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화마가 덮칠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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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계 금융시장을 호령하던 월스트리트가 화염에 휩싸였다. 골드먼삭스·모건스탠리가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158년 전통의 리먼브러더스·월가의 귀족 메릴린치가 스스로 방화한 불에 폭삭 주저앉는 광경은 황당하고 불안했다. 달러 제국을 지휘하는 난공불락의 심장부였기에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금융 버블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스크 헤지의 자기 증식 위험성을 제어하는 진단시스템이 작동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월스트리트가 구가했던 미증유의 호황은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멋진 이름의 파생상품으로 몇 차례 증권화하는 과정에서 추출된 ‘가상의 부’였다. 부풀린 돈으로 허황된 파티를 열광적으로 즐긴 것이다.

이 ‘가상의 부’를 증식하는 레이스에 월스트리트 고수들과 금융설계사들이 앞다투어 뛰어들었으니 버블 규모를 가늠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번 사태가 세계 주요 금융기관들에 입힌 피해액만 1조 달러로 추산했다. 한국의 1년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벤 버냉키와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 조(組)가 응급처치를 약속한 덕에 급한 불은 잡힌 듯하나 파산의 불길이 언제·어디서 다시 발화할 것인지 숨을 죽이고 있는 형국이다. 불길하다. 이게 사태의 끝인지, 아니면 거대한 금융 재앙을 예고하는 작은 징후인지를 누구도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한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월가는 죄스럽다는 듯 쪼그려 앉았고, 금융 세계화를 주도하던 미국 정부는 공신력을 잃었다.

달러 제국의 금융창고에서 발생한 이번 화재는 ‘빚 갚을 의무’까지를 이윤 창출 수단으로 활용하는 금융의 자동변형 본능과 야생적 무한질주가 지구촌을 공멸의 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공포를 불렀다. 월스트리트산(産) 파생상품과 채권들이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무한정 팔려 나갔을 것이고, 여기에 연루된 기업과 투자자들은 가히 천문학적 규모일 것이다. 가슴 앓는 한국 기업들이 왜 없겠는가. 빚을 상품화하고, 위험 자산을 채권으로 바꾸고, 이것을 다시 증권화해 판매하는 월가의 이 놀라운 금융 기법은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가 주목해 마지않았던 19세기 ‘큰손 금융’(haute finance)을 원시적이라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촌스럽기 짝이 없던 이 ‘큰손 금융’은 대출과 투자라는 고전적 업무에만 충실했던 탓에 국제사회에 ‘백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던 반면 세련된 월스트리트 금융은 모든 국가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 되었다. 연쇄 파산이 없더라도, 미국의 경제 위축은 적어도 2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한국은 왜 이렇게 복이 없는가. 국민소득 1만 달러 선에서 호되게 당한 게 엊그제 같은데, 2만 달러 지대에서도 그냥 넘어가 주질 않으니 말이다. 이런 악재가 없다. 고유가·고환율로 숨이 차는 판에 금융위기까지 겹쳐 기업들이 버틸지 걱정이다. 가전·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 기업들은 벌써부터 북미 수출액을 20~30% 낮춰 잡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현금 확보에 비상을 걸었다. 낙진이 떨어지듯 유럽 시장에도 암운이 짙어지고 있으나 탈출구가 없다. 은행의 여신 강화와 내수 위축으로 중소기업의 70%가 자금 경색에 허덕인다. ‘747 공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생존이 더 다급한 상황으로 몰렸다.

이쯤 되면 이명박 정권도 박복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역대 정권 중 가장 복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경제치(痴)에 가까웠던 YS는 살아난 미국 경제가 받쳐주었고, 『대중경제론』의 저자 DJ는 아예 IMF 교본을 따르면 되었다. MH(노무현 전 대통령)는 IMF가 차려놓고 간 밥상을 받아먹고 설거지만 해도 충분했다. 그런데 ‘경제를 조금 안다’고 자처하는 MB에겐 이런 복이 없다. 10종 허들도 모자라 온갖 해저드가 덮치더니 급기야는 월스트리트발 화염에 휩싸였다. 살인적 유가, 널뛰는 환율, 금융 재앙- 대공황 이후 세계사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3마(三魔)의 합동공세가 한국 경제를 집어삼킬 기세다. 그런데 종부세·유가 보상·재건축·지방행정·광역권 개발 같은 것에 찔끔찔끔 손댄 정도의 실력으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제 국민소득 2만 달러의 한국 경제는 화마가 난무하는 극한의 위험지대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성장의 꿈을 접어야 하는가? 고만고만한 청와대 사람들과 수선 전문 메뉴로는 2년 후 국민소득이 반 토막 날지도 모를 일이다. 복도 없는 바에 눈치 볼일 있는가, 더 늦기 전에 비상 내각을 꾸려야 한다. 위기를 감지 못한 정치적 무지가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을 이미 10년 전에 경험했다.

송호근 서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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