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월 100만엔 써라” 박정희는 국가 체면 챙겼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5.23

대일 교섭의 막후…퇴계 선생 존경했던 우파 거물 야스오카

1961년 군정(軍政)이 민간인 출국을 1호로 허락한 인물은 박철언(1926~2008)일 것이다. 참고로 소위 ‘6공 황태자’라 불렸던 박철언(1942~ ) 전 장관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인생도 참 특이하다. 평북 강계 출신인 그는 광복 후 일본에 들어가 미 극동군총사령부 번역 문관이 되었고, 휴전 이후 판문점의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에도 나와 있었다. 판문점에 근무하는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이승만 정권 후반기였다.

그가 극진히 모시는 일본인이 야스오카였다. 1904년에 태어난 야스오카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폭넓게 섭렵했으며 도쿄대 재학시절에 쓴 ‘중국의 사상 및 인물 강화’란 저서로 명성을 날렸다. 해군 대장 야시로가 26세의 그와 양명학(陽明學) 토론을 벌이다 꿇어앉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야스오카는 한국의 퇴계 선생을 유난히 존경하는 친한파였고, 정치적으로 우파였으며 전후 일본 정·재계 지도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막강한 막후 실력자였다.

1976년 일본 철강업계 인사들과 환담하고 있는 필자(왼쪽에서 셋째·작업복 입은 사람). 왼쪽에서 둘째가 친한파 한학자 야스오카다.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1976년 일본 철강업계 인사들과 환담하고 있는 필자(왼쪽에서 셋째·작업복 입은 사람). 왼쪽에서 둘째가 친한파 한학자 야스오카다.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박철언과 야스오카-. 이 라인은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교섭 막후에서 귀중한 창구 역할을 맡았다. 내가 포철에 대일청구권 자금을 끌어다 쓰는 과정에도 큰 도움을 줬다.

장면 총리가 서울 반도호텔 8층에서 집무하던 1961년 4월 하순~5월 초순. 박씨는 야스오카와 장 총리의 편지를 들고 비밀리에 서울과 도쿄를 오갔다. 한·일회담 재개의 전초 단계로 일본 중의원 노다 우이치 일행이 방한했을 때는 아무도 몰래 노다를 반도호텔 8층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도 우리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원하고 있었다.

장 총리는 다리를 놓아준 박철언에게 수고했다며 서울시 전차 200대 교체사업을 선물로 내놓았다. 그러나 곧 5·16이 터졌다. 뜻밖의 전차 교체 이권까지 물거품으로 날린 그를 군정이 모처로 연행한 것은 5월 하순이었다. 서슬 퍼런 혁명군이 정릉 셋집에서 그를 잡아 지프에 태웠다. 위태위태한 과정을 거쳐 오해가 풀린 그가 나에게 연락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