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수에 빠진다, 슬램덩크서 스즈메까지 J컬처 열풍

    향수에 빠진다, 슬램덩크서 스즈메까지 J컬처 열풍

     ━  일본 대중문화의 귀환   지난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이 개봉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단기간 100만 기록을 세웠다.(17일 현재 124만) ‘스즈메’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실감과 불안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환기시키는 감동과 치유의 영화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11월 개봉해 1000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했다. ‘너의 이름은.’(2017), ‘날씨의 아이’(2019)에 이어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연속 10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이다.   장르 다양성이 틈새시장 공략 강제징용 배상 합의로 한일 관계가 다시 화두가 된 지금, 일본 대중문화에 훈풍이 불고 있다. 이번주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스즈메'(1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2위),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마을로’(4위) 등 일본 애니가 휩쓸었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부터 바람이 시작됐다. ‘오세이사’는 1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난해 수입 실사 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 차트에 머물고 있다. 국내에서 일본 실사 영화가 1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02년 ‘주온’ 이후 21년 만이다. ‘슬램덩크’는 17일 기준 누적 관객 수 405만명으로, ‘너의 이름은.’(380만)의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 만화 차트도 1~22위까지 슬램덩크로 도배되며 단행본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   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2 너의 이름은.(2017). 3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 4 스즈메의 문단속(2023). 5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2023). [각 영화사],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지난해 말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웹툰에 잠식되는 일본 망가(Japanese Manga are being eclipsed by Korean webtoons)’라는 기사를 쓰는 등, K팝과 OTT, 웹툰 열풍으로 K콘텐트가 일본을 넘어섰다는 인식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침체된 국내 극장가를 일본 콘텐트가 점령한 모양새라 흥미롭다. 쇠락하던 대중문화 강대국 일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걸까. 2019년부터 이어진 ‘노재팬’ 정서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 극장가의 코로나 회복세가 느린 탓도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미국·유럽의 관객 회복세가 80%인데 한국은 50%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더디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트 개봉을 미루게 되고, 관객은 극장을 더욱 멀리하는 악순환의 와중에 ‘슬램덩크’처럼 고정팬이 많은 일본 애니가 레트로 감성까지 자극시키며 흥행이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일상의 회복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원래 일본 애니를 즐기는 팬들의 움직임이 있다. 대중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서 지브리(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이 개봉해 1위를 하면 한국에서도 곧바로 1위를 하는 게 패턴이었는데, ‘노재팬’을 겪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며 “일본에서도 지금 애니가 계속 잘 되고 있고, ‘스즈메’나 ‘귀멸의 칼날’이 최고 성적을 올렸으니 한국 팬들도 당연히 본다”고 말했다.   사실 경제 흐름이 막혔던 ‘노재팬’ 시국에도 문화는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2019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 만큼 폭발력은 없었지만, 무려 259일 동안 상영되며 ‘국내 최장기 극장 상영 영화’(2위 ‘서편제’ 231일)가 됐다. 2021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도 그해 누적매출 200억원을 넘긴 첫 영화로, 예스24 상반기 결산 만화 차트 1~25위를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석권하기도 했다.   원래 일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1950년대 이미 사람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상상했던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철완아톰’은 1963년 일본 최초의 TV애니로 제작돼 영미권에 수출됐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1988)는 지난해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연극으로 제작할 정도로 세계인에게 친숙한 글로벌 콘텐트다. 지난해 포켓몬빵 광풍을 부른 ‘포켓몬스터’(1996)는 증강현실게임 ‘포켓몬고’ 등 꾸준히 전세계에 문화 현상을 일으키며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누적 매출 1180억 달러 추정)을 올린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군림하고 있다.   앞선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글로벌 웹툰 시장 규모가 37억달러(약 4조8300억원)를 넘어선 반면 망가(일본 만화) 시장 규모는 2650억엔(약 2조5700억원)으로 축소경향이라고 분석했지만, 종이책 매출만 따진 수치다. 일본출판과학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전자책을 포함한 일본 만화 매출은 지난해 6770억엔(약 6조5600억원) 규모로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애니메이션 시장도 2021년 매출 2조7422억 엔(약 26조원)으로 전년 대비 13% 커지며 역대 최대 규모가 됐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넘어 일본 대중문화 전반을 보면 몇년 새 부쩍 활력을 잃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콘텐트 시장에서 OTT 등 디지털 비중이 작아서다. 강태웅 교수는 “일본은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한편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저작권법이 까다롭고 아날로그 체제를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크다 보니 OTT시대가 아직 안 왔다. 드라마의 경우 OTT보다 제작비가 약한 지상파가 모험을 못하고 안정적인 국내 시청률이 보장된 출판문화 기반의 제작을 지속하니 글로벌 경쟁력은 떨어진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저작권법을 고치자는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자극적인 소재도 덜해 졌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플랜 75’(2022),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2022) 처럼 초고령화와 가족해체 등 현실문제를 조명하거나, 드라마 ‘일본침몰’(2021)이나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처럼 위기를 담담하게 응시하는 콘텐트가 많다. 복고 트렌드도 강하다. 한동안 침체였던 NHK 대하사극의 시청률이 다시 올라가고, 시대극 영화도 부활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처럼 과거를 동경하고 소박한 일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힐링·향수템이 대세다. ‘스즈메’도 고 히로미·마쓰다 세이코·나카지마 미유키·이노우에 요스이 등 7080 국민가수 메들리가  향수를 자아낸다.   이런 코드는 복수와 폭력, 불평등 등 자극적인 소재 일변도인 한국에서 틈새시장이다. 일본 대중문화는 다양한 장르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고, 그중 우리에게 부족한 장르가 마니아층을 형성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꼭 챙겨본다고 소개한 ‘고독한 미식가’를 비롯해 ‘심야식당’ 등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일드는 음식이나 잔잔한 일상을 소재로 한 힐링 계열이다.   슬램덩크 현상도 향수 마케팅 덕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웹툰의 시대에 90년대 만화 왕도물을 추앙하는 대중심리가 세대 불문이라 ‘현상’이 됐다. ‘슬램덩크’를 13회 관람했다는 30대 여성 조민정씨는 “상영관마다 오리지널 티켓, 포스터 등 특전 MD가 달라서 경기도까지 가고 있는데, 만화를 워낙 좋아해서 보고 또 봐도 재밌다. 만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특유의 작화 스타일 때문에 만화를 다시 보고 싶어져 전집까지 구입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도 “고독한 미식가 봤다”   지난해 포켓몬빵 띠부씰 수집 광풍이 떠오르는 과몰입인데, 오히려 원작을 보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이 장기 흥행을 견인하고 있다. CGV에 따르면 10~30대 관객이 66%고, 예스24의 슬램덩크 만화 구입층도 2030 여성 비중이 43.9%다. 이들은 슬램덩크 굿즈 팝업스토어를 찾아 일본 여행을 갈 정도다. ‘스즈메’도 한정판 굿즈와 콜라보 디저트를 파는 홍대 앞 팝업 카페가 문전성시고, 직접 캐릭터 굿즈를 만들어 SNS에 자랑하는 팬들도 많다.   강태웅 교수는 “전형적인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의 행동”이라며 “과거 쟈니즈 아이돌 팬덤처럼 애니 팬도 캐릭터에 빠져드는 게 특성이다. ‘슬램덩크’도 단순히 옛날 농구만화라 농구팬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20대 여성 사이에서 캐릭터별로 팬덤이 생겨 장기 흥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동진 평론가도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흥행할 땐 늘 마니아들이 움직인다”면서 “특히 ‘슬램덩크’와 ‘오세이사’ 현상은 우리 극장가의 극단적 니치화를 보여 준다. ‘스즈메’는 작품성도 좋지만 신카이 마코토 마니아 덕이 크다. 당분간 극장가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와 고정 마니아층이 있는 장르만 성공할 것 같다”고 진단했다.   흥미로운 건 민감한 한일 정세가 대중의 문화 수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게 된 현실이다. 국격이 향상되면서 우리 정서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걸까.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젊은 세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소셜 아이덴티티가 다르다”면서 “집단적 피해자 마인드를 가진 기성세대가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며 취향 공개에 소극적이었다면, 상처를 많이 극복한 지금은 집단의 기억보다 개인의 선택과 기호가 중요해졌다. 일본 문화를 남들보다 잘 향유하는 것도 힙한 취향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게 요즘 세대”라고 해석했다.   노재팬과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으로 외교 현안과 문화적 기호를 구별할 여유가 생겼다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교수는 “한일관계는 기복이 심했지만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경색 국면이 3년 넘게 이어진 적은 없었기에 현 상황은 그에 대한 반동현상”이라면서 “이 분위기를 그간 약해진 민간교류와 문화교류를 토대부터 다시 쌓아나갈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3.18 00:01

  • “비 안 오면 공장 셧다운” 유화업체 공업용수 말라 초비상

    “비 안 오면 공장 셧다운” 유화업체 공업용수 말라 초비상

     ━  ‘가뭄과의 전쟁’ 남부 산단 르포   지난 15일 전남 순천시 주암면 주암댐 본댐이 가뭄으로 사면이 드러나 있다. 이날 본댐 저수율은 18.1%로, 주암댐은 14년 만에 저수율이 20% 미만으로 떨어졌다. 신수민 기자 “여기서 물이 더 마르면 공장 멈춰야죠.”   지난 15일 찾은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단엔 허연 수증기와 파이프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수산단은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석유화학단지다. 여수산단로4길에 위치한 A화학업체 공장도 이날 스팀을 뿜어내고 있었다. 계면활성제를 주로 생산한다는 공장 관계자 강모씨는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스팀을 열원으로 사용한다”며 “스팀을 대기업으로부터 사오는데 가뭄이 계속 돼 대기업이 스팀 생산을 못하면 우리는 그냥 끝나는 거죠, 뭐”라고 속을 털어놨다. 인근의 B화학업체 관계자는 “오늘 아침에도 산업단지공단, 여수시, 수자원공사로부터 ‘공업용수 부족으로 협조를 요청한다’는 공문을 또 받았다”며 “지역 자체가 공업용수 관로와 멀어 새로운 수원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곳 여수산단엔 LG화학과 GS칼텍스, 롯데케미칼 등 10여곳의 대기업 석유화학공장을 포함 협력업체까지 200여개가 넘는 공장이 밀집해 있다. 주로 석유화학 업종이다보니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열원이나 식히는 냉각재로 물을 주로 사용해 공업용수를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산단 내 비교적 큰 규모로 입지해 있는 C화학업체 관계자는 “공장 전체 가동의 60% 정도로 생산라인을 돌리고 있다”며 “좋게 볼 상황은 아니지만 석유화학업 시황이 좋지 않아 재고가 남아서 그나마 이 정도 수준에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석유화학 공장은 한 번 돌아가면 계속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가동률 60% 미만으로 내려가면 아예 공장전체를 셧다운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인근 광양산단 기업들도 위기감   여수산단의 공장들이 공급받는 공업용수의 수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호남 최대 규모 다목적댐인 주암댐이 나온다. 이날 찾은 상사면 주암댐(조절지댐)은 과연 사면이 보일 정도로 저수율(댐에 저장된 물을 이용할 수 있는 최저수위)이 낮은 상태였다. 이중호 한국수자원공사 주암댐지사 차장은 “주암댐이 준공된 이후 33년간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차장은 드러난 사면을 가리키며 “전체 주암댐 높이로만 보면 약 20%가량 빠진 상태”라며 “저수장 형태가 빗살무늬토기 모양으로 돼 있어 윗 부분 20%가 빠진 거면 사실 그보다 물이 더 빠졌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생활·공업용수를 공급하는 주암댐 본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날 주암댐(본댐)의 저수율은 18.1%로 저수량은 예년 수준의 절반에 불과했다. 특히 취수탑을 보면 특정 부분까지 거멓게 그을려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수위가 낮아지면서 물이 항상 차있던 곳이 드러난 거라는 설명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지난해부터 시작된 ‘남부 가뭄’에 산업 동력의 물길이 말라가고 있다. 이는 여수산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근의 광양국가산업단지 내 기업들도 고민인 건 마찬가지다. 수어댐에서 취수하는 포스코 광양제철소 관계자는 “주암댐보다는 심하지 않고, 엄청나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라면서도 “이렇게 비가 안 오면 6~7월쯤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래도 포스코는 해수담수화 시설 등을 갖추고 용수 확보에 비교적 대처 능력이 있는 편이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공장 가동에 지장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다”라면서 “(가뭄이) 언제 해결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라 심각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여수·광양 산단 내 대부분의 기업들 반응도 비슷하다. 산단 내 D업체 관계자는 “미리 저수장의 깊이를 더 파서 저수능력을 제고해서 용수공급량을 보장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월 말경에는 가뭄지역이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환경부는 5월 생활·공업용수 가뭄경계지역(심한 가뭄)으로 광주광역시, 전북 정읍, 전남 여수, 광양, 순천, 목포 등을 전망했다. 아무리 가뭄이 심각해도 이 정도로 공급이 부족하냐는 의견도 있다. 용수 수요가 대폭 늘어난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이에 대해 이 차장은 “산단 내 입주업체들은 애초 입주 시 공업용수 사용량을 계약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사전 배분이 가능하고, 이미 지난해 가뭄 사태가 발생하기 몇 년 전부터 산단 내 업체는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극심한 가뭄 이상기후가 원인이라고 분석한다”며 “정확히 2020년 홍수가 나고 2년 뒤 정반대로 가뭄의 상황이 일어났는데, 보통 태풍이 와도 남부지방을 거쳐 위로 올라가는데 지난해엔 건너 뛰고 가면서 강수량이 극히 적었다”고 덧붙였다.   극심한 가뭄, 이상기후가 원인   가뭄이 더 심해지면 용수부족 문제도 있지만, 기업들의 추가 비용이 더 늘 수 있다는 점도 우려 지점이다. 정재환 여수산단환경협의회 환경지원처장은 “가뭄으로 저수위가 되면 침전물이 가라앉은 물들만 남게 돼 이를 사용하는 데 정화하는 비용은 더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차장은 “주암댐은 수질이 깨끗해 녹조가 생길 우려는 없지만 아무래도 저수위의 물이 계속 고이면 정화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대안으로 폐수 재이용 시설, 해수 담수화 시설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비용적 측면에서 보면 만만치 않다.   결국 지금으로선 절수밖에 방법이 없다. 산단 내 공장들은 절수를 위해 가동률을 줄이거나, 주기적으로 공장 가동을 멈추고 정비하는 대정비(TA) 작업기간을 하반기에서 가뭄 심화가 예상되는 상반기로 옮겨서 시행하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다. 작업기간 일수도 기존보다 10~30일 가량 더 늘려 절수 기간을 늘리는 노력도 하고 있다.   김담희 여수산단 총무부서장협의회 회장은 “대부분 업체가 절수에 공감하는 가운데 최근엔 15곳 업체가 대정비 기간을 상반기로 앞당겼다”며 “쌓아둔 재고가 있어서 큰 차질은 아직까지 없지만, 액상제품을 만드는 곳은 보존기간이 길지 못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포스코 관계자는 “철강업은 석유화학과 달리 연속공정이고 생산 마감일정이 있어서 대정비 기간을 자유로이 조정하기는 어렵다”며 “전체 생산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정부, 폐수 재활용 시설 재정지원 검토…전문가 “통합 물 수요 관리를” 「 ‘남부 가뭄’에 주암댐, 섬진강댐, 동복댐 등 주요댐 저수율이 일제히 20%선을 밑돌자 물대란의 위기감은 커지고 있다. 정부도 서둘러 관계부처 합동 회의에 나섰다. 산단 내 폐수 재활용 시설, 해수담수화 시설 등의 인프라 구축과 재정 지원을 포함한 대책안을 검토 하고 있다. 정재환 처장은 “당장 생산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기업들은 제한급수를 몇 %로 한다든지와 같이 구체적 로드맵을 미리 알려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담희 회장은 “재활용 용수 이용 비용은 지금보다 3배 더 들기 때문에 추가비용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원을 끌어오는 안도 논의 중이다. 16일엔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수자원공사가 협약을 맺고 보성강댐 강물을 주암댐으로 보내는 식으로 연계 운영하기로 했다. 여수시 토박이라는 택시기사 박모씨(65)는 “섬진강댐 강물을 끌어온다 들었는데 5~6월 한창 재첩 수확기인데 섬진강 일대 어민들이 괜찮다고 하겠냐”며 “제한급수까지 하면 생활용수를 20% 정도 줄여야 하는데 5일 중 하루를 안 씻는거면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수공 관계자는 “섬진강댐 저수율은 19.1%라 끌어와 쓸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양이라고 볼 수 없다”며 “그나마 낫다는 수어댐도 저수율은 70% 정도이지만 큰 댐이 아니라 취수장에서 푼 물을 받아놨다가 공급하는 식이라 괜찮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취수원 확보는 근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평가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석유화학, 철강업 뿐 아니라 반도체도 공업용수가 없으면 공장이 안 돌아간다”며 “전 산업이 바뀌는 이때 정부, 지자체, 관계부처가 전체적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고, 그 첫 순서가 ‘통합 물 수요 관리’”라고 짚었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도 “호주처럼 기업 간 취수권을 사고팔 수 있는 ‘취수권 거래제’도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용수의 공급용도를 파악해 댐별 교차이용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 여수·광양=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3.03.18 00:01

  • ‘비대면 진료·병원 방역·재택 근무’ 제도화 목소리 커져

    ‘비대면 진료·병원 방역·재택 근무’ 제도화 목소리 커져

     ━  코로나 시대 세 가지 유산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하지만 팬데믹 정책이나 문화 중 일부는 제도화 또는 정착시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유산’이라 부를만하다. 과연 어떤 유산이 있을까.   ① 비대면 진료   효용성이 있는 ‘코로나 시대 유산’을 제도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대면 진료, 재택근무(아래 사진)가 그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뉴스1] 직장인 김모(32)씨는 지난달 말 60대 어머니가 갑작스레 오한과 발열 증상을 호소해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하필 병원이 문을 닫는 일요일 오전 증상이 나타난 데다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 같으면 구급차를 불러 인근 병원 응급실에 가 수 시간 대기를 했겠지만 김씨는 지난해 말 코로나19에 걸렸을 때 휴대전화 앱을 통해 비대면 진료를 받았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김씨는 앱에 접속해 평점이 높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선택했다. 간단한 예진표를 작성·접수한 뒤 수분의 대기 끝에 어머니의 진료를 끝낼 수 있었다. 총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김씨의 어머니는 인근 약국에서 타온 약을 먹은 후 증세가 호전됐다.   비대면 진료가 허용된 건 2020년 2월 24일부터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 내 감염 예방 및 진료 공백 최소화를 위해 한시적으로 전화 상담 및 처방을 허용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코로나19 감염병 위기대응 ‘심각’ 단계 발령 기간 비대면 진료를 가능하도록 하는 법 개정까지 이뤄졌다. 이때 명시된 전제가 ‘위기대응 심각 단계일 때’이기 때문에 향후 위기대응 단계가 ‘경계’나 ‘주의’ 등으로 하향되기 전 비대면 진료 제도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두 살짜리 딸아이를 둔 권모(31)씨는 “어린아이들은 38도까지 열이 오르는 게 빈번하다. 그때마다 병원에서 2~3시간씩 대기를 하곤 했는데 비대면 진료 앱을 이용하니 훨씬 편하다”라며 “물론 대면 진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코로나 이후에도 비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비대면 진료 이용자 수는 2020년 79만명에서 2022년 1015만명으로 약 12.8배 증가했다. 0~14세 영유아·어린이의 경우 같은 기간 5만7000명에서 196만으로 약 35배 급증했다.   바이오헬스 산업을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정부는 비대면 진료 제도화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비대면 진료가 이어지면 외국인 환자 등을 유치하는 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전히 비대면 진료 제도화 반대 목소리를 외치는 의료계는 넘어야 할 큰 산이다.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는 “환자 안전에 대해 최종 책임지는 역할은 의사들인데 비대면 진료의 경우 아직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아 우려가 크다”라며 “당장 4~5월 엔데믹 발표에 맞춰 급하게 서두르기보다는 구체적인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② 병원 방역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하고, 출입자 통제가 엄격한 ‘병원 이용 지침’은 코로나19가 낳은 또 다른 문화다. 이전까지는 환자 입원 시 보호자에 대한 별다른 제재도, 병문안을 위한 출입객 제한도 크지 않았지만 팬데믹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환자 보호자로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유전자증폭(PCR) 검사 ‘음성’ 확인이 필수이며 병원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는 다시 PCR 검사를 받아야 할 만큼 깐깐한 출입 절차를 거치고 있다. 오는 15일 실내 마스크 완전 해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인 정부는 병원을 비롯한 감염 취약시설만큼은 예외로 두는 규정을 고민 중이다.   병원들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불필요한 출입을 줄일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 감염병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는 “예전에는 환자 한 명이 입원하면 줄줄이 병문안을 와 감염 확산 위험이 컸는데, 출입객 규정이 강화되면서 그런 우려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출입객을 대상으로 여전히 QR코드를 확인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어쩌면 형식적인 절차로 볼 수 있지만 불필요한 출입을 최대한 줄이게끔 하는 요인이다. 방역 단계가 완화되더라도 당분간 이 절차를 없앨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③ 재택근무   효용성이 있는 ‘코로나 시대 유산’을 제도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비대면 진료(위 사진), 재택근무가 그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연합뉴스] 직장인들의 경우 팬데믹 종식이 다가오면서 재택근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각 기업은 코로나19로 인해 시행했던 재택근무 제도를 올해 들어 축소하거나 해제하고 있다.   판교 IT 회사에 근무하는 3년 차 직장인 김모(32)씨는 “팬데믹 기간에는 회사가 재택을 용인해줘서 출퇴근 스트레스가 덜했는데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려니 오전부터 체력이 바닥난다”고 말했다. 여전히 회사가 재택근무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는 또 다른 직장인 김모(29)씨는 “보통 재택을 하면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사실 집에서 일할 때 출퇴근이 없어 업무를 더 늦게까지 하게 된다. 회사에선 커피 타임이나 스몰토크를 했는데, 집에서는 그런 부분이 없이 업무 효율에서도 더 나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국내 여론조사 전문기관 데이터리서치가 전국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와 비대면 업무에 대한 평가’를 실시한 결과 77%가 찬성 의견을 밝혔다.   다만 사용자 측은 업무에 대한 비효율성과 소통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사무실 복귀를 요구하고 있어 재택근무를 둘러싼 갈등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2023.03.11 05:00

  • 대기 속 탄소 포집, 향수·의약품서 탄산수까지 만든다

    대기 속 탄소 포집, 향수·의약품서 탄산수까지 만든다

     ━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최근 유럽에서 폭염과 한파, 태풍과 폭설, 대형 산불 등 극한기후 발생빈도가 4.8배 늘어났다.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탄소중립의 갖은 노력이 수년 동안 쏟아지고 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했던 사계절의 경계도 점차 사라지고 이상 기후는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지구 평균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평균 1.09℃ 높아졌고 해수면도 1901년보다 0.2m 상승했다고 한다. 이상 기후로 채소들을 비롯한 먹거리의 품귀 현상까지 일어나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21년 8월 제54차 총회에서 지구의 평균 온도가 1.5℃ 이상 도달하는 시점을 기존 2030~2052년에서 10여년이나 앞당긴 2021~2040년이라고 분석했다. 2℃  상승할 경우 지구는 생존하기 어려운 곳이 돼버릴 것이다. 그나마 상승하는 온도를 1.5℃ 로 억제할 경우 큰 위험을 막을 것이라고 한다.   보령화력 등 국내 업체도 탄소포집   스위스에 있는 클라임웍스의 이산화탄소 포집 설비. [사진 valser] 2015년 기후변화회의에서 채택한 파리 협정은 극한기후로 발생할 비상사태를 미리 막고자 2050년까지 ‘넷제로(Net Zero)’를 이루자고 밝혔다. 넷제로란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이 균형을 이루어 실질적으로 순(純, net) 배출을 제로(0)로 만들자는 강령이다.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 수소불화탄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 등 6가지 온실가스의 배출량과 관련되지만 이산화탄소가 온실가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흔히 탄소중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광합성, 동물의 호흡 등을 통해 자연계에 순환되면서 흡수량과 배출량이 지구에서 오랜 세월 균형을 유지했지만, 2차 산업혁명 이후 그 배출량이 많아지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최근 우리나라 통계만 봐도 탄소 흡수량이 2018년 4560만t인 반면 2019년 배출량은 6억4380만t으로 배출량이 14배나 높다.   코카콜라 소유의 브랜드 발저는 이 설비(위 사진)로 포집한 이산화탄소로 탄산수를 만들어 출시했다. [사진 valser] 병든 지구를 살리자는 노력은 기업들의 ESG 실천으로 이어졌고 탄소중립을 위한 기후테크(Climate Technology, CTech)가 활황을 이루면서 이산화탄소포집·활용·저장(CCUS) 기술이 그 중심에 서게 됐다. 지난 3월 2일 우리나라 소재기술 전문회사 중 하나인 SK머티리얼즈가 탄소포집 분야에서 선도 기술을 보유한 미국 아이온에 지분을 투자하고 전략적 제휴 관계를 체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현재 탄소중립을 위해 인위적인 탄소포집·활용·저장 기술이 본격적으로 강구되고 있는 것이다.   CCUS(Carbon dioxide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가 실현가능한 기술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미국·노르웨이 등에서 이미 성공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산화탄소가 석유 및 가스전에 주입되어 유전에 남아 있는 원유를 추가적으로 생산해내는 원유회수 증진법(EOR, Enhanced Oil Recovery)은 1972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2017년부터 가동된 일리노이 인더스트리얼 탄소포집·저장(CCS, Carbon dioxide Capture and Sequestration) 프로젝트는 포집된 이산화탄소를 2㎞깊이의 지질에 저장한 최초의 프로젝트로 평가 받았다.   이 프로젝트는 노르웨이에서 1996년에 상업적으로 활용된 이산화탄소의 지층 저장 사례를 개발한 결과였다. 또한 2008년부터 가동된 노르웨이의 스노비트 저장소는 천연가스 공정 중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연간 약 70만t 저장할 수 있으며 최대 용량 4000만t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CCS는 2021년 8월 기준 전 세계적으로 25개 프로젝트가 상업운영 중이며 38개의 추가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활용까지 포함된 CCUS 기술은 지구온난화의 강도 높은 해결책으로 집중 조명되고 있다. 각국 정부를 비롯해 MS의 빌게이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에 의해 그 기술이 최고 수준으로 개발되는 곳에 1억 달러가 베팅된다는 말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 또한 최고조에 달한 것도 사실이다.   CCUS 개념도 CCUS의 과정은 미국과 노르웨이를 통해 이미 시행되고 있는 CCS 단계와 앞으로 특정 소재로 개발될 탄소포집·활용(CCU, Carbon dioxide Capture Utilization) 단계로 나뉘는데 특히 CCS는 국제표준화기구인 ISO 기준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포집, 이송 및 지질 저장(Carbon dioxide Capture, Transportation and Geological Storage) 전반을 말한다.   우선 이산화탄소를 효율적으로 포집하는 방법부터 살펴보자. 이산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는 0.04%로 미미하지만 석유화학, 정유, 시멘트, 철강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배기가스 중 농도는 보통 10% 정도다. 이런 산업은 탄소를 모으려고 이미 일찍부터 이산화탄소에 흡수제를 넣어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방법으로 포집하는 대표적인 산업체는 보령화력, 태안화력, 포항제철소, 성신양회 시멘트 등을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포집에는 아민(Amin)계 흡수제가 주로 쓰이는데, 아민에 흡수된 이산화탄소에 열을 가하면 두 물질이 쉽게 분리된다. 이후 아민은 재활용되어 또 다른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도록 하고 분리된 이산화탄소는 온도와 압력이 가해져 액체상태가 되면서 탄소 포집이 완료된다.   이제 탄소의 이송을 살펴보자. 포집된 이산화탄소를 효율적으로 이송하려면 액체나 기체와는 다른 상태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액체일 경우는 밀도가 크지만 점성이 높아 배관에 손실을 입히며, 기체일 경우는 점성과 밀도가 모두 낮아 이송되는 양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결국 이산화탄소는 액체와 기체의 중간인 초임계 상태가 되어야 다량으로 안전하게 이송될 수 있다.   빌 게이츠·일론 머스크도 적극 지지   이렇게 이송된 탄소는 지하 해저에 저장된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25%가량이 바다에 자연적으로 흡수되어 심해로 가라앉아 탄산염·석회암과 같은 암석이 된다. 이런 자연의 순환 과정과 가장 유사하여 친환경적인 방법이라고 선호되는 저장소가 바다에 있는 폐유전이나 폐가스전이다.   울산 앞바다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 유전인 동해가스전도 저장소로 쓰일 예정이다. 이 유전은 2004년부터 17년간 천연가스를 생산해오다가 2021년에 생산종료 되었다. 현재 비어있는 동해가스전 저류층은 단단한 암석층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산화탄소가 안정적으로 저장될 수 있으며 2025년부터 연간 40만t씩 30년간 총 1200만t이 저장될 계획이다. 깊은 바다 속에 저장된 이산화탄소는 혹시 조금씩 새어 나오더라도 서서히 물에 녹게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땅속 암석이나 광물과 반응해 암석이 되긴 하지만 요즘엔 아예 주입할 때 압력을 높여서 단단한 광물 상태인 탄산염으로 저장하는 ‘암석화’가 채택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저장소라고 해도 공간적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넓은 저장소를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진이나 전쟁 등으로 이산화탄소가 다량으로 유출될 위험도 있다. 그래서 탄소를 포집과 저장만 해서는 안 되고 활용할 수 있는 CCU가 다각도로 모색되고 있다. 예를 들어 폐콘크리트, 석탄재, 탈황석고 등의 산업부산물을 처리하여 거기에 있던 이산화탄소가 광물탄산화 되면 친환경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탄소로 미세조류를 배양시켜 바이오매스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바이오디젤 등의 연료로 사용되거나 화장품·식품·의약품으로 제품화될 수도 있다.   흥미로운 활용 사례들도 있다. 코카콜라 소유의 브랜드 발저(Valser)는 대기 중에서 포집된 이산화탄소로 탄산수를 만들어 출시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포집된 이산화탄소를 에탄올로 화학전환하여 보드카로 제조하기도 했다. 조만간 향수·선글라스·옷 등에도 이산화탄소를 활용한 제품들이 선보일 예정이다. 아직까지는 높은 기술적 난이도와 막대한 개발 비용 때문에 상용화하기에 역부족이지만 최근 탄소중립 정책의 가속화와 함께 연구개발이 지속되고 있다.   친환경을 앞당기기 위해서 CCUS가 반드시 필요한 분야가 있다. 아직까지는 수소 생산 공정에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는 가장 큰 약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이 바로 CCUS다. 수소는 그 생산 방식과 친환경성에 따라 그린수소, 그레이수소, 블루수소 3가지로 구분된다.   그린수소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에서 나온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하여 생산된 것이지만 원가가 너무 높아서 아직까지는 현실성이 부족하다. 현재 생산되는 수소의 약 96%에 해당하는 그레이수소는 메탄과 고온의 수증기를 촉매 화학반응하여 얻어낸다. 이때 이산화탄소가 다량으로 발생되는데 수소 약 1㎏당 10㎏이라고 한다. 이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배출되지 않도록 하여 생산한 수소가 블루수소인데, 이것을 생산하려면 CCUS 기술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렇듯 CCUS는 신재생에너지와의 연계와 활용이 높아 그 잠재력 또한 높다고 할 수 있다.   전 지구적으로 전기·가스·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생필품의 가격이 오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연탄과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탄소중립의 다른 차원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모든 동물의 호흡에서 그렇듯 인간의 모든 활동에도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탄소의 배출량과 흡수량이 균형을 잃은 상황에서 탄소중립을 지키려는 개인의 실천과 함께 탄소를 포집·활용·저장하는 일에도 우리의 눈길을 돌릴 때이다. 그렇게 할 때 저탄소 수소인 블루수소의 생산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김동훈 인문학자. 서양고전학자·철학자.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희랍과 로마문학 및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희랍어와 라틴어 및 고전과 인문학을 가르친다. 인문학의 서사를 담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퓨라파케’ 대표. 『인공지능과 흙』 『브랜드 인문학』 『키워드 필로소피』 『별별명언』 등을 썼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을 번역했다.

    2023.03.11 00:20

  • 3대 AI 번역기 비교해보니, 딥엘 자연스럽고 구글은 원문 충실, 파파고 한글↔일어 강점

    3대 AI 번역기 비교해보니, 딥엘 자연스럽고 구글은 원문 충실, 파파고 한글↔일어 강점

     ━  AI 번역기 3개 비교해보니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가 영문으로 쓰고 네이버의 AI 번역기 ‘파파고’가 국문으로 번역한 책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 [연합뉴스]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외부의 인정이나 승인을 구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결코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투쟁, 도전, 경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허무에 대한 연습이기도 하다.”   현자의 잠언일까? 이것은 인간 기획자가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 ‘챗GPT’에게 자기계발서 단골 화두를 영어로 물어 답을 얻은 후 네이버의 AI 번역기 ‘파파고’에게 국문 번역을 시켜 엮은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이하 『45가지』)의 한 구절이다. “인쇄를 제외하고 총 30시간 만에 완성됐다”는 이 책은 지난 달 22일 출간된 후 7천부가 넘게 팔리며 이미 2쇄를 찍었다.   왜 번거롭게도 AI에게 먼저 영어로 묻고 또다른 AI에게 번역시키는 수고를 감수했을까. 책을 기획한 스노우폭스북스의 서진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어로 질문했을 때 1천 자 내외의 답변을 생성하며 (…) 설득과 공감을 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텍스트밖에 생성하지 못했다. 때문에 영문으로 질문을 했고 3천자 내외의 원고를 얻을 수 있었다.” 기획자는 독자가 직접 AI 번역 퀄리티를 비교할 수 있도록 영어 원문도 책에 나란히 실었다. 즉 책을 낸 사람도, 사는 사람도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는 의도가 담긴 책인 것이다.   챗GPT 열풍에 AI 번역도 관심 집중   챗GPT 열풍이 일어나면서 덩달아 AI 번역기, 즉 인공신경망 기반 딥러닝을 활용한 번역기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고 있다. 『45가지』의 사례처럼 챗GPT도 영어로 대화할 때 더 풍부한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달리2(Dall-E2)’ 같은 이미지 생성 AI는 아직은 영어로만 쓸 수 있기 때문에 번역기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AI 번역기의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45가지』에는 인생에 대해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은 좋은 말’들이 제법 그럴듯하게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어색한 곳들도 발견되는데, 맨 앞의 인용문에서 ‘허무에 대한 연습’ 부분도 부자연스럽다. 영어 원문을 보면 an exercise in futility(‘헛고생’이란 뜻의 관용구)를 잘못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책 출간 후 20일이 지난 지금 다시 파파고를 돌려보면 ‘헛된 연습’이라는 조금 나은 번역을 내놓는데, 그동안 AI가 학습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렇다면 토종 번역 AI 파파고의 라이벌인 미국 구글의 번역기와 독일 AI 번역기 ‘딥엘(DeepL)’은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까? 2017년 처음 공개된 딥엘은 (구글 번역은 2007년, 파파고는 2016년 공개) 자체 전문가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구글 번역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올해 1월 말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국내 사용자들 사이에 과연 ‘자연스러운 번역이 일품’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10억 명이 넘는 사용자가 있다.   『45가지』에서 파파고가 ‘허무에 대한 연습’이라고 번역한 부분을 구글 번역기는 ‘무의미한 행동’으로 번역했고 딥엘은 ‘헛된 노력’이라고 번역해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첫 문장이 인상적인 영문 소설로 손꼽히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의 처음 부분을 구글 번역, 파파고, 딥엘에게 번역하도록 해보았다.   결과물〈그래픽 참고〉을 보면 파파고와 구글 번역은 모두 원문의 의미를 큰 오류 없이 전달하고는 있지만 문장 구성과 말투가 어색하고 특히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는 말을 존댓말로 번역해서 한국 문화에 맞지 않는다. 즉 초벌 번역으로만 쓸 수 있는 수준이다. 반면에 딥엘은 결과물을 그대로 최종 번역문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맥락적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에서 완성도가 높다. 그렇다면 확실히 딥엘이 경쟁사들보다 우수한 것일까? 이번에는 사회과학서로 다시 세 AI 번역기의 성능을 실험해 보았다. ‘10년간 서울대 도서관 대출 1위’로 유명한 스테디셀러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1997)의 주요 구절이다.   AI 번역기 비교해보니 [문소영] 파파고 요컨대,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 자체의 차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지리학과 생물지리학의 사고, 특히 대륙의 다른 지역, 축, 야생 동식물 종들의 집합 때문이었다.   구글번역 (첫문장 위와 비슷해 생략) 오히려 그것은 지리학 및 생물지리학의 우연, 특히 대륙의 서로 다른 지역, 축, 야생 동식물 종군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딥엘 (첫문장 위와 비슷해 생략) 오히려 지리와 생물지리, 특히 대륙의 서로 다른 지역, 축, 야생 동식물 종의 집합에 따른 우연 때문이었죠.   여기에서도 딥엘이 가장 자연스럽게 읽히는 번역문을 내놓았다. 그러나 원문을 존중한 정확성 면에서는 구글 번역이 낫다고도 볼 수 있다. ‘지리학적, 생물지리학적 우연’이 ‘대륙의 서로 다른 면적, 축(의 방향), 야생 동식물 종군’을 포함하는 게 원문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파파고는 우연(accidents)을 ‘사고’로 번역했고 세 번역기 모두 책의 맥락에서 ‘면적’으로 봐야 하는 areas를 ‘지역’으로 번역했다.   K팝 인기로 국문→영문 번역시장 성장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서 사회과학서를 주로 번역하는 김모 번역가는 “AI 번역기가 어려운 글을 만날 때, 원시적인 번역기들은 아예 비문인 결과물을 내놓는 반면, 뛰어나다는 번역기들은 원본을 대충 뭉뚱그려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드는데 원본을 보면 오역인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잘못된 것을 눈치채지 못하니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론적으로 딥엘이 돋보이지만 우열을 섣불리 결론 내기는 어려운 상태다. 파파고가 영어→한국어 번역에서 구글과 딥엘에 비해 다소 약해 보이지만, 한국어↔일본어 쌍방향 번역에 있어서는 구글 번역보다 강하다는 것이 사용자들의 중론이다. 한국어 초보인 일본 전업주부가 파파고를 활용해 국내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를 일본어로 번역한 작품으로 지난 12월 2022 한국문학번역상 웹툰 부문 신인상을 수상해 큰 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렇다면 국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AI 번역기의 성능은 어떨까? 최근 몇 년간 K-팝, K-드라마·영화를 위시한 한국문화가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개인 방송 크리에이터들까지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해외 팬들을 얻게 되면서 한국어의 외국어 번역 수요와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뒤에는 한국 영화에 정통한 미국 평론가 달시 파켓의 영어 자막이 있었다. 지난해 정보라 단편집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데에도 중앙일보 홍진기 창조인상을 수상한 한국인 번역가 안톤 허가 있었다. 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해서 부커상은 비영어권 부문에서 번역가를 원작자와 한 팀으로 후보에 올린다. 이들을 AI가 대체할 수 있을까?   AI 번역기 비교해보니 [문소영]   안톤 허를 사로잡았다는 『저주토끼』의 첫 문장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를 세 AI 번역기로 돌려보니, 파파고와 구글 번역은 원문을 부분적으로 왜곡하거나 애매하게 만든 반면 딥엘은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영어 번역을 선보였다. 비록 부커상 후보에 오른 인간 번역가의 감칠맛 나는 번역을 따르지는 못하나, 문학적 완성도가 중요하지 않은 영역에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국내 주요 출판사인 민음사의 양희정 인문교양 편집부장은 “고품격 번역가들은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AI가 어느 수준까지는 번역을 꽤 하는 것처럼, AI 이전 시대에도 번역가들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2%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품격 번역가와 그렇지 않은 번역가가 확연히 갈렸다. 그 2%는 창의성과 깊이의 차이인데, 그 차이는 번역가가 얼마나 많이 고전을 읽고 소화했느냐에 달려 있다. 고전을 섭렵해야 문화의 수많은 맥락을 알아서 번역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변주가 가능하다.” 또한 양부장은 “앞으로의 번역 시장은 이러한 소수의 고품격 번역가들과 AI를 적극 활용하며 하향평준화된 수준으로 대량생산을 하는 번역가들로 양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회과학 전문인 김 번역가의 경우, 초벌번역에도 AI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초벌번역 정도는 내가 실시간으로 영문을 보고 손으로 타이핑을 해도 번역기와 비슷한 퀄리티가 나온다. 제대로 된 만족스러운 문장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것은 번역기가 해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번역 작업을 하는 중에 원저자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명색이 번역가로서 이메일 질문지에 어색한 영어를 쓰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일단 내가 영어로 쓴 메일 내용을 번역기를 돌려 한국어로 옮겨 자연스러운지 확인하는 등으로 활용한다. 요즘은 챗GPT에게 영어 글을 올리고 교열해 달라고 하면 문법 오류를 고치고 더 세련된 표현으로 바꾸어 준다고 들었다. AI가 전문 번역가를 대체하지는 않겠지만, 일상적이고 단순한 번역의 영역에서는 번역가를 적잖게 대체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2023.03.11 00:01

  • ‘로또청약’ 사라졌지만, 시세차익 1억~2억에 대기자 몰려

    ‘로또청약’ 사라졌지만, 시세차익 1억~2억에 대기자 몰려

     ━  다시 온기 도는 아파트 분양시장   올림픽파크 포레온. [뉴스1] ‘로또청약’이 사라진 분양 시장에 다시 온기가 돌고 있다. 둔촌주공(올림픽파크 포레온) 구하기가 마침내 성공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총 1만2000여 세대의 재건축사업으로 ‘단군이래 최대 프로젝트’로 불리는 둔촌주공은 지난해 부동산시장이 냉각되고 공사비용이 급등하며 사업 좌초의 위기를 맞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흥행 마감을 예고했다. 8일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이날 진행된 둔촌주공 무순위 청약 899가구 모집에 4만1540명이 신청해 평균 경쟁률 46대1의 경쟁률로 마감됐다. 이날 청약을 받은 미계약분은 전용면적 29~49㎡의 소형이어서 수요가 적을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했다. 전용 29㎡ 원룸 가격이 5억원을 넘어 수요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적잖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최종 청약 성적표는 기대 이상이었다.   최근 미분양의 위기에서 되살아난 단지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분양에 나선 ‘장위자이 레디언트’는 전용면적 84㎡ 분양가가 9억∼10억원 수준으로 고분양가 논란에 휩싸이며 초기 계약률은 59%에 그쳤던 곳이다. 그러나 올해 선착순 분양에 나선 지 3주 만에 물량을 전부 털어냈다. 강동구의 ‘강동 헤리티지 자이’도 지난 1월 예비 당첨자 계약을 통해 완판에 성공했으며, SK에코플랜트와 롯데건설 컨소시엄이 중랑구에서 분양한 ‘리버센 SK VIEW 롯데캐슬’도 전 가구 분양 계약을 마쳤다. 최근 미분양의 고비를 넘어, 완판 대열에 속속 합류하는 단지들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장위자이, 선착순 3주 만에 물량 털어   1순위 청약에서도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자이 디그니티 아파트는 일반공급 98가구 모집에 1만9478명의 청약 신청이 몰렸다. 평균 경쟁률 198.8대 1에 이른다. 최고 경쟁률은 356대 1로, 전용면적 59㎡ 18가구 모집에 6424명(해당지역 및 기타지역)이나 청약통장을 던졌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부동산업계는 차갑게 식어가던 분양시장에 훈풍을 몰고 온 일등공신으로 정부의 연착륙 대책을 꼽는다. 정부는 지난 ‘1·3부동산대책’으로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와 용산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규제 지역에서 해제했다. 영등포자이 디그니티 아파트는 1·3부동산대책 후 서울에서 처음으로 분양에 나선 단지다. 영등포가 규제 지역에서 해제되면서 전용면적 85㎡ 이하 중소형 가구에 가점제 40%, 추첨제 60%가 적용돼 59가구가 추첨 물량으로 나왔다. 추첨제는 청약 가점과 상관없이 입주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청약가점이 낮은 젊은층이 대거 몰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 중소형 아파트에서 추첨제로 입주자를 선정하는 건 2017년 이후 5년 6개월 만이다.   지난 2월부터는 무순위청약의 무주택·거주지 요건을 폐지했다. 기존에는 청약자 본인이 해당 지역에 거주해야 하고, 가구 구성원 모두가 무주택자여야 무순위청약을 할 수 있었는데, 문턱이 확 낮아진 것이다. 전국에서 누구나 ‘줍줍(무순위청약)’에 나설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전매제한도 완화했다. 수도권의 경우 전매제한은 최대 10년이었으나 공공택지 및 규제지역은 3년, 과밀억제권역은 1년, 그외 지역은 6개월로 축소됐다. 실거주 의무(2~5년) 폐지도 예고했다.   규제 완화에 힘입어 분양시장의 바로미터라는 평가를 받았던 둔촌주공이 무순위청약에 성공하고, 최근 청약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아파트 분양시장은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다. 시장에 온기가 돌면서 분양 일정을 조율하던 건설사들도 속속 공급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R114에 의하면 3월 전국 아파트 분양예정 물량은 2만543가구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3월 분양실적(2만1341가구)에 살짝 못미치는 수준 이나, 서울 분양 규모는 전년 338가구에서 4116가구로 늘어났다. 서울 아파트시장의 반등을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묻지마 청약 가고 옥석 가리기 심화”   윤지해 부동산R114 리서치팀장은 “둔촌주공 등의 완판 성공은 시장 회복 징조로 청약성적 및 경쟁률 상승은 의미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분양시장의 온기가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비롯한 기존 주택시장으로도 확산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윤 팀장은 “신축 경쟁이 높아지면 주택 수요가 기존 매물들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집값 바닥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둔촌주공 무순위청약이 완판되면서 당분간 서울은 더 큰 규모의 하향 조정이 쉽지 않을 전망”이라며 “서울을 중심으로 분양에 나서는 사업장이 속속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청약 열기에도 불구하고 금리 리스크 등이 다시 부각되면서 “반등은 일시적”이라는 회의적 시각도 많다. 시장에는 미국 기준 금리가 연 6%까지 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다시 금리 부담이 부각되고 있다. NH투자증권은 지난 8일 “현재 부동산 시장은 저점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최근 반등은 규제 완화로 인한 일시적 현상일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분양시장의 양극화를 주목하며 일부 단지 성공 뿐만이 아니라 지역별·단지별 상황과 요인을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이제 ‘묻지마 청약’의 시대는 저물고, 옥석가리기 시대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시장에서 옥석을 가리는 기준은 가격이다. 부동산 투자의 첫번째 요소로 꼽히던 ‘입지’보다 가격 경쟁력이 우선시되는 분위기다. 1·3대책 후 분양시장의 첫 흥행으로 기록될 영등포자이 디그니티는 전용 59㎡가 8억원대, 84㎡는 11억대로 주변 아파트 시세에 비해 1억원 가량 낮은 가격이 안전판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둔촌주공의 전용 39㎡ 분양가는 최고 7억원을 웃도는 수준인데, 인근 가락동 헬리오시티(2018년 준공, 9510가구)의 전용 39㎡는 지난 2월 9억5500만원에 거래됐다. 해당 면적의 지난해 최고가는 13억원이었다. 인근 대단지 시세보다 낮은 분양가가 흥행 성공의 관건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시세 차익에 대한 눈높이는 낮아졌다. 규제지역 완화에 따라 분양가상한제 해제지역이 늘면서 분양가는 점점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윤 팀장은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던 때는 입지에 따라 선호가 엇갈렸는데, 이제는 지역·입지보다 가격이 성패를 가르는 기준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 “분양가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 새 집 잡으려는 마지막 줄타기” 「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 “현 분양가는 크게 싸지도, 비싸지도 않다. 그럼에도 일부 단지들에서 완판 행진이 나오는 것은 ‘지금이라도 새 집을 잡아야겠다’는 줄타기의 마지노선으로 보인다.”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사진)는 최근 청약시장이 기지개를 켜는 것에 대해 “10곳 중 1~2곳만이 합리적인 분양가”라며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청약이 전문인 박 대표는 둔촌주공의 무순위청약이 진행된 지난 8일 “나도 둔촌주공 청약을 신청했지만 분양시장 전반의 매력은 크게 낮아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줄타기는 무슨 뜻인가. “분양가는 앞으로도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새 집을 잡아야겠다는 수요가 마지막에 몰렸다고 본다. 분양가가 아예 높아지면, 청약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분양이 쌓일 것이다. 그런데 사업을 진행하는 곳도 낮은 분양가로는 못 내놓으니, 점차 공급도 없어질 것이다. 공공주택이 아닌 이상 민간 사업자가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가는 낮아지기 어렵다.”   일부라도 저렴하게 공급될 수 있는 곳이 없나. “택지를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저렴한 분양가로 공급될 수 있다. 이러한 공공택지가 서울에는 거의 없다. 동작구 수방사, 강서구 등 일부다.  부산에선 에코델타시티 정도다. 수도권에서는 양주신도시, 오산세교지구, 동탄2, 파주·운정, 검단 등 외곽에 위치한다. 대구·울산·광주 등은 향후 저렴하게 공급될 수 있는 공공택지 물량을 찾기 어려워보인다.”   그렇다면 현 분양시장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가격이 관건이다. 지난달 청주 흥덕구에서 청약 접수를 받은 ‘복대자이 더 스카이’는 355가구 일반 공급에 1순위 경쟁률 8.13대 1을 기록했다. 이곳은 입지로 볼때, 서울에 비유하면 강남 한복판 수준의 입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전용 84㎡의 인근 아파트 시세가 최고 7억원까지 갔다가 4억원대로 떨어졌는데, 떨어진 수준에서 분양하자 수요자들이 합리적 가격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은 불패다 식의 지역별·입지보다 가격이 중시되고 있다.”   적정 분양가 판단은 어떻게 하나. “2019년 이전의 시세 수준으로 분양한다면, 저렴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2020년 가격 수준이라면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정도다.”   ‘로또청약’이 사라졌는데, 고가점자의 청약 전략은. “이번주 영등포에서 200대 1 가까운 경쟁률이 나왔는데, 69점 등 고가점자의 통장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그 정도 가점이라면 시세차익을 최소 5억원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곳에 넣었는데, 지금은 기대하는 마진이 1억~2억원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앞으로 나올 청약을 기다리기도 애매하다. 지금 시장에선 통장점수가 아깝더라도 분양만을 고집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강남·잠실 등의 급매가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분양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인기 단지의 급매가 있다.”   청년·신혼부부가 주목할 만한 유망 청약 대상이 있나. “둔촌주공의 초소형이 마지막까지 미계약분으로 나왔듯, 1~2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아파트도 관심 가질 만하다. 전용 59·84㎡ 등의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지만, 원룸 수준 규모라고 투자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장이 살아나면, 중대형과 함께 소형의 시세도 올라간다.”   새 집 마련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2024년까지 입주 예정인 단지의 입주 시점을 공략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입주 시기에는 자금 마련 부담 등으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지금 분양하는 단지들은 이르면 2025년 이후 입주 예정인데, 2024년까지 입주할 단지라면 이전 분양가가 낮았던 시기에 공급됐던 물량이어서 가격이 저렴할 수 있다.” 」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3.11 00:01

  • 2030 등린이 뜨악했다…20~30% 뛰는 등산용품 가격

    2030 등린이 뜨악했다…20~30% 뛰는 등산용품 가격

     ━  고물가·고환율·고금리에 버거운 봄철 산행   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북한산 산성입구 주차장은 3월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이미 만차 상태인 주차장에 대려는 차량들이 긴 줄을 이루며 대기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까놓고 얘기합시다.”   이렇게 말하자 김경민(35·가명)씨는 등산 배낭을 펼쳤다. 최저가 800원 화장지부터 최고가 34만원 재킷까지, 그의 등산 물품이 해부학 교실의 개구리 배처럼 드러났다. 그렇게 김씨의 배낭을 해부했다. 배낭 안에는 지난해 5.2% 오른 물가가 들어 있었다. 1달러 대비 1200원대에서 1300원대로 9.7% 상승한 환율이, 1.25%에서 3.5%로 2.8배 인상된 금리가 얽혀 있었다.   %(퍼센트). 15세기 이탈리아의 한 문헌 속에서 유래했다는 이 기호가, 600여 년 지난 21세기에 김씨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난 1일 북한산에서 1년 새 물가·환율·금리 따라 치솟은 배낭 속 용품 가격을 따졌다. 곳곳에 등산 팁도 곁들였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사진=김홍준 기자   배낭·재킷·등산화…예년 4배 수준 인상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42%, 2위 가을 41%, 2019년 한국갤럽 조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등산(11%, 공동 2위 음악감상·헬스 7%)이다. 봄철(3~5월) 국립공원의 산을 찾는 인구가 가장 많은 달은 5월이지만, 그 절정을 향해 3월부터 산은 붐비기 시작한다. 19~79세 성인 중 한 달에 한 번 이상 등산·트레킹에 나서는 인구는 3229만명(78%, 산림청, 2022년 기준). 그중 한명이 김씨다.    물·랜턴·재킷. 전문가들이 사시사철 산행 중 갖고 다녀야 하는 필수 3종으로 꼽는 품목이다. 김씨는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 땄다. 지난달, 이 500㎖ 생수가 14% 올랐다(그래픽 참조). 대형마트에서 350원 하던 게 400원이 됐다. 김씨는 “그래요? 오른 줄 몰랐네”라고 반문했다. “값 올랐다고 아끼는 게 아니라 원래 산에서는 이렇게…”라며 그는 찔끔찔끔 나눠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북한산 족두리봉에서 비봉을 바라보고 있는 등산객. 최근 등산 용품 가격은 물가와 환율이 치솟으면서 20~30% 뛰고 있고 높아진 금리로 구입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김홍준 기자   랜턴에 들어가는 건전지도 지난해 슬그머니 올랐다. AA 두 입이 8.9% 인상(3950원→4300원)됐다. 그는 얇은 의류를 겹겹이 입었다. 층층이 보온 공간을 만드는 ‘레이어링 시스템’이 그의 몸에 적용되고 있었다. 가장 바깥에 입고 있는 34만원짜리 재킷은 1년 새 20%나 올랐다. "아는 사람은 한 벌에 125만원짜리를 입더라"며 “2년 전에 80만원대에 샀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새 40만원 안팎(약 50%)이 올랐다는 이야기다. 지난 1년 새 19% 올랐다. 김씨의 목을 감싸는 스카프도 지난해 2만7000원에서 3만원으로 11% 올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암벽화 얼마에 샀어?” “22만원. 현금으로.” 북한산 중성문을 얼마 앞두고 김명선(26)·이승원(25)씨가 이상하게 생긴 배낭을 메고 지나갔다. 작은 바위에서 오름짓을 하는 볼더링을 하러 간단다. 등에 멘 ‘이상한 배낭’은 충격 흡수용 패드다. 그 패드 사이에 암벽화가 끼어 있었다.   등산용품 중에는 수입하는 품목이 많다. 가격 인상이 가파르다. 이미 지난해 올랐어도 조만간 다시 오를 예정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관세청이 밝힌 지난해 1~10월 등산용품 수입액은 4억2700만 달러(등산화 3억800만 달러, 등산스틱 1억1900만 달러)에 이른다.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74.5%나 늘었다. 코로나19가 아웃도어 바람을 몰고 왔다는 분석이다. 김경민·김명선·이승원씨 같은 2030 세대가 늘었다. 20대 등산·트레킹 인구는 최근 감소세지만, 2008년 30%에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59%다. 30대(70%)는 꾸준히 늘어 40대(71%)와 비슷하다(산림청, 2022년 기준). 덕유산을 오르는 2030 등린이들. 코로나19로 산을 찾는 20대, 30대가 늘었다. 김홍준 기자   2030 세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곳이 있다. 실내암장이다. 필수품은 고무신처럼 생긴 등산화의 하나인 암벽화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수입된다. ‘국민 암벽화’라고 부르는 한 제품은 이미 지난해 가을 10% 올랐고, 조만간 10%가량 다시 오른다. 서울 종로5가 장비점 사장은 “한 켤레에 출고가 27만 5000원 정도로 가격이 정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반년 새 22만 5000원에서 22% 뛰게 되는 것이다.   “야, 아껴 써. ‘금 테이프’야.” 이승원씨가 말했다. 부상 방지를 위해 손가락에 감는 수입 접착붕대(클라이밍 테이프) 하나가 지난해 6000원에서 8000원으로 수직 상승(33%)했다.  실내 암장인 일산 더클라임을 이용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2030 '클린이'다. 이들의 필수품인 암벽화 가격은 최근 20% 넘게 올랐다. 김홍준 기자   25.9%. 암벽화와 클라이밍 테이프 가격 상승률 사이, 지난해 수입 물가는 이렇게 올랐다. 2008년 36.2% 상승 이후 최고치다. 국제 원자재 가격, 인건비가 올랐다. 여기에 환율이 뛰었다. ‘현지 가격 또는 환율 변동으로 주문이 취소될 수 있다’는 안내문이 곳곳의 해외 구매 대행사에 걸렸다. 한 등산장비 업체 관계자는 "통상 연간 5%, 많아야 7% 정도 값이 오르는데, 1년 새 20~30% 오른 품목이 많다"고 밝혔다.    등산화·암벽화에 쓰는 고무는 코로나19 이전 가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중순 기준 천연고무 가격은 t당 1852달러, 합성고무는 1700달러로 1년 전보다는 하락했지만, 코로나19 확산 이전보다 500달러 정도 비싸다. 국내 유명 등산화의 경우, 외형을 조금 바꾼 새 시리즈가 30만원에서 32만5000원으로 올랐다. 수입 등산화는 20% 넘게 올랐다.    김경민씨는 “새 등산화를 사느니 수선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루고 미루다 곧 비용을 올릴 예정”이라고 등산화를 수선하는 국윤경(62)씨가 말했다. 등산화 창갈이는 이미 지난해 8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렸고, 암벽화 창갈이는 4만5000원에서 5만원으로 올릴 예정이다. 국씨는 “밑창에 쓰는 수입 고무 한 판 가격이 1년 새 5만원 올라 18만원”이라며 “이전 10년간 올랐던 가격만큼의 액수가 2022년 한해에 인상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건비와 원자재 값이 오르면서 등산화 수선 비용도 8만원에서 10만원으로 25% 올랐다. 등산화 수선업체 '빅스톤' 대표인 국윤경(62)씨는 ″조만간 암벽화 수선 비용도 4만5000원에서 5만원으로 올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홍준 기자   아웃도어 시장은 일상과 동떨어져 보인다. 생필품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국내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6조원대로 추산된다. 반려동물·모바일게임·건강기능식품 시장과 비슷한 규모로, 결코 작지 않은 시장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인 점을 고려하면, 치솟은 물가와 환율·금리가 부른, 깔딱고개처럼 가파른 가격 상승은 살갗에 절실하게 와 닿는다.   2030세대 등린이 "이렇게 가격 오를 줄이야"   김씨가 배낭에서 김밥을 꺼내 먹었다. 등산인의 최애 메뉴는 김밥과 막걸리. 김씨는 “1000원 김밥이 나온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1500원, 2000원으로 오르더니 이젠 3000원”이라고 말했다. 실제 한국소비자원이 밝힌 외식 가격 중 김밥은 1년 새 12% 올라 3000원을 돌파했다. 삼겹살과 인상률이 비슷하다. 지난해 여름 가격이 80% 넘게 폭등한 시금치를 아예 뺀 당근 김밥도 등장했다. 서울 동대문의 한 등산 장비점. 최근 등산 용품 가격이 예년 5% 인상의 4배 수준인 20~30% 뛰고 있다. 김홍준 기자   막걸리는 1525원에서 2000원(편의점 기준)으로 오른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주세 인상(L당 1.5원)으로 가격이 오를 태세다. 국립공원에서는 지정된 곳에서의 음주를 금한다. 하지만 현장 적발이 어렵고,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의 음주는 처벌할 수 없다. 대신 과태료를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100% 올렸다. 애초 실명을 밝히려던 김씨는, 막걸리 한 통이 배낭에서 나오자 “구설에 오르기 싫다”며 가명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씨가 입을 닦느라고 쓴 화장지 가격도 지난해 23% 상승했다. 쓰고 있는 모자도 최근 6만9000원에서 7만5000원으로 9.2% 올랐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과태료까지 안 오른 게 없었다.   하산길. 정준희(30)씨가 북한산 장비점에서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난해 여름 암벽화를 샀다가 사이즈가 안 맞아 중고시장에 내놓고 보니 그새 가격이 올랐고, 조만간 또 인상된다는 직원의 말을 들었다. 20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카드로 긁자니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서 갚아야 한다. 정씨는 가격 인상과 금리 인상 모두 고민하고 있었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케이비(KB)국민·신한·하나·우리·엔에치(NH)농협)의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지난 1월말 기준 41조8억원. 1년 새 7조357억원 감소했다. 마이너스통장 잔액 감소 배경엔 금리 인상이 있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의 신용한도대출(마이너스통장) 평균 금리는 연 6.77~7.28%로 치솟았다. 기준금리 인상 여파다. 일부에서는 적금을 해약해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갚기도 한다.    등린이 2년 차인 '초보' 정씨는 “비용이 덜 드는 취미가 등산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봄철 산행을 앞두고 재킷과 중등산화·보온병·간이의자 등 이런저런 장비를 구입하자니 한 달 월급 3분의 1인 120만원이 나갈 것 같아 참고 또 참는 중”이라고 밝혔다. 정씨는 암벽화 구입을 포기했다. 높아진 금리가 소비를 억제했다. 이는 물가 하락 요인으로 이어질까. 하지만 등산용품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자물쇠효과(lock-in effect)도 있기 때문에 정씨는 결국 해당 암벽화를 살 것이다. 경남 통영 사량도 지리망산. 최근 등산 용품 가격은 물가와 환율이 치솟으면서 20~30% 뛰고 있고 높아진 금리로 구입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김홍준 기자   등산장비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김윤선(53)씨는 “아직 외국의 제조업체에 주문한 물량이 채 들어오지 않았는데, 지난해보다 20~30% 정도는 비싸질 듯하다”라며 “용품들이 ‘일제히’가 아니라 ‘점점이’ 오르기 때문에 어떤 고객은 가격 인상 체감이 더딜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30% 인상의 파고가 계속 덮친다는 얘기다. 다른 장비점 사장은 “물가·환율·금리의 삼중고가 배낭 속 용품을 연중 인상으로 만들 태세”라고 말했다.   %로 가득 찬 김씨의 배낭이 무거워 보였다. 가만, 배낭 자체는 얼마나 올랐을까. 장비점 사장에게 물어보니 “30%”라고 답했다. 순간 아찔. 봄기운에 취했나, %에 놀랐나.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3.03.04 00:01

  • 유보통합 싸고 30년 밥그릇싸움, 교사 자격 달라 이견 팽팽

    유보통합 싸고 30년 밥그릇싸움, 교사 자격 달라 이견 팽팽

     ━  진통 겪는 유치원·어린이집 통합   지난 16일 ‘교육부 중심 유보통합 추진을 위한 학부모 연대’ 관계자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서 영유아의 평등한 교육을 위한 유보통합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4년제 유아교육과 졸업한 교사에게 배우다가 학점은행제로 보육교사 자격 취득한 교사에게 배우고 싶은 아이들이 있을까요? 유보통합은 좋지만, 교사통합은 결사반대입니다.” (서울 A유치원10년차 송모 교사)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모두 경험해 봤습니다. 어린이집은 너무 많은 보육시간을 떠안고 있어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기관을 통합하는 게 결국 유일한 해결책이란 생각이 드네요.” (경기도 B어린이집 15년차 김모 교사)   2023년은 교육계에 ‘통일’의 해로 기억될까, 아니면 되풀이되는 ‘휴전’의 해로 기억될까. 윤석열 정부는 28년간 교육계의 해묵은 난제였던 유보통합(영유아 교육·보육 통합)을 핵심 국정과제로 들고 나왔다. 교육부는 지난달 30일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제3의 통합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유보통합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어느 기관이든 학부모가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 이후 통합 추진·중단 반복   유치원·어린이집 간의 격차를 줄여 평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겠다는 유보통합은 약 30년간 추진과 중단을 반복해왔다. 유아교육을 맡는 유치원(교육부)과 보육을 담당하는 어린이집(보건복지부)간의 이해관계가 부딪친 결과다. 1995년 김영삼 정부가 5.31 교육개혁안을 내놓으며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통합하는 ‘유아학교’가 처음 등장하면서 유보통합 논의가 시작됐지만 당시 보육계의 반발로 추진이 무산된 바 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만 3~5세 공통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을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정보공시시스템 등을 통합하는 등 행정, 교육과정 통일까지는 진행됐으나 교사 자격과 관리부처 통합은 끝내 추진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2017년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끝장토론을 진행했음에도 절충안을 찾지 못하자 통합이 아닌 유치원·어린이집의 교육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중규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 회장은 “지난 28년 동안 오로지 운영자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인해 아이들과 학부모의 피해만 커진 채 이원화 체제를 유지해왔다”고 평가했다.   지난 12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전국교사결의대회를 열고 윤석열식 유보통합을 전면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모습. [뉴스1] 유보통합의 가장 큰 걸림돌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교사 자격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경우 고졸 이상의 학력을 보유하면 학점은행제 등으로도 보육교사 3급 자격을 취득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허들이 낮다. 반면 유치원 교사는 2년제 이상의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만 ‘유치원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유치원 중에서도 국공립유치원 교사가 되려면 지난해 기준 6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임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자격요건이 다르니 이들이 받는 보수도 월 평균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까지 벌어진다.   유치원 교사들은 유보통합을 하게 될 경우 교사 처우가 하향 평준화되거나, 높은 자격을 요구하는 유치원 교사가 역차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 반기를 든다. 8년차 유치원 교사인 김모(34)씨는 “4년제 아동학과에서도 성적 우수자 1~2명에게만 유치원 교원자격증을 주는데, 이것 자체가 배우는 과목과 범위가 너무나 다르다는 증거 아닌가”라면서 “보수교육을 몇 시간 듣는다고 해서 같은 수준으로 인정해준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이중규 회장은 “학력만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건 아니지 않냐”며 “현장에서 충분히 경력을 쌓은 어린이집 교사까지 깎아내리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 3~5세의 경우 교육과정이 통일돼 있어 교사들의 수준이 현저하게 다르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으냐”고 반발했다. 이에 교육부는 “교사 자격을 일률적으로 통합하는 게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양측의 의견 대립은 팽팽하다.   입장에 따라 찬반이 갈리는 교사들과는 달리 학부모들은 유보통합이 필요하다는 쪽이다. 7세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홍모(38)씨는 “다니는 기관에 따라 지원금액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며 “양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지원금액과 범위를 통일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고 말했다. 5세 학부모 구지은(33)씨는 지난해 경남 김해시의 한 유치원 추첨에서 떨어져 올해도 다니던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 그는 “영어를 매일 가르치고, 태권도·축구는 물론 골프까지 유치원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어 경제적 부담이 큼에도 입학을 노렸는데 실패했다”며 “요즘은 돈을 더 내더라도 아이한테 더 좋은 교육을 해주고 싶어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현재 만 3~5세 유아는 누리과정 지원금으로 1인당 28만원의 정부 지원을 받는데, 어린이집의 경우 보육료를 추가 부담하지 않지만 사립유치원은 전국 평균 13만5000원(2022년 4월 기준)을 추가 부담해야 했다. 급식비 또한 사립유치원은 1식당 2800~3435원의 지원을 받지만 어린이집은 1식당 단가가 2500원에 불과해 차액을 기관이 부담해야 한다. 이중규 회장은 “지금까지는 기관의 희생으로 격차를 메웠다면, 이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때”라고 강하게 말했다.   유치원·어린이집, 어떻게 다른가 ‘교육부중심 유보통합 추진을 위한 학부모 연대’도 지난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30년간 유보 분리로 인한 불평등한 교육과정, 시설, 급 간식비, 교사 자격 및 처우 등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과 현장의 교사들이 감당해 왔다”며 “지역별 유치원·어린이집 수급 관리, 교사 대 영유아 비율 등을 하루빨리 개선해 아이들이 평등한 교육·돌봄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부모들은 형식적인 제도 개선보다 실질적인 교육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강남구에서 6세, 9세 아이를 키우는 김모(42)씨는 “어린이집은 법적으로 오후 7시까지 보육해주고, 방학에도 긴급돌봄이 있어서 맞벌이 부부들이 선호하는 반면 유치원은 대부분 오후 1~2시에 하원해야 하고, 방학이 있어서 맞벌이 부모들은 월 40만원까지 나오는 추가 특별활동이나 하원 후 퇴근 때까지 ‘학원 뺑뺑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씨의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둘째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그는 “돈 많은 사람은 비싼 사립 영어유치원 보내고, 돈 없으면 공립 어린이집에 보내는 ‘빈익빈 부익부’를 이어가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보통합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손혜숙 경인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90년대 이전까지는 두 기관이 이원화된 상태에서도 원활한 운영이 가능했지만,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주무부처를 통합해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며 “부모들조차 두 기관의 차이를 잘 몰라 혼란이 커지고, 아이들까지 차별당하는 불공정을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지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는 “저출산 시대가 도래하며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줄줄이 폐원하고 있는데 행정체계가 다르단 이유로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학생이 없어 폐원하는 기관과 오랜 시간 대기를 해야만 입학이 가능한 기관이 공존하는 불균형 상태라는 것이다.   유치원은 교육부, 어린이집 복지부 관할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6일 한 유치원에서 어린이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극명하게 갈리는 이해관계를 통합의 키를 쥐게 된 교육부가 얼마나 공정하게 해결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본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교육정책학)는 “유치원 교사도 유보통합이라는 대의명분에는 동의하지만, 어린이집 교사와 자격과 처우가 현저히 달라 심리적 거부감이 큰 상태”라며 “과거 중등교사를 초등교사로 임용했던 중초교사제 등을 참고해 어린이집 교사들의 자격 체계를 어떻게 끌어올릴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중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통합 소요 예산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도 관건이다. 교육부는 향후 유아교육특별회계와 복지부, 지자체 예산을 활용하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시행령을 개정해 교육청 예산을 추가 지원하는 방향으로 비용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에서는 지방교육재정을 활용해 유보통합을 지원하라는 기조에 난색을 보인다.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12개 교육청에서 유보통합을 위해선 중앙정부 차원의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김 교수는 “지난 30년간 유보통합을 성사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통합으로 인해 감수해야 하는 비용이 과도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재원을 투입하느냐가 성패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2.25 01:23

  • “경미한 부상인데 상급병실 입원, 10여가지 한방 진료”

    “경미한 부상인데 상급병실 입원, 10여가지 한방 진료”

     ━  자동차보험 과잉진료 논란   “교통사고 나면 무조건 한방병원 가야지, 그래야 합의도 잘된대.”   얼마전 이경민(35)씨는 아파트 단지내에서 접촉사고를 냈다. 단지에서 서행 중 킥보드를 타던 아이를 피하려다 갓길에 정차돼 있는 상대방 차량의 옆면을 스치듯 긁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상대방이 ‘괜찮다. 이정도 접촉사고는 흔하다’고 말했는데 얼마 뒤 보험사를 통해서 상대방이 서울의 유명한 한방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하루 입원비만 20만~30만원 한다더라”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경미한 교통사고 후에도 초호화 치료를 받는 등 과잉진료가 일상이 되고 있다. 정모(50, 경기도 수원시)씨는 2022년 11월 경미한 접촉사고로 상해급수 12급의 척추염좌 진단을 받았다. 정씨는 사고가 난 후부터 매일 침술, 부항, 약침, 뜸 등 10여가지의 진료를 받았다. 보험사의 관계자는 “환자의 증상과 피해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한다기 보다는 방문만 하면 동일한 시술을 무더기로 시행한다”며 “단순 요양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에 따르면 자동차보험 내 한방 진료 비율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의원의 상급병상은 2019년 861개에서 2020년 1898개로 1년 만에 120.4% 증가했다. 2021년 11월 의료정책연구소 ‘자동차보험 한방진료의 현황과 문제점’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자동차보험 청구기관 비율은 의원 17.62%, 요양병원 44.94%, 병원 71.09%인 것에 비해, 한방병원과 한의원은 각각 96.83%와 82.54%다.   자동차보험 한방진료 실적은 2013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자보심사를 위탁받아 심사 실적 자료가 축적되기 시작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2014년 1조4234억 원이던 자동차보험 진료비는 2020년 2조3370억원으로 64.2% 늘었다. 특히 한방 진료비 증가가 눈에 띈다. 의과의 경우 같은 기간 1조1503억원에서 1조1676억원으로 큰 변화가 없는 반면, 한방은 2698억원에서 1조1643억원으로 331.5% 증가했다. 한방병원은 787억 원에서 5505억원으로 599.5%, 한의원은 1911억원에서 6137억원으로 221.4% 늘었다. 그 결과 전체 자동차보험 진료비 중 의과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80.8%에서 2020년 50%로 감소한 반면, 한방은 같은 기간 19%에서 49.8%로 급격히 증가했다.   실제 한방병원에 문의한 결과 교통사고에 대한 실질적인 치료보다 고급스러운 시설과 한약 처방 등에 대한 홍보가 주를 이룬다. 서울 모 한방병원 관계자는 “시설이 호텔만큼 깔끔하다”, “고급스러운 1인실을 이용하며 추나요법, 한약 처방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누릴 수 있다”고 답했다. 실제 한방병원에 입원했던 이진영(42)씨는 “1인실에 고급 안마의자와 대형 TV를 구비하고 넷플릭스, 티빙 등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굉장히 고급스럽고 대접받는 기분이라 좋았지만 조금은 과도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일반 병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서비스지만 한의과에서는 가능하다. 국토교통부가 정하는 자동차보험수가기준상 7일까지 환자가 아무런 부담 없이 상급병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규정상 병실이 10개 이하인 한의원은 일반병실을 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의원에서 1~2인실의 상급 병실만 두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새는 보험금은 자동차보험의 가격 상승을 불러 온다. 특히 자동차보험 한방진료 건수가 늘고, 이로 인한 진료비 급증이 및 보험료 인상이 우려된다. 운전자들 사이에서는 ‘교통사고 나면 바로 한방병원으로 가야 보험사 직원이 달려온다더라’, ‘한방병원에 입원하니 합의금이 30만원 올랐다더라’는 등 다양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정경일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법무법인 L&L)는 “보험 제도가 허술하기 때문에 불거지는 문제”라며 “보험사가 경미한 사고 같은 경우 악성 민원인이 진정을 넣는 것을 더 무서워하기 때문에 과잉 치료를 못본척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사고를 내지 않거나 경미한 사고를 낸 선의의 운전자들은 분통을 터트릴 수 밖에 없다. 자동차보험 가입자 이정우(37)씨는 “살면서 사고가 나도 한방병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며 “정말 아픈 사람들이 몇몇 악용하는 사람이나 병원들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보험료와 한방 진료 비율 증가가 한방병원의 잘못이라고 볼 수 만은 없다. 대한한의사협회의 21년 ‘교통사고 후 한의치료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교통사고 후 제공 받은 한의의료기관 의료서비스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 17.1%, ‘만족하는 편이다’ 74.4%로 90%가 넘는 만족감을 표시할 정도로 피해자들의 만족도가 높았고. 한의 진료 후 증상 개선 정도에 대해서는 ‘우수’ 15.0%, ‘호전’ 50.7%, ‘약간 호전’ 29.2%로 총 94.9%의 응답자가 치료효과가 있었다고 답했다. 만족한 한의치료 서비스는 침·뜸·부항-한방물리요법-약침-추나요법-첩약-기타 순이었다.   해당 문제가 불거지자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는 지난 7월 상급병실 입원은 치료 목적이어야만 하고 '병실 사정'이라는 예외적 상황은 병원급 이상으로 제한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자동차보험 진료수가에 관한 기준 일부개정안을 냈다. 다만 전문가들은 진료수가 및 세부 인정기준이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한방 진료 특징상 과잉 진료, 보험사기 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고 입을 모았다. 이정찬 의료정책연구소 부연구위원은 “현행 자동차보험 수가 기준에는 첩약, 약침술, 추나요법, 한방물리요법 등에 있어 횟수 제한이나 인정 기준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며 “한방 경증환자에 대한 진단서 교부를 의무화하고 치료기간별 지급 금액 규모나 한도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건강보험에서 한방특약을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자동차 보험에서도 한방의료기관의 혜택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보험료를 깎아 주는 등 소비자에게 어드벤티지를 주는 대안도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보험 제도의 변화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경일 변호사는 “제도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소수를 잡기 위해 섣불리 제도를 개선하면 정말 한방 진료나 입원이 필요한 분들이 피해를 받을 수 있다”며 “의도적 과잉진료나 보험 사기 등을 적극적으로 적발해 일벌백계하는 대안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3.02.25 01:18

  • 한전, 작년 32조6000억원 영업손실…사상 최악 실적

    한전, 작년 32조6000억원 영업손실…사상 최악 실적

    서울 도심의 전기계량기 모습. [뉴스1] 한국전력이 지난해 32조60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냈다. 역대 최악의 실적이다. 연료는 비싸게 사서 전기는 값싸게 공급한 탓에 손실이 눈덩이로 불었다. 24일 한전은 지난해 실적을 결산한 결과 32조6034억원 영업손실(연결 기준)이 났다고 발표했다. 손실액은 2021년 5조8465억원보다 26조7569억원 늘었다. 불과 1년 사이 5배 넘게 불었다. 지난해 매출액 71조2719억원을 한참 웃도는 103조8753억원을 영업비용으로 썼기 때문이다.   전력 판매가 늘고 요금도 올라가면서 매출액은 1년 전과 비교해 10조5983억원(17.5%) 늘었지만 치솟는 연료비, 전력 구입비를 따라가지 못했다. 전년 대비 연료비는 77.9%, 전력 구입비는 93.9% 각각 늘었다. 이를 포함한 영업비용은 1년 사이 37조3552억원(56.2%) 증가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공급망 교란 등 여파로 연료비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전력을 생산할 때 연료로 쓰는 액화천연가스(LNG)와 유연탄 가격은 1년 사이 2배로 올랐다. 한전에 따르면 LNG 값은 2021년 t당 73만4800원에서 지난해 156만4800원으로, 유연탄은 t당 139.1달러에서 359달러로 각각 113%, 158.1% 상승했다. 한전은 지난해 4월과 7월, 10월 3차례에 걸쳐 전기요금을 킬로와트시(㎾h)당 19.3원 인상했지만 손실을 메우기엔 한참 모자랐다. 올 1월에도 ㎾h당 13.1원 요금을 추가 인상했지만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한전은 향후 5년간 총 20조원의 재무개선을 목표로 ‘재정건전화 계획’을 추진 중이나 근본적 해결책은 안 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한전이 국회에 제출한 경영 정상화 방안에선 ㎾h당 51.6원은 올려야 적자 해소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단계적으로 요금을 인상하되,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대폭 늘리고 에너지 소비는 줄이는 등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2023.02.25 00:59

  • [김홍국 하림 회장 - 김관영 전북지사 대담] “지방으로 이전하는 대기업·명문대에 세금 면제해주자”

    [김홍국 하림 회장 - 김관영 전북지사 대담] “지방으로 이전하는 대기업·명문대에 세금 면제해주자”

     ━  김홍국 하림 회장 - 김관영 전북지사 대담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왼쪽)과 김관영 전북도지사는 통념을 깨는 시장경제 역발상이 지역을 살리는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영재 기자 『어서오세요, 책 읽는 가게입니다』의 저자 아쿠스 다카시는 북카페를 운영한다. 독서를 즐기는 그는 마우스 클릭 소리, 타이핑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거슬리는 이유를 “이질적인 혹은 불연속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뇌가 완만한 차이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이질적인 혹은 불연속적인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뇌과학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지방 회생’이나 ‘지역균형발전’ 같은 어젠다 또한 우리의 시야(視野)에 들어오더라도 잘 보이지 않는 주제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윤석열 정부를 비롯한 역대 정부의 지역 회생 정책들이 ‘이질적이거나 불연속적인 차이’를 주지 못한 탓이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정책들이 우리 뇌에 완만함을 안김으로써 지방 관련 이슈는 늘 관심사의 뒷전으로 밀린 감도 있다.   이런 면에서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과 김관영 전북도지사의 주장은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두 사람은 2월 17일 발간된 월간중앙 3월호 ‘구루와 목민관 대화’에서 지역균형발전 전략과 관련해 역대 정책 대안과는 결이 다른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예컨대 지방으로 이전하는 대기업과 명문대에 법인세, 상속세, 부동산 거래세 등을 감면, 면제하자고 제안했다. 노조 파업 없는 ‘노 스트라이크 존(no strike zone)’ 조성, 환경 점검 사전 예고제 등 기업이 지방에서 성공 신화를 쓰는 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지난 16년간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144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런데도 지역 불균형은 심화했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 지방의 회생과 지역의 균형발전은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 즉 기업과 대학이 지방에 진출해야 한다. 저는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과 명문대가 지역으로 가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정부 시책에 따른 강제적 이전이 아니라 제도 자체가 혜택이 되면서 자발적으로 지방으로 가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언젠가 계산해봤더니 서울의 한 명문대 부지는 아파트, 상가 등 다른 용도로 개발하면 15조원의 가치로 평가되더라. 이 대학이 부지를 팔고 지방으로 내려가면 세금 등 제도적 인센티브를 주면 된다.   서울에서 멀리 갈수록 더 많은 혜택을 주자. 해외 명문대 중에는 시골에 자리한 대학이 많지 않나. 대학부지 매각 대금에 세금을 매기지 않고 오로지 학교 이전과 발전에 쓰게 하는 것이다. 15조원 중 대학 타운과 기숙사 등 최고의 캠퍼스를 만드는 데 7조원을 들이고 나머지 8조원은 대학이 보유, 활용하면 세계 최고의 명문대로 도약하는 데 부족하지 않은 재원이다. 게다가 서울의 명문대가 온다면 부지를 공짜로 제공하는 지자체도 나올 수도 있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지방으로 가는 대기업은 법인세 절반을 깎아주자. 더 먼 지방으로 가는 경우 법인세를 아예 면제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증여·상속세를 감면하거나 면제해줄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한 지역에서 고용을 7년 유지하면 상속세를 100% 탕감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은 그런 저력으로 수출 대국, 무역흑자 3000억원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렇게 되면 세수(稅收)에 구멍이 생기진 않을까?   김 회장 : 지금까지 지역균형발전에 쏟아부은 144조원을 법인세 부족분에 충당하면 된다. 지방이 회생하면 줄어들 법인세, 상속세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세수가 새로이 걷힐 것으로 확신한다. 대기업과 명문대가 지방으로 이전하면 관련 중소기업들도 쫙 따라간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원리에 따라 정책을 집행하면 기업, 대학이 지방으로 가게 된다. 사실 대한민국은 엉뚱한 데 돈을 억지로 써버려 정책이 실패하는 나라다.   농업 보조금 많이 주는데도 농업 경쟁력은 꼴찌다. 저출산 대책에 그렇게 큰돈을 퍼부어도 출산율은 바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중소기업 예산을 가장 많이 지원하는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1년 생존율은 매우 낮다. 우리나라는 뭐든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돈을 넣어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근본적으로 순리(順理)에 어긋나는 정책은 100% 실패하게 돼 있다.   김관영 전북도지사 : 김 회장 얘기는 대기업과 명문대 지방 이전에 시장 원리를 도입하자는 것인데 백분 공감한다. 법인세·상속세·증여세의 과감한 면제 내지는 감면 이런 게 수반된다면 시장은 분명히 기능적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현실에서는 그게 참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다. 그렇게 가자면 구조를 바꿔야 하고, 결국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야 한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국회의원 분포를 보면 수도권 출신이 더 우세한 실정이다. 수도권 소재 대기업과 대학의 지방 이전에 이들이 호응할지 의문이다.   ‘중앙지방협력회의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분기별로 열리는 중앙지방협력회의가 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중앙지방협력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국무총리, 중앙부처의 장관, 17개 광역지자체장 등이 지방 자치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국정운영 플랫폼이다. 이 자리서 저를 비롯해 많은 광역지자체장이 법인세, 상속세 획기적인 감면, 교육부의 대학 정원 조정기능 지방 이전, 지자체의 비자 발급 등 지역 발전에 필수적인 의제들을 공론화하고 있다.   김 회장 : 지난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실장 관리들과 함께 전북 익산에 있는 하림 본사와 공장을 찾아왔다. 윤석열 정부 첫 국무회의를 세종시에서 개최하기에 앞서 대통령에게 보고할 지방소멸 대응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 제가 언급한 대기업, 대학 이전 방안을 얘기했더니 공감하더라. 저도 이게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방안을 누구든 선언적으로라도 꾸준히 주장해줘야 그 사업에 탄력이 붙는 법이다. 지방에 가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 주는 쪽으로 제도를 다듬으면 나머지 문제는 알아서 해결된다. 심지어 지방에 가는 대기업에는 중소기업에 주는 혜택을 주겠다고 하면 시장의 반응은 뜨거울 것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분류되면서 받지 못하는 혜택이 100개도 넘는다. 지방의 대기업이 이런 혜택을 누린다? 갈 기업은 가게 된다.   대기업들이 인센티브 준다고 지방으로 과연 내려갈까?   김 회장 :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기업 경쟁력에서 격차가 나게끔 파격적인 혜택을 줘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노동의 경우 외국의 싼 인력을 수도권 기업에는 못 쓰게 하고 지방에는 확 풀어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으로 제도를 통해 지방에 있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고 경쟁력을 갖게 환경을 만들어 주면 상대적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기업들도 지방으로 가게 된다.   김 지사 : 전북도는 노동 문제가 성공하는 기업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노총·민주노총과 노사 상생 협약을 통해 노사가 협력하는 전북을 만들어가고 있다. 저는 전북도를 노동자가 불이익을 입지 않는 각종 안전장치를 만들어 파업 청정지역으로 한번 만들어보고자 한다. 실질적인 ‘노 스트라이크’ 지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환경 규제도 문을 열어둘 참이다. 과거 불시 단속하던 것을 지금은 도내 1000여 개 기업에 환경 점검 일자를 예고하고 점검을 한다. 그 전에 문제점을 다 해소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 대담 전문은 2월 17일 발행된 월간중앙 3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2023.02.25 00:59

  • 이정재가 영어로 연기하는 ‘오겜’, 엘비스가 부르는 K팝

    이정재가 영어로 연기하는 ‘오겜’, 엘비스가 부르는 K팝

     ━  ‘성수 AI 데이’ 콘퍼런스   16일 띵스플로우가 주최한 성수 AI 데이 콘퍼런스에 참석한 산업계와 학계 연사들이 AI 기술의 변화상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1. ‘이정재가 영어를 저렇게 잘했어?’ 화면을 본 주변이 술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세계적 인기를 모은 K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에 나온 이정재(기훈 역)의 목소리가 분명 맞는데, 영어 발음은 원어민 수준이다. 사실 이 화면은 인공지능(AI) 신기술로 만들어졌다. AI 기술이 이정재 목소리를 영어로 연기한 외국인 성우의 목소리로 감쪽같이 변조한 것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외국인들은 재미있는 장면과 이야기엔 푹 빠져들지만, 외국인 성우가 영어나 프랑스어 등 자기네 언어로 더빙할 경우 작품 속 배우들의 목소리는 못 듣게 돼 연기에 대한 몰입감은 떨어질 수 있다. 이때 AI가 배우 목소리로 영어나 프랑스어 등을 하도록 성우 연기를 변조하면 해당 언어권 시청자들의 몰입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2. 엘비스 프레슬리가 환생해 생전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K팝 발라드를 부르면 어떤 느낌일까. 혹은 비틀즈가 다시 뭉쳐 다시 중흥기를 맞고 있는 한국 트로트 곡을 연주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 역시 AI의 힘을 빌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AI 기술 관련 스타트업인 수퍼톤의 최형석 리서치리드는 성시경의 노래를 프레슬리 목소리로 바꾼 샘플을 소개했다. 엘비스의 오리지널이라 해도 믿을 만큼 감쪽같았다. 수퍼톤은 방탄소년단(BTS) 소속사인 하이브가 지난달 인수한 업체다. 이 업체가 자체 개발한 AI 음성 합성 기술인 ‘NANSY(Neural Analysis and Synthesis)’는 사람의 목소리를 음색과 발음, 운율, 세기 등으로 분해하고 개별 제어 및 재합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다. 기존 기술에 비해 AI의 학습 속도가 빠르고, 발음의 부정확성을 줄인 것이 특징이다. 노래 변조도 가능하다.   소비자가 아티스트 음악 재창작도 가능   16일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성수 AI 데이’ 콘퍼런스에서 선보인 AI 기술들 중 일부다. 게임 개발 업체 크래프톤의 자회사 띵스플로우가 주최하고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가 후원한 이날 행사엔 산업계와 학계의 AI 전문가들이 연사로 등장해 신기술 동향과 시사점을 제시했다. 마켓츠앤드마켓츠에 따르면 세계 AI 시장 규모는 올해 869억 달러(약 112조원)에서 2027년 4070억 달러(약 526조원)로 5년 사이 5배가량 성장할 전망이다. 2020년 2조2000억원 규모였던 국내 AI 시장도 2030년 27조5000억원 규모로 13배 커질 전망이다(KT경제경영연구소).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네이버 등 국내 기업들도 AI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만 자금력이 부족하거나 상용화했을 때 성공 확률이 낮은 아이디어만 갖고 AI 사업에 뛰어든 스타트업은 혹독한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관건은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신기술을 선보여서 충분히 투자를 받고,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벤처캐피탈(VC)인 SV인베스트먼트의 홍원호 대표는 “불경기로 최근 들어 투자가 많이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AI 분야만큼은 (투자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고) 글로벌 확장성에 초점을 맞춰 주시하고 있다”고 VC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어떤 AI 기술들이 세간을 사로잡고 있을까. 고광범 MS 부문장은 MS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저(Azure)’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미지 생성 편집 AI ‘달리(Dall-E)’를 소개했다. 달리는 사용자가 입력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자동 변환해준다. 예를 들어 달에 착륙한 강아지를 그린 걸 보고 싶다면 이를 텍스트로 입력, 그대로 이미지가 나타나는 식이다. 고 부문장은 “챗GPT와 달리를 써서 일반 소비자가 단 이틀 만에 동화책 한 권을 완성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MS는 챗GPT보다 빠르고 정확한 AI 모델인 ‘프로메테우스’를 활용해 검색 엔진 ‘빙(Bing)’을 고도화하는 데도 나섰다.   토스모바일은 최근 가세한 알뜰폰 분야에서 AI 기술을 적용했다. 하대웅 비바리퍼블리카 최고제품책임자(CPO)는 “기존 알뜰폰 서비스에 가입하려면 거의 20단계에 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해서 고통스러웠다”며 “알뜰폰에 자동 음성인식(ASR, Automatic Speech Recognition) 기술 등을 적용했더니 가입 절차가 2단계로 크게 줄었다”고 소개했다. 이 기술은 AI가 사람 대신 자동 응답 시스템(ARS, Automatic Response System)을 듣고, 데이터에 따라 소비자 맞춤형 정보를 텍스트로 바로 제공해준다. 기존 ARS에선 소비자가 안내원의 긴 설명을 다 듣고 있어야 해서 기억하기조차 쉽지 않았던 불편함을 해소한 것이다.   “AI도 다양한 문화권 역사적 배경 알아야”   뉴튠은 ‘믹스오디오’라는 AI 기반의 인터랙티브 음악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비자가 재창작하고 그 저작권을 인정받는 미래형 음악 경험인 ‘플레이투크리에이트(Play2Create)’ 등에 부응하는 서비스다. 이종필 뉴튠 대표는 “AI의 도움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두 명의 음악을 섞은 작품을 만드는 등의 재창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공개한 가상인간 걸그룹 ‘메이브’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3주 만에 누적 140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 회사 강성구 최고기술경영자(CTO)는 “가상인간을 잘 만들려면 AI 학습 데이터의 품질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AI 관련 신기술 개발엔 산업계뿐 아니라 학계도 발 벗고 나섰다.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 연구팀은 AI가 텍스트에서 사람의 감정을 추론하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 알아내도록 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홍성은 인하대 교수는 AI가 사람 얼굴을 인식할 때 정면뿐 아니라 측면 등 환경적 차이가 있는 상황을 제대로 다루도록 하는 등의 ‘도메인 어댑테이션(DA)’을 연구 중이다. 홍 교수는 “DA를 이용하면 AI가 병원마다 다른 의료 장비로 학습한 이후 다른 병원에서 얻은 영상을 샘플만으로 분석하는 등의 일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다만 AI의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과제도 많다. 김주연 유니스트 교수는 “챗GPT로도 실험해봤지만 여전히 AI는 학습이 된 것만 알고, 학습이 안 된 것은 모른다. 논리란 게 없고 갈 길이 남은 것”이라며 “AI가 사람처럼 경험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도록 꾸준히 움직여서 학습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정우 네이버 AI랩 소장은 “AI 학습용 데이터엔 지식재산권(IP) 침해 리스크가 늘 따른다”며 국내외에서 관련 법·제도 정비가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에 동의했다. AI가 잘못된 데이터 학습으로 혐오·갈등 조장 표현이나 선정적 이미지 생성에 나설 위험성도 개선점으로 지목된다.   오혜연 카이스트 교수는 “사람처럼 AI도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를 듣고, 역사적 배경 등을 알아야 한다”며 “그래야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AI를 상대로 ‘어느 나라 사람이 적(敵)이냐’고 물었을 때 한국에선 일본인이라고 답한 경우가 많았던 연구 사례를 소개했다. 고광범 부문장은 “AI 서비스를 강화할수록 (기업들에) 강한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실감한다”며 “예기치 않은 비정상 동작 방지, 부정적 영향 차단 등에 기업들이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 헬로우봇, 개인화·개성 표출 서비스 차별화로 매출 급성장 「 김준희 띵스플로우 본부장. 최영재 기자 챗GPT가 급부상하면서 대화형 AI인 챗봇(chatbot) 전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챗봇 서비스엔 이용자와 ‘놀아주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금융사나 대학병원 등의 ‘보이는 ARS’도 대표적인 챗봇 중 하나다. 이처럼 소비자 일상 깊숙이 스며든 챗봇이지만, 기업 입장에서 이것만 갖고 매출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16일 만난 김준희 띵스플로우 AI콘텐트랩 본부장은 “띵스플로우가 5년여 전부터 서비스를 해온 챗봇은 성공적인 비즈니스모델(BM)로 입증됐다”고 자신감을 표했다.   챗GPT가 연일 화제인데. “시장에 나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최신 기술임에도 각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콘텐트 산업에서 파급력이 엄청나다. 2017년부터 캐릭터 지식재산권(IP) 기반 챗봇인 ‘헬로우봇’을 서비스 중인 띵스플로우도 이런 동향에 주목하고 있다. 막이 오른 챗GPT 시대를 성공적으로 맞을 자신이 있다. 생성형 AI를 실제 BM으로 키운 회사는 국내에서 우리가 유일하고, 세계에도 몇 곳 없다.”   근거는. “헬로우봇 하나에서만 매출이 2021년 45억원, 지난해 100억원 났고 올해는 250억원일 것으로 기대한다. 매출이 매년 2배 이상씩 성장 중인 유일한 챗봇이다. 해외 유명 챗봇인 미국의 ‘레플리카’도 헬로우봇보다 매출이 적다.”   다른 챗봇과 어떻게 차별화했나. “헬로우봇에서 유저는 현실의 나와 다른 자아인 ‘페르소나’를 다양하고 개성 있게 만들 수 있다. 개인화한 챗봇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감추는 공간인 온라인에서도 강렬한 개성 표출을 원하는 MZ세대에게 인기를 모으는 이유다. 또 헬로우봇엔 아기자기한 부가 서비스가 있다. 타로(Tarot) 카드로 연애 상담을 해주는 ‘라마마’가 대표적이다.”   헬로우봇 외에 어떤 AI 관련 플랫폼을 갖고 있나. “유저가 AI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돕는 ‘스플(스토리플레이)’을 서비스하고 있다. 웹툰과 웹소설 등을 만드는 데 활용하는 아이디어 정리부터 기획, 시놉시스 작성 등에 이르기까지 AI가 단계별로 도와준다. 데이터 분석 개념도 들어간다. 어떻게 기획하면 20대 여성 독자가 얼마만큼 증가하는 효과를 얻는다는 등의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   향후 계획은. “올해 목표 중 하나가 글로벌 서비스(수출)다. 챗GPT는 모든 언어를 섭렵한다지만 영어로 이용할 때 강점이 있는 서비스다. 띵스플로우도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강점을 갖도록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국내에선 헬로우봇과 스플 외에 커플 전용 애플리케이션 ‘비트윈’까지 세 핵심 서비스에 고성능 AI를 내재화해서 효율을 극대화하고 이용자 만족도를 높일 계획이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ang.co.kr

    2023.02.18 01:31

  •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장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 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영세 개발사와 함께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갖고 실천하는 점을 국내 기업들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플레시먼힐러드코리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게임·웹툰·동영상 등의 유료 콘텐트가 있으면 소비자는 앱의 내부 결제 시스템을 통한 ‘인앱결제’를 해야만 한다. 앱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2020년 이를 의무화해서다. 이 때문에 논란도 거셌다. 특히 콘텐트 개발자들은 플랫폼에 30%씩 내야 하는 인앱결제 수수료 부담이 큰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구글은 자사 앱 유통 플랫폼 ‘구글플레이’에서 유료 콘텐트를 판매하는 개발사들에 받던 인앱결제 수수료를 2021년 7월부터 반값 수준으로 인하했다. 최초 100만 달러(약 12억6000만원) 매출에 15% 수수료를 적용, 이를 초과한 매출에 대해서만 30% 수수료를 받는다. 전체 개발사의 99%가 연매출 100만 달러 미만임을 고려하면 영세 사업자일수록 비용 부담을 덜게 된 셈이다.   7일 만난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창업대학장)는 “구글 측이 ‘앱생태계상생포럼’을 통해 각계 의견을 청취하는 데 열린 자세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변화”라며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가 강한 국내 대기업들이 배울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앱생태계상생포럼은 국내 앱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공유, 앱 생태계의 상생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20년 11월 구글코리아가 발족한 전문가 포럼이다. 장 교수가 의장을 맡은 가운데 정보기술(IT)·법률·심리·언론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 10명이 각 기수 멤버로 참여했다(현재 3기 운영 중). 구글의 수수료 인하는 이 포럼에서 나온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물 중 하나다.   지난해 서울대 교수를 하다 가천대 창업대학장으로 옮길 때 큰 화제가 됐는데. “종합대학에서 창업대학을 따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창업 관련 교육을 하는 게 한국 사회에선 새로운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진화심리학자로서 학생들한테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가르치는 데 힘쓰고 있다.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창업 열기도 확 식지 않았나. “확실히 힘든 시기다. 하지만 지금이 오히려 창업 준비의 적기(適期)다. 혹한기인 지금 아이디어를 잘 발전시키면서 내실 있게 준비했다가 경기가 좋아질 때 치고 나가면 된다. 현재 창업대학 1기 수료생 30명이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앱생태계상생포럼 의장을 3기째 맡고 있다. “처음 구글코리아에서 의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특정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모임이 되진 않을까 해서였다. 초기에 인앱결제 문제를 논하면서 구글 측 반응을 살폈더니 외부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김경훈 구글코리아 사장은 2021년 2월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포럼에 결석하지 않았다. 적당히 축사(祝辭)만 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빽빽이 기록하고 더 고민하면서 포럼에서 나온 얘기를 임직원들과도 계속 공유한다고 들었다.”   포럼에선 어떤 얘기들을 하나. “데이터 문제, 알고리즘의 편향성, 웹 3.0, 스타트업 지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구글코리아 경영진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보면 나도 많이 배운다. 구글 전체에서 이런 포럼을 여는 곳은 한국밖에 없지만, 여기서 나온 얘기가 번역돼 미국 본사로 넘어간다고 들었다.”   운영 성과는. “인앱결제 수수료를 기존 30%에서 15% 비율로 낮추는 데 일조한 게 대표적이다. 과거에 비해 영세 사업자들이 그만큼 구글플레이에 입점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포럼에 참여하는 법학자와 심리학자, 개발자, 뇌과학자 등이 앱 생태계의 진화 방향을 입체적으로 고민한다. 플랫폼 기업과 콘텐트 개발사, 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조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다.”   앱 생태계가 왜 중요한가. 소비자 입장에선 단순히 서비스가 빠르고 사용료가 저렴하면 그만 아닌가. “플랫폼마다 수많은 개발사가 입점해 자기 것을 판매하고, 수많은 소비자가 그걸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개발사는 각종 법적 리스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고, 소비자는 안전하게 개인 정보를 보호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플랫폼 기업이 시간·비용을 들여서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누구나 개발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소비자가 되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 앱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현명하게 앱을 다룰 수 있다.”   인앱결제 의무화는 논란이 거셌다. “나도 처음엔 소비자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봤는데 포럼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으니 (인앱결제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관점을 바꿔 서비스 유지를 위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만 봐도 극소수의 잘나가는 스타 유튜버가 대부분의 수익을 가져가고 대부분의 유튜버는 수익이 거의 없다. 이들도 유튜브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상이 없다면 불공정한 게 아닌가. 이게 평상시의 내 불만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구글 측은 소수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대다수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서버 등의) 유지비로 쓴다고 하더라. 기업 입장에선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랫폼 기업과 영세 개발사 간의 상생도 중요한데. “구글의 경우 구글플레이에 새로 입점한 영세 개발사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을 준 다음 일정 수준 매출이 발생해야 돈을 받기 시작한다. 구글은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창구’(창업+구글플레이)를 통해 국내 소규모 개발사들이 해외에 진출하려 할 때 초기 마케팅 비용 등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글로벌 기업으로서 다른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확실히 갖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배울 점이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3.02.18 00:56

  •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  [국민의힘 전대 ‘2강’] 김기현 당대표 후보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며 “보수 정체성 측면에서도 내가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자신을 ‘승리의 리더’로 정의했다. “2021년 소수 야당 시절 원내대표를 맡은 뒤 20%대였던 당 지지율을 2배 가까이 끌어올리고 정권 교체와 지방선거 승리를 이끌며 2전 2승을 기록했다. 스포츠에 빗대면 A매치 승률 100% 사령탑”이라면서다. 그러면서 “이젠 일하는 여당의 모습으로 총선에서 승리해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이뤄낼 것”이라며 “이를 위해 지금 우리 당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당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3·8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중반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선명성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100% 당원 투표제 도입으로 열성 당원들 표심이 당락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로 떠오르면서 당대표 후보들도 TV 토론과 합동 연설회에서 정통 보수의 정체성을 앞다퉈 강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오랜 세월 보수 정당을 굳건히 지켜온 뚝심으로 세대·지역·계층을 두루 포용하는 당대표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당정일체론’을 거듭 주장하고 있는데. “당정 관계는 ‘밀당 부부’에 비유할 수 있다. 당과 정부는 운명 공동체다. 잘되면 같이 잘되고 잘못되면 같이 잘못되는 사이다. 별거 중인 부부 관계가 아니란 뜻이다. 더 나아가 당정이 건강한 부부 관계로 거듭나려면 때론 밀당도 필요하다. 한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각에선 당이 ‘용산 출장소’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적잖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자꾸 대통령의 당무 개입을 지적하는데 참 답답한 노릇이다. 애당초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란 용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헌 8조를 보면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당의 정강 정책을 국정 운영에 잘 반영하고, 당은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협조하게 돼 있다. 민심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대통령이 집권 여당과 머리를 맞대는 걸 어떻게 당무 개입이라 할 수 있나.”   윤 대통령의 명예 대표 추대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헌상으론 대통령이 명예직을 갖는 게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과 당은 동지적 관계다. 어떤 직책을 따로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부부 관계에서 남편이면 남편이고 아내면 아내지 명예 남편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나.”   김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윤핵관’이 득세할 것이란 지적도 끊이질 않는다. “오히려 윤핵관이 왜 나쁜지 되묻고 싶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도 ‘가신’이라 불린 측근 그룹이 있었는데, 그럼 그들도 다 나쁜 사람인가. 문재인 정권 때도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대통령 주변에 많았는데 그들도 무조건 찍어내야 할 대상인가. 오로지 자신들 필요에 따라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나쁜 프레임일 뿐이다. 대통령에게 믿을 만한 정치적 동지가 있다면 그게 더 바람직한 일 아닌가.”   김 후보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낮은 수도권 인지도가 약점으로 거론되는 데 대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인지도가 한 자릿수에 그쳤지만 지금은 50% 턱밑까지 상승했다. 보수 정체성은 물론 외연 확장성 측면에서 내가 적임자란 뜻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총선 승리는 당대표의 수도권 인지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도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리더십이 핵심”이라며 “나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그 리더십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내년 총선의 공천 원칙이 있다면. “오롯이 후보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상향식 공천을 통해 최상의 후보를 뽑을 것이다. 다행인 건 우리 당이 그동안 수차례 공천 룰을 개선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공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도를 바꾸는 방안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공천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오히려 당이 총선 과정에서 대통령 의견을 듣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 차원에서 일반 당원들 의견도 경청하는데 1호 당원인 대통령의 생각은 당연히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 의사도 듣지 않을 거면 집권 여당을 왜 하나. 대통령뿐 아니라 당의 원로들과 당 외곽에서 우리 당을 사랑하는 분들의 고견을 충분히 듣고 최적의 공천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대선 이후 당내 많은 분란이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그런 만큼 지금은 당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전대 과정에서 ‘연포탕(연대·포용·탕평) 정치’를 계속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당대표가 되면 좋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당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뒤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 과제에 집중할 생각이다.”   김 후보는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선 “민생 현안만큼은 여야가 최대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며 “대표가 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야당 대표와 회동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야당과 싸워야 할 땐 적극적으로 싸울 것이다. 협상의 결과는 상대방에게 빌어서 얻는 게 아니라 싸워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후보의 정체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안연대’ 가능성도 내비쳤는데. “당대표가 아닌 당 소속 의원 자격이라면 안 후보와도 얼마든지 뜻을 같이할 수 있다는 취지다. 같은 당 의원인데 당의 발전과 총선 승리, 나아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연대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안 후보가 당대표가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문재인·박원순 당시 후보들과 연대한 이유를 안 후보는 우리 당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 당은 곧 사라질 정당이란 말까지 하지 않았나. 앞뒤 행적이 다른 분이 당대표가 돼선 안 된다.”   남은 기간 경선 전략은. “상품에 비유하면 나는 신선함이 강점이다. 명시적인 성과도 있다. 반면 상대 후보는 선거 때마다 출마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대표가 되면 당이 어떻게 바뀔지 당원 한분 한분께 소상히 보여드릴 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게 선거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당심에 호소할 계획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18 00:01

  •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  [국민의힘 전대 ‘2강’] 안철수 당대표 후보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은 수도권에서 승패가 갈릴 것”이라며 “내가 대표가 되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당대표 후보 중 유일한 수도권 3선 의원인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를 필두로 선출직 최고위원 전원이 수도권 지역구”라며 “우리 당도 3·8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 전략에 대항할 필승 진용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당대표 본경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후보 간 신경전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 15일 첫 TV 토론에서도 김기현 후보가 ‘정통 보수의 뿌리’를 강조하자 안 후보는 ‘수도권 대표론’으로 응수하며 팽팽히 맞섰다. 최근엔 친윤계 핵심 인사들이 군불을 지핀 ‘당정일체론’이 ‘대통령 명예대표론’으로 확산되며 분위기가 한층 과열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전당대회는 윤심에 맞는 후보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라며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대통령 명예대표론이 논란을 빚고 있다. “우리 당헌상 대통령은 명예직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전당대회 중에 이런 말이 불거지면 자칫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국민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 또 대통령을 전당대회에 끌어들이는 게 과연 내년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겠느냐. 이번 전당대회는 민심에 호소해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다. 나를 포함한 당대표 후보 모두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 후보는 컷오프 1위라고 주장한다. “컷오프 결과는 철저히 비공개 사안이다. 사실 확인이 안 된 보도를 활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증거를 내면 선거법 위반이고 못 내면 허위사실 유포다. 어느 쪽이든 당대표 후보로서 매우 부적절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미발표된 컷오프 결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에 장수가 병사 앞에서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듯 당대표도 위기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를 건네고 싶다.”   대통령 탄핵과 탈당 공방도 오가는데. “패배가 두려워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전략적으로 당원들을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집권 여당의 당대표 후보라면 탄핵 운운하며 흑색선전으로 당의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면 안 된다. 이런 막말과 실언은 총선에도 악영향만 미칠 뿐이다.”   김 후보는 지난 12일 “(안 후보는) 그동안 민주당과 결이 같은 주장을 펴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안 후보의 보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 후보는 이어 “지금은 정권 초기여서 대통령 눈치를 볼 수 있겠지만 대표가 되고 나면 이 장관 탄핵처럼 대통령에게 칼을 겨눌 수 있다는 걱정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탄핵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 장관 탄핵에 대한 입장은. “나는 지난해 12월 민주당의 이 장관 해임건의안에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번 탄핵소추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탄핵 추진은 ‘이재명 대표 수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국민이 부여한 탄핵권을 이 대표 개인 비리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 공세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민주당의 이런 행태는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선 투표 가능성도 큰데. “3월 8일 전당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날 반드시 1등을 하겠다. 자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당대표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보나. “첫째는 수도권 민심 파악, 둘째는 승리의 경험, 셋째는 중도층과 2030세대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수도권 선거는 많아봤자 5%포인트 이내에서 승부가 갈린다. 나는 20~30% 차이로 이겨 왔는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중도층과 2030세대의 고정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중도층 이탈로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중도층 표를 다시 가져올 수 있는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했는데. “당의 혁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당대표가 되면 공천 관리에만 집중하고 공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당대표의 사심이 들어간 공천은 총선 패배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당대표가 먼저 공천 불개입을 엄중하게 표명해야 정실 공천도, 외압 공천 시비도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 또 당이 원한다면 전국의 어느 험지든 가리지 않고 출마하겠다. 당대표가 먼저 희생을 감수해야 당을 결집시키고 민심도 얻을 수 있다. 만약 당에서 이재명 대표 지역구에 출마해 이 대표와 맞붙으라면 기꺼이 그러겠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3대 개혁을 추진하겠다. 첫째는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만들 거다. 당에 반부패 정치혁신특위를 설치하고 정치개혁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시행해 반부패 운동을 선도하고 확산시키겠다. 둘째는 ‘미래 대 과거’ 구도를 갖추겠다. 민간인 전문가들까지 포함한 인공지능(AI) 정치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챗GPT 대국민 소통 서비스’처럼 민주당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스마트 정당을 구축하겠다. 여의도연구원에 청년 정치 리더십 스쿨도 개설할 생각이다. 셋째는 ‘실용 대 진영’ 구도를 통해 극단적 진영 세력의 포퓰리즘 정치와 맞서 싸우며 개혁·실용정당을 발전시켜 나가겠다.”   남은 기간 어떤 각오로 임할 건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오세훈 후보를 도와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연 데 이어 지난해 대선 때는 윤석열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거대 야당이 독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정권 교체를 완성하는 길은 내년 총선에서 우리 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끝내겠다는 결자해지의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원들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최현목 기자 choi, hyunmok@joongang.co.kr

    2023.02.18 00:01

  •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지난 7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대일 관계는 반일이나 친일이 아닌 일본을 적극 활용하는 용일(用日)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에 빠졌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양국 정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특히 관계 개선의 선결 조건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열린 양국 외교부 국장급 협의에 이어, 오는 13일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를 계기로 한·일 차관이 만난다. 17~19일 독일에서 열리는 뮌헨안보회의에서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방위적으로 해법 찾기에 나선 것이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주요 외교 정책 중 하나다. 특히 상반기 방미를 앞두고 이 문제를 매듭지어 한·미·일 3각 공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한·일 정상간 셔틀 외교를 복원하겠다는 게 윤 대통령의 기대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청국 자격으로 참가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강제동원 협상은 기금 조성에 일본 기업의 참여 여부를 놓고 양국 이견이 팽팽하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를 만나 현재 진행 중인 강제징용 문제 협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들어봤다.   강제징용 해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양국이 협의하고 있는 방안은 제3자 변제다. 다시 말해 한국이 정부 산하 재단(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대신 변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의 수혜 기업 등이 참여한다. 관건은 미쓰비시 중공업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같이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고용했던 기업들의 참여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상으로 이 문제가 매듭지어졌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들 기업의 참여를 관철하기 위해 협상력을 집중하고 있다.”   양국이 타협안을 도출하지 못하면 결국 협상은 결렬되는 것 아닌가. “현재로썬 협상 타결 여부를 전망하기 어렵다. 단지 이전보다 일본 내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있다. 2013년 신일철주금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서울고법 판결이 나왔을 때 일본 여론은 싸늘했다. 한국이 이미 끝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트집을 잡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동남아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수 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실질적인 소송 당사자가 1000여 명밖에 되지 않고, 이 가운데 증거 부족 등으로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200명 정도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이미 시효 3년이 지나 새로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다. 금전적으로 봤을 때 200억원 정도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일본이 끝내 미쓰비시 중공업 등의 배상금 참여를 거부할 것으로 보는가. “일본은 실용주의 외교를 중시한다. 일본 정부는 협상의 성공 여부에 따른 손익을 계산할 것이다. 특히 한·일 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고심은 깊을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등 최고위층의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이다.”   국내 여론도 만만찮다. 전범 기업의 참여가 없으면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도 있는데. “우리 정부도 이와 관련해 또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최대한 공감하는 배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 생각으로는 지원재단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경우 대법원의 판결대로 일본 기업의 국내 재산을 매각해 현금화해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또 다른 과제다.”   양국은 배상과 함께 사과 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하고 있는데. “여기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일본 측이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와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을 계승하겠다는 선에서 정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협상에서 보듯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이 문재인 정부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의 불필요한 악화로 인해 글로벌 외교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대미 외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일 관계는 단순한 양자 관계라기보다 한·미 관계 속에 숨은 히든 코드로 볼 수 있다. 한·일 관계가 나쁠 때 한·미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한·일을 하나의 세트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일본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외교적 자원이자 공간이다. 제대로 활용하면 도쿄는 워싱턴에 긴밀히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베이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대북 관계에서도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우리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런 인식은 현 정부 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일본에 대해 친일과 반일 구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9세기 패러다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반일을 고집하면서 전략적 이익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면 반일도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친일이나 반일 대신 실용적으로 일본을 활용하는 ‘용일(用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보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아베 신조 정부 때부터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전략적 비중을 많이 낮춘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선 한국의 지난 정부가 대립각을 세웠기에 협력의 공간이 좁아졌다고 탓한다. 그러면서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을 배제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틀을 놓고 봤을 때도 한국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반도는 일본 외교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외교의 1순위인 미국의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일본도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3.02.11 01:09

  • 인간관계 오래 가려면 ‘배터리 스와핑’처럼 교류 활발해야

    인간관계 오래 가려면 ‘배터리 스와핑’처럼 교류 활발해야

     ━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인문학자 2019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로스트 인 스페이스’에서 로빈슨 가족은 자원의 고갈과 오존층 파괴로 이주할 만한 장소를 찾아 우주로 떠난다. 어떤 미지의 장소에 불시착하여 우주선을 바다에 빠뜨려버리고 추운 밤을 맞이한다. 바다마저 꽁꽁 얼어붙는 절대 위기의 순간 목숨 걸고 한 행동은 우주선에서 리튬이온전지 팩을 꺼내오는 것이었다.   이렇듯 서로 다른 기기를 동일한 전지로 사용한다는 배터리 스와핑(Battery Swaping)이 전기차에서 이미 상용화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사물이 배터리로 움직이는 사물 배터리(BoT·Battery of Things) 시대다. 휴대용 전자기기에 탑재되는 소형전지뿐만 아니라 전기차, 에너지저장시스템용 중대형전지까지 수많은 사물의 동력원이 되고 있는 전지의 원리를 살펴보자.   #멈추지 마, 계속 왕래하는 이온   마이클 패러데이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사진)는 고대 그리스어 ‘가다(eimi)’라는 동사의 현재분사 이온(ion)을 자신이 발견한 입자에 이름으로 붙였다. 현재분사는 동작의 진행상(aspect), 그러니까 ‘가는 중’이나 ‘계속 가고 있는’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온은 패러데이의 물 전기분해 실험에서 두 개의 전극을 향해 ‘계속 가고 있는’ 입자였다. 이후 이온이 두 물질 사이를 이동하면 전류도 흐른다는 사실이 이탈리아 과학자 알렉산드로 볼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온의 이동을 돕는 전해질도 준비되었다. 전해질 속에 아연과 구리를 담그면 이온화가 높은 아연은 산화 반응이 일어나 전자를 내놓는 반면, 이온화가 낮은 구리는 환원 반응이 일어나 전자를 얻었다. 전자가 음극 아연에서 양극인 구리로 이동하면서 전류가 생성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전지는 전해질을 통해 이온화 과정을 유도하고 거기서 생기는 전자를 이용해 전류를 발생시킨다. 이 전지를 ‘볼타 전지’라 불렀고 전류의 전압을 측정하는 단위인 볼트(V)도 볼타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볼타 전지는 전압이 약해서 한 쌍으로 된 아연·구리 전해질을 몇 개씩 겹겹이 쌓아올려야 했다.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휴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 휴대에 편한 1.5볼트 건전지는 음극에 아연통, 양극에 탄소막대·망간 그리고 그 사이에 전해질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아연이 모두 산화되면 더 이상 전류가 발생되지 않는데 구리로 간 이온이 더 이상 아연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회용 전지는 이온이 그 행위를 멈추면 충전되지 않아 버려질 수밖에 없고 그것을 사고 갈아 끼우는 사람을 귀찮게 했다.   재충전용 전지가 곧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온이 두 물질 사이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는 없을까? 이온의 계속적인 진행은 전지가 산화와 환원을 반복함을 의미한다. 산화란 어떤 물질이 산소를 흡수하여 전자를 잃고 이온화된 것이다. 그래서 산화된 물질이 환원되려면 잃었던 전자를 흡수하고 이온이 그 물질로 다시 이동하면 된다. 이렇게 양극에 있던 이온이 음극으로 이동하면 전지가 충전되고 반대로 음극의 이온이 양극으로 돌아가면 전지는 방전된다. 이온이 음극으로 한 번만 가는 전지가 1차 전지라면, 음극과 양극을 계속 오고가면 2차 전지다. 현재 진행이 가능한 이온 교환은 곧 재충전용 납축전지(1859년), 니켈-카드뮴 전지(1899년)로 실현됐지만 이온의 진행 횟수가 많아지면 전지의 성능도 크게 감소되다가 그 수명을 다한다.   위에서 말한 2차 전지는 일정한 횟수 이상 충전되면 못 쓰게 된다. 전지의 충전이 많을수록, 그러니까 이온이 두 개의 전극을 오가는 횟수가 계속될수록 충전 용량이 줄어들다가 아예 못쓰게 되는 것이다. 전지의 충전 횟수는 충전 사이클로 말하는데, 1회 충전되고 방전된 후 다시 충전되는 게 한 사이클이다. 충전 사이클이 많으면 많을수록 충전되는 전류의 양은 감소한다.   #무엇을 기억하니-메모리 효과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메모리 효과’라는 재미있는 생각이 도입되었다. 그러니까 전지가 어느 특정 수준까지 충전되고 방전을 시작하면 전지는 바로 이전 충전 용량만 ‘기억’하여 다음부터는 그 수준 이상을 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로 이전에 전지가 60%까지만 충전되었다가 방전됐다면 마치 전지가 이것만 기억하는 듯 그 수준 이상을 넘지 않고 또 그것보다 적은 용량이 충전되면 그것만 기억해서 용량은 계속 줄 수밖에 없다.   2차 전지는 기억 효과 때문에 수명이 오래가지 못한다. 이온이 두 전극 사이에서 더 많이 오고간 추억도 있었을 텐데 전지는 하필이면 왜 줄어든 용량만 기억하는 것일까? 전지가 다시 일정 충전 용량을 회복하려면 일단 완전히 방전되도록 한 후 다시 충전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전지는 또다시 새로운 기억을 하면서 이전의 기억을 잊고 새 출발 한다.   드디어 1976년 빈번한 이온 교환에도 성능이 크게 감소되지 않는 전지가 영국 태생의 미국 화학자 스탠리 휘팅엄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전지는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가볍고 이온화 경향이 가장 강한 리튬을 사용했다. 하지만 휘팅엄의 리튬이온전지는 물에만 넣어도 바로 반응이 일어나 너무 불안정했을 뿐만 아니라 화재까지 자주 일어났다.   그런데 1980년 금속 산화물과 함께 있을 때 고전압을 발생시키면서도 안정적인 리튬이온전지가 독일 태생의 미국 과학자 존 굿이너프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전지는 양극, 음극, 분리막 전해액으로 구성돼 있으며 양극에는 리튬코발트산화물이, 음극에는 리튬이 사용되었다. 분리막을 통해 양극에 있는 리튬코발트산화물과 음극에 있는 리튬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액체 전해질을 통해서는 리튬이온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했다.   양극의 리튬이온은 외부에서 전압을 받으면 분리막을 통과해 음극의 리튬으로 들어가고 양극에서 분리된 전자는 도선을 통해 음극의 리튬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충전된 전지는 전류를 기계장치에 내어놓으면서 방전이 시작된다. 음극에 있던 이온이 다시 분리막을 통과해 양극으로 이동하고 음극의 전자도 도선을 통해 양극으로 가서 다시 결합한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가 상용화되기에는 아직까지도 부피가 크고 불안정했다. 1985년 작고 가벼운 리튬이온전지가 일본의 요시노 아키라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번에는 음극의 리튬금속이 석유코크스로 대체되어 이전보다 안정화되었다. 결국 리튬이온전지가 소니의 ‘워크맨’에 장착되면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후 충전용 전지가 소형전자기기의 1차 전지를 대체하면서 2차 전지의 본격적인 시대가 열렸다.   2019년 노벨화학상은 충전용 전지가 상용화되는 데 공로를 세운 세 명의 과학자 스탠리 휘팅엄, 존 굿이너프, 요시노 아키라에게 돌아갔다. “그들이 재충전이 가능한 세상을 창조했다”라는 노벨위원회의 멋진 찬사가 말해주듯, 충전용 전지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했다. 충전용 전지가 인간의 이동성을 증대시켰고 어디를 가든 전지를 재충전하는 사물 배터리 시대를 실제적으로 연 것이다.   리튬이온전지는 다른 2차 전지에 비해 메모리 효과가 적을 뿐만 아니라 고에너지밀도를 갖고 있다. 전지가 저장할 수 있는 전기에너지양은 전지의 용량에 전압을 곱한 것인데 이것을 결정하는 핵심 소재가 양극 소재다. 리튬이온전지는 양극에 니켈·코발트·망간 산화물 소재들과 리튬이온을 주로 사용하고 음극에 흑연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실리콘이 음극 소재로 거론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리콘 음극재의 단위 에너지 용량이 흑연보다 약 10배가량 높다. 하지만 부피 변화가 흑연보다 크기 때문에 부피 변화를 줄이려는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상용화된다면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혁신적으로 늘리는 차세대 소재가 될 것이다.   #누가 힘세고 오래갈까-리튬이온전지   아무리 좋은 리튬이온전지라 해도 에너지밀도가 높은 만큼 위험성도 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지의 양극과 음극 사이에는 이온을 잘 이동시키기 위한 전해질이 있는데 가연성인 데다가 액체라 예상치 못한 이온의 흐름이 만들어지면 열 생성량이 순간적으로 높아지면서 매우 불안정하게 되어 화재나 폭발이 발생한다. 우리로 치자면 사람은 좋은데 격이 없이 너무 가깝게 지내다 보니 가끔 버럭 하는 성질을 지닌 듯하다.   액체 전해질의 대안으로 고체로 된 전고체전지가 거론되고 있다. 전고체전지는 폭발의 위험성이 낮고  0℃ 이하의 저온이나 60~100℃ 고온에서 액체전해질보다 전도 성능이 향상되는 장점이 있다. 또한 리튬이온전지에 비해 대용량을 구현하여 전기차 배터리로도 알맞다.   또한 배터리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충전 시 리튬이온은 전지에 골고루 퍼져 이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음극 표면의 특정한 곳에 ‘덴드라이트’가 증식하면서 사람의 종양처럼 쌓이게 된다. 덩이가 커진 덴드라이트는 분리막을 뚫고 양극을 강타해 전기 쇼트를 일으킬 수 있다. 사람의 악성 암세포처럼 리튬이온전지의 덴드라이트는 결국 전지가 폭발하게 만든다.   전지는 두 전극 사이의 이온이 계속 오고가는 원리를 활용한 장치다. 이것을 발견하고 고대어의 ‘계속 진행하는’이란 이름을 붙인 패러데이의 통찰이 섬뜩하다. 두 전극 사이에서 이온의 계속된 진행이 없을 때 전지는 일회용이다. 물론 이온의 계속된 왕래가 있어도 좀 못한 수준을 기억하면 전지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처럼 최고의 전지가 되어도 이온이 너무 들끓는다거나 한쪽에만 증식되면 폭발의 위험성을 지닌다.   사람 관계가 그렇듯 일회용 전지가 되지 않으려면 왕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명이 오래가려면 항상 새롭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기억하며, 갑자기 폭발하지 않으려면 버럭 들끓거나 한쪽에만 치우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올 한해는 이온 교환이 안정적인 전지를 서로서로 주고받는 ‘배터리 스와핑’이 있었으면 한다. 그것을 위해서 계속 왕래할 것. 좋은 추억을 만들어 기억할 것. 건강을 최대한 유지할 것. 버럭 화내거나 혼자 골몰하지 말 것.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계속 만나는 좋은 관계가 되려면 전지처럼 해보자.   김동훈 인문학자. 서양고전학자·철학자.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희랍과 로마문학 및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희랍어와 라틴어 및 고전과 인문학을 가르친다. 인문학의 서사를 담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퓨라파케’ 대표. 『인공지능과 흙』 『브랜드 인문학』 『키워드 필로소피』  『별별명언』을 썼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을 번역했다. 

    2023.02.11 00:20

  • “졸업하기 싫어?” 교수 갑질…‘공노비’ 전락 대학원생의 눈물

    “졸업하기 싫어?” 교수 갑질…‘공노비’ 전락 대학원생의 눈물

     ━  인권 사각지대 K-대학원   공노비.   대학원생 박모(31)씨는 이렇게 불린다. 뜨내기 같은 기간제 교사에서 벗어나, 어엿한 정교사가 되고 싶었다. 기술교사라는 꿈을 향해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려 한국교원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연고가 없는 충북 청주로 삶의 터전까지 옮겼다. 그러나 그의 꿈은, 그저 ‘꿈’에 그쳤다. 입학 첫 학기. 지도교수를 배정받은 후 그의 꿈은 물거품이 돼 흘러내렸다.   한국교원대학교 이 모 교수의 수업 강의평. 제보자 제공 지도교수 이모씨는 대놓고 학생들을 ‘공노비’라고 불렀다. ‘집에 컴퓨터를 설치해 달라’, ‘자료를 집으로 가져와라’는 부탁은 예삿일이었다. 교수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선 사실상 365일 24시간 호출 대기 상태였다. 강의실에서의 차별도 덤으로 따라왔다. 지도교수는 성별로, 출신 대학으로, 부모님의 직업으로 학생을 차별했다. 박씨는 내세울 게 없었다. 박씨를 비롯한 학생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졸업하기 싫어?”라는 협박과 횡포가 되돌아왔다. 수업마다 “맘에 안 들면 갑질로 신고하라”며 으름장을 놓는 일이 반복됐지만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참을 수 없었다. 부당대우에 불만을 제기했다. 돌아오는 건 ‘졸업 불가’ 통보와 실습실 출입 금지 조치였다. 박씨는 “올해 임용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지도교수의 갑질로 졸업요건을 갖추지 못해 2차 시험에 응시조차 못 했다”며 “교사의 꿈을 위해 진학한 대학원에서 이런 대우를 당하고 졸업도 못 하니 너무 허탈하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결국 업무방해, 횡령 등의 혐의로 지도교수를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당한 갑질은 입증할 방법이 없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대학생 때 죄 많이 지어 가는 곳’ 자조   ‘대학생 때 죄를 많이 지어서 가는 곳’이 대학원이요, ‘21세기 현대판 노예’는 대학원생이다. 농담 같은 말이라고 한다면, 아주 오래된 농담이자, 현실로 본다면 대학원생들에게는 진담이다. 전공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사실상 교수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곳이 ‘K-대학원’의 현실. 교수가 제자에게 인분을 먹이고(2015년), 제자 뺨을 때렸다는 건(2022년)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다. 그 밑에는 억압과 착취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국내 최고의 연구대학인 카이스트 대학원에서만 사적으로 교수에게 노동력을 제공했다는 대학원생이 6.2%인 것으로 조사됐다.   전 세계 대학원 중에서도 유독 ‘K-대학원’이 인권침해에 취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입학하는 순간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지도교수가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컨트롤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지도교수의 승인 없이는 학위 취득 여부를 결정하는 논문이 통과될 수 없다. 때문에 학업 범위를 넘어서는 사적 요구를 거절하거나 불이익을 당해도 고발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이른바 ‘자발적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최동혁 카이스트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지도교수가 전적으로 갖고 있는 학위 취득 여부 결정권은 강력한 무기”라며 “졸업심사위원회가 있지만 유명무실하고, 지도교수에게 권력이 쏠려있다 보니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지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영국·독일 등 해외 대학원의 경우 독립기관인 졸업심사위원회의 권한이 강력하지만, 국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제주대학교에서도 지도교수의 갑질로 논문 심사 신청조차 받지 못했던 사례가 등장했다.   가까스로 졸업하더라도 지도교수의 ‘지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석·박사 졸업생의 경우 학위를 취득해 학계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학계 인맥을 무시할 수 없다 보니 악순환이 된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대학원 특성상 ‘누구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중요하고, 이를 중심으로 학계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며 “학생들 입장에서는 교수에게 복종하거나, 기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우리나라 대학원생의 지위는 이중적이다. 학생이자 근로자다. 연구실에서 공부와 노동(혹은 시중)을 겸한다. 이러한 이중적 지위는 인권 사각지대를 만들고 만다. 최 회장은 “국내 대학원은 교수가 사장님, 대학원생은 직원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며 “대학은 연구실 등 인프라만 제공하고, 모든 권한을 지도교수에게 위임해 방관하고 있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미국·프랑스 등 해외의 경우 학교가 직접 학생과 고용 관계를 맺고, 교수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며 감시·견제하도록 운영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대학원생의 ‘밥줄’인 연구비도 교수가 쥐락펴락하게 된다. 인건비에 반영되는 ‘연구 참여율’을 교수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서다. 최 회장은 “연구 과제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도, 이에 따른 인건비도 모두 교수의 주관적 판단하에 결정되기 때문에 업무 과중이나 의도적 배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이공계 대학원생의 경우 직장인 성격이 강한데, 교수의 권한 남용으로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2022년 카이스트 대학원 연구환경실태조사에 따르면 카이스트 대학원생의 연구 평균 시급은 7644원. 지난해 최저시급인 9160원보다 1516원이 모자란 액수다. 카이스트 대학원 재학생 A씨는 “국내 최고의 연구대학에 재학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자부심은 편의점 알바생보다 못한 대우에 꺾이고 만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의 한 사립대 대학원 재학생 B씨는 “일과가 끝난 후 지도교수에게서 나를 찾는 전화가 올까 매일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교수가 사장님, 대학원생은 직원 분위기”   부당대우를 받는 대학원생들의 하소연은 이내 벽에 부딪혀 메아리가 된다. 부당대우를 신고하고 상담을 받고 싶지만 그런 기관조차 마땅치 않다. 2012년 서울대학교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에 인권센터가 들어서고, 대학원생 권리장전이 확산됐다. 하지만 실상은 유명무실하다. 박씨 역시 학교 교학처 등의 문을 두드렸으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최 학생회장도 “지난해 뺨을 때린 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가해자 교수와 동일한 학과의 교수가 인권센터 보직을 맡고 있어 상당히 곤란했다”고 설명했다. 이우창 전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전문위원은 “인권센터와 인권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갖춘 대학이 드물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다”며 “대학원은 학부처럼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인 분위기도 아닐뿐더러 각자의 학과, 랩실에 분리돼 있어 서로의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걸림돌”이라고 전했다. 장다혜 연구위원은 “인권센터 등이 설치된 것은 괄목할만한 변화였지만, 기존 상담센터 인력의 업무만 가중되는 등 실질적 시스템은 개선되지 않았다”며 “인권위원회 구성원에 학생위원을 포함해 구성을 다양화하고, 법적 처벌 이외의 징계 수위도 현실화하는 등 아직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분석했다.   대학과 정부는 방관하는 모양새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열악한 국내 대학원의 원인으로 대학과 정부의 무관심이 꼽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은 양적 팽창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질적 향상에는 소홀했다. 정부 또한 학부 교육에는 지원과 평가를 아끼지 않았지만 지식 생산의 허브인 대학원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논문 등 실적에만 매달리는 성과주의에 매몰됐고, 인권침해와 부당대우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엄미정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학원은 연구기관이기 이전에 연구자를 양성하는 기관인데, 원생들을 어떻게 훌륭한 연구자로 길러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교수들이 일반 연구원이나 출연연구기관과 동일한 수준의 성과를 내는 것에만 매달린다”고 답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성과주의에 매몰된 대학원은 쇠퇴로 치닫는다. 이우창 전 위원은 “지금 20대들은 대학원을 마치 ‘X소기업’(중소기업을 비하하는 용어)처럼 바라보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며 “인권침해를 당해 구제를 요청해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거나, 2차 가해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끊임없이 공론화되는 상황에서 대학원 진학을 꺼리는 건 당연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최근 수년간 대학원 정원미달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대학과 교수들이 의식적으로 교육·연구문화 선진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대학원 진학 기피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공노비’가 수두룩한 K-대학원의 현실은 우수 연구인력의 해외 유출을 부추긴다는 진단도 나온다.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2~2021년) 해외로 떠난 이공계 유학생은 34만6239명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학령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대학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지금 학계의 중추 역할을 하는 대학원생까지 사라지면 국가 연구·개발 경쟁력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학원이 교육기관, 연구기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그 실태를 점검하는 곳은 있는가. 엄 위원은 “아니다. 전무하다”고 말했다. 그는 “늦었지만, 대학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2.11 00:02

  • “이용만 해 먹고…” 거인병 몰라 희생된 2m5㎝ ‘코끼리 센터’

    “이용만 해 먹고…” 거인병 몰라 희생된 2m5㎝ ‘코끼리 센터’

     ━  비운의 농구 스타 김영희   농구인 김영희(1963~2023)씨가 6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2월 1일자 부음 기사를 보고 잠시 멍했다. ‘코끼리 센터’라는 별명을 얻으며 1980년대 여자농구 인기에 한몫 했던 그는 ‘거인병’이라 불리는 말단비대증과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오랜 세월 외로운 투병 생활을 했다.   나는 2016년 1월, 김영희씨가 혼자 사는 경기도 부천의 다세대 월세방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들을 들려줬다. 우리는 금세 “누님” “동생”으로 부를 만큼 친해졌다. 그는 몸도 아프지만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다’는 배신감에 더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밝고 맑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에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말을 재미있게 했고, 다른 사람 흉내도 잘 냈다. “생긴 건 이렇지만 마음은 솜사탕이랍니다. 호호호”하면서 짐짓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짠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김영희와 함께 대한민국 구기 사상 첫 은메달을 따낸 박찬숙 여자농구연맹(WKBL) 경기운영본부장은 “영희는 늘 먼저 전화해서 ‘언니, 도와줘서 고마워요’라며 안부를 묻던 싹싹한 친구였어요. 두 달 전에 넘어지면서 목뼈가 부러졌고, 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해서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고 하네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놀리는 꼬마들 사탕 나눠주며 친구 돼   김영희씨가 2002년 10월 모교인 숭의여고를 방문해 슈팅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포토] 경남 언양에서 태어난 김영희는 아주 작은 신생아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손녀딸이 너무 작아서 걱정이니 정상적으로 잘 크게 해 주세요”라고 백일기도를 드릴 정도였다. 다섯 살부터 키가 쑥쑥 크고 몸도 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1m65㎝) 어머니(1m63㎝)도 보통 체격이고, 남동생(1m78㎝)도 평균보다 조금 큰 정도인데 김영희는 중학교 2학년 때 1m85㎝가 넘었다고 한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부산 동주여중 농구부에 들어간 김영희의 인생은 박찬숙과 운명처럼 엮여 있다. 70~80년대 여자농구는 화장품업계 라이벌 태평양화학과 한국화장품의 맞수 대결이 불을 뿜었다. 숭의여고 1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가 된 박찬숙(1m90㎝)을 영입한 태평양화학은 무적이었다. 한국화장품은 박찬숙과 맞설 장신 센터를 발굴하기 위해 전국을 뒤졌고, 동주여중의 김영희를 점찍었다.   그런데 그 시절 부산에 온 실업배구팀 코치가 김영희를 본 뒤 서울로 ‘보쌈’을 해 버린다. 김영희에게 배구 기본기를 가르치던 코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를 경찰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진을 받게 했다. 의사가 “이 아이는 그냥 놔 두면 앞으로 얼마나 더 클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술을 받으면 성장을 멈추게 될 겁니다”고 말했다는 게 김씨의 증언이다. 코치는 이후 김영희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거인병 증세가 나타났는데도 말이다.   몇 달 뒤 김영희는 다시 동주여중으로 잡혀와 농구를 계속 했고, 숭의여고로 진학해 박찬숙의 후배가 된다. 2m2㎝까지 자란 김영희는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1984년 농구대잔치에서 태평양화학을 누르고 팀에 우승을 안긴다. 본인은 득점왕·리바운드왕 등 5관왕에 오른다.   김씨가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죠. 그런데 거울로 몸과 얼굴을 보면 이건 여자가 아닌 거야. 그 뒤로 3년 동안은 거울을 안 봤어요. ‘운동을 잘하라고 하늘에서 이런 몸을 준 모양이다’고 속으로 정리를 했죠.”   화려한 시절도 잠시, 거인병이 진행되면서 김영희는 87년에 쓰러져 뇌종양 수술을 받는다. 은퇴한 그는 합숙소를 나와 세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람들은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이고 엄청 크네. 저게 남자야 여자야?” 그런데도 2m5㎝까지 커진 김영희는 자신이 거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2002년 10월 21일, 중앙일보 문병주 기자가 ‘키가 커서 슬픈 전 농구대표 김영희’라는 제목으로 김씨의 거인병 투병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김영희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KBS에서 그에게 정밀진단을 권했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통해 말단비대증임을 확인한 그는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장애인 시설 봉사   1984년 농구대잔치 신용보증기금과의 경기에서 골밑 슛을 시도하고 있는 김영희. [중앙포토] “감독·코치님들은 왜 병원에 가 보자는 얘기 한 번 안 하셨나. 키 크다고 이용만 해 먹고…. 지금도 묻고 싶어요. 왜 나를 그렇게 학대했는지. 증상이 심해져서 체중이 130㎏까지 나갔을 때는 살찐다고 물도 못 먹게 했다니까요.”   그 후 김영희는 서울 제기동 집에만 틀어박혔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구름아, 나랑 친구 하자는데 어디로 가니’라며 혼잣말을 했고, 독한 양주를 병째 마시고 밤에는 속이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유일한 친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마저 2년 뒤 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린 김영희는 7개월간 곡기를 끊었다. “누나까지 가면 난 어떻게 살아”라며 울부짖는 남동생과 친어머니처럼 돌봐준 지인의 정성에 그는 마음을 열었다. 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기로 했다. “거인 아줌마”라며 놀리던 꼬맹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눠줬고, 호박죽을 쒀서 독거 어르신을 대접하기도 했다. 파주에 있는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네’라며 삶의 의지를 추스르기도 했다.   말단비대증은 성장호르몬 이상으로 인해 신체와 장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병이다. 코·입·손발 등 신체 끝부분이 더 심하게 커진다고 해서 말단(末端)비대증이다. 씨름 천하장사를 거쳐 격투기 선수로 뛴 최홍만(2m17㎝)도 2008년 말단비대증의 원인이 되는 뇌하수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생전에 김영희씨는 최홍만에게 “빨리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 받아 봐라. 나처럼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신세 되지 말고”라며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스포츠에서 키가 큰 건 장점이지만 지나치게 큰 사람은 동작이 굼뜨거나 기본기가 떨어진다. 남모르는 질병이나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혹독한 훈련, 호기심 어린 시선, 원인도 모르는 병마로 힘들어하다 쓸쓸히 경기장을 떠난 ‘골리앗’ ‘기중기’ ‘코끼리’들이 있었다.   박찬숙 위원장은 “영희는 나보다 키는 컸지만 기본기가 확실하게 잡힌 선수가 아니었어요.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그 힘든 운동을 했으니 얼마나 고통이 많았을까요. 영희가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한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신체 자본’에 소모된 김영희…몸이 쓰는 한 편의 시 못 봐 「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체육철학)  스포츠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문화 장르다.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올라 하늘의 문턱을 뛰어넘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손흥민의 정교한 드리블, 허웅의 림으로 빨려드는 슛은 인간의 몸이 쓰는 한 편의 시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몸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그걸 드러내는 말이 ‘신체 자본’이다. 몸이 자본이 되는 순간 이윤의 희생양이 된다. 김영희의 몸은 이윤(이익)을 추구하는 타자의 것이었다. 운동선수로서 김영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소모되었다.   소모품으로서 선수의 몸은 기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골리앗이 되고, 기중기가 되고 공을 실어 나르는 코끼리가 되었던 것이다. 운동선수들의 몸에 붙는 이런 기호들은 몸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된 몸을 즐기는 새디즘적 관음증을 부른다. 인간의 몸은 어떤 다른 기호로도 대체할 수 없다. 운동선수의 몸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2m가 넘는 신장은 다만 그 선수의 삶의 조건일 뿐이다. 몸의 차이는 삶의 차이만큼 신성하다.   우리는 운동선수의 몸에서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슛, 드리블, 패스는 인간의 몸이 쓰는 시인데, 왜 우리는 김영희의 몸에서 시를 보지 못했을까? 김영희의 죽음은 이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관용과 따뜻함. 그 마음의 부재가 김영희를 일찍 보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2023.02.11 00:02

  •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  취임 100일 맞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당명까지 바꿀 각오로 재창당에 매진해 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정의당이 풀어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이정미 대표 체제가 이달부터 재창당 수순에 돌입하면서다. 이 대표는 오는 11일 재창당추진위를 구성해 직접 위원장을 맡으며 당의 전면적인 쇄신 작업에 나선다. 4일 취임 100일을 맞은 이 대표는 “당명 개정까지 염두에 두고 올 상반기까지 재창당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대대적인 혁신과 변화를 통해 당원과 지지층의 동력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참패로 당의 성장 엔진은 사실상 실종됐다. 성 비위 사건과 갑질 논란 등 연이은 악재에 당원들의 집단 탈당 사태까지 불거지며 원내 3당으로서의 존재감도 급속히 약화된 상태다. 정의당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중앙SUNDAY가 이 대표를 만나 위기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극복 방안을 들어봤다.   취임 100일을 맞은 소감은. “하루하루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취임 다음날 이태원 참사가 발생해 진상 규명에 힘쓰다 보니 그새 100일이 지나간 것 같다. 무엇보다 창당 이래 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표를 맡게 된 만큼 마음이 매우 무겁다. 임기는 2년이지만 사실상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뛰고 있다.”   이정미 대표 체제의 성과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는데. “당장의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취임하자마자 당에 분칠부터 했을 것이다. 당명도 바꾸고 특권도 내려놓겠다고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3년 만에 당에 복귀해 보니 그동안 당이 입은 내상이 생각보다 깊더라. 골병이 너무 깊이 들어 장기 치유가 필요한 상황인데 겉모습만 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금은 현장을 다니며 당과 지지층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는 게 급선무다.”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   정의당은 지난해 9월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정의당의 지난 10년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당을 운영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라며 “정의당의 경우 공교롭게도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쳤고, 그 상황을 극복할 리더십이 굳건히 서 있지 못해 위기를 더욱 키운 것 같다”고 진단했다.   ‘포스트 심상정’의 차세대 리더십을 육성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잖다. “그 부분은 나를 비롯한 중진들 책임이 크다. 지난 총선 때 지역구에서 살아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심상정 의원을 능가할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했는데 여러모로 부족했다. 개인적으로도 뼈아픈 부분이다. 당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지지자층 입장에서도 기대감은 계속 줄고 꾸지람은 더욱 잦아지는 것 같다.”   10년째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민주당 2중대’ 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 아닌가. “요즘엔 ‘국민의힘 2중대’란 지적이 더 많다(웃음). 2017~19년 첫 당대표 시절엔 특정 정당이 의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정의당이 사안에 따라 여러 정당과 공조하며 캐스팅보터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고 대통령은 야당과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 않나. 지금 정의당이 할 일은 거대 양당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게 아니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민생 얘기라면 어느 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재창당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은. “크게 두 가지 축이다. 우선 기후위기·돌봄 등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 또 정의당과 함께할 사람들과 세력 확장을 도모할 계획이다. 다른 당의 재창당 사례를 보면 당 대 당 통합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 당을 환골탈태하는 시도도 있었는데 정의당은 이를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생각이다.”   부울경 노동 벨트 뿌리 말라가고 있어   이 대표는 그러면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10개를 전략 지역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정의당은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중심의 영남 노동 벨트가 중심축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지역이 너무 취약해지다 보니 당을 지탱하는 뿌리도 점점 말라가고 있다”며 “이젠 비례의석을 늘리는 전략만으론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내부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정의당의 지역구 의석 확대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부분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당의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지역에서 당선돼야 하는 구조다. 이를 깨기 어렵다며 도전하지도 않으면 당을 어떻게 운영하겠나. 힘들더라도 해내야 하는 몫이 있다면 총력을 다해야 한다. 재선 의원을 배출하지 못하는 정당이란 지적도 넘어야 할 산이다.”   당의 어젠다가 실종됐다는 비판도 많다. “우리 당은 최저 시민소득 도입, 노동시장 이중구조 타파, 돌봄 복지국가 등 주요 정책 대안을 줄기차게 얘기해 왔지만 여의도 정치 지형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대선 때도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을 놓고 선거 내내 싸우지 않았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당에 그만 싸우고 민생을 논의하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좀처럼 바뀌질 않는 게 현실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04 00:50

  •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  임기 마친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2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줄 세우기, 공식 외워 답 찾기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1등은 불안하고 2등부터는 불만인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입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요. 국내총생산(GDP)은 많이 올랐는데 행복지수는 꼴찌 수준이고, 청소년 자살률도 높습니다.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로 줄 세우기는 교육이 아닙니다. 기성세대, 특히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지난달 31일 임기 4년을 마친 오세정(70) 전 서울대 총장은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며 “정보화 사회에 맞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2016년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던 그는 2019년부터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했고 이제는 전공분야인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가 됐다.   1등도 불안,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교육   지난 4년을 돌아본다면. “우리나라 교육의 전환기였다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대학 교육의 목표는 남보다 빨리 첨단 지식을 배워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 취지라면 줄 세우기가 의미도 있고 효용도 충분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인 지금은 지식의 라이프타임이 3년이다. 평생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한다. 남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빨리 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재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난 4년간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떻게 교육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데 입학 정원을 바꾸는 건 전쟁이더라. 그래서 일단 들어온 학생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복수전공, 부전공을 확 풀었다. 앞으로 정원의 3분의 2 정도는 복수전공을 할 것이다. 학과에 대한 지원 규모도 입학 정원이 아니라 복수 전공을 포함, 수강생의 수로 기준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임기 중 인구 문제부터 시작해 양극화, 교육 등 장기 계획을 세우고 지금부터 준비하기 위해 국가미래전략원을 만들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씽크탱크가 목표다.”   재임 중 성과는 있었나. “지난해 QS 세계대학 평가에서 처음으로 20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이라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솔직히 서울대는 학생들이 알아서 좋은 성과를 내기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방시혁 HYBE 이사회 의장이 학교에서 뭘 배워서 성공한 건 아니지 않나. 좋은 친구들을 모아 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학교의 할 일이다.”   지난해 8월 오세정 당시 서울대 총장이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허 교수는 지난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했다. [뉴시스] 올해 서울대 수시 합격자 138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연고대까지 합치면 미등록자가 2200명이 넘는다. 대다수가 다른 학교 의대를 선택한 자연계 학생이라고 한다. 이공계 인력의 편중현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의대를 나오면 억대 연봉을 받고 늙어서까지 일할 수 있다. 반면 자연대나 공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업한들 정년까지 다니는 사람이 드물고 중간에 퇴직해서 갈 곳이 없다. 교수들이 황창규·진대제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공계 선배들 얘기를 해도 학생들은 그건 간혹 나오는 한두 명 사례에 불과하다고 반응한다. 근본적으로 이공계를 졸업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도 의대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대를 그만두고 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과 15년 전만해도 외환위기 이후 연구직들이 많이 쫓겨나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있었다. 그때는 문과를 더 많이 갔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뜨고, 소프트웨어 전공이 각광받으며 상황이 역전됐다. 의대 편중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산업구조나 인력구조가 망가지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교육의 질적 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입시다. 대입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어차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들어오니 합격자의 70%는 똑같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중고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훈련을 받느냐인데, 그건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은 보지 않고 결승점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뽑는 정시 전형은 좋은 제도가 아니다.”   국민 다수는 학생부 전형 같은 수시 전형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론조사를 하면 정시 선발이 공정하다는 응답이 70% 이상이다. 조국 사태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논문이나 수상 실적을 본 것은 10년 전의 얘기지, 지금은 학생부에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문제점은 많이 해소된 상태다. 오히려 정시는 단 하루 시험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한 문제만 실수해도 만회할 방법조차 없는데, 그게 과연 공정한 제도인지 의문이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설득이 안된다. 수능만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몇년 전 출제위원으로 선정돼 수학 문제를 풀어봤는데 반나절 동안 채 절반도 못 풀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니 수백개의 공식을 외워 답만 찾는 훈련을 반복해야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는다. 그런 공부로 과연 수학의 원리나 재미를 찾을 수 있겠나.”   입학 전형별로 학습능력에 차이가 있나. “특목고나 8학군 출신이 수능 점수 위주로 선발하는 정시에 가장 많다. 그런데 추적조사를 해보면 입학 후 학점은 수시 일반전형이 제일 좋고, 그 다음으로 정시, 지역균형 전형 순이다. 반면 졸업 성적은 수시 일반전형, 지역균형, 정시 순으로 높다. 정시가 가장 낮다. 취직도 이 순위다. 수능은 반복해서 훈련하면 점수가 높아지는 시험이다. 점수에 맞춰서 전공을 선택했거나 시키는 공부만 해서 그런지 대학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 지역균형 학생들이 처음에는 힘들어하는데 수업에도 적극적이고 곧잘 적응한다.”   지방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해간다는 말처럼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절벽에 따른 지방소멸은 심각한 문제다. 20년 뒤에는 수도권 대학 정원을 다 채우면 지방대에는 한 명도 안가도 된다. 이미 지방거점 국립대학교도 영향을 받고 있다. 수요에 맞지 않는 정원은 이미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다. 하지만 지방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에 대학교 하나 없는 상황을 두고 보겠나. 그러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미국 공대 대학원은 한국·중국·인도 학생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다. 우리도 개발도상국의 똑똑한 학생을 데려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한류 영향으로 인도네시아·베트남 등에 한국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많다. 호찌민의 베트남 국립대학에 가보니 한국 대학에서 받아준다면 오겠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학부 졸업 후 싱가포르 국립대에 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라. 이런 친구들에게 한국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건설 노동자나 베이비시터만 받을게 아니라 탑클래스 사람들을 받아야 한다.”   개도국 똑똑한 학생 유치 방안 찾아야   유학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수도권 과밀화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다. 사실 정부 기관이나 공기업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좋은 일자리, 의료 시스템, 인프라를 갖춰야 지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업은 예전에는 제조업이었지만, 지금은 4차 산업혁명으로 IT기업이 됐다. 그만큼 대학 인재가 중요하다. 좋은 대학이 없는 곳으로 좋은 기업이 가지 않는다.”   오 전 총장은 미국의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를 예로 들었다. 석탄과 철광석을 기반으로 한 제철 도시로 이름 높았던 피츠버그는 현재 금융·교육·의료 중심지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반면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는 쇠락해 녹슨 지역(러스트 벨트)의 대명사가 됐다. 오 명예교수는 이런 차이를 불러온 요인으로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런대, 피츠버그대 혁신연구소, 에너지기술연구소 같은 연구시설을 들었다. 반면 디트로이트는 수준급 대학이 없어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자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대학이 지방에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변화는 어디까지 왔나. “학생 선발, 교육 과정 등에 대한 문제는 인식한 것 같다. 해결책을 향해 몇 발자국 뗀 셈이다. 지금까지는 외국 명문대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따라가기만 했다. 이제는 중장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난 사람=김창우 사회에디터 changwoo.kim@joongang.co.kr, 정리=윤혜인 기자

    2023.02.04 00:01

  • 나경원 빠지자 안철수 지지율 껑충, 김기현 오차범위 내 추격

    나경원 빠지자 안철수 지지율 껑충, 김기현 오차범위 내 추격

    김기현 나경원 전 의원이 지난 25일 3·8 국민의힘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한 뒤 안철수 의원 지지율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와 미디어트리뷴이 지난 25~26일 국민의힘 지지층을 대상으로 ‘차기 당대표로 누가 선출되는 게 좋은지’를 물어 2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김기현 의원이 40.0%로 1위, 안철수 의원이 33.9%로 2위를 차지했다. 직전 조사(16~17일)에 비해 김 의원은 0.3%포인트 감소한 반면 안 의원은 16.7%포인트나 껑충 뛰었다.   “안 의원이 나 전 의원의 표를 상당수 흡수”(배철호 리얼미터 수석전문위원)하면서 두 의원의 지지도 차이가 6.1% 포인트로 오차범위(±4.8%포인트) 내로 줄며 양강 구도가 선명해졌다는 분석이다. 이어 유승민 전 의원(8.8%), 황교안 전 대표(4.7%), 윤상현 의원(3.2%), 조경태 의원(1.8%) 순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관련기사 “잘못된 길 바로잡지 않고 맹종하는 건 친윤 아니라 망윤” “방탄 프레임에 얽매여 민생 외면, 어떻게 총선 이기겠나” 검찰 출석 하루 앞둔 이재명 “독재 시대, 국민이 다시 나설 때” 결선 투표를 가정한 김·안 양자 대결에서도 김 의원은 48.0%, 안 의원은 40.8%로 오차범위 내에서 김 의원이 앞섰다. 배 위원은 “나 전 의원과 대통령실의 갈등 기간에 비윤 표심도 강해졌지만 역으로 이에 대항해 전통 보수층도 결집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김 의원은 대세론 굳히기에 총력전을 펼 계획이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나 전 의원과 대통령실의 충돌에 실망한 일부 보수층이 잠시 안 의원 측으로 넘어간 것 같다”며 “하지만 당내 유일 보수 주자로서 정체성이 분명한 만큼 결국엔 나 전 의원 표심도 다시 우리에게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지도 높이기에도 적극 나섰다.   안철수 캠프 관계자는 “나 전 의원 표가 안 의원 쪽으로 상당수 이동한 데는 둘 다 유명인사라는 공통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며 “우리도 얼굴을 더 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도 이날 페이스북에 배구 선수 김연경, 가수 남진과 식사한 사진을 올리며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썼다.   이에 맞서 수도권 대표론을 강조하는 안 의원은 청년·중도층 잡기 행보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지지율 상승에 대해서도 안 의원은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캠프 내부는 상당히 고무된 분위기다.   안 의원 측 관계자는 “나 전 의원을 찍어누르는 ‘김장연대’에 실망한 보수층과 중도층이 우리 쪽에 모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안 의원이 설 연휴 전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을 만난 사실도 공개했다. 안 의원 측근은 “최근 현안에 대한 공감대가 적잖았다.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전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2023.01.28 01:22

  • “잘못된 길 바로잡지 않고 맹종하는 건 친윤 아니라 망윤”

    “잘못된 길 바로잡지 않고 맹종하는 건 친윤 아니라 망윤”

     ━  [설 민심 살펴보니]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설득해 민심과 보조를 맞추도록 돕는 게 진짜 친윤”이라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부산 해운대구갑)은 자신을 ‘적극적 친윤’으로 규정했다. “여당 의원이라면 대통령의 입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 설득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다. 그러면서 “그런 노력도 안 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데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건 ‘친윤(親尹)’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을 망치는 ‘망윤(亡尹)’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대통령의 언행이 논란을 빚을 때 침묵하며 맹종만 하기보다는 설득하고 쓴소리하며 민심과 보조를 맞추도록 돕는 게 진정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하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하 의원은 부산·경남(PK) 출신의 3선 의원으로 21대 국회에서 국민의힘 부산시당 위원장과 국회 정보위 간사 등 주요 보직을 잇따라 맡으며 여당 내 중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평소 당 안팎의 정치 현안과 관련해 소신 발언을 아끼지 않아 당내 대표적인 ‘쓴소리 의원’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이번 설 연휴 때 직접 접한 지역 민심은 어떠했는지, 당내 일부 친윤계 의원들의 최근 행보를 ‘맹목적 친윤=망윤’이라고 비판하고 본인처럼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의원들을 ‘적극적 친윤=진짜 친윤’으로 부르는 근거는 뭔지 들어봤다. 관련기사 나경원 빠지자 안철수 지지율 껑충, 김기현 오차범위 내 추격 “방탄 프레임에 얽매여 민생 외면, 어떻게 총선 이기겠나” 검찰 출석 하루 앞둔 이재명 “독재 시대, 국민이 다시 나설 때”   지역에 가보니 설 민심이 어떻던가. “무엇보다 민생 문제가 큰데, 예년과는 또 다른 게 대출이자 부담이 만만찮았다. 자영업자들을 만나니 대출이 없는 분이 거의 없더라. 젊은 층도 집 구한다고 영끌 대출했는데 이자가 두세 배나 올랐으니…. 정부도 이자 부담을 어떻게 줄여줄지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더 나아가 지금 힘들어도 고통이 길지 않을 것이란 희망을 주는 게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금리를 더 올리지 않을 것이란 신호와 함께 터널의 끝이 곧 올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줄 필요가 있다.”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터널의 끝이 올 거라는 메시지에 민심이 쉽게 동의할까.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도 아랫목이 뜨뜻해져야 윗목도 뜨뜻해진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기업들 돈이 막혔던 게 최근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중소기업과 자영업에도 영향이 있지 않겠나. 좀 더 강력하고 일관된 조치를 취하면 조만간 희망의 시기가 올 거라고 본다.”   정치권에 대한 민심은. “두 가지 목소리를 같이 듣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잘 좀 도와주라는 얘기와 바른 소리도 많이 하라는 주문이 서로 다른데, 이걸 잘 소화해 실천하는 건 결국 정치인의 몫일 거다. 나도 과거엔 돌직구 쓴소리를 했다면 지금은 좀 더 섬세하게, 쓴소리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정제된 발언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쓴소리도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어야 효과가 있는 것 아니겠나. 예전엔 수용성까진 생각 못한 측면이 있었다.”   당권 경쟁 등 당내 현안에 대한 반응은. “우리 당에 대한 민심도 둘로 쫙 갈리는 것 같다. 적극 지지층이 있고 관망형 지지층이 있는데, 후자는 대통령이 좀 더 포용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불편한 사람들 말 중에도 새겨들을 게 있는 것 아니냐, 메신저가 싫다고 메시지까지 다 배척하지 말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게 대통령 리더십 아니냐는 조언이었는데 타당한 얘기도 있다 싶었다. 대통령이 너무 속 좁게 보이는 건 여당에도 좋지 않다. 몰아내는 방식의 정치를 하면 오히려 대통령이 국민 속에서 고립될 수 있다.”   ‘윤심’ 논란도 뜨겁다. “당대표 후보들이 윤심 마케팅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그럴수록 대통령실 차원에선 ‘대통령은 누가 당대표가 돼도 협력 가능하다. 우리 당 사람이라면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 경상도 말로 다구리 친다고 하는데, 나경원 전 의원에 대해서도 너무 몰매가 심하지 않았나. 심지어 감별사 논란까지 벌어지니 국민도 ‘이질적인 건 수용하지 못하는 대통령이구나’라고 넘겨짚게 되는 것 아니겠나. 전대가 불공정 게임으로 인식되면 누가 관심을 갖고 보겠는가. 대통령 주변 참모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런 메시지로 해석되지 않게 지금이라도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당내 협치’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지금처럼 제2의 진윤 감별사 정당 논란만 커지면 당도 굉장히 힘들어지고 내년 총선도 폭망할 우려가 크다. 그러면 바로 레임덕이고, 이는 대통령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제1당이 되려면 당내 비주류와의 협치는 필수다. 당내 다른 목소리와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하나가 되려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도 우리를 인정하고 찍어주지 않겠나. 정당 내에서도 다원주의가 필요하고 이를 통해 당내 협치가 뒷받침돼야 윤석열 정부도 성공할 수 있다.”   본인을 ‘적극적 친윤’으로 규정했는데. “맞다. 대통령과 입장이 다르면 대통령을 설득하고, 설득 못 시키면 내가 따르겠다는 점에서 적극적 친윤이다. 국민도 이런 게 진정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자 진짜 친윤으로 평가하지 않겠나. 맹목적 친윤은 망윤일 뿐이다. 박근혜 정부 때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때도 진박 논란으로 망친 것 아니냐. 그나마 다행인 건 진윤 감별사 논란이 총선 1년 전에 나왔다는 점이다. 총선 직전에 불거졌으면 다 망할 뻔했다. 예방주사를 잘 맞은 셈이다.”   집권 2년차를 맞았지만 대통령과 당 지지율은 여전히 30%대에 머물러 있다. “딱 세 가지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리더십 중 가장 보완해야 할 게 ‘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권한이 막중한 만큼 발언의 파급력 또한 커서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선 절제되고 준비된 메시지가 필수다. 최근 핵무장이나 이란 관련 발언도 오해 소지가 많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건 매우 잘한 결정이다. 과거 대통령들이 A4 용지에 정리한 걸 읽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이젠 즉흥적 발언 대신 준비된 말씀만 하셔야 할 때다.”   하 의원은 이어 “법치를 확고히 뿌리내리는 것과 경제·안보 분야에서 실적을 내는 게 둘째·셋째 필수조건”이라며 “이 세 가지 기조만 끝까지 유지해도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절제된 메시지는 더 이상 실점하지 않는 것, 확고한 법치는 윤석열다움을 통해 지지층을 공고히 하는 것, 경제 실적은 민생 현안 해결로 중도층 민심까지 회복하는 것이란 진단으로 읽혔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해야 집권 2년차 원활한 국정 운영과 내년 총선 승리를 담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야 협치에 대한 여론의 주문도 적잖다. “영역을 나눠 접근했으면 싶다. 국내 정책 분야는 투쟁 속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외교안보 분야는 반드시 협치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외국에 ‘투 보이스’로 나가면 안 되지 않나.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여야 원로들과 자주 만나 외교안보 현안에서 공통분모를 마련하면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2023.01.28 01:21

  • 검찰 출석 하루 앞둔 이재명 “독재 시대, 국민이 다시 나설 때”

    검찰 출석 하루 앞둔 이재명 “독재 시대, 국민이 다시 나설 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검찰 조사를 하루 앞둔 27일 군산공설시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스1] 2차 검찰 출석 조사를 하루 앞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7일 야당의 텃밭인 전북 익산과 군산을 찾아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이 대표는 이날 전북 군산공설시장에서 “국민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비정상 사태, 바로 독재의 시대가 왔다”며 “다시 우리 국민이 나설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28일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할 예정이다.   이 대표는 이날 여느 때보다 강한 어조로 검찰을 비판했다. 그는 “유신 군사독재 시절에도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처벌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됐고 증거를 만들려고 고문해서 가짜 자술서라도 만들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증거가 필요 없다. 그냥 검찰이 쓰면 그게 죄의 증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피 흘려 지켜온 민주주의가 부패하고 있다”며 “방치하면 그들 세상이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1인 1표 민주공화국에서는 숫자가 최고 아니냐. 물방울이 모여 강물이 되듯 다시 작은 실천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이 대표는 SNS를 통해서도 자신을 향한 배임·특혜 의혹을 반박했다. ‘성남 대장동 사업은 5503억원을 환수하고 세금 지원도 없었지만, 부산 엘시티는 1000억원의 세금을 지원하고 공익 환수 금액은 0원이었다’는 내용의 그래픽을 트위터에 올리면서다. 이 대표는 지난 18일 서울중앙지검 출석 방침을 밝힐 때도 “그러면 공공 개발을 포기해 버린 엘시티의 부산시장은 배임죄냐”며 결백을 주장한 바 있다.   관련기사 “잘못된 길 바로잡지 않고 맹종하는 건 친윤 아니라 망윤” 나경원 빠지자 안철수 지지율 껑충, 김기현 오차범위 내 추격 “방탄 프레임에 얽매여 민생 외면, 어떻게 총선 이기겠나” 당 지도부도 일제히 검찰을 성토하고 나섰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익산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오죽하면 다 끝난 사건(성남FC 후원금 의혹)을 끄집어내 재수사하는 무리수를 두고 삼류 소설을 방불케 하는 ‘변호사비 대납 의혹’으로 옭아맸다”며 “이젠 돌고 돌아 또 대장동 타령을 한다”고 비판했다. 박찬대 최고위원도 “선택적이고 편파적인 수사와 기소는 유사 이래 최악의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국회에서도 지원 사격이 이어졌다. 전용기 의원 등 민주당 청년위원회 소속 40여 명은 이날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윤석열 검찰 정권 규탄대회’를 열고 “정적 제거를 위한 검찰의 과도한 수사를 규탄한다”고 외쳤다. 박범계·김남국·김승원 의원 등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네티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대단한 기밀처럼 포장해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김정재 기자 kim.jeongjae@joongang.co.kr

    2023.01.28 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