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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 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 불안·체념, 정부 안전 컨설팅도 감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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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08면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한 달] 시화·반월산단 르포

21일 경기 반월·시화 산업단지에 위치한 한 제조업체 공장에서 지게차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공된 부품을 운반하고 있다. 이곳 산단에 입주한 기업 95%는 지난달 27일을 기점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됐다. 최기웅 기자

21일 경기 반월·시화 산업단지에 위치한 한 제조업체 공장에서 지게차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공된 부품을 운반하고 있다. 이곳 산단에 입주한 기업 95%는 지난달 27일을 기점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됐다. 최기웅 기자

19일 찾은 경기도 시흥·안산시 일대 시화·반월산업단지는 코를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와 청력 보호구 없이는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2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수출문이 닫혀 도로 곳곳을 도배하던 ‘공장 임대’ 현수막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27일 5인 이상~50인 미만 기업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 적용 한 달을 맞는 이곳의 분위기는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1970년대 수도권 중소형 공장들이 대규모 이전하면서 조성된 이곳은 국내 소재·부품·장비산업을 이끌며 한국 제조업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국내 뿌리산업(제조업의 기본이 되는 주조·금형·용접 등의 기초 제조업)의 본고장답게 굳게 자리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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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곳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한 건 지난달 27일 중처법이 50인 미만 기업으로 확대 시행된 이후부터다. 시화·반월산단 입주 기업 중 94.7%가 50인 미만으로 지난달 27일을 기점으로 중처법 대상 기업이 됐다. 이에 따라 업체 대표 등 사업주는 ▶재해 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 관리체계와 ▶재해 발생 시 대책을 구축해야 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알아듣기도 힘든 법 지키라니 난감”

이 법은 ‘처벌’만을 규정한 법으로 중처법 대상이 되면 어쨌든 중처법상 안전보건 관리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자의 사망이나 동일 사고로 인한 부상이 발생할 경우 대표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법안 확대 시행 이후 한 달이 거의 다 됐지만 이곳의 많은 기업 대표들은 “중처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우리 같은 작은 기업도 해당이 되냐”고 되물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반월산업단지 초입을 지키고 있는 K산업 서모(59) 대표는 “뉴스에서 몇 번 (중처법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는데, 10명 남짓 일하는 우리 회사에서도 준비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며 기자의 설명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 정부나 유관단체로부터 안내문조차 받아본 적 없다는 답변도 돌아왔다. 서 대표는 “매달 직원들을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하고 있고, 작업 시 안전용구를 착용하도록 지시하는데 뭘 더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정부는 중처법 확대 시행에 맞춰 중소기업의 예방 컨설팅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이곳까지는 손길이 닿지 못한 것이다. 실제 19일에 이어 21일에도 이곳을 찾아 곳곳을 살폈으나 산업단지 어디에도 중처법 시행과 관련된 안내문이나 현수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중처법 대상이 된 건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 손을 놓고 있다는 반응도 많았다. 이곳에 긴장감이 감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처법상 처벌만 있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라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처법 제4조 제1호는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 조치’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 법 그 어디에도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이 없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가 50인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방대한 법 준수사항’(54%, 복수응답) 때문에 법 대처가 어렵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30년째 도금업체를 운영하는 김모(65) 대표는 “직원을 다치게 만들어 처벌받고 싶은 사장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공장마다 환경이 다 다르니 뭐가 위험하고 뭐가 필요한지 매뉴얼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중처법에 대처하려 로펌 등 법률적 자문을 구한 업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종합건설업체를 운영하는 D공영 김모(64) 대표는 “우리처럼 상수도 공사, 콘크리트 공사, 건물 건설 공사를 한꺼번에 하는 업체는 사업장마다 적용해야 하는 안전기준이 다 다르다”며 “(컨설팅을 요청하려) 기관마다 물어봐도 담당자마다 대답이 다 달라 어떤 기준을 세워 안전관리자를 고용하고, 처벌에 주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수십 곳의 공사현장을 한 명의 대표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관리하라는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2년간 준비한 업체도 “빈틈 있을까 불안”

실제 제조·건설업 현장에서는 업종별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일률적 처벌 규정에 재해방지 대책을 세우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가령 조선업이나 건설업의 경우 고공에서 추락할 위험이 높아 낙상 위험을 막는 것이 중요하고, 화학물질을 다루는 곳에서는 화상이나 가스 흡입 사고, 제조업에서는 끼임, 절단 등의 위험이 가장 높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하지만 현행 중처법에는 업종별 관리체계가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대표 입장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대처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길은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업장마다 모두 상황이 다르다 보니 현장에서는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지 판단하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감독관조차 판단 기준이 달라 안전장치를 마련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하면서도 어느 업장에는 1개 규정이, 어느 업장에는 10개 규정이 적용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숙한 준비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주 입장에선 휴업 또는 폐업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도 사업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50인 미만의 중소기업 대표는 직함은 사장이지만 부족한 인력 탓에 영업, 공장 운영, 기계 가동, 경영관리 등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예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중처법 처벌 대상이 되면 유·무죄를 떠나 소송 과정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2년부터 지난해 8월 말까지 입건된 중대재해법 위반 사건의 처리 기간은 평균 215.9일, 최장 477일이었다.

수사 결과 내사 종결에 그치더라도 해당 업체 대표는 1년 가까이 조사를 받으며 사업을 끌고가야 하는 셈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현행 중처법에는 ‘일정 수준의 예방조치를 취하면 면책한다’는 규정도 없어 어디까지 예방을 해야 할지 파악해 대처하기 어렵다”며 “대기업의 경우 안전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조치를 취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어려운 중소기업은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법안 개정과 더불어 구체적인 이행 내용을 담은 시행령이나 대통령령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50인 미만 기업의 중처법 시행을 유예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용윤 동국대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중처법의 기본 목적은 중소기업이 아니라 중대 규모 사업장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며 “20인 미만이나 1억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건설업)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것은 법안 체계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높은 형량으로 기업주에게 공포감만 퍼트리는 만큼 무작정 법안을 적용하기보단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의 기준규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2년가량 추가 유예 기간을 두고 명확하지 않은 법안을 수정해 실효성 있는 법안을 만드는 것이 이 법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길 위원은 “운전면허를 보유한 모두를 동일한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보단, 자주 규정을 어긴 사람을 대상으로 보다 엄격하고 강력한 처벌 규정을 만드는 것이 안전수칙 준수에 효과적”이라며 “산재처리, 안전관리규정 등을 잘 준수해왔던 업체까지 단순히 사업주라는 이유로 잠재적 범법자로 뭉뚱그려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2022년 법 시행 이후 약 2년간 안전관리를 위해 컨설팅을 받았던 H콘크리트 제조업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코로나19 위기도 악착같이 버텨 이겨냈는데, 중처법에는 속수무책입니다. 2년간 준비했는데도 혹여 빈틈이 있을까 불안한데,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제발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달라는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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