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시대 노인 일자리] 대기업 상무 출신, 전문기술 배우려 또 대학에…"몸 낮추고 몸값 올리는 노력은 계속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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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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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기술이 없는 명문대 졸업생은 고용주 입장에서 불편하지.”

은행에 다니다 정년퇴직한 남편 소스케에게 아내가 ‘살벌하게’ 말했다. 우물쭈물하던 남자는 결심한다. “나, 대학원 갈 거야.”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일본 영화 ‘끝난 사람(2018년)’의 한 장면이다. ‘Life in overtime’이란 영어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는 일 하나만 바라보며 회사에 청춘을 바친 중년 남성의 퇴직 후 방황기를 실감 나게 그리고 있다.

미국 영화 ‘인턴십(2013년)’에서 주인공 닉(오웬 윌슨)은 이렇게 다짐한다. “시합에 못 나가는 후보라도 열정만 충분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끝까지 한번 버텨보자고.” 평생 아날로그 사회에서 살아온 중년 샐러리맨 닉은 정리해고된 충격을 딛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러곤 몸을 낮춰 인턴십에 지원해 구글에 들어갔다. 더 늦기 전에 디지털 시대를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겠다는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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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허구도 아니다. ‘노는 노년’을 줄이는 건 당장 내년이면 초고령사회(65세 이상이 20% 이상)에 진입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절박한 ‘실제 상황’이다. 팔팔한 노년층은 갈수록 늘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과연 얼마나 마련돼 있는가. 60대 은퇴자와 곧 퇴직을 앞둔 50대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찍 나와 궂은 일 도맡아

서울 숭인동 진형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6070 만학도들이 컴퓨터 수업 시간에 엑셀 강의를 듣고 있다. 신수민 기자

서울 숭인동 진형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6070 만학도들이 컴퓨터 수업 시간에 엑셀 강의를 듣고 있다. 신수민 기자

‘이렇게 나이 들면 안 되겠다.’

이민휘(56)씨의 머리에 번쩍 이 생각이 든 건 50세 무렵이었다. 이씨는 서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상무까지 20년 일한 뒤 비교적 이른 46세에 퇴직했다. 도쿄대를 졸업한 영화 ‘끝난 사람’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학력만 남았다. 미래가 불안했다. 그는 고심 끝에 전문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지난해 연암대 동물보호계열을 졸업한 뒤 올해 경기대 동물매개자연치유 전공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씨는 “대기업에 있을 때보다 10분의 1도 못 벌고 대우도 흡족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래도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삶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강영(62)씨는 제지업체 생산직이었다. 퇴직을 앞두고 회사 권유로 인사팀 인턴이 돼 일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인턴십’의 열정남 닉처럼 몸을 한껏 낮췄다. 아침 일찍 나와 궂은 일도 마다 않고 한다. 정씨는 “인턴으로 일자리를 이어가는 대가로 생산직에서 인사 업무로 전환했다”며 “컴퓨터 사용도, 보고서 작성도 어색하지만, ‘시니어 인턴’의 좋은 선례를 만들 수 있게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와 정씨는 공통점이 있다. 은퇴 후 일자리를 갖기 위해 눈높이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몸값을 올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은퇴자들이 명심해야 할 ‘금과옥조’로 통한다.

이씨처럼 대학이나 전문대에 입학하는 만학도들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지난해 60대 이상 대학·전문대 재학생은 3만4172명으로 전년 대비 3000명 가까이 늘었다. 중·노년층의 재취업에 필수로 여겨지는 자격증 취득 필기시험 응시자도 2020년 4만8999명에서 지난해 8만8129명으로 3년 새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씨와 정씨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신(新)중년’이란 점이다. 이들 5060세대 중 30.3%는 대졸 이상 학력 소지자다. 70대 10.6%의 3배에 가깝다. 소득도 높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두고 있다. 통계청이 분석한 ‘주된 직장에서 나오는 이들의 평균 연령’이 49.4세임을 고려하면 50대 중에서도 ‘1차 은퇴’를 경험한 이들이 상당수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이에 대해 강민정 한국고용정보원 전임연구원은 “일명 ‘낀세대’로 불리는 신중년 세대는 독립이 늦어지는 자녀를 뒷바라지하고 수명이 길어진 부모를 봉양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적잖은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게다가 이전 세대보다 고학력·고소득으로 살아온 데다 건강도 아직까진 뒷받침되다 보니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려는 열망이 매우 강하다”고 진단했다.

김문정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부연구위원도 “초고령사회가 다가오면서 60대는 물론 50대 초반이나 은퇴 직전의 중년층에게도 재취업 준비가 더욱 절박한 과제가 됐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다. 현재의 노인 일자리는 급증하는 은퇴자와 은퇴 예정자를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편의점이요? 편하게 돈 버는 것 절대 아닙니다. 퇴직 후 60대에 하기엔 버거울 겁니다.” 서울 은평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미향(55)씨는 “운영 초기 40대 체력으로 육탄방어를 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며 “남편의 은퇴 후 일자리를 위해 15년 전부터 단단히 준비를 해왔다”고 말했다.

은퇴자들이 선호하는 편의점과 치킨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중 63%가 50대 이상이다. 하지만 자영업 폐업률은 10%에 달한다. 강 연구원은 “신중년보다 앞서 은퇴한 6070세대도 서비스직이나 사무직을 선호하고 노무직은 기피하는데, 이런 경향은 학력과 소득이 높은 50대가 향후 은퇴하면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일자리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라고 짚었다. 앞서 은퇴한 6070의 얘기를 따라가 보자.

“고급 인력은 은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에 걸맞은 자리가 부족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용철(70)씨는 ‘신의 직장’으로 불리던 한국전력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한전 재직 중에 미리 상담심리 석사 학위를 딴 뒤 국가자격증인 임상심리사 2급도 취득했다. 진씨는 “50대부터 철저히 준비했다”며 “그런데도 상담 분야는 60세까지만 받는다고 하니 막상 갈 곳이 없더라”고 털어놨다. 아무리 사전 대비를 단단히 해도 마땅한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노인이 돋보기를 들고 구직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말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노인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노인이 돋보기를 들고 구직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슬기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팀장은 “전문 경력을 가진 고령층 구직자들은 은퇴 후에도 경력을 활용한 일자리를 찾고 싶어 하지만 고령 인구 증가세만큼 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분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분기 노인 취업자는 606만여 명에 고용률 43.4%로 3년 전부터 꾸준히 증가 추세다. 70세 이상도 네 명 중 한 명은 취업자다. 700만 명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모두 60대에 진입했다. 여기에 2차 베이비부머와 X세대를 아우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 출생자까지 은퇴 대열에 합류할 경우 은퇴자들의 노인 일자리 미스매치는 한층 심화할 전망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김 부연구위원은 “일하고자 하는 신중년층의 욕구가 갈수록 커지고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취업형 일자리를 적극 발굴·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지난해 7월 2027년까지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영역에 노인의 경력·역량을 활용하는 ‘사회서비스형’을 21만 개로 늘리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외 정부의 노인 일자리 유형은 ‘공익형(단순노무직 봉사 성격)’과 ‘민간형(기업과 근로계약)’이 있다. 지난 총선 때도 국민의힘이 노인 일자리 확대를 1호 공약으로 내놓는 등 여야 모두 노년층 표심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대해 박경하 노인인력개발원 부장은 “정부 부처별 사업이 각개 전투식으로 따로 나오고 홍보가 제대로 안 돼 출입구부터 막히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홍순철(74)씨도 “집 근처 노인복지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각 지자체별로 노인일자리센터와 시니어클럽이 있고 취업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노인일자리 여기(한국노인인력개발원)’라는 사이트도 있지만 홍보가 부족해 접근성이 낮은 편이다. 김 팀장은 “어르신들에게 ‘손품 발품 다 팔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취약계층 대상 상설 무료상점인 푸드마켓 매니저 차만희(68)씨가 “나는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식 뒷바라지, 부모 봉양 ‘낀세대’

“몸은 일단 낮춰야 하고, 몸값은 게임 레벨 올리듯 차곡차곡 높여야 합니다.”

현재 은퇴 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방법은 60대 퇴직자인 차씨의 이 한마디에 요약돼 있다. ‘선(先) 일자리 확보, 후(後) 몸값 올리기’ 전략인 셈이다. 변수는 앞으론 ‘생존형’ 일자리 못지않게 ‘자아실현’을 위한 일자리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란 점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시니어 니즈와 기업 니즈 갭 분석 및 연계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고령층이 일자리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사항 1순위(43.2%)도 ‘적성·전공·경력·능력에 맞는 업무’였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은퇴를 앞둔 50대 직장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은 ‘마음 내려놓기’”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김 팀장은 “슬픈 현실이라고 해야 하나. 현역에서 활약할 때와 은퇴 후 일자리의 간극이 너무 크다 보니 이런 말이 도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연구원은 “정부도 은퇴 후 일자리가 청년 일자리와 상충하지 않는 선에서 양적, 질적으로 보다 다양하게 마련될 수 있도록 실질적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오래, 계속 일하고 싶죠, 그러려면 오타니만큼은 아니더라도 몸값을 올려야 하지 않겠어요.” 대기업 계열사 부장인 강모(53)씨는 오늘 저녁에도 학원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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