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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법 될 우려, 엄벌이 정의라는 도그마 벗어나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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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09면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한 달

19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에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19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에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중대재해처벌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법이 될 수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 적용이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된 데 대해 “중대재해 관련 처벌이 대기업이 아닌, 중소업체 최고경영자(CEO)에 집중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중처법은 애초 대기업을 처벌하고자 하는 것이 취지지만, 실상은 중소업체 사장 처벌에 치우칠 것이라는 우려다. 중처법 도입 이전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중소기업의 경우 대부분 CEO가 처벌됐으나, 대기업 CEO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구성요건, 위법사실에 대한 증거 부족 등으로 인해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이에 중처법 제정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2022년 1월 중처법 도입 이후에도 이전부터 기소가 집중됐던 중소업체 책임자 처벌에 치우치고 있다. 실제 중처법 도입 후 지난달까지 검찰에 의해 기소된 37건(급성중독 1건, 사망 30건) 중 대기업(근로자 1000명 이상)은 1곳뿐이다. 지난달부터 50인 미만 중소업체로 확대된 만큼 영세 사업자가 처벌 받을 우려는 더 커졌다. 정 교수는 “유·무죄 판결 여부를 떠나 수사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영세 기업엔 큰 타격이 될 수 있고, 이는 기업 도산이나 사업 위축으로 이어져 결국 근로자와 취약계층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처법 유죄 판결 14건 모두 중소기업

‘엄벌이 곧 정의’라는 도그마(독단적 신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벌을 강화한 중처법이 실시된 이후인 2022년 산업 현장 사망 사고 발생 현황을 살펴보면,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자 수는 248명에서 256명으로 되레 증가했다. 2023년 3분기(누적)까지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자 수는 192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0명 감소했다. 정 교수는 “지난해 재해 사망사고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설현장이 반토막 나고 제조업 생산이 크게 위축됐던 점을 고려하면, 이 법은 중대재해를 줄이기는커녕 늘리는 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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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처법 도입 후 2년을 평가한다면.
“안전 역량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산재예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정비할 노력은 하지 않고 엄벌주의로 상황을 회피하고 있어서다. 현재 우리나라 안전 분야 행정인력은 전 세계 독보적인 수준이다. 근로자 1만명당 미국의 8배 이상, 일본의 4배 이상이다.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산재예방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산재예방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봐야 하지 않나. 중처법은 안전평가서나 관련 인원과 조직을 두는 등 형식적 안전에 치중돼 있다. 정작 실질적 안전 예방 조치는 뒷전이 될 수 있다.”
중처법에 의한 예방 효과는 없나.
“중처법으로 경영진의 안전 의욕을 고취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안전 역량을 키우기 위한 실질적·실효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중처법은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과 안전을 강화하는 것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엄벌주의로 따지면 중국, 북한, 아랍권이 산재예방 선진국이 됐어야 한다.”

한국경제학회도 지난달 ‘중처법은 재해를 감소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사업주와 CEO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사고가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박재옥·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처벌보다 경영진이 직원들의 근무나 일 처리 방식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느냐가 사고 증감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됐는데.
“50인 미만 사업주는 자포자기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처법의 큰 문제는 예측과 이행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기 어렵다. 안전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 감독기관과 수사기관에 잘 보여 처벌을 피하는 쪽에 돈과 역량이 몰리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익부 빈익빈이다. 중소기업은 로펌 등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칼날이 중소기업에 집중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중처법 확대 적용 이전에도 중처법상 유죄 판결이 난 기업 14곳이 모두 중소기업이었다.”
중처법은 어떤 점에서 지키기 어려운가.
“가령 A기업에서 엘리베이터 유지보수 업무를 B업체에 맡겼다고 치자. 사고가 나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이다. 여론의 비난이 몰리거나 기업 규모에 따라 책임 여부가 달라지기도 하고, 두 업체 모두 책임이라고도 한다. 외부 업체의 안전 업무에 대한 평가도 해야 하는데, 우리 회사도 우리 직원도 아닌데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 주무부처(고용노동부)에 물어봐도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현실적인 규정도 문제다. 일례로 기계가 오작동하는 경우나 테스트가 필요하다면, 기계를 무조건 정지하도록 한다. 그런데 오류를 잡아내거나 테스트를 위해선 기계를 작동시켜야 하지 않나. 이런 경우에도 사고가 발생하면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고 처벌할 수 있다.”


수사기관 자의적 법 집행·남용 우려도

대구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은 19일 성명을 통해 “중처법 시행 2년이 넘도록 시행규칙조차 없다”며 “시행령은 있지만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무슨 조치를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두루뭉술한 법령 탓에 중대재해 적용 여부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된 만큼 영세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정부 차원의 안전시스템 구축 등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처법의 안전 강화 취지를 살리려면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
“범죄구성 요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중대재해 예방에 효과적이다. 지키기 어려운 법을 만들어놓고 엄벌을 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법에 대해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법 해석이 모호하다보니 수사기관의 자의적 법 집행과 남용도 우려된다. 기업체의 경우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수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타격이다. 이로 인해 기업이 도산하거나 위축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취약계층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도 많다. 의무 주체나 법령이 중복되거나 충돌하는 중처법으로 이중 규제하기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기본법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처법의 취지를 일부 반영해 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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