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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도적떼’ 월스트리트, 미 정부가 세금 쏟아 돕는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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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호 17면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월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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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최초의 인류는 무정부 상태에서 살았을 것이다. 정부가 없다는 것은 법도 없었다는 뜻이므로 폭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더라도 말릴 사람도 없고 죄책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인간들은 서로 지켜야 할 법을 만들고, 이 법을 집행할 정부를 만들어서 폭력 대신 윤리와 법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

최초의 정부, 도적떼가 세웠다고 생각

과연 최초의 정부와 법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경제학에서는 최초의 정부를 만든 사람은 ‘도적떼’였다고 생각한다. 법과 정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도적이나 강도를 잡아서 처벌하는 것인데, 그 법과 정부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사실 도적떼였다는 것이 진실일 수 있을까? 독자들이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과거 원시 인류가 농사와 목축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발생한 직업이 있었을 것인데 바로 도적질이다. 열심히 곡식을 재배해 수확하고 양과 돼지를 키우는 성실한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반대로 이런 사람의 곡식과 가축을 훔쳐서 편하게 먹고 살고자 하는 집단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도적떼 중의 한 패거리를 흑곰파라고 부르겠다. 흑곰파는 한강 주변에서 농민에게 강제로 곡식을 뺏는 나쁜 도적떼였다. 그런데 가을 어느 날 흑곰파 도적들이 한 마을로 곡식을 뺏으러 갔는데, 곡식이 한 톨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당황한 흑곰파 두목이 농민들에게 이유를 묻자, 얼마 전 백호파라는 도적의 무리가 마을에 쳐들어와서 수확한 곡식을 다 뺏어 갔다는 것이다.

백호파나 흑곰파나 같은 도적질을 하는 동종 직군이므로 백호파의 이런 행동을 흑곰파가 좋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흑곰파는 마치 자신의 곡식을 백호파가 뺏어간 것 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백호파가 계속해서 한강 유역의 농민들의 곡식을 뺏어 가면 흑곰파는 뺏을 곡식이 없어서 도적질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아마 흑곰파는 농민들에게 백호파 도적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물은 후 뒤쫓아 가서 백호파를 급습하고 농민들의 곡식을 다시 뺏어 왔을 것이다. 이렇게 백호파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흑곰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힘이 없는 농민을 노리는 도적떼가 한둘이 아닌데 앞으로 다른 도적떼에게 농민들이 곡식을 뺏기는 일이 계속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경제학자들이 생각했을 때 흑곰파 두목은 결국 농민들을 다른 도적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사를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강 유역의 농민들을 밤낮으로 지키면서 다른 도적떼로부터 보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보호하는 농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농민들의 생산이 늘어나야 흑곰파도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므로 농민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매년 적당량의 곡식만 빼앗고 농민들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흑곰파에게 곡식을 뺏기는 농민 입장에서도 여러 명의 도적떼들에게 번갈아 곡식을 뺏기기 보다는 사정을 봐가면서 곡식을 뺏어 가면서 한편 다른 도적들을 막아주는 흑곰파에게 의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수확한 곡식의 일정 양을 흑곰파에게 매년 자발적으로 주게 되었을 것인데, 이것이 아마도 세금의 시초였을 것이다. 당연히 흑곰파는 얼마 후 도적떼가 아닌 정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말이다.

경제학에서는 농민과 도적처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주체도 오랜 기간 관계가 지속되면 오히려 협력을 하게 된다는 현상을 ‘반복 게임(repeated game)’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관계의 상대방이든 지속적으로 교류하게 되면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이라는 말처럼 협력으로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와 메인스트리트(Wall street vs. Main street)의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금융위기로 미국 금융 회사가 밀집한 뉴욕 월스트리트가 파산의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의 부유한 금융 기관을 정부의 돈으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금융 기관이 아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메인스트리트가 반기를 들고 항의를 했던 현상이다.

도덕적, 논리적으로는 메인스트리트가 옳다. 동네 마을의 공장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 정부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해당 사업이 실패한 것은 해당 사업의 종사자들이 잘못 운영했기 때문이니 국민의 혈세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인스트리트의 공장은 결국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의 부유한 금융가들이 무모하고 위험한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것인데, 미국 정부가 국민의 혈세로 이 금융기관을 도와서 파산을 막았으니 메인스트리트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메인스트리트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심지어 자신의 돈으로 투자를 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반인의 돈을 받아서 위험한 곳에 투자를 한 후 잘 되면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은 엄청난 수수료를 받는 반면, 투자가 실패하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손해는 고스란히 메인스트리트의 일반인이 감수해야 하니 괘씸하다면 괘씸한 집단이 바로 금융권인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권은 현대판 도적떼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주장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이런 괘씸한 월스트리트를 돕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단순히 월스트리트만 파산하는 것이 아니라 메인스트리트에 위치한 일반 공장이나 가게도 모두 파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의 정부들이 금융권에 더 신경을 쓰고 지원해주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인류의 고령화 현상이다.

과거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인류가 생산에 종사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퇴직한 후 불과 몇 년 안에 병으로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60세 생일인 회갑을 맞이하면 오래 수명 장수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노후 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사망하기 직전까지 생산 활동으로 돈을 벌다가 죽었을 테니 늙어서 살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의학의 발전으로 100세까지 사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만큼 퇴직 후 오랜 기간 생존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져서 더 이상 생산활동으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의식주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상당한 병원비를 감당하면서 10년 또는 20년 이상 살아야 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돈이 돈을 벌게 하는 곳이 월스트리트

경제학적으로 보면 더 이상 몸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젊어서 저축한 돈으로 돈이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노후생활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돈이 돈을 버는 것을 하는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 즉, 금융권이다. 금융권은 일반인이 저축한 남의 돈으로 투자해서 이익이 발생하면 중간에서 떼어서 빼돌리는 도적떼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 나의 귀중한 돈을 잘 투자해서 노후에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주식 투자를 전혀 하지 않는 일반인이라도 아마 국민 연금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이 국민연금의 대부분이 주식 시장에 투자돼 있으므로 나의 노후는 금융권과는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대로 금융권 측면에서 일반인은 단기적으로는 각종 이자와 수수료를 뜯어낼 수 있는 대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금융권이 지나치게 이익을 챙기면 일반인들이 금융권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므로 오히려 일반인들이 투자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서 다시 금융권에 투자해야 장기적으로 금융권도 더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는 밸류업(value up)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을 성장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견 금융권에 지나친 혜택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정책이 실행돼야 한다. 그리고 금융권이 이런 프로그램을 악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흑곰파와 농민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법과 정부를 만들어서 서로 도왔듯이 반복 게임의 교훈인 적과의 동침을 통해서 고령화 사회의 노후 대비를 금융권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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