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순간 슈퍼히어로된 느낌…우리 노래, 이제부터 시작

    어느 순간 슈퍼히어로된 느낌…우리 노래, 이제부터 시작

     ━  ‘싱어게인3’ 홍이삭·소수빈   전 세계가 K팝에 열광한다지만 노래를 들으며 감동할 일은 잘 없다. 세련된 공산품같은 노래에 중독은 될지언정 감동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최근 종영한 JTBC ‘싱어게인’ 시즌3에 대국민 문자투표 60여만 통이 몰리고 콘서트 티켓이 10분 만에 동 난 건 우리가 아직 인간적인 노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1·2위를 차지한 ‘무명가수’ 홍이삭(58호)과 소수빈(49호)의 무대에 늘 감동했던 것도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노래하는 이들의 정직한 목소리가 너무도 순수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외치는 음악 같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적확하다.   사실 파이널은 긴장감이 없었다. 미리 공개된 온라인 투표와 동영상 조회수에서 워낙 둘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막판 음이탈을 한 홍이삭이 심사위원 평가에서 앞선 소수빈을 문자투표로 뒤집는 역전극이 있었을 뿐. “결국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 음악이 좋아졌는지가 중요한 거잖아요. 심사위원 점수는 잠시 기분이 좋을 뿐, 지나고 나면 큰 의미 없는 것 같아요.”(소)   일찌감치 라이벌 구도 형성 화제몰이   싱어게인3 우승자 홍이삭(왼쪽)과 준우승자 소수빈. 박종근 기자 “끝이 안 보이다가 이제 다 왔다 싶으니까 살짝 안일하고 교만해졌어요. 실수하는 순간 그 실수를 하기까지 빌드업된 사소한 결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난 아직 멀었구나, 한참 더 해야 된다 느꼈습니다.(웃음)”(홍)   오히려 일찌감치 두 사람이 맞붙은 2라운드와 5라운드가 하이라이트였다. 라이벌 구도인 둘의 한치 양보 없는 진검승부에 시청자들은 손에 땀을 쥐었지만, 막상 이들에겐 전우애가 싹텄단다. “5라운드 상대로 형을 지목했을 때 저를 응원하는 분들은 엄청 뭐라 했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었어요.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쉽게 넘어갈 수 없었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있어야 배울 게 있잖아요. 실제로 많이 배웠어요. 결국 져서 패자부활전에 갔는데, 음악 인생에서 가장 진귀한 경험을 했죠. 그 순간에 너무 집중해서 뭔가에 씐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봐도 그 때 표정은 제가 아닌 것 같아요.”(소)   “저는 사실 피하고 싶었어요.(웃음) 왜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수빈이를 잊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고민했죠. ‘싱어게인’이란 방송이 그런 것 같아요. 승부에 대한 갈급함과 동시에 내 음악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더군요.”(홍)   사실 홍이삭은 그 누구도 대적하고 싶지 않은 강적이었다. 2019년 ‘슈퍼밴드’로 주목받은 이후 꽤 인지도를 얻었다. ‘찐무명’이 아니라는 얘기다. “30대 중반이 되니 고민이 많아졌어요.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통장에 돈이 없거든요.(웃음) 저만의 결을 갖지 못한 것도 불안했죠. 수빈이처럼 소신 있게 자기 결을 가져야 성장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안정적인데, 내면이 성장하기 전에 쉽게 유명해지는 길을 좇아왔던 게 잘못이란 걸 절감하고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 ‘싱어게인’이 왔어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한계에 부딪쳐 보고 떨어지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생각했고, 가진 걸 다 쏟자는 각오로 도전한 거죠.”(홍)   [홍이삭-소수빈/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각각 우승-준우승한 가수 홍이삭과 소수빈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아이돌 산업 위주로 흘러가는 음악시장에서 인디 뮤지션들이 설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홍대 인디씬도 사라져 시장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니 닥치는 대로 활동해 왔지만, “어느 순간 넥스트가 없더라”는 게 소수빈의 말이다. “겁이 많아서 오디션 프로에 못 나갔어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방송에 비치는 게 두려워서 적게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생각했는데, 점점 리스너가 줄어드는 걸 보며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됐죠. 다행히 ‘싱어게인’이 좋은 기회가 돼서 다음 단계로 갈수 있었다 생각해요.”(소)   “좀 슬픈 게 중간이 없거든요.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과 명성의 지점은 있는데 중간이 결국 오디션 프로인가 봐요. 100석, 200석짜리 공연장에서 지속가능한 문화가 없으니까요. 로드맵도 없이 페스티벌이나 행사를 뛰다 보면 내가 성장하고 있단 걸 알 수 없죠. 안개가 껴서 내가 보이지 않았어요.”(홍)   문자투표 60만통, 콘서트 10분 만에 매진   파이널 2라운드 경연 모습. [사진 JTBC] ‘싱어게인’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장이 됐다. 사실상 제작진이 리드하는 다른 오디션 프로와 달리 자기 음악으로 승부하도록 자유와 책임이 부여되기에, 뮤지션 각자가 자신의 능력치를 시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 결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남게 되더군요. 선곡과 편곡이 각자의 몫인데, 사실 나답게 노래하려면 그 두 가지를 다 내가 붙잡아야 하죠. 5라운드에서 저는 엄청 대중적인 곡을 골랐지만 수빈이가 경연에 어울리지 않는 ‘트라이 어게인’이란 곡을 고르면서 ‘그냥 내꺼 하겠다’는데 진짜 멋있더군요. 그게 맞거든요. 떨어져도 결국 그렇게 가야 앞으로 10년을 더 갈 수 있는 거니까. 그게 ‘싱어게인’의 엄청난 차별점인 것 같아요.”(홍)   “이야기를 본인이 만드는 방송이었어요. 정말 원하면 하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방송이 원하는 방향도 있겠지만, 본인이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능력을 계속 시험하면서 재밌는 상황이 생기더군요. 내 한계를 알고 있는데, 어떤 순간 슈퍼히어로 같은 힘이 나온다는 걸 깨닫는 거죠. ‘싱어게인’ 하면서 아직 더 할 게 있단 것도 알게 됐어요.”(소)   “나만의 결이 없다”지만 홍이삭은 ‘자연주의’로 통한다. 서늘한 가을바람처럼 불어와 광활한 대지를 깨끗이 씻어내는 소나기 창법으로 뭉클한 서라운드 감동을 만들어낸다.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파푸아뉴기니의 대자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영향이 크다. “타이어 안에 진짜 튼튼한 고무 튜브가 들어 있거든요. 강에서 그걸 타고 한 4시간 동안 내려가면 폭포도 만나고 급류도 있고 진짜 재밌어요. 그렇게 맨발로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들이 정서적으로 기반이 된 것 같아요. 학교에서 브라스밴드 하고 록밴드 형들 동경하면서 음악이 얼마나 재밌는지 깨달았고요.”(홍) [홍이삭/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우승한 가수 홍이삭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지금도 소년같은 외모의 소수빈은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촉각적인 음색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런데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이 단단하다. 어릴 적 장난치다 오른쪽 검지가 절단되고도 독학으로 기타를 마스터 할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롱 타고 올라가다가 손가락이 끼어서 잘렸어요.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긴 했죠. 근데 애초에 기타를 치기 전에 다쳐서 익숙해요. 손가락이 짧아서 기타 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안 해봤죠. 어릴 땐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어요.”(소)   짧지 않은 세월 ‘무명가수’로 머물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두 사람 다 음악을 포기할 뻔한 순간도 있지만, 주변의 도움이 있어 여기까지 올수 있었단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계약이 잘못돼 한 7년 음악을 제대로 못했어요. 친구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데 나는 꿈만 꾸고 있으니 어떡하나 싶더군요. 그만두려는 순간 감사하게도 가까운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라고, 같이 노래하자고 손 내밀어 줬어요. 덕분에 음반을 냈고, 거기 힘 입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죠. ‘트라이 어게인’을 불렀던 것도 그래서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도 그 노래를 듣고 좌절 딛고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소) [소수빈/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준우승한 가수 소수빈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20대 때 부정교합이 심해 음역대도 좁고, 얼굴도 비뚤어져서 무대 서기도 부끄러웠어요. 버클리 음대 유학을 가느라 집안 기둥뿌리도 뽑혀 있었고요. 막다른 길에서 후원을 받아 수술을 할 수 있었죠. 그 덕에 음역대와 발성도 좋아졌고, 잘생겼다는 말도 서른 지나 처음 들어봤어요.(웃음) 사실 지금의 얼굴과 성대가 제 것이라 생각 안해요. 선물로 받았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죠.”(홍)   경연 과정에서 이들은 ‘나다운 음악’에 대한 갈증을 얘기했었다. 주로 남의 노래를 불렀던 ‘싱어게인’에서 100% ‘나다운 음악’을 들려주진 못했을 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이유다. “49호는 49호답게 할 겁니다. ‘쉬운 가수’를 내걸고 나온 만큼, 나만 어려우면 되고 여러분에게는 쉬운 가수로 남으려고요. 아직 못 보여준 게 많아요. 재즈, 블루스도 잘하고 웅장한 것도 좋아하거든요. 경연은 차력쇼가 아니니까 안 했을 뿐이죠.”(소)   “전 좀 차력쇼를 한 것 같아요.(웃음) 매 라운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만큼 쏟아 부었거든요. 이젠 온전히 새로운 곡들에 내 이야기를 담는 게 숙제가 되겠죠. 아직 갈 길이 멉니다.”(홍)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2.03 00:23

  • "연극배우 연봉이 200만원? 가난한 이미지에 가두지 마세요"

    "연극배우 연봉이 200만원? 가난한 이미지에 가두지 마세요"

     ━  [비욘드 스테이지] 연극 ‘와이프’ 화제의 배우 이승주   화제의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와 게이를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승주 배우. 김상선 기자 최근 소녀시대 수영의 연극 데뷔작 ‘와이프’ 공연 중 관객의 대포카메라 촬영 사건이 화제였다. 우리 관람문화에 무지한 외국인 관객이 벌인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엉뚱한 이슈가 터졌지만 ‘와이프’는 연극계 블루칩 신유청이 연출한 보기드문 웰메이드 연극이다.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입센의 ‘인형의 집’을 창조적으로 해체해 성소수자와 다양성에 관한 담론을 제시한 작품인데,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3관왕과 최초의 백상연극상까지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이번엔 수영 뿐 아니라 정웅인·김소진·박지나·송재림 등 매체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소녀시대 수영·송재림 등 출연 유명세   그런데 연극팬이라면 이보다 놀랄만한 재발견이 있다. 마초남 ‘로버트’에서 동성애자 ‘아이바’를 거쳐 하남자 ‘핀’으로 3단 변신하는 배우 이승주다. 2010년대 한태숙 연출의 ‘유리동물원’, 김광보 연출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M.버터플라이’‘사회의 기둥들’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다 2017년 예술의전당 기획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끝으로 무대서 사라졌다. 1년 전 국립극단 ‘세인트 조앤’으로 조용히 컴백했지만, 이번에 신들린 ‘게이 연기’로 빵 터졌다. 뮤지컬계 게이 연기의 달인 김호영이 연상될 정도인데, 빈틈없이 반듯한 외모라 더 충격적이다.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연기는 처음이라 초기엔 힘들었어요. 요즘은 매체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표현이 될까봐 오히려 안 찾아봤거든요. 아이바란 인물이 가진 상태에만 집중하니 연출님에게 ‘너무 남자답다’는 걱정을 듣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속된말로 ‘게이스런’ 몸짓이 조금씩 나오더군요. 역시 껍데기가 아닌 마음부터 채우는 게 옳은 선택이었나 봐요.”   걸그룹 소녀시대의 최수영(왼쪽)의 마초 남편 로버트도 이승주의 1인 3역 중 하나다. [사진 글림컴퍼니]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 ‘인형의 집’ 속 젠더 이슈가 현대에도 여전하듯, ‘와이프’도 1959년에서 시작해 1988년·2023년·2046년까지 시대별 에피소드의 순환구조 속에서 변함없이 소외받는 성소수자의 입장에 확대경을 댄다. 이승주는 막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1인 3역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로버트같은 인물, 아이바같은 인물, 핀같은 인물을 한 배우가 하는 게 정말 큰 의미가 있고, 셋이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근간에 내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게 관건이에요. 극단적인 캐릭터 사이 벽을 깨부수는 거죠. 세 사람을 가르는 시선은 하나의 틀일뿐, 그 틀로 사람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 같아요. 단순히 퀴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연극에 관한 이야기죠.”   2막에 20대였다가 3막에 50대 다른 배우로 등장하는 아이바는 동성 커플 관계상 갑에서 을로 극명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작가의 의도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연습 때 실제 성소수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딱 ‘50대 아이바’같은 분도 있더군요. 굉장히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태도였는데, 중년 게이로 산다는 게 그만큼 힘들고 외롭다고 해요. 젊어서는 당당히 싸웠지만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거죠. 어쩌면 가장 소외된 계층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몸짓을 찰지게 표현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그들에게 공감이 잘 되냐고 물으니 “대한민국의 40대 남자 연극배우만큼 소외된 계층도 없다”고 답한다. “좀 웃픈 얘긴데, 연극한다고 하면 밥은 먹고 다니냐, TV는 언제 나오냐, 돈도 벌어야지 그래요. 30대까지는 미래성을 봐줬다면, 40대인 나를 보는 사회의 시선은 소외 그 자체죠. 연극에서 기반을 다져 매체에서 잘되신 분들이 토크쇼에 나가 ‘연봉 200만원이었다’는 식의 얘기는 제발 안했으면 해요. 본인이 좋아서 했고 얻은 게 있다면 그 시간과 노력을 돈으로 견줄 수 없는데, 그런 얘길 하면 어떤 부모가 연극하라고 할까요. 러시아처럼 존경받진 못할지언정 어둡고 가난한 이미지에 갇히는 게 속상해요. 연극 덕을 봤으면 연극이 너무 좋고 너무 배웠다고 말해도 모자란데, 한 달에 20만원 받았다는 얘기만 하는 건 화가 나요.”   완벽한 외모 때문에 편견을 갖기 쉽지만, 이승주는 누구보다 연극에 진심이다. 하지만 연극인이 연극만으로 연극판에서 버티기 힘든 시대인 건 사실이다. 그가 무대를 사랑하지만 떠나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영화 ‘악녀’(2017), 드라마 ‘스케치’(2018) 등 매체 문도 두드렸지만, 개점휴업 상태가 오래 갔다. “작품 하나 끝나면 몇 개월 쉬게 되는 그 시간을 못 견딘 거죠. 우연히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됐는데, 나름 성취감도 있더군요. 연기를 관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세월이 갔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힘들 때마다 한태숙, 김광보 연출님이 ‘너는 연극배우다. 잊지 마라’는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혼자 많이 울었죠.”   5년 공백기 거친뒤 예민한 성격 둥글어져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남 로버트를 연기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결국 다시 돌아온 것도 김광보 연출의 부름을 받고서다. 하지만 5년 만에 쿨하게 무대를 밟기란 쉽지 않았다. “미칠만큼 힘들었다”면서 오히려 데뷔무대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수영을 추켜세웠다. “발가벗겨진 느낌이라 처음엔 무대에 잘 서있기도 힘들거든요. 그런데 수영이는 종류는 달라도 큰 무대에 많이 서봐서 그런가봐요. 혼자 준비한 것뿐만 아니라 리액션도 잘하고 되게 살아있죠. 영감을 주는 배우랄까요.”   공백기가 약이 된 면도 있다. 연기에 대해 병적으로 예민하던 성격이 조금은 둥글어졌다.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해요. 전에는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워갈 정도로 필사적이었죠. 연출님한테 새벽에 카톡 보내고. 그저 잘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그게 남을 불편하게 했다는 걸 쉬면서 깨달았어요. 본질은 그대로겠지만, 날카롭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작인 ‘튜링머신’ 공연과 ‘와이프’ 연습을 병행하는 ‘겹치기’도 데뷔 이래 처음 해 봤다고. “스스로 가장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지금 간절한 버킷리스트도 생겼다. “오래 전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봤거든요. 마치 연극을 찍어놓은 것 같은 오래된 흑백영화였는데, 왠지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그 영향으로 연극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10년 전 ‘유리동물원’ 드라마투르그였던 이화여대 강태경 교수님이 최근 햄릿에 관해 쓰신 책을 보내주셨어요. ‘자네의 햄릿을 꼭 보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요. 복귀 후에도 늘 불안했었는데,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다른 사람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더군요. 죽을 때까지 연극을 놓지 말자고 결심했고, 햄릿도 꼭 하고 싶습니다.” 왕자형 외모에 살짝 미친 듯한 연기가 전매특허인 이승주 만큼 햄릿에 찰떡인 배우가 있을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1.27 00:07

  • 대역전 드라마 쓴 ‘팬텀 키즈’…스포츠영화 같은 감동 줄 것

    대역전 드라마 쓴 ‘팬텀 키즈’…스포츠영화 같은 감동 줄 것

     ━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   최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과로 성악계가 떠들썩하다. 준결선에 진출한 남성 9명 중 8명이 한국인이었다니, 새삼 ‘가무의 민족’임을 실감한다. 최근 막 내린 JTBC ‘팬텀싱어’ 시즌4에서도 탄탄한 실력의 크로스오버 싱어가 여럿 배출됐다. 지난 2일 생방송으로 치러진 결승 2차전에서 대역전극 끝에 우승한 ‘리베란테’는 연세대 성악과 재학생 3명(테너 진원·정승원, 바리톤 노현우)과 성악을 전공한 뮤지컬 배우 김지훈이 뭉친, 평균 나이 26.7세의 역대 최연소 팀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포기하고 출연   JTBC ‘팬텀싱어’ 시즌4 우승팀 ‘리베란테’. 왼쪽부터 바리톤 노현우, 테너 정승원, 뮤지컬배우 김지훈, 테너 진원. 최기웅 기자 쟁쟁한 유학파 선배들을 제치고 왕좌에 오른 건 팬덤의 힘이 컸다. 결승 1차전에서 월드클래스 카운터테너 이동규가 이끈 ‘포르테나’가 압도적인 점수로 우승 문턱까지 갔지만, 리베란테 팬덤이 대국민 투표에서 화력을 과시했다. 신촌 유플렉스 전광판에 리베란테 투표 독려 광고가 걸렸을 정도다. “신촌 한복판에 우리 얼굴이 걸리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팬들이 함께 마음 모아서 해 주신 것인 만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김) “지쳐가는 타이밍에 그 메시지들이 너무 큰 격려가 됐어요.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자는 마음을 가졌던 게 11개월 여정에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노)   리베란테는 좀 이상한 팀이다. 혼자 나와서 4중창 팀을 결성해 가는 콘셉트인 방송이니 웬만큼 일심동체가 아닌 이상 팀 구성이 오리무중인데, 이들은 한 명씩 더해 가는 과정이 마치 무적의 아이템을 장착해 가는 듯했고, 깨지지 않을 팀이란 게 뻔히 보였다. “‘MZ네 진지맛집’으로 처음 완전체가 됐을 때 마음가짐이 절대 안 변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벅차오름은 한 번 느끼면 잊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죠. 의리보다 더한 진심이 통했달까요.”(노) “처음에 원이와 ‘꼬제(Cose)’ 부르면서 가슴 속 뜨거움을 동시에 느꼈거든요. 승원이, 현우가 더해지면서 점점 뜨거워졌고요. 이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하면 이 뜨거움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김)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2라운드 진원·김지훈의 ‘진지맛집’부터 탄탄하게 구축된 서사가 있었다. 듀엣 결성을 위해 서로를 탐색하는 장에서 지훈이 원에게 다가가 “빛나게 해 주고 싶다”며 끈질기게 구애(?)하는 과정이 생생히 전파를 탔다. 이후 한 명씩 더해질 때마다 아빠미소를 지으며 모두가 빛나는 무대를 만들어가는 지훈의 모습은 마치 마에스트로 같았다. “중창 팀에서 제가 메인이 될 사람은 아니란 걸 일찌감치 깨닫고, 그렇다면 내가 정말 좋은 사람들 모아 멋진 팀을 꾸려보자고 한 거죠. 빛나게 해 주겠다고 했지만 제가 도움 받은 게 더 많아요. 팀원들이 아이디어가 훨씬 많고, 저는 그저 정리하고 조율하는 역할만 하고 있어요.”(김) “혼자 무대에 서는 것과 교감하면서 노래하는 건 정말 다르더군요.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달라지는데, 지훈이 리더로서 음악에 빠질 수 있게 분위기를 잘 만들어줘서 좋은 무대가 나올 수 있었어요.”(진)   그런 지훈도 혼자는 어려웠다. ‘음색깡패’의 면모를 처음 과시한 프로듀서 예심 때는 사실 컨디션 난조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전날 밤을 꼴딱 새고 새벽에 갔더니 목이 꽉 잠겨 버린 거예요. 시작하는 순간까지 극심한 공포감에 시달렸죠. 준비했던 것 하나도 못 보여드렸어요.”(김) “제가 같은 조라 다 목격했어요. 유독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웃음) 안절부절 못하고 굉장히 불안해 하길래 안쓰러웠죠.”(정)   2016년 시작된 ‘팬텀싱어’는 음악계를 어느 정도 바꿔놨다. 중장년층 여성 위주로 성악가들에게 대중적 팬덤이 생겨났고, 공연 시장의 판도까지 달라졌다. 최근 비중이 부쩍 커진 클래식 공연 중 티켓파워 상위권을 차지하는 건 크로스오버 공연들이다. 역사가 짧은 크로스오버가 당당히 클래식의 한 축으로 떠올랐고, 성악가들의 활동반경도 넓어졌다. 실제로 남자 성악도 상당수가 팬텀싱어 도전을 고민한다고 한다.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노래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걸요. 무대에 대한 간절함이 있으니까요.”(진) “성악도들은 콩쿠르유학파와 팬텀싱어파로 나뉘는데, 중간에서 고민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유학파인 줄 알았던 승원이 형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못했거든요.”(노)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싸이가 ‘챔피언’ 부르는 모습에 반해 노래를 시작했어요. 부모님 권유로 성악으로 돌려 순탄하게 노래를 해 왔는데, 뭔가 인생에 첫 도전을 해보고 싶던 차에 팬텀싱어가 타이밍이 잘 맞았죠. 근데 초반엔 참 어렵더군요. 나를 내려놓는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졌을 때 ‘진지맛집’을 만났는데,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고민이 사라지고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정)   파바로티의 화려한 발성을 닮은 승원이 의외로 싸이로 인해 노래를 시작했다면, 진원과 노현우는 팬텀싱어로 인해 노래를 하게 된 ‘팬텀 키즈’들이다. 진원은 시즌1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 손태진의 사촌으로 유명한데, 무려 5수 끝에 성악과에 입성했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테너 치고 묵직한 발성이 반전인데, 알고 보니 바리톤으로 시작했다고. “형 때문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는데, 고3 때 노래를 시작해 재수까지는 억지로 했어요. 3수 때부터 조금씩 애정이 생겼고 발전도 있었지만 시험운이 없었죠. 막판에 선생님 권유로 성부를 바꿨는데, 테너로서는 운 좋게 4개월 만에 들어갔네요.”(진) “저도 인문계 고등학생일 때 엄마가 챙겨 보시던 팬텀싱어를 중간에 우연히 보게 됐어요. 따라할 수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고 화음 맞추는 것에 두근거림이 있었고, 저도 모르게 성악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팬텀싱어 무대에 서는 꿈을 품고 노래를 시작한 건데, 막상 나와 보니 너무 힘들었어요. 바리톤 솔로는 더 울림 있고 질감 있는 소리를 내기 위해 훈련하는데, 중창에서 튀지 않고 묻어나는 법을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이 팀에서는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신나게 하다 보니 어느새 묻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어요.”(노)   ‘MZ네 진지맛집’ 으로 완전체 구축   지난 2일 결승 2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자 기뻐하는 리베란테 멤버들. [사진 JTBC] 엄청난 성량의 동굴저음과 카운터테너 뺨치는 극고음을 겸비한 노현우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에 올랐지만, 팬텀싱어 일정과 겹쳐 과감히 콩쿠르를 포기했단다. 팬텀싱어가 되기 위해 성악을 시작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언젠가 오페라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팬텀싱어가 오페라나 성악계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요. 팬텀싱어를 통해 음악을 사랑하게 된 저같은 학생도 있고, 오페라계에서도 크로스오버까지 할 수 있게 된 세상이 왔으니까요. 초창기엔 오해와 의심의 말들도 있었지만, 팬텀 출신이라고 오페라에 도전 못하는 세상도 아니고, 오페라를 한다고 팬텀에 도전 못하는 세상도 아니라 생각합니다.”(노)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3명이 대학생이라 기말고사 보느라 바쁘다는 ‘리베란테’ 청년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음악 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지만, 신기하게 결이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정)는 게 이들의 말이다. 선배 팬텀싱어들처럼 각자 완성된 예술가는 아니지만, 서로 부족함을 채워가며 합을 내는 모습이 훈훈하다. 제법 커진 크로스오버 시장에 막 뛰어든 ‘팬텀 키즈’들은 이제 흰 도화지를 어떤 색깔로 채워 나갈까.   “계속 듣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4중창은 직관적으로 자극시켜 줄 수 있는 힘이 있지만, 편안하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 가장 대중적인 크로스오버 팀이라는 말을 듣고 싶거든요. 자체 콘텐트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습 보여드리면서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가겠습니다.”(김) “4중창은 하나의 레이스 같아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절대 잃지 않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으로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음을 맞춰 가는 과정이죠. 다양한 사람이 팀으로 모여 협력해서 역전승을 거두는 짜릿한 스포츠영화 같은, 그런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노)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6.17 00:01

  • “팀 나와 몇달 폐인처럼 지냈다... 자유로운 지금이 내 본모습”

    “팀 나와 몇달 폐인처럼 지냈다... 자유로운 지금이 내 본모습”

     ━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성악가로 돌아온 ‘팬텀싱어’ 테너 김민석   ‘팬텀싱어’ 김민석이 돌아왔다. 시즌3 결승팀 ‘레떼아모르’의 멤버로 활약하다 훌쩍 무대를 떠난지 1년여 만이다. 지난 1월 예술의전당과 이천문화재단 신년음악회에 바리톤 김기훈, 소프라노 박소영 등 월드클래스 성악가들과 함께 등장했고, 지난달 발매한 첫 솔로 앨범 ‘아리아 다모레’는 클래식 차트 정상을 밟았다. 다음달 1일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첫 리사이틀도 연다.   컴백에 훈풍만 분 건 아니다. 지난해 건강문제를 호소하며 갑자기 팀을 탈퇴한 터라 레떼아모르 팬덤에선 곱지 않은 시선도 있고, 멤버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크리스털처럼 쨍한 고음과 우유처럼 부드러운 중저음을 겸비한 테너 김민석의 독보적인 음색을 “1년여간 유튜브만 돌려보며 기다렸다”는 팬들이 더 많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너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거든요. 누구도 못 만나고 집에서 나가지도 못했죠. 노래도 놓다시피 하고 폐인처럼 지냈는데, 그렇게 계속 살 순 없더군요.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면서 온기를 찾았고, 복귀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어요. 일단 퇴보한 상태에서 준비 과정이 쉽진 않았죠. 성악은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녹슬고 균형이 깨지는 몸의 기관과 같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지난해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했던 ‘팬텀싱어’ 출신 테너 김민석이 최근 첫 솔로 앨범을 내고 컴백했다. 박종근 기자 ‘무책임하게 팀을 떠났다’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제작 여건상 하루 2회씩 공연을 강행해야 하는 그룹 활동은 테너에게 큰 무리였다. 서정적이고 중저음이 돋보이는 ‘리리코’로 훈련해 온 그가 극고음을 소화하는 ‘레제로’ 역할을 요구받으면서 “한도초과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스케줄이 감당 안됐어요. 무대에 설 때마다 실수에 대한 불안이 쌓이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졌죠. 멤버들이 끌어주려 애썼지만, 도움 받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고음 담당자로서 혹시라도 팬들 실망시킬까봐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저로 인해 피해가 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팀을 떠나게 된 거예요.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다시 나올 용기를 준 건 팬들이었다. 쉬는 동안에도 팬카페에 매일 들어가며 멀리서 팬들을 바라봤다는 그다. “들어갈 때마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어요. 팀 탈퇴에 실망해 떠나가신 분들에겐 죄송한 마음뿐이죠. 그런데 활동할 때부터 저의 힘듦을 공감해 주신 팬들이 계시고, 그런 분들이 꾸준히 저를 기다려 주셨어요. 영상도 만들어 주고 옛날에 같이 했던 얘기도 나누면서요. 그렇게 제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오래 기다리신 만큼 앨범이 좋은 선물이자 의미가 됐으면 합니다.”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수줍은 미소 너머로 서글서글한 눈빛은 ‘팬텀싱어 올스타전’이 한창이던 2년 전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쩍 말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당시엔 아주 과묵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팀 안에 수렴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탓이다.   “그땐 정답만 추구했다면 지금은 저다워졌달까요. 솔직히 그 땐 눈치보기 바빴거든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미지라서, 실수하지 말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팀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4차원이냐고요? 그런 소리도 듣지만, 저는 정상이라 생각해요.(웃음) 그냥 저는 생각이 달라요. 내추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인터뷰를 해도 솔직하고 싶거든요. 혼자가 되니 책임감은 무겁지만, 지금 제 모습이 더 저다운 것 같습니다.”   첫 솔로 앨범 ‘아리아 다모레’는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아이다 중 ‘청아한 아이다’ 등 아리아 8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녹음한 정통 클래식 앨범이다. 테너라면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아리아들로만 골랐단다. “대학 시절 성악을 한창 배울 때 로망이었던 곡들로 골랐어요. 테너가 오페라 아리아를 오케스트라 반주로 녹음한 경우는 별로 없다던데, 그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타이틀곡을 꼽으라면 ‘그대의 찬 손’이죠. 주변에서도 목소리가 잘 감긴 것 같다고 하고, 저도 꼭 완창해보고 싶었거든요.”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클래식으로만 승부하려는 걸까 싶은데, “크로스오버 가수가 아니라 정통 테너로서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성악가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4월 1일 첫 리사이틀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들려준단다. “첫 단독 콘서트를 너무 큰 홀을 잡아서 많이 부담이 돼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다 안 차면 어쩌나 싶고요.(웃음) 테너가 한 공연에서 마이크 없이 ‘찐 클래식’도 부르고 크로스오버도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거든요. 성악과 팝은 발성의 톤 자체가 달라서 잘 계산하지 않으면 금방 목이 지치고 고장이 나죠. 저는 성악가지만 다양한 노래를 색다르게 부를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 해요. 극비인데 ‘싱어게인’ 출신 게스트와 듀엣으로 팝도 부를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웃음)”   1부에선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2부에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중 ‘뮤직 오브 더 나잇’, ‘지킬앤하이드’ 중 ‘지금 이 순간’,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중 ‘마리아’ 등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들을 부른다니 문득 궁금해졌다. 오페라나 뮤지컬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을까. “오페라는 대학 때 모차르트 ‘코지판투테’에서 페란도 역을 한 번 해본 적 있어요. 오페라나 뮤지컬이나 워낙 많은 사람의 노고가 필요한 분야인데, 제가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연기도 해본 적 없으니까요. 만일 ‘오페라의 유령’ 섭외가 온다면요? 그럼 해야죠. 기왕 할 꺼면 팬텀 역을 하겠습니다.(웃음)”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3.25 00:02

  •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장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 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영세 개발사와 함께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갖고 실천하는 점을 국내 기업들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플레시먼힐러드코리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게임·웹툰·동영상 등의 유료 콘텐트가 있으면 소비자는 앱의 내부 결제 시스템을 통한 ‘인앱결제’를 해야만 한다. 앱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2020년 이를 의무화해서다. 이 때문에 논란도 거셌다. 특히 콘텐트 개발자들은 플랫폼에 30%씩 내야 하는 인앱결제 수수료 부담이 큰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구글은 자사 앱 유통 플랫폼 ‘구글플레이’에서 유료 콘텐트를 판매하는 개발사들에 받던 인앱결제 수수료를 2021년 7월부터 반값 수준으로 인하했다. 최초 100만 달러(약 12억6000만원) 매출에 15% 수수료를 적용, 이를 초과한 매출에 대해서만 30% 수수료를 받는다. 전체 개발사의 99%가 연매출 100만 달러 미만임을 고려하면 영세 사업자일수록 비용 부담을 덜게 된 셈이다.   7일 만난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창업대학장)는 “구글 측이 ‘앱생태계상생포럼’을 통해 각계 의견을 청취하는 데 열린 자세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변화”라며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가 강한 국내 대기업들이 배울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앱생태계상생포럼은 국내 앱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공유, 앱 생태계의 상생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20년 11월 구글코리아가 발족한 전문가 포럼이다. 장 교수가 의장을 맡은 가운데 정보기술(IT)·법률·심리·언론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 10명이 각 기수 멤버로 참여했다(현재 3기 운영 중). 구글의 수수료 인하는 이 포럼에서 나온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물 중 하나다.   지난해 서울대 교수를 하다 가천대 창업대학장으로 옮길 때 큰 화제가 됐는데. “종합대학에서 창업대학을 따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창업 관련 교육을 하는 게 한국 사회에선 새로운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진화심리학자로서 학생들한테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가르치는 데 힘쓰고 있다.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창업 열기도 확 식지 않았나. “확실히 힘든 시기다. 하지만 지금이 오히려 창업 준비의 적기(適期)다. 혹한기인 지금 아이디어를 잘 발전시키면서 내실 있게 준비했다가 경기가 좋아질 때 치고 나가면 된다. 현재 창업대학 1기 수료생 30명이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앱생태계상생포럼 의장을 3기째 맡고 있다. “처음 구글코리아에서 의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특정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모임이 되진 않을까 해서였다. 초기에 인앱결제 문제를 논하면서 구글 측 반응을 살폈더니 외부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김경훈 구글코리아 사장은 2021년 2월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포럼에 결석하지 않았다. 적당히 축사(祝辭)만 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빽빽이 기록하고 더 고민하면서 포럼에서 나온 얘기를 임직원들과도 계속 공유한다고 들었다.”   포럼에선 어떤 얘기들을 하나. “데이터 문제, 알고리즘의 편향성, 웹 3.0, 스타트업 지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구글코리아 경영진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보면 나도 많이 배운다. 구글 전체에서 이런 포럼을 여는 곳은 한국밖에 없지만, 여기서 나온 얘기가 번역돼 미국 본사로 넘어간다고 들었다.”   운영 성과는. “인앱결제 수수료를 기존 30%에서 15% 비율로 낮추는 데 일조한 게 대표적이다. 과거에 비해 영세 사업자들이 그만큼 구글플레이에 입점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포럼에 참여하는 법학자와 심리학자, 개발자, 뇌과학자 등이 앱 생태계의 진화 방향을 입체적으로 고민한다. 플랫폼 기업과 콘텐트 개발사, 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조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다.”   앱 생태계가 왜 중요한가. 소비자 입장에선 단순히 서비스가 빠르고 사용료가 저렴하면 그만 아닌가. “플랫폼마다 수많은 개발사가 입점해 자기 것을 판매하고, 수많은 소비자가 그걸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개발사는 각종 법적 리스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고, 소비자는 안전하게 개인 정보를 보호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플랫폼 기업이 시간·비용을 들여서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누구나 개발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소비자가 되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 앱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현명하게 앱을 다룰 수 있다.”   인앱결제 의무화는 논란이 거셌다. “나도 처음엔 소비자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봤는데 포럼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으니 (인앱결제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관점을 바꿔 서비스 유지를 위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만 봐도 극소수의 잘나가는 스타 유튜버가 대부분의 수익을 가져가고 대부분의 유튜버는 수익이 거의 없다. 이들도 유튜브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상이 없다면 불공정한 게 아닌가. 이게 평상시의 내 불만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구글 측은 소수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대다수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서버 등의) 유지비로 쓴다고 하더라. 기업 입장에선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랫폼 기업과 영세 개발사 간의 상생도 중요한데. “구글의 경우 구글플레이에 새로 입점한 영세 개발사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을 준 다음 일정 수준 매출이 발생해야 돈을 받기 시작한다. 구글은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창구’(창업+구글플레이)를 통해 국내 소규모 개발사들이 해외에 진출하려 할 때 초기 마케팅 비용 등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글로벌 기업으로서 다른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확실히 갖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배울 점이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3.02.18 00:56

  •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  [국민의힘 전대 ‘2강’] 김기현 당대표 후보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며 “보수 정체성 측면에서도 내가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자신을 ‘승리의 리더’로 정의했다. “2021년 소수 야당 시절 원내대표를 맡은 뒤 20%대였던 당 지지율을 2배 가까이 끌어올리고 정권 교체와 지방선거 승리를 이끌며 2전 2승을 기록했다. 스포츠에 빗대면 A매치 승률 100% 사령탑”이라면서다. 그러면서 “이젠 일하는 여당의 모습으로 총선에서 승리해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이뤄낼 것”이라며 “이를 위해 지금 우리 당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당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3·8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중반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선명성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100% 당원 투표제 도입으로 열성 당원들 표심이 당락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로 떠오르면서 당대표 후보들도 TV 토론과 합동 연설회에서 정통 보수의 정체성을 앞다퉈 강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오랜 세월 보수 정당을 굳건히 지켜온 뚝심으로 세대·지역·계층을 두루 포용하는 당대표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당정일체론’을 거듭 주장하고 있는데. “당정 관계는 ‘밀당 부부’에 비유할 수 있다. 당과 정부는 운명 공동체다. 잘되면 같이 잘되고 잘못되면 같이 잘못되는 사이다. 별거 중인 부부 관계가 아니란 뜻이다. 더 나아가 당정이 건강한 부부 관계로 거듭나려면 때론 밀당도 필요하다. 한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각에선 당이 ‘용산 출장소’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적잖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자꾸 대통령의 당무 개입을 지적하는데 참 답답한 노릇이다. 애당초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란 용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헌 8조를 보면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당의 정강 정책을 국정 운영에 잘 반영하고, 당은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협조하게 돼 있다. 민심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대통령이 집권 여당과 머리를 맞대는 걸 어떻게 당무 개입이라 할 수 있나.”   윤 대통령의 명예 대표 추대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헌상으론 대통령이 명예직을 갖는 게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과 당은 동지적 관계다. 어떤 직책을 따로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부부 관계에서 남편이면 남편이고 아내면 아내지 명예 남편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나.”   김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윤핵관’이 득세할 것이란 지적도 끊이질 않는다. “오히려 윤핵관이 왜 나쁜지 되묻고 싶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도 ‘가신’이라 불린 측근 그룹이 있었는데, 그럼 그들도 다 나쁜 사람인가. 문재인 정권 때도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대통령 주변에 많았는데 그들도 무조건 찍어내야 할 대상인가. 오로지 자신들 필요에 따라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나쁜 프레임일 뿐이다. 대통령에게 믿을 만한 정치적 동지가 있다면 그게 더 바람직한 일 아닌가.”   김 후보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낮은 수도권 인지도가 약점으로 거론되는 데 대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인지도가 한 자릿수에 그쳤지만 지금은 50% 턱밑까지 상승했다. 보수 정체성은 물론 외연 확장성 측면에서 내가 적임자란 뜻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총선 승리는 당대표의 수도권 인지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도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리더십이 핵심”이라며 “나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그 리더십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내년 총선의 공천 원칙이 있다면. “오롯이 후보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상향식 공천을 통해 최상의 후보를 뽑을 것이다. 다행인 건 우리 당이 그동안 수차례 공천 룰을 개선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공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도를 바꾸는 방안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공천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오히려 당이 총선 과정에서 대통령 의견을 듣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 차원에서 일반 당원들 의견도 경청하는데 1호 당원인 대통령의 생각은 당연히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 의사도 듣지 않을 거면 집권 여당을 왜 하나. 대통령뿐 아니라 당의 원로들과 당 외곽에서 우리 당을 사랑하는 분들의 고견을 충분히 듣고 최적의 공천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대선 이후 당내 많은 분란이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그런 만큼 지금은 당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전대 과정에서 ‘연포탕(연대·포용·탕평) 정치’를 계속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당대표가 되면 좋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당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뒤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 과제에 집중할 생각이다.”   김 후보는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선 “민생 현안만큼은 여야가 최대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며 “대표가 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야당 대표와 회동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야당과 싸워야 할 땐 적극적으로 싸울 것이다. 협상의 결과는 상대방에게 빌어서 얻는 게 아니라 싸워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후보의 정체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안연대’ 가능성도 내비쳤는데. “당대표가 아닌 당 소속 의원 자격이라면 안 후보와도 얼마든지 뜻을 같이할 수 있다는 취지다. 같은 당 의원인데 당의 발전과 총선 승리, 나아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연대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안 후보가 당대표가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문재인·박원순 당시 후보들과 연대한 이유를 안 후보는 우리 당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 당은 곧 사라질 정당이란 말까지 하지 않았나. 앞뒤 행적이 다른 분이 당대표가 돼선 안 된다.”   남은 기간 경선 전략은. “상품에 비유하면 나는 신선함이 강점이다. 명시적인 성과도 있다. 반면 상대 후보는 선거 때마다 출마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대표가 되면 당이 어떻게 바뀔지 당원 한분 한분께 소상히 보여드릴 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게 선거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당심에 호소할 계획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18 00:01

  •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  [국민의힘 전대 ‘2강’] 안철수 당대표 후보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은 수도권에서 승패가 갈릴 것”이라며 “내가 대표가 되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당대표 후보 중 유일한 수도권 3선 의원인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를 필두로 선출직 최고위원 전원이 수도권 지역구”라며 “우리 당도 3·8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 전략에 대항할 필승 진용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당대표 본경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후보 간 신경전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 15일 첫 TV 토론에서도 김기현 후보가 ‘정통 보수의 뿌리’를 강조하자 안 후보는 ‘수도권 대표론’으로 응수하며 팽팽히 맞섰다. 최근엔 친윤계 핵심 인사들이 군불을 지핀 ‘당정일체론’이 ‘대통령 명예대표론’으로 확산되며 분위기가 한층 과열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전당대회는 윤심에 맞는 후보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라며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대통령 명예대표론이 논란을 빚고 있다. “우리 당헌상 대통령은 명예직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전당대회 중에 이런 말이 불거지면 자칫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국민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 또 대통령을 전당대회에 끌어들이는 게 과연 내년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겠느냐. 이번 전당대회는 민심에 호소해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다. 나를 포함한 당대표 후보 모두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 후보는 컷오프 1위라고 주장한다. “컷오프 결과는 철저히 비공개 사안이다. 사실 확인이 안 된 보도를 활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증거를 내면 선거법 위반이고 못 내면 허위사실 유포다. 어느 쪽이든 당대표 후보로서 매우 부적절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미발표된 컷오프 결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에 장수가 병사 앞에서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듯 당대표도 위기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를 건네고 싶다.”   대통령 탄핵과 탈당 공방도 오가는데. “패배가 두려워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전략적으로 당원들을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집권 여당의 당대표 후보라면 탄핵 운운하며 흑색선전으로 당의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면 안 된다. 이런 막말과 실언은 총선에도 악영향만 미칠 뿐이다.”   김 후보는 지난 12일 “(안 후보는) 그동안 민주당과 결이 같은 주장을 펴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안 후보의 보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 후보는 이어 “지금은 정권 초기여서 대통령 눈치를 볼 수 있겠지만 대표가 되고 나면 이 장관 탄핵처럼 대통령에게 칼을 겨눌 수 있다는 걱정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탄핵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 장관 탄핵에 대한 입장은. “나는 지난해 12월 민주당의 이 장관 해임건의안에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번 탄핵소추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탄핵 추진은 ‘이재명 대표 수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국민이 부여한 탄핵권을 이 대표 개인 비리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 공세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민주당의 이런 행태는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선 투표 가능성도 큰데. “3월 8일 전당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날 반드시 1등을 하겠다. 자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당대표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보나. “첫째는 수도권 민심 파악, 둘째는 승리의 경험, 셋째는 중도층과 2030세대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수도권 선거는 많아봤자 5%포인트 이내에서 승부가 갈린다. 나는 20~30% 차이로 이겨 왔는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중도층과 2030세대의 고정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중도층 이탈로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중도층 표를 다시 가져올 수 있는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했는데. “당의 혁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당대표가 되면 공천 관리에만 집중하고 공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당대표의 사심이 들어간 공천은 총선 패배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당대표가 먼저 공천 불개입을 엄중하게 표명해야 정실 공천도, 외압 공천 시비도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 또 당이 원한다면 전국의 어느 험지든 가리지 않고 출마하겠다. 당대표가 먼저 희생을 감수해야 당을 결집시키고 민심도 얻을 수 있다. 만약 당에서 이재명 대표 지역구에 출마해 이 대표와 맞붙으라면 기꺼이 그러겠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3대 개혁을 추진하겠다. 첫째는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만들 거다. 당에 반부패 정치혁신특위를 설치하고 정치개혁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시행해 반부패 운동을 선도하고 확산시키겠다. 둘째는 ‘미래 대 과거’ 구도를 갖추겠다. 민간인 전문가들까지 포함한 인공지능(AI) 정치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챗GPT 대국민 소통 서비스’처럼 민주당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스마트 정당을 구축하겠다. 여의도연구원에 청년 정치 리더십 스쿨도 개설할 생각이다. 셋째는 ‘실용 대 진영’ 구도를 통해 극단적 진영 세력의 포퓰리즘 정치와 맞서 싸우며 개혁·실용정당을 발전시켜 나가겠다.”   남은 기간 어떤 각오로 임할 건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오세훈 후보를 도와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연 데 이어 지난해 대선 때는 윤석열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거대 야당이 독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정권 교체를 완성하는 길은 내년 총선에서 우리 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끝내겠다는 결자해지의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원들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최현목 기자 choi, hyunmok@joongang.co.kr

    2023.02.18 00:01

  •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지난 7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대일 관계는 반일이나 친일이 아닌 일본을 적극 활용하는 용일(用日)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에 빠졌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양국 정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특히 관계 개선의 선결 조건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열린 양국 외교부 국장급 협의에 이어, 오는 13일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를 계기로 한·일 차관이 만난다. 17~19일 독일에서 열리는 뮌헨안보회의에서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방위적으로 해법 찾기에 나선 것이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주요 외교 정책 중 하나다. 특히 상반기 방미를 앞두고 이 문제를 매듭지어 한·미·일 3각 공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한·일 정상간 셔틀 외교를 복원하겠다는 게 윤 대통령의 기대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청국 자격으로 참가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강제동원 협상은 기금 조성에 일본 기업의 참여 여부를 놓고 양국 이견이 팽팽하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를 만나 현재 진행 중인 강제징용 문제 협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들어봤다.   강제징용 해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양국이 협의하고 있는 방안은 제3자 변제다. 다시 말해 한국이 정부 산하 재단(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대신 변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의 수혜 기업 등이 참여한다. 관건은 미쓰비시 중공업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같이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고용했던 기업들의 참여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상으로 이 문제가 매듭지어졌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들 기업의 참여를 관철하기 위해 협상력을 집중하고 있다.”   양국이 타협안을 도출하지 못하면 결국 협상은 결렬되는 것 아닌가. “현재로썬 협상 타결 여부를 전망하기 어렵다. 단지 이전보다 일본 내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있다. 2013년 신일철주금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서울고법 판결이 나왔을 때 일본 여론은 싸늘했다. 한국이 이미 끝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트집을 잡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동남아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수 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실질적인 소송 당사자가 1000여 명밖에 되지 않고, 이 가운데 증거 부족 등으로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200명 정도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이미 시효 3년이 지나 새로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다. 금전적으로 봤을 때 200억원 정도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일본이 끝내 미쓰비시 중공업 등의 배상금 참여를 거부할 것으로 보는가. “일본은 실용주의 외교를 중시한다. 일본 정부는 협상의 성공 여부에 따른 손익을 계산할 것이다. 특히 한·일 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고심은 깊을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등 최고위층의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이다.”   국내 여론도 만만찮다. 전범 기업의 참여가 없으면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도 있는데. “우리 정부도 이와 관련해 또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최대한 공감하는 배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 생각으로는 지원재단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경우 대법원의 판결대로 일본 기업의 국내 재산을 매각해 현금화해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또 다른 과제다.”   양국은 배상과 함께 사과 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하고 있는데. “여기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일본 측이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와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을 계승하겠다는 선에서 정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협상에서 보듯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이 문재인 정부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의 불필요한 악화로 인해 글로벌 외교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대미 외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일 관계는 단순한 양자 관계라기보다 한·미 관계 속에 숨은 히든 코드로 볼 수 있다. 한·일 관계가 나쁠 때 한·미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한·일을 하나의 세트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일본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외교적 자원이자 공간이다. 제대로 활용하면 도쿄는 워싱턴에 긴밀히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베이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대북 관계에서도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우리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런 인식은 현 정부 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일본에 대해 친일과 반일 구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9세기 패러다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반일을 고집하면서 전략적 이익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면 반일도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친일이나 반일 대신 실용적으로 일본을 활용하는 ‘용일(用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보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아베 신조 정부 때부터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전략적 비중을 많이 낮춘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선 한국의 지난 정부가 대립각을 세웠기에 협력의 공간이 좁아졌다고 탓한다. 그러면서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을 배제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틀을 놓고 봤을 때도 한국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반도는 일본 외교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외교의 1순위인 미국의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일본도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3.02.11 01:09

  •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  취임 100일 맞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당명까지 바꿀 각오로 재창당에 매진해 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정의당이 풀어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이정미 대표 체제가 이달부터 재창당 수순에 돌입하면서다. 이 대표는 오는 11일 재창당추진위를 구성해 직접 위원장을 맡으며 당의 전면적인 쇄신 작업에 나선다. 4일 취임 100일을 맞은 이 대표는 “당명 개정까지 염두에 두고 올 상반기까지 재창당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대대적인 혁신과 변화를 통해 당원과 지지층의 동력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참패로 당의 성장 엔진은 사실상 실종됐다. 성 비위 사건과 갑질 논란 등 연이은 악재에 당원들의 집단 탈당 사태까지 불거지며 원내 3당으로서의 존재감도 급속히 약화된 상태다. 정의당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중앙SUNDAY가 이 대표를 만나 위기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극복 방안을 들어봤다.   취임 100일을 맞은 소감은. “하루하루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취임 다음날 이태원 참사가 발생해 진상 규명에 힘쓰다 보니 그새 100일이 지나간 것 같다. 무엇보다 창당 이래 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표를 맡게 된 만큼 마음이 매우 무겁다. 임기는 2년이지만 사실상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뛰고 있다.”   이정미 대표 체제의 성과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는데. “당장의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취임하자마자 당에 분칠부터 했을 것이다. 당명도 바꾸고 특권도 내려놓겠다고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3년 만에 당에 복귀해 보니 그동안 당이 입은 내상이 생각보다 깊더라. 골병이 너무 깊이 들어 장기 치유가 필요한 상황인데 겉모습만 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금은 현장을 다니며 당과 지지층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는 게 급선무다.”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   정의당은 지난해 9월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정의당의 지난 10년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당을 운영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라며 “정의당의 경우 공교롭게도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쳤고, 그 상황을 극복할 리더십이 굳건히 서 있지 못해 위기를 더욱 키운 것 같다”고 진단했다.   ‘포스트 심상정’의 차세대 리더십을 육성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잖다. “그 부분은 나를 비롯한 중진들 책임이 크다. 지난 총선 때 지역구에서 살아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심상정 의원을 능가할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했는데 여러모로 부족했다. 개인적으로도 뼈아픈 부분이다. 당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지지자층 입장에서도 기대감은 계속 줄고 꾸지람은 더욱 잦아지는 것 같다.”   10년째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민주당 2중대’ 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 아닌가. “요즘엔 ‘국민의힘 2중대’란 지적이 더 많다(웃음). 2017~19년 첫 당대표 시절엔 특정 정당이 의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정의당이 사안에 따라 여러 정당과 공조하며 캐스팅보터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고 대통령은 야당과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 않나. 지금 정의당이 할 일은 거대 양당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게 아니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민생 얘기라면 어느 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재창당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은. “크게 두 가지 축이다. 우선 기후위기·돌봄 등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 또 정의당과 함께할 사람들과 세력 확장을 도모할 계획이다. 다른 당의 재창당 사례를 보면 당 대 당 통합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 당을 환골탈태하는 시도도 있었는데 정의당은 이를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생각이다.”   부울경 노동 벨트 뿌리 말라가고 있어   이 대표는 그러면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10개를 전략 지역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정의당은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중심의 영남 노동 벨트가 중심축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지역이 너무 취약해지다 보니 당을 지탱하는 뿌리도 점점 말라가고 있다”며 “이젠 비례의석을 늘리는 전략만으론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내부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정의당의 지역구 의석 확대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부분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당의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지역에서 당선돼야 하는 구조다. 이를 깨기 어렵다며 도전하지도 않으면 당을 어떻게 운영하겠나. 힘들더라도 해내야 하는 몫이 있다면 총력을 다해야 한다. 재선 의원을 배출하지 못하는 정당이란 지적도 넘어야 할 산이다.”   당의 어젠다가 실종됐다는 비판도 많다. “우리 당은 최저 시민소득 도입, 노동시장 이중구조 타파, 돌봄 복지국가 등 주요 정책 대안을 줄기차게 얘기해 왔지만 여의도 정치 지형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대선 때도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을 놓고 선거 내내 싸우지 않았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당에 그만 싸우고 민생을 논의하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좀처럼 바뀌질 않는 게 현실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04 00:50

  •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  임기 마친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2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줄 세우기, 공식 외워 답 찾기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1등은 불안하고 2등부터는 불만인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입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요. 국내총생산(GDP)은 많이 올랐는데 행복지수는 꼴찌 수준이고, 청소년 자살률도 높습니다.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로 줄 세우기는 교육이 아닙니다. 기성세대, 특히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지난달 31일 임기 4년을 마친 오세정(70) 전 서울대 총장은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며 “정보화 사회에 맞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2016년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던 그는 2019년부터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했고 이제는 전공분야인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가 됐다.   1등도 불안,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교육   지난 4년을 돌아본다면. “우리나라 교육의 전환기였다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대학 교육의 목표는 남보다 빨리 첨단 지식을 배워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 취지라면 줄 세우기가 의미도 있고 효용도 충분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인 지금은 지식의 라이프타임이 3년이다. 평생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한다. 남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빨리 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재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난 4년간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떻게 교육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데 입학 정원을 바꾸는 건 전쟁이더라. 그래서 일단 들어온 학생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복수전공, 부전공을 확 풀었다. 앞으로 정원의 3분의 2 정도는 복수전공을 할 것이다. 학과에 대한 지원 규모도 입학 정원이 아니라 복수 전공을 포함, 수강생의 수로 기준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임기 중 인구 문제부터 시작해 양극화, 교육 등 장기 계획을 세우고 지금부터 준비하기 위해 국가미래전략원을 만들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씽크탱크가 목표다.”   재임 중 성과는 있었나. “지난해 QS 세계대학 평가에서 처음으로 20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이라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솔직히 서울대는 학생들이 알아서 좋은 성과를 내기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방시혁 HYBE 이사회 의장이 학교에서 뭘 배워서 성공한 건 아니지 않나. 좋은 친구들을 모아 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학교의 할 일이다.”   지난해 8월 오세정 당시 서울대 총장이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허 교수는 지난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했다. [뉴시스] 올해 서울대 수시 합격자 138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연고대까지 합치면 미등록자가 2200명이 넘는다. 대다수가 다른 학교 의대를 선택한 자연계 학생이라고 한다. 이공계 인력의 편중현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의대를 나오면 억대 연봉을 받고 늙어서까지 일할 수 있다. 반면 자연대나 공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업한들 정년까지 다니는 사람이 드물고 중간에 퇴직해서 갈 곳이 없다. 교수들이 황창규·진대제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공계 선배들 얘기를 해도 학생들은 그건 간혹 나오는 한두 명 사례에 불과하다고 반응한다. 근본적으로 이공계를 졸업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도 의대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대를 그만두고 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과 15년 전만해도 외환위기 이후 연구직들이 많이 쫓겨나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있었다. 그때는 문과를 더 많이 갔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뜨고, 소프트웨어 전공이 각광받으며 상황이 역전됐다. 의대 편중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산업구조나 인력구조가 망가지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교육의 질적 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입시다. 대입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어차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들어오니 합격자의 70%는 똑같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중고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훈련을 받느냐인데, 그건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은 보지 않고 결승점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뽑는 정시 전형은 좋은 제도가 아니다.”   국민 다수는 학생부 전형 같은 수시 전형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론조사를 하면 정시 선발이 공정하다는 응답이 70% 이상이다. 조국 사태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논문이나 수상 실적을 본 것은 10년 전의 얘기지, 지금은 학생부에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문제점은 많이 해소된 상태다. 오히려 정시는 단 하루 시험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한 문제만 실수해도 만회할 방법조차 없는데, 그게 과연 공정한 제도인지 의문이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설득이 안된다. 수능만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몇년 전 출제위원으로 선정돼 수학 문제를 풀어봤는데 반나절 동안 채 절반도 못 풀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니 수백개의 공식을 외워 답만 찾는 훈련을 반복해야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는다. 그런 공부로 과연 수학의 원리나 재미를 찾을 수 있겠나.”   입학 전형별로 학습능력에 차이가 있나. “특목고나 8학군 출신이 수능 점수 위주로 선발하는 정시에 가장 많다. 그런데 추적조사를 해보면 입학 후 학점은 수시 일반전형이 제일 좋고, 그 다음으로 정시, 지역균형 전형 순이다. 반면 졸업 성적은 수시 일반전형, 지역균형, 정시 순으로 높다. 정시가 가장 낮다. 취직도 이 순위다. 수능은 반복해서 훈련하면 점수가 높아지는 시험이다. 점수에 맞춰서 전공을 선택했거나 시키는 공부만 해서 그런지 대학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 지역균형 학생들이 처음에는 힘들어하는데 수업에도 적극적이고 곧잘 적응한다.”   지방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해간다는 말처럼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절벽에 따른 지방소멸은 심각한 문제다. 20년 뒤에는 수도권 대학 정원을 다 채우면 지방대에는 한 명도 안가도 된다. 이미 지방거점 국립대학교도 영향을 받고 있다. 수요에 맞지 않는 정원은 이미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다. 하지만 지방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에 대학교 하나 없는 상황을 두고 보겠나. 그러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미국 공대 대학원은 한국·중국·인도 학생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다. 우리도 개발도상국의 똑똑한 학생을 데려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한류 영향으로 인도네시아·베트남 등에 한국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많다. 호찌민의 베트남 국립대학에 가보니 한국 대학에서 받아준다면 오겠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학부 졸업 후 싱가포르 국립대에 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라. 이런 친구들에게 한국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건설 노동자나 베이비시터만 받을게 아니라 탑클래스 사람들을 받아야 한다.”   개도국 똑똑한 학생 유치 방안 찾아야   유학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수도권 과밀화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다. 사실 정부 기관이나 공기업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좋은 일자리, 의료 시스템, 인프라를 갖춰야 지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업은 예전에는 제조업이었지만, 지금은 4차 산업혁명으로 IT기업이 됐다. 그만큼 대학 인재가 중요하다. 좋은 대학이 없는 곳으로 좋은 기업이 가지 않는다.”   오 전 총장은 미국의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를 예로 들었다. 석탄과 철광석을 기반으로 한 제철 도시로 이름 높았던 피츠버그는 현재 금융·교육·의료 중심지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반면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는 쇠락해 녹슨 지역(러스트 벨트)의 대명사가 됐다. 오 명예교수는 이런 차이를 불러온 요인으로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런대, 피츠버그대 혁신연구소, 에너지기술연구소 같은 연구시설을 들었다. 반면 디트로이트는 수준급 대학이 없어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자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대학이 지방에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변화는 어디까지 왔나. “학생 선발, 교육 과정 등에 대한 문제는 인식한 것 같다. 해결책을 향해 몇 발자국 뗀 셈이다. 지금까지는 외국 명문대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따라가기만 했다. 이제는 중장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난 사람=김창우 사회에디터 changwoo.kim@joongang.co.kr, 정리=윤혜인 기자

    2023.02.04 00:01

  •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 방안, 겉만 번지르한 부실 밥상”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 방안, 겉만 번지르한 부실 밥상”

     ━  한국 최초 전산학 박사 문송천 교수   문송천 KAIST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 미래를 책임질 고급 데이터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유진 기자 지난해 8월 정부는 2026년까지 총 100만 명의 정보기술(IT)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5년간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SW), 빅데이터, 메타버스,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5G·6G 통신, 사이버 보안 등 8개 분야에서 초급(고졸·전문학사) 16만명, 중급(학사) 71만명, 고급(석·박사) 13만명 등 총 100만명을 양성할 계획이다. 고급 인력을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 고등교육법을 개정시켜 5년 6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학사·석사·박사 통합과정도 신설할 예정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정부 목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인재 양성에 필요한 교원 확보나 관련학과 정원 확대 등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양성한 후에는 어느 분야에 투입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 국내 최초 전산학 박사이자 컴퓨터 데이터베이스(DB) 분야의 권위자인 문송천 KAIST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기초 코딩 인력만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선심성 정책”이라며 “향후 국가 경쟁력이 될 소프트웨어 영역, 특히 DB를 설계, 제작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퇴직 교수·기업인 교육 현장에 투입해야   정부가 내놓은 계획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5년 내 100만 명의 인재를 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배출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이들 중 90% 이상이 단순 코딩을 소화하는 수준에만 머무를 것이란 점이다. 이런 인력은 지금도 남아 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차원의 데이터를 직접 설계, 제작해 여러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다. 그런데 이런 고급 인력을 어떻게 양성하겠다는 계획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100만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달성하는 것에만 공들인 계획이 아닐까 싶다. AI, 빅데이터, 메타버스 등 얼핏 들으면 전문적으로 보이는 분야만 늘어놓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차려둔, 실속 없는 밥상 같다.”   정부는 조기교육을 내세웠는데. “초등학교·중학교 정보 수업시수를 현행 17시간, 34시간 수준에서 2배 이상 늘리겠다고 하는데, 터무니없다. 학기당 10시간을 배우든, 100시간을 배우든 이들이 고급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될까. 코딩만 주야장천 하지 않겠나. 학교 선생님들조차 지식이 부족한데 시수만 늘려서는 결코 소프트웨어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대학에서는 인문계 전공생들이 달려들어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코딩 학원에 다니는 등 그야말로 전 국민이 소프트웨어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고급 인력들은 모두 기업에 가버리니 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특성화중을 제외한 전국 중학교 3172개교 중 정보교과 정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1510개교(47.6%)로 절반이 채 안 된다.”   교육인력을 확보할 방안이 없나. “사실 이 문제는 법만 개정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수년 사이 쏟아져나오는 퇴직 교수, 은퇴 기업인들을 재고용해 교육 현장에 투입하는 거다. 정부는 민간인력에 교직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는데, 기업과 학교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을 왜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보·컴퓨터 교과 정교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2000명도 되지 않는데 감당이 가능한가. 나조차도 은퇴 후 학교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하고 싶었는데 자격이 안 된다며 뽑아주질 않는다. 나름 전산학 1호 박사인데. (웃음)”   그간 수십만 명의 SW 전공자가 배출됐는데. “IT 강국인 우리나라 기업 중 세계 100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 이름을 올린 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2곳밖에 없다. 심지어 이 회사들은 소프트웨어와는 관계없는 하드웨어(반도체) 기업이다. 무늬만 ‘IT 강국’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네이버, 카카오도 해외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는 내수용 기업이지 않나. 세계 SW 시장 규모는 매년 커지는데, 우리나라 점유율은 0.9%에 불과하다. 아무리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이라고 해도 경쟁국인 중국, 일본, 대만 등에 뒤처졌다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DB 관리 안 돼 2000억 들인 시스템 삐끗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그동안 AI, 빅데이터 등 최상위층에 있는 기술 개발에만 매달려 뜬구름만 잡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SW 개발의 시작은 DB를 구축하고, 설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코드를 가져다 입력해도 밑바탕이 되는 DB가 엉망이면 결과물이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화려한 용어와 신기술에 휘둘려 이 부분을 소홀히 해왔다. 대학에서도 이미 정제된 DB를 가지고 시험문제를 풀게 하고, 기업들은 자체 DB 개발보단 외주업체 대행을 선호해왔으니 누가 제대로 다룰 줄 알겠나.”   문 교수는 최근 LG CNS, 한국정보기술 등 국내 최고수준의 시스템 통합(SI) 업체들이 투입된 보건복지부 차세대 사회보장시스템이 개통 첫날부터 말썽을 부린 것도 기초가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0억원에 가까운 세금을 투입했는데, DB가 제대로 설계되지 않아 그야말로 폭삭 무너졌다는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금융사 개인정보 유출 문제도 모두 DB 관리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기초 DB가 형편없는데 최상위 기술인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을 개발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대안은 있나. “인도처럼 단순 코딩만 반복하는 SW 용역 국가를 지향한다면 지금처럼 전공자 숫자만 늘리는 정책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SW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신산업 먹거리 아닌가. 언제까지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이 가진 능력에 기대 살아남을 순 없다. 필연적 미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모든 디지털 기술의 원천인 DB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말만 그럴듯한 AI를 내세워 ‘디지털 인재’를 키우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질 ‘데이터 인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1.28 00:55

  • “경제 위험 과대 해석 말라, 올 하반기 이후 개선될 듯”

    “경제 위험 과대 해석 말라, 올 하반기 이후 개선될 듯”

     ━  이종렬 한국은행 부총재보   위기를 경계하되, 균형잡힌 시각이 중요하다. 이종렬 부총재보는 “현재의 위험은 올바른 정책대응으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김상선 기자 “우리가 경제 상황에 대한 지나친 우려로 지레 위축될 경우 오히려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 지난 3일 범금융 신년인사회)   “지방간이나 위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중병에 걸릴 것으로 지레짐작하여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방안에 누워있기보다는 식습관을 고치고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대처법이다. 과도하게 위축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 지난 9일 한은 블로그)   최근 한국은행 고위급 인사들이 경제 상황에 대한 과도한 우려를 경계하는 메시지를 연이어 내놨다. 위험을 과대 해석해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부총재보는 지난해 12월 한은이 발표한 ‘2022년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를 바탕으로 ▶현재 금융시스템 상황 ▶가계 채무상환 능력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험성에 대해 아직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한은 부총재보급 인사가 최근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담긴 글을 직접 한은 공식 블로그에 올린 것은 처음이다. 이 부총재보는 금융안정보고서를 작성하는 금융안정국 등을 총괄하고 있다.   차주 DSR, 코로나 이전 수준 밑돌아   올해 경제 전망은 어느 때보다 암울하다. 전세계적으로 긴축 기조가 이어지며 글로벌 경기가 둔화하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단기 금융시장이 불안해졌고, 고질적인 가계부채와 자산가치 하락에 따른 부동산 관련 부실 문제도 직면하고 있다. 정부도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로 낮췄다. 한은 보고서에서도 금융시스템 리스크 불안 가능성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2022년 하반기 시스템 리스크 평가’ 결과에 따르면, 단기(1년 이내) 시계에서 시스템 리스크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중이 58.3%에 달했다. 2012년 시스템 리스크 평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 한은이 바라보는 우리 경제의 위험 수준은 어떨까.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바탕은 무엇일까.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를 인터뷰했다.   대내외 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위축되지 말자’는 메시지를 직접 올린 이유는.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금융안정 상황을 평가하고 그 취약성과 리스크에 대한 점검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리스크 요인이 부각되면서 잠재위험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금융안정 상황을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더 자세한 설명을 담은 글을 올리게 됐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우리의 대응능력을 과소평가해 위험을 증폭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장 참가자의 불안이 과도하게 커지면 오히려 자기실현적 손실로 이어져 불안이 더 확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세간의 반응이 엇갈린다. 대체로 경제 위기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에는 수긍하면서도 “얼마나 경기가 안좋으면, 한은이 연일 위축되지 말자고 강조하냐”는 시선부터 “감당하기 힘든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아직도 한은이 갈팡질팡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은의 상황 인식이 다소 낙관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위기 발생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 아닌가. “2022년 하반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은 주요국 정책금리가 빠르게 인상되는 가운데 레고랜드 사태와 같은 우발적인 신용사건이 더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영향이 반영되면서 금융불안지수(FSI) 지표가 위기단계(22) 수준까지 빠르게 높아졌다. FSI는 한은이 금융안정 상황을 가늠해보는 지표로, 단기적 시계에서 가격변수의 변동성과 신용스프레드, 심리지수 등 금융시스템의 불안 상황을 보여준다. 다만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당시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었고, 이후 정부와 한은의 적극적인 시장안정화 조치에 힘입어 지난해 11월 이후 FSI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진정되는 양상이다. 또한 금융시스템에 내재된 중장기적 취약성을 나타내는 금융취약성지수(FVI)도 장기평균 수준으로 점차 수렴해 가고 있다. 금리상승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FSI가 상승할 수 있겠으나, 중장기적으로 대내외 부정적 충격이 금융부문 취약성을 통해 실물경제로 전이되는 영향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고 있다고 본다.”   올해 경제 전망이 어둡다.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다시 말하자면 단기(1년 이내)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중장기적 관점에서는 안정적으로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차원이다. 여기에서 ‘단기’는 올해다. 개인적으로 2023년, 아니 올 상반기가 제일 어려운 시기일 수 있다고 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부총재보는 가계채무와 부동산 경착륙 우려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진단했다. 특히 이 부총재보는 지난해 3분기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차주의 평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60.6%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인 2015년~2018년(62~63%) 수준을 하회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도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금융 불안 뇌관으로 떠오른 부동산 PF도 대출 일부가 부실화되더라도 우리 금융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한은이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통해 부동산 경기 부진이 단기에 그칠 경우(주택가격 15% 하락, 부진 기간 1년) 금융기관 전반 자본비율은 양호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부동산 경기 부진이 장기화할 경우(주택가격 30% 하락, 부진기간 3년)에는 금융기관 자본비율이 상당폭 하락할 수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해 전국 주택 가격이 실거래 기준 15% 하락했다. 3년간 30% 하락도 올 수 있지 않나. “한은이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주택가격이 30% 하락하고 그 기간도 3년 이상 장기화하는 경우’라고 말한 시점은 2022년 9월 말 기준이다. 여기서 추가로 30% 하락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다. 금융기관의 양호한 건전성과 최근 정부의 연착륙 대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주택시장 부진이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본다.”   ‘숨겨진 연체’에 대한 우려가 크다. “가계대출 연체율은 최근 들어 대내외 여건이 안 좋아지면서 상승 전환했다. 그러나 2022년 9월 말 기준 금융권 가계대출 연체율은 0.6%로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2009년 3월말 2.3%) 수준을 크게 하회하고 있다. 대내외 충격에 대한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 전반의 건전성은 여전히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정부의 금융지원정책이 지속함에 따라 자영업자 대출을 중심으로 연체 발생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측면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금융기관들도 대손충당금 추가 적립, 자본확충 등을 통해 손실 흡수능력을 높여가야 한다.”   지난 13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3.5%로 인상한 직후, 이창용 총재는 향후 금리 동결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금통위 직후 시장에선 앞으로 금리가 동결될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JP모건과 씨티 등은 현 수준인 3.5%에서 금리 인상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했다. 금리 수준을 선반영하는 국고채 금리도 떨어졌다.   컨틴전시 플랜 준비해 신속 조치   한은은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시장은 사실상 동결로 보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금리가 급상승할 때는 어디가 고점인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컸다면, 지난번에 기준금리 3.5% 또는 3.75% 가능성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금리 인상의 끝이 보이는구나 하고, 거기에 맞춰 시장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1월 금통위에서 이창용 총재는 “현시점에서는 시기상조이나 물가가 중장기적으로 정책 목표 수준으로 확실히 수렴해 간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때 가서 금리 인하에 관해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기대인플레이션이 오히려 소폭 상승했다.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면, 금리 동결이나 금리 인하는 예단하기 어렵다.”   금리 인상이 3.5~3.75%로 종료될 경우 한·미 금리차에 따른 리스크는. “지난해 하반기 우리 경제를 돌아볼 때, 한·미 간 정책금리 격차가 자본유출입 등에 기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국내외 경제 및 금융시장 여건 등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금리 격차에 대해 유의해서 지켜봐야 하겠지만, ‘얼마 이상이면 위험하다’는 식으로 단정해 부정적 영향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현재 위험은 “올바른 정책 대응으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근거가 무엇인가. “위험에 대비한 대응 방안, 소위 컨틴전시 플랜을 준비하고 각 위기 진행단계에 맞는 조치를 신속히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레고랜드발 단기 자금시장(PF ABCP)  불안에 대응해 한은과 정부는 정책 공조를 통해 시장안정화 조치를 전격 시행하고, 상황에 따라 대응조치 수준을 조절해 나갔다. 가계부채 및 부동산 등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인 대응방안 마련을 강구하고 있다. 부동산과 연계돼 누증된 가계부채 리스크 관리를 위해 DSR 등 소득기반 대출원칙을 정착해 나가는 한편 가계부채의 질적 구조 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은은 정부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고민해 나갈 것이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1.28 00:01

  • “명령 따른 계엄군, 그들도 죄책감·트라우마로 고통”

    “명령 따른 계엄군, 그들도 죄책감·트라우마로 고통”

     ━  용서·화해의 손 내민 5·18 단체 회장들   황일봉(왼쪽)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과 정성국 5·18민주화운동 공로자회 회장. 최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계엄군과 경찰 묘역을 참배한 이들은 “명령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용서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필 객원기자 “명령을 따르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된 계엄군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들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17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투입됐다가 숨진 계엄군 묘역에 참배하고 광주광역시로 돌아온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자회) 임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황일봉 5·18부상자회 회장(이하 황 회장), 정성국 공로자회 회장(이하 정 회장), 홍순백 유족회 상임부회장 등 임원단은 최익봉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 총재(이하 최 총재) 안내로 계엄군과 경찰 묘역을 참배했다. 현충원에는 계엄군 장교 3명(29묘역)과 사병 20명(28묘역), 경찰 4명(8묘역)이 안장돼 있다.   황 회장은 참배를 마친 뒤 최 총재에게 특전사동지회 중앙 차원에서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참배를 건의했다. 최 총재 등 특전사동지회 모두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특전사동지회 150여명은 다음 달 19일 5월 3단체 사무실을 찾을 예정이다. 이때 5월 단체 150여명과 함께 매년 5·18묘역에 참배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화해와 감사- 새로운 도약 공동 선언식’을 하기로 했다. 이날 5·18묘역도 찾을 예정이다.   5월 단체 임원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 11일 옛 광주 국군통합병원 터에서 청소 봉사를 하던 계엄군 출신 시민을 만난 뒤부터다. 이 병원은 5·18 당시 고문과 폭행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곳으로 현재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국립 트라우마센터 건립이 예정돼 있다. 청소하던 계엄군 출신 시민은 5·18 당시 대원 80명을 데리고 시민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박성현 대위였다. 그는 5월 단체 임원들에게 사죄하며 자신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계엄군도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5월 단체는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5월 항쟁 당시 군인들은 명령 복종에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지시를 따랐단 점, 그 기억과 죄책감으로 43년 동안 고통받아왔던 점 등을 고려하면 계엄군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단 생각이 들어서다. 5월 단체와 특전사동지회 첫 공식적인 행사도 진행됐다. 지난 11일 특전사동지회 광주전남지부 관계자 3명은 군복을 입고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 있는 5월 단체 사무실을 방문해 감귤 20박스를 전달했다. 마음의 문을 연 5월 단체는 특전사 군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에도 이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번 참배에 대해 일부 5·18 단체 회원들은 “시기와 절차가 적절치 않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회원 대부분이 계엄군 묘역 참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안 뒤 누구 마음대로 한 결정이냐며 카톡방(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난리가 났다”며 “계엄군 당사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황 회장은 “현충원 참배를 위해 상경하는 길에서 많은 비판이 있을 거라 예상했던 일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더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황 회장과 정 회장의 1문 1답.   지난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장교 묘역을 찾은 황일봉 5·18 부상자회 회장. [연합뉴스] 5월 3단체는 무슨 일을 하는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는 세 부류로 크게 나뉜다. 계엄군 총·곤봉·대검 등에 사망한 분과 행방불명된 분 가족이 유족회다. 계엄군에게 폭행이나 총상을 당한 피해자와 구속된 분은 부상자회, 경찰 등에 연행·구금되거나 민주화 운동 활동을 한 분 등은 공로자회 회원이다. 3단체는 공식 단체로 회원 복지를 우선시하고 그다음에 5·18 정신을 선양·계승·발전시켜 나가는 일을 한다.”   계엄군 묘지에 참배하게 된 계기는. “사연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 조사위) 조사에 임하던 계엄군이 한 시민을 총으로 쐈다고 진술하면서 사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쏜 총에 숨져 5·18민주묘역에 안장된 희생자를 찾아 사죄했다는 소식을 5·18 조사위로부터 들었다. 이 밖에도 트라우마를 겪는 계엄군 등의 사연을 계엄군 당사자와 5·18 조사위에게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고 손을 내민 사람도 없는 상황을 알게 됐다. 숨어 지내야만 했던 계엄군에 손을 내밀고, 그들이 증언하면 진상규명에 더 힘을 보탤 수 있겠다는 마음에 참배했다.”   일부 회원은 아쉽다고 하는데. “‘시기가 이르다’는 지적은 맞지 않는다. 25년 전쯤 특전사와 5월 단체가 용서하고 화해한 적이 있지만 일회성으로 끝나면서 지금까지 왔다. 43년이나 지나서 늦으면 늦었지 빠르지 않다. 5·18 조사위 활동이 곧 끝난다. 그 전에 숨어 있는 계엄군 당사자를 발굴해 더 많은 진술을 확보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5월 송년회에 모인 단체 회원 700여명에게 계엄군의 참배 의사를 밝히고 동의를 구했다. 그 자리에서 열변을 토했고 박수를 얻었기 때문에 절차는 거쳤다고 봤다. 회원들께서 취지를 이해해주면 좋겠다. 명령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용서한 것이지 신군부 수뇌부를 용서한 게 아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어갈 향후 계획은. “25년 전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특전사동지회와 매년 5·18묘역을 참배하며 진정한 5·18 전국화를 이룩할 계획이다. 또 5월 단체와 특전사동지회가 함께 김치를 담그고 이웃에게 나누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대화합을 이룰 예정이다. 이제는 특전사동지회와 5·18 진상을 규명할 때다.” 황희규 기자 hwang.heegyu@joongang.co.kr

    2023.01.21 00:04

  • “과거사는 돈 아닌 마음 문제, 일본 무한 책임 의지 보여야”

    “과거사는 돈 아닌 마음 문제, 일본 무한 책임 의지 보여야”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일본 정부가 ‘무한 책임’, 즉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점을 명시하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지난 12일 위안부·강제징용 등 한·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피해자를 포함해) 한국 국민이 분노하는 부분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해결된 문제를 더는 반복해서 제기하지 말라는 일본의 고압적 태도 때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인터뷰가 진행된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선 외교부가 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정부는 이에 앞서 민관협의회를 네 차례 열고 피해자 측과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에도 두 차례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차관·국장 등 각급에서 실무 협의를 지속했다. 이날 토론회엔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 등 시민단체가 불참하며 ‘반쪽 토론회’가 됐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 측의 거센 항의와 고성이 오가며 향후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둘러싼 진통을 예고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경우 현재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기존의 입장을 바꾸기 어려운 정치적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윤 대통령과 함께 리스크를 감수하고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지난 11일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이사장 이종찬)이 수여하는 우당특별상을 수상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평화 사상을 기리는 재단이 일본의 정치인에게 특별상을 수여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시상식에서 “한·일 양국에 가로 놓인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양국의 우호 발전과 동아시아 평화 구축에 미력하나마 힘써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위해 일본 측이 할 수 있는 ‘성의 있는 호응 조치’는 뭔가. “개인적으로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에 아무리 다양한 협정을 체결했다 해도 개인의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게 국제적인 상식이 됐다고 확신한다. 일본에는 ‘잘못을 고칠 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시기가 많이 늦은 만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보나. “일본 측이 우리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강제징용 문제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분들께서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일본 정부가)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과거사 문제의 해법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닌 마음, 심리적인 문제다.”   일본은 한·일 협의를 거쳐 마련될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이 ‘최종적 해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면서 일본은 이미 한국의 정권 교체에 따라 국가 간 합의가 효력을 잃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 같은 일본의 우려에 대해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며 운을 뗐다.   이번에 도출될 강제징용 해법의 최종성과 신뢰성을 높일 방법이 있나. “정권이 교체되면 정권마다 생각과 방향성이 달라진다. 다만 2015년 위안부 합의의 경우 일본 측에서 ‘이 합의로 모든 게 끝났고 해결됐다’ ‘우리는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 걸 위안부 피해자들이 납득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명예와 존엄, 인권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의 토대 위에서 양국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고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한·일 관계 개선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외교 과제다. 양국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보나. “비단 한·미·일 3국이 공조해서 중국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한·일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미·중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일 양국이 어느 한 편에 서서 적대적 행동에 나서는 건 상호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두 나라는 미·중 대립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공조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단독으로 하면 효과가 부족하겠지만 함께 힘을 합쳐 미·중 대립을 제어한다면 한·일뿐 아니라 미·중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재개하며 북핵 문제가 한·일 양국의 핵심 현안으로 부상했다. “북한의 핵 문제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CVID라는 높은 수준의 목표를 강조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온 게 현실이다. CVID는 결코 포기해선 안 되지만 목표를 한 단계 낮춰서 대응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우선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을 목표로 내걸고 달성될 경우 대북 제재를 일부 해제해 주는 대응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한·일 공조를 통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도 조금 더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해결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북·미 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한·일 양국이 공조해야 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2023.01.14 05:00

  • “북한이 인권 유린 가해자인데,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나”

    “북한이 인권 유린 가해자인데,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나”

     ━  이신화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이신화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국제 공조를 더욱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영재 기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일어난 각 분야의 정책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북한 인권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북한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새 정부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11일 외교부와 국방부의 신년 업무보고에서 “북한 인권 문제는 단순한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라며 “북한 인권 실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건 국가 안보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속에 이런 정책기조 변화의 배경이 함축돼 있다.   앞서 정부가 5년간 공석 상태이던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에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다양한 활동 경력을 가진 정치학자 이신화 고려대 교수를 임명한 배경도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설명이 된다.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는 2016년 북한인권법 제정에 따라 법적 근거가 마련됐지만 문재인 정부를 거치는 동안 내내 공석이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이 대사는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인권 유린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선후 관계가 있을 수 없다”며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는 따로 볼 게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기본 원칙은 뭔가. “2016년 북한 인권 실태를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해 제정된 북한인권법은 특정 정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게 아니라 여야 공동 발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이다. 이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북한 인권 문제만큼은 정쟁화하지 않겠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 셈이다. 그런 만큼 남북관계를 이유로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 정권의 눈치를 봐선 안 된다. 북한 주민의 인권 침해를 이해득실에 따라 외면하고 침묵하는 나라가 어떻게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유엔총회는 지난해 12월 북한인권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문재인 정부 때의 전례를 뒤엎고 윤석열 정부는 공동제안국에 참여했다. 지난달 결의안엔 탈북 어민 북송 사건을 간접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으로 송환되는 북한 주민이 강제 실종, 자의적 처형, 고문과 부당한 대우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대해 이 대사는 “북한이 가해자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동안 우리 정부가 이런 조치를 선제적으로 하지 못한 게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인권 문제를 보편적 가치가 아닌 정쟁의 대상으로 삼은 걸 반성해야 한다. 진짜 잘못한 당사자는 북한인데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어야 하느냐”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비핵화가 인권 문제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안다. “안타깝게도 이전 정부는 남북관계를 고려해 북측이 예민해 하는 인권 문제를 사실상 외면하다시피 했다. 유엔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제출될 때도 공동 제안국에서 3년이나 빠지지 않았나.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핵화도 이루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 인권도 좀처럼 나아지지 못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문제를 패키지로 풀어야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북한이 쏘아올린 60여발의 미사일 발사에 든 비용만 최대 5억3000만달러(약 6590억원)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중국에서 수입한 7~8년치 쌀값과 맞먹는 규모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만성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의 생존권이야말로 방치할 수 없는 인권 문제 아닌가. “북한 주민의 인권 유린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이 필수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이 단순히 식량이나 코로나19 백신 등을 원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 주는 수준까지 확장돼야 한다. 주민들이 북한 당국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나라 안팎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국제사회가 중국의 위구르족이나 소수 민족이 겪는 인권 탄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듯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이슈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국제 무대에서 북한 인권 얘기를 하면 오히려 우리보다 더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국가들이 적잖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국군 포로와 납북자 문제도 장기 미결 과제다. “정부 공식 추산으로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은 516명에 달한다. 문제는 이들의 가족이 억류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있고 생사도 알 길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국제인권법 위반이다. 앞으로 억류자 생사뿐 아니라 수용소 내 처우 환경도 적극 조사할 방침이다. 때마침 지난해 11월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도 억류자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이 채택됐고 통일부도 억류자 석방 논의에 본격 나서기로 한 만큼 조만간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막는 데 대해서도 그동안 쓴소리 한 번 못했지만 이젠 제대로 비판할 필요가 있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1.14 00:51

  • “문학구장 만원 땐 팬티 입고 뛴다” 약속 지키자 여성팬 눈물

    “문학구장 만원 땐 팬티 입고 뛴다” 약속 지키자 여성팬 눈물

     ━  [정영재의 레전드를 찾아서] 원조 공격형 포수 ‘헐크’ 이만수   이만수 감독이 지난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선정한 KBO 40년 레전드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이 감독은 “포수는 잘 받고, 잘 던지고, 잘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SK 와이번스 감독 그만두자마자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로 갔어요. 솔직히 ‘야구 불모지에서 재능기부 한다’는 얘기 좀 듣고 멋있게 현장에 복귀하려고 했죠. 한 달 뒤 작별인사 하고 돌아설 때 왜소한 체구의 아이가 ‘아짱(라오스어로 선생님), 저희들하고 같이 야구해요’ 하는데, 태어나서 천사를 처음 봤습니다. 그 순간 마음먹었죠. 남은 인생은 동남아에 야구를 보급하고, 이 아이들과 같이 야구하는 데 바치겠다고요.”   ‘헐크’ 이만수 감독은 10년째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는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해 팀을 만들고 야구장을 지었다. 라오스야구협회를 결성해 2018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베트남에도 같은 방식으로 야구를 보급하고 있다. 2월 24~26일 라오스에서 인도차이나반도 4개국(태국·베트남·라오스· 캄보디아)이 출전하는 첫 국제대회를 연다.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인 그는 국내에서도 전국을 돌며 재능기부를 하고, 장애인 야구단체도 돕고 있다.   이만수는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 기록을 갖고 있는 ‘공격형 포수’의 원조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6년을 뛰었고,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 월드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나눔과 베풂의 전도사로 변신한 이만수 감독을 서울 강서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야구 통해 꿈이 바뀐 아이들 보며 보람   “야구 하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소리를 많이 들으셨죠. “맞습니다. 사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월급은 안 받는데 쓰는 건 두 배 이상이니까요. 라오스 활동 시작하고 3년쯤 지나 아내한테 ‘그동안 퍼주기만 했는데 뭘 먹고 사냐’고 물었어요. 아내가 ‘진짜 숟가락 못 들 정도 되면 얘기 할 테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일하세요. 평생 야구로 받은 사랑을 되돌려줘야 하잖아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TV 광고 두 편 찍고 받은 4억원을 기부하면서 재단을 만들었죠.”   아이들은 야구를 통해서 뭐가 바뀌었나요. “라오스 온 초기에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어요. ‘하루 세 끼 먹는 게 꿈’이라고 해서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 뒤에 20여명을 부산에 데려가 바다 구경도 시켜주고 인천에 와서는 제가 다니는 교회 도움으로 홈스테이를 하게 했죠.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안 가겠다며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라오스로 돌아왔는데, 몇 달 뒤 다시 물어보니 꿈이 다 바뀌었어요. ‘정치인이 돼서 군부가 장악한 나라를 바꿀래요’ ‘병원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치는 의사가 될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겠어요’ 라고요. ‘아, 야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구나’ 싶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만수는 또래보다 늦은 중1 때 야구를 시작해 1년을 유급했다. ‘호랑이 이상사’였던 직업군인 아버지는 운동을 제대로 안한다 싶으면 도끼로 배트를 찍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하루 4시간만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연습하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힘들어서 코피를 자주 흘리는 바람에 그 시절 별명이 ‘쌍코피’였다고 한다. 이 감독은 “중-고-대 11년을 그렇게 하니까 습관이 돼서 지금도 하루 6시간 이상 안 잡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습관이 있었다면? “단체운동 전에 미리 나와서 체조를 30분간 합니다. 제가 뻣뻣할 것 같은데 다리와 가슴이 붙을 정도로 유연해요. 그래서 은퇴할 때까지 큰 부상이 없었죠. 꿈나무들을 만나면 ‘일기를 쓰고, 야구 일지를 써라’고 말합니다. 기록을 해야 내 장단점과 보완할 점을 알게 되거든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알기 위해 베스트셀러나 유명인의 자서전을 읽으라고도 권합니다.”   테니스 선수인 동생의 서브를 받아치는 훈련을 했다죠. “동생이 국가대표였는데 서브 시속이 200㎞ 넘어요. 원 바운드된 공을 배트로 치는 건데 며칠간은 맞히지도 못했죠.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제가 다 칩디다. 메이저리그 가 보니 테니스공을 쏴 주는 피칭머신이 있는데 시속 300㎞가 넘어요. 더 놀라운 건 그 공에 색칠을 해 놓는데 무슨 색인지 선수가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동체시력(動體視力)을 강화하는 훈련을 멋모르고 제가 했던 겁니다. 하하.”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굳은살이 터졌다면서요. “저희 때만 해도 야구장갑이 없어서 맨손으로 타격 연습을 하다 보면 굳은살이 쌓입니다. 겨울에는 물집이 생기고 몇 번 더 까지고 나면 허연 뼈가 보여요. 일본 타격왕 출신 장훈 선배가 자전거 튜브를 감고 연습했다는 걸 책에서 보고 따라해 봤는데, 스윙 몇 번 하다보면 굳은살 터진 곳에서 피가 흘러 미끄럽더라고요. 그럴 땐 온기가 좀 남은 연탄재에 손을 쓱쓱 비빈 뒤 스윙을 계속 했죠.”   타자 약 올리는 데 최강이셨죠.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우리 때는 일본 야구 영향을 받아서 포수는 ‘이빨’을 잘 써야 한다고 했어요. 김봉연 선수에겐 ‘선배님, 어젯밤에 어떤 아가씨하고 데이트 하던데 형수한테 다 일러줍니다’ 하면 ‘뭐, 이 XX야?’ 하면서 흥분합니다. 김우열 선수한테는 ‘형님 뭐 합니까. 이 나이에 머리 다 빠져서’ 라고 하고,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 선배님께는 ‘감독님,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예. 한국까지 와서 와 이러십니까’라고 긁어 놓죠.”   친구 최동원 탓 통산 타율 3할 못 넘어   2007년 5월 26일 문학구장에서 ‘팬티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이만수 SK 코치. [사진 이만수] 요란한 홈런 세리머니 때문에 보복도 많이 당하셨죠? “최정(SSG) 선수가 몸 맞는 볼 세계신기록 세웠다고 하던데, 빈볼(위협구)은 제가 더 많이 맞았을 겁니다. 홈런 친 뒤에 만세 부르고 춤추면서 들어오면 바로 다음 타석에 빈볼이 날아옵니다. 그런데 이게 천성이에요. ‘좋은데 좋다고 표현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거든요. 그런 천성 때문에 미국 생활도, 동남아 야구 보급도 잘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지금은 서로 자극하는 행동은 안 하는 게 맞죠.”   제일 치기 힘든 게 최동원 공이었다면서요? “최동원은 제 친굽니다. 중학교 때 부산 토성중에 안경 낀 친구가 공을 던지는데 너무 빠른 겁니다. 동원이 커브는 좌우로 휘는 게 아니라 위에서 드롭성으로 뚝 떨어지니까 맞히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 프로 통산 타율이 0.296인데 동원이 때문에 타율 다 까먹어서 3할을 못 넘긴 겁니다(웃음). 동원이가 암 투병할 때 마지막까지 제가 병상을 지켰는데 어머님이 ‘동원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좀 이뤄줬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대성통곡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7년 5월, 프로야구는 SK 수석코치 이만수의 ‘팬티 세리머니’로 들썩였다. 이 코치가 농담으로 “문학구장 만원 되면 팬티만 입고 운동장 돌겠다”고 한 말이 중계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는데 ‘10경기 안에 만원이 되면 한다고 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고 했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결국 팬티 세리머니를 하게 됐죠. “D데이였던 5월 26일 KIA 타이거즈전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1회 끝나기도 전에 ‘오늘 경기 만원’이 떴어요. 5회 끝나고 라커에 걸어놨던 ‘원숭이 팬티’로 갈아입고 있는데 빨리 나오라고 난리가 났어요. 구단에서 ‘이만수 수호대’ 22명을 모집했는데 5분 만에 다 찼다는 겁니다. 그분들과 함께 3만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운동장을 도는데 여기저기서 여성 팬들이 울더라고요.”   이만수 프로필 무슨 의미의 눈물이었을까요.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본 감동이겠죠. 자신이 한 말을 밥 먹듯이 뒤집는 세상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라도 지키려는 한 남자의 우직함을 본 거죠. 당시 한국 사회가 반으로 딱 갈렸대요. ‘이만수는 무식하니 팬티 입고 뛸 거다’는 측과 ‘월드시리즈 우승팀 코치까지 한 스타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겠나’는 쪽이었죠.”   고교 선수 대상으로 이만수 포수상-홈런상을 6년째 시상하고 계신데요. “포수상 만든다고 했을 때 주위 분들이 말렸어요. 포수는 인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강팀엔 좋은 포수가 있다’는 걸 팬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양의지가 2019년 FA 대박(4년 총액 125억원)을 터뜨렸죠. 올 시즌 4명(박동원·박세혁·양의지·유강남)이 총액 343억원의 FA 계약을 하면서 ‘포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지난해 이만수 홈런상을 받은 포수 김범석(경남고→LG)은 저를 능가하는 엄청난 선수가 될 겁니다.”   좋은 포수의 조건이 뭔지 물었다. 이 감독의 대답은 ‘기본’을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 잘 받아야 합니다. 프로야구에 패스트볼(포수가 공을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둘째, 잘 던져야 합니다. 2루 송구든 1루 견제든 빠르고 정확해야죠. 셋째, 잘 막아야 합니다. 블로킹 동작이 잘못된 프로 선수가 의외로 많은데 꿈나무들이 그걸 따라 하더라고요. 앞사람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됩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2023.01.14 00:20

  • 우리가 춤추다 넘어질까봐? 엘리베이터 연습으로 충분해요

    우리가 춤추다 넘어질까봐? 엘리베이터 연습으로 충분해요

     ━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댄스가수의 전설 김완선·박남정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댄스가수 김완선(왼쪽)과 박남정이 18일 오랜만에 한 무대에 선다. [사진 마포문화재단] 지금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K팝’은 댄스음악이다. 2000년대 초 H.O.T와 보아가 세계 시장에 진출한 이래 지금의 BTS, 블랙핑크에 이르기까지 쭉 그랬다. 이런 댄스 아이돌이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건 아니다. 1980년대 가요계에 ‘한국의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이 있었으니, 김완선과 박남정이다. 이들은 발군의 춤 실력은 물론,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고유의 음색까지 갖추고 청소년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두 사람의 춤과 노래를 열심히 흉내내던 ‘김완선·박남정 키즈’들이 지금의 ‘K팝’ 씬을 만들었고, 이들이 유행시킨 ㄱㄴ춤, 토끼춤 등은 K팝 댄스의 핵심인 포인트 안무의 원조가 됐다.   김 “해외 영화제 여우주연상도 받아”   두 ‘레전드’가 만났다. 마포문화재단의 기획 공연 시리즈 ‘어떤가요’ 3탄(18일 마포아트센터)을 위해서다. 지난해 조정현·이정봉·이규석·이치현·이정석 등 8090 가수들이 먼저 꾸린 ‘어떤가요’ 1,2탄에 중장년층의 호응이 뜨겁자, 올해는 댄스가수까지 확장한 것.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 ‘널 그리며’ 등 추억의 히트곡들이 우리를 타임머신에 태워줄 예정이다.   연습실에서 리허설 중인 김완선. [사진 마포문화재단] 4일 연습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7년여 만에 한 무대에 선다고 했다. 김완선은 예상대로 얼음공주였다. “연습하러 왔는데 인터뷰가 있는 줄 몰랐다” “둘다 말수가 적어서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면서 냉기를 뿜었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박남정이 “완선씨는 선망의 대상이라 말도 잘 못 걸었다” “완선씨와 같이 무대 서는 것 만으로도 좋았다”며 얼음을 부수자 추억 얘기도 하나둘 꺼내놓았다. 사실 두 사람은 전성기 시절 매일같이 방송을 함께 했던 터라 ‘동창생 바이브’라고. “학교 다니듯 매일매일 만났으니 자연스럽죠. 우리와 이지연·소방차·양수경·이상은·변진섭이 얼굴 본 횟수만 해도 엄청날 걸요.”(김)   당시 가요 프로그램은 가수들이 자기 노래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꾸미는 무대도 제법 있었다. 둘 사이 연결고리는 마이클 잭슨이었다. “그땐 PD가 시키면 학교에서 숙제하듯 해결했는데, 우린 가끔 마이클 잭슨 노래를 했죠. 둘이 아이보리색 의상을 맞춰 입고 ‘빌리진’을 같이했던 기억이 나네요. 컴퓨터음악이 일반적이지 않았을 땐데, 어떻게 좀 잘 해보려고 낙원상가까지 쫓아가서 힘들게 음악을 만들었어요. 드럼머신 같은 것도 써 보고 공을 들였죠. 같이 연습하면서 신기했어요. 여자는 브레이크나 팝핀을 아예 못하는 줄 알았는데, 통하는 게 있더군요. 그때 반응이요? 난리 났었죠.”(박) “남정씨나 저나 너무 인기가 많아서, 같이 뭘 하면 다들 좋아라 했죠. 뭘 해도 되는 시절이었어요.(웃음)”(김)   연습실에서 리허설 중인 박남정. [사진 마포문화재단] 1980년대 댄스가수계 두 봉우리였지만, 뿌리는 완전히 달랐다. 영화 ‘플래시 댄스’의 한 장면에 비친 스트리트 댄스에 매료되서 혼자 이태원 클럽을 돌며 춤을 독학한 박남정에 비해, 김완선은 매니저계의 전설인 이모 한백희가 차린 연습실에서 당대 춤꾼들에게 레슨을 받으며 다양한 춤을 섭렵했다.   “완선씨는 체계적으로 춤을 배운 사람이고, 저는 땅 파서 연습한 사람이죠. 정말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에요. TV에서도 춤을 못봤거든요.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토요일 밤 12시에 하는 ‘소울트레인’이 유일했죠. 나이트클럽에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외국 음악을 들을 기회도 없었어요. 종로 국일관과 이태원의 모든 나이트클럽에서 알바를 하면서 춤을 익혔고, 데뷔 때는 안무도 직접 했죠.”(박) “그때 춤추는 사람들은 보통 나이트클럽 거울 앞에서 연습했다던데, 저는 춤선생님이 있었어요. 마포 공덕동에 우리 연습실이 아주 컸거든요. 우리나라 댄스씬의 첫번째 리더였던 이성문 선생님을 비롯해서 나이트클럽에서 연습하던 사람들이 우리 연습실에 모여들었어요. 그 덕에 저도 다양한 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죠.”(김)   요즘은 수많은 아이돌 군단의 춘추전국시대지만, 80년대 두 사람은 라이벌도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가까웠다. 특히 김완선은 다른 여가수들에게 흔했던 안티 하나 없는 범접 불가능한 ‘천상계’였다. “그때는 여가수가 나오면 여자들이 굉장히 싫어했는데, 완선씨만 독보적으로 디스를 안 당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이지연·세또래·강수지·하수빈 같이 청순한 스타일은 욕을 무지하게 먹었거든요. 완선씨만 격이 다르니 질투도 못한 거죠.”(박) “유치한 시절이었어요. 남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이지연씨가 무대에 서면 객석에서 여학생들이 어찌나 험하게 욕을 하는지, 옆에서 보기도 괴로울 정도였죠. 나 같으면 못 견뎠을 것 같은데, 지연씨는 그냥 못 들은 척 하는 게 너무 불쌍했어요. 지금은 멋지게 성공해서 잘 살고 있죠. 여가수들 모일 때 종종 같이 보고, 서로 SNS로 응원하고 있어요.”(김)   라이벌이 없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방심한 상태로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파격적인 등장을 목격했고, 격동하는 흐름에 ‘80년대 춤신춤왕’의 자리는 없었다. “라이벌이 없었던 게 아쉬워요.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경쟁의 니즈가 없으니 발전을 못한 거죠. 5년쯤 지나니 후배들이 튀어나오는데 이게 뭐지 싶고, 이미 따라갈 수 없더군요. 서태지가 나왔을 땐 짜증이 났죠.(웃음) 당시 제 신곡인 ‘비에 스친 날들’과 비교하며 그래도 내 노래보다 못하다 싶었으니까요. 사실 제 백업 댄서 ‘프렌즈’였던 이주노와 양현석이 미리 데모테이프를 들려주는데, 랩은 끝내주더군요. 저도 시도했었지만, 한국말로 랩을 하면 ‘간지’가 안 난다고 대충 했었거든요.”(박)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이었는데, 제가 패널로 있던 예능 프로에서 서태지가 첫 데뷔를 했어요. ‘난 알아요’ 노래가 좋았지만, 랩이 그 정도로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저도 그 무렵 6집에서 랩을 검토하다가 아직 이르다고 안 했거든요. 안 하길 잘했죠 뭐.”(김)   원조 아이돌로서 지금 아이돌 천하는 격세지감이다. 그들의 시대엔 서양 팝 스타일에 뒤처져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K팝이 대세가 됐다. 박남정의 딸 시은도 걸그룹 스테이씨 멤버로 활약 중이다. “시은이를 봤는데 너무 예쁘고 잘하더군요. 사실 요즘엔 못하는 친구를 찾기가 힘들어요. 노래만 하는 것도 아니고 춤과 연기까지 하도록 진화가 된 것 같아요. 다 잘하는 가운데서 살아남는 것도 어렵지만요.”(김) “요즘은 개인 방송이 있으니 자신만 있으면 기회를 만들 수 있어요. 기획사들이 그런 걸 눈여겨 보고 있죠. 물론 다들 잘하니 어렵지만, 튀면 다 찾아오게 돼 있어요. 결론적으로 아주 좋은 환경이 된 거예요.”(박)   콘서트는 둘 다 팬데믹 이후 처음이라는데, 추억여행보다 새로운 시도에 방점을 찍는다. 30여년간 춰 왔던 춤은 따로 연습할 필요도 없단다. “설마 우리가 순서 틀리고 넘어질까봐요. 춤 연습 안한 지 꽤 됐지만 다 배어 있어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웃음)”(김) “춤 연습은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동안 하는 정도? 그래도 완벽합니다. 그보다 저는 관객과 소통을 시도해 보려고요. 무대에서 노래만 부르는 것보다 관객 눈치를 봐 가면서 얘기도 좀 하고. 그런 걸 요즘 시대가 원하는 것 같아요. 퀴즈 내서 상품도 주고. 그런 식으로 구상하고 있어요.”(박)   박 “서태지가 나왔을 땐 짜증이 났죠”   오랜 세월 곁을 지켜주는 팬들이 있기에 가능한 시도다. 이제 가족이 됐다는 팬 얘기를 할 때 두 사람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 “36년 된 팬들이 아직 스무명 정도 옆에 있어요. 가수와 팬이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 집에 초대도 하고, 꽤 자주 만나요. 다들 경력과 일이 있으니까 각자의 분야에서 제가 필요한 걸 도와주기도 하고. 무조건적인 서포트를 해주니 너무 고맙죠.”(김) “한달전 쯤 난생 처음 팬미팅을 했어요. 팬들이 주최한다길래 저도 조명, 음향 장비 챙겨서 같이 만들어 봤죠. 100명쯤 모였는데, 이런 게 된다고 상상을 못했거든요. 행사 때 삼삼오오 모이면 고마운 정도였으니까요. 이번에 체계적으로 해보니 영탁·임영웅이 안 부러워요. 이렇게 응원해 준다니, 나도 좀더 노력해 봐야겠구나 싶더군요. 임영웅 공연 때 버스 대절을 한다면 나는 헬기라도 준비해야겠다. 그런 힘이 생겼어요.”(박)   만나 보니 이들에겐 ‘레전드’란 수식어가 영 억울해 보였다. 둘 다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영원한 현역’이라서다. “10년 전부터 계속 싱글을 냈어요. 작년에도 두 번 냈고, 올해도 그럴 것 같아요. 작년 여름에는 저의 스토리로 만든 예술영화 ‘킬링디바’가 외국 영화제에서 작품상도 받고, 저는 여우주연상도 받았죠. 5월엔 뮤지컬도 할 예정인데, 이제까지와 좀 다른 일도 해보며 살고 싶어요.”(김) “저는 팬들과 함께 만드는 공연으로 전국 투어에 도전해 볼 생각이에요. 작게 하더라도 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요. 완선씨도 게스트로 다 얘기된 상태죠.(웃음)”(박) “글쎄요, 뮤지컬이 바빠서요.(웃음)”(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1.14 00:01

  • 사랑을 원하면 개를, 영감을 원하면 고양이를 키우라

    사랑을 원하면 개를, 영감을 원하면 고양이를 키우라

     ━   ‘냥이 예찬’베르나르 베르베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을 출간한 베르나르 베르베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소설가’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최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열린책들, 옮긴이 전미연)을 출간했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계에 다다른 인류문명을 조감하고 이를 대신할 고양이 문명의 탄생을 그려낸 ‘고양이 3부작(『고양이』 『문명』 『행성』)’을 펴낸 바 있는 그가 이번에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고양이에 대한 정보를 빠짐없이 집대성해 한 권의 백과사전을 내놓았다.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고양이는 어떤 모습일까?’ ‘스파이로 활동한 고양이가 있었다고?’ 등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집요한 탐구력은 신비스러운 고양이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사랑스러운 고양이의 모습을 담은 138장의 도판 역시 고양이의 매력에 빠지게 한다.   20대의 베르베르에게는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글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을 내면서 “『개미』를 통해 소설가로 데뷔하고, 얼마 전까지 ‘도미노’라는 이름의 암고양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30권이 넘는 책을 펴냈으니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고 말했다. 고양이의 무엇이 이토록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중앙SUNDAY가 ‘고양이 집사’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서면 인터뷰를 청했다. 인터뷰는 ‘고양이 3부작’을 그래픽노블로 옮긴 첫 번째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을 오가며 진행됐다.   인쇄술, 인류의 전진 중 가장 가치 있어   소설 ‘고양이 3부작’을 그래픽노블로 옮긴 『베르베르의 고양이』. 유독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많은 작가들이 고양이를 키운다. 기자로 활동할 때 동료 작가인 파트리크 코뱅을 인터뷰 하러 가보니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곁에서 글을 쓰는 삶 자체가 행복인가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헤밍웨이 생가를 방문했을 때도 타자기 앞에 고양이 방석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이쯤 되니 고양이야말로 좋은 영감의 비밀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3마리의 고양이를 키워 봤는데,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인간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 느껴지며, 내게 영감을 준다. 나와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은 착하거나 애교가 많은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저마다 신비롭고 똑똑하고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 특징들이 소설 『고양이』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번역자 전미연씨가 ‘도미노’에게 작별인사를 할 만큼, 고양이‘도미노’는 당신에게 각별했던 것 같다. “‘도미노’는 최근까지 함께한 고양이다. 21년 전 동료 작가 스테파니 자니코가 선물해 준 고양이로 신경질적이고 무척 까탈스러운 아이라 소설의 주인공으로 제격이었다. 단순하고 애교 넘치는 성격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 오히려 훌륭했다. 도미노가 상냥한 순둥이였다면 할 이야기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은 비범하고 복잡해야 재미있고, 도미노는 딱 그런 고양이였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 소설 『고양이』의 원제 ‘내일은 고양이’를 해석하면서 “지금까지 ‘개미의 작가’로 기억됐다면 이제 ‘고양이’가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를 바라는 유머러스한 표현”이라고 했다. 그토록 고양이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뭔가. “고양이는 인간을 적절히 이용해 가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한 동물 같다. 서두르는 법이 없고, 장난치고 노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소 광적이고 예측 불가하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동물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고양이 3부작’은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수컷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했다. 젠더 의식이 전환점을 맞으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미투 운동이 일어난 후로 역사가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여성이 한때는 지나치게 지배당하고 억압받았다면, 지금은 설욕전을 펼치는 듯하다. 역사의 흐름이 가져온 필연이고, 우리는 이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든 것에는 중용의 지점이 존재한다. 성 불평등 문제도 마찬가지. 하나의 불평등이 또 다른 불평등을 생산한다면 폭력이 되풀이 될 뿐이니, 한쪽에 치우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양이 백과사전에는 고양이에 관한 138개의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사진 Roberto Frankenberg] ‘인류는 세 걸음 전진을 이룩했다가 두 걸음 뒤로 물러난다’고 했다. 당신이 생각한 인류의 전진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뭔가. “인쇄술이다. 책이 있었기에 지식이 보전될 수 있었다. 책이 없던 시대에는 수학자나 천문학자가 아무리 대단한 발견을 하더라도 모두 잊힐 수밖에 없었다. 책은 이 세상의 기억과 같으며, 그 지식에 인류가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다. 책 없이는 어떤 발명도 유지되고 기억될 수 없다.”   ‘책’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요즘의 우린 디지털 의존도가 너무 높다. “디지털은 훌륭한 도구다. 물론 의존이 생기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우리가 디지털을 사용하는 의도다. 최근에 내 최면 수업을 녹화했는데, 관련된 커뮤니케이션을 오직 디지털로만 했다. 디지털은 나라는 개인의 미디어가 되어 줬다. 원래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전에는 내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고 싶을 때, 내 작업에 관심을 가진 기자가 운 좋게 찾아와서 내 말과 의도를 제대로 전달해 주길 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직접 정할 수 있게 됐다. 디지털은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에 일정한 사용 규칙을 정해서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 이 제도화 작업은 정치인들의 몫이다.”   고양이 백과사전에는 고양이에 관한 138개의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쥐들의 창궐은 기후 온난화 때문’이라고 했다. 환경 위기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내가 1991년에 집필한 소설 『개미』를 보면, 열대 기후에 서식하던 개미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처럼 나는 책을 통해 오래 전부터 기후 문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물질의 소비를 줄이는 것 외에 별다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 게 나의 오랜 고민거리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비 감소를 하나의 선택지로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광고들은 더 많은 소비를 재촉하고, 정치인들은 과소비가 현대 경제를 지탱한다고 말한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선택지 자체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지구를 물려주고자 한다면 포장재의 낭비를 멈춰야 한다. 의미 없이 사고 버릴 선물이라면 사지 말아야 한다. 물질 낭비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만 한다. 환경 위기를 생각하면 ‘블랙 프라이데이’가 떠오른다. 정말이지 충격적인 행사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차피 버릴 물건들을 구입하게 하고 낭비와 환경오염을 조장하는 행사가 바로 블랙 프라이데이다. 소비가 마치 전 지구적 축제인 양 격려하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행사들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인들이 용기를 내어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하지 않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고양이가 인간의 행복에 일조한다는 ‘갸르릉테라피’ 부분이 흥미로웠다. “이 이론을 확인하고 싶다면 먼저 고양이 집사가 되어야 한다. 추천한다!”   고양이 백과사전에는 고양이에 관한 138개의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사진 셔터스톡]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을 보면 왠지 개보다 고양이가 한 수 위인 것 같아 반려견주라면 속상할 것 같다. “개는 무조건적인 사랑, 고양이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신비한 영감을 원한다면 고양이를, 사랑을 원한다면 개를 키우라고 말하고 싶다. 개만큼 극진한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고양이는 드물다. 나도 도미노를 고양이별로 보낸 뒤에는 개를 한 마리 키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척 행복하지만, 아파트에서 키우기는 쉽지 않더라.”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 사람들을 만나는 ‘하루 루틴’으로 유명하다. “글쓰기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이다. 꾸준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써야만 써진다. 그렇게 해야 쓸 수 있으며, 멈추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다. 작가라는 직업의 핵심이 바로 규칙성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라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글을 잘 쓰는 요령을 절로 깨닫게 된다. 그러려면 반드시 규칙적으로 써야 한다. 이건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도 필요한 규칙이다. 이상적인 하루를 산다는 것은 예술 작품 한 편을 만드는 일과 같다. 내 하루가 이상적이려면 어때야 할지 고민해 보고, 이상적인 날들을 반복할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질리지 않는 공식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나의 글쓰기에 최적화된 공식을 찾아냈듯, 각자 자신에게 맞는 공식을 찾아야 한다. 벽돌을 하루에 하나씩 쌓아서 집 한 채를 만들어 올리는 일과 비슷하다.”   영화만 보고 책 안 보면 창의성 속박   고양이의 눈으로 볼 때 인간들의 세상은 참으로 지겹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이 또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뭔가? “돌이켜보면 과거의 세상은 더 지겨웠다. 한국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겪은 나라다. 이전 세대의 고통과 용맹이 없었다면 지금의 어린 세대가 누리는 삶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을 사는 한국인들이 20세기를 살던 한국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험이 없지 않지만, 우리 조상들보다 객관적으로 나은 삶이다. 프랑스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영화광이라고 들었다. 바쁜 현대인에게 ‘영화’와 ‘문학’은 개와 고양이 중 한 쪽을 선택하는 문제와 같다. “책은 영화와 달리 연출의 시각화를 독자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고 본다. 영화는 즐기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책보다 훨씬 대중적이라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선택하라면 책이 우선순위인 것 같다. 책으로 충분한 교양을 쌓고 나면 영화에서 훨씬 많은 것이 보인다. 영화만 보고 책은 보지 않는다면 창의성이 속박당한다. 어릴 때 책을 읽어야 창의성이 풍부해진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과학잡지에 개미에 관한 글을 쓰다가 1991년 데뷔작 『개미』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총 3000만 부 이상이 판매됐는데, 한국에서만 절반 이상 팔렸을 정도로 유독 한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교보문고의 ‘10년간 국내외 작가별 소설 누적 판매량 집계’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개미』 3부작과 『타나토노트』 3부작 외에도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신』 『나무』 『파피용』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다. 」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3.01.14 00:01

  • 반도체 패권 경쟁은 국가대항전, 한국 이대론 안 된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국가대항전, 한국 이대론 안 된다

     ━  반도체 전문가 양향자 의원   지난 12일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최근 반도체 업계 판도는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산적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 반도체 재고가 쌓이면서 생존 경쟁이 화두로 떠올랐다. 다른 한편에선 반도체 패권 전쟁의 포연(砲煙)이 더욱 짙어졌다. 미국은 새해 벽두부터 중국 견제와 반도체 동맹 강화에 여념이 없다. 대만과 일본도 심기일전해 지원에 나섰다. 한국은 아직도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확정하지 못한 채 국회 논의를 기다린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최대 가전쇼 ‘CES2023’을 참관하고 돌아온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12일 “혁신 제품 경쟁도 결국은 반도체 싸움이고, 반도체 산업을 향한 미국의 자국우선주의가 견고해지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에서 상무로 재직하다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겨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국민의힘 반도체 특위 위원장 등을 역임한 양 의원은 국회를 대표하는 반도체 전문가로 꼽힌다.   올해 CES는 어땠나. “매년 참관하는데, 과거 어느 때보다 메타버스와 웹3.0 등 혁신 기술을 구현한 제품들이 실용화됐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만큼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제품이 늘어날 것이고,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커진 셈이다. 동시에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는 걸 느꼈다. 중국 기업들의 규모는 물론 참관인도 굉장히 줄어든 게 체감됐다. 현장에서 만난 업체들도 한 목소리로 고민을 전했다.”   어떤 고민인가. “최근 반도체 업계 판도는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산적한 상태다. 국가 패권이 걸린 산업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에선 최근 수년간 미국 정치권을 향한 소통 창구가 굉장히 좁아졌다. 한미 의원간 외교라인도 뒷걸음질 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냉전이라고 불릴 만큼 미·중 갈등이 깊어지고,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려는 주요국 정부 정책이 쏟아지는 상황이라 워싱턴과 접점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어떻게 지원해야 하나. “미국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기업에 손을 내미는 것은 미래 패권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론 생산 기지를 미국 안에 두고 싶어 한다. 각종 인센티브를 주며 미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미국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한국 기업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도 함께 넘어갈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어느 순간 토사구팽 당하는 점을 가장 두려워 한다. 미국에 투자하더라도 우리가 현지 생산기지를 주도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 차원에서는 물론 의회에서도 계속 협상할 필요가 있다. 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행정부와는 달리 미 의회에서는 여야, 지역구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미국·일본·대만의 ‘칩4 동맹’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일종의 국가 대항전처럼 여기며, 일본·대만 등 경쟁국들은 경쟁적으로 혜택을 뿌리고 있다. 대만에선 연구개발비의 25%를 세액공제하는 방안을 마련해 즉시 적용했다.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속에 지난해 구마모토에 TSMC의 공장을 유치한 일본은 최근 소니와 도요타, 키옥시아 등 대기업 8곳이 힘을 합쳐 반도체 기업 라피두스를 설립하는 등 숨가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도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공감을 얻었다. 경쟁국들에 조금 뒤처진 감이 있지만, 나아질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지원은 여전히 더디다. “윤석열 대통령의 질책으로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한도가 상향(최대 25%) 된 개편안을 마련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대기업은 15%로 묶었다. 대기업이라고 차등 적용하면 부작용이 만만찮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장을 자국 영토 안에 확보하려는 경쟁을 벌이는 상황인데 오히려 투자를 줄이라고 하는 셈이다.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막대한 설비투자 없이는 시장 진입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대기업과 여기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연합체로 여기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드물다. 한배를 탔는데 덩치가 큰 선원을 차별하는 게 항해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대기업 특혜란 지적이 나올 수 있는데. “또다시 대기업 특혜 프레임으로 갈라치기에 나서는 건 나라의 미래를 파묻는 매국(埋國) 행위다. 오죽하면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대기업의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을 높이는 게 중소기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겠나. 지난해 1월 통과됐던 반도체 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 원안은 산업계와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도체 산업 지원 경쟁에 뒤진 상황에서 절박하게 준비한 게 반도체산업 지원 특별법(K-칩스법)이다. 이조차 국회에서 통과가 안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쟁국과 비교할 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 예컨대 반도체 특화단지 인허가 신속처리기간을 준수하도록 강행 규정을 추가하는 방안이나 반도체 특화단지 설치 지역에 특별조정교부금을 우선 교부하는 방안 등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2023.01.14 00:01

  • “한국, IRA 개정보다 현실적 손익 따져볼 필요 있다”

    “한국, IRA 개정보다 현실적 손익 따져볼 필요 있다”

    웬디 커틀러 전 USTR 부대표 “한국 등 파트너들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개정보다 좀 더 현실적인 기대를 할 필요가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를 지낸 웬디 커틀러(사진)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부회장은 5일(현지시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IRA의 개정 가능성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 상황에서 가능성이 작아진 법 개정에 매달리지 말고 다른 창의적 방안 마련에 집중하라는 조언이다. 커틀러 부회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탄생의 주역으로 2006~2007년 협상 때 미국 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그는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기로 한 IRA로 인해 한국산이 차별받게 된 상황에서 한국이 느낄 좌절과 배신감에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통상 환경을 볼 때 앞으로도 ‘온쇼어링(미국 내 공급망 구축)’과 ‘프렌드쇼어링(동맹국에 공급망 구축)’ 간의 긴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각국이 공급망 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안보를 더 우선시하게 됐고 전통적인 무역 이슈는 덜 중요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IRA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동의한다. 내가 협상에 참여한 한·미 FTA의 목적은 서로를 파트너로 대하며 차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느끼는 좌절과 배신감에 동감한다. 그러나 이 법으로 인해 얻게 될 엄청난 기회도 고려하길 바란다. 특히 배터리 분야의 보조금 혜택은 한국 제조업체에 돌아갈 수 있다. 한국의 파트너들은 어떤 부분이 해가 되고 도움이 될지 평가해 보길 권한다. 미국도 이 같은 한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법을 고치는 게 가능할까. “낙관적이지 않다. IRA 입법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부분 개정을 한다 해도 일단 뚜껑을 열면 하원 다수당이 된 공화당에서 엄청나게 수정을 하러 달려들 것이다. 이런 입법의 한계를 고려할 때 과연 뭘 할 수 있을지, 무역 파트너들은 현실적인 기대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뭐가 최선의 시나리오인가. “지난달 미 재무부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상업용 전기차에 리스차를 포함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무역 파트너들, 특히 한국의 우려를 줄이는 의미 있는 첫발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재무부는 여전히 최종 규정을 내놓기 위해 작업 중이다. 현시점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국과 파트너들이 협력해 창의적 방법을 찾는 것이다.”   조 바이든 정부의 무역정책이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비슷한 점도 분명히 있다. 둘 다 중산층과 노동자들의 필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는 동맹·파트너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차이가 있다. 수입 규제는 계속 이뤄졌지만 트럼프 정부 때처럼 일방적이진 않다.”   앞으로도 보호주의적 입법이 계속될까. “지금 추세를 과소평가할 순 없다. 그동안 온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에 대한 수요에 균형을 맞추려 노력해 왔는데 IRA로 분쟁이 일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의 파트너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긴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균형점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최근 여러 사건을 겪으며 국가 간 무역 행태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맞다. 그동안 국제사회엔 더 많은 나라와 교역하면서 경제적으로 얽히게 되면 군사적 갈등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오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런 믿음은 무너졌고 이로 인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무역과 경제 협력 분야에서 좀 더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세계 각국도 경제안보 차원에서 공급망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전통적인 무역 이슈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워싱턴=김필규 특파원 phil9@joongang.co.kr

    2023.01.07 01:14

  • “한·미 확장억제, 나토식 핵 공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미 확장억제, 나토식 핵 공유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은 지난 5일 남북관계 해법으로 군사적 억지력과 함께 외교력 강화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북한은 미사일뿐 아니라 무인기까지 동원해 서울 상공을 위협하면서 도발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확장억제를 위해 미국과 핵에 대한 공동 기획, 공동 연습 개념을 논의하고 있다”며 북한을 압박하고 나섰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처럼 냉각된 남북, 북·미 관계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주러시아 대사 등을 지낸 한반도 안보 전문가인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을 만나 최근 현안들에 대한 분석을 들어봤다.   확장억제와 관련한 윤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논란을 빚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에서 중단됐던 한·미 간 확장억제 협의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윤 대통령의 언급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발언과 겹쳐지면서 오해가 생겼던 것 같다. 이를 양국 간 이견이란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 중인 한·미 간 확장억제 협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바람직할까. 나토식 핵 공유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 건 이전보다 크게 강화된 확장억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핵 자산 운용에 있어 한국 정부의 개입을 그다지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미국 간 핵 공유와 유사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나토와 미국은 핵계획그룹(NPG)을 설치해 여기에서 협의를 통해 핵 운용 방안을 최종 결정한다. 다년간 대미 협상을 했던 내 경험에 비춰볼 때 미국 정부가 한국을 나토처럼 대할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 정부는 확장억제와 관련한 구체적인 규정과 규범을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켜야 한다. 적어도 나토의 NPG 같은 상설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현재 운영 중인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를 사전 준비기구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이 과연 유사시에 제대로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상설 협의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지금은 북한의 핵무기가 완성되지 않은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확장억제와 관련해 윤석열 정부의 대미 협상 전략을 평가한다면. “현재 추진하는 방향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국 측이 그다지 열의를 갖고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점에는 유의해야 한다. 미 정부의 기본 스탠스는 ‘확장억제 공약은 확고하다. 한국은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이보다 더 강력하고 시스템화된 정책이 필요하다.”   핵무기 개발이나 전술핵 재배치 목소리도 작지 않은데.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도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전술핵을 사용해 남한을 공격했을 때 미국이 핵무기로 대응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확장억제에 대한 믿음은 무너질 것이다. 이런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도 한·미 간 협의를 통해 구체적이고 체계화된 확장억제 전략이 수립돼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해야 한다거나 미국의 전술핵을 한반도에 재배치해 북한 핵과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핵 개발이나 핵 반입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클 것이다. 핵 개발 도미노를 우려하는 국제사회의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될 것이고 수출 위주 경제에도 치명적일 것이다. 일부에선 국가안보와 관련해서는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NPT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제조약에는 국익을 크게 침해할 경우 탈퇴가 가능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명목상의 조항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런 조항을 들어 핵 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가정을 전제로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만일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국내에선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북핵을 막기 위해 핵 개발 또는 전술핵을 들여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높아질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전술핵과 관련한 미국의 정책이 바뀔 수도 있다.”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다. 윤 대통령은 북한이 영토를 다시 침범하면 9·19 군사합의를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남북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당분간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사상 최대 규모였다. 남한 정부도 공세적으로 맞섰다. 북한에 대한 억지력 강화를 위해 한·미 연합전력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이런 전략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방향은 맞다. 하지만 억지력 강화와 동시에 대북 외교력을 키우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팃 포 탯(tit for tat·맞불 놓기)’에만 몰입하면 외교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진다. 궁극적으로 남북 문제는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이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올까.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 초창기에도 군사적 도발과 함께 한·미에 대한 강력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런 분위기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급반전됐다. 당시 북한은 내부적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모든 과정을 컨트롤하면서 미국과 남한을 주무르고 있다고 선전했다. 북한은 또다시 긴장을 한껏 고조시킨 뒤 협상 테이블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런 전략은 그동안 북한이 보여온 패턴 중 하나다. 바이든 정부 이후가 될 수도 있지만 언젠가 북한은 협상에 나설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3.01.07 01:11

  • 정선아의 인생극장? 잘못된 선택은 없다

    정선아의 인생극장? 잘못된 선택은 없다

     ━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이프덴’ 주연 정선아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만 실존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선택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만들어 간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선택이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남의 결정과 환경에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선택의 결과가 좋건 나쁘건, 다시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   이런 난해한 실존주의 철학을 100% 공감할 수 있는 무대가 나왔다. 뮤지컬 ‘이프덴’ 얘기다. 사실 주말에 공연을 예약해 놓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피곤하니 그냥 쉴 것인가, 바지런을 떨 것인가. 휴식을 포기한 대신 깨달음을 얻었다. 판타지를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던 뮤지컬이 인생을 사유하게 할 줄은 몰랐다.   160분 중 주연 분량 150분, 화장실도 못가   2002년 18살 나이에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정선아는 데뷔 20주년을 보내고 아이도 낳은 지금이 ‘인생 2막’의 시작이라고 했다. 박종근 기자 그날 만약 편안한 휴식을 택했다면 배우 정선아를 굳이 만나지 않았을 터. ‘이프덴’의 이혼녀 엘리자베스를 연기하는 정선아는 ‘위키드’의 글린다, ‘아이다’의 암네리스 같은 공주 역할로 각인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변신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2002년 18세 나이로 뮤지컬 ‘렌트’ 주역을 따내며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소녀가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넘겼고, 지난해 아이도 낳았다.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그런데 엄마가 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복귀를 택했다. ‘이프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단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임신 때 77㎏까지 쪘는데 빨리 무대에 서겠다는 목표로 살을 뺐죠. 출산하면 목소리도 변한다길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임신 중에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거든요. 제게 너무 찰떡같은 이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운동도 하고 몸관리도 많이 했어요. 걱정도 있었지만 감히 완벽한 복귀였다고 생각해요.”   ‘찰떡같다’는 표현은 그가 연극적인 무대를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지붕 뚫는 고음’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도 컸기에, 두 편의 드라마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프덴’이야말로 “내 꺼다” 싶었단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무대다. 러닝타임 160분 중 주인공 분량이 150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이프덴’은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두가지 삶의 모습을 쉼없이 오간다. [사진 쇼노트] “그동안 톡톡 튀는 역할을 많이 했고, 제게 원하시는 게 고음 뽐내는 아리아란 것도 알아요. 하지만 배우로서 대사 위주의 드라마적인 작품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이건 연기적으로 끌고 가는 대사를 극강의 고음으로 노래하는 거라 두 토끼를 다 잡은 셈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90% 이상 분량은 처음이고, 이후에도 이런 뮤지컬이 있을까 싶어요. 보통 화장실 갈 시간은 있거든요. 잠깐 앉아서 쉬면서 물도 마시고 소곤소곤 얘기도 할 수 있는데, 화장실은 커녕 아예 옷도 무대 옆에서 갈아입어야 해요. 분량이 워낙 많아서 인터미션에도 대사와 노래를 계속 숙지해야 하고요.”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배우도 바쁘지만, 관객도 방심할 수 없다. 이혼 후 새 삶을 시작하는 엘리자베스가 순간의 선택에 따라 ‘리즈’와 ‘베스’의 삶으로 달라지는데, 두가지 삶이 수십 차례 교차되며 드라마가 전개되기에 관객도 바짝 긴장해야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다른 작품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시잖아요. 캐릭터가 어떻고 둘의 관계가 그렇구나. 그런데 이 작품은 나의 시점으로 보게 되니 어느 한 순간 방관하게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실제로 눈을 뗄 새가 없다는 반응이 많고요. 배우로서 이런 현실적인 뮤지컬이 많아졌으면 해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메시지를 드리고, 생각하게 만드는 공연이어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고3 때 처음 본 오디션에서 에이즈에 걸린 스트리퍼 역할을 단박에 따낼 정도로 어떤 역할이든 쉽게 소화하는 정선아는 ‘본 투 비 뮤지컬 배우’로 알려졌다. 그런데 타고난 게 전부는 아니다. 중2 때 ‘브로드웨이 42번가’에 반해 뮤지컬 배우의 꿈을 품은 이후, 꿈을 향해 쉼없이 직진했을 뿐이다. 데뷔 무대에서도 전혀 떨지 않을 만큼 ‘준비된 스타’였다.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안 떨렸어요. 잘하는 걸 보여주게 되니 그저 좋았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으니 떨릴 이유가 없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미친 듯이 뮤지컬에 파고들었으니까요. 그땐 뮤지컬 배우란 직업을 아무도 몰랐어요. 정보도 없던 시절 방배동에 딱 하나 있는 배우 아카데미에 직접 찾아가서 등록하고, 매일 저녁 연습하러 다녔죠. 엄마의 지지도 컸어요. 뮤지컬을 처음 보여준 분도 엄마였고, 배우가 되겠다니 적극 알아봐 주셨죠. 윤석화 선생님이 ‘토요일 밤의 열기’를 처음 들여왔을 때도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고등학생은 원서도 못 내냐고 묻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뮤지컬 ‘이프덴’은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두가지 삶의 모습을 쉼없이 오간다. [사진 쇼노트] 사실 뮤지컬 판에서 무명의 신인이 데뷔부터 주역을 꿰차는 일은 거의 없다. 티켓을 파는 건 실력이 아니라 인지도라서다. “어려서부터 준비가 돼 있어서 기회를 잡은 것 같아요. 오디션에서 10대가 섹시댄스를 추니 놀랍지만, 30살이 춘다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모험하는 제작사가 없어요. 혜성같이 등장하는 신인이 잘 없는 게, 유명한 누군가가 나온다고 해야 티켓이 팔리니까요.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님께 항상 감사드리는 이유죠.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예리한 눈으로 발견하시고 주연으로 세우는 모험을 해 주셨잖아요.”   ‘이프덴’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엘리자베스가 공원에서 시위 행렬에 가담할 것인가, 버스킹 공연을 볼 것인가의 사소한 선택에 따라 ‘리즈’와 ‘베스’라는 매우 다른 삶의 경로가 펼쳐진다. 누구에게나 돌이켜 보면 ‘그때 만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순간이 있을 터. 정선아에게도 마찬가지다. “만약 제가 렌트 오디션에 나이가 안 된다고 자신 없어 했다거나, 가 보지도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좀 늦게 배우가 됐어도 실력이 있으니 잘 풀렸겠지만,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는 못했을지 몰라요.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갔기에 최선의 나를 보여준 것이죠.”   하지만 그는 ‘내가 그때 왜 그걸 안 했지’라는 생각은 잘 안 한다고 했다. 괜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가 선택한 작품이 다 흥행하진 않았지만, 쭉 돌아보면 다 행복했던 지점이 있어요. 흥행 대신 사람을 얻었달지. 그런 게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정선아를 만든 것이고, 또 앞으로 제가 나아갈 밑거름이 되겠죠. ‘이프덴’의 메시지도 그거예요. 옛날 TV에서 보던 ‘이휘재의 인생극장’과는 달리, 그 어떤 선택에도 좋고 나쁘고가 없어요. 그저 나로부터 시작되는 순간순간의 선택과 사건이 모여 나의 긴 인생이 되고, 책임도 나의 것이라는 이야기죠.”   18세에 뮤지컬 ‘렌트’ 주역 준비된 스타   새침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정선아는 개그맨 뺨치게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든 질문에 열정적으로 답했고, 무한 긍정의 행복 에너지로 주변의 텐션까지 끌어올렸다. 스스로도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창 ‘천재’ 소리를 듣던 시절엔 교만했고, 한때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었단다.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10년쯤 일을 하니 어릴 때 미친 듯 쫓아다니던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진 것 같았어요. 이른 나이에 꿈을 이뤄 버리고 나니,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더라구요.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어릴 때 교복 입고 연습실에 가서 새벽까지 열심히 하던 내가 꿈꾸던 미래가 그냥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달까요. 내 꿈이 고작 얼마의 돈이 되고, 페이를 더 받으려고 작품을 선택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발견한 건 ‘감사’라는 키워드였어요. 내가 이런 끼를 받았고, 이렇게 멀쩡하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게 모든 해결의 열쇠였어요. 그러고 보니 나를 도와주는 스태프에게도 감사한 줄 모르고 혼자 우쭐해 살았더군요. 계속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다행히 저는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감사 표현도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정선아/20221222/서소문/박종근] 뮤지컬 '이프덴' 주인공 정선아가 22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스 빌딩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그는 지나간 이야기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고 싶다”면서 자신의 대표작도 지금 하고 있는 ‘이프덴’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렌트’는 지나간 첫사랑이었을 뿐이다. “이프덴을 만나기까지 고민이 많았어요. 결혼, 출산으로 인한 몸의 변화, 환경의 변화가 생기면서 여러 선택을 해야 했죠. 앞으로도 많은 갈림길이 있겠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안 할 거예요. ‘이프덴’의 메시지처럼, 잘못된 선택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무대에서도 행복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1.07 00:34

  • “흥민, 널 믿을게” 벤투 뚝심 유지, 선수들 결속 강해졌다

    “흥민, 널 믿을게” 벤투 뚝심 유지, 선수들 결속 강해졌다

     ━  최태욱 코치의 ‘벤투호 1500일 항해일지’   파울루 벤투 감독과 4년4개월의 동행을 마무리한 최태욱 코치는 “감독님의 전술과 선수 기용에 대해 밖에서 흔들수록 대표팀 내부의 신뢰와 결속은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2022 FIFA(국제축구연맹)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16강으로 이끈 파울루 벤투(54·포르투갈) 감독이 본국으로 돌아가던 날, 이 냉철한 승부사도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최태욱(42) 코치와 작별 포옹을 하는 순간이었다. 2018년 8월 부임해 2022년 12월 월드컵을 마칠 때까지 4년4개월 동안 벤투의 곁을 지킨 사람이 최 코치였다. 대표팀 코칭스태프 중 유일한 한국인이자 2002 한일 월드컵 4강 멤버로서 그는 선수들과 벤투 사단 사이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500일이 넘는 긴 항해를 끝내고 벤투호에서 내린 최 코치는 모처럼 가족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위기도 있었고 외부에서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수록 벤투 감독님은 자신의 축구 철학을 뚝심 있게 유지했고, 선수단 내부의 신뢰와 결속은 강해졌다”고 말했다. 최 코치는 “매력 있게 이기고 싶어한 벤투 스타일을 끝까지 믿어주신 정몽규 축구협회장께 감사드린다. 선진 대열에 합류한 한국 축구가 뒷걸음치지 않으려면 후임 감독을 잘 뽑아야 하고 대표팀에 대한 지원도 좀 더 촘촘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라질에 맞장 뜨는 벤투 축구에 확신   1500일 항해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2019년 11월 아랍에미리트에서 브라질과 맞붙었을 때다. 0-3으로 졌지만 점유율·슈팅수 등이 대등했다. 세계 최강과 중립지역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선 수비 후 역습’으로 갈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맞장을 뜨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벤투 축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   벤투 감독 첫인상이 어땠나.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선수만 생각하고, 선수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다. 운동장에서만 좀 강하시고, 특히 심판에게는 되게 강하다(웃음). 일하는 방식은 내가 만난 지도자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었다. 코칭스태프의 역할 분담이 명확했고, 시너지 효과도 컸다.”   훈련할 때 특징적인 모습을 꼽자면? “체력훈련 때 규격과 간격을 매우 중요시 한다. 위치추적장치(GPS)가 부착된 전자성능추적시스템(EPTS)을 착용한 선수들이 훈련이 끝나면 활동량·맥박수 등을 체크한다. 전날 좀 강한 훈련을 했다고 하면 당일 패스 연습 때 선수간 거리를 1m라도 줄이라고 하고, 훈련 장비 무게에도 신경을 썼다.”   카타르 월드컵 가나전에서 2-3으로 분패한 뒤 벤투 감독이 손흥민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카타르 월드컵 멤버가 확정될 때까지 축구팬들의 관심은 이승우(25·수원FC)와 이강인(22·마요르카)에게 쏠렸다. 이승우는 2019년 1월 아시안컵에서 계속 경기에 못 나가자 물병을 걷어찼다. 그 후 벤투호에서 사라졌고 카타르에도 가지 못했다.   이강인도 2021년 3월 제로톱(미드필더에게 최전방 역할을 맡기는 전술)으로 나선 일본전에서 0-3 완패한 뒤 강하게 어필했다가 벤투 눈밖에 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강인은 막판 벤투호에 승선했고, 카타르에서 ‘게임 체인저’로 큰 역할을 했다.   이승우 ‘물병 사건’을 돌이켜 보면? “어느 선수나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감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거다. 그것 때문에 감독님이 이승우를 안 뽑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승우는 지난해 K리그로 돌아와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경쟁자보다 월등했던 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월드컵에 갈 수 있었다고 본다.”   2021년 ‘이강인 항명’ 얘기도 있는데. “당시 급하게 한일전이 잡혔고, 유럽파 중에선 이강인만 힘겹게 요코하마에 왔다. 강인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을 고민하다가 제로톱으로 갔는데 강인이 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안 됐다. 강인이가 경기 후 라커룸에서 불만을 터뜨렸다는데 그런 장면은 본 적이 없다.”   이강인에 대한 벤투의 본심은? “이강인이 좋은 선수고 장점이 뭔지는 다 알고 있었다. 황인범(27·올림피아코스)처럼 미드필드에서 활동성이 좋은 주축 선수를 이겨내야 기회가 열리니까 감독님이 기다려주셨던 것 같다. 가장 큰 약점이 공수 전환, 즉 공격 실패 후 수비 가담이었는데 강인이가 그걸 극복했다. 가나전에서 공을 뺏긴 뒤 곧바로 탈취해 크로스를 올려 조규성 헤딩 골로 연결시킨 장면이 바로 그거다.”   선수들이 감독을 ‘벤버지’라 불렀나. “그건 아니고 ‘우리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9월 감독님이 ‘재계약이 결렬됐다. 돈 문제가 아니라 계약 기간 문제’라고 통보했다. 사우나에서 고참 선수들이 ‘저희들이 감독님한테 남아 달라고 사정해도 안 될까요’ 하기에 ‘감독님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분이다’고 얘기해 줬다. 선수들이 후임 관련 소문을 들었는지 ‘우리 축구가 이렇게 발전이 됐는데, 어떻게 해야 경기를 이길 수 있는지 알게 됐는데…’ 라면서 한숨을 쉬더라.”   황희찬 부상 보고 전임 닥터 필요 절감   벤투 감독(가운데)이 훈련 중 선수단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오른쪽 둘째가 최태욱 코치. [연합뉴스]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불과 3주 앞두고 주장 손흥민(31·토트넘)이 안와골절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는 ‘마스크 투혼’을 발휘했지만 본인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답답했다. 최 코치가 당시를 회고했다. “얼굴 다쳐본 선수는 트라우마 때문에 실전 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나도 이마를 40바늘 꿰맨 적이 있는데 상처가 아문 뒤에도 상대 축구화가 얼굴 근처에만 와도 공포가 훅 밀려왔다. 다친 지 얼마 안 된 흥민이는 헤딩까지 할 정도로 자신을 희생했고, 그걸 보면서 동료들이 더 죽기살기로 뛰더라.”   벤투 감독은 어땠나. “아무리 주축 선수라도 결정적인 찬스를 계속 놓친다면 교체하고 싶을 거다. 그런데 감독님은 ‘네가 정말 힘들어서 빼 달라고 할 때까지 나는 널 믿겠다’고 약속하셨다. 결국 16강행을 이끈 포르투갈전 결승골이 흥민이 발에서 나왔다. 그 패스는 ‘쏘니’ 아니면 할 수 없는 어시스트였다. 팀의 에이스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배웠고, 축구 인생을 걸고 희생정신을 발휘한 흥민이한테도 감동을 받았다.”   가나전 두 골로 스타가 된 조규성(25·전북 현대)이 사고를 칠 것 같았나. “감독님이 ‘너는 침투력·제공권·결정력 다 좋다. 볼 키핑과 연결만 잘 해주면 된다’고 하셨다. 나와 마이클 김 코치도 같은 얘기를 하면서 ‘규성이는 나이도 어리고 군대도 갔다 왔고 인물도 좋으니 월드컵 때 잘 하면 대박 날 거다’고 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터졌다. 우루과이전에 교체 투입돼 뛰면서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   포르투갈전 결승골 주인공 황희찬(27·울버햄튼)은 부상으로 힘들어했는데. “월드컵 직전 소속팀에서 햄스트링(넓적다리 뒷근육)을 다쳤다고 해서 재활을 하다가 훈련에 합류했는데, 첫 경기 이틀 전에 또 다쳤다. 부상 부위 MRI(자기공명영상)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포르투갈전도 힘들다고 봤는데 경기 뛴 것도, 골 넣은 것도 기적이다. 대표팀 닥터가 대회마다 바뀌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전임 닥터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케이스다.”   2002년 히딩크 사단 선수였고 2022년 벤투호 코치였는데, 20년 동안 한국 축구가 어떻게 바뀌었나. “2002년 이후 다섯 번 월드컵 나가서 두 번 16강에 오르지 않았나. 경기력으로 봤을 땐 한국 축구가 변한 게 없었다고 본다. 한국 특유의 스타일로 강팀을 만나면 ‘선 수비 후 역습’ 이거였는데 벤투 감독님이 좀 바꿔 놓으신 것 같다. 정말 우리가 하려는 걸 하면서 이기는 것, 이걸 앞으로 더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서 벤투 후임이 더 중요한데. “축구협회에서 많은 고민을 하겠지만 선수들과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어떤 축구가 대세인지 알고, 최상급 감독도 경험한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이런 감독이 필요합니다’라는 말도 좀 들을 필요가 있다.”   앞으로 계획은? “히딩크와 벤투 감독님한테 배운 것들을 잘 갈무리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팀을 만들고 싶다. 20년 뒤엔 대표팀 감독을 맡아 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는 게 목표다. 선수와 코치로서 월드컵 16강을 경험했으니 감독으로서도 기록을 세우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최태욱. 부평고 동기 이천수가 “태욱이를 이기려고 이를 악물었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측면 공격수였다. 빠른 발과 돌파력, 슈팅력을 갖췄다. 2001년 11월 서울월드컵경기장 개장기념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중거리포를 터뜨려 ‘서울월드컵경기장 1호골’의 주인공이 됐다. 2002 월드컵 때는 부상 때문에 3-4위전에서 10분 뛴 게 전부였다. A매치 29경기 4골, K리그 통산 313경기 37골-50도움을 기록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2023.01.07 00:01

  • “서훈 기준은 국가 백년대계 정체성, 정권따라 바꾸면 안돼”

    “서훈 기준은 국가 백년대계 정체성, 정권따라 바꾸면 안돼”

     ━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널리 알려진 대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7살 때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보훈가족 출신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보훈처장으로 임명된 그의 소명의식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지난 27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 응한 박 처장은 “보훈이야말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 없이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영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태껏 미흡했거나 잘못됐던 부분을 하나하나씩 바로잡는 일을 해 왔다”고 말했다.   취임사에서 올바른 보훈 정체성을 확립하겠다고 강조했다. 박 처장이 생각하는 보훈 정체성이란 뭔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신 분들 앞에서 국가는 차별 없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독립운동가와 광복군에 대한 예우와는 달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해전 등의 피해자들에 대해선 보훈 지원 정책이 부족했던 게 현실이다. 천안함·연평도의 경우 전사자나 순직자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분들도 정당한 보상과 예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행정적으로 피해 당사자에게 피해 사실을 입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보훈 심사 기간을 내년부터 대폭 단축하기로 했다.”   보훈이 국민통합에 기여하긴커녕 분열과 갈등을 부추긴 적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광복회의 내부 횡령 비리가 대표적 사례 아닌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는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명예를 악용하는 사례가 있어선 안 된다. 지난 8월 고강도 감사를 통해 사업비 운영 등을 살펴보니 전임 회장이 8억원대의 비리를 저지르며 꽤 오랫동안 광복회를 사유화해 왔더라.”   최근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영화 ‘영웅’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보훈처는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뒤 인근 공동묘지에 매장됐다는 사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지난 10월엔 안 의사 유해가 하얼빈산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됐다는 순국 당시의 중국 현지 보도를 보훈처가 찾아냈다. 너무나 귀중하고 유익한 단서다. 이렇게 하나하나 수집한 역사적 증거들을 지렛대 삼아 중국 정부와 유의미한 협의를 이뤄내려 한다.”   윤동주 시인의 유해도 중국에 안장돼 있는 것으로 안다. “맞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윤 시인을 ‘조선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는 윤 시인을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으로 생각하지만 뒤늦게 살펴보니 서류상 국적이 없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해 봉환이 추진될 경우 국적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지난 7월 윤 시인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들고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를 독립기념관 주소로 등록했다. 이걸로 당장 유해 봉환이 가능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나마 진척을 이루길 기대한다.”   유해 봉환을 추진하는 유공자가 더 있나.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이병헌 역할의 모티브가 된 황기환 선생을 꼽을 수 있다. 황 선생은 임시정부 시절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활동하는 등 미국과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1923년 미국에서 서거하신 황 선생이 2008년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황 선생의 유해도 봉환하기 위해 힘써왔다. 무엇보다 2023년은 황 선생께서 순국하신 지 100년째 되는 해다. 황 선생을 국내로 꼭 모실 수 있도록 뉴욕 법원에 파묘 및 이장 허가를 요청하고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보훈처의 내년도 예산안을 살펴보면 6·25 전쟁 과정에서 다부동 전투를 이끈 백선엽 장군의 동상 건립 비용도 편성됐다. 보훈처는 국비 1억5000만원을 포함해 총 5억원을 들여 내년 상반기까지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위치한 6·25 기념 시설에 동상을 설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백 장군의 과거 친일 행적에 문제를 제기하며 동상 건립 예산의 적절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처장은 “백 장군은 6·25 전쟁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호국의 별이란 사실은 변함없다”며 추모 공간 조성을 통해 호국 영웅의 공적을 제대로 기리겠다는 입장이다.   서훈을 받은 국가유공자를 둘러싼 행적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텐데 보훈처의 구체적인 입장은. “지난 정부 때인 2018년 서훈 심사 기준이 완화되면서 독립운동가나 광복군이 광복 이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한 게 아니라면 일부 일탈이 있더라도 포용적 차원에서 과거 독립운동을 폭넓게 인정하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적극 동조’로 해석할지 논란이 가중되고 있어 이에 대해 내부 의견을 수렴 중이다.”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위원 중 일부가 편향돼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편향된 역사관을 가진 위원이 있다면 공론화를 통해 재정비의 기회를 마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전 정부에서 심사 기준이 아무런 숙의 과정 없이 변경됐고 기준 역시 모호해지면서 국민 정서와 다소 맞지 않는 논란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훈 기준은 백년대계로 이어가야 할 국가 정체성이다. 정권에 따라 혹은 진영에 따라 마음대로 변경해선 안 된다. 이런 사회적 논란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재 서훈 기준이 적정한지, 좀 더 명확하게 개선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검토 단계에 있다.”   새해는 6·25 정전 70주년이다. 준비하고 있는 기념사업들이 있다면. “유엔군이 대한민국 땅을 처음 밟았던 부산 등 의미 있는 지역으로 22개 참전국 정부 대표를 초청해 정부 기념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해외에선 메이저리그 등 한국인 스포츠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는 구단들 협조를 받아 현지 참전 용사들을 경기장으로 초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데 여의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부산의 지역구에서 재선한 국회의원이지만 지금은 국가 보훈을 관장하는 공직자로서 호국 정신과 가치를 바로잡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2.12.3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