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 빚 갚아야 해 암울" 2030 우울증 5년 새 배로 늘어

    "평생 빚 갚아야 해 암울" 2030 우울증 5년 새 배로 늘어

     ━  빚더미에 시름하는 청년들    서울 명동거리에 붙은 대출 명함. [뉴시스] 이정진(37·가명)씨는 7개월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증상을 느낀 건 1년 전쯤이다.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업무를 끝까지 마치기가 어려웠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씨는 “제대로 자지 못했고 잠이 들어도 계속 깨곤 했다”며 “한 달 내내 이런 증상이 이어지니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 했는데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는 받지만 대출 이자에 아이들 교육비까지, 걱정의 근본 원인인 빚더미가 해결되지 않으니 여전히 좋지는 않다”며 “이대로 평생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암울하다”고 덧붙였다.   “고립 동반 사회적 합병증 유발 우려”   지난해 국내 우울증 환자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18년 75만2976명 대비 32.9% 증가한 수치다. 특히 2030 환자가 절대적으로도 증가하고 그 비율도 높아졌다. 20대 우울증 진료 인원은 18만5942명. 18.6%를 차지해 연령대별 최다다. 30대가 16만108명(16%)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2030 청년 34만 여 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5년 전인 2017년 15만 여 명에서 2.3배 늘어난 수치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30은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나가야 할 세대인데 이들이 우울증에 계속 빠지면 우리 사회도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라며 “그 우울은 정체와 고립, 경직을 동반하며 사회적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 합병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정명(35)씨는 “대기업·공기업 등 좋은 곳에 취업을 못하면 첫 번째 패배자가 되고, 집을 사지 못하면 두 번째 패배자가 된다”며 “하루라도 빨리 돈을 모아 집을 사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는 상황이라 무리해서라도 대출을 받았다”고 말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 같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 지난 1년여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늘어난 부채 규모가 47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30대 청년층이 진 빚은 133조원을 넘어서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청년들은 집을 사는 데 가장 많은 빚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한 해 동안 75조4604억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8조4888억원의 신용대출도 더해졌다. 주식 신용거래 46조890억원, 미수거래 3조7709억원으로 빚투를 위한 부채 또한 적지 않았다. 신규대출액이 늘면서 연체 또한 함께 증가했다. 2030세대의 올해 7월 연채액은 4940억원으로  작년 연체액인 3524억원에 비해 1416억원의 증가세를 보였다.   권 교수는 “꼭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더라도 그 직전에 있거나 심각한 우울감에 빠져있는 2030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30세대(34만명)에 이런 ‘위험 단계’와 ‘숨은 환자’까지 더하면 4~5배 수준으로 폭증할 것이라고 권 교수는 추정했다. 약 130만~150만 명에 이른다는 말인데, 2021년 기준 2030세대 인구가 1343만명임을 감안하면 청년 열 명 중 한 명은 우울증을 앓거나 고위험군이라는 것이다. 권 교수는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권 교수는 경제 문제를 청년 우울증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우울증을 겪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경제 문제와 얽혀있다는 것이다. 그는 “취업도 포기하고 집도 포기하는 등 흔히 말하는 N포 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이라며 “경기는 안좋고 미래는 불확실 하니 우울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노동-대출-부동산’이란 연쇄고리 속 청년들의 소득 격차는 선명한 계급 격차로 이어진다. 6개월전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는 이상훈(34)씨는 “지금 아니면 영영 집을 사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다”며 “그런데 금리가 오르고 경제상황이 나빠지면서 달에 나가는 이자만 100만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누구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물려준 집에서 잘사는데 나같은 일반 시민은 아등바등해서 간신히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계급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박탈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사회적 계급 격차로 인한 청년층의 박탈감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하게 만든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2 자살백서’에 따르면 상대적 박탈감이 청년층을 극단적 선택으로 이끄는 주된 요인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보건복지부 연구팀은 ‘상대적 박탈감이 클수록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고, 이는 다시 사회적 고립감을 높여 극단적 선택 위험성이 커진다’는 가설에 대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거의 대부분의 자살자가 우울증을 겪는다고 보고 있다. 지난 4월 보건사회연구학술지에 오른 ‘같지만 다른 그들, 청년:성별 자살생각과 자살시도 영향요인의 탐색 연구’ 논문에 따르면 만 20~39세 청년 1012명의 42.1%(430명)가 지난 1년 내 극단적 선택을 고려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감과 함께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 경험이 있다는 20대 김우연씨는 “취업도 잘 안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겹치니깐 오히려 죽는게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느 순간 내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김씨와 같이 생각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건복지부가 전국 80개 병원 응급실에 내원한 자살 시도자 2만6538명을 분석한 결과 20대 27.9%(7400명), 30대는 13.6%(3607명) 등으로 집계됐다. 극단적 선택으로 응급실을 찾은 10명 중 4명이 2030인 셈이다.   경제적 문제 뿐 아니라 코로나도 청년 우울증의 유의미한 원인 중 하나라는 분석도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등 주변 환경이 비대면으로 변화하면서 일, 학업과 휴식 간 경계가 사라지고 코로나 이전 대비 오프라인 환경에서의 움직임과 긍정적인 정서 교류가 감소했다”며 “굉장히 제한된 공간에 고립되면서 우울감이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코로나  상황은 수그러들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이 현재 심화하고 있는 것은 시간 차를 두고 나타나는 ‘심리적 후유증’ 때문이라고 임교수는 전했다.     회복탄력성 훈련·안전망 확보 필요   경제 문제와 코로나로 취약해져 있는 청년들에게 소셜미디어(SNS)는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시시각각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연예인이든 엄청난 부자들이든 다들 어떻게 사는지 SNS를 통해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그 확산 정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큰데 2030세대의 경우 SNS에 담긴 다른 사람의 좋은 모습들만 보면서 자신과 끝없이 비교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최근 SNS를 모두 삭제했다는 이은진(32)씨는 “휴대폰에 앱 이용시간이 뜨는데 인스타그램만 하루에 5시간을 넘게 했더라”며 “매번 해외여행을 가거나, 좋은 집에 사는 친구들을 보며 질투하는 스스로가 구차해서 SNS를 아예 안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다만 2030세대의 우울증 진단 증가 원인이 정신과 진료 문턱이 낮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권준수 교수는 “이전에는 정신과에 다니는 것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우울 증상이 생기면 병원에 도움을 청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라며 “자신의 우울감을 깨닫고 적절한 치료를 찾는 젊은 층이 많아졌다는 부분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적으로는 회복 탄력성을 높이려는 훈련이, 사회적으로는 안전망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명상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회복탄력성을 길러야 한다”며 “사회적으로는 안정적인 주거 대책과 연금개혁 등 다양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SNS 서비스에 대한 적절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곽 교수는 “SNS 서비스 제공자들도 자신들의 서비스가 청년들의 박탈감과 위화감을 조장하는 데 쓰이길 바라진 않을 것”이라며 “과도하거나 허위적인 게시물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정작용이 가능한 가이드라인을 정해 두려는 논의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3.10.28 00:45

  • 후보 순위 매기는 ‘보다 카운트 투표’ 땐 극단 정치 줄어든다

    후보 순위 매기는 ‘보다 카운트 투표’ 땐 극단 정치 줄어든다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현재 대한민국의 투표 방식은 ‘단순 다수결’(simple majority voting)이다. 가장 지지하는 한 명의 후보에게만 표시하는 투표 방식이다. 이런 단순 다수결 투표의 문제는 바로 ‘어떤 후보를 제일 좋아하는가’에 대해서만 의사 표현이 가능할 뿐이고 어떤 후보를 끔찍이 싫어하더라도 싫다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어떤 안을 싫어하는지’를 말하는 비토(veto)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비토 방식은 싫어한다는 의사 표현만 가능하고 좋아한다는 의사 표현이 안 된다는 정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어쨌든, 국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이끌어갈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을 선출하는 단순 다수결 방식에 크나큰 결함이 있어 국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최우수 선수, 보다 카운트 투표로 선발   국민들의 의사가 잘 반영되는 투표를 통해서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오래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도편추방(ostracism)과 같은 전 시민이 참여하는 투표가 시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학계에서 인정하는 투표 방식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의 시작은 18세기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과 귀족이 아닌 국민들의 국가가 세워졌으니 당시 프랑스의 학자들로서는 주인인 국민의 뜻을 모을 이상적인 투표 방식이 무엇인지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18세기 말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제안된 투표 방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가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라는 수학자가 제안한 ‘콩도르세 투표’(Condorcet voting)와 보다(Jean-Charles de Borda)라는 수학자가 제안한 ‘보다 카운트’(Borda count)이다.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어떤 후보를 싫어한다는 의사 표현을 못하는 단순 다수결의 단점을 해결하고자 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일단 콩도르세 투표는 모든 후보자를 놓고 한 번에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예를 들어 올림픽 권투 경기에서 참여한 선수들 수십 명을 링 위에 올려놓고 한 번에 경기를 시켜서 최종적으로 남은 선수에게 금메달을 주는 방식을 택한다면 어떻겠는가. 반드시 기량이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가 금메달을 받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선수들은 가장 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에워싸고 공격해서 일단 그 선수를 탈락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수가 남아 있다면 자신이 금메달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떼로 몰려서 싸우게 만드는 경우에는 오히려 가장 강하고 뛰어난 선수가 먼저 탈락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투표도 마찬가지다. 어떤 후보가 뛰어나다고 하면 다른 모든 후보들은 가장 뛰어난 그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서 힘을 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이 원하지 않는 엉뚱한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에서는 모든 권투 선수들이 1:1로 시합을 하도록 한다. 두 명이 경기를 해서 패한다면 그 결과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고, 승리한 선수가 더 강하다는 것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자인 콩도르세는 올림픽 권투 시합처럼 모든 후보들을 1:1로 맞붙여서 선거를 해 최종 승리자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이런 콩도르세 투표가 시행된다면 정치인들은 왼쪽, 오른쪽, 그리고 중도의 다른 정치인들과 1:1로 붙어서 모두 이겨야 하므로 한쪽에 치우친 정책을 내걸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런 콩도르세 투표에는 ‘콩도르세 역설’(Condocet paradox)이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결점이 존재한다. 다시 올림픽 권투 시합을 생각해 보자. A, B, 그리고 C라는 세 명의 권투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고 시합을 했는데 A와 B의 경기에서 B가 승리하고, B와 C의 경기에서 C가 승리하고, C와 A의 시합에서는 A가 승리한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금메달을 줄 것인가? 세 선수가 모두 1승 1패이므로 금·은·동을 가릴 길이 없는 것이다.   콩도르세 투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A, B, 그리고 C라는 세 후보가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콩도르세의 방식에 의해서 투표를 했더니 A와 B의 투표에서는 B후보가 승리하고, B와 C의 투표에서는 C가 승리하고, C와 A의 투표에서는 A가 승리한다면 당선자를 가릴 길이 없는 것이다. 만일 콩도르세 역설이 실현되면 선거에서 당선자를 가릴 수 없게 되므로 정치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콩도르세 투표 방식을 채택하는 국가나 조직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대학 학생 대표 선출할 때도 사용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 다수결제도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극과 극으로 나뉘어 서로 타협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단순 다수결 투표 방식의 문제점이 존재한다고 본다. 단순 다수결에서 유권자는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자 한 사람에게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어떤 후보를 모든 유권자들이 두 번째로 선호한다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선거에서 두 번째로 선호되는 후보는 단순 다수결에서는 단 1표도 받지 못하고 탈락하게 된다.   따라서 단순 다수결 하에서 정치인들은 어차피 자신을 1등으로 선호하지 않을 유권자들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유권자가 자신을 2등으로 좋아하든, 아주 질색을 하면서 싫어하든 정치인에게는 똑같은 것이다. 자기를 찍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일부의 유권자들에게 극단적인 정책으로 호소하여 자신을 1등으로 찍어줄 유권자만 늘리는 정책을 펴는 것이 유리하다. 이런 단순 다수결 방식의 투표 때문에 정치인들은 자신의 극렬 지지자들의 의견만 듣고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된 것이라면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동정이 간다.   단순 다수결 제도 하에서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다수에게 널리 사랑받기 보다는 소수에게 열정적으로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8세기 또다른 프랑스의 수학자인 보다가 제안한 보다 카운트 투표 방식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카운트 투표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사람만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후보들을 놓고 가장 선호하는 사람을 1위로 표시하고, 다음으로 선호하는 후보를 2위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투표하게 된다. 즉,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부터 가장 싫어하는 후보까지 순서를 매기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후보들의 수가 10명이라면 1위를 한 후보는 10점을 받고, 2위를 한 후보는 9점을 받으며 제일 싫어하는 10위를 한 후보는 1점을 받는 방식이다. 이렇게 모든 유권자들이 후보들에게 점수를 주고 그 점수를 합산하여 그 합이 가장 큰 후보가 당선되는 방식이다. 이런 보다 카운트의 투표 방식에서는 1등을 하기 보다는 꼴등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모든 유권자들에게 2등을 한 후보가 있다면 평균 9점을 받아서 당선될 확률이 아주 높아질 것이다. 즉, 보다 카운트 제도에서는 정치인들은 극렬 지지 유권자에만 신경 쓰고 다른 유권자들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했다가는 당선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다 카운트 방식을 사용하면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모든 국민들에게 골고루 호응 받을 수 있는 중도적인 화합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될 것이다. 보기 싫고 억지스러운 반대를 위한 반대의 적대적 정치인들은 줄어들 것이다. 실제로 보다 카운트는 많은 곳의 투표에서 사용되고 있다. 각종 스포츠에서 올해의 최우수 선수를 선발할 때 보다 카운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국 대학에서 학생 대표를 선출할 때에도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보다 카운트 방식의 투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수천만 명의 유권자들의 점수를 다 합산한다는 것은 몇 달이 걸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계산기를 두드리면 불과 1초도 안 되어서 모든 합산이 가능한 시대이므로 이런 다양하고 보다 합리적인 투표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경제학 비타민』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등의 저서가 있다 

    2023.10.28 00:33

  • 데뷔도 전에 팬덤 100만 돌파, BTS식 홍보시스템의 힘

    데뷔도 전에 팬덤 100만 돌파, BTS식 홍보시스템의 힘

     ━  글로벌 K팝 4.0 현지화 넘어 토착화   요즘 가요계에선 벨기에·미국·독일·인도 멤버로 구성된 다국적 걸그룹 블랙스완이 화제다. ‘국내에서 한국어 노래로 활동하는 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이라는 역설 때문이다. 2020년 결성 당시 한국인과 외국인이 고루 섞여 있었지만, 지난해 한국인 멤버가 모두 탈퇴하고 전원 외국인으로 재정비됐다.   그뿐 아니다. 한국에서 영어 노래를 부르는 일본인 7인조 걸그룹 엑스지도 있고, 최근 JYP가 최종 데뷔조로 발표한 6인조 신예 걸그룹 VCHA(비춰)도 미국인 4명·캐나다인 1명·한국계 미국인 1명 구성이다. 미국 대형 음반사 리퍼블릭 레코드와 함께 현지에서 캐스팅한 VCHA는 한국에서 K팝 트레이닝을 받고 내년 정식 데뷔해 북미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글로벌 아이돌 오디션에 12만 명 몰려   ‘K팝 연수돌’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최영재 기자 하이브도 유니버설뮤직 산하 게펜 레코드와 함께 북미 시장 맞춤형 글로벌 오디션 ‘더 데뷔: 드림아카데미’를 진행 중이다. 방탄소년단(BTS)을 탄생시킨 K팝 제작 시스템으로 글로벌 걸그룹을 키운다 하니 전 세계에서 12만 명이 몰렸고, 600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예비 멤버 20명이 지난달부터 대중 앞에 섰다. 미국·브라질·아르헨티나·스위스·벨라루스 등 12개 국적인데, 2명뿐인 한국인이 최종 멤버 6~7인 안에 들지는 미지수다.   관련기사 K인니팝 그룹 스타비 “블랙핑크처럼 월드투어 꿈 이룰 것” ‘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이 아직 낯설지만, 아이돌의 원산지 일본은 일찌감치 포맷 수출 형태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해 왔다. ‘AKB48그룹’을 기른 거물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2010년대 이미 태국의 BNK48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JKT48, 대만 TPE48, 필리핀 MNL48, 인도 MUM48, 중국 SNH48 등 AKB 자매그룹을 아시아 전역에서 제작했다.   그에 비해 K팝의 세계진출은 특정 아티스트 중심으로 한 해외원정의 역사였다. 2000년대 보아처럼 한국 아티스트에게 언어와 문화를 교육시켜 현지용 아티스트로 키우던 1단계와 2010년대 블랙핑크의 리사, 트와이스의 쯔위·사나·모모처럼 외국인 멤버에게 현지에서 K팝 홍보대사 역할을 맡기던 2단계를 거쳐, 2020년대 들어 비로소 ‘한국인 없는 K팝 아이돌’을 제작하는 3.0 시대가 활짝 열렸다.   오는 30일 첫 싱글 앨범 ‘프레스 플레이’로 국내 가요계에 데뷔하는 니쥬가 가장 성공한 모델이라 할만하다. JYP가 2020년 일본 소니뮤직과 손잡고 시작한 ‘니지 프로젝트’를 통해 전원 일본인 멤버로 짠 9인조 걸그룹이 일본에서 이미 맹활약 중이다. 데뷔 전 발매한 디지털 앨범부터 오리콘 차트를 싹쓸이했고, 최근 일본 8개 도시 단독 투어에 18만 5000여 관객을 동원했다. 2019년 한일 공동제작 ‘프로듀스101 재팬’을 통해 결성된 일본인 보이그룹 JO1도 홍백가합전 출전, 교세라돔 콘서트 등 일본 내 입지가 탄탄하다.   K팝 스타들의 주무대도 더 이상 국내가 아니다. 정국·뷔 등 BTS 멤버들의 솔로곡은 빌보드의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고, 블랙핑크는 지난해부터 11개월간 세계 41개 도시 월드투어를 돌았다. 지난해 데뷔한 걸그룹 아이브도 최근 19개국 27개 도시 월드투어를 시작했고, 뉴진스도 곧 월드투어에 나선다고 알려졌다.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9인조 걸그룹 니쥬. [사진 JYP엔터테인먼트] 글로벌 음악업계도 K팝에 적극 러브콜을 보낸다. JYP와 하이브의 글로벌 오디션은 세계 3대 메이저 제작사와 협약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업계의 주목 포인트도 성공한 특정 아티스트보다 K팝의 미학과 제작 노하우, 훈련 방식이 응집된 시스템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류 연구자인 조영한 한국외대 교수는 “최근 K팝의 흐름은 더 이상 특정 한국인이나 한국회사가 만드는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퍼포먼스와 패션 등 하나의 컨셉트를 가진 종합 프로젝트로서 기획되어 만들고 유통하고 즐기는 방식으로서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K팝의 미학은 솔로보다 그룹이 행하는 힙합과 R&B 요소가 강한 댄스음악이 기본인데, 비주얼 요소가 핵심이다. K팝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우먼파이터2’의 인기에서 보듯, 숏폼 챌린지 시대에 노래보다 안무와 퍼포먼스가 더 중시되곤 한다. 스토리텔링이 있는 뮤직비디오, 판타지 웹툰을 뚫고 나온 듯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각 그룹 컨셉트에 맞춤형으로 스타일링된 패션도 K팝을 규정하는 요소다.   시스템적으로는 준비된 인재가 아닌 원석을 기획사가 발굴해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아이돌로 육성하는 방식인데, 특히 주목받는 건 홍보 시스템이다. BTS가 소셜미디어를 통한 적극적인 소통으로 팬덤을 키운 방식이 모델이 됐다. 요즘 아이돌은 안무 영상·자체 예능 등 공식 콘텐트의 꾸준한 업데이트는 물론, 트위터·V라이브·1:1 채팅 포맷까지, 끊임없는 노출을 통해 팬을 붙잡는다. 지난 9월 데뷔한 SM 보이그룹 라이즈는 데뷔도 전에 공식 SNS계정 팔로워 1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글로벌 음악산업 주류 된 K팝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K팝의 이런 요소들은 이제 ‘모듈’화 추세다. 아시아권에서는 2000년대부터 많은 K팝 커버그룹이 나왔지만, 이제 K팝을 통째로 이식하기보다 현지 스타일이 어우러진 토착화 모델이 소위 K팝 4.0시대를 열고 있다. ‘피팝’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운 필리핀 보이그룹 SB19, ‘큐팝’으로 통하는 카자흐스탄 보이그룹 나인티원, ‘K인니팝’의 개척자를 자처하는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 등이다.   SB19은 한국 중소 기획사가 필리핀 현지에서 3년간 트레이닝을 거쳐 2018년 데뷔시켰다. 안티가 많은 카피캣 그룹과 달리 필리핀 신화를 곡의 소재로 삼는 등 현지 문화를 적극 끌어안는 한편, 한국 여행 브이로그를 찍는 등 K팝과의 연결고리도 강조한다. 필리핀어와 영어가 섞인 노래를 부르는데, 지난해 ‘Bazinga’란 곡이 빌보드 ‘핫 트렌딩 송즈’ 차트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인지도도 얻었다.   SB19의 성공 이후 ‘피팝’을 내세우는 그룹이 여럿 등장하고, 다른 동남아 국가에도 유사한 흐름이 생기고 있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3년째 동남아 아이돌을 선발해 K팝 연수를 시켜주는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도 현지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이 K팝 모델에 탑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시장 진출이다. 강력한 소통 플랫폼과 홍보 시스템을 활용해 글로벌 인지도를 단숨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길화 원장 정길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장은 “아시아권 국가들이 한류지수가 높고 팬도 많지만 일방주의·상업주의를 지적받기도 했다”면서 “한류 플랜트 수출을 통해 동반성장 하자는 취지로 우리가 특장점을 가진 트레이닝 시스템을 투입해 교류의 판을 깔아주고 K팝 플러스 현지음악을 만들게 하니 지난해 연수를 받은 태국의 로즈베리는 자국에서 신인가수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엔 ‘어디까지를 K팝으로 봐야 하느냐’는 정체성 논란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음악이란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고, K팝도 서양의 팝음악과 일본 J팝의 강력한 영향 아래 탄생된 장르기에 국적 논란은 무의미하다. 심두보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미국 팝 시장이 커지면서 90년대만 해도 영국 팝이 정체성 위기를 겪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차별화된다”면서 “K팝도 혼종화를 통해 진화했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구별할 정도로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태국에서 블랙핑크 리사가 엄청 영웅시되지만 아무도 태국가수라 부르지 않고 K팝 가수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피팝·큐팝·K인니팝…K팝 무한진화   현지화를 넘어 토착화에 이른 K팝의 성공은 팝 글로벌리즘의 측면에서 서양 팝문화를 로컬화시키고 글로벌 대중문화의 다양성 확장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 조영한 교수는 “지금 K팝을 둘러싼 글로벌한 현상들은 저들의 일상생활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마치 한국에서 힙합을 여러 형태로 듣는 것처럼 서구에서도 K팝을 만드는 다양한 연행자들이 나오고 문화끼리 서로 교류하는 데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K팝이 세계시장을 정복해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대중문화의 헤게모니를 흔들면서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적 측면에서는 성공에 들뜨기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보고 글로벌 메이저 자본에 종속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팝시장이 대자본에 휩쓸려 자칫 글로벌과 리저널(regional), 로컬의 3중 지배 구조가 굳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두보 교수는 “하이브·YG·JYP가 유니버설·소니 등 글로벌 메이저 제작사와 협약 관계를 맺은 것이 쾌거였으나, 템퍼링 의혹이 강한 피프티피프티 사태에 워너뮤직이 배후로 지목되면서 중소기획사의 생존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K팝이 피팝·큐팝 같은 로컬 시장을 아우르는 리저널 시장이 됐지만, 메이저 자본에 종속되면 다양성이 훼손되고 생태계가 파괴될 수도 있다. 정부도 대기업 위주의 정책이 아니라 제작현장의 불공정 관행 등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10.21 00:53

  • "블랙핑크 제니, 트와이스 지효 닮고 싶어요"

    "블랙핑크 제니, 트와이스 지효 닮고 싶어요"

     ━  글로벌 K팝 4.0 현지화 넘어 토착화   지난달 8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3 아시아송 페스티벌’에선 하드코어 힙합 컨셉트에 걸크러시 매력을 더한 새 노래 ‘뱅’을 부르는 4인조 걸그룹이 유독 눈에 띄었다. 빼어난 외모에 세련된 의상을 입고 블랙핑크 풍 신곡에 칼군무까지 빈틈없이 소화하니 얼핏 K팝 아이돌 중 하나로 보이지만, 잘 들어보면 낯선 외국어가 섞인 노랫말에 살짝 에스닉한 선율이 입혀졌다.   최신 K팝 ‘스모크’ ‘칠리’ 챌린지도 척척   지난달 2023 아시아송 페스티벌에 출연한 스타비. [사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인도네시아 ‘K인니팝’ 걸그룹 스타비의 무대였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3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에 연수팀으로 선정돼 지난 8월부터 K팝 트레이닝을 받으며 탄생한 신곡으로, 같은 날 공개된 뮤직비디오도 단숨에 조회수 20만뷰를 넘어서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관련기사 한국인 없는 다국적 K팝 아이돌 그룹, BTS 신화 잇는다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댄스 스튜디오에선 스타비의 아벨(21)·케지아(21)·셸라(21)·첼시(19)가 에일리의 신곡 ‘라타타’ 안무를 배우고 있었다. 매주 1회씩 현업 댄서에게 레슨을 받고 챌린지 동영상 콘텐트를 찍는데, 지난주까지 스우파의 ‘스모크’ ‘칠리’ 등을 찍었단다. 거울 앞에서 강사가 별다른 설명 없이 카운트를 세며 동작을 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숙지를 한다. 레슨 후 뉴진스의 ‘하입보이’를 비롯해 그동안 배운 안무들을 척척 시연해 보이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지친 기색 없이 웃으며 춤추는 모습이 트레이닝이라기보다 그저 즐기는 것 같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힘들어도 재미있다. 많은 글로벌 시청자가 우리를 볼 생각을 하면 두근두근한다”(첼시)고 꽤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답한다. 리더인 메인 댄서 아벨은 카리스마가 넘쳤고, 블랙핑크의 지수를 닮은 래퍼 케지아와 제니가 롤모델이라는 막내 첼시는 애교 넘치는 캐릭터, 트와이스의 지효를 좋아한다는 메인 보컬 셸라는 조용해 보였다.   K팝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스타비. 최영재 기자 한국에 어떤 목표를 갖고 왔나.   첼시: “K팝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우리가 가진 매력 포인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의상이나 음악적인 면에서도 인도네시아적 요소를 오히려 글로벌하게 노출시키고 한국인들에게 우리를 알리고 싶은 목적도 있다.”   K팝 트레이닝은 많이 다르던가.   아벨: “일단 연습량부터 다르다. 댄스의 경우 인도네시아에서 하루 3~4시간을 연습했다면 한국에선 8시간까지 하드 트레이닝을 한다. 우리는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해왔는데, 여기서는 배운 것을 토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도 다르다.”   첼시: “내 스타일을 넣으라고 하는 것이 신기하고 새로우면서도 좋았다. 동작만 따라하는 게 아니라 표정과 자기 매력을 댄스 동작 안에 녹여내는 게 K팝스러운 장점인 것 같다.” K팝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스타비. 최영재 기자   “트레이닝 중 한국어 가사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고 입을 모으는 이들은 간단한 한국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오자마자 한아리(아벨)·김지아(케지아)·신세라(셸라)·강채린(첼시)이라는 한국 이름도 지었다. 한국어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K드라마와 K팝을 통해 자연스럽게 독학했다며 각자 BTS의 뷔, 정국, 진, 엑소의 카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한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   케지아: “크레이지하다. K팝 노래방이 따로 있고, K팝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있다. 클럽에도 K팝 데이가 따로 있을 정도로 어딜 가나 K팝 이벤트가 있다.”   셸라: “K팝 아이돌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싶어 K뷰티 튜토리얼 비디오를 보고 배우는 사람도 많다. 이번에 ‘뱅’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한국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현지 팬들이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로 예뻐졌다고 칭찬 댓글을 많이 달아줬다.”   K팝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스타비. 최영재 기자 이들이 아이돌이 된 계기도 K팝의 영향이 크다. 인터뷰에 동석한 소속사 프로엠의 니다 가이파 대표도 아이돌을 꿈꾸며 K팝을 공부했었는데,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줄 인재를 모은 것이 지금의 스타비란다.   어떻게 아이돌이 됐나.   셸라: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케지아가 원래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데 K팝 커버댄스를 같이 해보자고 했고, 니다의 오디션에 뽑혀 아이돌이 됐다.”   케지아: “전에는 인도네시아에 걸그룹 개념이 거의 없었다. K팝 한류가 커지면서 우리가 모였고, 그후 다른 걸그룹이 많이 생겼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도 아이돌 문화가 생겼는데, 선두주자인 우리가 한국에서 기회를 얻었으니 좋은 모델이 되고 싶다.”   첼시: “나는 K팝 커버그룹에서 레드벨벳의 아이린 역할을 하다가 니다에게 포착돼서 합류하게 됐다.”   아벨: “나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힙합 댄서였는데, 댄스 스튜디오에서 니다를 만났다. 오디션을 보면서 K팝에 애정이 생기고 관심이 커져 지금은 내가 리더를 맡고 있다.”   한국 이름 한아리·김지아·신세라·강채린   스타비는 이번 프로젝트로 상당한 글로벌 인지도를 얻었다. 전세계에 송출된 아시아송 페스티벌 데뷔 이후 한국 방송 출연과 각종 페스티벌 축하공연에 초청되고 있고, 인도네시아 현지에서의 인기도 더 높아졌다. 최근엔 구글 측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고, 틱톡 크리에이터 어워즈 후보에도 오르는 등,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K팝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스타비. 최영재 기자 연수 효과를 체감하고 있나.   아벨: “SNS 채널에서 글로벌 팬덤도 많이 늘고, 전혀 없었던 한국인들의 반응도 생겨 신기하고 고맙다. 프로모션이나 이벤트 섭외도 많이 들어오는데 우리에게 K팝이 더해져서 초청받는 것 같다. ‘뱅’이 론칭되자마자 틱톡 크리에이터 어워즈 후보에 오른 걸 보면 K팝의 힘이 확실하다.”   K팝은 팬덤의 역할이 큰데, 소통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나.   케지아: “우리 팬덤인 스카이비를 위한 그룹 채팅방에서 소통하고 있다. 엊그제 아벨 생일에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생일파티까지 같이 했다. 팬들은 우리가 한국에 와서 성장하는 걸 보면서 기뻐하고 대견해 한다.”   어떤 프로그램이 가장 도움이 됐나.   아벨: “일단 한국에 와서 K팝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임팩트가 크다. 우리 팬덤과 아이돌 네트워크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아시아송 페스티벌도 우리에겐 꿈이 이뤄진 자리였다. 글로벌 시청자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꿈이 있다면.   케지아: “아직 스타비 단독 콘서트를 해본 적이 없다. 블랙핑크처럼 자국에서 시작해 세계를 도는 월드투어 콘서트를 하는 게 꿈이다.”   아벨: “이번에 틱톡 어워즈 후보에 올랐지만, 또 다른 많은 글로벌 어워즈 후보에 오르고 상도 받는 걸그룹이 되고 싶다.”     ■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 아시아권 아이돌 뽑아 4개월 K팝 트레이닝 「 K팝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스타비. 최영재 기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원장 정길화)이 주관하는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Grow Together)’은 대중문화 산업 기반 교류를 통해 한류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글로벌 성장 가능성이 있는 아시아권 아이돌을 선발해 4개월간의 체계적인 K팝 트레이닝과 매니지먼트를 통해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한국 문화도 홍보하는 컨셉트로, 다른 나라에 일방적으로 진출하는 게 아니라 상생을 도모하는 ‘윈-윈’ 모델이다.   2021년 베트남 보이그룹 슈퍼 브이와 걸그룹 오투오 걸 밴드, 2022년 태국 걸그룹 로즈베리에 이어 3년차인 올해는 한·인니 수교 50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 대표 걸그룹 스타비가 선정됐다. 스타비는 2019년 데뷔 이후 ‘Time to Fly’라는 곡으로 뮤직비디오 조회수 400만 뷰를 기록했고, 다른 곡들의 뮤직비디오도 평균 10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며 동남아권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카이비’라는 강력한 현지 팬덤이 있고, 지난해 인도네시아 뮤직 어워즈의 베스트 보컬 그룹 후보에도 올랐던 실력자들이다.   이들은 동반성장 디딤돌 사업 참여를 계기로 ‘인도네시아의 블랙핑크’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품고 있다. K팝과 현지 스타일을 결합한 ‘K인니팝’의 개척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아시아송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뱅’이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교류를 통해 탄생한 ‘K인니팝’의 첫 사례인 셈이다. ‘뱅’은 한국인 음악감독과 인도네시아 프로듀서가 협업해 인도네시아 팝 스타일의 멜로디를 적절히 섞었고, 멤버들도 각자 작사 작곡 능력을 살려 수정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인도네시아의 스타일을 담았다. 뮤직비디오에도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국기 이미지를 세련되게 교차시키고 조명과 소품으로 인도네시아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냈다.   이들은 지난 8월부터 11월까지 한국에 머물며 음원과 뮤직비디오, 한국 인플루언서 협업 콘텐트, 한국문화 체험 콘텐트 등을 제작해 전 세계로 송출하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연수 프로그램의 핵심인 ‘2023 아시아송 페스티벌’ 데뷔 직후엔 여러 협업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한·인니 수교 50주년 기념 행사에도 대표가수로 초청받아 축하공연을 했다. ‘K팝 연수돌’로 SNS에서도 유명해진 스타비는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도와 이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10.21 00:49

  • "월급만 안 올라 뭐든 해야" 온라인·AI 활용 'N잡러' 54만명

    "월급만 안 올라 뭐든 해야" 온라인·AI 활용 'N잡러' 54만명

     ━  ‘조용한 부업’ 열풍   지난 18일 오후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시내를 이동 중인 배달 노동자의 모습. [뉴시스] “교통비, 점심값 등 안 오른 게 없는데 월급은 그대로니 뭐라도 해야죠.”   서울시 중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홀로 점심을 먹던 직장인 김경민(38)씨는 자신의 태블릿PC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태블릿 화면에 나타난 건 블로그 방문자수 통계. 점심시간을 활용해 ‘블로그 운영 대행’ 부업에 열중하던 참이다. 김씨는 “건당 사례를 받고 블로그에 올라갈 콘텐트를 대신 작성해주다가 아예 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며 “큰돈 버는 일은 아니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조용히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부업 증가세, 정규직 43%가 투잡   서울의 한 중견기업 재무팀에 근무 중인 직장인 박준수(41)씨의 부업은 작명(作名)이다. 브랜드 네이밍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의 이름을 지어주고 대가를 받는 식이다. 박씨는 “아직은 최저시급 수준의 수익이지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메리트”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한모(37)씨는 국내에는 없는 상품을 대신 구해주는 ‘해외구매대행’으로 소득을 늘리고 있다. 출퇴근길과 식사시간을 쪼개 상품 검색하고 온라인상점에 등록한 다음 퇴근 후 쌓인 주문을 처리하는 게 일과다. 한씨는 “본업에 열중하는 사이에도 온라인에선 매출이 발생하는 게 이 부업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부업이 열풍이다. 물가상승과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살람살이가 팍팍해지자 부업을 통한 추가 소득에 눈길이 쏠리는 것이다. 여기에 모바일과 인터넷 플랫폼이 발전하면서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부업이 가능해진 것도 이런 추세에 한몫하고 있다. 배달대행이나 대리운전 등 기존의 부업과 달리 회사에 알리지 않고도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부업, 이른바 ‘조용한 부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부업 부업을 하고 있다는 근로자 수는 역대 최고치(54만6000명)로 치솟았다. 일이 끊겼거나, 잠시 쉬는 등 지금은 부업을 하지 않더라도 한 번이라도 해본 직장인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열명 가운데 아홉명(89%)은 본업과 함께 부업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비대면 디지털 경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플랫폼 노동이 확대돼 부업하기 쉬운 환경이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인공지능(AI)의 발전도 부업 하는 직장인들에게 단비로 여겨진다. 본업과 부업을 넘나드는 ‘N잡러’(복수의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 그런 N잡러들에게 인공지능은 단순반복 작업 시간을 줄여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컨대 간단한 작문이나 그림은 물론 홈페이지 관리·코딩 같은 일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대략적인 초안을 만드는 것이다. 온라인 구매대행을 부업으로 삼은 한씨도 “최근에는 AI를 활용한 상품 검색, 번역 프로그램도 많아 적절히 활용하면 귀찮은 일이 줄어든다”며 “모바일 원격 제어 프로그램까지 활용하면, 스마트폰만으로 어디서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일자리를 통한 부업에 나서는 건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퇴사와 조용한 해고를 거치며, 본업에서 소득을 올리겠다는 기대를 접고 조용한 부업에 나서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디지털 부업으로 소득을 늘렸다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온라인 그림 판매로 월평균 2만2000달러를 벌고 있다는 도모니크 브라운(29)도 그중 하나다. 그는 CNBC와 인터뷰에서 “2020년까지만 해도 본업 외에 또 다른 정규직 일자리를 병행했으나 지금은 하나만 유지하고 있다”며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한주에 10시간 정도 PC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누구나 고소득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미국에서도 부업에 나서는 직장인은 증가세다. 사업 자동화 플랫폼 업체인 자피에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4%는 부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규직 근로자의 경우 이 비율은 43%로 뛰어오른다. 올해 안에 부업을 시작하겠다는 응답자도 24%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업을 하는 근로자 규모는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까지만 해도 5%가량으로 추정됐지만 몇 년새 급증한 셈이다.   일본 기업 “승진하려면 부업 경험 필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업을 제재하는 기업들도 늘었다. 세계 2위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파이의 공동 창업자인 토비아스 뤼트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부업을 하지말라”고 요구했다. 미국 신용정보기업 에퀴팩스는 지난해 부업 하는 직원 24명을 해고했다.   부업 한국에서도 부업은 금기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일단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선 사전 허가가 필수적이다. 최근 겸직금지 규정 위반으로 징계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유튜버 김재혁(40)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과학 유튜버 궤도로 유명한 김씨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인 한국과학창의재단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겸직금지 규정을 어기고 유튜버 활동을 한 탓에 징계 대상에 올랐다.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25조에선 공무원의 영리업무를 금지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사직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민간 기업도 마찬가지다. 블로그 운영이나 작명 부업에 나선 김씨와 박씨처럼 회사에서 허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 별도 약정서 등을 통해 겸직을 제한하는 게 일반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근로계약서에 경쟁 금지 조항이나 품위 유지 조항이 붙어 있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부동산 임대업 정도”라며 “직원이 창작한 글이나 그림, 영상 등 콘텐트가 구설에 오르면 회사 이미지에도 타격이 불가피해 웬만한 건 금지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부업을 경계하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일본에선 부업을 장려하는 상황이다. 저출산·고령화로 노동 인구 부족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2018년 부업·겸업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어 2019년엔 기업 취업 규칙 기본 지침에서 부업·겸업 금지 항목을 삭제했고, 2022년엔 기업들에 부업·겸업 허용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다. 그러자 부업을 허용하는 민간 기업의 수는 급증했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에 따르면, 부업 허용 기업 비율은 2018년 30%에서 지난해 53%로 늘었다.   직원들의 부업을 장려하는 기업도 부지기수다. 미쓰이스미토모해상보험에선 과장으로 승진하려면 부업이나 자회사 파견 등 다른 일을 해본 경험이 필수적이다. 2020년부터 부업을 허용한 일본 생활용품 제조기업 라이온의 코이케 요코 인사담당 임원은 “사회가 변하는데 대기업 직원들은 같은 가치관으로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업을 허가해 생기는 위험보다 외부 변화를 모르는 데서 오는 위험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 본업·부업 경계 모호, 사회보험·조세 등 제도 변화 논의해야 「 590만원. 부업을 하는 직장인 N잡러들 사이에서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월 소득이다. 국민연금 기준소득월액 상한선인 이 금액을 넘어서면 국민연금공단에선 소득 비율 대로 국민연금을 나눠 납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전달받은 회사 측에선 직원의 부업 여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조용한 부업’을 회사에 알리지 않으려면 본업에서 받는 급여와 부업 소득을 더한 금액이 590만원을 넘어선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직장인 N잡러들 사이에 특정 금액이 공유될 정도로 부업 여부를 알리길 꺼리는 이유는 뭘까. 일단 법적으론 부업을 한다는 것 만으론 문제가 될 게 없다. 우리 헌법 15조에선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고용노동부에서도 부업을 사생활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덕분이다. 그러나 개별 기업들은 상당수는 여전히 근로계약서와 취업 규칙 등을 통해 겸업을 금지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부업과 관련한 소송이 종종 벌어진다.   부업이 문제가 돼 법원까지 간 경우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 법원 판례에선 본업에 지장이 없는 한 부업을 인정하지만, 지장이 있다면 징계 사유로 인정하는 것이다. 회사 업무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 역시 합당한 징계 사유라는 게 중론이다. 합법적인 부업으로 인정받으려면 본업과 부업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디지털 플랫폼의 발전으로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점이다. 회사 입장에선 스마트폰을 자주 만지작거리는 직원을 모두 확인하기도 어려운 데다, 간접적으로라도 회사 생활 중에 얻은 정보와 경험을 부업에 활용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직장인 한모(37)씨는 “스마트폰이나 PC 사용 기록을 통해 겸업 금지 조항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더라도 사생활이 완전히 노출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며 “징계를 피하더라도 ‘한눈파는 직원’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용형태가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제도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옅어지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본업·부업 구분에 묶이기보단 노동시간과 사회보험 적용 기준, 산업재해 책임, 조세 제도 개편 등 다양한 제도 변화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문정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유사한 경제활동에 대하여 자격 유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보험료에 차이가 난다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노동시장 변화를 포용하기 위해 제도가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2023.10.21 00:44

  • 단순 노동력 대체 수준, 미래형 완전 무인매장 아직 멀어

    단순 노동력 대체 수준, 미래형 완전 무인매장 아직 멀어

     ━  폭증하는 무인매장 경쟁력 있나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세븐일레븐의 무인편의점 ‘시그니처 DDR’점은 첨단 정보기술(IT)이 집약됐다. [사진 코리아세븐] 1일 오전, 서울 여의도동 더현대 서울 6층의 ‘언커먼 스토어’ 앞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대기 순번이 400번대에 달했다. 20대 여성이 주를 이룬 가운데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입장을 기다리는 부모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언커먼 스토어는 MZ세대(1980년~2000년대 초 출생) 취향에 맞춘 잡화·생활용품·식음료·굿즈 등 200여 개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빼곡했다. 좁은 매장에는 수십명의 고객이 있었지만 어디에도 점원과 계산대가 보이지 않았다. 점원이 없는 이른바 ‘무인(無人)매장’이다.   고객은 매장 입구에서 스마트폰 ‘현대식품관 투홈’ 애플리케이션(앱) QR코드를 찍고 입장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른 후 그대로 들고 나가면 앱에 등록된 결제수단으로 3분 내 자동결제가 이뤄진다. 자동결제는 천장에 설치된 40여 대의 인공지능(AI) 탑재 카메라와 150여 개 무게 감지 센서가 고객과 상품 이동을 추적하는 것과 동시에 무게 변화를 읽어내 이뤄진다. 진열된 상품 1개당 최소 3대의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고객의 구매 여부를 파악한다.   관리 쉽고 소자본으로 가능해 각광   2018년 미국의 아마존이 무인편의점 ‘아마존 고’를 선보인 이후 국내에서도 무인매장이 크게 늘고 있다. ‘무인’으로의 전환이 가장 활발한 곳은 아마존 고와 같은 편의점이다. 편의점 4사(CU·GS25·세븐일레븐·이마트24)의 무인매장은 지난해 기준 3310개로 최근 4년 새 16배 가까이 증가했다. 소방청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소방안전관리를 위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에만 무인매장 2163개가 있다. 이어 서울(1005개), 부산(605개), 인천(376개) 순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무인매장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 최첨단 기술, 성과는 암울…AI 매장 ‘아마존 고’ 철수설 AI 카메라가 행동 인식, 물건 골라 출입문 나가면 자동 결제 모두 최근 몇 년 새 생겨난 매장으로, 이번 조사는 소방안전관리 차원에서 실시한 것인 만큼 업계에서는 실제 영업 무인매장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기도에서 셀프빨래방을 운영하는 최모씨(42)는 “관리가 쉽고 직원이 없어 인건비는 물론 4대 보험과 같은 준조세 부담도 없다”며 “투입 노동 대비 수익률이 나쁘지 않아 더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인매장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이스크림 판매점으로 2011개에 달했다. 이어 셀프빨래방(1975개), 스터디카페(967개), 사진관(708개), 밀키트(662개) 등이 차지했다.   무인매장은 점포 운영 등 사업자 입장에서는 관리가 쉬운 데다 인건비를 확 줄일 수 있고, 고객 입장에서는 점원의 간섭 없이 쇼핑을 즐길 수 있다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1일 언커먼 스토어에서 만난 김진아(21)씨는 “평소 ‘최고심’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여기에 종류가 많아서 종종 찾는다”며 “점원이 없어 눈치 보지 않고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매장은 2021년 오픈 후 현재까지 누적 방문객 수가 28만명에 이른다. 편의점의 경우 업종 특성상 매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데다 그 마저도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은 영향이 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무인편의점은 직원이 아예 필요 없거나 과거에 비해 직원 수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무인편의점은 인건비가 적게 들고 공장이나 기숙사, 관광지 등 일반 점포 출점이 어려운 곳에 출점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키오스크(무인 결제시스템)나 로봇 서빙과 같은 비대면 방식에 거부감이 사라진 것도 무인매장이 늘어난 한 원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셀프빨래방 등 비교적 사업 형태가 단순한 업종을 제외하면 완전한 ‘무인’으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상품 수가 많은 편의점의 경우 대개 낮에는 유인매장으로, 사람 구하기가 힘든 새벽에는 무인으로 운영하는 예가 적지 않다. 점포 수가 가장 많은 CU만 해도 전국에 완전 무인매장은 4곳에 불가하다. 이마저도 정부 실증사업 차원에서 CU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이마트24는 2021년부터 완전 무인으로 운영하는 스마트코엑스점을 운영 중이다. 이마트24 측은 연내까지 시범 운영 후 향후 완전 무인매장을 확대한다는 목표지만 아직 상용화까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편의점 업계에서는 GS25가 가장 많은 85개의 완전 무인매장을 운영 중이다.   완전 무인매장이 쉽지 않은 건 보안 등의 이슈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인결제 시스템 등은 이미 완벽히 갖춰져 있지만, 무인이라는 특성상 절도 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6월까지 무인매장 절도 건수는 총 2830건으로 월평균 471건이었다. 이는 전년(월평균 351건) 대비 34%가량 늘어난 수치다. 폭행과 기물파손 등까지 합치면 무인매장 범죄 건수는 수만 건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안업체 에스원 산하 범죄예방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주택 침입 범죄는 전년 대비 72% 감소한 반면 무인매장 침입 범죄는 85.7% 늘었다. 관련 범죄가 늘면서 보안 시스템도 상당부분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이를 완전히 막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따른다는 분석이다.   매장서 체험하고 온라인으로 구매   여기에 담배·주류와 같은 미성년자 판매 불가 상품을 취급하는 문제는 걸림돌이다. 편의점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담배·주류 판매에 대한 대안으로 자판기 등도 거론되고 있지만 유인에 비해 편의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며 “또 심야시간에 직원이 상품 발주와 진열을 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완전 무인매장이 대세로 자리 잡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광진구에서 아이스크림 무인매장을 운영하는 김수길(가명·39)씨는 “유흥거리라 밤에도 손님은 많지만 그만큼 취객 관련 사고가 많아 신경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라며 “아파트가 많은 상권에서 운영하는 매장조차 아이스크림 몇 개씩 덜 계산하는 건 예사”라고 말했다.   사업 형태가 단순해 완전 무인화한 업종에서는 과당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무인매장가 인기를 끌면서 매출이 늘어나자 무분별하게 출점을 하거나, 유사 브랜드가 등장하면서다. 예컨대 공정거래위원회 가맹사업거래 정보공개서에 따르면 국내 최초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 응응스크르의 폐점률은 지난해 기준 13.7%로 2021년 5.4%에서 8.3%포인트나 상승했다. 폐점률은 프랜차이즈 업종이나 브랜드의 포화상태를 나타내는 지표로 쓰이는데, 10%를 넘어설 경우 수익성이 악화된 것으로 평가한다.   서울 송파구에서 2년 전부터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을 운영하는 박광진(가명·48)씨는 “근처에서 요식업을 하고 있어 관리가 쉽고, 소자본으로 가능해 창업했다”며 “첫 1년은 경쟁자가 많지 않아 수입이 쏠쏠했지만 이제는 100m 건너 한곳이 무인매장일 정도로 흔해져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창업 전문가인 임흥렬 컨설턴트는 “무인매장는 유통·관리가 쉽고, 소자본 창업 가능하다는 이유로 각광받았지만 상권과 입지에 따라 매출이 좌우되기 때문에 부동산 관련 비용을 이기지 못한 창업자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무인매장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4차 산업혁명, AI 기술 발전으로 무인매장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상황이지만 아직은 단순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준”이라며 “대기업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기술로 미래형 점포 개발에 나서곤 있지만 상용화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무인매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공간’보다는 온라인 매장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소매업 매출의 50%가량이 온라인에서 나오는 상황에서 오프라인 매장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 시작한 것이 무인매장”이라며 “이제 오프라인 매장이 점차 상품을 체험하는 모델하우스(견본주택)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동탄점의 여성의류·잡화 무인매장인 ‘#16’이 대표적인 예다. 고객이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상품이 생기면 백화점 앱을 통해 바코드를 찍으면 된다. 앱 장바구니에서 상품을 결제하면 며칠 뒤 집으로 배송 받는 시스템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입어보고, 구매는 할인혜택이 큰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쇼핑 트렌드를 반영했다”며 “오픈 이후 여성복 부문 매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반응이 좋아 다른 지점으로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3.10.07 00:58

  • AI 카메라가 행동 인식, 물건 골라 출입문 나가면 자동 결제

     ━  폭증하는 무인매장 경쟁력 있나   무인매장의 또다른 관전 포인트는 관련 기술이다. 미국의 아마존이 처음으로 아마존 고를 선보였을 때도 단연 화제는 아마존 고에 접목된 신기술, 이른바 ‘리테일테크(소매 유통업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한 기술)’였다. 아마존 고 사례에서 보듯 신기술을 접목했다고 매출이 느는 것은 아니지만, 리테일테크는 산업계 전반에 활용 가능성이 커 무인매장의 매출과는 별개로 산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국내외 무인매장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사람 대신 키오스크(무인 결제시스템)가 결제를 대신하는 식이다. 예컨대 무인빨래방은 키오스크나 세탁기 자체에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빨래가 시작된다. 하지만 무인매장에서 파는 상품의 종류가 다양화하면서 리테일테크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무인편의점 시그니처에 고객이 손바닥을 대기만 하면 결제가 되는 ‘핸드페이’를 적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핸드페이는 사람마다 정맥의 모양이나 혈관 굵기가 모두 다른 것을 이용해 손바닥 인증만으로 본인 확인 및 상품 결제가 가능한 기술이다.   관련기사 단순 노동력 대체 수준, 미래형 완전 무인매장 아직 멀어 최첨단 기술, 성과는 암울…AI 매장 ‘아마존 고’ 철수설 중국의 e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인 징둥이 운영하는 X무인슈퍼에도 첨단 기술이 대거 적용돼 있다. 매장의 모든 상품에 전파식별(RFID) 태그를 붙여가 상품을 들기만 하면 어떤 상품을 몇 개나 집어 들었는지 자동으로 확인된다. 계산 역시 RFID를 감지해 이뤄진다. X무인슈퍼에는 또 안면인식 기술을 적용해 신체 정보를 입력한 고객이 계산대 카메라만 바라보면 자동으로 결제가 이뤄진다.   GS25가 최근 서울 금천구에 선보인 편의점 DX랩은 최신 리테일테크의 집합장이다. 고객이 이 회사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QR코드를 통해 전용 출입문으로 입장하면 60여 대의 딥러닝 AI 카메라가 행동을 인식하고, 상품 매대 별로 장착된 190여 개의 무게 감지 센서가 상품 이동 정보를 실시간 수집한다. 최종적으로 딥러닝 AI 카메라와 무게 감지 센서의 정보를 통합 분석하면 AI가 어떤 상품을 얼마나 골랐는지 최종 판단한다.   이 같은 리테일테크 분야에서 가장 앞선 곳은 중국의 e커머스 기업인 알리바바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달 시장조사업체 아스타뮤제와 2011년부터 올해 3월까지 210개국에서 공개된 리테일테크 관련 기술 특허를 조사한 결과 알리바바가 1141개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상위 10위에 8개 업체를 올렸지만 선두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특히 세계 최초 무인 매장 아마존 고를 선보인 아마존(750개)은 6위로 크게 밀렸다. 삼성전자는 특허 274개로 18위에 올라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상위 20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신문에 따르면 리테일테크 시장 규모는 오는 2027년까지 14조엔(약 125조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3.10.07 00:53

  • 최첨단 기술, 성과는 암울…AI 매장 '아마존 고' 철수설

    최첨단 기술, 성과는 암울…AI 매장 '아마존 고' 철수설

     ━  폭증하는 무인매장 경쟁력 있나   미국 시애틀 아마존 본사에 위치한 무인편의점 ‘아마존 고’ 전경. [AP=연합뉴스] 8월 미국 시애틀에 있는 아마존 본사를 방문했다. 이 건물 1층에는 아마존이 2018년 1월 선보인 무인결제 편의점 즉, 무인매장인 ‘아마존 고(Amazon Go)’도 있다. ‘물건을 들고 나가기만’ 하면 결제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저스트 워크 아웃 기술’(Just Walk Out Technology)을 내세워 입장에서부터 구매·결제에 이르기까지 자동화된 차세대 매장이다. 점원을 대신해 센서와 카메라가 물건과 고객을 확인하고, 인공지능(AI) 기술로 고객의 성향까지 파악하는 최첨단 무인매장에 전 세계가 들썩였다.   상품별로 설치했던 카메라 사라져   당시 아마존은 아마존 고의 확장판인 수퍼마켓 아마존 프레시(Amazon Fresh)를 연이어 선보이며 과일·채소·고기까지 갖춘 완벽한 무인매장로 거듭날 것이라 예고했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당시 CEO였던 제프 베조스는 “2020년까지 미국에만 2000개 매장을 만들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 즈음 중국의 e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는 5000개 매장을 목표로 신기술을 적용한 무인수퍼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고,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인매장’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관련기사 단순 노동력 대체 수준, 미래형 완전 무인매장 아직 멀어 AI 카메라가 행동 인식, 물건 골라 출입문 나가면 자동 결제 필자가 6개월 단위로 아마존 고를 방문할 때마다 느낀 점은 매년 더욱 새로운 기술과 제품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이번에 방문한 아마존 본사 인근의 아마존 프레시 시애틀 매장은 오히려 휑할 정도로 썰렁한 모습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상품 종류별로 촘촘하게 설치한 카메라가 사라진 점이다. 대신 천장에 넓은 구역을 인식하는 카메라가 확충됐다. 매대 사이에는 아마존의 AI 플랫폼 알렉사를 탑재한 검색대가 있어 제품 가격을 확인하거나 서비스를 문의할 수 있다.   특이한 건 유인 계산대가 생겼다는 점이다. 반품·교환을 담당하는 고객 서비스 센터에도 전에 없던 인력이 배치됐다. 국내 여느 대형마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아마존이 뒤숭숭하다. 실적만 놓고 보면 2000년 닷컴붕괴 이후 최악이다. 최근의 적자 폭은 2014년 파이어폰 등 새로운 사업의 연이은 실패로 기록한 적자보다 6배 이상인 27억 달러에 이른다. 실적이 고꾸라지며 150만명이 넘는 임직원에 대한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구조조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분기별 순이익이 회복세를 보이면서 좀 나아지나 싶었으나 다른 악재가 터졌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의 반독점 소송 제기다. FTC의 리나 칸 위원장은 젊은 나이에 교수를 잠시 접고, 미국 공정거래 위원장이 된 자타가 공인하는 ‘아마존 전문가’다. 그의 논문은 대부분 대기업의 횡포를 지적하고 이를 규제하는 내용이었다. 그랬던 그가 2년 만에 빅테크 기업의 독과점과 전쟁을 선포하며 아마존을 지목한 것이다.   아마존 3억 온라인 고객 최대 강점   이 같은 아마존의 우중충한 현실 한가운데에는 무인매장의 대명사가 된 아마존 고가 있다. 지난해 이후 8개 아마존 고 매장을 폐점했다. 언론에서는 아마존 고의 철수나 축소에 대한 얘기가 꾸준히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존 고는 쪼그라들고 있다. 한때 시장을 주도하던 아마존 고가 뒷걸음질 치는 데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 아마존 고도 코로나19 팬데믹을 피해가지 못했다. 팬데믹 이전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도시가 텅 비었다. 아마존 고는 편의점 특성상 주로 도심에 있다. 신기해서 방문하던 관광객마저 팬데믹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엔데믹으로 이제 회복될 법도 한데 아마존 고는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다시 찾지 않는 데는 신기술만을 앞세운 측면도 없지 않다. 기술우선주의를 통해 무인매장 그 자체를 만드는 데 집중한 것이다. 아마존 고에는 설치된 카메라만 100대가 넘는다. 고객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레이더 센서, 상품의 무게를 측정하는 천칭 등 각종 센서도 한두 개가 아니다. 물건마다 카메라와 저울을 설치해 고객이 물건을 집어들 때마다 일일이 계산했다. 작은 편의점 하나를 운영하기 위해 기술 비용으로만 150억~200억 달러를 들인 것이다.   기술 개발과 적용에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있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어도 결국은 사람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아마존 고는 100% 무인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그 카메라를 감시하는 게 사람이다. 기술 개발, 업데이트 외에 감시 인력까지 비용이 세배로 늘어난 셈이다. 아마존이 기술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동안 고객의 쇼핑에 대한 경험이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뒷전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진즉에 ‘신기하지만 다시 이용하지 않는 곳’이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 아마존 고의 참패는 어쩌면 예고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존은 실패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지금의 아마존은 ‘아마존 옥션’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재의 제3자 판매방식인 오픈마켓을 만들었다. 아마존의 매출 50% 이상이 오픈마켓에서 나온다. 2014년 최악의 제품으로 평가 받는 ‘파이어폰’은 후속 모델인 ‘아마존 에코’의 성공을 가져왔다. 에코는 미국 시장점유율이 72%에 달하기도 했다. 또 ‘아마존 언박싱’은 넷플릭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아마존 비디오’를 탄생시켰다. 검색을 기반으로 구글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아마존은 이후 선보인 상품검색으로 미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존은 분명히 큰 실패를 기반으로 성공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아마존 고가 쪼그라들고 있다고 해서 아마존이 무인매장 운영을 포기했다고 보긴 어려운 이유다.   아마존 고는 구축에 대한 비용 부담을 줄이려 기술의 단순화(카메라 인식기술)를 꾀하는 모습이다. 상품마다 배치한 카메라를 없애는 대신 천장에 매달아 큰 구역을 관리하고, 천칭이나 센서도 대폭 줄였다. 기술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 단순화하면 신기술 전시장은 사라져도 적용 비용으로 구축할 수 있는 무인매장이 자리잡을 수 있다. 특히 이미 아마존은 3억명에 가까운 온라인 고객을 확보한 거대 기업이다. 여기에 더욱 정교한 오프라인의 고객 데이터까지 결합하게 되면 아마존의 고객에 대한 특성 파악은 ‘나보다 나의 쇼핑 습관을 더 잘 알고 있는 아마존’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하지 않게 된다.   앞으로 30년 동안은 ‘데이터 기술의 시대’라고 이야기한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의 말이나, 미래는 인공지능 시대라고 이야기한 손정의 회장의 말대로 아마존은 미래의 무소불위 기업이 될지도 모른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빅테크 기업이 급성장했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진 기업도 결국 오프라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속가능성을 보장받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아마존 고의 실패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다.   최재홍 가천대 창업대학 교수.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카카오 사외이사를 거쳐 현재 KB금융지주 이사회의 사외이사와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2023.10.07 00:53

  • "1000만원 쯤이야" 성장주사·교정·드림렌즈 3종 세트 유행

    "1000만원 쯤이야" 성장주사·교정·드림렌즈 3종 세트 유행

     ━  신종 ‘등골 브레이커’   취학 전 시력검사를 하는 예비 초등학생. 지난 해 9세 이하 근시환자는 27만명에 달하면서 ‘드림렌즈’ 착용 논란이 일고 있다. [연합뉴스] ‘성장주사 0.5년차, 드림렌즈 2.5년차’ 김지원(가명·41)씨의 아들 스펙이다. 중학교 입학 첫날 아들이 “앞에서 두 번째”라며 온종일 시무룩하던 그날이 시작였다. 같은 반 친구도 맞는다는 성장주사를 맞게 됐고 지금 6개월째다. 아직 4㎝ 정도 컸는데, 무엇보다 아이가 좋아한다. 드림렌즈는 진작에 해줬다. 일찍이 근시가 찾아왔던 탓인데, 얼굴형도 그렇고 축구할 때 불편하다해서 렌즈를 맞춰 줬다. 이제는 알아서 잘 끼고 잔다. 성장주사로 급성장해 시력이 급감할 걱정은 미리 덜긴 했다.   드림렌즈는 특수렌즈로 근시, 난시 진행을 늦춰준다. 렌즈를 착용하고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시력이 회복된다. 렌즈가 각막 중심부를 눌러주면서 일시적으로 안경처럼 오목렌즈 효과를 내는 원리다. 간편한데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더 인기인 건 안경을 써서 코가 눌리거나 관자놀이에 안경다리 홈이 생기는 등 얼굴형 변형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다.   성장주사 제품 매출도 100% 넘게 늘어   심지혜(43)씨의 둘째 아들은 6년 전 한창 치아교정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 교정을 시작했다. 5살 무렵 아랫니가 윗니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주걱턱 증상을 보이면서다. 어릴 때 교정을 해두면 성인 때는 편하게 교정할 수 있다는 말에도 솔깃했다. 편하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실리콘 교정장치를 끼고 자면 된다. 초기비용은 50만원에서, 구강구조가 변하면서 3번 교정틀을 바꿔 총 300만원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걸 보면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최근 맘카페에선 종합3종 선물세트(성장주사·치아교정·드림렌즈)가 유행이다. 이르면 5세 유아부터 중학생까지 성장기 아이들의 치료 목적 외에도 외모에 필요한 항목이 고루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각각 성장주사(키), 치아교정(얼굴형, 고른치열), 드림렌즈(얼굴형)와 같다. 실제 성장주사 호르몬 처방은 근 3년 새 2배 늘었다. 2020년 처방인원 수는 1만2500명에서 2022년 2만5300명으로 늘었고, 금액도 597억원에서 1085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환아 중 치아교정 비율도 2017년부터 급증세다. 전남대병원 방문 환아 기준, 2017년 7.09%에서 2020년 13.28%로 늘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이제는 단순 동조심리라기보다 외모의 표준이 상향됐고 이게 일종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외적 요소가 성실함, 자기관리 등의 인격적 요소로까지 비춰지다보니 필수 고려사항이 됐다”고 진단했다. 다시 말해 남들이 다 하는데 안 하면 내가 노력을 안 한 것처럼, 열심히 안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이렇다보니 부모들도 ‘남들 못지 않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남들만치 키 큰다는데 1년에 1000만원은 아깝지도 않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고 가격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성장주사의 경우 키가 전국 하위 3% 미만 중 성장호르몬 분비 관련 질환이 있을 경우 급여항목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비급여 항목으로 취급돼 모두 자부담을 해야 한다. 여기에 몸무게에 따른 투약용량, 약품 종류에 따라 구입비가 1년 기준 60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길게는 6~7년까지도 맞기 때문에 비용은 몇 배가 될 수 있다. 한 달치 약값 공식으로 알려진 ‘아이 몸무게×1.5~2’를 따져보면 몸무게가 적을수록 이득이다. 그래서 더 어릴 때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치아교정은 상대적으로 성인 치아교정보다는 저렴한데 그래도 200만~300만원은 든다. 드림렌즈도 한 번 맞추는 데 90만~100만원 정도지만, 크면서 시력변동이 생기면 다시 맞춰야 한다. 1년 기준으로 3종 종합세트는 최대 1400만원 꼴이다.   이전에는 나이키 운동화, 노스페이스 패딩 등이 ‘등골 브레이커’라 불렸다. 부모가 무리해서 비싼 물건을 사느라 등골이 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런 ‘원조 등골 브레이커’는 30만~40만원에 불과했다. 아무리 소득이 늘고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지만 1000만원이 넘는 신종 등골 브레이커는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물론 치료 목적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게 전문의들의 소견이다. 안문배 서울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요새는 100명을 진료 보면, 치료를 위해 주사를 맞아야 하는 환아는 10명도 채 안 된다”며 “특히 우리나라는 키 작은 게 너무 주눅드는 요인이 된 탓이 크다”고 말했다. 키크는주사 제품으로 알려진 유트로핀(LG화학), 그로트로핀투(동아에스티) 등은 2018년 대비 2021년 매출이 모두 100% 넘게 늘었다. 최근엔 키크는주사 외에 피부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키크는 패치, 키크는 분유 등의 제품들도 보인다.   소아치아교정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모(7)양은 엄마와 함께 지난해부터 세 차례 대학병원 소아치과를 찾았다. 분명 얼굴이 비대칭인 것 같은데 계속해서 진료 결과 이상소견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이모양은 올해 치아교정을 시작했다. 박소연 서울아산병원 소아치과 교수는 “치아교정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요새 정보가 너무 많다보니 골든타임, 즉 적기를 놓칠까 하는 불안감에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보통 윗턱이 아랫턱보다 성장이 빨리 멈추기 때문에 3급 부정교합인 반대교합(주걱턱)엔 조기교정이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단순 치열이 고르지 못한 1급 부정교합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성장에 따른 재발 위험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부 부모, 아이 잘때 몰래 성장주사 놓기도   게다가 호르몬을 포함한 약물을 투입하는 성장주사의 경우 부작용 우려가 적지 않다. 성장주사 설명서에 명시된 부작용엔 두통, 고혈당, 관절통 등이 있다. 안문배 교수는 “성장주사 부작용에는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척추측만증이나 뇌압이 올라 수술하는 경우도 있다”며 “사실 지금껏 성장호르몬 치료를 이렇게 많이 하던 때가 없어 아직 발견이 안 된 부작용이 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장주사 후기글엔 두통이나 척추측만층이 생겨 고민이라는 글도 종종 보인다.   장모(45)씨가 딸아이의 성장주사를 과감히 거절한 것도 그래서다. 장씨의 딸 김모(11)양은 성조숙증으로 1달에 1번씩 지난 2년간 사춘기호르몬억제주사 치료를 받았다. 흔히 성조숙증 진단을 받으면 성장판이 빨리 닫힌다는 우려에 성장주사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장모씨는 “치료받는 중에도 키가 10㎝ 컸다”며 “여아는 초경시기 때문에 서둘러 하던데 안전성이 입증이 안 됐을 뿐더러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5~8세 같이 더 어린 경우엔 고민이 커진다. 어리다보니 주사바늘 자체를 무서워해서 피하거나 아직 너무 어려 약물 투여가 부담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가 잘 때 몰래 성장주사를 놓는, 일명 도둑주사를 놓기도 한다. 일각에선 성장호르몬 결핍이 아니면 그렇게까지는 안 하고 싶다는 의견도 있다.   지나친 교육열, 잦은 스마트폰 사용 등 환경적 요인이 3종 세트를 부추기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19세 이하 근시환자 수는 2017년 74만7181명에서 2021년 75만8464명으로 1만1283명 늘었다. 초중고학생들의 치아 부정교합 비율은 같은기간 16.91%에서 20.09%로 3.18%포인트 늘었다. 박소연 교수는 “진화론적으로 최근 두상 형태가 바뀌고 있긴 하나, 실질적으로 딱딱한 것을 씹지 않아 저작근 발달이 더뎌 뼈가 제대로 지탱하지 못한 탓도 있다”며 “식습관 등 올바른 생활태도부터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10대 중 절반은 일주일 중 30분도 채 안 움직인다. 지난해 10대 생활체육(일주일 1회 30분이상) 참여 비율은 52.6%으로 지난해(55%)보다 더 줄었다. 해외에선 초등교육에서부터 체육시간 비중을 늘리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초등교육에서 ‘전체 필수교육과정 중 체육시간 비중’은 2015년 8%에서 2022년 10%로 늘었다. 한국은 7%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생활습관 변혁을 강조했다. 모두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어서다. 박신혜 서울성모병원 소아안과 교수는 “안경이든, 드림렌즈를 착용하건 그건 본인의 선택사항”이라면서도 “무엇을 하든 근본적으론 시력을 보전하는 생활습관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드림렌즈는 착용 후 수면만 취하면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 충분한 숙면이 병행될 때 유효하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안문배 교수는 “학원을 다니느라 어떻게든 짬을 내 성장주사를 맞으면서 새벽 2시에 잔다는 건 아이러니하지 않나”라며 “일찍 자면 열심히 안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3종세트에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3.10.07 00:48

  • '미리 추석' 쇠고, 넷 중 한 명 해외로 …"86만원으론 어림도 없다"

    '미리 추석' 쇠고, 넷 중 한 명 해외로 …"86만원으론 어림도 없다"

     ━  미리 추석 쇠는 풍경   추석 연휴가 6일간 이어지게 되면서 일본·베트남·서유럽·미국 등 해외여행 상품 예약이 지난여름 ‘7말8초’ 성수기를 넘어서고 있다. 사진은 출국자로 붐비는 인천국제공항. [뉴시스] 설 연휴에는 175만원 썼다. 그렇다면 이번 추석에는?   김용주(46·경기도 고양) 과장은 전전긍긍했다. 나흘간의 설 연휴(1월 21~24일)에 110만원을 지출했다는 김영철(44) 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 지난 설 연휴 씀씀이 기사(중앙SUNDAY 1월 21일 자 2면)에 등장한, ‘그때 그 사람들’이다. 4인 가구, 월 450만원 소득의 중산층 직장인이다. 물가(지난달 3.4%)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미리 추석’을 쇠는 이들을 통해 엿새간 이어지는 추석 연휴 씀씀이를 가늠해 본다. 특정 상황에 따라 비용은 다를 수 있다.   추석 연휴 2주 전인 지난 주말(16~17일) 김영철씨는 ‘미리 추석’을 쇠었다. 장손인 영철씨는 올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57%(한국리서치)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신 온라인 성묘를 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장례문화진흥원이 2020년 추석 때 온라인 추모라는 이름으로 도입했다. 당시 23만여 명이 이용했다. 이후 2021년 추석에 30만 명을 넘겼다. 올해 설은 19만여 명이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도입했지만, 영철씨처럼 ‘미리 추석(혹은 설)’을 쇠기 위한 방편도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장장 엿새에 걸친 추석 연휴에 영철씨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본 여행을 갈 겁니다.”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이번 추석 연휴에 해외여행 계획이 있다는 사람은 24%(성인 1000명 설문)에 달한다. 지난 설 연휴 19%에 비해 5%포인트나 늘었다. 지난해 추석(7%)보다는 3배 이상 증가했다. 한 여행업계 관계자는 “이미 3월부터 ‘인기’ 수준이던 예약 주문이 8월 초순부터 10월 2일 임시공휴일 지정설이 나오면서 ‘치열’ 수준으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영철씨도 “전쟁 치르듯 여행 티켓을 챙겼다”고 할 정도였다. 15일 하나투어에 따르면 9월 29일~10월 8일 출발하는 해외여행 예약 건수는 올해 여름 성수기(7월 27일~8월 5일) 예약 건수보다 30% 많다. 긴 연휴로 유럽과 미국 등 장거리 여행이 인기다. 완판율 90%다. 하지만 상반기부터 지켜온 일본 여행의 열기는 이어지고 있다. 예약의 24%가 일본 행이다. 베트남(19%)이 그 뒤를 잇는다. 이훈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 원장은 “코로나19 그림자에서 완연히 벗어난 이후의 첫 계절이자 첫 황금연휴라, 해외여행 욕구가 급격히 뛰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영철씨는 귀국 후 지난 설처럼 양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양가 부모님 모두 좋아하는 냉면이 설과 추석 사이 9.5%나 올라 한 그릇 11200원(한국소비자원 참가격, 서울 기준)에 육박하고 있다. 삼겹살 1인분(200g)이 1만9000원대에서 그새 ‘보합세’를 보인 것은 다행일까. 외식 물가를 가늠하는 냉면·삼겹살 등 8개 메뉴의 평균 가격은 지난 설에 비해 3.7%가 올랐다. 영철씨가 검색을 해보니 서울 시내 유명 냉면집은 한 그릇 14000원, 제육 한 접시는 3만원. 그는 “10만원 이하로는 외식은 꿈도 못 꾸는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   “김밥 한 줄이 5000원이라니!”   김용주씨는 지난 주말 강원도 홍천에 있는 조부모 묘소에 ‘미리 성묘’를 다녀오면서 고속도로 휴게소 메뉴를 보고 놀랐다. 한국소비자원 참가격에서는 3215원이지만, 2000원 가까이 더 비쌌다. 차에 휘발유를 5만원 어치 넣었는데, 주유 눈금은 찔끔 움직일 뿐이었다. 휘발유 값은 지난 설 연휴(1월 3주차) 리터당 1560원에서 1760원(9월 2주차)으로 12.8% 올랐다. 용주씨는 대체 교통수단 비용을 알아봤다. 고속·시외버스는 설보다 5% 올랐다. 택시비는 26%(기본요금 3800원→4800원), 시내버스비는 25%(서울 1200원→1500원) 인상됐다. 용주씨는 “시민의 ‘발’이 죄다 하이킥을 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홍천 왕복 차량 기름값을 의식한 용주씨는 이번 추석에는 벌초대행을 의뢰했다. 강원도만 해도 벌초 대행 건수가 2019년 3498건에서 지난해 5576건으로 솟구쳤다. 비용은 묘소 규모에 따라 5만원~15만원. 평균 8만5000원선이다. 하지만 ‘미리 성묘’를 가던 용주씨는 고속도로에 갇혀 있었다. 용주씨처럼 ‘미리 성묘’를 가는 차량으로 북새통이었다. 추석을 앞두고 휴일인 지난 9월 10일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영락공원에서 성묘객들이 조상의 묘를 찾아 이른 성묘를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영철씨와 달리 ‘오프라인’ 성묘와 차례를 꼬박꼬박 챙기는 용주씨는 오늘(23일) ‘미리 추석’을 쇠러 경북 영주로 내려간다. 설과 달리 이번엔 부모님께서 차례상을 차린다고 했다. 한국물가정보가 밝힌 올 차례상 비용은 지난 설(35만9740원·대형마트 기준)에 이어 역대 최고치(40만3280원)를 다시 기록했다. 용주씨는 부모님께 차례상 비용 외에 용돈도 드려야 한다. 차량 기름은 20만원 어치 채워놨다. 추석 연휴 때는 국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1년 새 국내 콘도 이용료와 호텔 숙박료는 7.7% 올랐다.   추석 연휴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지난 9월 21일 대전시 오정농수산물 도매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사과와 배, 포도 등 각종 과일을 고르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용주씨는 국내여행을 하며 휴게소에서 5000원짜리 김밥을 다시 먹을 것 같고, 영철씨는 부모님과 14000원짜리 냉면을 씹을 것 같다. 모두 ‘통계’를 웃도는 ‘현실’의 비용이다. 유진그룹이 직원 1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번 추석 연휴 예상 경비는평균 86만원. 지난 설 연휴 79만3000원에서 8.5% 늘었다. 용주씨는 230만원선, 영철씨는 280만원선을 꼽았다. 긴 연휴만큼 비용도 늘었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 경비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86만원? 설에도 그랬지만 실제 그렇게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4인 가구 중산층 직장인 임모(52)씨는 간소한 차례를 지내고 수도권 근교 산행과 궁궐 나들이 정도로 연휴를 보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은 없지만, 70~80만원에서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며 웃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3.09.23 00:35

  • 기뢰 폭파·함포 엄호 속 “상륙 돌격”…팔미도 등대 깜빡이자 “작전 성공”

    기뢰 폭파·함포 엄호 속 “상륙 돌격”…팔미도 등대 깜빡이자 “작전 성공”

     ━  73주년 인천상륙작전 역대 최대 전승 행사   15일 인천시 연수구 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행사에서 6·25전쟁 참전국 대사·무관 등 외교사절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상문 기자 “펑! 펑!” 15일 오전 10시50분쯤 고요하던 인천시 중구 팔미도 인근 해상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해군의 마라도함(1만4000t급), 미 해군 아메리카함(LHA), 캐나다 해군 벤쿠버함(FFH)함이 나란히 인천항 수로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륙 목표인 팔미도를 향한 탐색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해함과 강경함이 소나(해상 물체 탐색 장비)로 기뢰를 찾아내 폭파하는 소해(掃海) 작전을 펼치는 동안 왕건함과 경남함은 함포를 쏘며 엄호했다.   “상륙 돌격을 시작하겠다.” 연이은 포성이 잦아들 무렵 본격적인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지시가 떨어졌다. 정찰용 무인항공기 3대가 상륙지점을 재확인하자 해군 특수전전단 대원을 실은 고속단정이 팔미도로 빠르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해병대의 침투용 고무보트 12척과 돌격용 장갑차 9대가 그 뒤를 뒤따랐다. 해군 해상작전헬기 링스와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이 상륙지점으로 나아가는 동안 장갑차에선 황토색 연막탄이 쉴 새 없이 해상으로 투척됐다. 혼전이 이어지길 15분 남짓. 마침내 팔미도 중앙의 등대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팔미도 상륙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작전 성공. 작전 성공.” 사령관의 무전에 따라 이지스구축함인 서애류성룡함과 인천함, 천지함, 윤영하함 등이 한데 모여 해상사열을 하면서 30분간의 상륙작전은 끝을 맺었다.   관련기사 윤 대통령 “힘에 의한 평화 구축, 자유민주주의 수호할 것” 북, 전투기 현대화·러 부품 조달 타진…한·미 “대가 따를 것” 중·러 등지고 한반도 비핵화 못해, 외교 공간 열어둬야 [사진] 전승 기념한 윤 대통령 vs 러 전투기 탄 김정은 이날 펼쳐진 한국·미국·캐나다 해군의 합동작전은 한국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73년전 인천상륙작전을 재연한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엔 유엔군 7만5000명을 태운 함선 261척이 팔미도 등대 점등을 기다렸다. 이날 오전 0시50분, 미군과 한국군, 켈로(KLO) 특공대가 팔미도에 진입해 등대를 점등하면서 상륙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오전 5시부터 월미도에 포격을 퍼부은 유엔군은 30분 뒤 월미도 상륙에 성공했다. 다음날 오전 1시에 인천을 장악했고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1960년부터 인천상륙작전 기념 행사가 시작됐지만 대부분 전승 기념식 위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실제 병력과 장비를 가동하는 재연행사는 2016년을 끝으로 중단됐다. 유정복 인천시장이 지난해 7월 취임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대규모 기념식을 준비했다. 독도함과 천왕봉함에서 기념식을 지켜본 시민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북 군산에서 왔다는 고모(42)씨는 “과거 선배님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병대 간부 1기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이서근(101)씨는 이날 영상 회고사에서 “당시 미 해군 대령이 나와 ‘우리는 인천으로 가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가서 죽을 장소가 인천인가보다 했다”며 “이걸 제대로 못 해내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갔다”고 회상했다.   한편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을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정상급 국제행사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2025년 인천상륙작전 75주년 기념행사에는 미국·영국 등 참전 8개국 정상을 초청할 예정이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이날 오후 6시 인천시 연수구 오크우드프리미어 인천에서 열린 ‘참전국 주요 인사 초청행사’에서 환영사를 통해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을 뒤집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견줄 수 있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인류의 자유와 평화라는 절대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극적인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인천시와 해군은 이날 행사에 참전국 주한 외교 대사들을 초청했다. 13개국의 주한 외교대사 내외 21명이 초청에 응했고, 인천시 초청인사 10명과 대한민국 해군 초청 인사 21명을 포함해 총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 등 대부분 한국전쟁 때 병력을 파병한 국가의 인사들이었다. 유 시장에 이어 환영사를 한 이종호 해군참모총장은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준 위대한 전쟁 영웅들과 참전국에 대한 감사함을 절대 잊지 않겠다”며 “오늘 자리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국가 간 상호신뢰와 협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의의와 인천의 미래에 대한 발표, 인천시 서구소년소년합창단과 해군본부 캄보밴드의 공연 등도 이어졌다. 유 시장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영웅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게 우리의 의무”라며 “인천을 자유와 평화, 안보 도시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2023.09.16 01:03

  • 윤 대통령 “힘에 의한 평화 구축, 자유민주주의 수호할 것”

    윤 대통령 “힘에 의한 평화 구축, 자유민주주의 수호할 것”

     ━  73주년 인천상륙작전 역대 최대 전승 행사   15일 인천 팔미도 근해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행사에서 상륙돌격장갑차(KAAV)가 연막탄을 터뜨리며 해안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면서 대한민국 타격을 공공연히 운운하는 등 군사적 위협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며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인천항 수로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 행사’ 기념사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현직 대통령이 인천상륙작전 전승 행사를 주관한 것은 1960년 행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다.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은 작전으로 평가된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연패하며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면서 패전 위기까지 몰렸던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아래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작전을 수행해 성공시켰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인천상륙작전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라고 규정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절대 후퇴하지 않겠다”며 맥아더 장군을 감동하게 했던 백골 부대의 고 신동수 일병과 상륙작전의 선두에 서서 적의 수류탄을 몸으로 막으며 산화한 미국 해병대의 발도메로 로페스 중위 등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런 장병들의 결연한 용기와 희생이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관련기사 기뢰 폭파·함포 엄호 속 “상륙 돌격”…팔미도 등대 깜빡이자 “작전 성공” 북, 전투기 현대화·러 부품 조달 타진…한·미 “대가 따를 것” 중·러 등지고 한반도 비핵화 못해, 외교 공간 열어둬야 [사진] 전승 기념한 윤 대통령 vs 러 전투기 탄 김정은 윤 대통령은 이어 “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낸 자유와 평화는 다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 세력과 그 추종 세력, 반국가 세력들은 허위 조작과 선전 선동으로 우리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며 “정부는 참전 용사의 희생으로 이룩한 승리를 기억하고 계승해 어떤 위협도 결연하게 물리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 연합 방위 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며 “자유·인권·법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국들과 단단하게 연대해 흔들림 없는 안보 태세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윤 대통령은 해군 상륙함 노적봉함에 탑승한 가운데 전승 기념식과 인천상륙작전 시연 행사를 주관했다. 전승 기념식은 올해 101세인 이서근 예비역 해병 대령이 영상을 통해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회고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중위로 인천상륙작전 등 각종 전투에 참여했던 해병대 간부 1기 출신이다.   이어 열린 인천상륙작전 시연 행사에는 마라도함과 서애류성룡함 등 함정 20여 척, 마린온, 링스 헬기 10여 대 등이 동원됐으며 현역 장병도 3300여 명이 참가했다. 스텔스 전투기(F-35B)를 최대 20대까지 탑재할 수 있는 미 해군 아메리카함(강습상륙함)과 캐나다 해군의 벤쿠버함(호위함)도 투입됐다. 윤 대통령은 시연 도중 연합상륙기동부대 탑재 사열과 대한민국 해군 함정의 해상 사열에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이날 행사는 한·미 모범 장병과 일반 시민 등 1300여 명이 독도함에 탑승해 함께 관람했다. 이들 중에는 미 해병대 대전차 포병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빈센트 소델로(91), 미국 해군 상륙함 레나위함을 타고 참전했던 알프레드 김(94), 캐나다 구축함 카유가함을 타고 서해 해상 경비와 피난민 보호 임무를 수행했던 도널드 포일(89) 등 해외 참전 용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그동안 전승 기념식 위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2018년 이후엔 태풍과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열지 못하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행사가 재개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전승 기념식과 상륙작전 시연 행사 모두 움직이는 함선 위에서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2023.09.16 01:00

  • 극악 범죄자도 언젠가 사회 복귀, 무고한 참변 막을 길 없어

    극악 범죄자도 언젠가 사회 복귀, 무고한 참변 막을 길 없어

     ━  ‘묻지마 흉악범’이 불러낸 종신형·사형제 논쟁   최근 묻지마 흉악범죄가 이어지면서, 범죄자 처벌 강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사진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추모 공간. [뉴시스] “강력한 처벌 제도가 있었다면, 제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들을 잃은 연모(61)씨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단장지애(斷腸之哀). 자식을 잃은 슬픔은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 같다고 했던가. 그러나 느닷없이 일상에 찾아온 ‘묻지마 범죄’는 어떤 말보다 가혹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연씨가 운영하는 공업사에서 매일같이 함께 일하던 아들(33)은 지난해 10월 2일 벌어진 이른바 ‘안산 월피동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아들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등교하던 길이다. 여자친구와 저녁을 먹고 귀가하던 아들에게 근처에 사는 30대 남성이 “시끄럽다”며 흉기를 휘둘렀다. 가해자는 양극성 정동장애 등 심신미약 상태를 주장했다. 1심 재판부의 판결은 징역 20년. 심신미약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충동적인 범행이고 초범이란 이유였다. 지난달 22일 열린 항소심에선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연씨는 “피해자와 유족들의 인권은 회복이 불가능한데, 가해자 인권만 바라보고 초범이니 충동적이니 하며 언젠가 사회로 복귀시키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정신질환 등 이유 부당한 감형 논란   “피해자 보호와 지원보다 가해자 인권이 더욱 무겁게 다뤄지는 현실,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가해자에 대한 부당한 감형 등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국대 영상영화학과 2학년 이시윤(21)씨는 ‘서현역 묻지마 흉기난동 사건’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피해자 보호를 요구하는 예술디자인대학 학생회의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도중 식사를 위해 서현역을 찾았다가 참변을 당한 김씨처럼 누구나 예고 없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씨는 지난 8월 서현역 흉기 난동으로 사망한 김혜빈(20)씨의 1년 선배다. 이씨는 “유족들은 피해자가 생각나 학우들의 연락도 잘 받지 못하고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데, 가해자는 언론사에 반성문을 보내는 등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예고 없이 찾아온 참변. ‘묻지마 흉악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자 범죄자 처벌 강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피해자 유족들은 입을 모아 사형이나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 강력한 처벌을 요구한다. 금전 문제나 치정, 원한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어 강력한 처벌 말곤 예방할 길이 없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또 다른 서현역 사건 피해자인 60대 여성 A씨의 유족은 지난 14일 첫 공판에서 “이번 사건을 통해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무고한 희생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 대다수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형제는 1997년 이후 집행되지 않아 사실상 폐지됐지만, 사형제 유지 여론은 여전히 다수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사형제 유지를 지지하는 응답은 69%로 반대(23%)의 세 배에 이른다. 1994년부터 2022년까지 여섯 차례 진행된 이 여론조사에서 사형제 폐지 의견이 유지 의견을 앞선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관련기사 “무거운 형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 세계 112개국 사형제 완전 폐지…중·일 등 55개국은 유지 피해자 유족이나 국민 여론과 달리 사형 제도가 부활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사형 집행이 범죄 발생을 줄인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유엔에선 1988년과 2002년 두 차례의 조사 끝에 “사형 제도가 범죄율 감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국내에서도 사형제가 범죄 발생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사형제가 있건 없건 범죄는 일어난다는 얘기다.   피해자 유족들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이들은 “사형 선고마저 실종되면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가해자가 언젠가는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예컨대 무기징역의 경우 20년 복역 후, 유기 징역의 경우 형기의 3분의 1을 넘어선 뒤 잔여 형기가 10년 이내일 경우 가석방이 가능하다. 반면 사형수는 형이 집행되지 않더라도 가석방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안산 묻지마 살인사건의 피해자 유족인 연씨는 “피해자 유족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며 “사형 집행을 하지 않더라도 살인 등 흉악범죄자는 사형을 선고해야 인명을 해치는 범죄자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 선고도 안 해 흉악범 경각심 못 줘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신이 아닌 이상 범죄자가 정말 반성하고 교화됐는지 판단하기란 불가능하단 점도 피해자 유족들이 사형 선고를 요구하는 이유다. 신림역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22)의 사촌 형이라 밝힌 유족은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유족들은 피의자가 반성 없는 반성문을 쓰며 갱생을 가장한 끝에 감형을 받고 사회에 나올까 두려워하고 있다”며 “피의자가 전과 3범에 소년원을 14번 오갔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다시 사회에 풀어놓는 판결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사형제 존폐와 별개로 사형 판결 실종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이 나온 것은 2015년 8월이 마지막이다. 일반 법원보다 처벌이 강한 군형법을 적용하는 군 법원에서도 2016년 임모 병장 GOP총기난사 사건 선고 이후 사형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최근 7년간 사실상 법정최고형은 무기징역이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우리 법원이 사형 선고에 인색하다 보니, 한번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령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범죄자가 또다시 살인을 저질러도 무기징역에 그치는 탓이다. 실제로 지난 7월 13일 대법원에선 강도살인죄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 중 또 다른 수용자를 살해한 20대 남성 이모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 바 있다.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면 무기징역 이하의 형을 받게 된다.   급기야 사법부가 조롱받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8월 창원지법에서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던 60대 남성이 “시원하게 사형 집행을 한 번 딱 내려 달라”며 재판부와 담당 검사를 조롱한 것이다. 살인과 살인미수 등으로 이미 30년 가까이 복역한 이 남성은 출소하고 1년여 만에 또다시 동거녀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범죄자의 인권을 얘기하는 것도 범죄자가 다시 죄를 짓지 않아 선량한 시민들이 인권을 침해당하는 일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며 “범죄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인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법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난 7월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지난달에는 법무부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입법 예고했다. 법조계에서도 도입에 무게를 두는 상황이다. 법무부가 입법예고 뒤 의견조회를 요청한 대한변호사협회에선 최근 찬성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서도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정부 여당은 지난달 22일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을 정부 입법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도 각각 지난 8월과 7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다만 법원행정처에서는 신중해야 한다며 반대 의견을 내놨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사형제 폐지를 전제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선진국에선 위헌성이 있다며 없애는 추세라는 지적이다. 장영수 교수는 “사형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모두 없는 독일에서도 기한 없는 보호감호 같은 대안을 마련해두고 있다”며 “사형제 폐지를 먼저 결정한 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논의하면 그 사이 흉악 범죄자에 대한 영구 격리 가능성에 공백이 생겨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2023.09.16 00:50

  • 세계 112개국 사형제 완전 폐지…중·일 등 55개국은 유지

    세계 112개국 사형제 완전 폐지…중·일 등 55개국은 유지

     ━  ‘묻지마 흉악범’이 불러낸 종신형·사형제 논쟁   사형제 폐지만 3번을 했다. 필리핀의 얘기다. 사형제 부활의 불씨가 켜질 때마다 재도입이 추진됐다. 최초로 1987년 폐지해 6년 뒤 재도입했고, 다시 7년 뒤 폐지, 3년 뒤 재도입을 되풀이했다. 극악 범죄가 증가하는데다 정치적 쿠데타 미수가 이어질 때마다 혼란 막기용으로 사형제 카드가 다시 등장했다. 2006년 이후 현재까지 일반범죄에 대한 사형제 폐지국을 유지 중이지만 부활의 불씨는 여전하다. 2020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사범 단속 과정에서 6000여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했다.   사형제 완전 폐지국이라도 흉악범죄나 테러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부활 여론이 고개를 든다. 정치적 반대자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형제가 고착화되기도 한다. 29년째 장기집권을 이어오고 있는 벨라루스가 그 예다. 유럽대륙 국가 중 유일하다. 그런 여론을 뚫고 사형제 폐지를 이어온 국가의 비결은 국민적 합의를 이룬 데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지난해 기준 세계 사형제 완전 폐지국은 112개국으로,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제를 폐지했다. 일반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제를 폐지하고 있는 곳은 9개국, 사형제 폐지를 헌법에 명시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인 곳은 23개국이다. 10년째 사형 미집행 상태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사형제를 유지해 온 곳은 중국, 일본, 미국 등 55개국이다.   사형제 폐지국의 사정은 저마다 다르지만 폐지 과정에서 비슷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엔 ‘헌법 조항 명시’부터 이뤄진다. 대개 즉시 폐지보다는 점진적 폐지 과정을 거치는데, 사형 선고가 가능한 범죄 수를 줄이거나 사형집행에 예외를 두는 식이다. 영국을 예로 들자면, 사형 폐지 전부터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경우를 축소해왔다. 1776년엔 220개였다가 1861년엔 살인죄, 대역죄, 간첩죄 등 다섯 가지로 줄였고, 1957년엔 살인죄만 남겼다가 1969년엔 폐지하기에 이른다.   관련기사 극악 범죄자도 언젠가 사회 복귀, 무고한 참변 막을 길 없어 “무거운 형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 국민투표의 방식은 국민합의 과정에서 자주 보인다. 스페인이 대표적인데, 1932년 사형 폐지 후 2번의 재도입 끝에 60여년 만에 완전 폐지를 이뤘다. 이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 국민투표다. 1978년 국민투표에 의해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면서 군형법을 제외한 범죄에 대한 사형을 폐지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사형을 금지하는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폐지 수순을 밟았다.   국가 리더십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미국에선 사형제 폐지에 주지사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미국은 각 주마다 사형제 존치여부가 다른데, 사형 폐지법안에 대해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네티컷, 뉴멕시코, 워싱턴주를 비롯해 최근엔 버지니아주도 주지사가 폐지법안에 서명하기로 선언하면서 23번째 사형폐지주가 됐다. 미국은 사형선고가 2011년 85건에서 2019년 43건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점차 폐지하는 분위기다. 2020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평균 살인율을 보면 사형제 존치주는 7.3%인 반면 폐지주는 5.3%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대체형벌에 대한 논의는 필수다. 사형 폐지국가는 대개 종신형부터 도입한다. 독일은 절대적 종신형을 폐지하고 최저 복역기간을  둬서 복역을 마치면 가석방이 가능토록 한 상대적 종신형을 도입했다. 응보이념보다 재사회화, 인간존엄의 중요성에 무게를 뒀다. 영국은 범죄에 따라 최저 복역기간을 달리한다. 미국에서도 가석방 불가능 종신형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상대적 종신형 도입 추진 여론이 일고 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3.09.16 00:47

  • “무거운 형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

    “무거운 형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

     ━  ‘묻지마 흉악범’이 불러낸 종신형·사형제 논쟁   11일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 위원은 범죄자 교화 가능성을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형벌을 강화하는 것보다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신호를 주는 게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입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화두로 떠오른 사형제 부활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등 처벌 강화 여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나 유족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형벌이 무거워진다고 범죄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위원은 오랜 기간 사형제를 연구한 법학자로  지난 2019년 사형확정자 33명을 인터뷰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김 위원은 “과거엔 형벌의 목적으로 응보와 예방을 꼽았지만, 현대 형사사법 체계에선 예방에 대해 더 무게를 둔다”며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선 무거운 처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묻지마 흉악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사형제 부활 등 처벌 강화 필요성이 제기된다. “묻지마 흉악범죄로 묶지 말고 구분해서 봐야 한다. 예컨대 서울시 관악구에서 발생한 증오범죄,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에서 벌어진 조현병 환자의 범죄, 서울시 관악구 등산로에서 벌어진 강간살인 범죄 등은 각각의 원인이 모두 다르다. 증오범죄, 조현병, 성범죄 등 원인이 다르면 대책도 달라야 하는데, 처벌 수위를 높이면 일괄적으로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건 단순한 생각이다.”   사형 등 강한 처벌이 범죄 발생에 영향을 주지 않나. “사형과 범죄율 간 관계는 명확하게 규명한 연구 결과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이 불가능하다. 범죄 발생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받는 데 이를 일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해외에서도 사형제 폐지 후 오히려 살인 사건이 줄었다는 통계도 있고, 사형 집행으로 살인 사건이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유엔에선 사형 제도가 존재하더라도 범죄율 감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무거운 처벌이 범죄 발생을 줄일 것이라 여기는 것은 근거가 없는 얘기다.”   관련기사 극악 범죄자도 언젠가 사회 복귀, 무고한 참변 막을 길 없어 세계 112개국 사형제 완전 폐지…중·일 등 55개국은 유지 범죄자들은 처벌을 두려워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국내 사형수 33명을 만나 직접 물어봤을 때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사형의 존재가 아니었다. 범행을 저지를 때 사형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형수 중에서 일부는 자신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사형제가 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범행을 저지를 때 사형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다른 형벌을 강화한다고 두려워하겠나.”   그럼 어떤 게 가장 두렵다고 했나. “체포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선 무거운 처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중요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범죄 검거율은 지난 2017년 85%로 정점을 찍은 뒤, 매년 하락해 2022년 76.5%까지 떨어졌다. 범죄자 4명 가운데 1명은 검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예비 범죄자가 나도 안 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문제다. 강력한 처벌보다 확실한 처벌이 범죄를 예방한다.”   확실한 처벌은 어떤 의미인가.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잡히고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범죄자들에게 확실히 인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범죄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체포해야 한다. 체포되면 예외 없이 누구나 처벌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 범죄자가 나도 예외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도록 하면 안 된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없애는 게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이란 얘기다.”   징역형의 가석방은 예외 없는 처벌에 반하는 것 아닌가.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가석방은 체포된 뒤 처벌을 받은 뒤의 일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란 얘기다. 교도소의 역할은 단순히 범죄자의 격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범죄자를 교화시켜 다시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그런데 가석방이 없다면 교화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어떤 문제인가. “현장에서 만나 본 교도관들은 가석방 없는 징역형이 도입되면 사형수나 수형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제재 방법이 없다는 점을 가장 우려한다. 희망을 잃은 수형자들이 교도관의 지시를 따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만나 본 사형수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도 희망이었다. 언젠가 사회로 다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교도소 안에서 변화도 하고 반성도 한다는 얘기다. 재범의 위험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격리하는 게 맞다. 그러나 다시 우리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을 교화하려면 가석방이란 희망이 필요하다.”   피해자 유족들은 살인 범죄에 한해서라도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 영구격리를 호소한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지금도 가능하다. 20년 뒤면 무기징역도 가석방 심사를 해준다고 하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교화 가능성을 판단한다. 교화 여부를 두고 가석방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모두 가석방해준다는 게 아니다. 현행 무기 징역 안에서도 가석방 없이 운영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형법에 넣어봐야 실익은 없다.”   흉악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 교도소에서 편하게 생활한다는 지적도 있는데. “예전처럼 교도소 내에서 사형수를 두려워하는 시선이 많이 줄었다. 사형수니까 다른 수용자들 위에 군림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드물다. 교도소 생활도 외부로 알려진 것보다 굉장히 열악하다. 직접 만나본 사형수의 절반은 작은 공간에서 혼자 지냈다. 이들은 평균 60대 남성인데 대부분 이혼한 상태였다. 가족들로부터도 고립되고 교도소 안에서도 고립돼 생활한다. 더구나 사형수들은 미결수 신분이라 기결수에게 부여되는 교정·교화 심리 프로그램도 받지 못한다. 일반 수용자들에게 하루 한 시간씩 주어지는 운동 시간도 사형수들은 30분에 불과하다. 국민 세금으로 먹여 살린다고 하지만 교도소에 들어가는 경비 가운데 사형수들에게 들어가는 직접비용은 연간 250만원가량이다. 편하게 생활한다고 보기 어렵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2023.09.16 00:44

  • 선형도시 가게처럼 이익만 추구, 극좌·극우로 치닫는 정치

    선형도시 가게처럼 이익만 추구, 극좌·극우로 치닫는 정치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경제학 이론에 ‘선형도시모형’(Linear City Model)이라고 하는 유명한 모형이 있다. 이 모형에서는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선 도시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4㎞의 도로가 있고, 그 도로 주변으로 사람이 거주한다는 생각이다. 그 일직선의 도로에는 자동차는 다닐 수가 없고 모든 시민은 걸어서 오갈 수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이 도시의 시민이 식료품과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철수네 상점과 영수네 상점 두 곳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 상점이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와 품질이 비슷하다면 시민은 자기의 집에서 가까운 가게로 가게 될 것이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먼 길을 다니려면 너무 수고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민의 편의를 고려했을 때 철수와 영수는 어느 위치에 가게를 세우는 것이 좋을까? 답은 철수는 서쪽 끝에서 1㎞ 떨어진 지점에, 영수는 동쪽 끝에서 1㎞ 떨어진 곳에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민이라도 최대 1㎞만 걸어가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형도시모형’ 닮은 극한 대립 정치권   우리의 정치 지형에 이 선형도시모형을 적용해 보면 재미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동서로 일직선상에 놓인 도시를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치 성향이며 철수와 영수의 두 가게는 이런 국민들의 정치 성향을 대표할 두 정당으로 볼 수 있다. 서쪽과 동쪽의 끝에 거주하는 시민은 ‘극좌’와 ‘극우’ 성향의 국민으로 간주하고 중간 지점의 시민들은 중도 성향의 국민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선형도시모형의 시민이 자기 집에서 가까운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싶어 하듯이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신의 정치 성향과 가까운 정당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선형 도시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점의 위치가 서쪽에서 4분의 1 지점과 동쪽에서 4분의 1 지점이 이듯 정당도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의 성향을 가지는 것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에서 철수와 영수는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4분의 1 지점에 가게를 위치시키지 않을 것이다. 우선 철수가 더 많은 고객에게 자신의 상품을 팔고자 한다면 가게 위치를 영수의 가게와 가까운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좋다. 어차피 현재 철수의 가게보다 서쪽에 위치한 고객은 철수의 가게가 좀 멀어져도 철수의 가게에서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수의 가게는 철수의 가게보다 더 멀리 위치하기 때문이다. 반면 철수의 가게가 영수의 가게와 가까운 동쪽으로 이동하면 기존 영수의 가게에 다니던 고객들을 뺏어 올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고객에게 자신의 상품을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수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므로 결국 철수와 영수 모두 4㎞인 도시의 딱 중간인 서쪽과 동쪽 끝에서 2㎞ 떨어진 중간 지점에 가게를 나란히 위치시킬 것이라는 말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모습. [중앙포토] 정당도 더 많은 표를 얻어야 당선되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중도 성향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 극좌나 극우 성향의 정책을 모두 포기하고 중도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공약을 내걸게 되는데 바로 이런 원리이다. 대통령 선거 시기가 되면 정책만 보고서는 어느 쪽이 좌측이고 어느 쪽이 우측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는 이런 중도 성향 수렴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진보 정당은 더욱 좌측으로 달려가고 있고, 보수 정당은 더욱 우측으로 달려가면서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의 정치 상황 역시 선형도시 모형으로 잘 설명될 수 있다. 경제학의 선형도시모형에서 철수와 영수의 가게가 궁극적으로 위치할 지점을 계산해 보면 철수는 서쪽 맨 끝 지점이고, 영수는 동쪽 맨 끝 지점이라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철수나 영수의 입장에서 보다 많은 고객을 확보한다면 나쁘지 않겠지만, 고객의 숫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윤이다. 철수와 영수의 가게가 도시의 중간 지점에 나란히 위치하게 되면 고객의 확보에는 유리하겠지만, 원가 수준의 낮은 가격에 물건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철수와 영수의 가게가 동일한 위치인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시민 입장에서는 어차피 철수의 가게나 영수의 가게 모두 똑같은 거리에 위치하는 셈이다. 만일 철수의 가게가 1㎞ 거리인데 영수의 가게가 3㎞ 거리라면 철수의 가게가 조금 비싸게 상품을 판다고 해도 영수의 가게까지 걸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다시 돌아오는 수고를 절약하기 위해 철수의 가게에서 다소 높은 가격을 주고라도 상품을 구입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철수와 영수의 가게가 동일한 거리에 있다면 이 시민은 당연히 한 푼이라도 싼 가게에 가서 상품을 구입할 것이므로 철수와 영수는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가격 경쟁으로 거의 원가 수준에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면 많은 고객을 확보하더라도 두 가게의 이윤은 아주 낮아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고려한 철수와 영수는 결국 각각 경쟁자인 상대방의 가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쪽 끝과 동쪽 끝에 가게를 위치시킨다는 것이 선형도시모형의 예측이다. 그리고 가격을 원가보다 훨씬 높게 매긴 후에 우리 가격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면 4㎞ 떨어진 다른 가게에 가서 장을 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철수네 가게 상품이 비싸더라도 영수네 가게까지 먼 길을 다녀올 수고가 두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철수에 가게에서 상품을 구입할 것이다. 영수와 가까운 위치에 사는 시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서로 간의 거리를 가장 멀리하는 전략을 통해서 철수와 영수는 원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상품을 팔게 되면 이윤을 최대화 시킬 수 있다.   대선은 다수 품어야 해 중도 공약 많아   정치도 마찬가지다. 두 정당이 모두 중도 성향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면 국민은 두 정당의 정치 성향이 같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정치인들의 청렴도를 따지기 시작할 것이다. 국민의 혈세를 자기 돈처럼 아끼는지, 불미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는지, 부정부패의 의심되는 점이 없는지를 꼼꼼히 따질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치인으로 살려면 아주 갑갑할 것이다. 어렵게 정치인이 되어서 선거에 이겨도 모든 국민들이 눈을 부라리고 청렴도를 체크할 것이니 피곤하고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당도 자신의 위치를 중도로 정하지 않고 극단적인 극우와 극좌로 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좌측 성향의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극좌에 위치한 정당의 정치인들이 다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고 이런 정치인을 비난하고 배척하면 유일하게 남는 다른 정당이 저 멀리 맨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너무 멀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중도 우파도 아닌 극우 성향의 정치인에게 권력을 넘기느니 너무도 부족하고 오염된 정치인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왼쪽에 위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용서하는 것이다. 이는 우측 성향의 국민이 극우에 위치한 정치인들의 행동이 못 마땅하더라도 극좌의 정치인이 싫어서 지지를 철회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렇게 웬만한 잘못과 비리를 유권자들이 눈감아 준다면 정치인으로서는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두 정당은 암묵적 합의 하에 극좌와 극우로 달려 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과거에는 정치인이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시늉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인은 거의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정치인임을 당당하게 나타내는 느낌이다.   선형도시모형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생계를 우선시 하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이윤이 최대화되도록 극좌와 극우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필요한 이유는 평상시의 삶에 바쁜 국민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정치를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권리를 위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을 대신해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본분을 저버리고 자신의 생계형 이윤 최대화만 정치인들이 추구한다면 정치인이라는 직업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맞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중요한 정책 결정이 있을 때 전 시민이 모여서 투표를 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시민을 모으는 것은 가능해도 수천만 명의 국민이 자주 모여서 투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간접 민주주의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국민이 손에 든 핸드폰으로 10초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방법이 생겼으니 직접 민주주의는 다시 가능한 세상이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과연 필요한 존재인지 국민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경제학 비타민』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등의 저서가 있다 

    2023.09.16 00:30

  • “더 진짜 같네” VR로 카레이싱 훈련하고 공황장애도 치료

    “더 진짜 같네” VR로 카레이싱 훈련하고 공황장애도 치료

     ━  쓰임새 많은 VR 콘텐트   영화 ‘그란 투리스모’의 한 장면. # 17인치 화면 앞에 앉아 매일같이 게임 속 레이싱 트랙을 시속 320㎞로 달렸다. 19살 소년은 게임 초고득점자 경주 ‘GT아카데미’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되고, 실제 닛산 485마력 슈퍼카 GT-R의 운전대를 잡고 영국 실버스톤 서킷을 달리는 기회를 갖게 된다. 지금 그는 프로 레이서로 활약 중이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그란 투리스모’의 실존인물 잔 마든보로 얘기다.   # 공황장애가 있는 A씨에게 다리를 건너는 건 불가능했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다. 인천대교를 건너 공항까지 갈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A씨는 가상의 다리라도 건너보자며 헤드셋을 끼고 연습했다. 올해 초 A씨는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두 사연엔 공통점이 있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 준 가상현실(VR) 콘텐트다. 현실에선 경제적 어려움, 병적 증상으로 불가능했던 상황이 가상현실에선 언제든 재생, 멈춤, 되감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VR이 조작이 가능한 가짜세계라는 것쯤은 다 안다. 그런데도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낸 힘은 ‘경험치’다. 가짜지만 현실 못지 않은 경험을 쌓은 셈이다.   비결은 VR의 ‘현존감’에 있다. 현존감은 VR헤드셋을 끼고 바라본 가상공간의 환경을 현실처럼 느끼는 것을 말한다. 한정엽 홍익대 일반대학원 AI실감미디어콘텐츠학과장은 “현존감 중에서도 블랙홀 같은 미지 세계를 탐험하는 게 아닌 실제 있을 법한 상황을 경험하는 ‘현실기반 현존감’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몰입감은 현존감을 더 높여준다. 김주연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인간의 몰입감은 다른 감각보다 시각이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VR콘텐트에선 시각요소가 다수를 차지해 몰입감이 높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현실기반 현존감을 살린 VR콘텐트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명화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작품, 문화재를 VR로 관람하거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VR체험관에서 지진 등 재난안전 교육을 하는 등 문화, 교육, 제조업, 엔터테인먼트 다방면에서 활용된다. VR콘텐트 개발이 활발해지는 건 역설적으로 VR기기 만으로는 충분한 현존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학 상명대 계약교양교육원 교수는 “현존감을 제고하는 데 있어 헤드셋 같은 VR기기 개발은 아직까진 한계가 있다”며 “시나리오나 감각적 요소 등 VR콘텐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프레지던스리서치는 VR시장이 올해 292억 달러에서 5년 뒤 662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중 교육, 의료 분야의 성장률이 두드러진다. 한정엽 교수는 “연습삼아 할 수 없거나 절대적으로 현존감이 느껴질 정도의 연습이 필요한 현장,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재연이 불가능한 경우가 VR콘텐트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아태지역 AR·VR 지출 중 2022년~2026년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높은 산업군은 전문서비스(41.5%)와 의료산업(39.9%) 분야다.   군사나 재난 분야도 유망하다. 고속정을 타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함정 바닥에 원인 모를 천공이 생겼다. 바닷물이 순식간에 기관실로 밀려들어왔고 기관이 고장나 제어가 안된다. 탈출하기 위해 구명조끼부터 찾으려 했지만 2m가 넘는 파도와 해무에 시야조차 확보가 어렵다. 함정 손상통제 교육훈련 시나리오를 각색한 내용이다. 연습을 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대비와 반복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국방 분야 VR콘텐트가 관심을 끈다. 항공 정비훈련, 비행체험 콘텐트(공군), 손상통제 교육훈련(해군), 재난훈련용 등이 있다. 실제 전투기 F-15K, KF-16 정비훈련에 활용도 한다.   재빠른 행동대응이 필수인 전시상황, 테러, 화학사고에 있어 VR 훈련은 더 효과적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에 익숙지 않을 경우 즉각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 미 교육학자 에드가 데일의 ‘경험의 원추’ 이론에 따르면 VR과 같은 실감형 교육은 아날로그 학습 대비 2.7배 이상 학습효과가 나타난다. 국방·재난 전문 VR콘텐트 제작업체 한길씨앤씨 곽승호 이사는 “인공지능(AI) 기술로 상호작용도 가능케 해 작전명령 지시 등 협업 훈련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현존감은 의학 치료에도 효과적이다. 정신의학 분야가 대표적이다. 인지재활(치매), 인지행동(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 치료에 활용된다. 가령 공황장애의 경우 사람이 많은 지하철, 비행기 등 가상으로 구현한 공공장소에 반복적으로 노출해 치료하는 식이다. 오주영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VR치료가 약물치료에 못지 않은 효과를 보이고, 약물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기반 사회불안장애, 공황장애 VR치료는 국내 최초 신의료 기술 허가를 받았다. 이외 훈련상황 재연에만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경우라도 VR은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결국 꿈을 실현시켜줄 VR콘텐트의 힘은 시나리오에 있다. 실제 업체들은 시나리오 제작에만 6개월 이상 공을 들이고, 현장 경험자인 도메인 전문가에게 자문도 받는다. 이재학 교수는 “얼마나 실제와 가깝냐보다 VR활용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를 높이고, 기대효과에 부응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며 “설계과정에서 음향, 온도 등 상황의 맥락적 요소도 적극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교수는 “VR콘텐트는 사용자의 연령대, 경험수준 등에 맞게 개발하고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3.09.09 00:36

  • 사드 이전 유커 특수 쉽지 않지만, ‘노재팬’ 반사이익 새 변수

    사드 이전 유커 특수 쉽지 않지만, ‘노재팬’ 반사이익 새 변수

     ━  돌아온 유커, 한국경제 도움 될까   2017년 ‘한한령’ 이후 6년 5개월 만에 입항한 크루즈선 블루드림스타호를 타고 31일 제주에 도착한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쇼핑을 위해 신라면세점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제주시 제주항 국제크루즈터미널.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한 크루즈선 블루드림스타호(2만4782t)가 접안하자 승객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단체관광객(유커·遊客)을 싣고 크루즈가 제주항에 온 것은 6년 5개월 만이다. 승객 1275명 가운데 중국 단체관광객은 661명이었다. 20여 대 관광버스에 나눠 타고 이동한 유커 대부분은 시내 쇼핑 시간을 면세점 쇼핑에 할애했다. 이날 오후 5시쯤 제주시 연동 롯데면세점제주점과 신라면세점제주점은 북새통을 이뤘다. 크루즈 관광객으로 가득 들어찬 제주 특산품 코너에서는 줄을 서는 광경도 포착됐다. 윤재필 신라면세점 제주지점장은 “중국발 크루즈가 재개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면세점 중국인 관광객 매출 16% 증가   6년여 만에 유커가 돌아오면서 관광·산업계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은 2017년 3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보복 조치로 한국 단체관광 금지 조치를 시행했다. 이 때문에 2016년 800만명이 넘었던 중국인 관광객 수는 이후 꾸준히 감소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하늘길·뱃길마저 막히면서 이듬해에는 17만명으로 뚝 떨어졌다. 2016년 120만9106명(507회)으로 정점을 찍었던 제주 크루즈 관광객도 이듬해 18만9732명(98회), 2018년 2만1703명(20회), 2019년 4만6000명(29회)으로 급감했다.   그러다 지난달 10일 중국 문화여유부가 사드와 코로나19를 계기로 금지했던 한국을 비롯한 78개국에 대한 단체관광을 허용키로 하면서 중국인 관광객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코로나19로 끊겼던 뱃길은 다시 열리고 있다. 지난달 11일 중국 상항이에서 출발하는 크루즈선 53척이 제주도(제주항·강정항)에 기항을 신청했다. 같은 날 중국 칭다오에서 출발한 카페리 뉴골든브릿지 5호가 11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에 도착했다. 웨이하이·칭다오 등 중국 8개 도시와 인천을 오가는 한·중 카페리의 승객 운송 재개는 2020년 1월 이후 3년 7개월 만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유커의 귀환’에 가장 기대감이 큰 곳은 사드 보복 조치 이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던 면세업계다. 당장 카페리 운항 재개에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매출이 상승세다. 지난달 23일 여객선을 통한 유커 150여 명이 서울 명동 롯데면세점 본점을 찾아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면세점에 따르면 100명 이상의 유커가 단체 방문한 것은 2017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이들은 중국 산둥성 위해항과 경기도 평택항을 오가는 카페리인 뉴그랜드피스호 여객선을 통해 입국했다. 박영빈 롯데면세점 홍보팀장은 “K뷰티 제품을 비롯해 화장품 브랜드를 주로 구매했고, 감귤 초콜릿과 조미김 등 식품류에 대한 선호도 높았다”며 “이날부터 일주일간 중국인 관광객의 매출이 직전 일주일(8월 16~22일) 대비 16% 가량 증가했다”고 전했다.   매출 상승세에 면세업계는 유커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롯데면세점은 서울을 비롯해 부산과 제주도에 대규모 중국인 단체 관광객을 태운 크루즈선의 기항이 잇달아 예정된 만큼 지점별 마케팅 프로모션과 브랜드 개편에 나설 방침이다. 신라면세점은 통역 전담 인력을 배치하고, 중국인 전용 프로모션 등 다양한 세일 행사를 펼친다. 이석춘 호텔신라 커뮤니케이션팀 차장은 “현지에서 비자를 발급하는데 시일이 소요되고, 여행사가 상품을 개발해 모객하는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체관광 허용이 매출로 이어지기 까지는 최소 2~3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며 “중국 최대 연휴인 국경절 연휴(9월 29일~10월 6일)를 기점으로 유커의 귀환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광업계에도 활력이 돌고 있다. 제주관광공사는 연말까지 4개월간 1만5000명∼2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제주도에 기항 신청이 들어온 중국발 크루즈선은 지난달 18일까지 264척(전체 선적 334척)에 이른다. 제주관광공사 관계자는 “유커가 국경절 연휴 때 본격적으로 제주를 찾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국내 거주 중국인 청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9월 1일부터 3일까지 2박 3일간 재한 중국 SNS기자단 ‘한유기’ 제주 팸투어를 진행하며 9월 15~17일 광저우 지역 광동성 국제여유산업박람회에 가서 홍보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중국서 ‘K-관광로드쇼’ 개최 계획   뚝 끊겼던 중국의 단체관광이 시작되면서 매출이 느는 등 당장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사드 보복 이전처럼 국내 관광·산업계가 ‘유커 특수’를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방한한 중국인 관광객은 54만명으로 지난해(7만명)보다는 늘었지만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280만명)과 비교하면 80%가량 급감한 상태다. 코로나19로 인해 줄어든 항공편이 급증하기 어렵고, 한·중 관계가 오랫동안 경색된 탓에 관광객이 단기간에 늘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다시 운행을 시작한 한·중 카페리의 승선률도 20% 선에 머물고 있다. 최용석 한중카페리협회 사무국장은 “코로나19 이전처럼 승선률이 80% 정도까지 오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최근 중국의 경제 지표가 악화일로를 걷는 것도 걸림돌이다. 청년실업률은 20%를 돌파했고, 부동산 시장은 빠르게 냉각되고 있다. 중국의 7월 소매 판매는 2.5% 증가에 그쳐 전월(3.1%)에 비해 증가율이 둔화했다. 경기 악화로 중국인이 지갑을 닫고 있다는 얘기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국의 부동산발(發) 경기 침체로 중국인의 소비 여력이 줄어 해외여행 대신 국내여행으로 발길을 돌리는 추세”라며 “우리나라 역시 물가 상승으로 화장품·의류 등 가격이 올라 중국인이 예전처럼 대량 구매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열풍이 시들해진 것도 사실이다. 사드 사태 후 한한령(한류 금지령)이 장기화되면서 중국 내 한국 드라마와 영화 등 콘텐트 방영이 줄어 자연스레 국산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한 화장품업체 관계자는 “현지에서 한국 콘텐트가 인기를 끌어야 제품을 협찬하고, 판매로 이어질텐데 한한령 이후 이 같은 경로가 아예 막혔다”며 “그 빈자리를 값싼 중국산 화장품이 대체하면서 일부 최고가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경쟁력이 약화됐다”고 말했다.   양국 간 교류가 줄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이 줄어들자 여행에 대한 관심도 과거에 비해 떨어졌다는 얘기다. 이는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한 마케팅 리서치 업체가 중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국인이 여행하고 싶은 나라 1위는 일본(16%)이었다. 2위는 러시아(13%), 3위는 싱가포르(12%)였다. 한국은 6%로 영국·미국 등과 공동 5위에 그쳤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한국행 단체관광 상품 수도 일본이 압도적이다. 중국의 관광포털 취날 조사에 따르면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 등 4개 도시에서 출발하는 하반기 한국행 단체관광 상품은 103개였다. 반면 일본행 단체관광 상품은 이보다 9배 이상 많은 978건이었다.   다만 관광·산업계에서는 최근 일본 오염수 관련 사태로 한국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기대감도 흘러나온다. 중국 정부가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등 현지에서 ‘노재팬’ 운동이 일면서 일본을 향하던 중국인들의 행선지가 한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다. 2012년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으로 노재팬 분위기가 이어졌을 때 우리나라를 찾는 유커 수가 급격히 늘어난 바 있다. 면세업계 관계자는 “중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는 대부분 제주를 찍고 일본으로 가는 게 일반적인데 중국에서 반일 운동이 계속되면 일본 코스를 취소하고 국내에 더 머무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부도 유커 관광객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국경절 연휴에 맞춰 13~17일 중국에서 ‘K-관광로드쇼’를 연다. K-뷰티·패션·쇼핑 등을 소개할 계획이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한국방문의 해’를 계기로 청와대 관광 랜드마크 10선과 다양한 K-컬처 연계 관광상품이 필수 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민관의 역량을 결집하겠다”고 말했다. 허정연 기자, 제주=최충일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3.09.02 01:29

  • 전례없는 쌍방 심판론, 정권 중간 평가냐 거대 야당 견제냐…핵심 변수는 공천 혁신

    전례없는 쌍방 심판론, 정권 중간 평가냐 거대 야당 견제냐…핵심 변수는 공천 혁신

     ━  [여의도 톺아보기 필진 좌담] 막 오른 7개월 총선 레이스   1일 정기국회 개회식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 [연합뉴스] 정치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폭염의 시간이 지나고 ‘총선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22대 총선이 7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여야 정치권도 내부 전열 정비와 민생 공약 마련 등을 통해 유권자 표심 확보를 위한 본격적인 총선 레이스에 돌입했다. 특히 내년 총선은 윤석열 정부 3년차에 실시돼 중간 평가의 성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모으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승리할 경우 현 정부가 한층 힘을 받게 될 것인 반면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유지하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국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관련기사 총선의 시간 왔지만…여야 모두 비호감도 60% 그런 만큼 여야 모두 총선 승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총력전에 나설 태세다. 이런 구도 속에서 총선 정국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어떤 주요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고 여야는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올해 초부터 중앙SUNDAY 정치 이슈 심층 진단·분석 코너인 ‘여의도 톺아보기’ 필진으로 활동 중인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등이 한자리에 모여 정국의 흐름과 주요 변수들을 짚어보고 내년 총선의 향배를 전망해 봤다. 좌담 진행은 박신홍 정치에디터가 맡았다.   중간 평가 총선, 대부분 집권당이 고전   본지 ‘여의도 톺아보기’ 필진인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이(왼쪽부터) 본사 회의실에서 총선 정국 좌담을 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현재 정국 상황을 진단한다면.  김형준=내년 총선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중반기에 실시된 총선 중 2020년을 제외하곤 집권당이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둘째는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진보가 점점 더 우위에 서는 추세 속에서 치러진다는 점이다. 두 개의 심판론이 정면충돌한다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특징 중 하나다. 의회 권력을 갖고 있는 민주당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도다. 현재 외형상으론 야당이 조금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팽팽한 접전 양상이다. 윤희웅=여야 누구도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기본적으로 총선은 정부·여당이 성적표를 받아드는 시간이라 여당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불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회초리론이다. 통상 야당은 총선에서 기존 지지율보다 더 많은 득표를 얻기 쉽다. 비록 야당을 지지하진 않지만 현 정부의 실정에 회초리를 들고 싶어하는 유권자들이 가세하기 때문이다. 다만 회초리가 깨끗해야 한다. 지금처럼 야당이 심판의 도구로서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면 야당을 통해 회초리를 들려는 사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쌍방 심판론’이 작동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얘기다. 안병진=기존 양당에 대한 불신이 크면 제3세력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지는 게 상례인데 이번엔 제3정당마저 지지부진하다는 게 특이점이다. 미국의 경우 바이든도, 트럼프도 싫다는 ‘더블 헤이터’가 급속히 늘면서 제3후보 기대치가 상승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세 개의 세력 모두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다 보니 역대 어느 총선보다 예측하기 힘든 국면이 예고되고 있다.   내년 총선의 주요 변수를 꼽자면. 안=무엇보다 공천이다. 산술적으론 민주당이 불리하다. 다수 의석을 갖고 있어 공천 물갈이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상대적으로 유리하지만 신선하고 유능한 수도권 출마자를 찾기가 여의치 않을 수 있다. 결국 누가 더 위기감을 갖고 대대적인 공천 혁신에 나서느냐가 승패를 가를 것이다.  윤=정당 불신이 심각한 현실에서 쇄신 경쟁이 불가피할 텐데, 여당은 용산 대통령실과의 일체감이 워낙 강하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완주 의지를 강하게 보이는 게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비대위를 꾸리는 등 혁신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쪽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먼저 쇄신에 나서는 쪽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크다.  김=공천과 관련해 여권은 2016년 새누리당의 교훈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진박 감별사’ 논란이 얼마나 거셌나. 이번에도 여권 핵심 인사의 ‘승선 거부’ 발언이 나왔는데 ‘친윤 감별사’ 공방이 커질 경우 국민은 ‘결국 대통령실에서 공천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거다. 이는 특히 중도층이 민감하게 반응할 사안이란 점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경제 변수는 얼마나 클 것으로 보나. 김=한국갤럽의 8월 넷째 주 조사 결과 향후 1년간 우리 경제가 나빠질 것이란 응답이 55%였다. 좋아질 것이란 전망(18%)과 세 배 차이다. 한국경제연구원도 연내 경기 회복이 힘들 것으로 내다보지 않았나. 통상 경제가 어려워지면 정부·여당에 책임을 묻는 응징 투표 성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대통령의 메시지 변화가 시급하다. 법치·카르텔은 이미 웬만한 유권자는 다 아는 얘기가 됐다. 이젠 서민과 새 경제 비전을 강조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할 때다. 손에 잡히는 민생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 총선이 임박할수록 경제가 아킬레스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안=법과 질서가 보수의 강점인 건 맞는데 민생이 함께 가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최근 수도권과 지방 청년의 취업 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는데 경제가 악화되면 당장 2030 표심부터 흔들릴 수 있다. 문제는 야권 또한 민생 이슈를 주도할 능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윤=민생과 이념 중 뭘 중시할 거냐의 문제다. 정체성 강조가 위기 때 지지층을 빠르게 복원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선거를 앞두고 외연을 확장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역대 선거가 늘 그랬다. 선거라는 전쟁터에 나갈 때는 실제 효과가 큰 무기를 들고 나가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경제고 민생이다.   갈라치기 전략, 막판 갈수록 부정적 영향   여야의 장단점을 좀 더 깊이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국민의힘은 어떤가. 김=선거엔 관성의 법칙도 적잖게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힘은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부터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3연승을 한 게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반면 갈라치기 전략은 선거가 임박할수록 단점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볼 수 있다. 김기현 대표 체제로 선거를 치르는 것, 비대위 체제로 일신하는 것, 국민의힘 간판을 새 간판으로 바꾸는 것 등이다. 그런데 셋 다 민주당의 변화 여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재명 대표 체제가 유지되면 우리도 굳이 바꿀 필요 있느냐는 목소리가 커질 거고 비대위로 가면 여당도 마냥 버티긴 힘들 것이다.  윤=여당과 대통령실이 한 몸이 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장점이지만 선거에선 다양한 목소리가 실종된다는 점에서 약점일 수밖에 없다. 특히 정부 견제론과 심판론이 높아질 경우 여당만 빠져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질 수 있다.  안=그럼에도 현재 대통령실은 지금 기조대로 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검찰을 앞세운 집토끼 전략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게 실제로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다고 보는 거다. 야권의 부진도 대통령실의 직진을 강화하는 요소로 꼽힌다. 반면 정치의식이 매우 높은 한국의 중도·중산층은 여권의 현 기조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걸림돌이자 숙제다.   민주당은. 비대위 현실화 가능성은.  김=현재 수도권의 민주당 현역 의원이 97명이나 되는데 이에 맞설 인지도 높은 후보를 국민의힘이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을까. 이게 민주당의 최대 강점 중 하나다. 약점은 ‘이재명의 민주당’을 ‘국민의 민주당’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이냐, 사법 리스크를 어떻게 털어낼 것이냐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약점이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친명 비대위는 당을 깨자는 얘기인 만큼 현실적으로 합의 비대위가 최선일 텐데, 합의가 안 되면 분당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안=전통적으로 리버럴 세력이 승리하려면 도덕성과 서민·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 등 두 가지는 상대보다 최소한 20%포인트 높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은 둘 다 크게 훼손된 상태고 단시간에 회복하기도 힘든 상황이란 게 치명적 약점이다. 역으로 지도부가 새 얼굴로 확 바뀌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면 극적인 반전도 가능할 수 있다. 다만 이 대표는 아직까진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위기가 닥쳐도 통제 가능한 비대위원장을 내세우는 정도가 최대치 아닐까 싶다.  윤=민주당은 신뢰의 부재라는 과제를 풀지 못하면 여권이 집토끼 결집 전략만 고수해도 이를 넘어서기 힘든 게 냉정한 현실이다. 이슈를 대하는 과격한 태도나 거친 단어 선정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이대로 가다간 혁신·쇄신 요구를 감당하기 힘들어질 거다. 그런 만큼 어떤 선택지도 열려 있는 게 지금의 민주당 상황이다.   2030 여성 투표율 남성보다 4~8%P 높아   2030 표심 비중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김=2030과 관련해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게 젠더 갈등이다. 이준석 전 대표 영향으로 남성은 보수, 여성은 진보로 나뉜 상황인데 문제는 2030 여성의 투표율이 4~8%포인트 더 높다는 점이다. 이대남 챙기기 전략이 총선에선 국민의힘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거란 얘기다. 2030은 보육 문제나 가정과 일의 양립 등 실용적 이슈에 매우 민감한 만큼 여당도 관련 정책을 개발·홍보하고 이를 챙길 인물도 적극 영입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도 실생활 이슈를 어떻게 선보이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지금껏 제기된 이슈는 ‘나’의 삶과는 큰 연관이 없는 게 대부분이지 않았나.  안=미국에선 2030이 민주당의 강력한 토대다. 한국의 경우 국민의힘이 이대남 공략에 성공하며 대선에선 0.73%포인트 차로 이겼지만 최근 이대남의 정부·여당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게 발등의 불이다. 2030 지지 없이 여당이 과연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다.  윤=동일 연령대에서 호불호가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건 처음 나타난 현상이다. 예전엔 2030은 무조건 진보라며 보수 정당이 사실상 포기한 세대 아니었나. 관건은 여당이 과연 성공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느냐다. 총선이 임박해 급박한 상황에 닥치면 또다시 2030 갈라치기 카드를 꺼낼 소지가 충분하다. 문제는 야당 때와 달리 여당일 때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이 투영된다는 점에서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도층의 향배가 총선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란 전망은 여전히 유효한가.  김=정당 호감도가 1년 넘게 여야 똑같이 3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비호감도는 60%대로 두 배나 높다. 무당층이 30%대에서 좀처럼 줄지 않는 등 중도층의 부동층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동안 중도층 표심은 세 가지에 따라 움직여 왔다. 누가 더 혁신적이냐, 누가 더 도덕적이냐, 그리고 누가 더 민생을 챙기느냐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관심(attention)·매력(attraction)·호감(affection) 등 3A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게 오랜 경험칙이다. 해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윤=투표율이 55%를 밑돌면 중도층이 무관심했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더 강력하게 결집하는 곳이 이기게 돼있다. 여의도에선 여당이 지금 이 전략을 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적잖다.   여야 모두 앞으로 보완할 점을 꼽자면.  안=직전의 과거와 단절하라는 말이 있다. 여권의 집토끼 전략이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보다 초당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야당도 내로남불 등 비판의 대상이 됐던 구습을 과감히 떨쳐내야 희망이 있다.  김=대통령이 아직 절박함이 없어 보인다. 성공가도를 달리다 보니 다음에도 승리할 거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선거는 과학이다. 전문가들이 늘 강조하는 게 선거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란 점이다. 어떤 상황이 오면 참패할지 미리 대비하는 게 선거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여야는 모두 어떻게 하면 이길까만 궁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번 추석이 1차 분수령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유권자의 신뢰를 쌓지 않으면 내년 초 본게임에서 낭패를 볼 공산이 크다.  윤=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기국회 때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민생 정책과 법안을 어떻게, 얼마나 내놓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1차 승부가 갈릴 거고, 여기서 뒤처지면 따라잡기 힘들 수 있다. 결국 누가 더 절박하냐의 싸움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jbjean@joongang.co.kr

    2023.09.02 01:18

  • “윤석열이 수사 무마”…신학림, 김만배에게 억대 받고 허위 인터뷰 혐의

    “윤석열이 수사 무마”…신학림, 김만배에게 억대 받고 허위 인터뷰 혐의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1일 김만배씨에게 판매했다는 책을 공개했다. [뉴스1] 검찰이 대장동 업자 김만배씨에게서 억대 금품을 받고 윤석열 대통령 관련 허위 인터뷰를 한 혐의로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에 대해 강제 수사에 나섰다. 신 전 위원장은 “김씨에게 받은 돈은 책값”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3부(부장 강백신)는 1일 2021년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산저축은행 사건 무마 의혹을 제기한 신 전 위원장의 집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20대 대선 사흘 전인 지난해 3월 6일,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는 신 전 위원장이 김씨를 인터뷰한 1시간 12분 분량의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신 전 위원장은 당시 뉴스타파 전문위원이었다. 인터뷰는 대장동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2021년 9월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녹음 파일에는 대장동 개발사업자인 화천대유자산관리의 관계사 천화동인 6호 실소유주 조우형씨가 거론된다. 김씨는 녹음 파일에서 자신이 당시 대검 중수부 검사였던 윤 대통령과 박영수 전 특검을 잘 안다며, 박 전 특검을 조씨의 변호인으로 소개해줬다고 말하며 “통할만 한 사람을 소개한 거지”라고 했다. 김씨는 또 “조우형이 대검 중수부에서 윤석열을 만났다…윤석열이가 ‘네가 조우형이야?’ 이러면서… 박○○ (검사가) 커피 주면서 몇 가지를 (질문)하더니 (조우형을) 보내주더래. 그래서 사건이 없어졌어”라고 녹음 파일에 남겼다. 이를 근거로 당시 대선 경쟁 후보였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TV토론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조우형에게 왜 커피를 타 줬나”라고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조씨는 인터뷰가 이뤄진 두 달 뒤인 2021년 11월 검찰에 출석해 ‘윤석열 검사를 만난 적이 없다. 대검 중수부에 출석할 때 만났던 검사는 박모 검사 뿐이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검찰은 계좌 추적을 통해 신 전 위원장이 해당 인터뷰를 한 직후 김씨에게서 1억원 넘는 금품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검찰은 이 금품을 허위 인터뷰의 대가로 보고 있다. 김씨는 신 전 위원장과 인터뷰하기 전에 조씨에게 연락해 “(부산저축은행 수사 때) 윤석열이 커피 타줬다고 말할 테니 (네가) 양해해 달라”는 취지의 전화를 하는 등 허위 인터뷰를 주도한 혐의도 받고 있다.   신 전 위원장은 검찰의 압수수색 직후 “김씨에게 받은 돈은 책값”이라며 “부가세를 포함해 총 1억6500만원에 책 세 권을 김씨에게 팔았다”고 밝혔다. 신씨가 팔았다고 주장하는 책은 2020년 발간된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혼맥지도』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oon1@joongang.co.kr

    2023.09.02 00:59

  • ‘묻지마 범죄’ 목숨값 평균 6000여 만원, 두 번 우는 유족들

    ‘묻지마 범죄’ 목숨값 평균 6000여 만원, 두 번 우는 유족들

     ━  피해보상 부족한 ‘묻지마 범죄’   지난달 22일 경찰이 강간살인 사건이 발생한 서울 관악구 목골산을 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근 중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순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지난달 20일 고려대 구로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살해 사건 피해자 A씨의 빈소에서 지인들은 고인의 순직 인정 필요성에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A씨가 방학 중 연수를 위해 출근하던 길에 참변을 당한 만큼 순직 처리가 필요하단 것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와 서울교사노동조합 등 교원단체에서도 논평을 통해 “고인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 순직 처리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19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도 “순직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신질환 범죄는 피해보상도 어려워   교육계에서 순직 처리에 한 목소리를 낸 건 이 사건이 피해자에게 가혹한 ‘묻지마 범죄’였기 때문이다. 범행 동기나 징후 없이 찾아온 묻지마 범죄는 손해배상 능력이 없는 은둔형 외톨이나 정신질환자의 단독 범행인 경우가 많아 피해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 사건의 피의자인 최윤종(30)씨는 특별한 직업 없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당한 사람만 억울한 처지에 놓인 셈이다. 교육계의 요청대로 순직이 인정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보상방안이란 얘기다. 현직 공무원의 순직 시 유족에겐 ‘전체 공무원 기준소득월액’(2022년 기준 539만원)의 24배 수준인 보상금(1억2936만원)이 지급된다. 여기에 공무원 사망 당시 기준소득월액의 38%가 유족연금으로 제공된다. 하지만 순직 처리가 되지 않으면 피해 보상은 이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묻지마 범죄로 인한 안타까운 피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피해자를 돕기 위해 우리 법에선 지원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헌법에 범죄피해자구조청구권(제30조)을 규정해 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선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른 ‘구조금’과 범죄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업무처리지침에 따른 ‘지원금’ 등으로 피해자를 지원한다. 이 가운데 피해자 사망 시 지급되는 유족구조금은 피해자의 월 실수입 또는 평균임금의 24~48개월 수준에서 책정된다. 지원금으로는 치료비, 심리치료비, 생계비 등이 지원된다. 하태인 경남대 경찰학과 교수(한국형사법학회 이사)는 “우리의 법체계는 개인의 사적 제재를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먼저 개인의 안전 보장 의무를 갖는 체계(헌법 제10조)라 범죄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원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2016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사망한 20대 여성 피해자 유족에게 지급된 유족구조금은 6641만원에 불과했다. 피해자에게 특별한 귀책사유가 없었던 만큼 비슷한 연령·직업의 피해자라면 이 이상의 구조금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범죄피해자구조심의위원회에선 피해자의 귀책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례적으로 기소 전 유족구조금 전액을 지급했다. 현행 구조금 제도에선 피해자의 월간 실 급여의 24~48개월치(최대 1억6000만원)를 구조금으로 지급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지급된 유족구조금의 평균액은 6091만5000원이다.   치료비, 심리치료비, 생계비 등 지원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범죄 피해로 인해 5주 이상의 치료를 해야 하는 신체적 피해를 본 경우 정부에선 연 1500만원, 총 500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금을 지급한다. 이 때문에 지난 8월 발생한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으로 뇌사 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입원비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법무부에선 “지원할 수 있는 액수를 초과하면 특별심의를 거쳐 추가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추가 지원할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피해자 지원 규모를 상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의 한 변호사는 “최근 묻지마 범죄의 안타까운 상황이 부각되면서 특별심의를 통해 피해자 지원 규모를 늘리고 있으나, 모든 피해자가 특별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안내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하태인 교수도 “특별심의를 통해 지원을 늘리는 것은 피해자에게 반가운 일이지만, 모든 범죄 피해자를 들여다 보기엔 한계가 있다”며 “법무부 중심의 피해자 보호 방안 외에도 경찰, 지자체 중심의 피해자 보호 방안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범죄피해자구조금 상한 없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전문가들은 특별심의가 아닌 기본적인 범죄피해자지원 규모를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범죄피해자 구조금 등 피해자 지원 상한을 정한 데에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반면 최근 흉악범죄 증가로 제도를 손볼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해외와 비교해서도 피해자 지원이 부족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과 법체계와 가장 유사한 일본만 하더라도 범죄피해자구조금의 상한을 두고 있지 않은 데다, 연령별 최소금액을 설정해 소득 격차에 따른 차별을 최소화하려 하고 있다. 개인의 적극적인 안전 보장 행위를 인정하는 영미법계 국가도 마찬가지다. 영국과 미국에선 범죄피해자 보상금으로 매년 3000억원 이상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국내에서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을 통해 범죄 피해자와 가족에게 지급한 직접 지원비(치료비, 생계비, 구조금 등)는 283억6900만원가량으로 격차가 크다.   문제는 재원이다. 국내에선 범죄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원으로 범죄자들의 벌금을 활용하고 있다. 거둬들인 벌금의 8%를 떼어내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을 조성한 뒤 피해자 지원에 사용하는 식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범죄 피해자 보호기금 예산은 1133억4700만원이다. 이 기금은 2022년과 2021년 각각 1001억1400만원, 1099억8500만원을 기록하며 1000억원대 초반에서 유지되고 있다. 범죄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이 갑자기 증가하기 어려운 데다, 범죄자들이 벌금 대신 노역을 선택할 수 있어 단기간 금액이 증가하기 어렵다는 게 기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재원의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써야 할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묻지마 살인 사건처럼 흉악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범죄의 지원 예산으로 활용되는 탓이다. 실제로 이 기금은 범죄피해자구조금을 지급하는 법무부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등 다양한 기관에 배분된다. 더구나 피해자지원센터나 보호시설 등 기관 운영에 들어가는 간접 지원비가 피해자에게 지급되는 직접 지원비를 넘어서는 상황이다. 김지선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피해자 지원 단체가 가장 많은 곳이 여성가족부인데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관련 단체들에 대한 지원비를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쓰다 보니 인건비 등 고정성 지출이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직접 지원비보다 많은 상황”이라며 “흉악범죄가 늘면서 지원 수요는 느는데 재원은 그만큼 늘어나기 어려운 만큼 인건비 등 간접 지원을 줄이거나, 재원을 변경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직접 지원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2023.09.02 00:56

  • 2차전지 광풍, 과당경쟁 땐 폴리실리콘 전철 밟을 수도

    2차전지 광풍, 과당경쟁 땐 폴리실리콘 전철 밟을 수도

     ━  증시 블랙홀 2차전지의 허실   한 배터리 관련 전시회에서 관람객이 전기차용 배터리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그동안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던 반도체 수출이 주춤하는 사이 전기차 배터리 등 2차전지가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들이 앞다퉈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고, 이들 기업의 주가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있다. 정부 지원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달 초 군산새만금컨벤션센터(GSCO)에서 열린 ‘새만금 2차전지 투자협약식’에 참석해 “2차전지는 반도체와 함께 우리나라 전략 자산의 핵심”이라며 다각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전기차 관련 중국 업체들 줄도산 위기   2차전지 시장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만 해도 올해 1210억 달러(약 160조원)로 예상되는 시장 규모가 2028년에는 3030억 달러, 2035년에는 6160억 달러(약 815조원)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SNE리서치). 여기에 태양광 등 친환경 발전 확산에 따른 발전 전기저장용 배터리인 ESS 수요도 증가 추세다. 최근 주식시장에서 2차전지에 대한 투자 열풍이 불고 있는 것도, 정부가 2차전지 산업을 반도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키우려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2차전지 산업은 반도체와는 다르다. 초격차 기술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어서 메모리반도체처럼 한국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기 어렵다. 어느 순간 수요가 줄면 과잉공급으로 가격이 급락하면서 태양광 모듈 원자재인 폴리실리콘 산업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폴리실리콘 산업은 폭증한 수요 덕에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과잉공급으로 생태계가 붕괴된 바 있다. 이 같은 난관을 뚫고 2차전지 산업을 한국의 대표 먹거리로 키우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우선 전기차 배터리 수요와 직결된 2차전지 수요를 늘려야 한다. 지금은 전기차가 팔리지 않으면 2차전지 산업의 성장세가 꺾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당장 7월 2차전지 수출 물량은 전월 대비 26%, 전년 동월 대비 30% 감소했다. 수출이 준 이유에 대해 LG에너지솔루션은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유럽의 전기차 수요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다행인 건 장기적으로는 전기차 업황이 밝은 편이라는 것이다. 이상 기후 속에 내연기관차는 하나 둘 전기차로 교체될 것이다.   관련기사 “폭등 종목 뒤쫓기보다, 음극재 등 숨은 보석 주목할 때” LFP 성능 높인 중국, 2차전지 시장서 질주…일본은 ‘전고체 배터리’로 역전 노려 그러나 전기차 자체가 경기 사이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경기 영향에 따라 2차전지 산업에 충격이 전해질 수 있다. 기업과 정부는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지난 30개월간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던 중국의 전기차 시장도 역성장으로 돌아선 지 오래다. 올 1월부터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한 영향인데, 주요 나라가 전기차 보조금을 줄이거나 없애는 추세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로 중국 전기차 ‘4소룡(小龍)’으로 불렸던 웨이마자동차를 포함해 관련 업체들은 자금난을 겪으며 줄줄이 도산 위기에 직면해 있다.   미국에서는 재고가 쌓이고 있다. 올 상반기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지난해 하반기 대비 50%가량 급증했으나 전년 대비 증가율은 둔화(71%→65%)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 대리점에는 팔리지 않은 차가 쌓이고 있다. 리서치회사인 콕스오토모티브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전기차 재고는 9만대(92일분 미판매 재고)로 1년 전에 비해 4배가량 늘었다. 전기차 기업들의 물량 밀어내기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얘기다. 수요 둔화 우려에 미국의 전기차 기업인 루시드는 올해 전기차 생산 목표를 당초 2만대에서 절반인 1만대로 낮췄다.   재고가 늘자 전기차 기업들이 점유율 확보를 위해 판매 가격을 내리고 있다는 점도 우리 기업과 정부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미국 전기차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테슬라는 올해 초 모델에 따라 판매 가격을 14~28%까지 내렸다. 포드·GM도 가격 인하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아이오닉5·6 등 주요 전기차에 대한 판매를 높이기 위해 충전요금 지원 등에 나섰다. 이로 인해 전기차 시장은 성장하고 있지만, 전기차 기업들의 수익률은 떨어지고 있다. 미국 시장 1위인 테슬라만 해도 수익률이 감소했고, 다른 전기차 업체 중에는 적자를 보는 곳도 있다. 경기 침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올해 하반기에는 전기차 기업들의 실적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월가에서는 테슬라의 목표주가를 줄줄이 낮추고 있다.   필수 광물 확보 위해 정부 지원 더 필요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배터리가 전기차 제조 원가의 40%가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기차 가격 인하는 2차전지 시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전기차 기업들이 전기차 판매 가격을 낮춰도 적정 수준의 수익을 내려면 결국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배터리를 장착할 수밖에 없다. 테슬라가 배터리 일부를 직접 생산하고, 가격이 싼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도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가격이 저렴한 중국산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쓸 예정이다. 중국이 주력하는 LFP는 리튬과 인산·철을 원료로 쓰는데, 니켈·코발트·망간으로 만드는 한국의 주력 제품인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수명이 길다. 반면 무게가 무겁고 주행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최근 중국 기업들의 기술력 향상으로 이마저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다.   결과적으로 2차전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으로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전해질막·분리막) 고도화를 통한 소재 혁신과 제조 공정 개선을 통해 원가를 인하하는 길 밖에 없다. 배터리 필수 광물인 리튬·니켈을 확보하는 데도 정부 지원이 더 필요하다. 2차전지 산업은 반도체와 비교하면 초기 투자비가 적은 대신 원재료비 비중이 원가의 68% 정도다. 그러다 보니 원자재인 메탈·리튬·흑연 등의 가격 등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에코프로비엠·포스코퓨처엠·LG화학·엘앤에프 등 양극재 4사가 올해 2분기 부진한 실적을 기록한 것도 메탈 가격 하락과 연관이 깊다. 대량 원료 구매 시기와 조달 비중이 상이하게 나눠지면서 각 사 실적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도체 산업과 달리 규모의 경제를 누리지 못해 압도적 이익 창출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핵심 광물의 높은 중국 의존도(리튬 80% 이상, 흑연 90% 이상), 낮은 진입 장벽은 수익성 확보에 큰 문제다.   2025년 무렵이면 2차전지가 조만간 우리나라의 단일 최대 수출품목인 메모리반도체 못지않은 거대 시장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올해 상반기 한국의 2차전지 배터리 3사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3.8%에 이른다. 하지만 전기차 기업들도 배터리를 직접 만들기 위해 공장을 짓고 있다. 글로벌 2차전지 생산능력은 곧 수요를 초과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이 시점을 2024년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2차전지가 과거 폴리실리콘 태양광 모듈처럼 과잉공급에 다른 가격 폭락을 경험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까지 나온다.   폴리실리콘이나 2차전지 산업은 소재 확보와 가격 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산업 구도를 보인다. 폴리실리콘을 교훈 삼아 정부와 업계는 과당경쟁이 발생하지 않는지 지금부터 주의 깊게 살피고 대비를 해야 한다. 원자재 가격 안정을 위한 공급망 다변화, 과잉증설을 피하는 수준의 추가 증설 비용 확보, 다른 글로벌 기업과의 기술력 격차 등 이 삼박자에 2차전지 시장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조원경 UNIST 교수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울산과학기술원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울산과학기술원 특임교수. 연세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경제·금융을 공부한 뒤 행시(34회)로 공직에 진출했고 OECD대한민국정책센터 조세센터본부장,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제금융심의관, 울산시 경제부시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앞으로 10년 빅테크 수업』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2023.08.26 00:43

  • LFP 성능 높인 중국, 2차전지 시장서 질주…일본은 ‘전고체 배터리’로 역전 노려

    LFP 성능 높인 중국, 2차전지 시장서 질주…일본은 ‘전고체 배터리’로 역전 노려

     ━  증시 블랙홀 2차전지의 허실   현재 글로벌 2차전지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배터리는 기본적으로 ‘리튬이온(Li-ion)’ 배터리지만 양극재로 사용하는 재료에는 차이가 있다. 중국은 리튬·인산·철(LFP)을 사용하는 데 반해 한국은 니켈·코발트·망간(NCM)을 주로 사용한다.   한국 기업의 주력인 NCM은 LFP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우수하다. 같은 용량이라도 LFP보다 30% 정도 가볍다. 그래서 고성능 전기차에서 주로 사용된다. 넉넉한 주행거리와 짧은 충전 시간에 민감한 전기차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한국 기업은 NCM에 주목해 온 것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LFP가 대세다. 지난해 중국에서 팔린 전기차 10대 중 6대가 LFP를 장착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LFP는 NCM보다 무겁고 주행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수명이 길고 가격이 저렴한 게 장점이다. 한국과 중국은 한동안 각자의 시장에 주력했다. 그러다 균형이 깨진 건 2020년께 중국이 알루미늄을 추가해 LFP의 성능을 끌어올리면서다. 가격이 싸면서 성능까지 좋아지자 테슬라를 시작으로 벤츠와 폴크스바겐이 LFP 탑재를 선언했다. 현대차도 지난해 “LFP를 포함해 배터리 다변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2차전지 광풍, 과당경쟁 땐 폴리실리콘 전철 밟을 수도 “폭등 종목 뒤쫓기보다, 음극재 등 숨은 보석 주목할 때” 저렴한 전기차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LFP에 대한 인식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포드는 아예 CATL과 손잡고 LFP 공장을 북미에 짓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LFP를 앞세운 중국 기업들의 질주에 한국 기업들은 NCM 가격 인하 노력과 함께 LFP 개발로 대응하고 있다. NCM 중 가격이 비싼 코발트 함량을 줄여 가격을 내리는 게 목표다. 동시에 LFP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LG엔솔이 국내 3사 중 처음으로 LFP를 양산할 예정이고, 삼성SDI도 울산 공장에 LFP 라인을 증설하기로 했다. 에코프로비엠, 포스코퓨처엠, 엘앤에프 등 주요 소재 기업도 LFP 시장 진출을 선언한 상태다.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한국과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기며 자존심을 상한 일본은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적극적이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 사이를 리튬이온이 오가며 충전과 방전하는 원리다. 이때 리튬이온이 오가는 도로 역할을 하는 ‘전해액’은 액체인데, 전고체 배터리는 이 전해액을 고체화하는 것이다. 고체화하면 액체에 비해 발화점을 높여 폭발·화재 위험성을 낮추고 부피를 줄일 수 있어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국내 기업들도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지만, 현재 이 분야에선 일본이 가장 앞선다는 평가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재까지 개발된 전기차 배터리 가운데 가장 진보한 형태”라며 “전고체 배터리와 같은 차세대 배터리의 주도권을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3.08.26 00:38

  • “폭등 종목 뒤쫓기보다, 음극재 등 숨은 보석 주목할 때”

    “폭등 종목 뒤쫓기보다, 음극재 등 숨은 보석 주목할 때”

     ━  증시 블랙홀 2차전지의 허실   염승환 이베스투자증권 이사가 24일 유튜브 채널 ‘염블리와 함께’에서 2차전지 등 주요 시장 이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이베스트투자증권] “2차전지의 과도한 상승기는 지나갔다. 음극재·전해액 등 광풍에서 소외됐던 기업을 주시해야 할 때다.” 염승환 이베스트투자증권 이사는 “2차전지의 중장기적 성장성은 꺾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진한 국면에 있다”며 “단기 급등한 양극재 중심 2차전지 대표주를 쫓아가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3분기까지 수익성 부진 이어질 듯   ‘2차전지’의 여름은 뜨거웠다. 7월 황제주에 오른 에코프로를 비롯해 포스코홀딩스, 포스코퓨처엠이 이끄는 포스코그룹 주가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특히 연초 대비 주가가 10배 이상 치솟아 코스닥시장을 뜨겁게 달군 에코프로는 지난달 26일 장중 153만9000원까지 급등하며 최고가를 찍었다. 이날 포스코홀딩스도 76만4000원으로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관련기사 2차전지 광풍, 과당경쟁 땐 폴리실리콘 전철 밟을 수도 LFP 성능 높인 중국, 2차전지 시장서 질주…일본은 ‘전고체 배터리’로 역전 노려 그러나 이달 2차전지를 둘러싼 온도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에코프로 주가는 8월 들어 100만원 선까지 밀렸다 22일 120만원대를 회복했다. 지난 4일 이후 11거래일 만이다. 이날 포스코홀딩스 종가는 56만원으로, 전날보다 1.65% 상승 마감했다. 2차전지 대표기업들이 소폭 반등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지난달 고점과는 괴리가 있다. 염 이사는 “최근 주가 변동성이 커졌지만, 2차전지는 일시적 테마주가 아니라 반도체와 함께 국내 증시를 이끄는 대표 산업군”이라며 “3분기 실적 발표가 이뤄지는 11월 이후 다시 강세를 띨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7월 고점 이후 2차전지 대표주 주가가 크게 밀렸는데. “2차전지 산업의 성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기대치에 맞는 실적이 나와야 하는데, 최근 실적이 주춤했다. 2분기 에코프로 영업이익은 전 분기 대비 6.6% 감소했고, 에코프로비엠의 매출도 직전 분기 대비 5.2% 줄었다. LG에너지솔루션, 엘앤에프 등도 시총에 비해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 전기차 판매가 부진하면서 재고가 쌓이고 있고, 양극재를 만드는데 중요한 리튬 가격이 떨어지면서 이에 연동된 양극재 가격도 급락한 영향이다. 3분기까지 이러한 수익성 부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주가 급등 부담에 때맞춰 중국 단체관광 허용 등 새로운 이슈가 터지면서 수급이 분산된 결과다.”   2차전지로의 극단적인 쏠림 현상은 어떻게 보나. “쏠림 후유증은 한동안 고통을 줄 수 있다. 신용매매도 많았고, 그래서 변동성이 너무 커졌다. 쏠림 현상이야 언제나 있었지만, 특히 이번에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동성이 많이 쌓인 상황에서 SNS 등의 영향으로 정보 확산 속도가 너무 빨랐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2차전지가 증시에서 주도주로 부각되기 시작한 건 2020년부터다. 당시 BBIG(배터리·바이오·인터넷·게임) 열풍이 불었는데, 이들 산업군에서 살아남은 건 배터리 산업뿐이다. 다른 산업들은 성장세가 꺾였으나 배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한 덕분이다. 그러다 지난 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후 시장 불안이 이어지면서 투자금이 쏠리기 시작했다. ‘강남 아파트’가 부동산 시장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에코프로 등 2차전지가 한국 증시의 대명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 밀렸던 전해액 경쟁력 높아져   2차전지 대표주들의 폭등기는 이제 끝난 것일까. “과도한 상승기는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차전지 대표주들이 조정을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2차전지는 일시적 테마주는 아니다. 반도체와 함께 국내 대표적인 산업군으로 이미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단기 급등에도 주가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3분기 실적 발표가 이뤄질 10월 말에서 11월 초 이후 성장 기대감이 살아나면, 2차전지에 대한 분위기가 다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산업도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전지 하면 전기차만 떠올리는데 다른 시장도 굉장히 크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초대형 배터리인 ESS를 비롯해 배터리 교체에 따른 폐배터리 산업까지 넓고 다양하다. 지금까지 열풍의 주역은 양극재였다. 이미 폭등한 종목을 뒤쫓기보단, 경쟁력이 있음에도 상승에서 소외됐던 기업들을 주목해야 할 때다.”   어떤 분야를 살펴봐야 할까. “우선 음극재 시장의 가능성을 주시한다. 양극재가 주행거리를 결정한다면, 음극재는 배터리 수명과 충전 속도 등을 좌우한다. 특히 실리콘을 음극재에 넣으면 성능이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데, 이를 상용화하는 기업이 하나 둘 나오고 있다. SK, 포스코, 롯데그룹과 같은 대기업도 이 시장에 출사표를 냈다. 전해액 시장의 상승 가능성도 크다. 전해액은 2차전지에서 신선식품 같은 요소다. 오랜 기간 보관이 어려운 특성상, 전기차 생산 공장 옆에 있으면 유리하다. 이 분야 세계 4위인 엔켐이 미국 등에 공장을 두고 생산량을 확대하고 있고, 솔브레인홀딩스 등도 미국 법인을 두고 있다. 그동안 관련 기업의 주가가 눌려 있던 주요인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려서였는데, 중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생산이 어렵기 때문에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3·4분기 투자 유의점은. “2차전지의 성장성이 주가에 이미 상당부분 반영됐다고 본다면, 다른 산업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성장 분야로는 인공지능(AI) 반도체 관련 기업, 가성비를 인정받는 중소 화장품 기업 등을 꼽을 수 있다. 개인적인 투자 철학은 투자를 하다 실패하더라도, 오르막길에서 넘어지는 게 낫다는 것이다. 주가가 싸다고 하향산업에 눈을 돌리지 말자. 2차전지는 오르막길임은 자명하다. 지금은 너무 아찔하게 오른 게 문제인 거다. 2차전지와 반도체 기업들은 차별화가 뚜렷해서 조금만 공부하면 기업의 옥석을 가려내기가 어렵지 않다. 남들이 열광하기 전에 공부해두면 기회가 분명히 있다. 요즘 미·중 악재로 증시 출렁임이 커졌지만, 코스피 2500은 주가순자산비율(PBR) 0.9배 수준이다. 연내 코스피지수는 2800까지 상승 가능성을 본다. 주식 비중 확대에 무게를 두고 성장주에 관심을 가져도 좋을 시기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8.26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