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D 모션 데이터 확보 가능, 이젠 안무저작권 현실화 나설 때"

    "3D 모션 데이터 확보 가능, 이젠 안무저작권 현실화 나설 때"

    리아킴 지난달 24일 출범을 알린 안무저작권협회는 원밀리언 스튜디오의 리아킴(사진) 대표가 주축이 됐다. 원밀리언은 유튜브 구독자 2630만명을 거느리고 K팝 댄스의 글로벌 장르화를 이끈 세계 최대 댄스 스튜디오다. 실제로 오프라인 수강생 중 외국인 비중이 70% 이상으로, 원밀리언에 다니기 위해 한국에 장기체류하는 외국인도 많다. 지난 2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6개월간 한국문화를 집중홍보하는 ‘코리아시즌’의 개막공연을 장식한 것도 원밀리언이었다.   리아킴은 “음악저작권협회, 작가협회 등 창작자들의 협회가 많은데 문화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K팝 댄스 분야에 협회가 없는 게 아이러니였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안무의 저작권이 안무가에게 있다는 것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안무저작권의 구체적인 기준이나 저작권료 분배 구조 등 시스템이 미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무저작권협회를 만든 배경은. “안무저작권 보호 체계 마련은 우리 안무가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동안 기록 및 저장이 어려운 안무의 특성상 현실화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영상만 있으면 3D 모션 데이터 확보가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다. 또 세계적으로 K팝이 각광받고, 댄스 예능이 인기를 얻으면서 안무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기술과 인식 모두 성숙하고 발달해 이제 안무저작권 현실화를 추진할 때가 됐다고 봤다. 무엇보다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도 확대되고 있다.”   관련기사 춤에도 DNA 새긴다…K팝 안무가들, 세계 최초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 추진 AI로 만든 영화도 저작권 인정 현행 저작권법에서 안무저작물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나. “안무에 대한 저작권 등록은 지금도 할 수 있다. 다만, 별도의 분류 없이 연극저작물의 하위 개념으로 인정될 뿐이며 저작권료 분배 구조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효용이 크지 않다.”   저작권을 등록하더라도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인가. “그렇다. 안무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다 해도, 지금 법제로는 안무 제작 시안비 외에 추가적인 수익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안무저작권 현실화는 직업인으로서 댄서의 권익은 물론 창작자로서 긍정적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협회에선 아일릿의 뉴진스 안무 카피 의혹에 대해선 어떻게 보고 있나. “개별 사안에 대한 표절 여부를 판단하는 건 협회장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협회는 위와 같은 분쟁 사례가 있을 때 안무의 유사성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할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   표절에 대한 기준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이전부터 안무 카피 논란은 종종 발생해 왔다. 춤은 보편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기술과 테크닉이 많기 때문에 단편적인 동작만으로 표절 시비를 가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래서 안무저작권 인정 기준과 그 방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계속 주장해 온 것이다.”   해외의 움직임은 어떤가. “미국은 유튜브 춤 영상에 안무가를 표시한다. 국제협약(베른협약·로마협약·세계저작권협약 등)에 가입한 국가들은 안무저작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음악저작권 수준의 실질적인 보호와 수익분배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도 안무저작물의 창조성 인정 여부에 대한 어떤 기준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 길이 멀다.”   안무가들의 권리 주장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저항감은 없나. “그들의 것을 나눠 가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같이 성장하는 개념이라 생각해 주면 좋겠다. 음원도 창작자 권리를 존중해  줬기에 발전한 것처럼, 댄스씬도 창작환경이 좋아져야 퍼포먼스 퀄리티가 좋아질 거다. K팝 산업이 있기에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대립이 아니라 상생구조를 찾으려고 한다.”     황지영 기자 hwang.jeeyoung@joongang.co.kr

    2024.05.18 00:51

  • AI로 만든 영화, 메타버스 속 건축물... 저작권 인정 어디까지

    AI로 만든 영화, 메타버스 속 건축물... 저작권 인정 어디까지

    생성형 AI로 제작한 국내 최초의 ‘편집저작물’로 인정받은 영화 ‘AI수로부인’ 민희진-하이브 사태로 ‘콘셉트 표절’이란 생소한 개념이 인구에 회자됐다. “아일릿이 뉴진스를 모든 영역에서 카피했다”며 내부고발했다가 경영권 탈취 논란을 초래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콘셉트 포토와 특정 댄스 동작, 긴 생머리 같은 외형적 특징, 프로모션 방식을 포함한 ‘포뮬러’를 따라 한 것이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콘셉트 저작권’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지만, 아이디어의 영역이라 법적으로 권리 침해를 주장할 수 있는 저작권 개념과는 다르다는 반론도 나왔다. K팝 업계에선 표절이 아니라 관행적인 ‘벤치마킹’으로 보기도 한다. 뉴진스 역시 90년대 일본 걸그룹 스피드의 ‘바디 앤 소울’ 뮤직비디오와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을 카피했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기사 춤에도 DNA 새긴다…K팝 안무가들, 세계 최초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 추진 “3D 모션 데이터 확보 가능, 이젠 안무저작권 현실화 나설 때” 대중문화 콘텐트 산업이 성장하고 시장이 커지면서 과거에는 관행으로 통했던 일들에 새로운 지적소유권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 포맷권이 대표적 사례다. 과거엔 방송 포맷이 저작권법 보호 대상이 아니어서 도의적 비난만 감수하면 무단으로 베껴도 된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2017년 SBS와 CJENM 간의 소송에서 대법원이 리얼리티 프로그램 ‘짝’의 저작물성을 인정한 이후 포맷 보호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 2021년 TV조선 ‘미스터트롯’과 MBN ‘보이스트롯’ 간의 소송도 업계의 관심사였다. ‘미스터트롯’ PD가 퇴사하고 MBN과 손잡은 뒤 소 취하가 됐지만, 마구잡이식 포맷 베끼기에 경종을 울렸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이제 방송 포맷은 어엿한 수출 상품이다. 대중문화 개방 이전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단골로 표절하던 한국이 이젠 글로벌 콘텐트 포맷 시장 3위, 점유율 10% 이상을 차지하는 포맷 수출국이 됐다. 미드 ‘굿닥터’가 대표적이다. 20부작 KBS 드라마를 2017년 ABC가 리메이크해 시즌7까지 이어지고 있다. MBC 예능 ‘복면가왕’도 2019년 미국 FOX TV가 리메이크해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이후 전세계 55개국에 수출됐고, CJENM ‘너의 목소리가 보여’ 포맷도 2020년 FOX 리메이크 이후 20여개국에 수출됐다. 인기에 비례해 해외에서 포맷 도용 사례도 빈번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6~2020년 예능 18편이 20차례 표절 및 도용을 당했다.   웹툰 시장에서도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등장과 함께 예전에 보지 못하던 유형의 저작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생성형 AI가 그리는 웹툰은 데이터 학습 과정에서 저작권 침해 소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네이버웹툰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의 한 회차 모든 컷이 생성형 AI로 제작됐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별점 테러를 당했고, 네이버웹툰은 특정 작가 맞춤형 툴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광범위한 그림체가 아니라 특정 작가 스타일을 학습시킨 AI를 1인 작가 시스템 안에서 도구화하면, 저작권 이슈에서 자유롭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성형 AI로 만든 콘텐트는 현행법상 저작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지난 1월 AI로 전면 제작한 영화 ‘AI수로부인’이 국내 최초로 ‘편집저작물’로 등록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GPT-4’ ‘클로바X’로 시나리오를 쓴 뒤 ‘미드저니’ ‘스테이블 디퓨전’ 등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젠2’ ‘D-ID’ 등 비디오 생성 AI로 영상을 구축, ‘클로바더빙’과 ‘사운드로우’로 소리와 음악을 입히는 등 제작 전 과정에 AI를 활용했지만, 편집과 리터치 등에 영화제작사 나라AI필름의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세계적으로도 AI 저작권 인정사례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 연말 문체부가 발표한 ‘생성 AI 창작물 관련 가이드라인’은 AI가 생성한 결과물에 인간이 추가한 창작적 표현에 대해 저작권 인정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AI 산출물을 만들기 위해 입력하는 데이터에도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정지우 변호사는 “AI를 활용한 작품에 저작권을 부여한다면 데이터 수집단계에서 기존 창작자의 권리 보호부터 해야 한다”면서 “이런 차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AI로 인한 작품들이 무한 생성되어 저작권 개념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가상현실에서의 저작권도 주목받고 있다. 실제 건축물과 조경을 그대로 모사해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메타버스 플랫폼들이 생겨나면서 최근 스크린골프 업체 골프존과 골프코스 설계회사 등의 저작권 침해소송 같은 건축저작권 분쟁이 생겼다. 게임도 저작권 분쟁의 주무대가 됐다. 2021년 미국음악출판사협회(NMPA)가 메타버스 게임 업체 로블록스에 2억 달러 규모의 저작권 침해 소송을 걸었다. NMPA는 일일 이용자 4천만명이 넘는 로블록스가 이용자들에게 파는 가상 음악 재생장치를 통해 음악이 무단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고, 결국 NMPA 회원들과 로블록스가 개별적인 라이선싱 계약을 맺도록 합의했다. 이 합의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저작권 문제 해결의 본보기가 됐고, 가상 환경 내 음악 라이선싱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개척됐다.   저작권 보호와 문화생태계의 발전은 불가분의 관계다. 방향성에 따라 콘텐트 산업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정지우 변호사는 “창작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규정했던 저작물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면서 “과거에는 표현과 아이디어의 구분이 중요했지만 콘셉트 아트, 미디어 아트 등 이분법으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영역이 많아졌다. 기존의 이론을 넘어 창작물을 보호할 법적 근거 마련에 폭넓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18 00:49

  • 할머니 돌보는 11살…나홀로 고군분투 '영 케어러' 30만명

    할머니 돌보는 11살…나홀로 고군분투 '영 케어러' 30만명

     ━  사각지대 놓인 가족돌봄청년   “힘들어도 어쩔 수 없죠.”   정우(11·가명)는 철이 일찍 들었다. 그래야만 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 정우는 할머니 간호부터 집안일에 생활비와 공과금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 부모님은 정우가 태어난 지 석 달여 만에 이혼했다. 이후 엄마는 가출했고 아빠는 사업을 하다 1년여 전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설상가상 여든이 다 되신 할머니는 중풍을 앓은 뒤 반신마비 증세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정우는 “집안일 챙기랴 할머니도 보살피랴 하루하루가 힘겹지만 할머니가 저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걸 아니까 버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에도 정우는 친구들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학교에서 서로 무슨 선물 받았는지 얘기하는 거 들으면 부럽고 그래요.” 그래도 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단다. “몸이 불편한 게 할머니 잘못은 아니잖아요. 저라도 챙겨드려야죠.”   김소희(24·가명)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10여 년간 나이 드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홀로 돌보며 살아왔다. 김씨는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어려서부터 체감했다”며 “지금이야 지자체에서 돌봄비 등 일부 도움을 받지만 그땐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가족을 책임지다 보면 정서적 결핍 등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쉽다”며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해 정부나 지자체, 민간단체들이 심리 상담 등을 적극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고 전했다.   정우나 김소희씨는 ‘가족돌봄청년’이다. 신체적·정신적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가족 구성원을 돌보며 ‘실질적 가장’ 역할을 맡고 있는 아동·청소년·청년을 아우르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일찍이 이들을 ‘영 케어러(young carer)’로 부르며 정부 차원에서 보호·지원 정책을 확대해 왔다. 반면 우리 사회의 가족돌봄청년들은 여전히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나홀로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족돌봄아동 지원법 국회서 ‘낮잠’   당장 공식 통계부터 잡혀 있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대략 18만 명 규모로 파악하고 있지만 민간단체들은 최소 30만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 지원책도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초 가족돌봄청년 지원을 위한 첫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연 200만원의 ‘자기 돌봄비’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원 대상이 960명에 불과해 대다수 가족돌봄청년이 실질적 지원을 체감하기엔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정신적 고충 또한 금전적 어려움 못지않게 시급히 해결돼야 할 문제로 꼽힌다. 2022년 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의 주당 평균 돌봄 시간은 21.6시간에 평균 돌봄 기간도 46.1개월로 거의 4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우울감 증세를 겪는 가족돌봄청년은 61.5%로 일반 청년(8.5%)보다 7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어린 나이에 늙고 병든 가족을 수년간 홀로 책임지다 보니 절반 이상이 우울감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 지원 대상에서 만 13세 미만은 제외돼 있는 것도 논란거리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난해 가족돌봄청년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명 중 한 명은 만 13세 미만 초등학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 관계자는 “5년 넘게 가족을 돌보고 있다는 응답자 중 60% 이상이 중고등학생인 점을 감안할 때 초등학생 때부터 돌봄이란 짐을 떠맡고 있는 경우가 상당수”라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만 13세 미만 아동은 지원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동 보호 차원에서 다른 방식의 지원책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란 입장이지만 부처별 정책 조율 과정에서 자칫 소외될 우려가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함선유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족돌봄청년 중에서도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만 13세 미만 아동을 챙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실정”이라며 “어느 부처가 어떤 정책을 내놓든 초등학생들을 돌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시돼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법적·제도적 정비도 현안 중 하나다. 국회에서도 지난해 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안 2개가 잇따라 발의됐다.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등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의무를 명시한 법안이다. 하지만 여전히 보건복지위 문턱을 넘지 못한 채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다. 법안을 발의한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돌봄을 받아야 할 아동과 청소년들이 오히려 돌봄의 주체가 돼 있는 현실을 개선하려면 더 늦기 전에 법적 토대부터 갖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를 적극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영국은 아동복지법에 영 케어러 발굴·지원 방식을 별도로 규정해 놓은 뒤 교육 훈련 프로그램과 긴급 지원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호주도 2010년 영 케어러 지원법을 만들고 1인당 연간 3000 호주 달러(약 27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채희옥 초록우산 아동옹호본부 팀장은 “정부 차원에서 가족돌봄청년을 직접 찾아내고 지원책도 꼼꼼히 챙기는 외국과 달리 일부 지자체의 경우 여전히 당사자인 어린아이들이 직접 신청해야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고령 인구가 갈수록 늘고 있는 가운데 이들을 돌봐야 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4.05.18 00:38

  • 춤에도 DNA 새긴다…K팝 안무가들, 세계 최초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 추진

    춤에도 DNA 새긴다…K팝 안무가들, 세계 최초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 추진

     ━  K팝 안무가들, 이름을 찾다   안무 표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걸그룹 뉴진스(위쪽)와 아일릿. “이건 뭐 죄다 ‘복붙’이야.” 지난 13일 ‘뉴진스 안무가’로 알려진 댄서 김은주·블랙큐가 아일릿의 신곡 ‘럭키걸신드롬’ 뮤직비디오를 저격하고 나섰다. 뉴진스의 맥도날드 광고 안무를 그대로 카피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제기한 아일릿의 ‘마이월드’와 ‘마그네틱’이 뉴진스의 ‘어텐션’과 ‘디토’ 안무를 표절했다는 시비가 해당 안무가들에게까지 옮겨붙은 모양새다.   이런 시비가 만일 법정에 간다면, 양측의 안무만으로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동작이란 없기 때문이다. 뉴진스가 기본동작을 응용해 독창적인 안무를 만들어 냈는지부터 살펴야 하고, 그 독특한 포인트를 아일릿이 의도적으로 베꼈는지 여부를 판사가 재량껏 판단한다. 정량적 기준은 없다. 흔히 말하는 음악의 '8마디'도 와전된 것이다. 그런데 안무 표절이 법정에 간 적은 없다. 안무저작권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소송을 제기할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무저작권이 돈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시장이 천문학적으로 커진 K팝에선 안무가 일약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   관련기사 “3D 모션 데이터 확보 가능, 이젠 안무저작권 현실화 나설 때” AI로 만든 영화도 저작권 인정 사실 지금까지는 안무가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하다. 뉴진스의 작곡가는 250(이오공)이라고 명시된 데 비해, 안무가는 비공식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동안 안무가들은 안무 창작이라는 용역에 대한 대가만 받아왔을 뿐, 창작에 따른 권리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귀속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2012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만든 안무가 이주선도, 2021년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시그니처 안무(‘헤이마마’)를 만든 안무가 노제도 안무저작료 수입은 0원이었다. 플랫폼에서도 소외됐다. 틱톡·릴스·유튜브 등의 현행 시스템상 모든 수익은 음악저작권자에게 돌아간다.   ‘강남스타일’ 말춤 안무가 수입 ‘0’   ‘수익 0원’이라고 화제였던 스우파 노제의 ‘헤이마마’ 안무. 이런 상황에 K팝 안무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달 24일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가 주축이 된 안무저작권협회가 출범을 선언했다. 허니제이·바다·바타·백구영·최영준 등 유명 안무가들이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원밀리언 대표 리아킴이 초대 협회장에 취임했다. 안무저작권 수익 분배 구조를 설계해 K팝 댄스를 산업화하려는 움직임이다.   문체부도 안무저작권 보호를 역점사업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 12월 유인촌 장관이 ‘저작권 강국 실현, 4대 전략’을 발표하며 음악 방송에서 안무가의 이름을 노출하도록 권고할 계획임을 알렸고, 현재 저작권위원회와 보상체계를 연구하고 있다. 정태경 문체부 저작권정책과장은 “안무저작권 등록을 시스템화하고 수익 분배를 위한 보상 기준을 지표화하기 위해 시장조사와 실태 파악을 하고 있다. 이르면 연내 성명표시를 개선권고하고 표준계약서 제정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8년 멜론뮤직어워드에서 삼고무를 춘 BTS 제이홉. 대중가요의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은 세계 최초로 추진되는 일이라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서 원밀리언 관계자를 제네바에 초청해 현황을 공유하기도 했다.   빌보드 집계 기준을 바꾼 싸이의 말춤. 한국이 앞서가는 이유가 있다. 음악을 동영상 플랫폼에서 소비하는 ‘보는 음악’ 시대를 K팝이 선도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도 ‘마카레나’처럼 전세계를 춤추게 한 댄스곡이 있었지만, 당시는 안무가 음악을 보조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의 기준을 바꿔버렸다. 당시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조회수 신기록을 세우는 엄청난 인기에도 라디오 방송횟수 때문에 빌보드 핫100차트 2위에 머문 것을 계기로, 2013년부터 유튜브 조회수를 집계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 결과 BTS·블랙핑크  등이 빌보드 차트에 빈번히 올랐으니, 지금의 K팝 신드롬 1등공신이 안무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숏폼 댄스 챌린지 트렌드 때문에 K팝에선 음악보다 안무가 더 중요시된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K팝 안무가의 위상과 보상체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윤여욱 원밀리언 공동대표는 “‘스우파’ ‘스맨파’가 큰 인기를 끌었어도 리더들만 떴을 뿐, 팀원들은 유명세 외엔 방송 전이나 똑같다. 노력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보상 시스템 설계가 쉽진 않다. 현재 K팝 안무는 연예기획사가 여러 안무팀에게 받은 시안에서 필요한 부분만 따서 조합하는 형식의 공동저작물인지라 한 곡에 수십 명이 관여될 수 있고, 기여도도 제각각이다. 시안에 참여할 때 저작권을 포기하는 특약을 요구받고 있기에 표준계약서 제정도 선결조건이다. 리아킴은 “업계의 관행을 깨부숴야 한다”면서 “어떤 회사는 댄서들이 SNS에도 참여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댄서를 창작자가 아니라 외주용역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다. 그래도 안무가는 활동을 이어가야 하니 기획사와 싸우지 않는다. 그게 관행이다. 그래서 협회가 필요하고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드물게 안무저작권이 등록된 사례인 ‘한글비보이’ 공연.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현행 저작권법으로는 안무저작물은 연극저작물의 하위 개념으로 인정될 뿐 별도로 분류되지 않는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따르면 저작권 등록 건수는 2019년 4만여 건에서 2023년 7만여 건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5년간 안무 관련 등록 저작물은 191건으로 전체 저작물 중 0.061%에 불과하다. K팝 댄스의 등록은 전혀 없다. ‘한글비보이’ ‘우리가락 퓨전 난타’ 같은 공연물이나 장검무·장고춤 등 순수무용이 일부 등록돼 있을 뿐이다. 저작권 등록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안무저작권이 이슈가 된 사례가 없진 않다. 2011년 걸그룹 시크릿의 ‘샤이보이’ 안무가가 해당 안무를 교습에 사용하고 영상을 올린 댄스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았다. 2018년 BTS 제이홉이 한 시상식에서 삼고무를 춘 이후 민속무용으로 통했던 해당 춤의 저작권 등록 사실이 알려져 분쟁 끝에 창작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해외에선 미국 게임회사 에픽게임즈와 안무가들의 분쟁이 유명하다. 세계 최고 인기 게임인 포트나이트가 기성 안무를 무단 사용한 댄스 아바타 때문에 꾸준히 문제가 됐지만 안무저작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안무가 카일 하나가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22년 1심은 댄스 스텝이 저작권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지난해 11월 항소법원은 ‘짧은 동작도 창의적인 선택과 배열이 반영되어 있다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고, 지난 2월 합의에 도달했다. 유명무실했던 안무저작권이 존재감을 얻은 것이다.   문체부도 안무저작권 보호 역점사업으로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법적 문제와 별도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저항감도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안무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가수가 아티스트로서 안무까지 어느 정도 스스로 창작한다는 판타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안무가들이 지금껏 묻혀 있었던 건 창작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발족한 안무저작권학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IP 중개플랫폼 위츠의 박진익 대표는 “방송사에서 성명표시권부터 해결해줘야 하는데 해묵은 연예계 서열 탓에 쉽지 않다. 공권력으로라도 빠르게 확산시켜야 인식도 개선될 것”이라며 “엔터업계에서도 누가 먼저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기대가 된다. 대형 기획사들은 무시하고 내부 안무가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안무가들 권익도 신경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수익배분이 실현되면 안무가들은 일반인들의 댄스 챌린지 영상이나 길거리 플래시몹에도 수익을 요구할까. 안무저작권학회장을 맡고 있는 함석천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안무저작권을 ‘수익의 저수지’에 비유하며 “권리가 아닌 산업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물이 고일 수 있게 해서 나눠 써야지, 개별적으로 내 권리니까 쓰지 말라고 하면 결국 손해를 본다. 대중이 널리 사용하게 하고 수익을 나도 모르는 사이 분배받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미디어 세상에서 가장 발전가능성이 많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춤이다. 안무저작권이 산업으로 발전하면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먹거리가 될 것이다.”     유주현·황지영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18 00:01

  • 4조1300억 K방산 요람…목초지 마을 질롱 '들썩'

    4조1300억 K방산 요람…목초지 마을 질롱 '들썩'

     ━  한국 방산 첫 해외기지 호주 현지 르포   호주 질롱시에 건설 중인 한화 현지 생산공장(H-ACE) 전경. [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지난달 19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남서쪽으로 60여㎞ 떨어진 질롱시로 향하는 길. 차창 밖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가 전부였다. 검은 소떼와 하얀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한 시간가량 이어졌을 때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호주 생산공장(H-ACE) 건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15만㎡의 드넓은 부지에 3만2000㎡ 규모로 들어선 생산공장은 한국 방산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다. 아시아 국가의 방산기업이 호주에 진출한 첫 사례로도 꼽힌다.   질롱시는 원래 포드 자동차 공장이 있던 지역이었지만 2016년 포드가 철수하면서 지역 경제에 한파가 닥쳤다. 한화가 이곳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구 20만 명의 조용한 목초지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1년 12월 한국이 호주와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장갑차 수출 계약을 맺은 데 이어 질롱이 현지 공장 부지로 결정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후 지난해 12월 호주 수출 계약이 성사된 한화 ‘레드백’ 장갑차 129대도 이곳에서 생산하기로 하면서 질롱은 일약 ‘K-방산’의 최전방 해외 생산기지로 거듭나게 됐다. K-9과 K-10, 레드백 수출은 본계약 규모가 4조1300억원에 달한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2022년 4월 공장 건설의 첫 삽을 뜬 지 2년 만에 찾은 질롱 생산공장은 내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호주형 K-9 자주포인 ‘AS9 헌츠맨’과 호주형 K-10 탄약운반장갑차인 ‘AS10’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잭슨 도커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호주 사업개발담당 부사장은 “호주형 K-9 자주포와 K-10 생산 공장은 오는 7월 완공될 예정으로, 올해 11월부터는 본격적인 생산 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현지 인력 채용이 한창이고, 내부 시설도 5월 중엔 완벽하게 갖춰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호주형 K-9 자주포의 경우 한 작업대에서 10일씩 9단계를 거쳐 생산이 이뤄져 90일이면 한 대가 완성되는 공정”이라며 “한국 기업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효율적으로 결합되면서 납기일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레드백 장갑차 생산 공장도 조만간 증축 공사에 착수해 2026년 6월부터는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철광석·양모 팔던 호주, 로봇·우주항공 두각 딥테크 강국 탈바꿈 “특허 1000개, 벤처 350개 배출…시카다는 21세기 산업혁명 메카” 한국과 호주의 방산 협력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엔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리처드 말스 호주 국방장관이 함께 질롱 공장을 방문해 공사 마무리 현장과 생산 라인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 두 장관은 이날 회동에서 한층 심화된 양국의 방산 협력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국방부는 밝혔다.    ━  레드백 장갑차 129대도 질롱에서 생산…공장 밖엔 ‘자주포·장갑차 테스트용’ 거대한 경사로     질롱 현지 생산공장 밖으로 나오자 너른 공터에 들어선 거대한 경사로가 눈에 띄었다. 현지 공장 관계자는 “K-9 자주포와 레드백 장갑차가 60% 경사로에 오른 뒤 멈춰서 버틸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장비”라며 “국제 표준에 따라 한화 창원 공장과 동일하게 설계됐다”고 전했다.   경사로 오른편에는 물탱크 두 개가 마련돼 있었다. 이 관계자는 “K-9 등 생산이 본격화되면 일정한 수심의 하천을 건널 수 있는지 시험하는 물웅덩이를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공장 주변엔 1.5㎞ 길이의 주행 트랙 및 시험장, 도하 성능 시험장, 사격장, 연구개발(R&D) 센터 등 각종 연구·시험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호주 협력업체 공장들도 속속 입주를 앞두고 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질롱 공장이 입주한 빅토리아주도 ‘K-방산’ 수출 계약에 따른 낙수 효과가 예상보다 훨씬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스콧 아들링턴 빅토리아주정부 국방우주항공 담당자는 “호주 연방정부가 한화와 계약을 체결한 뒤 현지 생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주정부 간의 입찰 경쟁이 매우 뜨거웠다”며 “1970년대 조성된 우주항공단지를 비롯해 방산 관련 산업이 발달했고 호주 국방 R&D 예산의 40%가 우리 주에 투자되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유치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유치 경쟁 뒷얘기를 전했다.   그는 “호주형 K-9 자주포 제작에 협력하는 지역 중소기업에 1000만 호주 달러(약 90억원)를 이미 투자했고 레드백 공급과 연계되는 기업에도 유사한 규모의 금융 지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빅토리아주정부는 한화 공장 유치가 지역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가 57억 호주 달러(약 5조1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지 생산공장의 본격 가동으로 현지인 채용도 늘면서 향후 12년간 질롱에만 1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역 경제도 한층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1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 안카(ANCA) 그룹은 멜버른 지역을 기반으로 50여 년 간 사업을 펼쳐왔다. 연삭기계(그라인딩머신)와 동작제어시스템 전문기업으로, 한국 기업과도 30년 넘게 거래해 왔다. 이번 한화 K-방산의 호주 진출 소식을 듣고 ‘코버스 테크놀로지 솔루션스(CTS)’라는 자회사까지 설립하며 방산 협력 강화에 적극 뛰어들었다.   CTS 사무실에서 만난 닉 윌리엄스 본부장은 “레드백 장갑차의 안정적인 주행을 위해 차체 아래 바퀴에 14개의 관련 부품이 들어가는데, 이와 관련해 한화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등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며 “연구진이 창원 공장에 가서 관련 기술을 익힌 뒤 이곳에 돌아와 생산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은 “우리 기업이 첫 해외 생산기지를 세운 건 K-방산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현지화에 성공해 호주 지역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면 앞으로 다른 방산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호주가 국방력을 강화하고 나선 것도 우리 방산기업엔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호주 국방부는 지난달 17일 ‘2024 국가 국방 전략’을 발표하면서 향후 10년간 국방비 지출을 기존 계획보다 500억 호주 달러(약 45조원)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한 해 호주 국방 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호주 국방 예산은 2019~20년 390억 호주 달러였던 게 지난해엔 사상 최고치인 526억 호주 달러(약 47조원)로 급증했다.   호주 정부의 이 같은 국방력 강화 전략은 무엇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분석이다. 호주는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와 미국·인도·일본·호주 등 4개국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의 정식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미·중 갈등 국면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춰 왔다.   특히 호주는 해군력 강화에 중점을 두겠다는 방침을 세워둔 상태다. 말라카 해협 무역통상로 확보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해군력 증강을 통해 경제·군사적 이해를 공고히 하겠다는 심산이다. 이를 위해 2029년까지 차기 호위함 11척을 도입하기로 했다. 한국 기업도 이미 수주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셰인 터핀 서호주국방과학센터 수석연구관은 “현재 한국을 비롯해 일본·독일·스페인의 설계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질롱(호주)=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4.05.11 01:45

  • 조태열 13~14일 방중, 왕이와 회담

    조태열 13~14일 방중, 왕이와 회담

    조태열(左), 왕이(右)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오는 13~14일 중국을 방문한다. 조 장관은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만나 한반도 관련 현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외교부는 10일 “조 장관은 왕 부장의 초청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하고, 한·중 관계, 한·일·중 정상회의, 한반도 및 지역·국제 문제 등 상호 관심사에 대한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열고 애로사항을 들을 예정이다. 외교부는 “간담회에서 기업인 지원 방안 등 한·중 경제 교류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장관은 중국 지역 총영사들을 소집해 회담 결과를 공유하고, 지방 차원의 양국 협력 증진 방안 등을 당부할 계획이다.   한국 외교장관이 베이징을 찾는 건 지난 2017년 11월 강경화 장관 이후 처음이다. 이후 한·중 관계가 좀처럼 풀리지 않은 데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고위급 교류가 중단됐고, 물리적 교류가 재개된 뒤에도 한동안은 중국 측이 방역 등을 이유로 베이징에서 ‘손님 맞이’를 꺼려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2022년 8월 박진 장관이 방중해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했지만, 장소는 산둥성 칭다오였다.   조 장관의 이번 방중은 다른 나라를 들르지 않고 중국과의 외교 협의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독 방문이라는 점에서 외교가는 한·중 관계의 흐름이 바뀌는 기회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한다. 이달 말에는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데, 이를 계기로 한·중 간 뜸했던 고위급 교류가 재개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이 본격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는 기대도 표출된다. 구체적 조율은 아니더라도 이번 외교장관 회담에서 양국이 시 주석의 방한, 또는 윤 대통령의 방중을 통한 정상회담 필요성에 공감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2024.05.11 01:27

  • 북, 금강산 지구 내 소방서 철거…정부 자산으론 처음

    북, 금강산 지구 내 소방서 철거…정부 자산으론 처음

     ━  남북교류 상징물 지워가는 북한   북한 금강산 지구 내에 있는 우리 정부 자산인 소방서 건물이 지난달 말 완전히 철거됐다고 통일부가 10일 밝혔다. 이 시설은 2019년 22억원을 들여 건설됐다. [사진 통일부] 북한이 금강산 관광특구 안에 있는 소방서를 지난달 말 완전히 철거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예산 22억원이 투입된 건축물이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10일 성명을 통해 최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며 “정부는 금강산 지구 내 우리 정부가 설치한 소방서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철거한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북한의 일방적 철거 행위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우리 정부의 재산권 침해 등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 당국이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해배상 소송 등 법적 조치도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 강원 고성군 온정리 일대에 조성된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이산가족면회소와 소방서 건물, 관광 도로 등 한국 정부 자산 3건이 있다. 이 중 소방서 건물은 대지 면적 4900㎡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통일부는 지난 2019년 소방서 건축에 22억원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이산가족면회소는 550억원, 관광 도로는 26억6000만원을 들여 조성했다.   이 외에 금강산 관광지구에는 온정각과 부두시설, 해금강 호텔, 온천빌리지 등 현대아산이 투자한 시설과 에머슨퍼시픽이 투자한 골프장 등의 위락시설이 있었다.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 11일 한국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이후 전면 중단됐다.   북한은 최근 남북 관계 단절을 상징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이어가고 있다. 금강산 관광지구의 시설 철거 역시 사실상 예고된 조치였다는 분석이다. 2019년 10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건축 미학적으로 낙후하고 관리가 되지 않아 남루하기 그지없다”며 “남측 관계 부문과 합의해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협의가 중단됐지만, 북한은 올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금강산 국제관광국을 폐지하며 다시 관련 조치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구병삼 대변인은 “소방서 철거와 관련해서 관련된 동향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완전 철거는 지난달 말에 확인했다”며 “그 외 해금강호텔 등 관광과 관련된 상당 시설이 철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북한이 정부 자산에 직접 손을 댄 건 대남 메시지 성격도 있어 보인다. 남측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끊었다는 측면에서다. 이를 위해 김정은은 스스로 밝힌 “남측 관계 부문과의 합의”조차 생략했다. 통일부는 지난해 12월에도 “북한이 개성공단(2016년 2월 전면 폐쇄)의 기업 30여 개를 무단 가동하는 동시에 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의 철거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북한은 2020년 6월 연락사무소 청사도 공개적으로 폭파했다. 이후 연락사무소,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 주변에 흩어진 건물 잔해들을 철거·정리하는 활동이 지난해 말 포착됐다. 비슷한 시기 지난 정부의 9·19 군사합의(2018년)에 따라 조성한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 고지의 전술도로에 지뢰를 매설한 사실도 확인됐다. 〈중앙일보 4월 29일자 1·8면〉   이처럼 북한은 각종 남북 교류의 상징물들을 지워가는 작업에 속도를 내며 내부적으로는 사상 교육 강화를 통한 주민 통제 등에 몰두할 것으로 보인다. 선대의 화해 업적에도 거침없이 손 대는 분위기다.   동시에 북한은 중국, 러시아에 밀착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북한 국영 고려항공은 이달 초 웹사이트를 통해 평양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간 정기 노선을 재개한다고 공지했다. 북·러 간 고려항공 정기 노선이 재개되는 건 4년 3개월 만이다. 고려항공 측은 평양과 베이징 노선도 주 3회 운영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2024.05.11 01:25

  • 철광석·양모 팔던 호주, 로봇·우주항공 두각 딥테크 강국 탈바꿈

    철광석·양모 팔던 호주, 로봇·우주항공 두각 딥테크 강국 탈바꿈

     ━  호주 4.5차 산업혁명 승부수   호주 AMSL항공이 개발에 성공한 수직이착륙 항공기 ‘베르티아’. 호주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전이 있다. 서호주 조폐국 ‘퍼스 민트’에 있는 순금 1t짜리 금화다. 2011년 주조된 동전 앞면에는 캥거루가, 뒷면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새겨졌다. 지난달 21일 찾은 퍼스 민트에서는 골드러시가 이어졌던 1800년대 후반의 모습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지금도 서호주 지역은 세계 4대 금 생산지로 꼽힌다.   금만이 아니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리튬을 비롯해 철광석·천연가스 등 온갖 천연자원과 광물이 흘러넘친다. 지난해 이 같은 광물과 석탄·석유 등 원료의 수출은 호주 전체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말 그대로 ‘땅만 파도 자원이 나오는’ 천혜의 환경을 갖춘 셈이다.   리튬, 전 세계 생산량 53%나 차지   지난해 호주의 총 수출액은 전년보다 12.4%나 감소했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세계 원자재 수요가 둔화한 데다 다른 나라들이 생산량을 늘리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원자재 가격이 하락한 탓이다. 하지만 호주 현지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와 기업인들은 “예상 가능한 결과”라며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중지를 모은 끝에 21세기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광석과 양모를 팔던 나라에서 첨단 미래산업과 딥테크 강국으로의 변신’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이를 위한 전략 마련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자원 부국’에서 ‘기술 부국’으로 탈바꿈하는 데 범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특히 호주 내에서도 자원이 풍부한 서호주정부가 가장 적극적이다. 호주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서호주는 세계 최대의 리튬 생산지다. 지난해 호주 전체 수출의 약 45%도 서호주의 몫이었다. 시몬 스펜서 서호주정부 국제전략정책관은 “2019년까지만 해도 광업 분야 비중이 가장 컸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금융업과 제조업 등으로의 다변화를 적극 꾀하고 있다”며 “서호주의 지리적 특성상 다양한 자원을 아시아로 실어나르는 조선·항만산업이 발달했는데 이를 미래 신산업과 최대한 연계하는 방안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4조1300억 K방산 요람…목초지 마을 질롱 ‘들썩’ “특허 1000개, 벤처 350개 배출…시카다는 21세기 산업혁명 메카” 서호주정부에서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 조언을 책임지고 있는 피터 클린켄 수석과학자는 “호주는 전 세계 리튬 생산량의 53%를 차지할 정도로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만 그동안엔 채굴 후 곧바로 중국 등으로 수출하는 ‘파서 나르는(Dig and Ship)’ 방식에 그쳤다”며 “하지만 원자재는 가격 변동에 취약한 만큼 최근엔 정제·가공 기술과 자동화 기술을 적극 도입해 수익성과 안정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나쉬대 연구원이 대학 혁신랩에서 개발한 스마트 로봇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리적 특성상 자동화와 로봇 기술 산업이 발달한 점도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클린켄 수석과학자는 “서호주는 면적은 넓지만 인구는 290만 명에 불과하다 보니 광산에서 2000㎞ 떨어진 퍼스의 사무실에서 원격으로 채굴·생산하는 등 일찍부터 자동화 제조 공법을 발전시켜 왔다”며 “현재 원격 제어 기술을 심해에서도 활용하고 있는데 앞으론 항공우주 분야에도 적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2018년 창업한 신생 기업인 키로닉스(Chironix)가 대표적 사례다. 퍼스에 기반을 두고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무인 로봇과 차량을 개발 중인 이 회사는 최근 원격 제어 기능을 광물·석유 채취에서 국방·우주 분야로 넓혔다. 더 나아가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도 참가해 300만 달러(약 41억원) 규모의 계약도 맺었다. 다니엘 밀포드 대표는 “전쟁터를 오가는 일종의 ‘우버’를 만드는 이 군사 프로젝트에 우리 기술을 적용할 경우 전장에서 군수품을 나르고 부상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훨씬 원활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드니공과대학 테크랩이 전파 차단 연구를 위해 설치한 무반향실. 더욱이 호주는 페니실린 개발과 엑스레이(X-ray) 기술 등으로 과학·의학 분야에서만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기초과학의 숨은 강국’으로 꼽힌다. 와이파이와 초음파 장비, 전자심박조율기, 비행기용 블랙박스 등도 호주산 발명품이다. 상위 10% 과학논문 인용 횟수도 세계 4위를 기록할 정도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호주가 과학 강국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연구 성과 대비 저조한 상용화 실적 탓이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따르면 지난해 호주 과학 연구의 상업화 수준(14위)은 한국(3위)보다도 크게 낮다. 이에 호주 정부도 1차 산업 중심 국가에서 4.5차 산업혁명 국가로의 변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간극을 줄이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고 나섰다.   “최소 5~10년 내다보고 장기 투자”   천연자원 개발용 원격 제어 로봇이 서호주 우드사이드 로봇 연구소에서 시연되고 있다. 허정연 기자, [사진 AMSL항공] 그 중심엔 호주 연방 과학산업연구기구(CSIRO)가 있다. 호주 최대 종합연구기관으로 최근 기초연구의 상업화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기술은 있지만 자본이 부족한 벤처기업을 집중 지원한다. 여기서 나온 연구 성과를 국가 산업과도 적극 연계하며 이미 102억 호주 달러(약 9조14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해냈다. 불에 타지 않는 경량 소재, 배터리 관리 시스템, 티타늄 3D 프린팅으로 만든 갈비뼈와 마우스피스 등이 이곳의 지원으로 탄생했다.   CSIRO 멜버른 사무실에서 만난 폴 세비지 제조 부문 부대표는 “35년 전 이곳에서 처음 일할 때만 해도 양모 산업이 국가 핵심 산업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관심은 로봇·AI·항공우주·바이오 등 딥테크 기술에 온통 쏠려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뉴사우스웨일스주에 기반을 둔 AMSL항공도 주정부 등의 투자 지원 속에서 단기간에 성장한 회사다. 2018년 엔지니어 2명이 창업한 지 6년 만에 수소 연 료를 동력으로 한 수직이착륙(VTOL) 항공기 ‘베르티아’를 최초로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맥스 요크 AMSL항공 CEO는 “별도의 활주로 없이 이착륙이 가능해 긴급 의료 수송 등에 적합한 게 장점”이라며 “현재 개발 중인 무인항공기는 향후 국방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산학 협력과 연계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정부·산업체·대학이 공동으로 13억 호주 달러(약 1조1600억원)를 투자해 호주의 주요 대학을 대상으로 기초과학 연구와 상업화를 지원 중이다.  우주·국방·첨단제조·식량·청정에너지 등 전략 분야가 주된 연구 지원 대상이다. 모나쉬대학 혁신랩과 시드니공과대학(UTS) 테크랩 등 대학들도 자체적으로 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기업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혁신랩에서 활동 중인 모나쉬대 2학년생 제임스 그레이는 “우주항공 기술을 기반으로 친구들과 HPR이란 벤처기업을 창업했는데 학교뿐 아니라 관련 기업의 투자도 받게 돼 초기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대학은 특히 벤처기업들이 빠지기 쉬운 ‘죽음의 계곡’을 슬기롭게 넘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지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아이반 추아 UTS 매니저는 “대학에서 아무리 훌륭한 연구를 진행해도 상용화하기까진 시간과 비용이 만만찮게 소요되다 보니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적잖았다”며 “이 고비를 잘 넘도록 지원하는 건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세비지 CSIRO 부대표도 “최소한 5~10년을 내다보고 장기적으로 투자한 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딥테크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시드니·멜버른·퍼스(호주)=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4.05.11 01:24

  • “특허 1000개, 벤처 350개 배출…시카다는 21세기 산업혁명 메카”

    “특허 1000개, 벤처 350개 배출…시카다는 21세기 산업혁명 메카”

     ━  호주 4.5차 산업혁명 승부수   알렉스 샤필스키 호주 시드니 남쪽 이블레이 지역은 19세기 후반 호주 산업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당시 이곳에선 하루에도 수십 대의 열차가 오가며 쉴 새 없이 화물을 실어날랐다. 인근엔 열차를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이 즐비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공장이 하나둘 폐쇄됐다. 이 지역 번영의 상징이었던 열차 차고지도 결국 1988년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00년. 딥테크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시카다 혁신센터(Cicada Innovations)’가 들어서면서 이곳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후 혁신센터에서 배출된 수많은 벤처기업이 호주 첨단산업을 선도하면서 1차 산업혁명의 근거지였던 이곳은 한 세기 반 만에 4.5차 산업혁명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관련기사 4조1300억 K방산 요람…목초지 마을 질롱 ‘들썩’ 철광석·양모 팔던 호주, 로봇·우주항공 두각 딥테크 강국 탈바꿈 혁신센터에 도착하자 오래된 증기기관차가 방문객을 맞이했다. 로비 천장엔 기차 엔진을 장착할 때 썼던 크레인이 매달려 있었다. 이에 대해 알렉스 샤필스키(사진) 시카다혁신센터 우주산업 책임자는 “기차가 이곳에서 엔진을 장착한 뒤 본격적인 운행을 시작했듯 우리 센터는 벤처기업이 세상에 나가 성공할 수 있도록 마지막 단계까지 지원한다”고 말했다.   시카다는 주로 어떤 기업을 지원하나. “딥테크를 기반으로 기후변화·에너지·우주·첨단제조부터 헬스케어·식품·농업까지 다양한 분야의 기업이 함께한다. 창립 후 이곳에서 350개 이상의 딥테크 벤처기업이 육성됐는데 이들이 유치한 투자 규모만 20억 호주 달러(약 1조8000억원)에 이른다. 수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고 특허도 1000개 이상 취득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에 집중하나. “정부 지원금을 벤처기업에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정부 사업과 연결해 주기도 한다. 동시에 시장 요구에 맞는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도 한다. 딥테크 기업 관계자·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네트워크도 강화하도록 돕고 있다.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시장에 적용해 상용화하는 게 벤처기업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8년 호주우주청(ASA)이 문을 열면서 호주 정부는 본격적으로 우주산업 육성에 뛰어들었다. 현재 40억 호주 달러 규모인 우주산업 규모도 2030년엔 120억 호주 달러로 3배나 늘릴 계획이다. 호주 정부는 우주 강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시카다와 여기에서 배출된 벤처기업들이 큰 역할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주 분야 스타트업 육성 계획은. “이미 2002년부터 우주 관련 벤처기업을 집중 육성해 왔다. 현재 13개 관련 기업이 상주해 있는데 위성 추진체, 위성 블랙박스, 탐사 로봇, 우주 통신, 위성항법, 우주방사선 측정기 등 다양한 기술을 보유하며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스페이스 머신 컴퍼니’의 경우 우주에서 재사용이 가능한 궤도 서비스 위성을 개발해 위성 수리나 우주 쓰레기 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세계 각국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혁신센터를 통해 상업화에 성공하면 투자금을 회수하나. “전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장한 기업들이 사회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특히 우주산업은 기술이 상용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지속적인 투자가 필수다. 센터 이름을 ‘매미(cicada)’로 지은 것도 같은 이유다. 땅속 매미가 성체가 되기까지 7년이란 긴 세월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도 7년이든, 10년이든 우수한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시드니(호주)=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4.05.11 01:18

  • 대사 많아 큰일났다 생각, 스타워즈 사전까지 공부했죠

    대사 많아 큰일났다 생각, 스타워즈 사전까지 공부했죠

     ━  한국 배우 최초 스타워즈 출연 이정재   해마다 5월 4일이면 영화 ‘스타워즈’ 팬들은 축제를 연다. 일명 ‘스타워즈 데이’다. 영화 속 명대사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의 발음이 5월 4일(May the Fourth)과 비슷해서 시작된 축제다. 한국에선 2015년부터 매해 스타워즈 데이 행사를 열고 있는데, 특히 올해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4일, 5일 양일간 드론 쇼와 함께 팬 퍼레이드, 오케스트라 공연, 샌드 아트, 팝업 체험존까지 풍성한 볼거리가 펼쳐졌다.   한국 스타워즈 데이, 부산서 이틀간 열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광선검을 든 ‘K-제다이’ 신화를 쓴 배우 이정재.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가 올해 스타워즈 데이 행사를 키운 건 배우 이정재가 출연하는 8부작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 1, 2회가 6월 5일  전 세계 동시 공개되기 때문이다. 한국 배우 최초로 스타워즈에 출연해  ‘K-제다이’ 신화를 쓴 이정재. 그가 활약하는 ‘애콜라이트’는 평화를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단의 황금기로 불리던 시대에 제다이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그 뒤에 숨겨진 비밀과 새롭게 떠오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다. 9개월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촬영을 마친 이정재가 맡은 역은 뛰어난 무술 실력과 지혜로 제자와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제다이 마스터 ‘솔’. 5월 4일 부산 해운대 스타워즈 데이 행사장에선 ‘마스터 솔 이정재 스페셜 영상’이 선공개 됐고, 이정재가 직접 무대에 올라 스페셜 토크도 진행했다. 다음은 중앙SUNDAY가 이정재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다.   영화 ‘스타워즈’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렸을 때의 충격은 컸죠. 이게 과연 영화가 맞나? 스타워즈 시리즈가 70년도부터 지금까지 영화 역사상 가장 큰 IP로서 게임, 피규어·광선검 등을 비롯한 완구, 체험 테마파크까지 다양한 산업과 협업하고 애니메이션·TV 시리즈로도 확장되는 것을 보면 많이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의욕도 생기죠.”   루카스 필름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아카데미·에미상 수상자, 전 세계 톱 스태프들이 함께했는데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진짜 심사숙고하고 집중하는 게 현장에서 느껴졌어요. 대본에 적힌 지문 한 줄, 대사 한 줄도 누구 한 명 함부로 바꾸지 않고 함께 상의하죠. 70년대부터 시작된 전체 이야기의 흐름과 맥이 닿아 있는지,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노력들 덕분에 스타워즈의 가치가 여전히 빛나는구나 생각했죠.”   ‘애콜라이트’스틸.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애콜라이트’는 에미상 후보에 올랐던 시리즈 ‘러시아 인형처럼’의 레슬리 헤드랜드가 연출을 맡았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도 쟁쟁하다. ‘당신이 남긴 증오’ ‘헝거게임’의 아만들라 스텐버그, ‘퍼펙트 스트레인저스’의 매니 자신토, ‘히스 다크 마테리얼’ ‘로건’의 다프네 킨 등 할리우드 대표 명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들이 이정재와 함께 앙상블을 펼친다.   영어 연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내게 주어진 대사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가 아니니까 작품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역할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캐스팅이 결정된 다음 8부작 시리즈의 대본을 보고 ‘이렇게 많이 나온다고? 이렇게 대사가 많다고? 이거 큰일 났다, 못한다고 해야 되나’ 생각이 많았죠. 솔직히 스크립트를 해석해서 읽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스타워즈 시리즈의 내용을 다 알아야 인물 캐릭터 간의 역학 관계나 상황을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는 스타워즈 사전을 봐야만 알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일반적인 일상을 다루는 감정 신들이 아니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들 간의 대칭, 이런 것들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고민하는 게 쉽진 않았죠. 촬영이 끝나도 계속 영어 레슨이 필요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내달 5일 1·2회 전 세계 동시 공개   캐스팅 제안을 받고 ‘광선검을 어떻게 거절하냐’ 했다죠. “‘광선검을 쓰는 역할이냐, 안 쓰는 역할이냐? 쓴다면 어떤 색깔이냐?’ 물어봤더니 딥 블루라고 하더군요.(웃음)”   K콘텐츠·K무비 글로벌 확산의 선두주자인데 부담감은 없나요. “현재를 최대한, 최대치로 잘 해내자는 생각뿐이에요. 내가 충실하게 한 작품을 끝낸다면 그 콘텐트는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스타워즈를 시작으로 ‘오징어 게임2’도 나올 거라 미국에 와서 중요한 미팅을 하자는 제안이 많아요. 해외 작품에 출연하는 건 의미 있고 소중한 경험이니 감사하죠. 더불어 한국에 직접 와서 촬영하는 해외 합작영화들도 많아져서 한국 콘텐트가 호평 받는 기회가 늘어나길 바래요. 제가 기획 혹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그런 것들이죠. 외국 배우들이 한국에 와서 벌어지는 일들…쉽지는 않은데 지금이 시도하기에 좋은 때가 아닌가 싶어요.”   정우성씨와 더불어 ‘매력적으로 참 잘 늙어가는 배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말씀 들으려고 관리도 하고, 더 노력도 하죠. 저도 안성기 선배 같은 훌륭한 선배님들을 보면서 저렇게 멋진 배우로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으니까요. 우리 세대 배우들을 롤 모델로 삼는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계속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요.”   늘 패션 감각이 뛰어납니다. “해외 팬들 중에는 한국 셀럽들이 뭘 입고, 어떻게 꾸미고 나오는지 관심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요. 우리 어렸을 때 홍콩 배우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이젠 한국 배우들이 참 세련되고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콘텐트든 스타일이든 이야기의 중심이 한국이 됐으면 하죠.”     ■ 영화 의상 원단까지 고증해 입는다…스타워즈 글로벌 팬 조직 ‘501군단’ 「 지난 4일 부산 해운대에선 스타워즈 데이를 맞아 ‘501군단’ 퍼레이드 등이 펼쳐졌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스타워즈 데이’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다스베이더, 스톰트루퍼 등 영화 속 의상을 똑같이 입고 등장하는 팬들의 코스튬 퍼레이드다. 그 중에서도 ‘501군단’은 미국에 본부를 둔 글로벌 팬 조직으로 유명하다. 해운대 스타워즈 데이 때도 거리 퍼레이드로 큰 박수를 받은 501군단의 김유미 한국 지부장과 ‘팬 소장품 전시’ 부스에서 각종 의상과 무기를 선보인 김현도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501군단 명칭의 유래는. “영화 속 다스베이더의 직속 부대 이름을 땄다. 2017년 미국 본부의 승인을 받은 한국 지부 멤버는 32명이다.”(김유미)   멤버들은 미국 본부의 승인을 받은 의상만 착용해야 한다던데. “영화의 고증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원단과 재질, 심지어 의상에 달린 작은 소품의 위치까지도 고증에 맞아야 한다. 모두 개인 소장품으로 그래서 군단에 들어오기 굉장히 까다롭고, 그만큼 열정이 엄청난 분들이 모였다.”(김유미)   부스 전시품들은 어떻게 수집했나. “키트를 구입해 직접 만든 것들이다. 해외에는 스타워즈 팬들이 많고, 그들이 영화 스크린 샷을 하나하나 찍어서 무기나 의상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하고, 키트를 만들어 판매도 한다.”(김현도)   지난 4일 부산 해운대에선 스타워즈 데이를 맞아 드론 쇼 등이 펼쳐졌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정기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 “비영리 목적의 집단이라 스타워즈 데이, 각종 영화제 참여뿐 아니라 봉사·기부 활동도 자주 한다.”(김유미)   악역인 다스베이더의 부대가 봉사활동을 한다니 재밌다. “우리의 모토는 ‘Bad Guys Doing Good(나쁜 놈들이 좋은 일을 한다)’이다.”(김현도)   땡볕에서 마스크 쓰고 고생하던데. “짐이 많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힘들지만 다들 열정이 많아서 행사가 끝나면 엄청난 보람을 느낀다.”(김유미)   스타워즈의 매력은 뭔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트가 다 들어있다. 광선검 같은 소품부터 로봇·우주·외계인이 등장하고 사랑과 선과 악도 있다. 오래 전 시리즈를 보면 20~30년 전 작품이라 요즘 눈높이로는 특수효과가 올드해 보일 수 있지만 스토리, 캐릭터 등 다양한 매력이 있는 작품들이라 일단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김현도) 」        부산=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5.11 00:38

  • '자식 부자'에게 온 정부 초청장…의령 10남매 놀란 '깜짝 선물'

    '자식 부자'에게 온 정부 초청장…의령 10남매 놀란 '깜짝 선물'

    박성용(왼쪽 셋째)·이계정(왼쪽 일곱째)씨 부부와 10남매가 3일 경남 의령군 의령예술촌에서 ‘다둥이 밴드’ 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손을 맞잡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자 도시’로 불리는 경남 의령군에는 자녀를 10명이나 낳은 ‘자식 부자’가 있다. 박성용(50)ㆍ이계정(48)씨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그동안 이들 부부와 10남매에게 어린이날은 평일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가족이 움직여야 하는 등 여러 가지 형편상 가족끼리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기 힘들어 평소처럼 지낸 경우가 많아서다.   그런데 올해는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을 받게 됐다. 보건복지부가 ‘제102회 어린이날 행사’에 두 부부와 10남매를 초청하면서 1박 2일간 서울 나들이를 가게 됐기 때문이다. 박씨는 “아이들 열 명 생일 챙기기도 힘든 상황이다 보니 어린이날에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며 “그런데 올해 어린이날에는 정부 초청으로 가족 전체가 오랜만에 서울 여행을 가게 돼 모두가 설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오후 박씨 집에 들어서자 현관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신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책이 잔뜩 꽂힌 책장으로 둘러싸인 거실에는 지난해 5월 태어난 막내 예빛과 예후(5ㆍ여)ㆍ예율(3)이가 함께 놀고 있었다. 이씨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박씨는 아이들이 거실 곳곳을 뛰어다니자 이름 대신 “8번~” “9번~” 숫자를 부르며 제지했다. 박씨는 “몇 년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마트에 갔다가 여섯째(예명ㆍ12)를 잃을 뻔한 적이 있다”며 “그때부터 어디 이동할 때면 인원수 체크를 위해 번호를 불렀는데 이젠 집에서도 이렇게 아이들을 숫자로 부르고 있다”며 웃었다.   올해 부산 부경대에 입학한 첫째 예서(20ㆍ여)와 김해외고에 다니는 셋째 예훈(17)이 기숙사 생활을 해 집에 없었지만 두 부부와 여덟 명의 자녀만으로도 38평(128㎡)의 집은 꽉 차 보였다. 안방은 박씨 부부와 8번~10번, 남자방은 4~6번(예한ㆍ예권ㆍ예명), 여자방은 2번(예아)과 7번(예령)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옷과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어 간신히 몸을 움직일 정도로 비좁았다. 이씨는 “집은 비좁지만 그 덕분에 가족들끼리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며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많이 낳은 걸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는 서울 토박이다.  2002년 2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둘 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번듯한 직장에 다녔다. 그러다 2004년 맏딸 예서를, 2006년 둘째 예아를 낳았다. 이후 셋째 예훈이를 임신했는데 주변의 반응이 사뭇 냉소적이었다. “서울에서 아이를 셋이나 낳아 어떻게 키우려고 하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았다. 부모님과 친지들도 비슷했다.   결국 이 같은 부정적 시선에 고심하던 박씨 부부는 경남 의령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리기로 결심하게 됐다. 박씨는 “마침 장인 장모께서 한 해 전에 연고가 있는 의령에 내려와 계셔서 이곳에서 함께 살기로 마음먹게 됐다”며 “여기라면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낳아 마음껏 기를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07년 의령으로 내려온 박씨 부부는 이후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일곱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박씨는 “원래는 자녀를 세 명 정도 나을 생각이었는데 아이를 낳을수록 기쁨과 행복도 더욱 커지는 걸 실감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열 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식비만 월 200만~300만원이 들었다. 박씨가 입시학원 등을 하고 이씨는 어린이집 교사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단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가족여행은 커녕 그 흔한 외식조차 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다. 임신과 출산ㆍ육아를 반복하면서 겪은 고통도 컸다.   의령군은 인구 2만5000여 명으로 전남 신안군과 인천 옹진군, 경북 울릉군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소멸 위기’를 겪는 곳이다. 산부인과는 물론 소아청소년과도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창원시와 진주시 등 인근 대도시로 원정 진료를 다녀야 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이가 아파 가슴 졸이며 도시에 있는 응급실로 달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막내 예빛이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심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아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서로서로를 돌보고 챙겨주는 모습은 박씨 부부가 버텨낼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됐다.   이런 가족애는 밴드 결성으로도 이어졌다. 학창 시절 밴드를 했던 박씨는 음반을 내는 게 꿈이었는데 “못다 이룬 아빠의 꿈을 우리가 이뤄주자”며 자녀들이 기타ㆍ베이스ㆍ드럼 등을 들고 피아노를 치는 박씨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2017년부터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다둥이 밴드’를 가족들은 자칭 ‘박성용과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최근엔 의령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나 행사에도 초청을 받아 공연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이렇게 박씨 부부와 10남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응원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한 장학재단에서는 대학에 들어간 예서의 4년간 학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포스코에서는 지난 3월 1박 2일 가족여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의령군도 넷째 예한이 때부터 출산장려금을 지급했다. 정부와 의령군 등에서 매달 나오는 영유아 지원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박씨는 “의령은 삼성 등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주를 다수 배출한 곳이어서 ‘부자 도시’로 불리는데, 저출생 시대를 맞아 10남매를 낳은 우리 같은 ‘자식 부자’도 진정으로 대우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다둥이 가정을 꾸리는 게 진짜 애국하는 길로 여겨질 수 있도록 세간의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어 최근엔 강연도 자주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이들 부부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열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 온 정성을 다해야죠. 그렇다고 소중한 생명을 우리 스스로 거부할 생각은 없어요.” 의령=위성욱 기자 we.sungwook@joongang.co.kr

    2024.05.04 01:28

  • ‘휴진 예고’ 서울아산·성모병원 혼란 없었다…일부 교수들은 피켓 시위

    ‘휴진 예고’ 서울아산·성모병원 혼란 없었다…일부 교수들은 피켓 시위

    울산대 의대 교수들이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신관 앞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어젯밤을 새웠습니다. 하루 쉬고 다시 진료하겠습니다.”   3일 오전 9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의대 교수 50여 명이 병원 신관 앞에서 이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30분 동안 서 있었다. “오늘 휴진합니다” “지친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을 반대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켓 시위에 참여한 홍석경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외상외과 교수)은 “전공의나 인턴 없이 교수 세 명이 번갈아 당직을 서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워야 하는 실정”이라며 피로감을 전했다. 그는 “환자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진료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체력적 한계가 있다”며 “이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창민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원장은 “두 달 넘게 당직을 연이어 하며 버텨왔는데 더 이상은 어렵다”며 “정부가 정원 문제를 풀지 않으면 전공의들이 병원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시위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하루 진료와 수술을 중단한 비대위 소속 교수들은 피켓 시위 후 ‘2024 의료대란과 울산의대 교육 병원의 나아갈 길’이란 주제로 비공개 긴급 세미나도 열었다.   서울아산병원과 함께 서울성모병원 교수들도 휴진하기로 한 날이었지만 다행히 두 병원 모두 큰 혼란은 없었다. 교수들이 개별적으로 휴진에 참여했고, 휴진하는 교수의 경우 같은 진료과목의 다른 교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조치했기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지난주와 동일한 수준의 환자가 진료를 봤고 수술 건수도 비슷하다”며 “휴진 참여율이 크게 높진 않아 예정된 진료와 수술을 차질없이 진행했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도 “교수협에서 개별적 휴진을 권고했지만 병원에 휴진하겠다고 연락하거나 공지한 교수는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휴진 여파가 크게 체감되진 않았지만 내원 환자들은 진료가 미뤄지거나 취소될까 불안해했다. 암 환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아산병원을 찾은 최모(32)씨는   “올 때마다 병원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늘 불안한 상황”이라며 “하루빨리 사태가 해결됐으면 싶다”고 덧붙였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40개 의대와 88개 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7개 병원이 정상 진료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며 “교수님들이 환자들을 뒤로하고 현장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2024.05.04 01:02

  • “살려고 나왔는데 갈 곳 없어요” 가정 밖 청소년 최소 30만

    “살려고 나왔는데 갈 곳 없어요” 가정 밖 청소년 최소 30만

     ━  가정의 달,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가정 밖 청소년들이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강북청소년드림센터] “막막해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어요.”   손에 쥐어진 건 달랑 캐리어 가방 하나와 핸드폰뿐. 김정수(19·가명)군은 고교 3학년 첫 등교일에 자퇴서를 쓴 뒤 그대로 집을 나왔다. 김군은 “부모님이 이혼과 재혼을 거치면서 집안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숨이 너무 막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고, 이럴 바에야 집 밖으로 탈출하는 게 사는 길이다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갈 곳이 막막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청소년 쉼터가 있어 찾아갔지만 임시 쉼터인 이곳의 체류 기한이 최대 7일이라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당장 먹고살 돈부터 마련해야 했던 그는 무작정 식당 문을 두드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고,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쉼터를 소개받았다. 김군은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 나가야 할지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가족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가정 밖 청소년’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소년복지지원법에 따르면 가정 밖 청소년은 가족 내 갈등·학대·폭력·방임이나 가정 해체, 가출 등의 사유로 보호자로부터 이탈돼 있어 사회적 보호와 지원이 꼭 필요한 청소년으로 규정돼 있다.   여성 청소년의 경우 성범죄 등 취약   하지만 정작 가정 밖을 떠도는 청소년이 몇 명이나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조차 집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국회입법조사처가 2020년 11만5000여 명으로 추산했지만 청소년 쉼터 등 현장 관계자들은 “공식 통계엔 잡히지 않는 가정 밖 청소년이 상당수여서 실제로는 최소한 3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이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고민은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가정불화로 중1 때 집을 나온 황찬우(18·가명)군은 “원래 가출을 계획했던 게 아니라 도저히 못 견디고 뛰쳐나오다 보니 당장 잠자리부터 마땅찮더라”며 “게다가 중1은 아동으로 분류되지도 않아 보호 시설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정 안에서 밀려난 청소년들이 가정 밖에서도 밀려나길 반복하는 셈이다.   이들을 수용해 보호하는 시설 또한 태부족이다. 현재 가정 밖 청소년들이 머물 수 있는 청소년 쉼터는 일시·단기·중장기 시설을 다 합해도 전국 138곳에 청소년 자립을 지원하는 자립지원관도 13곳으로 총 수용 인원이 200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2022년 실태 조사에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이 ‘갈 곳 없음(42.4%)’을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가정 밖 청소년은 머물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이들이 가정을 나와 지낸 주요 장소 중 1위는 ‘친구나 선후배집(62.0%)’이었지만 오래 신세를 질 수 없어 대부분의 시간을 건물 또는 길거리에서 노숙하거나 찜질방·고시원·PC방 등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병모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장은 “쉼터 등 보호 시설에 들어와 있는 소수의 가정 밖 청소년을 잘 보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설 밖을 떠돌며 위험한 상황에 노출돼 있는 대다수 청소년을 보호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가정으로의 복귀가 최상의 해법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의 가출 사유 1위가 ‘부모와의 문제(52%)’로 나타나는 등 가정 내 갈등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온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오랜 기간 아동 학대나 가정불화를 참고 참다가 끝내 가출을 결심한 청소년이 상당수”라며 “이들에게 무조건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부처마다 청소년 연령 규정 달라 고충   금전 문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당장 돈이 궁한 가출 청소년들이 원룸을 빌려 함께 생활하는 ‘가출팸’이 급속히 늘면서 사회 문제화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최근엔 이곳에 먼저 자리 잡은 청소년이 나이가 어리거나 연약한 아이들에게 ‘앵벌이’를 강요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황대연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 간사는 “쉽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에 속아 이른바 핸드폰 깡이나 환전 사기에 연루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이렇게 범죄자로 낙인 찍힐 경우 자립은 훨씬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가정 밖 청소년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취약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김은영 강북청소년드림센터장은 “여성 청소년의 경우 집을 나온 사실이 SNS에서 확인되자마자 성적 만남 요구가 줄을 잇는 게 현실”이라며 “당장 생필품을 살 돈도 마땅찮다 보니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만큼 이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시급히 마련돼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쉼터 퇴소 청소년에게 월 40만원의 자립 수당을 지원하는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주거 지원 요건도 완화하기로 했지만 단기적 지원에 치중하는 등 여전히 한계가 뚜렷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처마다 청소년 연령 규정이 각기 다른 점도 걸림돌이다. 청소년 복지시설 관계자는 “아동복지법은 18세 미만, 청소년기본법은 9~24세를 청소년으로 보고 있고 민법은 19세부터 성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니 가정 밖 청소년의 범위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며 “효율적 지원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통일된 대책 마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짚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정책의 사각지대에 소외돼 있는 가정 밖 청소년들을 위한 보다 체계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 가정 밖 청소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사후 관리’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는 미국과 영국의 시스템을 참고할 만하다는 제언도 곁들여진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턱없이 부족한 청소년 쉼터 관리 인력과 예산을 현실화하고 보호 시설 등 인프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 사회가 ‘개울가에 내던져진 심정’이란 가정 밖 청소년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무너져가는 가정을 복원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5.04 00:59

  •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박형준 한동안 뜸했지만 국민의힘 계열에서 ‘소장파’가 의미 있는 목소리이던 시기가 있다. 이른바 16대 국회에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대변되는 젊은 정치인들이 주도했고, 더는 ‘젊지 않던’ 19대까지도 이들은 계속 소장파로 불리며 개혁적인 의견을 내고 변화를 이끌었다.   지금 국민의힘을 대표하는 얼굴 중 상당수가 소장파 출신이다. 박형준(사진) 부산시장도 한 명이다. 17대 국회에서 새정치수요모임(수요모임)을 이끌었다. 대학생 아카데미를 통해 청년 세대에도 손을 내밀었다.   관련기사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박 시장은 2일 통화에서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 ‘첫목회’에 대해 “당이 위기일 때 좀 소장파들이 당의 혁신과 미래를 위해서 움직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반겼다. 그는 “젊은 세대 정치인들이 새로운 혁신을 위해서 움직일 때 그것이 길게 보면 당에 큰 도움이 됐다”며 “2000년대 초반 야당일 때 소장파들의 적극적인 혁신 노력이 집권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랜만의 소장파 움직임이다. “민주당이 당내 민주주의에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많은데, 국민의힘이 당내 민주주의나 활력 측면에선 그런 요소들을 배가할 필요가 있다. 또 여당이지만 입법부 내에선 야당이고 정치적으로는 국민의힘이 큰 위기에 봉착해 있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기존 정치인들보다 더 참신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눈치 안 보고 혁신 노력을 할 수 있는 소장파들의 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쓴소리하는 것만이 혁신과 개혁처럼 해선 안 되고 대한민국의 미래나 정치의 미래를 위해 굵직한 담론을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7대 때도 공동체 자유주의 등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건강한 논쟁의 장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어 당시 박근혜 대표가 혁신위를 만들어 당내 민주주의를 한 단계 크게 진전시키는 계기도 만들었다.”   실제 당시 혁신위에선 당권·대권 분리를 이뤄냈고,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분배·형평을 강조한 경제정책 등을 합의해냈다.  박 시장은 3040과의 소통의 장도 당부했다. 그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를 갖고 답을 찾아내는 소통과 담론의 장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3040과의 소통에 대해 조언한다면. “정책으로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거고, 분명히 세대 인식이나 감각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시정(市政)하면서도 느낀다. 굉장히 이슈에 민감하다. 이들이 민감한 이슈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 세대는 (이들을) 머리론 이해해도 가슴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동시대만이 갖는 고유한 감각을 살려 이슈를 찾아내고 당의 전체 의견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은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할 수 없다.”   과거 소장파들은 간혹 당내 분란을 키운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당 구조나 질서란 게 선수(選數) 위주로 가고 일정하게 권위주의적 성격을 내포해서 일사불란함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압박을 못 견뎌내면 안 된다. 견뎌내는 방법의 하나가 대(對)야당 관계다. 여당이 하고자 하는 정책적 의지를 관철하는 역할도 앞장서서 해줘야 당에서 지지받고 지지자들로부터 칭찬받는다. 대통령에게 대들고 하는 ‘안티’로서만 자리하게 되면 여러 면에서 좋은 효과를 못 가질 수도 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57

  •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총리 관저에서 캐머런 총리와 만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2010년 이래 영국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연 건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이자 현 외무장관이다. 20대 연구원으로 보수당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따뜻한 보수주의’ ‘빅 소사이어티’를 주창하며 당을 현대화했다. 이중엔 보건복지를 강화하고 당내 반발이 강했던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내용도 있었다. 덕분에 13년 노동당 집권을 끝낼 수 있었다. 그 혼자 한 게 아니었다. ‘노팅힐 세트’로 불릴 정도로 자주 어울리던 젊은 보수당원들이 함께했다. 그중 조지 오스본은 캐머런 총리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고 스티븐 힐턴은 뛰어난 선거 전략가로 활동했다.   이들에겐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보수당 당수를 지낸 마이클 하워드다. ‘국민은 커야 하고 정부는 작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불공평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며 기회 균등이야말로 중요한 가치임을 나는 믿는다’ 등 보수주의 강령을 발표한 이다. 그는 당수직을 물러나기 전 캐머런 등 젊은 정치인을 그림자내각에 발탁, 당권 도전의 길을 열어줬다.   관련기사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이처럼 정치적 폐허에서 새로운 비전과 함께 변화의 불꽃이 일고, 때때로 새 리더십으로 이어지곤 한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속 집권으로 민주당이 주춤하던 1985년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중심으로 백인 중산층의 지지 회복을 위한 민주당의 변화가 모색됐다. 새로운 담론으로 무장한 민주당원들은 자신을 ‘뉴 데모크랫’으로 불렀다. 빌 클린턴은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뉴 데모크랫으로 집권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공화당에서도 ‘미국과의 계약’이란 액션 플랜으로 민주당의 40년 하원 지배를 끝냈다.   이재영 국민의힘 서울 강동을 조직위원장은 “성공과 실패의 반복 속에서 시대에 맞는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라며 “지난 10년간 최소한 국민의힘은 그걸 못했다. (담론을 담은) 텍스트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55

  •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  희귀암 극복한 가수 윤도현   그런 목소리가 있다. 거침없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울다가 지쳐버린 외로운 남자처럼, 등 뒤에서 조용히 위로해 주는 친구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들의 공통점은 기교 없이 묵묵하고 담백하다는 것이다. 가수 윤도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다.   20대는 폭주기관차, 지금은 KTX 목소리   3년 여의 암 투병 후 완치 판정을 받은 가수 윤도현은 지난 3월 대구를 출발해 6월 초 서울까지 이어지는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섰다. [사진 디컴퍼니] 지난해 8월, 윤도현은 희귀성 암인 위말트 림프종 진단을 받고 3년의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깜짝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무대로 돌아왔다. YB는 현재 3월 대구를 시작으로 수원·안산·창원·부산·인천 등 전국을 누비며 ‘2024 YB TOUR LIGHT; INFINITY’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종착지는 6월 8·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이다. 오직 음악과 조명만으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포부로 시작된 YB만의 공연 브랜드 ‘LIGHT’에 무한함을 뜻하는 ‘INFINITY’를 덧붙였다. YB만이 할 수 있는 한계 없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강조한 의미다.   방송 출연 외에는 내내 미디어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와 지난달 26일 어렵게 만나 근황에 대해 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건강해 보였다. 콘서트 무대에서도 파워풀한 가창력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건강에 더 신경 쓰니까요. 투어 일정이 주말이라 금요일에 지방에 가면 무조건 호텔에서 8시부터 자요. 공연 끝나면 또 바로 와서 자고. 예전 같으면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했을 텐데 요즘은 공연과 건강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이번 전국 투어에선 특별하게 공감 토크 ‘YB의 DM 레터’ 이벤트를 진행한다. 윤도현의 선후배 뮤지션과 지인들, 깜짝 게스트, 그리고 미리 사연을 보낸 이들이 무대에 올라 ‘공감’과 ‘위로’를 주제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코너다. 암 완치 소식 후 많은 암 환자와 가족들이 SNS에 ‘힘을 얻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윤도현은 사연마다 모두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산 공연에선 11살짜리 초등학생이 무대에 올랐다. 라디오 프로그램 ‘4시엔 윤도현입니다’에 10년 간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사연을 보냈던 학생이다. 윤도현이 공연에 초대했고, 사연을 들은 관객들은 ‘흰수염고래’를 열창하며 소년을 응원했다.   공연이 아닐 때는 새 음반 준비에 몰두한다. 6월쯤 첫 선을 보일 새 음반 장르는 메탈이다. “고등학교 때 ‘단두대’라는 메탈 밴드를 했는데, 80년대 말 얼터너티브 장르가 생기면서 메탈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이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플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메탈 음악을 접하고 완전 빠져들었죠.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그래, 이거다!”   ‘필’은 받았지만 록 밴드 YB에게 메탈은 엄청난 도전이라 음반 작업이 쉽진 않다. “YB 스타일도 아니고, 멤버들 나이가 다 50이 넘어서 체력도 달려요.(웃음) 우리가 알던 클래식 메탈이 아니라 최신 메탈이라 더 어렵고. 에릭 클립톤이 메탈에 도전하는 격이랄까.(웃음) 그래도 모두 의지를 불태우며 맹연습 중이죠. 안 될 것 같은 걸 해내는 게 인생의 큰 재미니까요.”   보컬리스트인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다. YB의 색깔과 새로운 메탈의 접점을 찾으려면 멜로딕한 목소리와 ‘그로울링(낮은 톤으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창법)’이 공존해야 한다. “한 곡에서 보컬리스트의 자아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거죠. 그로울링은 괴물 같은 소리라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KBS 환경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에 출연한 윤도현이 물이 차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며 해수면 상승 위기를 경고했던 장면. [사진 디컴퍼니] 올해 나이 52세. 중년이 된 그는 어떤 고민을 할까. 옆에서 데뷔 때부터 29년을 지켜본 기획사 대표는 “형은 만년 뽀로로”라고 했지만 윤도현의 대답은 딱 대한민국 중년 남자다웠다. “멤버들끼리 만나면 애들 얘기, 교육 얘기, 돈 들어가는 얘기, 건강 얘기.(웃음) 록커도 아빠고, 남편이니까요.”   아빠 윤도현은 요즘 속으로 안절부절 못한다. 스무 살 딸내미가 곧 미국 유학을 간다. 딸이 커가는 세상은 남성 위주의 세상도, 여성이라고 무시당하는 세상도 아니길 바라며 부부의 성을 나란히 붙여 지은 이름은 ‘윤이 정’. 한자로는 ‘정(情)’. 당시 인기였던 초코파이 CF를 보고 지었다. “다른 광고들에 비해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광고였죠. 그 CF만 나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좋았어요. 우리 애도 정을 나누는 사람이길 바란 건데, 이름 따라 간다고 진짜 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어차피 자주 뉴욕을 오갈 거라면 공연을 해도 좋겠다 했더니 “YB의 미국 시장 진출이 시급하다”며 활짝 웃었다.   신해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   추억을 찾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이. 그는 얼마 전 ‘학전 어게인’ 공연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학전은 어머니 뱃속 같은 공간이고, 김민기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시죠. 김민기 선생님은 아프시고, 학전은 없어지고. 리허설 후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데뷔도 전에 윤도현을 알아본 김광석이 자신의 공연에 게스트로 그를 세웠던 공간 또한 학전이다.   어제 10년 전 세상을 뜬 신해철이 AI목소리 모델 ‘AI 신(新)해철’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해철의 생전 육성자료들로 음성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시켰다고 한다. 각별했던 신해철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들려준 일화는 웃기면서도 애틋하다. “해철이 형은 애티튜드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이었어요. 그런 캐릭터의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귀여운 형이었지만요. 술 마시자는 청을 귀찮아서 몇 번 피했더니 집으로 불러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형이 살이 좀 찐 후라 앞치마를 두른 뒷모습이 장모님 같아서 한참 웃었죠.(웃음) 그날 저녁 형 작업실에서 컴퓨터에 담긴 미발표 곡을 밤새 들었어요. 미발표 곡이 무려 200곡이나 된다니 이 형 정말 미쳤구나,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새벽 무렵에는 너무 졸려서 형의 질문들에 대충 대답했어요. 그때 내가 더 잘 할 걸…아쉬워요.”   김광석·신해철 모두 아티스트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선배들이다. 요즘 윤도현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KBS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 촬영 때는 바닷물이 점차 차 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해수면 상승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메탈리카 30주년 앨범 ‘The blacklist’에 참여했던 관련 수익은 모두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기부했다. 라디오에선 ‘가치합시다’ 코너를 통해 청취자들과 함께 텀블러 쓰기, 세제 물에 풀어 쓰기, 계단 오르기, 일회용품 사용 자제 등 일상 캠페인도 벌인다. “무분별한 난개발들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으니 안타깝죠. 이제 단순히 보호·보존 차원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지구인 전체가 노력하고 연구할 때에요.”   올해는 YB가 결성된 지 29년이 되는 해다. 외국의 60~70대 밴드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밴드가 있기를 바라고, 그 기대를 YB에 걸어보는 이들이 많다. “데뷔 후 4년 간 앨범을 계속 발표했지만 히트곡이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 했죠. 사람들이 한 곡도 모르는 앨범도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했어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쏟아 붓는 음악, 이런 음악이 우리를 오래 지탱해 준 코어 근육 같은 존재죠. 꾸준히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오래 갈 수 있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다. 29년 동안 늙지 않는 목소리의 비결이 뭘까. “변했어요.(웃음) 20대 때는 폭주기관차 같았는데 지금은 KTX에요. 20대에는 투박하지만 불을 활활 태워가며 막 달렸다면, 지금은 뭔가 힘이 달리니까 노련미와 기술의 힘으로 보완하는 거죠.” 세월이 다듬은 윤도현의 진짜 목소리를 확인하려면 공연장에 가야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5.04 00:29

  •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  [비욘드 스테이지]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배우 이영애의 최근작 ‘마에스트라’는 기대했던 음악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남성중심으로 돌아가는 클래식 업계에서 고독한 여성 리더의 포스를 뿜어내는 이영애의 냉철한 카리스마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젠더 파괴의 시대에 아직 ‘남성적 세계’가 좀 있다. 음악에선 대표적인 게 오케스트라 지휘다. 힘자랑을 하는 일도 아닌데 아직 남성 비율이 절대적이다.   한양대 대학원 ‘지휘전공 1호’로 유명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지난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 시즌 개막작 ‘라트라비아타·춘희’를 4일간 이끈 마에스트라는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손지훈,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김기훈 등 초특급 오페라가수를 비롯해 2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1900년대 경성 배경으로 옮긴 낯선 무대에서 베르디의 음악을 역량껏 펼칠 수 있게 한 것이 그의 리더십이었다. “각색된 무대가 연주자들에게 쉽진 않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음악의 템포와 호흡도 다르거든요. 그래도 너무 좋은 가수들을 만나서 즐거웠어요. 사실 교향악 지휘가 훨씬 편하지만, 저는 오페라 지휘를 더 좋아하죠. 많은 분야 사람들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성공적인 무대를 향해 가는 게 재밌잖아요.”   오페라 공연에선 흔히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솟은 지휘자의 뒤통수가 보인다. 여자경은 뒤통수 대신 열정적인 지휘봉만 보이는 작은 체구다.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지휘전공 1호’로 유명한데, 당시 대학원에 없던 지휘과 개설의 계기가 되서다. 그런데 지휘자가 되려고 지휘를 전공한 건 아니라니, 반전의 연속이다. “오페라 때문에 지휘공부를 하게 됐어요. 대학 오페라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했는데 성악가들 코칭하는 게 재밌더군요. 지도교수님이 오페라를 하려면 지휘를 해야 한다면서, 본인 경험을 살려 커리큘럼을 만들어주셨죠. 여자로서 승산이 있겠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저는 지휘자가 되려던 게 아니라 지휘라는 학문이 궁금했어요. 오페라 코치나 교단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죠.”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무대를 지휘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린 알솝이 런던 음악축제 BBC 프롬스 폐막 공연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오른 2013년 이래 세계 주요 무대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성시연·김은선·장한나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여성도 꽤 있다. 여자경도 2020년 클래식 전문지 객석이 꼽은 ‘세계의 파워 여성지휘자 16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1990년대만 해도 성공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배움의 장도 좁은 시절이었어요. 빈에 유학을 간 것도 내가 잘 배워서 좋은 지휘자 육성을 하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학교가 아니라 연주 쪽으로만 기회가 이어지더군요. 그렇게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무채색 일상복 차림의 그는 얼핏 중성적으로 보이고, 목소리 톤도 아주 낮았다. 그런데 지휘의 영역이 ‘남성적 세계’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성이라 특별할 건 없다고 했다. “남자였으면 좀 편하게 했을텐데 하는 생각은 가끔 해요. 출장을 가도 남자들은 짐싸서 가면 되는데 나는 아이의 일주일 먹거리를 다 준비해놓고 가야하니까요.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럴테죠. 사실 올해 아이가 스무살이 돼서 조금 자유로워졌지, 그동안 애 밥 챙기느라고 쪽공부하면서 살았거든요. 모든 걸 다 직접 해 먹이는 편이라 해외에서 콜이 와도 못갔어요. 일 욕심도 많지만 엄마가 1순위란 생각으로 살았으니까요. 엄마가 지휘하는 거죠 뭐.(웃음)”   엄마의 그림자를 드러내니 솔직히 마에스트라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십명 연주자를 일사불란하게 단결시키려면 ‘마에스트라’의 이영애나 영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강인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은데, “나는 포디움 위아래가 똑같다”고 답한다.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면 다시는 콜을 못 받아요. 같은 동료인데 내가 지휘라는 파트를 맡은 것일 뿐,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게 지휘자 역할은 아니죠. 소통이 정말 중요하고, 단원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아요. 단원들을 음악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지휘자의 카리스마죠. 지휘자 말이 맞다고 느껴야 소리를 내니까. 그러니 포디움 위에서 나 자신이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최근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지휘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라 여자경. 10일 대전시향 40주년 특별 공연을 직접 지휘한다. [사진 대전시향] 같은 악보라도 지휘자에 따라 다른 음악이 탄생하니, 방점은 악보 해석에 찍힌다. 해석의 기준은 “악보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란다. “악보의 70~80프로는 누구나 생각하는 정답이 있고, 나머지 20~30프로를 지휘자 해석으로 제안하게 돼요. 작곡가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악보에 마킹한 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남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걸 찾아내서 그대로 실현에 옮기기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내 색채를 입히는 정도죠. 그랬을 때 연주자들이 동조하게 하는 게 지휘자 역량이고요.”   지난해부터 그가 이끌고 있는 대전시향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10일에는 40년 전 창단 연주를 오마주한 특별 공연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5번을 직접 지휘한다는데, 그의 해석은 뭐가 다를까.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3악장에 왜 왈츠를 썼을까. 아직 요한 스트라우스가 살아있었고, 파티장에서 왈츠 추는 게 한창 유행이었기에 가져왔겠지 하고 유추를 해봐요. 후원자에게 5번 교향곡이 실패작이라고 털어놨던 만큼 전반적으로 우울한 모티브가 깔려있는데, 3악장만 유독 밝은 이유죠. 그런 걸 알고 접하느냐 아니냐는 사운드를 만들어갈 때 굉장한 차이거든요. 그런 보이지 않는 악보의 비밀에 예민하게 접근할 때 나만의 색채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죠.”   그러고보면 지휘자란 센 직업이 아니라 굉장히 섬세한 일이다. 차별화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게 다양한 오케스트라의 존재이유라서다. “예전에야 권위적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게 카리스마인줄 알았지만, 요즘 그렇게 하면 다 도망가지 누가 따르나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이 멋있긴 해도 2024년에 그렇게 하면 지휘 못해요. 물론 단체를 끌고 갈 때 민주주의를 완전히 내버려두면 하나로 가져갈 수 없고, 1%의 독재가 가미되어야 하는 건 맞아요. 그 1%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만한 책임감이 있어야 리더라 생각해요. 좋은 건 너희 덕이고 안 좋은 건 내가 책임진다. 그 마음가짐이 지휘자 자격요건입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04 00:27

  • 이 해맑은 웃음 사라져간다…경수초교 마지막 어린이날

    이 해맑은 웃음 사라져간다…경수초교 마지막 어린이날

     ━  초저출산 시대의 5월 풍경   3일 경기도 안산 경수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장래 희망을 그린 캐리커처를 들고 있다. 전교생이 87명인 이 학교는 내년에 인근 경일초등학교와 통합한다. 최기웅 기자 “선생님! 선생님은 왜 새로운 학교로 저희랑 같이 안 가세요?”   어린이날을 앞둔 3일, 아이들의 깔깔 웃음이 넘쳐나도 모자란 날.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웃음 너머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어쩌죠?” 어린 학생이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채 묻자 담임 선생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렇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 선생님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할 거야. 즐거운 추억도 늘 같이 쌓아 갈 거고.”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경수초등학교. 87명의 재학생은 올해 이 학교에서 마지막 어린이날을 맞이한다. 내년 3월부터는 같은 성포동에 있는 경일초등학교와 통폐합되기 때문이다. 2000년 개교한 지 25년 만에 학교 문을 닫는 셈이다. 초등학교 이름도 ‘경수’ 대신 ‘경일’로 통일되고 지금의 학교 공간도 추후 다르게 바뀔 예정이다.   내년이 되면 정든 아이들과 헤어질지 모르는 담임 선생님은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쩌면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경수초등학교’도, ‘담임 선생님’도 아예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들을 위해 작지만 마음을 담은 ‘마지막 어린이날’ 행사를 마련했다.   “와, 나랑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연도별 초등생 수 쓱싹쓱싹. 지난 2일 캐리커처 작가 네 명이 경수초등학교를 찾아 아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학교 통폐합 예산을 활용한 첫 행사였다. 멋진 그림이 완성되자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3학년 남학생 한 명이 “나도 아저씨들처럼 훌륭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거야”라고 외치자 곁에 있던 친구가 “나는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맞장구쳤다. 꿈에 더해 학교에 대한 추억을 심어주는 행사였다.   이렇게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고 어울림을 배우는 터전인 초등학교가 위기에 봉착했다. 2000년 경수초등학교 개교 당시 합계출산율(15~49세 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1.48명에서 지난해 0.72명으로 절반 이상 급감하면서 학령인구 또한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초·중·고교생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 수는 2028년이 되면 200만 명을 밑돌아 187만580명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70년 574만9301명의 3분의 1도 안 되고 올해 248만1248명보다도 25%나 줄어든 수치다. 초·중·고교 전체 학생 수도 올해 513만여 명에서 2026년에는 483만여 명으로 줄면서 500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통폐합이 불가피해졌고, 그 와중에 매년 10명 안팎이 입학하던 경수초등학교도 통폐합 대상에 포함되게 됐다.   같은 학교로 거듭나게 되는 경일초등학교와는 걸어서 고작 7분 거리.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마음속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두 학교는 ‘어울림 행사’를 준비했다. 일종의 ‘통폐합 연착륙’ 기획이었다.    ━  3년간 전국 초·중·고 72개교 통폐합…수도권에서도 13곳     ‘어울림 행사’는 두 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몸을 부대끼며 어울리는 자리로 마련됐다. 지난달엔 두 학교 2학년과 3학년생이 학교 근처 노적봉에서 같이 게임도 하고 생태 체험도 했다. 2학년 남자 어린이는 “학원에 함께 다니는 친구도 있고 해서 크게 낯설지 않아 다행이었다. 같이 게임을 하고 나니 경일초등학교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며 웃었다. 반면 5학년 여자 어린이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자니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그냥 쭉 여기서 공부하다 졸업하고 싶다”며 우려를 나타내 대조를 이뤘다.   학부모들도 걱정스러운 모습이었다. 1학년생 학부모인 이모(42)씨는 “아이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가 적응하고 있는 참인데 내년엔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니”라며 “저도 새 학교에서 새 부모들과 인간관계를 쌓고 적응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3학년 최윤선 선생님은 “오는 7월에는 체육대회도 열고 함께 땀을 흘리며 더 친해지는 자리를 가져볼 계획”이라고 전했다.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3일 오전 9시. 최인옥 교장은 ‘마지막 어린이날’ 조회 방송을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서다. 이옥경 교감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학생 수가 줄수록 수월한 측면도 있겠지만 학교의 존속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인 만큼 심각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저출산뿐 아니라 맞벌이가 아니면 아이를 키우기 힘든 현실에 방과 후 학교 강사 문제도 있는 등 여러 요인이 겹치다 보니 학교 통폐합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라며 아쉬워했다.   학교 통폐합의 파도는 인구가 적은 지역을 넘어 수도권까지 몰아닥쳤다. 지난 3월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으로부터 받은 ‘2021~2023년 통폐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1년 24개교, 2022년 27개교, 2023년 21개교 등 최근 3년간 72개 초·중·고교가 통폐합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를 포함해 수도권에서도 13곳이 통폐합됐다.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너무 급격히 변하는 가운데 물리적 공간으로서 고향이란 의미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며 “그나마 심리적 고향으로 인식되는 학교가 사라진다는 건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고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진단했다.   경수초등학교 출신인 이서우(28)씨도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학교 앞을 지나며 괜히 코흘리개 때가 생각나고 그랬는데 뭔가 휑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학교 근처에서 14년간 꽃집을 운영해온 김모(57)씨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꽃을 사러 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 이러다 학교가 없어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현실로 닥칠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잊혀진 고향처럼, 경수초등학교라는 이름은 이제 졸업 앨범과 졸업장에 박제된 채 남게 됐다. 하지만 지금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되면 또 다른 ‘경수초등학교’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아쉬움이 그리움으로 남는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고. 올해 졸업생 한 명이 통폐합 소식에 말을 남겼다. “앞으로도 선생님 엄청 뵙고 싶을 텐데, 어쩌죠?”  안산=원동욱 기자, 김홍준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4.05.04 00:14

  •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  여당 3040 모임 ‘첫목회’ 4인, 보수정치의 미래를 고민하다    보수 정당은 총선 기준으로 12년간 정치적 황무지(political wilderness)에 머문다. 지금대로면 더 오래일 수 있다. 보수를 지지하는 세대가 퇴장하고 반목하는 세대는 다수가 된다. 여당으로 정책(미래)을 말할 수 있는 이번에도 심판(과거)에 집중할 정도로 당력도 한계다.   지난 2일 첫 공개 세미나로 활동 개시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첫목회’회원들. 왼쪽부터 이종철·한정민·이재영 조직위원장과 김재섭 당선인. 최기웅 기자 이런 속에서도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첫목회’로 대부분 수도권 등 험지에서 출마한 3040들이다.  “전사(戰死)는 했지만 정치적 에너지는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때”(박상수 인천 서갑 후보)란 이들이 2일 공개 세미나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앞선 지난달 27일 김재섭 서울 도봉갑 당선인과 이재영(서울 강동을, 간사)·이종철(서울 성북갑)·한정민(화성을) 조직위원장을 만나 생각을 들었다. 중도와 젊은 층을 향한 새 정책을 만들어내겠다는 이들은 “당의 주력인 영남 원내 계신 분들이 쓴 약과 독약은 구분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우린 절대로 독약이 아니다”라고 했다.   어려운 선거였다. 김재섭=“후보들이 다 무기력감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바람이 너무 셌다. ‘당신은 좋은데 당신 당은 못 찍겠다’는 말을 한 번씩은 들어봤을 텐데 개인적으로 제일 힘 빠지는 얘기였다. 내 노력과 무관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이종철=“3월 초중반이 되면서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도 사전투표 후 주말에 사람들이 모이는 천변에 갔는데 저를 찍었다는 분이 많아 일요일엔 세 봤다. 10명 중 7명 정도였다. 결과적으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분들의 무서운 민심을 확인했다.”   관련기사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수도권에선 양자 구도다. 화성을에선 여당 후보가 3등이었다. 당사자인 한 위원장은 “나중엔 누가 더 싫은가 대결하는 선거였는데 나보다 훨씬 더 잘 싸우는 사람이 지역에 있었다”며 “나를 찍어달라고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고 했다.   인구정치적으로 다음 선거는 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이재영=“지금 상황으로 보면 2년 후에 있는 지방선거에 비관적이고 대선도 연장선에서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당의 저력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수도권에서 뛰었던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선거 결과를 거의 부정하는 것 같은 모습이 비치면서 과연 희망이 있을까 싶다.”   어떤 모습이 그랬나. 이재영=“단편적이긴 하나, 1차 당선자 모임이 축하하는 자리였다고 하더라. 당이 이렇게 돼 있는데 축하할 일인가.”   2월 말 3월 초 대통령실발 논란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김재섭=“그간 누적됐던 것의 기폭제였다. 대표적으로 대파 논란 같은 건데 대통령이 말하고자 했던 건 875원이 아니었다. 충분히 맥락이 있는데 왜곡된 것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화를 낸 건 그간 누적된 불만이 있었다는 거다. 2년 간 국민 불만이 적재적소에 해결되지 않아 총선을 기점으로 다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재영=“정권심판론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 프레임에 빠져서 선거를 치렀다. 결국엔 이조(이재명·조국) 심판으로 갔는데 전쟁터로 치면 그쪽 전쟁터에서 치른 거다. 선거는 당이 치르는 거다. 사람도 없었고 콘텐트도 없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비판하자면 많지만 지금 얘기할 건 당이다. 당이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여전히 2, 3년을 좌우할 건 대통령이다. 최근 윤 대통령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회동하는 등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던데. 김재섭=“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시그널이긴 하다. 그런 변화가 체감되어야 하는 부분에선 아쉬움이 많다.” 이재영=“질문 자체가 다시 대통령에게 뭘 맡기자는 건데 우리 당이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대통령의 변화에 달려있다고 우리가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번 총선에서 몇 가지 체크된 게 있다. 65 플러스(65세 이상)를 빼곤 다 떠났다. 우리 당은 수도권 선거를 치를 전술과 전략이 없다는 것도 확인됐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비전과 방법을 제시하고 토론하기 위해 첫목회가 결성된 것이다. 대통령을 바꾸기 위해, 대통령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결성된 게 아니다. 우리 걸 가지고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대통령이 잘하면 당이 잘 되겠다, 그걸 기대하면서 정치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종철=“민주화가 심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야당보다 여당이나 권력자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게 매우 엄격한 기대를 가졌다. 윤 대통령이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문제가 나왔을 때 즉각적으로 사과를 했다면 우리가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제일 중요한 게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 소통과 공감 능력이고 세 번째가 무능이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들어오면서 (유권자들이) 흡족하지 않지만 넘어가려던 게 윤 대통령의 TV 대담 등 대응 모습을 보며 이전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이거 안 되겠구나’ 해서 쏠렸던 것 같다. 당이 따로 가더라도 대통령과 관련되어서든, 당의 직접적인 것이든 공정과 상식, 공감·무능에서 차별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대통령이 국민 보기에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당이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국민의힘 계열엔 이전에도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대표되는 개혁성향의 소장파 움직임이 있었다. 최근 7년여 미약했지만 말이다.   기후·젠더·환경 등 새 담론 제시해야   지금 첫목회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나. 이재영=“우리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당을 어떻게 해서든 수도권 중심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총선 3연패라지만 서울만 따지면 4연패다. 수도권에서 인재영입이 굉장히 힘들어졌고 수도권 어젠다가 보수 진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래연대나 민본21이 있던 때엔 소장파가 말하면 들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네 번 선거에서 지면서 어젠다와 이슈,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 몰리면서 들어줄 준비가 사라진 것 같다. 당내 쓴소리를 ‘잘되라고 하는 얘기’로 듣는 게 아니라 ‘내부총질’로 설명해버리는 굉장히 이상하고 배타적인 문화가 생겼다.” 한정민=“(국민의힘이) 우리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더 많이 공부해서 지선이든 대선이든에서 말해주고 싶다. 사실 젊은 친구들이 우리에게 감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걸 흡수하지 못할 뿐이다. 2030에게 어젠다를 주고 싶고 이들이 활동할 단체들이 보수 진영엔 거의 없는데 그런 걸 만들고 싶다. 지금은 자리가 없어서 함께 가는 동지가 아니라 서로 (한정된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다. 각자도생해야 하니 장기적으로 하기도 어렵다. 사람이 없다는데 사람을 키우지 않으니 없는 것이다. 청년 생태계를 양성해야 한다. 우리가 정부일 때 하지 않으면 다음 총선은 물론 다다음 총선도 어려울 것이다.” 김재섭=“보수 정당이 20대 이하의 유권자에 매력적인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는 큰 문제다. 예를 들어 반공 보수, 경제 만능 보수, 이건 5060 이상엔 호소력 있을지 몰라도 (그 아래엔) 잘 피부에 안 와 닿는다. 그런 세대엔 그다음 담론을 제시해야 되는데 이민문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20대 반중 정서를 우리가 적절하게 핸들링할 수 있는가 등이다. 기후·젠더·환경 담론도 없다. 이들이 우리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표를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거다. 담론을 생성하는 기능을 첫목회가 해야 된다고 본다. 끊임없이 20대가 우리한테 표를 줘야 하는 이유를 개발하는 역할이다.” 이종철=“서울에선 민주당과 표차가 지난번보다 줄었다. 어찌 보면 국민이 (표를) 주려고 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소중하게 봤으면 좋겠다. 혁신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성찰하며 국민의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 수준에 맞추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간다면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초선 중 다수가 대통령을 두둔하는 연판장을 낸 게 논란이었다. 한정민=“우리 슬로건이 일단빡공, 일단 빡세게 공부다.”   이렇게 하면 다음에 될 거라고 보나. 이재영=“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음에 안 된다. 22대 국회 구조상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같은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1대보다 훨씬 더 힘든 여소야대가 될 텐데, 현역 분들은 정치 상황에서 벗어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첫목회는 자주 모여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좋은 콘텐트를 만들어내 당에 전달하고 보수 진영을 포함한 일반 대중에게도 오픈될 것이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12

  • 서방의 '캔슬컬처' 사태에도 웃고 있는 친 푸틴 예술가들

    서방의 '캔슬컬처' 사태에도 웃고 있는 친 푸틴 예술가들

     ━  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예술밖에 난 몰라.” 정치권력의 변화나 사회흐름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아티스트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과연 그럴까. 특히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는 클래식 업계는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지금 세계 클래식 공연예술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함의를 업계 전문가의 눈으로 파헤친다.  -편집자 주     4월 예정됐던 내한 공연이 취소된 ‘푸틴의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 Vladimir Fridkes] 지난 4월 예정됐던 볼쇼이 발레단 관련 두 개의 내한 공연이 무산됐다.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군무진이 출연할 예정이던 ‘모댄스’(17~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볼쇼이의 신성’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등 수석 무용수 6인이 등장하기로 했던 ‘발레앤모델 슈퍼 발레 콘서트’(16~1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가 각각 ‘관객과 아티스트 안전’ ‘공연 변경 신청 심의 부결’을 사유로 취소됐다.   두 공연의 연이은 취소 사태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3월 4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이들 공연이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같은 달 15일 자하로바 공연이 전격 취소됐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문화예술분야 협력이 정치적 게임의 인질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논평을 냈고, 발레앤모델 볼쇼이 발레 내한을 두고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두 한국 정부와 민간 반응을 살폈다. 결국 이 공연도 취소에 이르자 러시아 외무부는 현지시간 19일 대변인 논평으로 “한국의 러시아 문화 말살이 계속되면 가시적 보복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반발했고, 27일에는 미국, 한국 등 비우호국을 대상으로 수입 관세를 인상했다. 29일에는 친 우크라이나 성향의 재한 러시아인 그룹이 5월 예정된 친푸틴 바이올리니스트 스피바코프 내한공연 취소 집회를 잠실에서 열었다.   전쟁 틈타 마린스키·볼쇼이 통합 관철   게르기예프(오른쪽)와 함께 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 러시아 대통령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에서 ‘모댄스’ 상연이 어려운 건 통합 러시아 의원으로 활약한 ‘친 푸틴’ 무용수 자하로바의 전력 때문이다. 대 러시아 제재에 참여한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2014년 3월 크림반도 합병 지지 공개 서한에 서명한 러시아 예술계 인사 511명의 공연 비자 발급을 뒤늦게 불허한다. 자하로바를 비롯해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비올리스트 유리 바쉬메트, 바이올리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의 서방 공연이 애초에 불가능한 연유다. 반면 우리 정부는 명단에 오른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자하로바의 공연 비자 발급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공연 취소 논란과 외교 공방의 빌미를 줬다.   ‘발레앤모델 슈퍼 발레 콘서트’ 같은 갈라 형태의 볼쇼이 발레단 행사도 러시아 밖에선 노골적 친러 성향의 벨라루스, 중동 균형추 역할의 오만 무스카트에서나 열렸다. ‘푸틴의 오른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에 이어 지난해 12월 볼쇼이 극장 총감독에 오르자 서방의 볼쇼이 보이콧 흐름은 더 선명해졌다. 1956년 이래 볼쇼이 발레단을 정기적으로 초대한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러-우전쟁 확전 직후 볼쇼이 발레단의 2022년 방영(訪英)을 취소했고 재초청 기약도 없다. 1957년 시작된 볼쇼이 발레단 일본 투어도 2017년을 끝으로 코로나 팬데믹, 러우전쟁 여파로 중단됐고 재개될 조짐은 없다. 영국 오페라하우스부터 일본 에이전시까지, 지금은 볼쇼이 보이콧을 최소한의 윤리적 도리로 본다.   현 시점, 볼쇼이 발레단 아시아 투어의 잠재 파트너는 러시아 우방인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국가대극원, 홍콩 아트페스티벌 정도다. 그런데 투어가 국가간 교류성 사업으로 진행되면 통상적으로 국립 예술 단체 개런티는 민간 초청 때보다 현저히 낮아진다. 볼쇼이 발레단으로선 민간 에이전시가 흥행 목적으로 부를 때 제값을 받는다. 발레앤모델은 국내 매체 인터뷰에서 4년간 볼쇼이 발레단 내한 공연권 독점을 밝혔었다.   볼쇼이 발레단 재정이 건전해지려면 러시아와 서방간 외교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올 가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면 볼쇼이 발레단은 현상 타개를 기대할 수 있다. 러-우전쟁 종전을 시사한 트럼프가 집권한다면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턴 케네디센터에 예전처럼 볼쇼이 발레단이 투어를 나오는 그림을 자연스레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케네디센터에는 러시아 예술 홍보 업적으로 푸틴이 수여한 러시아 정부 메달을 받은 사업가 수전 레어먼이 거액 후원자로 자리 잡고 있다. 볼쇼이 발레단이 미국을 가면, 일본 재팬아츠, 영국 빅터 호흐하우저 에이전시도 볼쇼이 발레단 초청 사업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향후 한-러 관계가 회복돼도 푸틴 정권과 한몸으로 인식되는 게르기예프와의 관계 설정은 유의해야 한다. 과거에 국내 정치권은 게르기예프와 연결에 적극적이었다. 2015년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은 부산 오페라하우스 건설을 논의하기 위해 게르기예프와 만났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게르기예프를 ‘서울 글로벌 대사’에 임명했었다. 2020년대 후반 예상되는 국내 지자체간 오페라극장 건립 경쟁에서 게르기예프는 외교 관계 호전 여부에 따라 다시 인기를 누릴 공산이 크다.   푸틴과 게르기예프는 서방의 러시아 보이콧을 ‘캔슬컬처’로 규정하면서 상부상조하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지난 3월 크로커스 콘서트장 테러 희생자 추모 공연을 지휘했고, 각지에서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축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푸틴 정부는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 예술인 공개서한에 동참한 블라디미르 우린 볼쇼이 총극장장 사표를 수리하고 지난해말 게르기예프를 5년 임기의 신임 총극장장에 임명했다. 서유럽에선 손절당했지만, 게르기예프는 전쟁 덕에 오랜 개인적 염원인 마린스키-볼쇼이 극장 통합을 관철했다.   그뿐아니다. 게르기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 세바스토폴, 칼리닌그라드의 마린스키, 볼쇼이 분관 인사와 프로그램 책임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연장 건설 관련 이권은 가스프롬, 스트로이가스몬타슈 등 친 푸틴 기업이 선점했다. ‘캔슬컬처’를 비난하며 활동 반경은 자국내로 줄었지만, ‘친 푸틴’ ‘친 게르기예프’ 예술가와 업체는 그리 배고프지 않다. 러시아에선 전쟁 중단 서명에 이름을 올린 예술가들이 ‘캔슬컬처’ 최대 피해자들이다.   서방 핍박 받는 이미지 힘입어 앞길 활짝   케네디 센터의 거액 후원자 수전 레어먼(오른쪽)에게 러시아 정부 메달을 수여하는 푸틴. [사진 러시아 대통령실] 러-우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방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한 거물 음악가의 엇갈린 행보도 주목된다. 1972년 모스크바 태생이지만 1990년 독일로 귀화한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현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은 거듭된 반 푸틴 발언으로 고국에선 배신자로 찍혔고 서방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유롭스키는 최근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예술인은 비정치적일 수 없으며 입장 표명은 정치가 아닌 윤리 문제”임을 주장했다. 크림 분쟁 직후 러시아 정부가 시민권을 제안한 사실도 공개했다.   유롭스키는 시민권을 거절했지만, 아테네 출신의 동갑내기 테오도르 쿠렌치스 현 무지카 아테르나 예술감독은 같은 제안을 수용했다. 쿠렌치스는 러-우전쟁 기간, 명시적으로 푸틴 지지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무지카 아테르나가 서방 제재 대상인 VTB은행 지원을 받은 데 대한 입장 요구에 침묵했고, 서유럽 대부분의 공연장에서 퇴출됐다. 그러나 서방에서 핍박받는 이미지에 힘입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마린스키를 승계할 ‘포스트 게르기예프’ 1순위 입지를 확고히 했다. 쿠렌치스도 게르기예프처럼 전쟁을 통해 본진에서 원하는 바를 얻은 셈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열강을 유지하는 방편은 정치적으론 독재정 회귀, 경제적으론 에너지의 무기화, 군사적으론 나토(NATO) 와해, 문화적으론 게르기예프 역할 극대화로 요약된다. 쿠렌치스는 서방에서 러시아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호평받은 게르기예프의 성공 공식을 따랐고, 지금 태도는 ‘전략적 침묵’으로 읽힌다. 게르기예프가 위원장을 맡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한국인 입상자나 그와 정기적으로 연주한 협연자, 마린스키와 볼쇼이 소속 단원 역시 현재의 외교 상황에 소신을 표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로 현재 러시아 공연 예술은 슬라브주의를 숭상하는 전제 군주제 시절로 돌아갔고, 이는 게르기예프가 푸틴과 협력해 일군 생태계다. 러시아의 예술적 정체성은 무엇이고,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장악한 게르기예프와 그의 뒤를 따르는 쿠렌치스가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러시아에선 사실상 토론이 불가능하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사망에 러시아 예술가들의 추도가 공개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마린스키-볼쇼이 통합이 온당한가에 대한 토의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냉전 시절 정치적 박해를 피해 서방으로 이주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처럼, ‘반 푸틴’ 노선을 분명히 한 유롭스키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 푸틴 생전에 모스크바로 돌아가 연주할 날이 과연 올까.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2024.05.04 00:01

  •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  ‘U23 아시안컵’ 명암 엇갈린 한국·인도네시아   아시안컵 8강에서 인도네시아에 패한 대한민국 선수들이 허탈해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돌발 악재라기보다는 예고된 참사였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대표팀(23세 이하)이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를 맞아 졸전 끝에 패하며 파리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놓쳤다.   한국은 2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아시안컵 8강에서 전·후반 90분과 연장전 30분을 2-2로 마친 뒤 승부차기에서 10-11로 졌다. 8강에서 멈춘 한국은 이번 대회 4강 이상에 오른 팀들에게 주어지는 파리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놓쳤다. 파리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겸하는 이번 대회 1~3위는 파리올림픽에 직행한다. 4위는 아프리카의 기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 승리하면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한국 축구가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는 건 지난 1984 LA 대회 이후 40년 만이다. 1988 서울 대회부터 시작한 연속 본선 진출 기록도 9회(세계기록)에서 멈췄다.   후반 추가 시간 레드카드를 받은 황선홍 감독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4위 인도네시아에 덜미를 잡힌 한국(23위)의 부진에 대해 축구인들은 “우려했던 상황이 끝내 현실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준비 과정부터 미흡했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팀 경쟁력을 가다듬는데 전념해야 할 사령탑(황선홍 감독)이 지난달 A대표팀 임시 사령탑 역할을 겸임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황 감독은 주축 선수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태국 원정 경기를 승리(3-0)로 이끄는 등 A대표팀의 급한 불은 껐지만, 정작 본업인 올림픽팀의 완성도는 챙기지 못 했다.   관련기사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플랜B’에 대한 대비도 부족했다. 배준호(스토크시티), 김지수(브렌트퍼드), 양현준(셀틱) 등 해외파 멤버들의 차출이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빈 자리를 메울 대체재를 제대로 확보해두지 않았다. 해당 선수들이 최종예선 개막 직전 줄줄이 불참을 통보하자 부랴부랴 대체 선수들을 발탁했지만, 중앙수비수 숫자가 부족해 대회 내내 수비라인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 황 감독은 다음달 중순께 선임 예정인 A대표팀 정식 사령탑 경쟁에서 한 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대회 실패와 함께 지도자 인생 최대 위기를 만났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A대표팀 임시 사령탑을 선임할 당시 박항서 전 베트남대표팀 감독 등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굳이 황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겨 올림픽팀 경쟁력을 떨어뜨린 대한축구협회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 축구인은 “올림픽 10회 연속 본선행이라는 중대한 도전을 앞둔 황 감독에겐 ‘위기에 빠진 A대표팀을 구해달라’는 축구협회의 요청을 거절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황선홍호가 올림픽 본선행에 실패한 배경에는 감독의 책임감을 이용해 A대표팀을 떠넘기다시피 한 협회의 잘못도 크다”고 꼬집었다.     송지훈 기자 song.jihoon@joongang.co.kr

    2024.04.27 00:49

  • 민희진 “제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민희진 “제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민희진 25일 오후 3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경영권 탈취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혔던 민희진(사진) 어도어 대표가 다음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추가 입장을 전했다. 민 대표는 하이브가 ‘프로젝트 1945’ 문건과 카톡 대화 등 증거 자료를 내놓았다고 하자 “대화에는 문맥이 중요한데 전후 상황이 다 배제된 일면이 있다”면서 “상상이 죄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저 혼자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어차피 하이브 컨펌을 받아야한다”고 반박했다. 어도어의 지분은 하이브가 80%, 민 대표가 18%, 직원들이 2%를 갖고 있다.   관련기사 뉴진스 독창성 베꼈나 안 베꼈나, ‘컨셉트 저작권’이 핵심 ‘신인 걸그룹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는 언급이 불러온 파장에 대해선 “뉴진스가 이전 걸그룹 씬의 이미지랑 다르게 반대로 나와서 화제가 된 팀이고 그게 기성화 되는 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밀도와 지점이 있지 않냐”며 어느 순간 선을 넘었다고 생각돼 이의 제기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순간 ‘내가 죽어야 하나’ 생각할 때 뉴진스 멤버들이 귀신같이 영상 통화를 걸어 함께 울며 ‘사랑한다’고 위로해주니 죽고 싶다는 마음이 빗겨가더라. 얘네가 나를 살렸나 싶고 더 애틋하더라”며 멤버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했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4.27 00:37

  • '팔리는 작품'에 집중, 넷플의 연상호 편애가 불안한 이유

    '팔리는 작품'에 집중, 넷플의 연상호 편애가 불안한 이유

     ━  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연상호 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 [사진 넷플릭스] 요즘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6부작 드라마 ‘기생수’는 3중의 모방 버전이자 확장판 리메이크다. 일본 SF괴수 영화 시리즈인 동명 작품을 가져 왔다. 일본 영화 ‘기생수’는 출판 만화가 원조인데 이 작품 또한 일본의 ‘베끼기’ 특기에 따라 할리우드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 원판은 1956년 돈 시겔이 만든, 이 분야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Body Snatcher)’이다. 돈 시겔 이후 영화계에 ‘바디 스내처’ 장르가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모든 좀비물, 바이러스 영화의 원조 격이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하는 이야기이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누군가, 뭔가에 의해 완벽하게 지배당한다.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날아 온 이상한 꽃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잠이 들면 그 꽃은 인간을 다른 존재로 변이시킨다. 주인공은 잠이 들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넷플서 ‘지옥’ ‘방법 재차의’ 등 선보여   동명의 출판 만화를 실사화한 일본 영화 ‘기생수’. [사진 넷플릭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핵에 대한 공포,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상징화해서 표현해 냈다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돈 시겔은 단순히 한 쪽의 이데올로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한 지배, 그 다른 것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그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매카시즘이 한창인 때였던 지라, 돈 시겔의 속 마음은 나중에 가서야 재평가됐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이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누군가의 지배 의식을 비판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래서 꽤나 양가적(兩價的)이다.   일본영화 ‘기생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갖는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들어냈다. 거기에 일본인 특유의 기벽이자 성벽에 해당하는 괴수 취향을 비벼 넣되 그것을 아예 주가 되게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환호했다. 오다쿠들이 생겨났다. 이번 넷플릭스의 ‘기생수’ 버전인 ‘기생수 더 그레이’를 만든 연상호 감독은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 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식 괴수 영화만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점 하나와, 원본에 해당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 지닌 복잡한 층위의 이데올로기 성향으로도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어려운 정치경제학을 결합시키면 보편성, 대중성을 확장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기생수’는 어느 날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충이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 뇌를 파먹고 변이를 일으켜 괴물로 변하게 한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수민(전소니)은 이 외계 존재에게 완전히 ‘먹히지 않아’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드라마는 내내, 주인공 수민을 둘러싸고 동족이라 불리는 기생수들과 이들을 없애려는 인간들의 전쟁을 그린다. 남일군 남일 경찰서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경감인 철민(권해효)과 경사 원석(김인권)이 갈등을 일으키고 프로파일러 출신의 경정이자 기생생물 전담반인 ‘더 그레이’의 팀장인 최준경(이정현)이 과욕과 집착을 부리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남일군이 고향인 조폭 강우(구교환)의 에피소드가 겹쳐진다. 특이한 것은 이 동족들의 집합 장소가 교회라는 점이고 모임의 방식이 부흥회라는 것이다. 연상호의 트레이드 마크인 종교 비판의 테마가 중첩된다.   모든 좀비물, 바이러스 영화의 원조 격인 1956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 [사진 넷플릭스] 연상호의 대중 전법이야 말로 넷플릭스가 연상호를 ‘최애하는’ 이유이다. 넷플릭스는 연상호와 특이하다 싶을 만큼 잇따라 작품을 내놓고 있는 바, ‘지옥’으로 시작해 ‘방법 재차의’가 있었고, ‘정이’가 있었으며 ‘선산’까지 만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편애하는 수준이며 극한의 정도이다. 특히 넷플릭스 앞에 놓인 국내 영화계의 기획서, 시나리오가 천 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점을 고려하면, 연상호는 넷플릭스로부터 특혜 아닌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넷플릭스는 왜 연상호를 이토록 ‘애모’하는 것일까. 어쩌면 연상호의 작품에 대한 발상, 작업 방식이야 말로 넷플릭스 철학에 최적화 된 무엇일 수 있다. 연상호는 넷플릭스가 추구하는 최적화된 장르영화를 만들고 있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다. 이 전체 시장을 관통시키려면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그래서 어쩌면 덜 철학적이고, 덜 어려우며, 특정의 계급과 계층,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는 논조의 영화를 원한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더라도, 그리고 어떤 나라의 어떤 국민이더라도, 저 얘기가 자신들의 것과 같은 것이라는 동일화, 동조화를 일으켜야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사진 넷플릭스] 그러면서도 동질화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연상호의 끈덕지게 이어지는 좀비물, 종교적 광기에 대한 경계심리 등등 작품적 요소가 전 세계에서 아주 쉽게,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똑똑한’ 연상호는 넷플릭스가 그런 걸 원한다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넷플릭스 측과 늘 절충하되 감독의 자존심도 적당히 내세울 줄 아는 작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상상력을 한국의 CG 능력과 특수효과 기술이 완벽하게 뒷받침 하고 있다. 그가 ‘넷플릭스라는 은하계’에서 거의 최고 등급으로 올라 간 이유이다. 특히 넷플릭스는 현재 동남아 시장, 특히 ASEAN 10개국에서 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현재 동남아 시장 전체 OTT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K-드라마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연상호의 작품이 내놓을 때마다 거의 매번 톱 위치로 오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생수’는 4월 8일 공개된 후 4월 14일까지 일주일 간 980만 뷰를 기록해 글로벌 시청 1위를 기록했다.   ‘기생수’가 평단에서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얻고 있는 것과 달리, 넷플릭스 초대형 블록버스터인 잭 스나이더의  ‘레벨 문’은 망작 중의 망작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두들겨 맞고 있다. 이 작품은 파트 1과 파트 2로 나누어 공개됐으며 ‘파트 2 스카키버’는 최근에 올라 갔다. 파트 별로 약 150분 분량이고 제작비는 약 2억 달러가 소요됐다. 현재 파트 6까지 기획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 쯤으로 여기는 잭 스나이더를 데려와 물심양면으로 그를 후원한 것인데, 한 마디로 ‘앞으로 벌고 뒤로 손해보는 꼴’이 됐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레벨 문’ 망작 평가   넷플릭스 초대형 블록버스터 ‘레벨 문’. 배두나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 넷플릭스] 잭 스나이더의 이 저급한 SF도 ‘기생수’ 처럼 어디서 가져 온 것이긴 하다. 한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다수의 용병들을 선발해서 데려온다는 이야기는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와 판박이다. 아키라의 이 전설적 영화는 안톤 후쿠아 감독이 2016년에 ‘매그니피센트7’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이병헌이 출연한 작품이다. ‘레벨 문’에는 배두나가 출연한다. 넷플릭스의 ‘단순 무식’ 제작 원칙에 따라 ‘레벨 문’에는 ‘7인의 사무라이’가 표방하는 사회적, 개인적 정의의 간극이 어떻게 시대에 따라 변질되는가 따위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초기에 보여 준 예술 지상주의 스피릿이 모두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복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는 초기에 현대 영화사의 전설로 꼽히는 오손 웰즈의 미완성작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을 프로듀서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협업을 자청해 완성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만들어 아카데미 감독상을 타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연상호를 애정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할 것이 아니다. 대대적으로 실패했다 해도 잭 스나이더를 좋아하는 것도 뭐라 할 수가 없다. 다만 작은 영화, 의미 있는 작가영화에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인다. 넷플릭스의 장기 플랜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예술적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초기 넷플릭스의 계획이었다. 스틱 투 더 플랜. 인생이나 사업이나 계획대로 해야 할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2024.04.27 00:19

  •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  ‘U23 아시안컵’ 명암 엇갈린 한국·인도네시아   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 대표팀 감독이 2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아시안컵 8강전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매우 기쁘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론 너무 처참하고 힘들다.”   한국을 꺾고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4강에 오른 신태용 감독이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신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는 2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한국과의 8강전에서 연장까지 2-2로 비긴 뒤 12번째 키커까지 나선 승부차기에서 11-10으로 승리해 4강에 진출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이후 68년 만의 올림픽 본선행 가능성을 높였다. 이번 대회 3위까지는 파리 올림픽에 직행하고 4위는 가나와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인도네시아는 사우디-우즈베키스탄전 승자와 준결승을 벌인다.   반면 한국은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인도네시아에 충격적인 일격을 당하며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신 감독은 4강에 오른 비결에 대해 “4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선수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기부여만 해주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한편 인도네시아축구협회는 신 감독과의 계약을 2027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신 감독은 부임 후 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서 뛰고 있는 혼혈 귀화 선수들을 대거 발탁, 대표팀의 체격과 체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인도네시아 축구를 근본부터 바꿨다는 찬사와 지지를 받고 있다.   신 감독과 인도네시아의 인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맡아 세계 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꺾어 탈락시키는 대이변을 연출한 뒤 쉬고 있을 때였다.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에서 대한축구협회(KFA)로 ‘신태용 감독 연락처를 알려 달라’며 이름을 콕 집어서 문의가 왔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 5전 5패를 하던 중이었는데 신 감독은 ‘인구 수나 축구열기가 나쁘지 않은 나라인데 왜 이렇게 FIFA 랭킹과 축구 수준이 처져 있나.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 2월 잠시 귀국한 신 감독을 만났다. ‘신태용 매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팬들이 한국과의 아시안컵 8강전을 관전하며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현지에 가서 보니까 어떤 문제점과 가능성이 있었는지 물었다. 신 감독은 “선수들이 축구를 20분 정도밖에 하지 않는 스타일과 체력이더라. 체력이 있을 때는 발 기술이 좋아 보였는데 20~30분 지나고부터는 거의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다.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코어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튀긴 음식과 맵고 짠 음식을 주로 먹는 식단부터 바꾸고 웨이트 트레이닝과 코어 훈련에 집중했더니 선수들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스스로 개인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체력을 올린 다음엔 마인드 컨트롤, 즉 멘탈에 집중했다고 한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되고, 거짓말 해선 안 된다는 걸 강조했다. 거짓말이란, 자기가 실수를 해 놓고도 동료가 패스를 잘못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선수들이 시간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겼다. 심지어 대표팀 소집을 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안 온 선수도 있다. 그런 친구들은 다 집에 보내버렸다. 지금은 철저히 규율이 잡혀 있다.”   신 감독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여기에 녹아들려는 ‘존중의 리더십’을 꼽았다. 그는 “무슬림으로서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1%도 터치하지 않고 존중해 줬다. 다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바꿔라’고 요구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목이 타고 힘들어도 물을 서서 마시지 않고 앉아서 마시는데, 신에 대한 존경을 담은 행동이라고 한다. 제발 좀 서서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의 틈을 좁혀가는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중도 퇴진으로 공석이 된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신 감독도 유력 후보로 올라 있었다. 실제로 지난 2월 인터뷰에서 “KFA에서 제안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묻자 그는 “아직 KFA에서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연락이 온다면 그때부터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대표팀을 다시 맡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계약 만료(올해 6월)를 앞두고 일찌감치 신 감독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한국행 가능성은 사라졌다.   신 감독은 “지금 나는 인도네시아 대표팀을 맡고 있다. 인도네시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밤잠 설치고 응원해 준 인도네시아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 축구와 선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지금 비록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팬들이 조금만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면 머지 않아 ‘아시아의 호랑이’ 위용을 되찾게 될 거라고 믿는다. 특히 대표팀의 젖줄인 프로축구 K리그에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2024.04.27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