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 부자'에게 온 정부 초청장…의령 10남매 놀란 '깜짝 선물'

    '자식 부자'에게 온 정부 초청장…의령 10남매 놀란 '깜짝 선물'

    박성용(왼쪽 셋째)·이계정(왼쪽 일곱째)씨 부부와 10남매가 3일 경남 의령군 의령예술촌에서 ‘다둥이 밴드’ 공연 리허설을 앞두고 손을 맞잡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자 도시’로 불리는 경남 의령군에는 자녀를 10명이나 낳은 ‘자식 부자’가 있다. 박성용(50)ㆍ이계정(48)씨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그동안 이들 부부와 10남매에게 어린이날은 평일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가족이 움직여야 하는 등 여러 가지 형편상 가족끼리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기 힘들어 평소처럼 지낸 경우가 많아서다.   그런데 올해는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을 받게 됐다. 보건복지부가 ‘제102회 어린이날 행사’에 두 부부와 10남매를 초청하면서 1박 2일간 서울 나들이를 가게 됐기 때문이다. 박씨는 “아이들 열 명 생일 챙기기도 힘든 상황이다 보니 어린이날에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는 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며 “그런데 올해 어린이날에는 정부 초청으로 가족 전체가 오랜만에 서울 여행을 가게 돼 모두가 설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오후 박씨 집에 들어서자 현관을 가득 채운 각양각색의 신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 책이 잔뜩 꽂힌 책장으로 둘러싸인 거실에는 지난해 5월 태어난 막내 예빛과 예후(5ㆍ여)ㆍ예율(3)이가 함께 놀고 있었다. 이씨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박씨는 아이들이 거실 곳곳을 뛰어다니자 이름 대신 “8번~” “9번~” 숫자를 부르며 제지했다. 박씨는 “몇 년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마트에 갔다가 여섯째(예명ㆍ12)를 잃을 뻔한 적이 있다”며 “그때부터 어디 이동할 때면 인원수 체크를 위해 번호를 불렀는데 이젠 집에서도 이렇게 아이들을 숫자로 부르고 있다”며 웃었다.   올해 부산 부경대에 입학한 첫째 예서(20ㆍ여)와 김해외고에 다니는 셋째 예훈(17)이 기숙사 생활을 해 집에 없었지만 두 부부와 여덟 명의 자녀만으로도 38평(128㎡)의 집은 꽉 차 보였다. 안방은 박씨 부부와 8번~10번, 남자방은 4~6번(예한ㆍ예권ㆍ예명), 여자방은 2번(예아)과 7번(예령)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옷과 갖가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어 간신히 몸을 움직일 정도로 비좁았다. 이씨는 “집은 비좁지만 그 덕분에 가족들끼리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며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을 많이 낳은 걸 후회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박씨 부부는 서울 토박이다.  2002년 2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둘 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번듯한 직장에 다녔다. 그러다 2004년 맏딸 예서를, 2006년 둘째 예아를 낳았다. 이후 셋째 예훈이를 임신했는데 주변의 반응이 사뭇 냉소적이었다. “서울에서 아이를 셋이나 낳아 어떻게 키우려고 하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았다. 부모님과 친지들도 비슷했다.   결국 이 같은 부정적 시선에 고심하던 박씨 부부는 경남 의령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리기로 결심하게 됐다. 박씨는 “마침 장인 장모께서 한 해 전에 연고가 있는 의령에 내려와 계셔서 이곳에서 함께 살기로 마음먹게 됐다”며 “여기라면 자연 속에서 아이들을 낳아 마음껏 기를 수 있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07년 의령으로 내려온 박씨 부부는 이후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거부하지 않고 일곱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박씨는 “원래는 자녀를 세 명 정도 나을 생각이었는데 아이를 낳을수록 기쁨과 행복도 더욱 커지는 걸 실감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열 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식비만 월 200만~300만원이 들었다. 박씨가 입시학원 등을 하고 이씨는 어린이집 교사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단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가족여행은 커녕 그 흔한 외식조차 하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다. 임신과 출산ㆍ육아를 반복하면서 겪은 고통도 컸다.   의령군은 인구 2만5000여 명으로 전남 신안군과 인천 옹진군, 경북 울릉군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소멸 위기’를 겪는 곳이다. 산부인과는 물론 소아청소년과도 전혀 없다. 그러다 보니 창원시와 진주시 등 인근 대도시로 원정 진료를 다녀야 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이가 아파 가슴 졸이며 도시에 있는 응급실로 달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막내 예빛이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심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아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래도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서로서로를 돌보고 챙겨주는 모습은 박씨 부부가 버텨낼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됐다.   이런 가족애는 밴드 결성으로도 이어졌다. 학창 시절 밴드를 했던 박씨는 음반을 내는 게 꿈이었는데 “못다 이룬 아빠의 꿈을 우리가 이뤄주자”며 자녀들이 기타ㆍ베이스ㆍ드럼 등을 들고 피아노를 치는 박씨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2017년부터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다둥이 밴드’를 가족들은 자칭 ‘박성용과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최근엔 의령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나 행사에도 초청을 받아 공연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이렇게 박씨 부부와 10남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응원의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한 장학재단에서는 대학에 들어간 예서의 4년간 학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포스코에서는 지난 3월 1박 2일 가족여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의령군도 넷째 예한이 때부터 출산장려금을 지급했다. 정부와 의령군 등에서 매달 나오는 영유아 지원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박씨는 “의령은 삼성 등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주를 다수 배출한 곳이어서 ‘부자 도시’로 불리는데, 저출생 시대를 맞아 10남매를 낳은 우리 같은 ‘자식 부자’도 진정으로 대우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다둥이 가정을 꾸리는 게 진짜 애국하는 길로 여겨질 수 있도록 세간의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어 최근엔 강연도 자주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이들 부부는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열 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 온 정성을 다해야죠. 그렇다고 소중한 생명을 우리 스스로 거부할 생각은 없어요.” 의령=위성욱 기자 we.sungwook@joongang.co.kr

    2024.05.04 01:28

  • ‘휴진 예고’ 서울아산·성모병원 혼란 없었다…일부 교수들은 피켓 시위

    ‘휴진 예고’ 서울아산·성모병원 혼란 없었다…일부 교수들은 피켓 시위

    울산대 의대 교수들이 3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신관 앞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어젯밤을 새웠습니다. 하루 쉬고 다시 진료하겠습니다.”   3일 오전 9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의대 교수 50여 명이 병원 신관 앞에서 이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30분 동안 서 있었다. “오늘 휴진합니다” “지친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을 반대합니다”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켓 시위에 참여한 홍석경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외상외과 교수)은 “전공의나 인턴 없이 교수 세 명이 번갈아 당직을 서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워야 하는 실정”이라며 피로감을 전했다. 그는 “환자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진료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체력적 한계가 있다”며 “이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창민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원장은 “두 달 넘게 당직을 연이어 하며 버텨왔는데 더 이상은 어렵다”며 “정부가 정원 문제를 풀지 않으면 전공의들이 병원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시위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하루 진료와 수술을 중단한 비대위 소속 교수들은 피켓 시위 후 ‘2024 의료대란과 울산의대 교육 병원의 나아갈 길’이란 주제로 비공개 긴급 세미나도 열었다.   서울아산병원과 함께 서울성모병원 교수들도 휴진하기로 한 날이었지만 다행히 두 병원 모두 큰 혼란은 없었다. 교수들이 개별적으로 휴진에 참여했고, 휴진하는 교수의 경우 같은 진료과목의 다른 교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조치했기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지난주와 동일한 수준의 환자가 진료를 봤고 수술 건수도 비슷하다”며 “휴진 참여율이 크게 높진 않아 예정된 진료와 수술을 차질없이 진행했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도 “교수협에서 개별적 휴진을 권고했지만 병원에 휴진하겠다고 연락하거나 공지한 교수는 없는 상태”라고 전했다.   휴진 여파가 크게 체감되진 않았지만 내원 환자들은 진료가 미뤄지거나 취소될까 불안해했다. 암 환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아산병원을 찾은 최모(32)씨는   “올 때마다 병원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늘 불안한 상황”이라며 “하루빨리 사태가 해결됐으면 싶다”고 덧붙였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40개 의대와 88개 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7개 병원이 정상 진료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며 “교수님들이 환자들을 뒤로하고 현장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2024.05.04 01:02

  • “살려고 나왔는데 갈 곳 없어요” 가정 밖 청소년 최소 30만

    “살려고 나왔는데 갈 곳 없어요” 가정 밖 청소년 최소 30만

     ━  가정의 달,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가정 밖 청소년들이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강북청소년드림센터] “막막해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어요.”   손에 쥐어진 건 달랑 캐리어 가방 하나와 핸드폰뿐. 김정수(19·가명)군은 고교 3학년 첫 등교일에 자퇴서를 쓴 뒤 그대로 집을 나왔다. 김군은 “부모님이 이혼과 재혼을 거치면서 집안에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며 “숨이 너무 막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고, 이럴 바에야 집 밖으로 탈출하는 게 사는 길이다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갈 곳이 막막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청소년 쉼터가 있어 찾아갔지만 임시 쉼터인 이곳의 체류 기한이 최대 7일이라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당장 먹고살 돈부터 마련해야 했던 그는 무작정 식당 문을 두드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고,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쉼터를 소개받았다. 김군은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 나가야 할지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가족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가정 밖 청소년’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소년복지지원법에 따르면 가정 밖 청소년은 가족 내 갈등·학대·폭력·방임이나 가정 해체, 가출 등의 사유로 보호자로부터 이탈돼 있어 사회적 보호와 지원이 꼭 필요한 청소년으로 규정돼 있다.   여성 청소년의 경우 성범죄 등 취약   하지만 정작 가정 밖을 떠도는 청소년이 몇 명이나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조차 집계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국회입법조사처가 2020년 11만5000여 명으로 추산했지만 청소년 쉼터 등 현장 관계자들은 “공식 통계엔 잡히지 않는 가정 밖 청소년이 상당수여서 실제로는 최소한 3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이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고민은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가정불화로 중1 때 집을 나온 황찬우(18·가명)군은 “원래 가출을 계획했던 게 아니라 도저히 못 견디고 뛰쳐나오다 보니 당장 잠자리부터 마땅찮더라”며 “게다가 중1은 아동으로 분류되지도 않아 보호 시설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정 안에서 밀려난 청소년들이 가정 밖에서도 밀려나길 반복하는 셈이다.   이들을 수용해 보호하는 시설 또한 태부족이다. 현재 가정 밖 청소년들이 머물 수 있는 청소년 쉼터는 일시·단기·중장기 시설을 다 합해도 전국 138곳에 청소년 자립을 지원하는 자립지원관도 13곳으로 총 수용 인원이 200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2022년 실태 조사에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이 ‘갈 곳 없음(42.4%)’을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가정 밖 청소년은 머물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이들이 가정을 나와 지낸 주요 장소 중 1위는 ‘친구나 선후배집(62.0%)’이었지만 오래 신세를 질 수 없어 대부분의 시간을 건물 또는 길거리에서 노숙하거나 찜질방·고시원·PC방 등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병모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장은 “쉼터 등 보호 시설에 들어와 있는 소수의 가정 밖 청소년을 잘 보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설 밖을 떠돌며 위험한 상황에 노출돼 있는 대다수 청소년을 보호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가정으로의 복귀가 최상의 해법이 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의 가출 사유 1위가 ‘부모와의 문제(52%)’로 나타나는 등 가정 내 갈등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온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오랜 기간 아동 학대나 가정불화를 참고 참다가 끝내 가출을 결심한 청소년이 상당수”라며 “이들에게 무조건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만은 없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부처마다 청소년 연령 규정 달라 고충   금전 문제도 가정 밖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당장 돈이 궁한 가출 청소년들이 원룸을 빌려 함께 생활하는 ‘가출팸’이 급속히 늘면서 사회 문제화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최근엔 이곳에 먼저 자리 잡은 청소년이 나이가 어리거나 연약한 아이들에게 ‘앵벌이’를 강요하다 검거되기도 했다. 황대연 경기북부청소년자립지원관 간사는 “쉽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에 속아 이른바 핸드폰 깡이나 환전 사기에 연루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이렇게 범죄자로 낙인 찍힐 경우 자립은 훨씬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가정 밖 청소년 중에서도 여성은 더욱 취약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김은영 강북청소년드림센터장은 “여성 청소년의 경우 집을 나온 사실이 SNS에서 확인되자마자 성적 만남 요구가 줄을 잇는 게 현실”이라며 “당장 생필품을 살 돈도 마땅찮다 보니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만큼 이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시급히 마련돼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관련,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쉼터 퇴소 청소년에게 월 40만원의 자립 수당을 지원하는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주거 지원 요건도 완화하기로 했지만 단기적 지원에 치중하는 등 여전히 한계가 뚜렷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처마다 청소년 연령 규정이 각기 다른 점도 걸림돌이다. 청소년 복지시설 관계자는 “아동복지법은 18세 미만, 청소년기본법은 9~24세를 청소년으로 보고 있고 민법은 19세부터 성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니 가정 밖 청소년의 범위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며 “효율적 지원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통일된 대책 마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짚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더 늦기 전에 정책의 사각지대에 소외돼 있는 가정 밖 청소년들을 위한 보다 체계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 가정 밖 청소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사후 관리’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는 미국과 영국의 시스템을 참고할 만하다는 제언도 곁들여진다.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턱없이 부족한 청소년 쉼터 관리 인력과 예산을 현실화하고 보호 시설 등 인프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 사회가 ‘개울가에 내던져진 심정’이란 가정 밖 청소년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무너져가는 가정을 복원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5.04 00:59

  •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박형준 한동안 뜸했지만 국민의힘 계열에서 ‘소장파’가 의미 있는 목소리이던 시기가 있다. 이른바 16대 국회에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대변되는 젊은 정치인들이 주도했고, 더는 ‘젊지 않던’ 19대까지도 이들은 계속 소장파로 불리며 개혁적인 의견을 내고 변화를 이끌었다.   지금 국민의힘을 대표하는 얼굴 중 상당수가 소장파 출신이다. 박형준(사진) 부산시장도 한 명이다. 17대 국회에서 새정치수요모임(수요모임)을 이끌었다. 대학생 아카데미를 통해 청년 세대에도 손을 내밀었다.   관련기사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박 시장은 2일 통화에서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 ‘첫목회’에 대해 “당이 위기일 때 좀 소장파들이 당의 혁신과 미래를 위해서 움직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반겼다. 그는 “젊은 세대 정치인들이 새로운 혁신을 위해서 움직일 때 그것이 길게 보면 당에 큰 도움이 됐다”며 “2000년대 초반 야당일 때 소장파들의 적극적인 혁신 노력이 집권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랜만의 소장파 움직임이다. “민주당이 당내 민주주의에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많은데, 국민의힘이 당내 민주주의나 활력 측면에선 그런 요소들을 배가할 필요가 있다. 또 여당이지만 입법부 내에선 야당이고 정치적으로는 국민의힘이 큰 위기에 봉착해 있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기존 정치인들보다 더 참신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눈치 안 보고 혁신 노력을 할 수 있는 소장파들의 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쓴소리하는 것만이 혁신과 개혁처럼 해선 안 되고 대한민국의 미래나 정치의 미래를 위해 굵직한 담론을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7대 때도 공동체 자유주의 등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건강한 논쟁의 장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어 당시 박근혜 대표가 혁신위를 만들어 당내 민주주의를 한 단계 크게 진전시키는 계기도 만들었다.”   실제 당시 혁신위에선 당권·대권 분리를 이뤄냈고,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분배·형평을 강조한 경제정책 등을 합의해냈다.  박 시장은 3040과의 소통의 장도 당부했다. 그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를 갖고 답을 찾아내는 소통과 담론의 장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3040과의 소통에 대해 조언한다면. “정책으로 얘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거고, 분명히 세대 인식이나 감각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시정(市政)하면서도 느낀다. 굉장히 이슈에 민감하다. 이들이 민감한 이슈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 세대는 (이들을) 머리론 이해해도 가슴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동시대만이 갖는 고유한 감각을 살려 이슈를 찾아내고 당의 전체 의견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은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할 수 없다.”   과거 소장파들은 간혹 당내 분란을 키운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당 구조나 질서란 게 선수(選數) 위주로 가고 일정하게 권위주의적 성격을 내포해서 일사불란함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압박을 못 견뎌내면 안 된다. 견뎌내는 방법의 하나가 대(對)야당 관계다. 여당이 하고자 하는 정책적 의지를 관철하는 역할도 앞장서서 해줘야 당에서 지지받고 지지자들로부터 칭찬받는다. 대통령에게 대들고 하는 ‘안티’로서만 자리하게 되면 여러 면에서 좋은 효과를 못 가질 수도 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57

  •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총리 관저에서 캐머런 총리와 만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2010년 이래 영국 보수당의 장기집권을 연 건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이자 현 외무장관이다. 20대 연구원으로 보수당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따뜻한 보수주의’ ‘빅 소사이어티’를 주창하며 당을 현대화했다. 이중엔 보건복지를 강화하고 당내 반발이 강했던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내용도 있었다. 덕분에 13년 노동당 집권을 끝낼 수 있었다. 그 혼자 한 게 아니었다. ‘노팅힐 세트’로 불릴 정도로 자주 어울리던 젊은 보수당원들이 함께했다. 그중 조지 오스본은 캐머런 총리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고 스티븐 힐턴은 뛰어난 선거 전략가로 활동했다.   이들에겐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보수당 당수를 지낸 마이클 하워드다. ‘국민은 커야 하고 정부는 작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불공평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며 기회 균등이야말로 중요한 가치임을 나는 믿는다’ 등 보수주의 강령을 발표한 이다. 그는 당수직을 물러나기 전 캐머런 등 젊은 정치인을 그림자내각에 발탁, 당권 도전의 길을 열어줬다.   관련기사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이처럼 정치적 폐허에서 새로운 비전과 함께 변화의 불꽃이 일고, 때때로 새 리더십으로 이어지곤 한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속 집권으로 민주당이 주춤하던 1985년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중심으로 백인 중산층의 지지 회복을 위한 민주당의 변화가 모색됐다. 새로운 담론으로 무장한 민주당원들은 자신을 ‘뉴 데모크랫’으로 불렀다. 빌 클린턴은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뉴 데모크랫으로 집권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공화당에서도 ‘미국과의 계약’이란 액션 플랜으로 민주당의 40년 하원 지배를 끝냈다.   이재영 국민의힘 서울 강동을 조직위원장은 “성공과 실패의 반복 속에서 시대에 맞는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느냐가 관건”이라며 “지난 10년간 최소한 국민의힘은 그걸 못했다. (담론을 담은) 텍스트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55

  •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  희귀암 극복한 가수 윤도현   그런 목소리가 있다. 거침없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울다가 지쳐버린 외로운 남자처럼, 등 뒤에서 조용히 위로해 주는 친구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들의 공통점은 기교 없이 묵묵하고 담백하다는 것이다. 가수 윤도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다.   20대는 폭주기관차, 지금은 KTX 목소리   3년 여의 암 투병 후 완치 판정을 받은 가수 윤도현은 지난 3월 대구를 출발해 6월 초 서울까지 이어지는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섰다. [사진 디컴퍼니] 지난해 8월, 윤도현은 희귀성 암인 위말트 림프종 진단을 받고 3년의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깜짝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무대로 돌아왔다. YB는 현재 3월 대구를 시작으로 수원·안산·창원·부산·인천 등 전국을 누비며 ‘2024 YB TOUR LIGHT; INFINITY’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종착지는 6월 8·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이다. 오직 음악과 조명만으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포부로 시작된 YB만의 공연 브랜드 ‘LIGHT’에 무한함을 뜻하는 ‘INFINITY’를 덧붙였다. YB만이 할 수 있는 한계 없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강조한 의미다.   방송 출연 외에는 내내 미디어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와 지난달 26일 어렵게 만나 근황에 대해 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건강해 보였다. 콘서트 무대에서도 파워풀한 가창력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건강에 더 신경 쓰니까요. 투어 일정이 주말이라 금요일에 지방에 가면 무조건 호텔에서 8시부터 자요. 공연 끝나면 또 바로 와서 자고. 예전 같으면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했을 텐데 요즘은 공연과 건강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이번 전국 투어에선 특별하게 공감 토크 ‘YB의 DM 레터’ 이벤트를 진행한다. 윤도현의 선후배 뮤지션과 지인들, 깜짝 게스트, 그리고 미리 사연을 보낸 이들이 무대에 올라 ‘공감’과 ‘위로’를 주제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코너다. 암 완치 소식 후 많은 암 환자와 가족들이 SNS에 ‘힘을 얻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윤도현은 사연마다 모두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산 공연에선 11살짜리 초등학생이 무대에 올랐다. 라디오 프로그램 ‘4시엔 윤도현입니다’에 10년 간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사연을 보냈던 학생이다. 윤도현이 공연에 초대했고, 사연을 들은 관객들은 ‘흰수염고래’를 열창하며 소년을 응원했다.   공연이 아닐 때는 새 음반 준비에 몰두한다. 6월쯤 첫 선을 보일 새 음반 장르는 메탈이다. “고등학교 때 ‘단두대’라는 메탈 밴드를 했는데, 80년대 말 얼터너티브 장르가 생기면서 메탈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이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플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메탈 음악을 접하고 완전 빠져들었죠.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그래, 이거다!”   ‘필’은 받았지만 록 밴드 YB에게 메탈은 엄청난 도전이라 음반 작업이 쉽진 않다. “YB 스타일도 아니고, 멤버들 나이가 다 50이 넘어서 체력도 달려요.(웃음) 우리가 알던 클래식 메탈이 아니라 최신 메탈이라 더 어렵고. 에릭 클립톤이 메탈에 도전하는 격이랄까.(웃음) 그래도 모두 의지를 불태우며 맹연습 중이죠. 안 될 것 같은 걸 해내는 게 인생의 큰 재미니까요.”   보컬리스트인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다. YB의 색깔과 새로운 메탈의 접점을 찾으려면 멜로딕한 목소리와 ‘그로울링(낮은 톤으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창법)’이 공존해야 한다. “한 곡에서 보컬리스트의 자아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거죠. 그로울링은 괴물 같은 소리라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KBS 환경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에 출연한 윤도현이 물이 차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며 해수면 상승 위기를 경고했던 장면. [사진 디컴퍼니] 올해 나이 52세. 중년이 된 그는 어떤 고민을 할까. 옆에서 데뷔 때부터 29년을 지켜본 기획사 대표는 “형은 만년 뽀로로”라고 했지만 윤도현의 대답은 딱 대한민국 중년 남자다웠다. “멤버들끼리 만나면 애들 얘기, 교육 얘기, 돈 들어가는 얘기, 건강 얘기.(웃음) 록커도 아빠고, 남편이니까요.”   아빠 윤도현은 요즘 속으로 안절부절 못한다. 스무 살 딸내미가 곧 미국 유학을 간다. 딸이 커가는 세상은 남성 위주의 세상도, 여성이라고 무시당하는 세상도 아니길 바라며 부부의 성을 나란히 붙여 지은 이름은 ‘윤이 정’. 한자로는 ‘정(情)’. 당시 인기였던 초코파이 CF를 보고 지었다. “다른 광고들에 비해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광고였죠. 그 CF만 나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좋았어요. 우리 애도 정을 나누는 사람이길 바란 건데, 이름 따라 간다고 진짜 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어차피 자주 뉴욕을 오갈 거라면 공연을 해도 좋겠다 했더니 “YB의 미국 시장 진출이 시급하다”며 활짝 웃었다.   신해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   추억을 찾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이. 그는 얼마 전 ‘학전 어게인’ 공연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학전은 어머니 뱃속 같은 공간이고, 김민기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시죠. 김민기 선생님은 아프시고, 학전은 없어지고. 리허설 후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데뷔도 전에 윤도현을 알아본 김광석이 자신의 공연에 게스트로 그를 세웠던 공간 또한 학전이다.   어제 10년 전 세상을 뜬 신해철이 AI목소리 모델 ‘AI 신(新)해철’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해철의 생전 육성자료들로 음성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시켰다고 한다. 각별했던 신해철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들려준 일화는 웃기면서도 애틋하다. “해철이 형은 애티튜드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이었어요. 그런 캐릭터의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귀여운 형이었지만요. 술 마시자는 청을 귀찮아서 몇 번 피했더니 집으로 불러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형이 살이 좀 찐 후라 앞치마를 두른 뒷모습이 장모님 같아서 한참 웃었죠.(웃음) 그날 저녁 형 작업실에서 컴퓨터에 담긴 미발표 곡을 밤새 들었어요. 미발표 곡이 무려 200곡이나 된다니 이 형 정말 미쳤구나,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새벽 무렵에는 너무 졸려서 형의 질문들에 대충 대답했어요. 그때 내가 더 잘 할 걸…아쉬워요.”   김광석·신해철 모두 아티스트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선배들이다. 요즘 윤도현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KBS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 촬영 때는 바닷물이 점차 차 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해수면 상승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메탈리카 30주년 앨범 ‘The blacklist’에 참여했던 관련 수익은 모두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기부했다. 라디오에선 ‘가치합시다’ 코너를 통해 청취자들과 함께 텀블러 쓰기, 세제 물에 풀어 쓰기, 계단 오르기, 일회용품 사용 자제 등 일상 캠페인도 벌인다. “무분별한 난개발들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으니 안타깝죠. 이제 단순히 보호·보존 차원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지구인 전체가 노력하고 연구할 때에요.”   올해는 YB가 결성된 지 29년이 되는 해다. 외국의 60~70대 밴드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밴드가 있기를 바라고, 그 기대를 YB에 걸어보는 이들이 많다. “데뷔 후 4년 간 앨범을 계속 발표했지만 히트곡이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 했죠. 사람들이 한 곡도 모르는 앨범도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했어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쏟아 붓는 음악, 이런 음악이 우리를 오래 지탱해 준 코어 근육 같은 존재죠. 꾸준히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오래 갈 수 있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다. 29년 동안 늙지 않는 목소리의 비결이 뭘까. “변했어요.(웃음) 20대 때는 폭주기관차 같았는데 지금은 KTX에요. 20대에는 투박하지만 불을 활활 태워가며 막 달렸다면, 지금은 뭔가 힘이 달리니까 노련미와 기술의 힘으로 보완하는 거죠.” 세월이 다듬은 윤도현의 진짜 목소리를 확인하려면 공연장에 가야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5.04 00:29

  •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  [비욘드 스테이지]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배우 이영애의 최근작 ‘마에스트라’는 기대했던 음악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남성중심으로 돌아가는 클래식 업계에서 고독한 여성 리더의 포스를 뿜어내는 이영애의 냉철한 카리스마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젠더 파괴의 시대에 아직 ‘남성적 세계’가 좀 있다. 음악에선 대표적인 게 오케스트라 지휘다. 힘자랑을 하는 일도 아닌데 아직 남성 비율이 절대적이다.   한양대 대학원 ‘지휘전공 1호’로 유명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지난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 시즌 개막작 ‘라트라비아타·춘희’를 4일간 이끈 마에스트라는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손지훈,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김기훈 등 초특급 오페라가수를 비롯해 2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1900년대 경성 배경으로 옮긴 낯선 무대에서 베르디의 음악을 역량껏 펼칠 수 있게 한 것이 그의 리더십이었다. “각색된 무대가 연주자들에게 쉽진 않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음악의 템포와 호흡도 다르거든요. 그래도 너무 좋은 가수들을 만나서 즐거웠어요. 사실 교향악 지휘가 훨씬 편하지만, 저는 오페라 지휘를 더 좋아하죠. 많은 분야 사람들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성공적인 무대를 향해 가는 게 재밌잖아요.”   오페라 공연에선 흔히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솟은 지휘자의 뒤통수가 보인다. 여자경은 뒤통수 대신 열정적인 지휘봉만 보이는 작은 체구다.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지휘전공 1호’로 유명한데, 당시 대학원에 없던 지휘과 개설의 계기가 되서다. 그런데 지휘자가 되려고 지휘를 전공한 건 아니라니, 반전의 연속이다. “오페라 때문에 지휘공부를 하게 됐어요. 대학 오페라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했는데 성악가들 코칭하는 게 재밌더군요. 지도교수님이 오페라를 하려면 지휘를 해야 한다면서, 본인 경험을 살려 커리큘럼을 만들어주셨죠. 여자로서 승산이 있겠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저는 지휘자가 되려던 게 아니라 지휘라는 학문이 궁금했어요. 오페라 코치나 교단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죠.”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무대를 지휘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린 알솝이 런던 음악축제 BBC 프롬스 폐막 공연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오른 2013년 이래 세계 주요 무대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성시연·김은선·장한나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여성도 꽤 있다. 여자경도 2020년 클래식 전문지 객석이 꼽은 ‘세계의 파워 여성지휘자 16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1990년대만 해도 성공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배움의 장도 좁은 시절이었어요. 빈에 유학을 간 것도 내가 잘 배워서 좋은 지휘자 육성을 하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학교가 아니라 연주 쪽으로만 기회가 이어지더군요. 그렇게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무채색 일상복 차림의 그는 얼핏 중성적으로 보이고, 목소리 톤도 아주 낮았다. 그런데 지휘의 영역이 ‘남성적 세계’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성이라 특별할 건 없다고 했다. “남자였으면 좀 편하게 했을텐데 하는 생각은 가끔 해요. 출장을 가도 남자들은 짐싸서 가면 되는데 나는 아이의 일주일 먹거리를 다 준비해놓고 가야하니까요.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럴테죠. 사실 올해 아이가 스무살이 돼서 조금 자유로워졌지, 그동안 애 밥 챙기느라고 쪽공부하면서 살았거든요. 모든 걸 다 직접 해 먹이는 편이라 해외에서 콜이 와도 못갔어요. 일 욕심도 많지만 엄마가 1순위란 생각으로 살았으니까요. 엄마가 지휘하는 거죠 뭐.(웃음)”   엄마의 그림자를 드러내니 솔직히 마에스트라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십명 연주자를 일사불란하게 단결시키려면 ‘마에스트라’의 이영애나 영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강인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은데, “나는 포디움 위아래가 똑같다”고 답한다.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면 다시는 콜을 못 받아요. 같은 동료인데 내가 지휘라는 파트를 맡은 것일 뿐,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게 지휘자 역할은 아니죠. 소통이 정말 중요하고, 단원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아요. 단원들을 음악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지휘자의 카리스마죠. 지휘자 말이 맞다고 느껴야 소리를 내니까. 그러니 포디움 위에서 나 자신이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최근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지휘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라 여자경. 10일 대전시향 40주년 특별 공연을 직접 지휘한다. [사진 대전시향] 같은 악보라도 지휘자에 따라 다른 음악이 탄생하니, 방점은 악보 해석에 찍힌다. 해석의 기준은 “악보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란다. “악보의 70~80프로는 누구나 생각하는 정답이 있고, 나머지 20~30프로를 지휘자 해석으로 제안하게 돼요. 작곡가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악보에 마킹한 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남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걸 찾아내서 그대로 실현에 옮기기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내 색채를 입히는 정도죠. 그랬을 때 연주자들이 동조하게 하는 게 지휘자 역량이고요.”   지난해부터 그가 이끌고 있는 대전시향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10일에는 40년 전 창단 연주를 오마주한 특별 공연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5번을 직접 지휘한다는데, 그의 해석은 뭐가 다를까.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3악장에 왜 왈츠를 썼을까. 아직 요한 스트라우스가 살아있었고, 파티장에서 왈츠 추는 게 한창 유행이었기에 가져왔겠지 하고 유추를 해봐요. 후원자에게 5번 교향곡이 실패작이라고 털어놨던 만큼 전반적으로 우울한 모티브가 깔려있는데, 3악장만 유독 밝은 이유죠. 그런 걸 알고 접하느냐 아니냐는 사운드를 만들어갈 때 굉장한 차이거든요. 그런 보이지 않는 악보의 비밀에 예민하게 접근할 때 나만의 색채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죠.”   그러고보면 지휘자란 센 직업이 아니라 굉장히 섬세한 일이다. 차별화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게 다양한 오케스트라의 존재이유라서다. “예전에야 권위적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게 카리스마인줄 알았지만, 요즘 그렇게 하면 다 도망가지 누가 따르나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이 멋있긴 해도 2024년에 그렇게 하면 지휘 못해요. 물론 단체를 끌고 갈 때 민주주의를 완전히 내버려두면 하나로 가져갈 수 없고, 1%의 독재가 가미되어야 하는 건 맞아요. 그 1%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만한 책임감이 있어야 리더라 생각해요. 좋은 건 너희 덕이고 안 좋은 건 내가 책임진다. 그 마음가짐이 지휘자 자격요건입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04 00:27

  • 이 해맑은 웃음 사라져간다…경수초교 마지막 어린이날

    이 해맑은 웃음 사라져간다…경수초교 마지막 어린이날

     ━  초저출산 시대의 5월 풍경   3일 경기도 안산 경수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장래 희망을 그린 캐리커처를 들고 있다. 전교생이 87명인 이 학교는 내년에 인근 경일초등학교와 통합한다. 최기웅 기자 “선생님! 선생님은 왜 새로운 학교로 저희랑 같이 안 가세요?”   어린이날을 앞둔 3일, 아이들의 깔깔 웃음이 넘쳐나도 모자란 날.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웃음 너머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어쩌죠?” 어린 학생이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채 묻자 담임 선생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렇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 선생님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할 거야. 즐거운 추억도 늘 같이 쌓아 갈 거고.”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경수초등학교. 87명의 재학생은 올해 이 학교에서 마지막 어린이날을 맞이한다. 내년 3월부터는 같은 성포동에 있는 경일초등학교와 통폐합되기 때문이다. 2000년 개교한 지 25년 만에 학교 문을 닫는 셈이다. 초등학교 이름도 ‘경수’ 대신 ‘경일’로 통일되고 지금의 학교 공간도 추후 다르게 바뀔 예정이다.   내년이 되면 정든 아이들과 헤어질지 모르는 담임 선생님은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쩌면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경수초등학교’도, ‘담임 선생님’도 아예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들을 위해 작지만 마음을 담은 ‘마지막 어린이날’ 행사를 마련했다.   “와, 나랑 어떻게 이렇게 똑같지?”   연도별 초등생 수 쓱싹쓱싹. 지난 2일 캐리커처 작가 네 명이 경수초등학교를 찾아 아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학교 통폐합 예산을 활용한 첫 행사였다. 멋진 그림이 완성되자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3학년 남학생 한 명이 “나도 아저씨들처럼 훌륭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거야”라고 외치자 곁에 있던 친구가 “나는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맞장구쳤다. 꿈에 더해 학교에 대한 추억을 심어주는 행사였다.   이렇게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고 어울림을 배우는 터전인 초등학교가 위기에 봉착했다. 2000년 경수초등학교 개교 당시 합계출산율(15~49세 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1.48명에서 지난해 0.72명으로 절반 이상 급감하면서 학령인구 또한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초·중·고교생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 수는 2028년이 되면 200만 명을 밑돌아 187만580명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70년 574만9301명의 3분의 1도 안 되고 올해 248만1248명보다도 25%나 줄어든 수치다. 초·중·고교 전체 학생 수도 올해 513만여 명에서 2026년에는 483만여 명으로 줄면서 500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통폐합이 불가피해졌고, 그 와중에 매년 10명 안팎이 입학하던 경수초등학교도 통폐합 대상에 포함되게 됐다.   같은 학교로 거듭나게 되는 경일초등학교와는 걸어서 고작 7분 거리.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마음속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두 학교는 ‘어울림 행사’를 준비했다. 일종의 ‘통폐합 연착륙’ 기획이었다.    ━  3년간 전국 초·중·고 72개교 통폐합…수도권에서도 13곳     ‘어울림 행사’는 두 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몸을 부대끼며 어울리는 자리로 마련됐다. 지난달엔 두 학교 2학년과 3학년생이 학교 근처 노적봉에서 같이 게임도 하고 생태 체험도 했다. 2학년 남자 어린이는 “학원에 함께 다니는 친구도 있고 해서 크게 낯설지 않아 다행이었다. 같이 게임을 하고 나니 경일초등학교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며 웃었다. 반면 5학년 여자 어린이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자니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그냥 쭉 여기서 공부하다 졸업하고 싶다”며 우려를 나타내 대조를 이뤘다.   학부모들도 걱정스러운 모습이었다. 1학년생 학부모인 이모(42)씨는 “아이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가 적응하고 있는 참인데 내년엔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니”라며 “저도 새 학교에서 새 부모들과 인간관계를 쌓고 적응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3학년 최윤선 선생님은 “오는 7월에는 체육대회도 열고 함께 땀을 흘리며 더 친해지는 자리를 가져볼 계획”이라고 전했다.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3일 오전 9시. 최인옥 교장은 ‘마지막 어린이날’ 조회 방송을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서다. 이옥경 교감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학생 수가 줄수록 수월한 측면도 있겠지만 학교의 존속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인 만큼 심각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저출산뿐 아니라 맞벌이가 아니면 아이를 키우기 힘든 현실에 방과 후 학교 강사 문제도 있는 등 여러 요인이 겹치다 보니 학교 통폐합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라며 아쉬워했다.   학교 통폐합의 파도는 인구가 적은 지역을 넘어 수도권까지 몰아닥쳤다. 지난 3월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으로부터 받은 ‘2021~2023년 통폐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1년 24개교, 2022년 27개교, 2023년 21개교 등 최근 3년간 72개 초·중·고교가 통폐합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를 포함해 수도권에서도 13곳이 통폐합됐다.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너무 급격히 변하는 가운데 물리적 공간으로서 고향이란 의미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며 “그나마 심리적 고향으로 인식되는 학교가 사라진다는 건 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고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진단했다.   경수초등학교 출신인 이서우(28)씨도 “추억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학교 앞을 지나며 괜히 코흘리개 때가 생각나고 그랬는데 뭔가 휑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학교 근처에서 14년간 꽃집을 운영해온 김모(57)씨는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꽃을 사러 오는 사람이 점점 줄어 이러다 학교가 없어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현실로 닥칠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잊혀진 고향처럼, 경수초등학교라는 이름은 이제 졸업 앨범과 졸업장에 박제된 채 남게 됐다. 하지만 지금의 저출산 추세가 지속되면 또 다른 ‘경수초등학교’가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아쉬움이 그리움으로 남는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고. 올해 졸업생 한 명이 통폐합 소식에 말을 남겼다. “앞으로도 선생님 엄청 뵙고 싶을 텐데, 어쩌죠?”  안산=원동욱 기자, 김홍준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4.05.04 00:14

  •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우린 독약 아닌 쓴 약…일단 '빡공'해 20대가 표 줘야 할 이유 찾겠다"

     ━  여당 3040 모임 ‘첫목회’ 4인, 보수정치의 미래를 고민하다    보수 정당은 총선 기준으로 12년간 정치적 황무지(political wilderness)에 머문다. 지금대로면 더 오래일 수 있다. 보수를 지지하는 세대가 퇴장하고 반목하는 세대는 다수가 된다. 여당으로 정책(미래)을 말할 수 있는 이번에도 심판(과거)에 집중할 정도로 당력도 한계다.   지난 2일 첫 공개 세미나로 활동 개시   국민의힘 소장파 모임인‘첫목회’회원들. 왼쪽부터 이종철·한정민·이재영 조직위원장과 김재섭 당선인. 최기웅 기자 이런 속에서도 신발 끈을 조여 매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첫목회’로 대부분 수도권 등 험지에서 출마한 3040들이다.  “전사(戰死)는 했지만 정치적 에너지는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때”(박상수 인천 서갑 후보)란 이들이 2일 공개 세미나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앞선 지난달 27일 김재섭 서울 도봉갑 당선인과 이재영(서울 강동을, 간사)·이종철(서울 성북갑)·한정민(화성을) 조직위원장을 만나 생각을 들었다. 중도와 젊은 층을 향한 새 정책을 만들어내겠다는 이들은 “당의 주력인 영남 원내 계신 분들이 쓴 약과 독약은 구분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우린 절대로 독약이 아니다”라고 했다.   어려운 선거였다. 김재섭=“후보들이 다 무기력감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바람이 너무 셌다. ‘당신은 좋은데 당신 당은 못 찍겠다’는 말을 한 번씩은 들어봤을 텐데 개인적으로 제일 힘 빠지는 얘기였다. 내 노력과 무관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이종철=“3월 초중반이 되면서 분위기가 전과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도 사전투표 후 주말에 사람들이 모이는 천변에 갔는데 저를 찍었다는 분이 많아 일요일엔 세 봤다. 10명 중 7명 정도였다. 결과적으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분들의 무서운 민심을 확인했다.”   관련기사 “소장파들, 위기 때 혁신 앞장…대한민국 미래 위해 굵직한 담론 내야” 캐머런의 따뜻한 보수, 노동당 집권 끝냈다 수도권에선 양자 구도다. 화성을에선 여당 후보가 3등이었다. 당사자인 한 위원장은 “나중엔 누가 더 싫은가 대결하는 선거였는데 나보다 훨씬 더 잘 싸우는 사람이 지역에 있었다”며 “나를 찍어달라고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고 했다.   인구정치적으로 다음 선거는 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이재영=“지금 상황으로 보면 2년 후에 있는 지방선거에 비관적이고 대선도 연장선에서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 당의 저력으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수도권에서 뛰었던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선거 결과를 거의 부정하는 것 같은 모습이 비치면서 과연 희망이 있을까 싶다.”   어떤 모습이 그랬나. 이재영=“단편적이긴 하나, 1차 당선자 모임이 축하하는 자리였다고 하더라. 당이 이렇게 돼 있는데 축하할 일인가.”   2월 말 3월 초 대통령실발 논란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김재섭=“그간 누적됐던 것의 기폭제였다. 대표적으로 대파 논란 같은 건데 대통령이 말하고자 했던 건 875원이 아니었다. 충분히 맥락이 있는데 왜곡된 것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화를 낸 건 그간 누적된 불만이 있었다는 거다. 2년 간 국민 불만이 적재적소에 해결되지 않아 총선을 기점으로 다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재영=“정권심판론이 있었지만, 우리가 그 프레임에 빠져서 선거를 치렀다. 결국엔 이조(이재명·조국) 심판으로 갔는데 전쟁터로 치면 그쪽 전쟁터에서 치른 거다. 선거는 당이 치르는 거다. 사람도 없었고 콘텐트도 없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비판하자면 많지만 지금 얘기할 건 당이다. 당이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부분에 대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여전히 2, 3년을 좌우할 건 대통령이다. 최근 윤 대통령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회동하는 등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던데. 김재섭=“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시그널이긴 하다. 그런 변화가 체감되어야 하는 부분에선 아쉬움이 많다.” 이재영=“질문 자체가 다시 대통령에게 뭘 맡기자는 건데 우리 당이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대통령의 변화에 달려있다고 우리가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번 총선에서 몇 가지 체크된 게 있다. 65 플러스(65세 이상)를 빼곤 다 떠났다. 우리 당은 수도권 선거를 치를 전술과 전략이 없다는 것도 확인됐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비전과 방법을 제시하고 토론하기 위해 첫목회가 결성된 것이다. 대통령을 바꾸기 위해, 대통령에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결성된 게 아니다. 우리 걸 가지고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대통령이 잘하면 당이 잘 되겠다, 그걸 기대하면서 정치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이종철=“민주화가 심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야당보다 여당이나 권력자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게 매우 엄격한 기대를 가졌다. 윤 대통령이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문제가 나왔을 때 즉각적으로 사과를 했다면 우리가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제일 중요한 게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 소통과 공감 능력이고 세 번째가 무능이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들어오면서 (유권자들이) 흡족하지 않지만 넘어가려던 게 윤 대통령의 TV 대담 등 대응 모습을 보며 이전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이거 안 되겠구나’ 해서 쏠렸던 것 같다. 당이 따로 가더라도 대통령과 관련되어서든, 당의 직접적인 것이든 공정과 상식, 공감·무능에서 차별화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대통령이 국민 보기에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당이 ‘아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국민의힘 계열엔 이전에도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대표되는 개혁성향의 소장파 움직임이 있었다. 최근 7년여 미약했지만 말이다.   기후·젠더·환경 등 새 담론 제시해야   지금 첫목회는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나. 이재영=“우리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당을 어떻게 해서든 수도권 중심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총선 3연패라지만 서울만 따지면 4연패다. 수도권에서 인재영입이 굉장히 힘들어졌고 수도권 어젠다가 보수 진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래연대나 민본21이 있던 때엔 소장파가 말하면 들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네 번 선거에서 지면서 어젠다와 이슈,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 몰리면서 들어줄 준비가 사라진 것 같다. 당내 쓴소리를 ‘잘되라고 하는 얘기’로 듣는 게 아니라 ‘내부총질’로 설명해버리는 굉장히 이상하고 배타적인 문화가 생겼다.” 한정민=“(국민의힘이) 우리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더 많이 공부해서 지선이든 대선이든에서 말해주고 싶다. 사실 젊은 친구들이 우리에게 감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걸 흡수하지 못할 뿐이다. 2030에게 어젠다를 주고 싶고 이들이 활동할 단체들이 보수 진영엔 거의 없는데 그런 걸 만들고 싶다. 지금은 자리가 없어서 함께 가는 동지가 아니라 서로 (한정된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다. 각자도생해야 하니 장기적으로 하기도 어렵다. 사람이 없다는데 사람을 키우지 않으니 없는 것이다. 청년 생태계를 양성해야 한다. 우리가 정부일 때 하지 않으면 다음 총선은 물론 다다음 총선도 어려울 것이다.” 김재섭=“보수 정당이 20대 이하의 유권자에 매력적인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는 큰 문제다. 예를 들어 반공 보수, 경제 만능 보수, 이건 5060 이상엔 호소력 있을지 몰라도 (그 아래엔) 잘 피부에 안 와 닿는다. 그런 세대엔 그다음 담론을 제시해야 되는데 이민문제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20대 반중 정서를 우리가 적절하게 핸들링할 수 있는가 등이다. 기후·젠더·환경 담론도 없다. 이들이 우리에게 호감이 있더라도 표를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거다. 담론을 생성하는 기능을 첫목회가 해야 된다고 본다. 끊임없이 20대가 우리한테 표를 줘야 하는 이유를 개발하는 역할이다.” 이종철=“서울에선 민주당과 표차가 지난번보다 줄었다. 어찌 보면 국민이 (표를) 주려고 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소중하게 봤으면 좋겠다. 혁신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성찰하며 국민의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 수준에 맞추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간다면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초선 중 다수가 대통령을 두둔하는 연판장을 낸 게 논란이었다. 한정민=“우리 슬로건이 일단빡공, 일단 빡세게 공부다.”   이렇게 하면 다음에 될 거라고 보나. 이재영=“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음에 안 된다. 22대 국회 구조상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같은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1대보다 훨씬 더 힘든 여소야대가 될 텐데, 현역 분들은 정치 상황에서 벗어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첫목회는 자주 모여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좋은 콘텐트를 만들어내 당에 전달하고 보수 진영을 포함한 일반 대중에게도 오픈될 것이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5.04 00:12

  • 서방의 '캔슬컬처' 사태에도 웃고 있는 친 푸틴 예술가들

    서방의 '캔슬컬처' 사태에도 웃고 있는 친 푸틴 예술가들

     ━  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예술밖에 난 몰라.” 정치권력의 변화나 사회흐름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아티스트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과연 그럴까. 특히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는 클래식 업계는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지금 세계 클래식 공연예술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함의를 업계 전문가의 눈으로 파헤친다.  -편집자 주     4월 예정됐던 내한 공연이 취소된 ‘푸틴의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 Vladimir Fridkes] 지난 4월 예정됐던 볼쇼이 발레단 관련 두 개의 내한 공연이 무산됐다.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군무진이 출연할 예정이던 ‘모댄스’(17~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볼쇼이의 신성’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등 수석 무용수 6인이 등장하기로 했던 ‘발레앤모델 슈퍼 발레 콘서트’(16~1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가 각각 ‘관객과 아티스트 안전’ ‘공연 변경 신청 심의 부결’을 사유로 취소됐다.   두 공연의 연이은 취소 사태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3월 4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이들 공연이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같은 달 15일 자하로바 공연이 전격 취소됐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문화예술분야 협력이 정치적 게임의 인질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논평을 냈고, 발레앤모델 볼쇼이 발레 내한을 두고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두 한국 정부와 민간 반응을 살폈다. 결국 이 공연도 취소에 이르자 러시아 외무부는 현지시간 19일 대변인 논평으로 “한국의 러시아 문화 말살이 계속되면 가시적 보복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반발했고, 27일에는 미국, 한국 등 비우호국을 대상으로 수입 관세를 인상했다. 29일에는 친 우크라이나 성향의 재한 러시아인 그룹이 5월 예정된 친푸틴 바이올리니스트 스피바코프 내한공연 취소 집회를 잠실에서 열었다.   전쟁 틈타 마린스키·볼쇼이 통합 관철   게르기예프(오른쪽)와 함께 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 러시아 대통령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에서 ‘모댄스’ 상연이 어려운 건 통합 러시아 의원으로 활약한 ‘친 푸틴’ 무용수 자하로바의 전력 때문이다. 대 러시아 제재에 참여한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2014년 3월 크림반도 합병 지지 공개 서한에 서명한 러시아 예술계 인사 511명의 공연 비자 발급을 뒤늦게 불허한다. 자하로바를 비롯해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비올리스트 유리 바쉬메트, 바이올리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의 서방 공연이 애초에 불가능한 연유다. 반면 우리 정부는 명단에 오른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자하로바의 공연 비자 발급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공연 취소 논란과 외교 공방의 빌미를 줬다.   ‘발레앤모델 슈퍼 발레 콘서트’ 같은 갈라 형태의 볼쇼이 발레단 행사도 러시아 밖에선 노골적 친러 성향의 벨라루스, 중동 균형추 역할의 오만 무스카트에서나 열렸다. ‘푸틴의 오른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에 이어 지난해 12월 볼쇼이 극장 총감독에 오르자 서방의 볼쇼이 보이콧 흐름은 더 선명해졌다. 1956년 이래 볼쇼이 발레단을 정기적으로 초대한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러-우전쟁 확전 직후 볼쇼이 발레단의 2022년 방영(訪英)을 취소했고 재초청 기약도 없다. 1957년 시작된 볼쇼이 발레단 일본 투어도 2017년을 끝으로 코로나 팬데믹, 러우전쟁 여파로 중단됐고 재개될 조짐은 없다. 영국 오페라하우스부터 일본 에이전시까지, 지금은 볼쇼이 보이콧을 최소한의 윤리적 도리로 본다.   현 시점, 볼쇼이 발레단 아시아 투어의 잠재 파트너는 러시아 우방인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국가대극원, 홍콩 아트페스티벌 정도다. 그런데 투어가 국가간 교류성 사업으로 진행되면 통상적으로 국립 예술 단체 개런티는 민간 초청 때보다 현저히 낮아진다. 볼쇼이 발레단으로선 민간 에이전시가 흥행 목적으로 부를 때 제값을 받는다. 발레앤모델은 국내 매체 인터뷰에서 4년간 볼쇼이 발레단 내한 공연권 독점을 밝혔었다.   볼쇼이 발레단 재정이 건전해지려면 러시아와 서방간 외교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올 가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면 볼쇼이 발레단은 현상 타개를 기대할 수 있다. 러-우전쟁 종전을 시사한 트럼프가 집권한다면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턴 케네디센터에 예전처럼 볼쇼이 발레단이 투어를 나오는 그림을 자연스레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케네디센터에는 러시아 예술 홍보 업적으로 푸틴이 수여한 러시아 정부 메달을 받은 사업가 수전 레어먼이 거액 후원자로 자리 잡고 있다. 볼쇼이 발레단이 미국을 가면, 일본 재팬아츠, 영국 빅터 호흐하우저 에이전시도 볼쇼이 발레단 초청 사업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향후 한-러 관계가 회복돼도 푸틴 정권과 한몸으로 인식되는 게르기예프와의 관계 설정은 유의해야 한다. 과거에 국내 정치권은 게르기예프와 연결에 적극적이었다. 2015년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은 부산 오페라하우스 건설을 논의하기 위해 게르기예프와 만났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게르기예프를 ‘서울 글로벌 대사’에 임명했었다. 2020년대 후반 예상되는 국내 지자체간 오페라극장 건립 경쟁에서 게르기예프는 외교 관계 호전 여부에 따라 다시 인기를 누릴 공산이 크다.   푸틴과 게르기예프는 서방의 러시아 보이콧을 ‘캔슬컬처’로 규정하면서 상부상조하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지난 3월 크로커스 콘서트장 테러 희생자 추모 공연을 지휘했고, 각지에서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축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푸틴 정부는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 예술인 공개서한에 동참한 블라디미르 우린 볼쇼이 총극장장 사표를 수리하고 지난해말 게르기예프를 5년 임기의 신임 총극장장에 임명했다. 서유럽에선 손절당했지만, 게르기예프는 전쟁 덕에 오랜 개인적 염원인 마린스키-볼쇼이 극장 통합을 관철했다.   그뿐아니다. 게르기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 세바스토폴, 칼리닌그라드의 마린스키, 볼쇼이 분관 인사와 프로그램 책임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연장 건설 관련 이권은 가스프롬, 스트로이가스몬타슈 등 친 푸틴 기업이 선점했다. ‘캔슬컬처’를 비난하며 활동 반경은 자국내로 줄었지만, ‘친 푸틴’ ‘친 게르기예프’ 예술가와 업체는 그리 배고프지 않다. 러시아에선 전쟁 중단 서명에 이름을 올린 예술가들이 ‘캔슬컬처’ 최대 피해자들이다.   서방 핍박 받는 이미지 힘입어 앞길 활짝   케네디 센터의 거액 후원자 수전 레어먼(오른쪽)에게 러시아 정부 메달을 수여하는 푸틴. [사진 러시아 대통령실] 러-우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방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한 거물 음악가의 엇갈린 행보도 주목된다. 1972년 모스크바 태생이지만 1990년 독일로 귀화한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현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은 거듭된 반 푸틴 발언으로 고국에선 배신자로 찍혔고 서방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유롭스키는 최근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예술인은 비정치적일 수 없으며 입장 표명은 정치가 아닌 윤리 문제”임을 주장했다. 크림 분쟁 직후 러시아 정부가 시민권을 제안한 사실도 공개했다.   유롭스키는 시민권을 거절했지만, 아테네 출신의 동갑내기 테오도르 쿠렌치스 현 무지카 아테르나 예술감독은 같은 제안을 수용했다. 쿠렌치스는 러-우전쟁 기간, 명시적으로 푸틴 지지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무지카 아테르나가 서방 제재 대상인 VTB은행 지원을 받은 데 대한 입장 요구에 침묵했고, 서유럽 대부분의 공연장에서 퇴출됐다. 그러나 서방에서 핍박받는 이미지에 힘입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마린스키를 승계할 ‘포스트 게르기예프’ 1순위 입지를 확고히 했다. 쿠렌치스도 게르기예프처럼 전쟁을 통해 본진에서 원하는 바를 얻은 셈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열강을 유지하는 방편은 정치적으론 독재정 회귀, 경제적으론 에너지의 무기화, 군사적으론 나토(NATO) 와해, 문화적으론 게르기예프 역할 극대화로 요약된다. 쿠렌치스는 서방에서 러시아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호평받은 게르기예프의 성공 공식을 따랐고, 지금 태도는 ‘전략적 침묵’으로 읽힌다. 게르기예프가 위원장을 맡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한국인 입상자나 그와 정기적으로 연주한 협연자, 마린스키와 볼쇼이 소속 단원 역시 현재의 외교 상황에 소신을 표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로 현재 러시아 공연 예술은 슬라브주의를 숭상하는 전제 군주제 시절로 돌아갔고, 이는 게르기예프가 푸틴과 협력해 일군 생태계다. 러시아의 예술적 정체성은 무엇이고,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장악한 게르기예프와 그의 뒤를 따르는 쿠렌치스가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러시아에선 사실상 토론이 불가능하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사망에 러시아 예술가들의 추도가 공개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마린스키-볼쇼이 통합이 온당한가에 대한 토의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냉전 시절 정치적 박해를 피해 서방으로 이주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처럼, ‘반 푸틴’ 노선을 분명히 한 유롭스키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 푸틴 생전에 모스크바로 돌아가 연주할 날이 과연 올까.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2024.05.04 00:01

  •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  ‘U23 아시안컵’ 명암 엇갈린 한국·인도네시아   아시안컵 8강에서 인도네시아에 패한 대한민국 선수들이 허탈해하고 있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돌발 악재라기보다는 예고된 참사였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축구대표팀(23세 이하)이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를 맞아 졸전 끝에 패하며 파리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놓쳤다.   한국은 2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아시안컵 8강에서 전·후반 90분과 연장전 30분을 2-2로 마친 뒤 승부차기에서 10-11로 졌다. 8강에서 멈춘 한국은 이번 대회 4강 이상에 오른 팀들에게 주어지는 파리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놓쳤다. 파리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겸하는 이번 대회 1~3위는 파리올림픽에 직행한다. 4위는 아프리카의 기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 승리하면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 한국 축구가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는 건 지난 1984 LA 대회 이후 40년 만이다. 1988 서울 대회부터 시작한 연속 본선 진출 기록도 9회(세계기록)에서 멈췄다.   후반 추가 시간 레드카드를 받은 황선홍 감독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4위 인도네시아에 덜미를 잡힌 한국(23위)의 부진에 대해 축구인들은 “우려했던 상황이 끝내 현실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준비 과정부터 미흡했다.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팀 경쟁력을 가다듬는데 전념해야 할 사령탑(황선홍 감독)이 지난달 A대표팀 임시 사령탑 역할을 겸임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황 감독은 주축 선수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태국 원정 경기를 승리(3-0)로 이끄는 등 A대표팀의 급한 불은 껐지만, 정작 본업인 올림픽팀의 완성도는 챙기지 못 했다.   관련기사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플랜B’에 대한 대비도 부족했다. 배준호(스토크시티), 김지수(브렌트퍼드), 양현준(셀틱) 등 해외파 멤버들의 차출이 쉽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빈 자리를 메울 대체재를 제대로 확보해두지 않았다. 해당 선수들이 최종예선 개막 직전 줄줄이 불참을 통보하자 부랴부랴 대체 선수들을 발탁했지만, 중앙수비수 숫자가 부족해 대회 내내 수비라인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초 황 감독은 다음달 중순께 선임 예정인 A대표팀 정식 사령탑 경쟁에서 한 발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대회 실패와 함께 지도자 인생 최대 위기를 만났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A대표팀 임시 사령탑을 선임할 당시 박항서 전 베트남대표팀 감독 등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굳이 황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겨 올림픽팀 경쟁력을 떨어뜨린 대한축구협회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한 축구인은 “올림픽 10회 연속 본선행이라는 중대한 도전을 앞둔 황 감독에겐 ‘위기에 빠진 A대표팀을 구해달라’는 축구협회의 요청을 거절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황선홍호가 올림픽 본선행에 실패한 배경에는 감독의 책임감을 이용해 A대표팀을 떠넘기다시피 한 협회의 잘못도 크다”고 꼬집었다.     송지훈 기자 song.jihoon@joongang.co.kr

    2024.04.27 00:49

  • 민희진 “제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민희진 “제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민희진 25일 오후 3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경영권 탈취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혔던 민희진(사진) 어도어 대표가 다음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추가 입장을 전했다. 민 대표는 하이브가 ‘프로젝트 1945’ 문건과 카톡 대화 등 증거 자료를 내놓았다고 하자 “대화에는 문맥이 중요한데 전후 상황이 다 배제된 일면이 있다”면서 “상상이 죄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저 혼자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어차피 하이브 컨펌을 받아야한다”고 반박했다. 어도어의 지분은 하이브가 80%, 민 대표가 18%, 직원들이 2%를 갖고 있다.   관련기사 뉴진스 독창성 베꼈나 안 베꼈나, ‘컨셉트 저작권’이 핵심 ‘신인 걸그룹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는 언급이 불러온 파장에 대해선 “뉴진스가 이전 걸그룹 씬의 이미지랑 다르게 반대로 나와서 화제가 된 팀이고 그게 기성화 되는 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 밀도와 지점이 있지 않냐”며 어느 순간 선을 넘었다고 생각돼 이의 제기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순간 ‘내가 죽어야 하나’ 생각할 때 뉴진스 멤버들이 귀신같이 영상 통화를 걸어 함께 울며 ‘사랑한다’고 위로해주니 죽고 싶다는 마음이 빗겨가더라. 얘네가 나를 살렸나 싶고 더 애틋하더라”며 멤버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했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4.27 00:37

  • '팔리는 작품'에 집중, 넷플의 연상호 편애가 불안한 이유

    '팔리는 작품'에 집중, 넷플의 연상호 편애가 불안한 이유

     ━  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연상호 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 [사진 넷플릭스] 요즘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6부작 드라마 ‘기생수’는 3중의 모방 버전이자 확장판 리메이크다. 일본 SF괴수 영화 시리즈인 동명 작품을 가져 왔다. 일본 영화 ‘기생수’는 출판 만화가 원조인데 이 작품 또한 일본의 ‘베끼기’ 특기에 따라 할리우드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 원판은 1956년 돈 시겔이 만든, 이 분야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Body Snatcher)’이다. 돈 시겔 이후 영화계에 ‘바디 스내처’ 장르가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모든 좀비물, 바이러스 영화의 원조 격이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하는 이야기이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누군가, 뭔가에 의해 완벽하게 지배당한다.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날아 온 이상한 꽃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잠이 들면 그 꽃은 인간을 다른 존재로 변이시킨다. 주인공은 잠이 들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넷플서 ‘지옥’ ‘방법 재차의’ 등 선보여   동명의 출판 만화를 실사화한 일본 영화 ‘기생수’. [사진 넷플릭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핵에 대한 공포,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상징화해서 표현해 냈다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돈 시겔은 단순히 한 쪽의 이데올로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한 지배, 그 다른 것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그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매카시즘이 한창인 때였던 지라, 돈 시겔의 속 마음은 나중에 가서야 재평가됐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이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누군가의 지배 의식을 비판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래서 꽤나 양가적(兩價的)이다.   일본영화 ‘기생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갖는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들어냈다. 거기에 일본인 특유의 기벽이자 성벽에 해당하는 괴수 취향을 비벼 넣되 그것을 아예 주가 되게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환호했다. 오다쿠들이 생겨났다. 이번 넷플릭스의 ‘기생수’ 버전인 ‘기생수 더 그레이’를 만든 연상호 감독은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 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식 괴수 영화만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점 하나와, 원본에 해당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 지닌 복잡한 층위의 이데올로기 성향으로도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어려운 정치경제학을 결합시키면 보편성, 대중성을 확장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기생수’는 어느 날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충이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 뇌를 파먹고 변이를 일으켜 괴물로 변하게 한다는 설정이다. 주인공 수민(전소니)은 이 외계 존재에게 완전히 ‘먹히지 않아’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드라마는 내내, 주인공 수민을 둘러싸고 동족이라 불리는 기생수들과 이들을 없애려는 인간들의 전쟁을 그린다. 남일군 남일 경찰서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경감인 철민(권해효)과 경사 원석(김인권)이 갈등을 일으키고 프로파일러 출신의 경정이자 기생생물 전담반인 ‘더 그레이’의 팀장인 최준경(이정현)이 과욕과 집착을 부리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남일군이 고향인 조폭 강우(구교환)의 에피소드가 겹쳐진다. 특이한 것은 이 동족들의 집합 장소가 교회라는 점이고 모임의 방식이 부흥회라는 것이다. 연상호의 트레이드 마크인 종교 비판의 테마가 중첩된다.   모든 좀비물, 바이러스 영화의 원조 격인 1956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 [사진 넷플릭스] 연상호의 대중 전법이야 말로 넷플릭스가 연상호를 ‘최애하는’ 이유이다. 넷플릭스는 연상호와 특이하다 싶을 만큼 잇따라 작품을 내놓고 있는 바, ‘지옥’으로 시작해 ‘방법 재차의’가 있었고, ‘정이’가 있었으며 ‘선산’까지 만들었다. 이 정도면 거의 편애하는 수준이며 극한의 정도이다. 특히 넷플릭스 앞에 놓인 국내 영화계의 기획서, 시나리오가 천 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점을 고려하면, 연상호는 넷플릭스로부터 특혜 아닌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넷플릭스는 왜 연상호를 이토록 ‘애모’하는 것일까. 어쩌면 연상호의 작품에 대한 발상, 작업 방식이야 말로 넷플릭스 철학에 최적화 된 무엇일 수 있다. 연상호는 넷플릭스가 추구하는 최적화된 장르영화를 만들고 있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둔다. 이 전체 시장을 관통시키려면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그래서 어쩌면 덜 철학적이고, 덜 어려우며, 특정의 계급과 계층,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는 논조의 영화를 원한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더라도, 그리고 어떤 나라의 어떤 국민이더라도, 저 얘기가 자신들의 것과 같은 것이라는 동일화, 동조화를 일으켜야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 [사진 넷플릭스] 그러면서도 동질화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연상호의 끈덕지게 이어지는 좀비물, 종교적 광기에 대한 경계심리 등등 작품적 요소가 전 세계에서 아주 쉽게,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똑똑한’ 연상호는 넷플릭스가 그런 걸 원한다는 걸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넷플릭스 측과 늘 절충하되 감독의 자존심도 적당히 내세울 줄 아는 작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상상력을 한국의 CG 능력과 특수효과 기술이 완벽하게 뒷받침 하고 있다. 그가 ‘넷플릭스라는 은하계’에서 거의 최고 등급으로 올라 간 이유이다. 특히 넷플릭스는 현재 동남아 시장, 특히 ASEAN 10개국에서 점유율 1위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현재 동남아 시장 전체 OTT의 47%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K-드라마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연상호의 작품이 내놓을 때마다 거의 매번 톱 위치로 오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생수’는 4월 8일 공개된 후 4월 14일까지 일주일 간 980만 뷰를 기록해 글로벌 시청 1위를 기록했다.   ‘기생수’가 평단에서 다소 엇갈리는 반응을 얻고 있는 것과 달리, 넷플릭스 초대형 블록버스터인 잭 스나이더의  ‘레벨 문’은 망작 중의 망작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두들겨 맞고 있다. 이 작품은 파트 1과 파트 2로 나누어 공개됐으며 ‘파트 2 스카키버’는 최근에 올라 갔다. 파트 별로 약 150분 분량이고 제작비는 약 2억 달러가 소요됐다. 현재 파트 6까지 기획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 쯤으로 여기는 잭 스나이더를 데려와 물심양면으로 그를 후원한 것인데, 한 마디로 ‘앞으로 벌고 뒤로 손해보는 꼴’이 됐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레벨 문’ 망작 평가   넷플릭스 초대형 블록버스터 ‘레벨 문’. 배두나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사진 넷플릭스] 잭 스나이더의 이 저급한 SF도 ‘기생수’ 처럼 어디서 가져 온 것이긴 하다. 한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다수의 용병들을 선발해서 데려온다는 이야기는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4년작 ‘7인의 사무라이’와 판박이다. 아키라의 이 전설적 영화는 안톤 후쿠아 감독이 2016년에 ‘매그니피센트7’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이병헌이 출연한 작품이다. ‘레벨 문’에는 배두나가 출연한다. 넷플릭스의 ‘단순 무식’ 제작 원칙에 따라 ‘레벨 문’에는 ‘7인의 사무라이’가 표방하는 사회적, 개인적 정의의 간극이 어떻게 시대에 따라 변질되는가 따위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넷플릭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초기에 보여 준 예술 지상주의 스피릿이 모두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복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는 초기에 현대 영화사의 전설로 꼽히는 오손 웰즈의 미완성작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을 프로듀서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와의 협업을 자청해 완성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만들어 아카데미 감독상을 타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연상호를 애정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할 것이 아니다. 대대적으로 실패했다 해도 잭 스나이더를 좋아하는 것도 뭐라 할 수가 없다. 다만 작은 영화, 의미 있는 작가영화에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인다. 넷플릭스의 장기 플랜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예술적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초기 넷플릭스의 계획이었다. 스틱 투 더 플랜. 인생이나 사업이나 계획대로 해야 할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2024.04.27 00:19

  •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한국까지 잡은 신태용 매직…비결은 '존중의 리더십'

     ━  ‘U23 아시안컵’ 명암 엇갈린 한국·인도네시아   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 대표팀 감독이 2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아시안컵 8강전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매우 기쁘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론 너무 처참하고 힘들다.”   한국을 꺾고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4강에 오른 신태용 감독이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신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는 26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한국과의 8강전에서 연장까지 2-2로 비긴 뒤 12번째 키커까지 나선 승부차기에서 11-10으로 승리해 4강에 진출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이후 68년 만의 올림픽 본선행 가능성을 높였다. 이번 대회 3위까지는 파리 올림픽에 직행하고 4위는 가나와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인도네시아는 사우디-우즈베키스탄전 승자와 준결승을 벌인다.   반면 한국은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인도네시아에 충격적인 일격을 당하며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신 감독은 4강에 오른 비결에 대해 “4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선수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기부여만 해주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대표팀 사령탑까지 투잡 뛴 황선홍…예견된 ‘도하 참사’ 한편 인도네시아축구협회는 신 감독과의 계약을 2027년까지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신 감독은 부임 후 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서 뛰고 있는 혼혈 귀화 선수들을 대거 발탁, 대표팀의 체격과 체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등 인도네시아 축구를 근본부터 바꿨다는 찬사와 지지를 받고 있다.   신 감독과 인도네시아의 인연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맡아 세계 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꺾어 탈락시키는 대이변을 연출한 뒤 쉬고 있을 때였다.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에서 대한축구협회(KFA)로 ‘신태용 감독 연락처를 알려 달라’며 이름을 콕 집어서 문의가 왔다고 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서 5전 5패를 하던 중이었는데 신 감독은 ‘인구 수나 축구열기가 나쁘지 않은 나라인데 왜 이렇게 FIFA 랭킹과 축구 수준이 처져 있나.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 2월 잠시 귀국한 신 감독을 만났다. ‘신태용 매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팬들이 한국과의 아시안컵 8강전을 관전하며 환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현지에 가서 보니까 어떤 문제점과 가능성이 있었는지 물었다. 신 감독은 “선수들이 축구를 20분 정도밖에 하지 않는 스타일과 체력이더라. 체력이 있을 때는 발 기술이 좋아 보였는데 20~30분 지나고부터는 거의 걸어 다니는 수준이었다.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코어 운동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튀긴 음식과 맵고 짠 음식을 주로 먹는 식단부터 바꾸고 웨이트 트레이닝과 코어 훈련에 집중했더니 선수들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스스로 개인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체력을 올린 다음엔 마인드 컨트롤, 즉 멘탈에 집중했다고 한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되고, 거짓말 해선 안 된다는 걸 강조했다. 거짓말이란, 자기가 실수를 해 놓고도 동료가 패스를 잘못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선수들이 시간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겼다. 심지어 대표팀 소집을 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안 온 선수도 있다. 그런 친구들은 다 집에 보내버렸다. 지금은 철저히 규율이 잡혀 있다.”   신 감독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여기에 녹아들려는 ‘존중의 리더십’을 꼽았다. 그는 “무슬림으로서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 1%도 터치하지 않고 존중해 줬다. 다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바꿔라’고 요구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목이 타고 힘들어도 물을 서서 마시지 않고 앉아서 마시는데, 신에 대한 존경을 담은 행동이라고 한다. 제발 좀 서서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생각의 틈을 좁혀가는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중도 퇴진으로 공석이 된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신 감독도 유력 후보로 올라 있었다. 실제로 지난 2월 인터뷰에서 “KFA에서 제안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건가”라고 묻자 그는 “아직 KFA에서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연락이 온다면 그때부터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대표팀을 다시 맡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계약 만료(올해 6월)를 앞두고 일찌감치 신 감독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한국행 가능성은 사라졌다.   신 감독은 “지금 나는 인도네시아 대표팀을 맡고 있다. 인도네시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밤잠 설치고 응원해 준 인도네시아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 축구와 선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지금 비록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팬들이 조금만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면 머지 않아 ‘아시아의 호랑이’ 위용을 되찾게 될 거라고 믿는다. 특히 대표팀의 젖줄인 프로축구 K리그에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2024.04.27 00:01

  • 뉴진스 독창성 베꼈나 안 베꼈나, '컨셉트 저작권'이 핵심

    뉴진스 독창성 베꼈나 안 베꼈나, '컨셉트 저작권'이 핵심

     ━  하이브 막장 내분 사태   컨셉트 카피 논란으로 떠들썩한 걸그룹 뉴진스와 아일릿(아래 사진). 뉴진스는 5월말 국내 컴백 등을 예정대로 진행할 예정이다. [중앙포토] ‘뉴진스 맘’ 민희진 표 막장드라마가 장안에 화제다. 경영권 탈취 의혹으로 하이브의 감사를 받던 어도어 민희진 대표가 25일 욕설과 오열로 점철된 분노폭발 기자회견을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막장드라마의 발단은 최근 데뷔한 걸그룹 아일릿이 묘하게 뉴진스를 카피했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뉴진스는 K팝 대표주자 하이브가 SM엔터테인먼트에서 활약하던 비주얼 디렉터 민희진을 영입해 만든 레이블 어도어가 2022년 데뷔시킨 걸그룹으로, ‘BTS 여동생 그룹’으로 통한다. 남성들의 판타지에 기대어 ‘섹시’와 ‘청순’을 오가던 걸그룹 클리셰를 뒤집은 독보적인 컨셉트로 탄생과 동시에 ‘또래들의 워너비’가 됐다.   관련기사 민희진 “제 지분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지난 3월 하이브의 또 다른 레이블 빌리프랩에서 방시혁 의장이 직접 프로듀스한 아일릿을 두고 민 대표가 “뉴진스의 컨셉트와 마케팅 방식을 그대로 베꼈다”며 ‘내부 고발’ 형식으로 항의한 것. 이에 하이브는 경영권 탈취 의혹을 제기, 민 대표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대표직 사임도 요구받은 민 대표는 “뉴진스의 문화적 성과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항의”라고 반발했다.   복잡해 보이는 막장드라마 플롯의 핵심은 ‘뉴진스의 문화적 오리지낼리티를 아일릿이 침해했느냐’의 공방이다. 민 대표는 아일릿 뿐 아니라 보이그룹 투어스·라이즈까지 ‘뉴진스 아류그룹’이라며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주장했고, ‘컨셉트 저작권’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이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뉴진스도 데뷔초 90년대 일본 걸그룹 ‘스피드’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블랙핑크 이후 비슷한 걸그룹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럼 테디는 뭐냐” “시대의 아이콘이 됐으니 아류의 등장은 당연하다” “민희진의 자의식 과잉”이라는 댓글도 많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음악시장에서는 ‘썸띵 뉴’, 즉 새로운 것이 절대적이기에 아이디어와 컨셉트 자체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아일릿이 뉴진스의 개념을 카피했다는걸 누구나 인정한다면 민희진도 설득력 있다”면서, 욕설 기자회견을 두고도 “우리나라에서 욕설까지 해가며 자신만만하게 자기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 있었나. 그런 배짱으로 만든 게 뉴진스”라고 말했다.   컨셉트 카피 논란으로 떠들썩한 걸그룹 뉴진스(위 사진)와 아일릿. [중앙포토] 업계에선 이 사태를 아이디어 도용에 대한 인식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정지우 변호사는 “아이디어가 저작권 보호 대상은 아니지만 컨셉트가 표현된 디자인이나 형태, 색감을 구체적으로 따라하면 저작권 침해라는 접근도 가능하다”면서 “저작권 범위가 넓어지고 있고, 부정경쟁방지법 같은 다른 법으로 아이디어를 보호할 여지도 있다. 아이돌의 컨셉트가 고도의 노력과 창작성을 갖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법형식만 따르기보다 폭넓게 보호할 방법을 찾는 게 현대 문화산업의 의무”라고 말했다.   하이브가 매출 2조원을 달성하며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혀온 국내외 멀티레이블 체제에 대한 회의론도 나온다. 절대적인 구심점 없이 한지붕 아래서 매출 경쟁을 하다가 이런 사태가 터졌다는 것이다. 임진모 평론가는 “멀티레이블은 음악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다양성 확보 방식으로, SM이 멀티칼라로 먼저 가동해왔다”면서 “하이브는 다양성이 아니라 돈을 좇다보니 예술적 결핍을 자초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사태로 잠재돼 있던 K팝 위기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해 카카오와 SM엔터테인먼트 간 경영권 분쟁, 걸그룹 피프티피프티와 소속사 간의 분쟁까지 소개하며 이번 사태가 “K팝 산업을 강타한 여러 분쟁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K팝의 위기는 산업 과몰입으로 인한 예술성 후퇴의 결과일 수 있다. 임 평론가는 “최근 아일릿과 르세라핌의 라이브 논란으로 K팝이 산업적 크기만 생각했지 예술적 깊이를 추구하지 않은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나 헤비메탈이 성장할 때도 시장의 인정과 동시에 예술적 깊이가 있었다. 아무도 K팝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 그나마 뉴진스는 나름의 자기 행보를 밟았기에 손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4.27 00:01

  • AI 진화의 역설, 개인·기업 은밀한 정보까지 공개 요구

    AI 진화의 역설, 개인·기업 은밀한 정보까지 공개 요구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설마설마했던 인공지능이 부쩍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챗GPT를 통해 일반인들이 처음 접한 인공지능의 모습은 놀라움과 함께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 인간만큼 자연스럽고 뛰어나진 않지만 챗GPT가 일반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챗GPT와 대화를 하다 보면 반대편에 어떤 사람이 앉아서 내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AI, 요구하는 것 없이 아낌없는 도움 줘   많은 가정이 자가용 자동차를 한 대 이상 소유하고 있듯이 가까운 미래에는 가정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인공지능 로봇을 한 대 이상 구매할 것이라는 예상도 더 이상 미래의 공상과학 만화 속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도 돌보고, 노인을 간병하고, 청소나 요리 등의 허드렛일을 모두 로봇이 맡는다면 인간은 보다 안락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 노인이 될 나 자신도 간병 로봇을 구입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저축을 시작할까 즐거운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곧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설 것이라는 많은 예측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챗GPT가 가장 잘하는 업무가 바로 어떤 서류를 보고 요약하는 것이다. 영어로 작성된 100페이지의 자료를 챗GPT에게 한국어 2페이지로 요약하라고 하면 아주 빠른 시간에 상당히 정확히 요약해 준다. 신입사원에게 이러한 작업을 시킨다면 신입사원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제 많은 직장에서 신입사원이 하던 일을 챗GPT가 해준다는 말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에 미칠 영향을 보여주는 많은 영화 중의 하나가 ‘그녀(her)’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와 이혼을 준비하면서 별로 행복하지 않은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가 이 주인공은 형체는 없고 목소리로만 소통할 수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로 답해주는 인공지능 서비스는 이 주인공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주인공이 지금까지 만났던 애인이나 친구 모두 주인공이 그들의 관심사를 알아내 기분을 맞춰줘야 했던 것에 반해, 인공지능 서비스는 주인공이 원하는 주제로 대화하고 주인공이 직장에서 하는 업무에도 최대한 도움을 준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2014년 영화 ‘그녀(her)’의 한 장면. [사진 안나푸르나 픽처스] 당연히 주인공은 인간의 배우자나 친구보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아낌없이 도와주기만 하는 인공지능 서비스를 좋아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공지능 서비스는 사용자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자신의 주장을 한다든지 사용자에게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달라고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라는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중 한 가지가 해당 인공지능 서비스가 자기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수백 명의 인간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주인공이 알게 된 것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시에 사귀고 교류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인공지능 서비스는 주인공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것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했다. 그뿐 아니라 주인공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이 동시에 사귀고 있는 수백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주인공으로서는 사람과 달리 인공지능은 마음 놓고 비밀을 이야기해도 괜찮을 줄 알고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나누었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버리고 만 것이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특징은 학습능력에 있다. 챗GPT는 우리의 질문에 답을 해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학습해 더 영리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챗GPT와 이야기하면서 그 능력에 놀라는 것은 챗GPT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배우고 향상한 능력을 현재 나와 이야기하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가정에서 간병이나 가사를 위해서 도우미 인공지능 로봇을 사용할 경우, 우리 가정에서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이 저 멀리 외국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두뇌에 보내지고 입력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넓히는데 사용될 것이라는 얘기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에 내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간병인 로봇을 구매해 사용한다면 솔직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병든 모습이 외부에 알려진다는 말이 된다.   내가 가정에서 내 가족과 나누는 이야기가 비밀이 아닐지라도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인데, 인공지능은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집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우리 가족의 적나라한 이야기를 모두 중앙의 거대한 두뇌에 보고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괜찮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새로운 지식 넣어줘야 갈수록 우수해져   기업의 경우에는 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만드는 어떤 기업은 인공지능 서비스를 이용해 공정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새로운 디자인이나 엔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공지능이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자동차 생산에 관한 지식을 이미 학습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런 자동차 생산에 관한 지식을 인공지능이 어디에서 배웠을까 생각해보면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이 바로 다른 자동차 회사가 될 수밖에 없다. 즉, 해당 자동차 기업을 도와주고 있는 인공지능은 다른 자동차 기업을 도우면서 학습한 지식을 내게 주고 있는 셈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해당 자동차 기업은 인공지능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에게 자동차 제조 과정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게 되는 셈이고, 그런 새로운 지식을 얻은 인공지능은 내 경쟁자에게 그 경험과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자신의 지식을 다른 개인이나 기업들과 공유하는 것은 좋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학에는 ‘공유의 비극(tragedy of commons) 현상’이 있는데, 어떤 지식이나 자원이 공유되기 시작하면 참가자 스스로 노력해서 지식을 만들어내거나 자원을 만들어내지 않고 남의 지식이나 자원을 공유해서 나눠 받으려고만 해서 결국 사회의 지식이나 자원이 모두 고갈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챗GPT와 같이 인간의 지식을 학습해 다른 인간을 돕는 시스템의 인공지능이 경제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공유의 비극 현상을 초래하지 않도록 새로운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머나먼 외국의 중앙처리장치에 연결되지 않고 내 가정에서만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내 기업에서만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유능한 인공지능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챗GPT와 같이 우수한 인공지능은 수십조원에 달하는 투자로 거대한 설비를 갖춤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단순히 무수한 반도체를 구입해 설비를 갖추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머리는 좋지만 아는 것이 없는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인공지능에게 부모나 학교의 선생님처럼 지식을 넣어주고 공부를 시키는 작업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챗GPT가 시간이 갈수록 더 우수해진다는 것이다.   가정용 로봇이나 컴퓨터에만 존재하는 작은 인공지능 서비스는 중앙의 거대한 투자 설비를 이용한 인공지능 서비스와 경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기업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중앙의 거대하고 우수한 인공지능 두뇌와의 연결을 포기하고 작은 나만의 인공지능을 통해서 기본적인 서비스만 받을 것인지, 아니면 첨단 인공지능 서비스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맛보기 위해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기업의 비밀을 희생할지가 향후 인공지능 서비스를 우리 생활에 받아들이는데 큰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은 단순히 일자리의 문제이거나 생산성의 향상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여러 제도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 봐야 하는 여러 가지 도전들을 안겨줄 것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4.27 00:01

  •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보수 정당에서 ‘남원정’은 단지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을 한정하는 건 아니다. ‘올드한 영남당’을 개혁하려는 수도권 출신의 ‘젊은 목소리’를 상징한 세력이기도 했다. 함께 성장하며 대선주자의 반열로도 올라섰다.   김재섭(左), 김용태(右) 22대 총선에서 ‘남원정’을 떠올리게 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의원 배지를 달았다.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인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된 김재섭(37) 당선인과 한때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의 지역구였던 포천-가평에서 당선된 김용태(34) 당선인이 그들이다. ‘친이준석계’로 분류되는 둘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과 친윤계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김재섭 당선인은 12일에도 “여당이 너무 정부와 대통령실에 종속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며 “22대 국회에서는 정부와의 건전한 긴장관계를 통해 정부와 협력하면서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가진 여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두고도 “우리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에 대해서도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라고 했다.   관련기사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국민의힘 최연소 당선자인 김용태 당선인도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이 책임을 갖고 국민의 상식에 부합할 수 있는 모습들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중 김용태 당선인은 이준석계의 ‘천아용인(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 중 한 명이었고 셋(천하람·허은아·이기인)이 탈당했을 때 당 잔류를 택했다.   이준석, 천하람, 이주영(왼쪽부터 순서대로) 이준석·천하람 두 사람은 개혁신당 간판으로 화성을과 비례대표로 각각 당선됐다. 천 당선인과 함께 개혁신당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았던 82년생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교수도 비례대표 1번으로 22대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이들은 스스로를 ‘범야’로 규정한다. 이준석 대표는 “여당이 정말 준엄한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며 “바로 직전에 전국 단위 선거에서 대승을 이끌었던 그 당의 대표였던 사람이 왜 당을 옮겨가지고 이렇게 출마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것에 대해서 윤 대통령이 한번 곱씹어보셨으면 하는 생각”이라며 윤 대통령을 정면 겨냥했다.   현재 ‘여야’로 나뉘어있지만, 보수 진영에서 비슷한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있다. 김재섭 당선인은 “(이 대표) 스스로 범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지만 중도정당이 아니라 늘 보수정당임을 자처했다”며 “보수의 적통을 자처했던 사람이기에 결국 가는 큰 방향성 자체는 같다”고 했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왼쪽부터 순서대로) 윤종빈 명지대 교수는 이들에 대해 “30~40대의 젊은 정치인으로 기성 정치를 쇄신하려고 한 ‘남원정’과 나이, 행보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남원정’보다 정치적으로 더 험한 자갈밭을 걸어 당선됐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며 “이 대표의 경우 페미니즘, 노인 무임승차 등 민감한 이슈들을 피하지 않고 건드려 온 점이 기성 정치에서 벗어나 보여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동수 청년정치 크루 대표도 “민주당에서 청년 정치인이라고 불릴만한 당선인들은 주류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보수 진영에선 쓴소리하는 정치인들이 자력으로 지역구를 돌파했다는 점에서 보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발판을 마련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종북에 대한 비판이나 영남에 갇힌 지역적 한계를 깨고 2030이 원하는 이슈를 많이 다뤄야 한다”며 “그러면 이들의 당선이 반짝 이슈를 넘어서 보수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란 지적도 있다.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 벌써 ‘남원정’을 연상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새로운 정치 세대로서 이들에게 그 정도 맹아(萌芽)가 있는지는 이제부터 증명해야한다”고 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4.04.13 01:18

  •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한 심상정 녹색정의당 의원. [뉴시스] 녹색정의당(이하 정의당)이 4·10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2.14%로 비례의원 배출에 실패했다. 심상정 의원도 지역구(경기 고양갑)에서 16년 만에 낙선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제22대 국회에서 정의당은 0석, 원외 정당이 됐다.   정의당의 빈자리는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이하 준연동제)로 생겨난 ‘2중대 정당’이 대신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조국혁신당이 득표율 24.25%로 당선인 12명을 배출해 원내 3당이 됐다. 범야권 지지층이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를 외치며 전략적 분산투표를 벌인 결과다.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특권정치를 기필코 끝내겠다”(심상정)며 정의당 주도로 도입했던 준연동제가 빚어낸 아이러니다.   거대 양당의 위용은 이번에도 끄떡없었다. 이들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과 국민의미래는 각각 14석과 18석을 챙겼다. 21대 총선 때보다 더 뻔뻔하고 재빨랐다. 위성정당 창당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고, 정당 기호 선순위를 받기 위한 현역 의원 꿔주기도 4년 전과 판박이였다. 양당 대표도 “국민만 찍자”, “더불어 몰빵”을 외치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다당제 실현이라는 선거제 개혁의 취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관련기사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민주당은 더 나아가 어떤 군소정당과 후보들을 자신의 위성정당에 입주시킬지 선택까지 했다.  거대 정당의 특권이 더 강화된 역설이다. 이걸 거부한 정의당은 다시 원외가 됐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당시 민주노동당, 지역구 2, 비례 8)을 배출하면서 시작된 ‘독자적 진보정당’ 노선의 비극적 말로다. 반면 역시 민주노동당의 후예를 자처하는 진보당은 민주당 위성정당에 들어가 비례 2석과 야권 단일화 지역구 1석(울산 북구)을 챙겼다. 사회민주당과 기본소득당도 한 석씩 받았다. 이준한 인천대(정치학) 교수는 “진보정당이 스스로 힘을 키워 국민의 지지를 받기보단, 거대 정당과 선거연합을 하거나 공천 나눠 갖기를 하는 기형적 문화가 완성됐다”고 비판했다.   준연동제가 도입 때부터 정치 세력의 담합에서 시작된 만큼,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당은 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2019년 민주당이 원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검경수사권 조정법을 패스트트랙에 태워 동시에 처리했다. ‘조국 사태’ 때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적격하다는 의견을 내면서 “정의당에서 정의가 사라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진만 덕성여대(정치학) 교수는 “정의당의 기대와 달리 거대 양당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준우 상임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지도부는 12일 오전 노회찬 전 의원 묘소가 있는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을 참배해 “부족함을 고백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저희를 찍어주신 60만 시민의 응원과 격려 속에서 다시 외롭지 않은 길을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의당의 장래가 밝진 않다. 정의당 창당 멤버인 한창민 초대 대전시당위원장은 민주당 위성정당 비례 10번으로, 신장식 전 정의당 사무총장은 조국혁신당 비례 4번으로 당선증을 쥐었다. 옛 정의당 지도부 인사는 “우리가 나이브했다”고 말했다.     강보현 기자 kang.bohyun@joongang.co.kr

    2024.04.13 01:12

  •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  정당학회·중앙SUNDAY 총선 좌담 - 전문가들이 본 4·10 총선   4·10 총선 이후 한국 정치가 미지의 경로로 들어섰다. 최고의 여소야대(與小野大)다. 노태우 대통령이 총선 후 20개월만인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나섰을 때 여당(민정당)은 지금보다 17석 많은 125석(전체 299석)이었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 임기 내내 여소야대를 한다는 게 (여권으로선) 가장 뼈아픈 지점이 아닐까 싶다. 양극화 과정이 심한 가운데 ‘분점 정부’(의회 다수당과 대통령 소속 정당이 다른 것)가 되면 정치든 협치를 통해 성과를 내야 할 텐데 지금 구도에선 상당히 불리하다. 이제 시간은 야당 편이다.”   “전국 선거처럼 치러져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은 다 표출됐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정당이나 지역구 의원들을 평가할 기회는 놓친, 되게 잃은 게 많은 선거일 수 있다.”   관련기사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11일 중앙SUNDAY와 한국정당학회(회장 박원호 서울대 교수)의 긴급 총선 좌담회에서 나온 진단들이다. 박 회장과 박현석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과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임유진 강원대 교수가 함께했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협치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175석의 더불어민주당엔 ‘제도적 인내’(forbearance)를 요청했고, 쪼그라들고 있는 국민의힘에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상대가 잘 안 돼야 내게 집권기회가 오는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고민도 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왔다. 윤 대통령에겐 개헌 이니셔티브가 기회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  정권 심판론 커지며 ‘전국 선거’ 돼버린 총선…지역구 의원 평가할 기회 사라져     초유의 여소야대를 만들어낸 4·10 총선 다음날인 11일 중앙 SUNDAY와 한국정치학회가 총선 민심을 논의할 긴급 좌담회를 마련했다. 왼쪽부터 박원호 정당학 회장(서울대)과 박현석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임유진 강원대,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교수. 김상선 기자 결국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재묵=“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대통령에 대한 불만 중 윤 대통령은 특히 불통·일방독주가 많다. 처음엔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이젠 외신에서도 ‘입틀막’이라고 한다. 여당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도 지나치게 용산 입김이 들어갔다는 보도도 있었다. 야당 대표가 아무리 인기 없고 사법리스크가 있다 해도 대통령이 2년간 안 만난 경우는 없었다. 사법 리스크가 있는 건 사법부가 판단하면 될 문제이지, 행정부 수반이 판단할 건 아니다. 야당과 소통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박현석=“대통령의 소통은 정치권 내 반대자들과의 소통과 국민·유권자·시민과의 소통, 두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 둘 중 하나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의대 증원 문제도 전형적인 예다. 민주당도 의대 정원 증원을 주장했었다. 지금이라도 소통해야 한다.”   4·10총선 당선인 분석 임유진=“정당 내부도 소통 자체가 너무 안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선거에서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운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걸 잘 봐야 한다.”   박원호=“윤 대통령이 특정 정책 영역에서 굉장히 큰 실책이 있었다기보다 스타일이나 컬처라고 해야 하나 그런 문제가 지적되곤 하는데, 저도 동의한다. 한국에서 소위 보수가 새로운 기반(segment)을 찾은 게 2007년, 2008년 MB(이명박)를 당선시킬 때였다. 당시 정두언 의원이 3중(中)을 말했다. 정치적 중도, 영호남이 아닌 서울, 그리고 중산층이다. 좀 리버럴한 스타일로 민정계 보수와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다. 박근혜 정부 때 떨어져 나갔고 촛불을 들었고 윤 대통령을 찍었다. 이들이 지금의 윤 대통령과 문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느냐,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아무리 밀턴 프리드먼 책을 가지고 입으론 자유주의를 말해도 행동은 자유주의가 아니지 않나. 리버럴한 이들 유권자를 끌고 갈 정도의 힘이라면 이준석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당 안에 함께 있지 못하고 쫓아내니 이길 수가 없다.”   박 교수는 2016년 총선이 정당과 유권자 간 안정적이고 장기적 관계 맺기가 흔들린 순간(realignment·리얼라인먼트)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민주당에 변함없이 강한 지지를 보내는 4050세대가 인구학적 다수를 점하면서다. 그는 ‘보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석·이재묵 교수도 비슷한 인식이다. 실제 2008년 총선 이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작아졌다(18대 153석→151석→122석→103석→108석). “이번에 수도권에서 살아남은 후보들을 보면 다 중도에 가깝다. 보수정당이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은 나와 있다”(박현석), “수도권 중심, 앞으로 성장할 세대 중심으로 노선을 재정비해야 하는데, 자꾸 선거 결과가 영남 쪽으로 국한된다. 대통령도 위기의식을 느끼면 대구 서문시장에 가지 않나”(이재묵)라고 했다.   4·10총선 지역별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 결국 정권심판 선거가 됐다.   이재묵=“총선을 통해 지역구에서 4년간 제대로 일했는가를 보고 잘한 사람은 더 칭찬해주고 못 한 사람은 벌해야 하는데 대통령에 대한 불만, 중간평가의 수단으로만 온전히 써버리게 되니까 결과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은 다 표출됐지만, 유권자들 입장에선 지역구 의원들을 평가할 기회는 다 사라진 셈이 됐다.”   임유진=“의회 정치를 잘하는 나라를 보면 대부분 의원이 선수(選數)가 높다. 우린 공천에서 제일 마이너스 되는 게 선수였다. 이들의 전문성은 무시되고 윤석열·이재명과의 관계만 남아 아쉽다. 학생들에게 진짜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박원호=‘전국 선거’가 돼, 로컬(지역구) 이슈들은 다 사라져 버리게 됐다. 전국 선거 프레임은 여당엔 절대로 유리할 수 없다. 지지율 36%짜리 대통령의 코테일(coattails, 선거에서 같은 당의 후보자들을 함께 당선시키는 대통령이나 유력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해볼 수 있는 게 없다.   윤 대통령은 정치인 되길 꺼린 것 같다.   박원호=“아직 정치인이 아닌 듯하다. 용산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걱정스럽다.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게 정치도 전문직이란 거다. 대통령만 아니라 국회의원도 몇 선씩 한 사람들은 전문직이다. 입법도 나름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다. 물갈이의 이면엔 막대한 코스트가 있다.”   한 위원장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나.   박현석=“신선했고 팬덤이 있었지만, 대세를 어찌 해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정치인으로 훈련받지 않아서 국가 비전이 없다 보니 (한 위원장에게서) 나오는 말들이 다 민주당을 공격하는 것들이었다. 그게 여당 포지션이면 표를 얻기 힘들다. 당으로 봐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한동훈 개인으로 보면 고생스럽긴 했겠지만, 정치가 정말 힘듦을 크게 깨달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본다.”   이재명 대표는 초유의 거대 여당 대표지만 사법 리스크는 여전하다. 사법부가 고민하게 될 듯하다.   박원호=“이 대표가 잘해서 압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본인이 선택한 거다. 만약 대통령의 비토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200석을 넘겼다면 훨씬 더 압박·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이 대표가 정치력이 있다면 당장 무엇을 한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 결과가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문제를 옆으로 제쳐놓으면 이 대표로선 급할 게 없다. 기다리고 있으면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박현석=“8월이면 전당대회다. 조국혁신당이 있고 전대를 하게 되면 강성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이 있기에 이 대표에게도 기회가 있을 수 있으나, 이 대표도 반대보단 국가를 끌어갈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대안도 비전도 꼭 제시해야 한다.”   임유진=“대항하고 적대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워왔기 때문에 180석 가까운 걸 이끌며 더 커지고 더 싸우게 될까 걱정이다.”   박원호=“민주주의가 존속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제도적 인내’다. 권력의 자기 자제다.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데 무력화하지 않는 것 내지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울 수 있음에도 여당 등 다른 정당과 협력해 진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야권의 압승에 조국 대표가 결과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다. 12석의 대표가 됐는데 그가 정치적 용서를 받았다고 보나.   이재묵=“지지를 확인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4050에선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조사를 보면 20대에선 0% 나왔다. 안티테제로만 어필했다. 다음 대선을 생각하려면 분명 확장성이 있어야 한다.”   박원호=“어떤 연구자가 카톡으로 ‘도덕성에는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다’고 보내왔더라. 측은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로 정치적 미래, 대선주자까지 갈 수 있느냐, 전 지금은 좀 아닌 것 같다.”   이번에도 거대 양당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우회해 위성정당을 만들며 비례의석을 대거 휩쓰는 폐해를 보였다. 동시에 민주당·국민의힘의 득표율은 5.4%포인트 차에 불과했으나 지역구 의석은 71석이나 차이 나는 비례성 문제도 여전했다.   위성정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박원호=“위성정당은 제도를 해킹한 것이다. 원래 멸칭(蔑稱)인데 이젠 준위성정당이란 희한한 얘기까지 한다. 병립형보다 지금이 더 나쁜 것 같다. 지역구 정당은 위성정당 여러 개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수 있었다. 이번 선거사에 기록될 것 중 하나는 정의당 계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의석 획득 기준인 3%에 미달한) 2.14%였다. 위성정당 안에 안 들어가서 그런 건데 안타까운 일이다.”   박현석=“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게 비례성 높은 선거제가 필요하고 소수의 목소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게 하려는 거였는데 둘 다 실패한 셈이 됐다. 양당 간 불비례성이 정치를 나쁘게 만드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비례의석을 넓혀가면 군소 정당의 진입 장벽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희망한다.”   단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싸우는 게 정치를 나쁘게 한다는 점에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려면 개헌해야 하지만.   박원호=“대선뿐 아니라 지역구 선거까지 결선투표하자고 말해왔다. 지금은 유권자들에게 0 또는 1의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게 돼 있는데 그거 말고도 다른 옵션이 많다는 걸 알려야 한다. 결선투표하는데 150억~200억원이 든다고 하는데 갈등을 더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쓰는 건 별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손대기 어렵게 돼 있다. 정권 초기엔 누구도 안 하려고 한다.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려나. 뭔가 판을 흔들고 싶다면 꺼낼 수도 있긴 하겠다.”   이재묵=“선거도 선거지만 다들 대통령제에 문제 있다는 걸 안다. 제로섬이다. 상대 진영의 대통령이 성공하면 나의 집권 기회는 줄어드는 거니, 협치보단 상대가 잘 안 되어야 하는 게 구조화되고 있다. 그간 불행한 대통령이 많았다. 정치인들이 이제는 여야 할 것 없이 권력구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4.13 00:01

  • 죽은 반려견 빼닮은 인형 만들고 동물 복제까지 시도

    죽은 반려견 빼닮은 인형 만들고 동물 복제까지 시도

     ━  펫로스 증후군 앓는 반려인 급증   펫로스 “털뭉치 모아놓은 병을 매일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아직은 보낼 때가 아니잖아요.” 10년간 함께했던 반려견 ‘싼쵸’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낸 지 20일이 지났지만 여느 때처럼 집에 보관 중인 유골함 앞에 밥도 주고 물도 준다. ‘싼쵸 아빠’ 강성일(41) 반려동물장례연구소장 얘기다.   지금까지 1만2000여 마리의 장례를 도왔던 그는 지난 7일엔 자신의 아이를 직접 염했다. 강씨는 그때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너무 힘들었다. 손쓸 새도 없이 떠나 버려서….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복제라도 하고 싶었다.” 지난 1월 심장병을 앓던 반려견 ‘기동이’를 보낸 정소현(30)씨도 16년간 동고동락한 기동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씨는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며 힘들어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면서 ‘펫로스 증후군(반려동물 사별 후 겪는 우울감)’을 호소하는 반려인들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 결과 2022년 반려동물 양육 인구는 602만 가구에 1306만 명으로 집계됐다. 네 가구 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얘기다. 지난 23일 ‘국제 강아지의 날’엔 페북에만 축하 기념글이 150만 개나 게시되는 등 반려동물은 이제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KB경영연구소 조사에서도 반려인의 81.6%가 ‘반려동물은 가족’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문제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펫팸족’이 늘어나면서 사별에 따른 후유증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북대병원 정운선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8월 국제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반려동물과 사별한 지 1년 미만인 반려인의 79%가 중증 이상의 우울감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포메라니안 ‘코난이’를 떠나 보낸 김모(34)씨도 “사고로 죽을 뻔했을 때 코난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런 생명의 은인이 먼저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며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이처럼 펫로스 증후군을 겪는 반려인들이 늘면서 인형 제작이나 음악·미술 치료 등 우울감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코난이 아빠’ 김씨도 최근 인형을 주문했다. 사진만 보내면 똑같은 외형으로 제작되고 생전의 수염과 털도 심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김씨는 “코난이와 너무 똑같이 생겨 받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말했다. 인형 제작자 김설아씨는 “지난해엔 주문이 두세 배 늘면서 연 200개 이상 판매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근엔 펫로스 극복을 위해 ‘동물 복제’까지 시도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연초엔 한 유튜버가 복제한 반려견 영상을 올리자 찬반양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최근 인터넷 카페엔 반려동물의 체세포 채취 및 보관 방법을 묻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현재 국내법상 동물 복제는 합법·불법 여부에 대한 법조항조차 전무한 상황에서 국내외 복제 업체에 개별적으로 의뢰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반려동물에서 채취한 체세포는 액화질소로 냉동 보관해야 하는 등 보관 비용만 1년에 최대 1000만원 들고 복제 비용도 견종에 따라 6000만원에서 최대 1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도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와 관련,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최근 유튜버가 의뢰한 복제 업체를 고발했다. 조 대표는 “복제하려면 최소한 대리모견 10마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측면도 문제점 중 하나로 지목된다. 조 대표는 “생명윤리적으로 동물도 인간과 동등하게 봐야 하며 따라서 동물 복제가 수단화돼선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래 반려동물과 성격 등이 결코 똑같을 수 없다”는 것도 반대 이유로 꼽힌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동물 복제는 ‘copy’가 아니라 ‘cloning’의 개념으로, 기존 반려동물과는 사뭇 다른 유전형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심할 경우 예상치 못한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찬성 쪽 목소리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펫로스 증후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행복추구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한재언 변호사는 “동물의 생명도 소중한 건 맞지만 헌법상 인간과 동등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며 “현행법상으로도 인간의 행복추구권이 우선돼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박세필 제주대 줄기세포연구센터장도 “반려동물을 난치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이 없으면 반려인들의 심적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며 복제 찬성 입장을 밝혔다. 그는 “최근엔 복제 기술의 일환으로 맞춤형 세포를 생산해 반려동물의 난치병 치료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며 “이 같은 연구와 기술 축적은 인간의 행복추구권 보호를 위해서도 권장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반려인 1300만 명 시대’를 맞아 ‘반려동물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를 둘러싼 논란이 더 이상 소모적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하루속히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강성일 소장은 “이젠 가족처럼 받아들여지는 반려동물의 죽음을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한 변호사는 “난자 채취 시 학대, 기형아 처분 문제, 대리모견 복지 등에 대한 법 조항이 우선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3.30 00:41

  • 미래의 북망산 경제학, 의료 서비스 편차 따라 값 달라져야

    미래의 북망산 경제학, 의료 서비스 편차 따라 값 달라져야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가 생중계 되고 있다. [뉴스1] 저마다 벼슬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김창업)    조선시대 김창업이라는 선비가 지은 시조다. 혹시 시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면 북망산(北邙山)은 중국 낙양성의 북쪽에 위치한 산인데, 낙양 사람들의 묘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유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묻힌 곳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학생 시절 참으로 운치 있고 나름의 철학이 담긴 시조라 생각해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의술보다 치료비 없어 북망산행 많아   하지만 현재 의사 증원을 두고 갈등이 첨예한 대한민국의 경제학 전공자로서 이 시조를 다시 읽어보면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우울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안동 김씨 권세가의 집안에 태어나 형제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했지만 초야에 묻혀서 글과 그림을 즐겼다는 김창업이 살았던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20세기만 해도 사람이 죽어서 북망산에 묻히는 이유는 의사가 병을 고치지 못해서였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해서 평범한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사람이 언제 죽는가는 당연히 병을 못 고치는 의사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의학의 발전은 정말 눈부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내 집안만 봐도 할아버님은 20대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형제분들도 4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님과 어머님의 형제분은 모두 건강하게 80대 인생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부모님의 형제분들이 모두 병에 한 번도 안 걸린 것은 전혀 아니다. 20세기라면 손도 대지 못할 중병에 걸렸다가 치료받고 살아난 분들도 몇 분이 계시다. 시대를 잘 타고 난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100세까지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게 됐다. 문제는 의학이 발전해 의원이 병을 아주 잘 고치게 되었고 앞으로 미래에는 더욱 의학이 발달할 것이지만 여전히 인간은 죽어서 북망산에 묻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북망산에 묻히는 책임은 사람들의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경제 전문가가 오롯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경제학과 교수인 내가 의대 정원을 놓고 전 국민이 고통을 겪는 현 상황에서 김창업의 시조를 보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국내 최초로 세브란스에 도입돼 치료를 시작한 중입자가속기는 가격이 3000억원이라고 한다. 수술을 하지도 않고 몸 안의 암세포만 골라서 1분 정도 만에 태워 없애는 꿈의 치료기라고 하니, 미래에는 암으로 죽는 사람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에 수천만원이 들어가는 치료비용이다. 이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학의 문제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도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이 있다. 같은 교수이지만 의과대 교수님들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65세 정년퇴임 날까지 매일 7시 이전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치열하게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의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전공하기를 백 번 잘 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물론 의대 교수님들의 연봉은 나보다 높지만 근무 시간과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오히려 의대 교수님을 보고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문제는 모두 잘 알고 있는 저렴한 의료 수가이다. 환자 한 명당 진료와 치료를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 국민건강보험에 의해 낮게 규제되고 있기 때문에 병원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마치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이 5분마다 한 명의 환자를 보아야 하는 형편이다. 각각의 환자들은 개인적으로 정말 중대한 병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인데, 5분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해야 한다니 나라면 아무리 큰돈을 주더라도 거절할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 의사들은 이런 일을 척척 잘 해낸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도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학생이 유학을 오는데, 이들이 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서는 모두 칭찬 일색이다. 이렇게 빨리 예약이 가능하고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해주면서 의료비는 깜짝 놀랄 수준으로 저렴한 것에 놀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내가 유학했을 때의 일이다.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치통이 있어서 재학하던 하버드대 보건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두 가지 측면에서 깜짝 놀랐다.   우선 치과 치료실이 너무 깨끗했다는 것이다. 의자와 치료 기구가 모두 비닐로 싸여 있었고 마치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내가 예약된 30분을 꽉 채워서 치료를 받고 나자 간호사가 들어와 의자와 치료 기구를 싸고 있던 비닐을 모두 벗겨내고 다음 환자를 위해서 새로운 비닐을 씌웠다. 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치과는 그야말로 5분에서 10분 만에 환자를 받아서 치료했고, 앞의 환자에게 썼던 치료 기구를 다시 나를 치료할 때 사용했다. 역시 의료 선진국은 다르다는 사실에 우선 한 번 놀랐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치료를 마치고 나오던 나는 치료비 청구서를 보고 하늘이 무너질 만큼 놀랐다. 한국의 치과에 비해서 미국 치과의 진료비가 10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후 나는 치통이 있더라도 참다가 여름 방학에 한국에 들어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치과 치료의 위생도 중요하고 품질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이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한국의 의료 설비나 위생 수준은 미국에 비해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그것은 뛰어난 인재들이 의대에 진학해서 엄청난 기술과 효율성으로 진료와 치료를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품의 품질은 높고 가격이 저렴하면 사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지는 반면, 만들어도 이윤이 별로 남지 않기 때문에 팔려는 사람은 줄어 공급 부족이 발생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원리인데 대한민국 의료 산업에도 이런 경제학은 정확히 적용된다.   현재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진료 분야의 의사 공급 부족 현상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에 추진하는 의대 정원 증가는 의사 공급을 늘린다는 점에서는 경제학적 해결 방안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대 정원의 증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논리도 경제학과 부합하는 점이 있다.   최고 서비스 받으려면 높은 가격 치러야   현재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은 소수 정예를 선발해 양성하는 시스템이다. 마치 모든 군인을 특전사 수준으로 양성하는 것과 같다. 개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 입대를 시켜서 특전사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시키는, 소수 정예의 의사가 전 국민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들은 상당히 높은 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정원을 늘리면 더 이상 모든 구성원을 정예 멤버로 육성할 수 없게 된다. 아마 현재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마음에는 앞으로 엘리트 의사만 육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이로 인해 평범한 의사가 배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의료계의 우려는 맞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하다. 우선 맞는 점은 앞으로는 소수 정예 엘리트 의료인만 육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전사 대원도 있지만 평범한 보병 소총수도 나타날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런 의료계의 우려는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소수 정예로 계속되면 특정 지역이나 특정 분야에서 진료를 아예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의료 서비스의 품질에 편차가 생겨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반면 의료계의 우려가 틀린 점은 의료 서비스 품질의 편차가 생기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고 우려만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 아파트에는 고급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상당히 살고 있지만 나는 20년 된 국산차를 아직도 타고 있다. 물론 나도 외제차를 타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 기꺼이 감수한다. 옷이나 음식이나 이 세상의 모든 상품에는 품질의 격차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감수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료 서비스 품질의 격차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가격의 격차이다.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고 비싼 첨단 의료 장비가 도입되면서 모든 사람이 저렴한 가격에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력이 뛰어난 의사의 진료비가 평범한 의사의 진료비와 같도록 유지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을 아주 기초적인 의료비를 제공하고 그것을 초과하는 고가의 진료와 치료는 개인이 선택적으로 부담하는 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미래의 북망산을 책임져야 하는 한 경제학자의 생각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3.30 00:25

  • 일본, 물가 뛰고 임금 올라 웃지만…근본적 체질 개선은 미지수

    일본, 물가 뛰고 임금 올라 웃지만…근본적 체질 개선은 미지수

     ━  ‘닛케이 4만 시대’ 계기로 본 일본 경제   지난달 24일 대만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제1공장 준공식을 개최했다. 연내에는 인근에서 제2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AP=연합뉴스] “마침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다카타 하지메 일본은행 정책 심의위원)   일본 정부가 2001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공식화한 이후 23년 만에 ‘디플레이션 탈피’를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등 일정 정도 ‘선순환’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본은행(BOJ)이 내달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 정부와 BOJ는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려면 2% 이상의 물가 상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 등으로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전년 대비 3.1% 상승하며 1982년 이후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저로 인한 기업 수출 증가와 함께 임금 인상도 이어져 1990년대 자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 했던 초기 요인이 하나 둘 해소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적지 않다며 섣부른 기대감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   일본 닛케이지수 추이 긍정적 시그널은 일본 경제 곳곳에서 감지된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임금이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오르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일본 기업은 2020년 이후 임금을 매년 3% 이상 올렸다. 지난해 인상률은 평균 3.58%로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올해 임금 인상 목표를 1992년 이후 최고 폭인 ‘4% 초과’로 정했다. 일본 최대 대형마트 ‘이온 몰’은 올해 정규직 임금을 7% 인상하기도 했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서는 소비 물꼬를 터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 인상은 필수”라며 “임금 인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강한 의지 속에 기업 임금이 3년 연속 상승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엔저 효과로 수출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수시장 침체가 이어지고 있어 기업 경영환경은 좋지 않은 편이다. 이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 인상이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기업도 ‘소비→투자→경기 회복’ 사이클을 되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임금과 함께 물가가 상승한 만큼 일본의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했다. 그러나 물가만 뛴 한국과 달리 물가·임금이 동시에 오르면서 일본 경제에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실제 미즈호리서치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2023년도 임금 증가율은 전년 1.9%에서 2%대 중반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임금 증가에 따라 소비지출은 0.6%, 국내총생산은 0.4%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올해 임금 인상률은 지난해보다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소비와 국내총생산이 더 뛸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2024년 전망 보고서에서 “2024년 일본 민간소비는 물가상승세 둔화와 임금 인상에 따라 완만하게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증시가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것도 임금 인상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기면서 개인 투자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 증시 투자 환경도 좋아졌다. 지난해 시행한 기업 밸류업 상승 프로그램이 본격화하고 있고, 올해 1월에는 소액투자비과세제도(신NISA)가 개편돼 세제 혜택 폭도 커졌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3개월간 도쿄증권거래소 프라임(최상위)시장의 매매 동향을 보면 개인 투자비중이 19%에서 25%로 증가했다”며 “NISA 관련 거래대금은 지난해 11월 5조 엔 수준에서 올 1월 61조 엔 규모로 대폭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기업으로도 자금이 몰리고 있다. 코로나19 당시 디지털 후진국이란 수모를 겪은 일본은 2022년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내놓고 반도체·2차전지와 같은 미래산업은 물론 관련 스타트업 집중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2027년까지 스타트업 투자액 규모를 10조 엔(약 89조원)으로 늘리면서 10만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창출하고, 100개를 유니콘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영향으로 스타트업 투자가 증가세다. 일본 스타트업 시장조사업체 이니셜은 “세계적인 투자 혹한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신규 벤처캐피탈과 신규 펀드 결성액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반도체의 경우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곳곳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1조엔(약 8조9215억원)을 들여 일본 구마모토현에 제1공장을 짓고 지난달부터 웨이퍼 양산에 돌입했다. 규슈경제조사협회에 따르면 TSMC 공장 준공에 따른 경제 파급효과가 10년간 20조 엔(약 178조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또 미쓰비시전기는 1000억 엔을 들여 구마모토현 생산 거점에 전기차용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고, 반도체 대기업 롬도 미야자키현 반도체 공장을 올해 말 가동할 예정이다. 도요타·키옥시아 등 일본 대기업이 설립한 파운드리 업체 라피더스는 지난해 홋카이도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 “2027년까지 10만개 스타트업 창출”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임금이 뛰고 기업 투자가 늘면서 지난해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속보치)은 1.9%를 기록하며 25년 만에 한국 성장률(1.4%)을 앞질렀다. 그러나 최근의 이 같은 일본 경제의 긍정적 변화가 꾸준히 이어져 근본적인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당장 지난해 4분기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로이터통신은 이에 대해 프랑스 크레디 아그리콜은행의 아이다 타쿠지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말을 인용해 “글로벌 성장 둔화와 국내 수요 부진 등으로 올해 1분기 일본 경제가 다시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저출산·초고령화 등으로 일본의 노동생산성이 바닥권을 맴돌고 있는 것도 전문가들이 일본 경제를 낙관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2022년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0위로 197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1980년대까지만 해도 4%대였던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2023년 0.25%까지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7일 “일본 정부가 출산율, 노인 노동 참가율 등이 오르지 않으면 내년부터 2060년까지 실질 GDP 성장률이 연평균 0.2%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고강도 저출산·초고령화 대책을 시행 중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7일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출생아 수(속보치)는 전년보다 5.1% 감소한 75만8631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까지 8년 연속 감소하면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김주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가 ‘이제는 (생산인구 부족)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노동 인구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일본은 특히 외국인 노동자 중 고임금 인재뿐만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까지 정착해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향후 일본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고,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관건”이라면서도 “일본 경제가 살아난다는 건 거꾸로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일본 경제 회복을) 지켜만 보고 있어선 안된다”고 설명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4.03.09 00:40

  •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  정치인들이 전통시장 찾는 까닭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마포구 망원시장. 신수민 기자 “우리 시장님 하나 잡으시고, 이 회장도 잡으시고…. 아주머니, 저거 빈대떡 아닌가요?”   지난해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부산 국제시장을 찾아 떡볶이 접시를 집으며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전통시장 방문이 더욱 잦아졌다. 지난해 11월 7일(대구 칠성종합시장)부터 지난달 26일(충남 서산 동부시장)까지 9곳을 오갔고 지난달에만 5곳을 찾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도 앞다퉈 전통시장을 찾고 있다.   관련기사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총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통시장을 향한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전통시장이 가장 많은 서울(189곳), 그중에서도 중구(50곳·1위)와 종로구(30곳·2위) 전통시장엔 후보들의 방문이 온종일 끊이질 않고 있다. 부산(160곳)과 대구(107곳)도 만만찮다. 후보들 대부분은 “민심 청취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치인들은 왜 선거 때만 되면 이처럼 전통시장으로 향하는 걸까. 전통시장 대신 대형마트를 찾으면 안 되는 걸까. 전통시장이 대체 뭐길래.   #민심의 바로미터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5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서울 경동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70여 년 전, 전통시장을 찾은 정치인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1월 30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현장을 방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피해액은 14억300만원. 1952년 한국 정부 세출 결산액인 206억원의 7%에 달하는 규모였다. ‘대한늬우스’ 제79보를 보면 이 전 대통령은 1956년에도 국제시장을 찾았다. 하재근 사회문화평론가는 “한국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 그중에서도 피란민이 모여 대한민국 재건의 상징이 된 국제시장을 면밀히 챙길 필요를 느꼈을 것”이라고 짚었다. 민심을 살피고 달래려는 행보였다는 분석이다.   대통령기록관 사진과 동영상을 들춰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3월 5일 서울 길음시장에서 상인들과 순대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다. 대통령의 음주 장면은 흔치 않다. 하 평론가는 “전통시장에서의 민심 청취 행보라는 컨셉이라 (음주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최근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자신을 드러낼 매체가 진화하면서 전통시장에서의 정치인도 ‘그림’이 잘 나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5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광주 양동시장을 각각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 대선 출마선언 전 “시장에서 오뎅(어묵) 먹는 것 같은 쇼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한 달여 만에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먹방’을 찍었다. 지난 대선 먹방을 삼갔던 이재명 대표도 최근에는 떡볶이를 마다치 않는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장 먹방’을 대선 홍보 영상으로 삼았다. 2008년 3월 9일 자양동 골목시장을 찾아서는 떡을 건네는 상인의 손을 덥석 잡아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재래시장이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차별화 정책이 필요하다”면서다. 2013년 실시된 대형마트의 ‘새벽 영업금지’와 ‘매달 이틀 의무 휴업’ 규제는 이미 이때부터 이 전 대통령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 전 대통령에게 전통시장은 민심 청취의 장이자 대선 공약이었던 ‘재래시장 활성화’를 재확인하는 곳이었다. 제도 시행 후 10년. 전통시장은 과연 활성화됐을까.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대형마트는 2013년 33조9000억원에서 2022년 34조8000억원으로 지난 10년간 10%에 가까운 매출 성장세(9.7%)를 보였다. 반면 전통시장은 같은 기간 1502곳에서 1388곳으로 114곳(7.6%)이나 줄었다. 그 사이에 이커머스는 거래액이 38조5000억원에서 209조9000억원으로 5배 넘게 급성장했다. 중대형 식자재 마트들도 의무 휴업 도입 이후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우리마트의 경우 2022년 2024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2013년 371억원에 비해 5배 넘게 증가했다. 업계에선 “대형마트와 전통시장 경쟁의 진짜 승자는 ‘제 3지대’인 이커머스와 식자재 마트”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당초 의도대로라면 대형마트 규제로 소비자는 불편해야 하는데,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불편하지 않다”는 응답이 65%에 달했다. 이에 더해 대구·청주·고양시 등 일부 지자체는 최근 조례 개정을 통해 대형마트 휴무일을 공휴일에서 평일로 옮겼다. 정부도 지난 1월 22일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 휴업을 폐지하기로 했다. 관련 개정안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윤 대통령은 사흘 뒤인 지난 1월 25일 의정부 제일시장을 찾아 어묵을 먹었다. 소상공인들은 정부의 대형마트 규제 해제 방침에 반발했지만 시장은 북새통이었다. 상인 윤모(56)씨는 “30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린 건 처음 봤다”고 했다. 하 평론가는 “정치인들의 전통시장 방문엔 지지층 결집 의도가 담겨 있다”며 “지지자들도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서 선거가 임박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왜 대형마트는 좀처럼 들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대형마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강자’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에서 어느 정치인이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겠느냐”며 “대신 서민과 중산층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의 방문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종로구 광장시장.신수민 기자 “재래시장이요? 전통시장 아닌가요?”   유지현(27·경기도 고양시)씨는 재래시장이란 단어를 낯설어했다. 문헌상 우리나라 시장 전통은 490년 시작됐다. 신라 소지왕 12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를 통하게 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1500여 년. 그새 태어난 시장들은 재래시장과 전통시장으로 뒤섞여 불리고 있다. 정치인들도 현장 방문 중에 구분 없이 부르고 있다. 국어사전은 재래시장을 ‘예전부터 있어 전해져 내려온 시장’으로 풀이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제정된 ‘시장 규칙’이 대한제국 시대까지 지속돼 온 시장을 ‘재래시장’으로 정리한 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2009년 ‘공식 용어’가 바뀌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에 찾았던 자양동 시장의 상인이 “재래시장이란 용어의 어감이 안 좋다”고 하자 “재래시장 대신 전통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1년 뒤인 2009년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은 ‘전통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으로 바뀌었다. 김도형 지방행정연구원 센터장에 따르면 재래시장이란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강해 이름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통시장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공식 용어를 바꾼 한국 전통시장은 이후 ‘여행 성지’로 떠올랐다. 최근엔 MZ세대나 외국인들이 전통시장을 찾아 SNS에 인증샷 등을 올리면서 방문객과 매출액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회복하는 추세다. 정부는 ‘K-관광 마켓’과 관련해 전통시장 버킷 리스트 10곳을 뽑기도 했다. ▶서울 풍물시장 ▶인천 신포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 ▶광주 양동전통시장 ▶수원 남문로데오시장 ▶속초 관광수산시장 ▶단양 구경시장 ▶순천 웃장 ▶안동 구시장연합 ▶진주 중앙·논개시장 등이다.   그중 대구 서문시장과 광주 양동시장은 정치인들에겐 영호남 전통시장의 상징이자 ‘성지’로 통한다. 이 대표는 지난달 5일 양동시장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렀던 국밥집에서 노 전 대통령이 국밥을 먹었던 자리에 앉았다. 한 위원장도 같은 날 서울 경동시장을 찾았는데 당내에선 “우리도 서문시장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 평론가는 “정치인들에겐 대구 하면 서문시장이고, 광주 하면 양동시장”이라며 “기왕에 갈 거면 그 지역에서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시장과 장소를 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저렴하다”고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과연 쌀까.   #물가의 바로미터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동대문구 경동시장. 신수민 기자 “소비자들은 가격 비교도 ‘전통시장 대 대형마트’를 원합니다. 저희도 양쪽의 품질을 맞춰 비교 가격을 제시합니다.” 이동훈 한국물가정보 팀장의 말이다. 한국물가정보는 최신 물가를 반영해 명절 차례상과 김장 비용 정보 등을 제공한다. 전통시장에서의 구매비가 대형마트보다 항상 4만~5만원 적게 나온다. 올해 정월대보름 오곡밥·부럼 차림 가격도 전통시장은 13만1600원, 대형마트는 17만1480원이었다. 이 팀장은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물건 품질이 전통시장은 대체로 ‘일률적’인데 대형마트는 ‘다양화’돼 있어서, 같은 수준으로 맞추다 보면 대형마트 비용이 좀 더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에서 파는 돼지머리고기. 김홍준 기자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대형마트를 선호할까. 주부 곽모(53)씨는 “편의성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리서치 소비자 인식 조사에서도 접근성, 환불·교환, 친절도 등에서 대형마트가 앞섰다. 곽씨는 “전통시장은 신용카드 사용 제한, 주차장 불충분, 정찰제 미정착 등 불편한 게 많다”고 설명했다. 1인 가구주인 김명선(29)씨도 “전통시장에선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팔아 돈도, 상품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고 했다. 한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대형마트 휴무일에 전통시장을 이용한다고 밝힌 응답자는 11.5%에 불과했다. 반찬거리는 전통시장이 싸지만 군것질거리는 비싸다는 평도 있다.   일각에선 정치인들의 전통시장 방문을 ‘구태’라고 꼬집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익히 알면서도 전통시장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전통시장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특히 떡볶이·어묵·순대를 많이 찾는다. 하 평론가는 “이곳저곳 빨리 들러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수를 먹자니 시간이 걸리고 남기면 ‘친서민’에 반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패스트푸드’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처럼 대형마트에 밀리면서도, 숫자가 줄면서도 전통시장은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논리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문화가 담겨 있고, 만남이 이뤄지며, 정서가 순화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을 넘어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시장(市場)이라고 부른다. 윤 대통령이 어묵을 먹었던 의정부 제일시장 분식집 사장이 말했다. “민심이고, 물가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우리 서민들에겐 시장이 곧 인심(人心)이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4.03.02 00:34

  •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서울 광장시장에서 파는 순대. 신수민기자 “모둠전과 순대는 안 먹었어요. 비싸잖아요.”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안시은(20)씨는 “가격 논란이 거셌던 메뉴라 아예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 타키(24)도 “광장시장은 재밌는 곳”이라면서도 “무슨 음식인지 잘 모르겠는데 값도 비싸 주문을 꺼리게 되더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중순 ‘1만5000원짜리 순대 모둠전’ 논란이 SNS를 뜨겁게 달군 지 100일. 중앙SUNDAY가 다시 찾은 광장시장은 2030세대부터 고령층에 외국인 관광객까지 몰려 여전히 붐비는 모습이었다. 한 점포에 들어가 보니 순대 1인분에 8000원. 포장해 무게 측정기로 중량을 재보니 520g이었다. 김지희(64)씨는 “아이고,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순대가 16점이니 하나에 500원이네”라며 놀라워했다.   관련기사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비교를 위해 서울 주변 전통시장 6곳을 함께 찾아가 봤다. 경동시장·광장시장·남성시장·아현시장·의정부 제일시장·통인시장 등을 둘러본 결과 순대 1인분 가격은 4000~8000원으로 시장마다 제각각이었고 광장시장 가격과도 차이가 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양이 적거나 같은 양인데 다른 곳보다 더 비쌀 경우 소비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며 “몇몇 상점의 과도한 가격 설정은 다른 상인들뿐 아니라 시장 전체 이미지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6곳 전통시장 모두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것도 여전했다. 계좌 이체를 해야 했고 일부 점포는 아예 현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현실적인 고충을 호소했다. 광장시장에서 10년째 호두과자를 팔고 있는 한 상인은 “카드를 받고 싶어도 웬만한 점포는 사업자 등록이 안 돼 있어 단말기를 놓을 수 없는 실정”이라며 “소비자들도 불편하겠지만 우리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그런 가운데 변신을 꾀하려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바가지요금’ 논란 이후 “이대로 가다가는 시장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면서다. 당장 광장시장은 지난해 12월부터 ‘정량표시제’를 시범 도입했다. 시장 상인회도 카드 결제 활성화를 위해 상인들의 사업자 등록 절차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상인들도 친절 서비스를 다짐하고 나섰다. “이랏샤이마세, 오이시이오이시이(어서오세요, 맛있습니다).” 희끗한 머리의 나이 지긋한 상인이 광장시장에서 일본어로 손님을 끌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메뉴판과 간판에도 외국어가 추가됐다. 옛날 과자 판매점을 운영하는 백정순(66)씨는 “관광객 안내 필수 용어로 일본어·중국어·영어 등 3개 국어를 익히고 있다”며 “자꾸 까먹긴 하는데 이렇게라도 노력해야 손님이 더 찾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관광 명소로 소문난 맛집은 입장 예약 서비스도 도입했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예능 프로 ‘런닝맨’에 나온 육회 음식점을 찾아 왔는데, 줄이 길 줄 알았더니 대기 시스템이 있어서 편리했다”며 반겼다. 시장 자체적으로 체험 콘텐트를 만들기도 했다. 종로구 통인시장에선 ‘엽전 도시락’을 체험하려는 2030세대로 붐비고 있었다. 현금을 엽전으로 바꾼 뒤 식판을 들고 각 점포의 대표 음식을 엽전으로 구입하는 식이다. 시설 현대화에도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경동시장의 경우 시장 안에 청년몰도 따로 조성해 MZ세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동작구 남성시장은 프랜차이즈 마트처럼 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남성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우리 시장은 야채와 과일·정육 등 1차 식품이 인기가 높은 만큼 이런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점포마다 배송 서비스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하고 있다”며 “맞벌이 부부 등 유동 인구가 많은 동네 특성상 배송 서비스를 활성화할수록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문가들은 전통시장의 이 같은 변신 노력이 효과를 거두려면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장흥섭 전 한국경영교육학회장(경북대 명예교수)은 “전통시장은 결국 상인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며 “지자체도 시장 현대화는 물론 각기 다른 지역적 특색을 잘 살려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3.02 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