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조깅화 ‘불 난’ 날, 금융실명제 실시 전격 발표했다: 청와대 대통령 소품전

    YS 조깅화 ‘불 난’ 날, 금융실명제 실시 전격 발표했다: 청와대 대통령 소품전

     ━  사연 많은 역대 대통령 소품전 가보니   청와대 세종실 입구에서 역대 대통령 초상화를 찍는 관람객. 문소영 기자 2일 오전 청와대 본관 관람객들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1일부터 시작한 특별전시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여기 대통령들이 있었다'를 둘러보고 있다. 문소영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떠올린다. 칼국수와 조깅. YS는 청와대 녹지원에서 새벽 조깅을 하면서 복잡한 국정을 정리하곤 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93년 8월 12일 새벽, 그는 여느 때처럼 조깅을 했다. 그런데 달리는 속도가 평소보다 두 배나 빨랐다고 한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 공보비서관이었던 박진 현 외교부장관의 회고다. 대통령이 뭔가에 몰두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저녁 YS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나라가 뒤흔들렸고 반발도 거셌으나 지금은 YS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 받는 결단이었다. 빠른 조깅은 그 결단의 조짐이었다.   박진 “YS, 평소보다 두 배 빨리 조깅”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1일부터 특별전시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여기 대통령들이 있었다'를 청와대 본관에서 시작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조깅화' 김경록 기자 이 에피소드에 관한 텍스트를 YS가 신었던 낡은 조깅화, 관련 사진들과 함께 지금 청와대 인왕실에서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시작한 특별전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여기 대통령들이 있었다’의 한 섹션이다. 역대 대통령 12인을 상징적인 소품을 통해서 돌아보는 새로운 방식의 전시다. 2일 청와대 세종실과 인왕실 전시실을 가득 메운 방문객들은 호기심에 차서 소품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중학생 조지현 양은 “대통령들이 살았던 공간에 와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고 사용한 물건들을 보면서 역대 대통령들에게 좀 흥미가 생겼어요”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개량 독서대’. [연합뉴스] 특히 흥미로운 물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시생 시절인 1974년 개발해 특허까지 따낸 ‘개량 독서대’다. 이 독서대는 요즘 수험생들도 즐기는 ‘눕공(누워서 공부하기)’을 위한 것으로, 누워서 책을 볼 수 있게 각도 조절 기능을 갖췄다. 문체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대통령을 안 했으면 컨설턴트나 발명가였을 것’이라고 했다. (…) 그는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 파격적인 해법과 개선 방식을 제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반려견 스케치’. 김경록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려견 방울이를 연필로 스케치한 작품도 흥미롭다. 그의 카리스마적 이미지와 동떨어진 귀여운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는 군인이 되기 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사범학교에서 교사의 필수 역량 중 하나인 그림도 익혔다. 두뇌 훈련 방법으로 인기를 끄는 ‘그림으로 생각 정리하고 메모하기’를 일찍부터 실천하기도 했다. 문체부는 “그림을 통해 국정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했다. 그가 직접 스케치한 경부고속도로 계획안은 정밀하다”고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 '퉁소'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음악에 뛰어났다. 그가 즐겨 불었던 퉁소가 전시에 나와 있다. 이 퉁소는 일곱 살 때 여읜 부친의 유품으로, ‘타향살이’ 노래로 유명한 가수이자 영화기획자 고복수가 부친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휘파람 불기도 노 전 대통령의 장기 중 하나였다. 친지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산에서 휘파람을 불면 산새가 날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문체부는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6공 집권 시절 정치의 유연성을 추구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원예가위와 물뿌리개' 김경록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상징적인 오브제는 물뿌리개와 원예가위다. 1980년 신군부에 체포되었을 당시 독서와 꽃 가꾸기로 감옥 생활을 견뎠던 DJ다. 문체부에 따르면 그는 “가위로 꽃을 다듬으면서 정치 공간을 새로 설계했다.” 그의 별호 ‘인동초’처럼 겨울을 견뎌내고 대통령이 된 후 전직 대통령 4명을 청와대에 불러서 어울리며 화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영문 타자기’. 김경록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타자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늘 그의 가방에 들어 있었고,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후에는 경무대 집무실에 놓였던 물건이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시절에 그는 직접 수많은 영어 문서를 작성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 무렵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협상할 때도 78세 나이에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기를 두들기며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박보균 “긍정적 역사관으로 가는 출발점”   윤보선 전 대통령 '여행용 가방'. 문소영 기자 최규하 전 대통령 '연탄난로'. 문소영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 '사인 축구공' 문소영 기자 이밖에도 윤보선 전 대통령이 경무대 대신 청와대 시대를 열었음을 보여주는 청기와, 최규하 전 대통령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연탄 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스포츠 정치를 보여주는 사인 축구공,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전거 헬멧,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 ‘나의 어머니 육영수’ 등이 전시에 나와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선물 받은 앤디 워홀 판화 ‘시베리아 호랑이’도 전시에 포함되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자전거 헬멧'. 문소영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 '나의 어머니, 육영수' 문소영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 ‘앤디 워홀 판화’. 문소영 기자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이번 전시는 대통령의 공과를 다루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상징적인 물건을 통한 스토리텔링으로 역대 대통령들에게 좀더 친근하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역대 대통령의 공과(功過) 중에서 과오에 초점을 맞추며 평가에 인색한 편이고 또 멀게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쉽고 흥미롭게 역대 대통령에 접근하고 관람객이 그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더 탐색할 마음이 생기도록 전시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박 장관은 “향후 역대 대통령 관련 물품을 청와대 본관 전반에 상설로 전시해서 청와대 본관이 역사 박물관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대통령기록관에 역대 대통령이 받은 선물들이 보관돼 있는데 그 중에도 흥미로운 것이 많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가 우리 대통령들에 대한 자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역사관으로 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박 장관은 덧붙였다.   이 같은 맥락으로 문체부는 ‘본관 내부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청와대 본관을 대통령이 국빈을 맞이하고 집무를 하던 모습으로 복원 중에 있다. 우선 이번 전시 기간에는 그동안 카펫 보호를 위해 설치되었던 덮개 카펫을 철거해 다시 드러난 붉은 카펫을 볼 수 있다. 한편 기자회견장이었던 춘추관 2층 브리핑룸에서는 청와대에서 오랜 기간 사용된 가구와 식기 등이 전시된다. 본관과 춘추관의 전시는 8월 28일까지 계속된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2023.06.03 01:19

  • 창가학회는 생명·평화 추구…일 군국주의 목숨 걸고 저항

    창가학회는 생명·평화 추구…일 군국주의 목숨 걸고 저항

     ━  창립 93주년 창가학회   한국SGI 김인수 이사장은 “창가학회의 창가 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교육은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이란 뜻이 담겨 있다. 불법 의 이치는 가치 창조 교육과 통한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가까우면서도 멀다. 미래를 보면 이웃이고, 과거를 보면 상처투성이다. 일제 강점기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도 군국주의에 저항하며 목숨을 걸고 양심의 소리를 높였던 종교 단체가 있다. 다름 아닌 창가학회(SGI)다. 불교 경전인 법화경(法華經)에 기반을 둔 재가자 중심의 불교 단체다.   1930년대 군국주의의 광풍이 일본 열도를 지배했다. 당시 일본인에게 ‘천황(일왕)’은 신(神)이었다. 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神道)는 원래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민속 신앙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 이후에 일본 군부가 일왕을 신격화했다. 일왕을 중심에 두고 ‘국가신도(國家神道)’의 개념을 도입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그게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뼈대였다.   당시 일본에는 약 1500개의 종교 단체가 있었다. 기독교와 천주교도 이미 들어온 상태였다. 그렇지만 군국주의에 강렬하게 저항하고, 그로 인해 대표자가 목숨까지 잃은 종교는 창가학회였다.   창가학회는 초토화 직전까지 갔다. 창립자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1871~1944) 초대 회장은 신사 참배 거부와 천황 모독 등의 이유로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체포됐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씌워진 죄목도 이 두 가지였다.   “천황(일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검찰의 취조 심문에 마키구치 회장은 대담하게도 “천황도 범부다!”라고 일갈했다. 취조하던 검사가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똑같았다. 결국 그는 수감돼 옥사했다.   저항의 이유는 명쾌했다. 군국주의는 창가학회가 추구하는 생명의 가치와 평화의 가치를 위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창가학회가 올해 창립 93주년을 맞았다. 1일 서울 구로구 한국SGI 본부에서 김인수(64) 이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창가학회의 지향점을 물었다.   왜 명칭이 ‘창가학회’인가. “창가(創價)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옥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이 원래 교육자(초등학교 교장)였다.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끝없이 던졌다. 그러다가 마키구치 회장은 니치렌(日蓮) 대성인을 통해 불법(佛法)을 알게 됐다. 그리고 ‘가치를 창조하는 교육’이란 답을 얻었다. 불법의 이치야말로 가치 창조 교육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펼칠 창가교육학회(현 창가학회)를 창립했다.”   니치렌 선사는 1200년대 인물이다. 그는 대승불교 경전인 법화경을 중시했다. ‘법화경’의 전체 명칭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다. 그걸 일본어로 발음하면 ‘묘호렌게쿄’가 된다. “나의 몸과 마음을 법화경의 가르침, 즉 우주와 생명을 관철하는 근원의 법에 귀의한다”는 뜻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다. 그래서 창가학회 회원들은 기원할 때 “남묘호렌게쿄”를 되풀이해서 봉창한다.   ‘남묘호렌게쿄’라는 발음 때문에 엉뚱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다. 왜 한국어로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부르지 않나. “지구촌에는 192개국에 1200만 명의 국제창가학회 회원이 있다. 세계 기독교에서 기도를 마칠 때 히브리어로 ‘아멘!’이라고 하지 않나. 같은 맥락이다. 창가학회는 미국·유럽·남미에 있는 회원도 ‘남묘호렌게쿄’를 봉창한다. 이건 부처가 깨달은 법의 이름이다. 고유명사로 봐달라.”   옥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뒤를 이은 도다 조세이(1900~58) 2대 회장도 군국주의에 저항했다. 일본 군부는 종교 단체에서도 신사(神社)의 부적을 모시라고 강요했다. 마키구치 회장과 수제자 도다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도다도 2년간 투옥됐다. 수감될 때 85㎏였던 몸무게가 출옥할 때는 50㎏였다. 그는 감옥에서 하루 1만 번 ‘남묘호렌게쿄’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처는 생명이다! 생명의 표출이다. (부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 속에 있다”고 선언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창가학회 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95)도 일본 군국주의에 초지일관 반대하는 입장이다. 수천 명의 일본 고교생·대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여학생 유관순”을 소개하고, “한민족 독립운동의 아버지 안창호는 일본의 비열한 침략과 끝까지 싸운 위대한 투사로서 몇 번이나 감옥에 투옥됐다”고 강연한 적도 있다. 평소에도 이케다 회장은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문화대은(文化大恩)의 나라’”라고 강조한다.   창가학회의 가장 핵심적인 지향은 뭔가. “인간혁명이다. 불교는 결국 인간혁명의 철학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설령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내면에는 이미 부처의 성품이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신을 깨고, 이웃의 행복까지 바라는 나로 확장될 수 있다. 그렇게 나를 바꾸면 가정과 사회가 바뀌고 국가와 세계가 바뀌지 않겠나. 창가학회는 생명의 가치와 평화의 가치를 추구한다. 창가학회가 펼치고 있는 평화·문화·교육 분야의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먼저 자신의 인간혁명으로 변혁을 지향한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2023.06.03 00:38

  • 미 달러 지위 흔들려 ‘불안정한 내쉬균형’ 땐 한국 직격탄

    미 달러 지위 흔들려 ‘불안정한 내쉬균형’ 땐 한국 직격탄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1945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축 통화는 미국의 달러이다. 달러가 오랫동안 기축통화라는 사실은 경제학의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개념에 아주 잘 부합한다.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미국 달러로 무역을 하고 있을 때 나만 다른 국가의 통화로 무역을 하겠다고 하면 아마도 당신은 거래할 상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번 모든 국가가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아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무도 달러 이외의 통화로 무역을 하지 않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경제학의 내쉬 균형이다. 경제학에서의 내쉬 균형은 한번 균형점에 도달하면 외부로부터 아주 큰 충격이 작용하지 않는 한 계속 그 균형 상황이 유지된다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미국의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인 1945년 유럽과 아시아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여전히 활발한 생산 활동이 가능한 미국은 세계 경제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세계의 각국이 무역을 함에 있어 자신이 상품을 수출하고 받을 돈으로 유일한 경제 대국인 미국의 달러 이외의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니 자연히 미국의 달러는 세계가 사용하는 기축통화가 되었다. 그리고 8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계는 여전히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경제의 위상은 80년 전과는 매우 다르다.   미 달러 가치 유지 위해 G7정상회담 생겨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G5 재무장관 회의.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 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미국의 제임스 A 베이커, 영국의 나이젤로슨,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장관. [AP=연합뉴스] 사실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모범적인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재정 적자가 없어야 한다. 만일 미국 정부가 많은 빚을 진다면 세계의 시민들이 저렇게 빚이 많은 나라가 발행한 통화를 믿고 쓸 수 있는지 의심할 것이다. 국가가 빚을 갚지 못해서 부도가 나면 그 국가의 통화는 휴지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축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만일 미국의 상품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형편없다면 세계의 다른 국가들은 미국의 상품을 사지 않을 것이고, 더 나가 미국인들도 미국 제품을 사지 않고 다른 나라의 제품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서 무역 적자가 늘어날 것이고 결국 미국 달러 가치가 하락한다. 따라서 미국이 모범적인 기축통화국이 되려면 미국의 공장들이 세계 제일의 제품을 생산해 내야 하고, 미국 정부는 알뜰하게 살림을 해서 재정 적자를 피해야 한다.   1945년부터 시작하여 약 20년간은 미국이 이런 모범적인 기축통화국이었다. 오히려 당시 미국과 세계 각국의 걱정은 미국의 모든 제품이 압도적으로 품질이 높아서 미국인들이 수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로 미국의 달러가 퍼지지 못할 가능성을 많이 걱정했다. 어쨌든 유럽이나 아시아가 미국 달러를 이용해서 거래하기 위해서는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미국 달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이런 나라들에게 미국 달러를 차관으로 빌려주거나 아니면 그냥 원조해주었다. 그래서 유럽과 아시아 등지의 국가들은 미국에서 받거나 빌린 달러를 이용해서 무역할 수 있었다.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무역의 내쉬 균형이 이렇게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를 경제학에서는 안정적 내쉬 균형(stable Nash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외부의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는 내쉬균형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970년쯤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미국 경제가 더 이상 모범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 등의 국가들을 선두로 해서 어느새 미국 제품보다 더 싸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국가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달러가 내쉬 균형이기는 하지만 외부의 충격에 취약한 불안정한 내쉬균형(unstable Nash Equilibrium)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때 미국 재무장관이 유럽과 일본 재무 담당자들에게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달러는 우리 미국의 돈이지만, 당신들의 문제입니다(The dollar is our currency, but your problem).”   즉 미국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손해를 보는 것은 미국보다는 유럽과 일본과 같은 다른 나라일 것이므로 유럽과 일본 국가들이 미국 달러 가치를 알아서 높이라는 말이다. 적반하장격인 발언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갑자기 달러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면 유럽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미국 달러의 가치가 하락해서 각국은 큰 손해를 입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달러가 아니라면 당장 어느 나라의 돈으로 무역할지 막연해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9년 대공황을 거치면서 미국과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였다. 즉 당시에는 금을 기준으로 세계 각국이 무역을 했는데 대공황이 닥치면서 미국과 영국의 경제가 침체하여 더는 금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무역을 할 통화가 사라져서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결국 세계의 무역이 60%가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국은 영국 식민지 국가들과 독점적인 무역을 하고 프랑스는 프랑스 식민지 국가와 독점적인 무역을 하면서 식민지가 없었던 독일과 일본의 경제가 곤두박질 친 것이다. 이런 경제적 충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불안정한 내쉬 균형은 한번 깨지게 되면 큰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경제학 교과서는 태연하게 한 내쉬 균형이 무너지면 경제는 다른 내쉬 균형을 찾아서 언젠가는 수렴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 경제에서는 이런 균형의 이동 과정은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일본과 독일을 포함한 세계의 선진국들은 미국의 경제를 도와서 달러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G7이라는 경제 선진국들의 정상회담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불안정한 내쉬 균형을 여러 국가가 힘을 모아서 억지로라도 유지해 보자는 취지이다.   일본이나 독일이 자기의 경제가 아닌 미국의 경제를 돕는다는 것이 괴이하게 들릴 수 있지만, 미국의 달러가치가 하락하여 기축통화의 지위가 흔들리면 세계의 무역이 타격을 받기 때문에 분을 삼키고 미국을 도왔다. 특히 1985년의 플라자 합의에서는 일본과 독일의 제품에 가격과 품질에서 뒤처진 미국의 산업이 크게 약화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과 독일이 자신의 통화를 파격적으로 절상하여 스스로 수출을 줄이는 행동을 했다. 그 결과 놀랍게 성장하던 일본의 경제는 장기 침체에 들어가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는 플라자 합의 이후 많이 회복되어 여전히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다. 물론 당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의 냉전이 심각했던 시기였으므로 미국의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은 아니었으므로 현재와는 다른 측면도 있었다.   한국, 실리 얻는 지혜로운 해결책 찾아야   이런 과정에서 한국은 경제 규모가 작은 국가로서 미국의 경제를 살릴 힘이 없기 때문에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요구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진 현재는 미국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차, 그리고 SK 같은 한국을 선도하는 기업들에게 미국에 많은 투자를 하도록 노골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사실 2008년의 금융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국은 엄청난 양의 달러를 찍어 내었고, 그래서 미국의 경제는 다시 취약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최근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서 러시아가 달러를 이용한 무역 결제를 못하도록 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약점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달러는 미국이 아닌 당신들의 문제이니 이를 해결하라는 뻔뻔한 요구를 미국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요구를 한국이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였다. 한국이 G8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경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 맞는 희생과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기축통화의 균형이 무너지면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의 경제는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남의 나라인 미국의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이 미국 경제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의 달러를 대체할 다른 기축통화의 후보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국도 현재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도 세계 경제를 이끄는 경제 강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다른 측면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경제학 비타민』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등의 저서가 있다. 

    2023.06.03 00:20

  • 대학 형편 따라 뷔페·간편식 큰 차 ‘학식판 부익부 빈익빈’

    대학 형편 따라 뷔페·간편식 큰 차 ‘학식판 부익부 빈익빈’

     ━  ‘천원의 아침밥’ 열풍의 그늘   지난 3월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푸른솔문화관 학생식당에서 천원의 아침밥을 배식받고 있다. 경희대는 학부생,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일 100명분 내외의 아침밥을 1000원에 판매한다. [뉴스1] “진짜 집밥보다 낫다.” “1교시 수업인데 이거 먹으려고 일부러 일찍 왔잖아.”   지난 1일 오전 8시 서울 광진구 세종대학교 군자관 학생식당. 이른 아침이지만 점심시간인 줄 착각할 정도로 학생들이 북적였다. 이날 학생식당 아침 메뉴는 부대찌개, 두부조림과 부추무침, 콩자반, 김, 채소샐러드. 메뉴만 보면 일반 구내식당과 다를 바 없는 이곳 학생식당은 재학생을 대상으로 단돈 1000원에 뷔페식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 23학번 재학생 권모씨는 “원래 이곳 학생식당에서 파는 메뉴는 6000원이라 잘 오지 않았는데, ‘천원의 아침밥’ 덕분에 매일 이곳을 찾고 있다”며 배식대로 향했다.   이날 학생들이 1000원에 풍족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던 건 농림수산식품부가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시행 중인 ‘천원의 아침밥’ 사업 덕분이다. 학생이 한 끼에 1000원을 내면 정부(농식품부)가 1000원을 지원하고, 나머지 금액을 학교가 부담해 고물가 시대 학생들에게 저렴한 음식을 제공한다. 2012년 순천향대학교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2017년 농림부 사업으로 채택되면서 올해 기준 전국 145개 대학이 동참하게 됐다. 지난해 사업 참여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 98.7%가 ‘사업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힐 정도로 인기다.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23학번 김모(21)씨는 “이 사업 덕분에 안 먹던 아침밥을 먹게 됐다”며 “학교에서 진행하는 사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복지”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학생식당에 ‘오픈런’이 벌어질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는 아침밥이지만 최근 대학본부는 아침밥 흥행에 되려 걱정이 커지고 있다. 1000원의 아침밥을 제공하기 위한 비용 중 절반 이상을 대학본부가 감당해야 해서다. 1식 단가를 4500원에 운영하는 학교의 경우 정부 지원금(1000원)과 학생 부담금(1000원)을 제외한 2500원을 대학이 지원해야 하는데, 15년째 등록금이 동결돼 자금난을 겪는 대학 사정상 지속해서 재정을 투입하긴 쉽지 않다. 세종대학교 관계자는 “학생 수요는 많으나 아침밥에만 계속 예산을 투입할 순 없어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이화여대 재학생 정모(22)씨는 “천원의 아침밥 덕분에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어 좋지만, 사실 내가 낸 등록금에서 나오는 돈 아니겠냐”며 “학교 복지사업에 정부는 생색만 내는 느낌이라 아쉽다”고 전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학교 재정 상황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같은 ‘천원의 아침밥’임에도 대학 형편에 따라 메뉴도 크게 갈린다. 동문 후원금이나 교비가 비교적 여유로운 학교들은 인원 제한 없이, 뷔페식으로 아침밥을 제공한다. 2015년 학내 기금으로 ‘천원의 식사’를 시작했던 서울대는 2016년부터 조식, 중식, 석식을 모두 1000원에 먹을 수 있고, 전국 사립대학 기부금 1·3위인 고려대·성균관대는 매일 아침 학생 수 제한 없이 전교생에게 1000원의 아침밥을 선보인다. 메뉴 구성도 고기가 포함된 삼첩반상으로 5000원을 내고 먹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성균관대 관계자는 “정부 지원 전부터 동문 발전기금으로 1000원의 아침밥을 지원하고 있었다”며 “꾸준히 모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재정에 어려움은 없다”고 답했다.   반면 식당 인력이 부족하거나 예산이 빠듯한 학교는 인원을 한정해 볶음밥, 떡, 빵, 국수 등 간편식 위주의 음식을 제공한다. 대학 재정이나 기부금에 따라 학식판 ‘빈익빈 부익부’가 벌어지는 셈이다. 지난 25일 찾은 배화여대에서는 이날 천원의 아침밥 메뉴로 주먹 크기의 백설기와 팩 음료수를 제공했다. 오전 8시30분부터 1시간 30분동안 70명을 대상으로 배식이 이뤄지지만, 이날 아침밥은 배식 23분 만에 매진됐다. 배화여대 21학번 A씨는 “간단한 음식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면서도 “규모가 큰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비교하면 메뉴 선택 폭이 작고, 배식 인원이 많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다”고 답했다. 이날 식권 자판기 앞에서 매진을 확인한 학생들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매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7일 사업 참여 대학이 대폭 늘어나 일부 지자체가 사업 지원에 뛰어들면서 학교 간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서울 성북구와 서울시는 지난 4월 정부 재정지원 계획과 별도로 ‘1식 1000원’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경우 성북구에 위치한 대학은 학생 부담금 1000원에 정부(1000원), 서울시(1000원), 성북구(1000원) 지원이 합쳐져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성신여대 관계자는 “정부뿐만 아니라 지자체(성북구)에서도 사업을 지원하고 있어 사업 진행에 큰 부담은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재정지원 여력이 부족한 지역에 위치한 대학은 이러한 혜택을 꿈도 꾸지 못한다. 경상남도의 한 대학 관계자는 “학생들 만족도가 높아 규모를 확대하고 싶지만, 대학 부담이 커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아침밥 사업보다 재정 투입이 시급한 분야들이 많은데, 소모성 사업에만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답했다.   무엇보다 너도나도 아침밥 지원에만 몰두하다 정작 대학에 시급한 현안 해결은 뒷전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올해 물가가 대폭 상승하면서 대학은 냉방비용 절약, 교수연봉 동결 등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식비가 올라 학생들의 부담이 커진 건 맞지만, 학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질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소모성 사업에 재정을 지출하느라 교육의 질이 낮아지면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악영향이 간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6.03 00:01

  • 매매혼·성차별 논란 ‘농촌총각 국제결혼 지원 조례’ 속속 폐지

    매매혼·성차별 논란 ‘농촌총각 국제결혼 지원 조례’ 속속 폐지

     ━  폐지되는 ‘국제결혼 지원 조례’   지난달 7일 충청남도 서천군은 ‘서천군 미혼자 국제결혼 지원에 관한 조례’의 폐지안을 입법예고 했다. 이 조례는 2012년 미혼 남녀의 국제결혼을 지원해 저출산 고령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목적으로 제정됐다. 군에서 3년 넘게 살고 있는 만 35세 이상 50세 미만 거주자가 외국인과 결혼한 경우 소요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서천군에 따르면 폐지안은 이달 말 공포될 예정이다.   지난달 7일 발표된 ‘서천군 미혼자 국제결혼 지원에 관한 조례’의 폐지안 입법예고 공고문. 윤혜인 기자   국제결혼 지원 조례가 속속 폐지되고 있다. 지난 3월 31일 경상남도 창원시도 ‘창원시 농촌거주 미혼남성 국제결혼 지원 조례’의 폐지를 입법예고 했다. 충북 괴산군도 지난 3월 20일 관련 조례의 폐지를 입법예고 했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국제결혼 지원 조례 폐지에 나선 지자체만 10여 곳이다. 충북 음성군, 금산군, 경북 울진군은 2021년 12월에, 경기 양평군은 지난해 1월에, 전남 화순군은 2월, 충남 부여군은 4월, 경기 남양주시와 충북 증평군은 9월, 경상남도는 12월에 관련 조례를 폐지했다.   국제결혼 지원 조례는 대부분 관할 지역 내 거주하는 ‘미혼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을 한 경우 국제결혼에 든 비용을 일부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농어촌 총각’ ‘미혼자’ ‘농어업인’ ‘결혼이민자 가정’ 등 지자체마다 지원 대상도, ‘만 35세 이상 50세 이하 미혼 남성’ ‘만 35세 이상 미혼 남성 농어업인’ 등 연령 기준도 다르지만 조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지원 금액은 300만원부터 1200만원에 이른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영농의욕 고취, 인구증가 도모, 저출산 고령사회 대응, 농촌사회 활력 도모 등을 위해 제정됐다.    ━  인구 유입 위해 시행했지만 “매매혼 조장, 성차별 문제”   국제결혼 지원 조례 폐지의 가장 큰 이유는 인권 문제다. 이주여성 인권 침해, 매매혼 조장이 대표적이다. 조례에서 국제결혼 ‘비용’을 인정하는 건 사실상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을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평등한 당사자 간의 계약이 아닌 매매혼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지적이다. 충북 괴산군 관계자는 “인구 유입을 위해 시행했으나 외국인 여성과의 매매혼 조장, 성차별 문제 등이 지속해서 제기돼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 특정성별영향평가에서 개선을 권고함에 따라 폐지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이 단기 속성 과정처럼 이뤄져 여성을 상업화한다는 비판도 일었다. 실제로 2020년 여성가족부가 국제결혼 중개업의 현황을 조사한 결과, 국제결혼 커플의 만남부터 결혼식까지 소요된 기간은 5.7일에 불과했다. 한국인 배우자가 낸 결혼 중개 수수료는 평균 1372만원에 달했지만, 외국인 배우자가 낸 수수료는 69만원에 그쳤다. 기간과 지불금액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이 서로 평등한 관계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결혼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연령차도 만만찮다. 한국인 배우자의 연령은 40~50대(81.9%)가 대부분이었지만 외국인 배우자는 20대(79.5%)가 가장 많았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  인권위·여가부도 정책 개선 권고   이런 이유로 지자체의 국제결혼 지원 사업에 대한 비판은 지속해왔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018년 1월 국제결혼 지원 사업을 시행하는 지자체에 “일회성 사업을 지양하고 다문화 가정의 역량 강화와 다문화 가정 여성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도록 예산을 집행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지난 2019년 “개인의 존엄과 성평등에 기초한 혼인의 성립과 가족생활 보장을 위해 국제결혼 지원제도를 젠더 관점에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박복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20년 여성가족부가 시행한 국제결혼지원사업 특정성별영향평가에서 “국제결혼지원사업은 결혼이주여성을 ‘사올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시키는 인권침해 문제가 있다”며 “지역 거주 남성의 국제결혼을 지원하기보다는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해당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가족부는 2021년 각 지자체에 “일회성 사업을 지양하고 다문화 가정의 역량 강화와 이주여성 인권이 향상될 수 있도록 사업 운영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국제결혼 지원 조례 및 사업 정비를 권고했다.   대부분 지원 대상자를 남성으로 한정해 성차별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남아있는 33개의 국제결혼 지원 조례 중 21개의 조례명에는 여전히 ‘농촌총각’‘농어촌 미혼남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외국인 여성’과 결혼한 ‘남성’으로 지원 대상을 한정한 곳은 27곳에 달한다. 지원 대상을 ‘외국인과 결혼한 미혼자’로 성별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은 곳은 6곳에 불과했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 처음에는 지원 자격을 남성으로 제한하다 조례를 개정해 성별 제한을 없앤 것이다.   지난 2021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등 국내 인권단체와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을 추진한 지자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페이스북] 이처럼 꾸준한 비판이 있었지만 최근에서야 관련 조례가 개정 및 폐지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높아진 인권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문화 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여성이 겪는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며 “국제결혼 지원 조례 및 사업 폐지도 그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조례 남아있는 지자체 33곳 중 8곳만 시행   이런 분위기 속에 아직 국제결혼 지원 조례가 남아있는 지자체도 대부분 국제결혼 지원 사업을 중단한 상황이다. 중앙SUNDAY가 현재 국제결혼 지원 조례를 가지고 있는 지자체 33곳을 조사한 결과 실제로 국제결혼을 지원하는 지자체는 8곳에 불과했다. 조례를 가지고 있는 지자체는 강원도와 경상남도가 각각 11곳, 충청남도 3곳, 충청북도 2곳, 인천시 2곳, 전라남도 2곳, 전라북도 1곳, 경상북도 1곳이었다(자치법규정보시스템). 하지만 실제 지원 사업을 시행하는 곳은 인천 강화군, 인천 옹진군, 강원 고성군, 강원 정선군, 충북 단양군, 전남 강진군, 경북 포항시, 경남 하동군 뿐이었다.   조례가 남아있는 33곳 중 17곳은 조례 개정 또는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강원도는 2020년 ‘농어촌 총각 국제결혼 지원 조례’를 ‘농어업인 국제결혼 지원 조례로’ 개정한 데 이어 조례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올해부터 예산도 배정하지 않고 사업을 중단했다. 강원도 관계자는 “조례 개정으로 지원자 성차별 문제는 해소됐지만, 매매혼 조장과 가정폭력 문제 등을 고려해 중단한 상황”이라며 “농촌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결혼을 안 하는 추세다보니 수요가 줄어든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정선군도 조례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정선군은 올해 최대 6가구까지 지원이 가능하도록 3000만원의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미 3가구가 신청해 수령한 상태다. 수요가 있어 사업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앞선 문제들이 제기돼 일회성 지원보다 3년에 걸쳐서 계속 정선군에 거주했을 때 지원하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 정선군 관계자는 “지원 대상에 있어서도 성별 제한이 없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국제결혼만 지원하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올해부터 국제결혼 지원을 중단한 삼척시는 “일반 국민의 결혼도 어려운 상황에서 국제결혼만 지원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중단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7일 폐지안을 입법 예고한 충남 서천군이 “신설된 결혼정착금 지원 정책이 미혼자 국제결혼 지원에 관한 조례를 보완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배경과 다르지 않다. 서천군은 올해부터 결혼 후 지역에 정착하는 신혼부부에게 최대 770만원을 분할 지급한다. 국제결혼의 경우 국적 취득 후 신청이 가능하다.    ━  지원자 적어 실효성 없다는 지적도   최근 수요가 적어진 점도 사업 중단 및 조례 폐지에 영향을 미쳤다. 강원도 삼척시는 지난해 10명분의 예산을 배정했지만 지원자가 적어 재공고를 올렸다. 삼척시는 올해부터 예산을 편성하지 않고 조례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은 2020년부터 22년까지 3년간 지원자가 0명이었다. 고성군 관계자는 “수요가 너무 적어서 내부에서도 실효성에 대한 얘기를 논의한 바 있지만, 일단 올해 다시 지원자가 2명이 있어서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상남도 하동군은 올해 2명 예산을 배정했지만 지원자가 없어 추가 모집 공고를 내걸었다.   경남 하동군 농촌총각 행복가정이루기 지원사업 추가신청 안내 공고. 윤혜인 기자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결혼 건수는 줄고 있다. 2013년 32만2807건에서 점차 감소해 지난해 19만1690건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국제결혼 건수도 2만5963건에서 1만6666건으로 35.8% 줄어들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결혼을 잘 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국제결혼도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07년 국제결혼중개업법이 제정되며 신상정보 공개, 소득 증빙, 범죄사실증명서, 국제결혼용 건강검진서 제출 등 요건이 까다로워졌는데 생계형 영농이나 어업을 하는 경우 기준에 못 미쳐 자격이 안 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외국인 여성도 농어촌에 거주하는 남성과의 결혼을 꺼리는 추세다.   결혼정보업체 리스토리 이현숙 대표는 “국제결혼중개업법에 의해 국제결혼을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아졌는데, 농어촌에서 농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해당 요건을 다 갖추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농촌이나 오지에 사는 남성과 결혼을 원하는 외국인 여성은 거의 없다”며 “외국인 여성들도 이제는 단순히 가난 때문에 국제결혼을 원하는 게 아니어서 외모, 직업, 학벌, 재산 등 다양한 면모를 고려해 배우자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2023.05.27 00:01

  • 김남국, 투자 규모·빈도·방식 모두 코인업계 ‘큰손’ 수준

    김남국, 투자 규모·빈도·방식 모두 코인업계 ‘큰손’ 수준

     ━  ‘김남국 방지법’ 통과, 코인 전문가 진단   김동환 대표는 “자본시장법 적용 여부는 코인의 증권성 인정에 달렸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김남국 무소속 의원의 거액 코인 투자 논란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25일 국회 본회의에선 이른바 ‘김남국 방지법’이 통과됐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의 재산 신고·공개 대상에 암호화폐 등 가상자산을 포함하도록 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의결된 것이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선 현금·주식·채권·금·보석류·골동품·회원권 등과 달리 암호화폐는 아예 재산 신고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개정안에 따르면 향후 의원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는 모든 가상자산을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포함 단 1원어치라도 가졌으면 재산으로 등록해야 한다.   미국은 공직자 코인 재산 등록 의무화   개정안은 올해 12월 초 시행될 예정이며, 대상자는 올해 1월 1일 이후의 모든 암호화폐 거래 내역을 신고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동환 원더프레임 대표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당연히 필요했던 규제인데 도입이 너무 늦었다”며 “암호화폐 투자자에게도 희소식”이라고 진단했다. 원더프레임은 지난해 10월 설립된 암호화폐 컨설팅 기업이다. 김 대표는 국내에서 암호화폐 생태계 전반에 가장 정통한 인사 중 하나다. 블록체인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코리아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21년 7월 처음 컨설팅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남국 방지법이 통과됐다. “국회의원이더라도 암호화폐 투자는 할 수 있다. 범법적인 내용도 아직 확인된 게 없다. 그런데 왜 심각한 이슈가 됐느냐면 국내에서 코인은 주식이나 부동산과 달리 불건전한 투자 대상이란 인식이 강해서, 국회의원의 코인 투자에 대한 윤리적 잣대가 엄격한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좋은 규제다. 지금 국내 중·장년층 이상은 코인 투자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는 반면 젊은 세대 사이에선 긍정적인 인식이 있다. (김남국 방지법은) 이 같은 시선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내용이다. 또 일반 시민이나 말단 공무원은 법 적용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의원 포함 고위 공직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엉뚱한 일을 벌이는 사각지대를 없앤다는 의의가 있다.”   해외에선 어떻게 규제하고 있나. “미국은 2018년부터 공직자가 재산 등록을 할 때 암호화폐를 포함시키도록 의무화했고, 2019년부터는 모든 암호화폐 투자 수익에 대한 과세를 시작했다. 미국도 제도화가 엄청 잘 돼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수년전부터 이렇게 암호화폐 투자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수년간 암호화폐 투자 광풍이 불었는데도 여태껏 기본적인 제도화조차 안 돼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김 의원은 코인 전문가인 것 같다. “운용한 자금의 규모나 거래 빈도, 투자 방식 등을 보면 업계 ‘큰손’ 수준이다. 김 의원은 유동성공급자(Liquidity Provider·LP) 투자를 다섯 종류나 했다. LP 투자는 비상장 코인 시장에 거액을 투자해서 수수료를 받는, 일종의 중개업자 역할을 하는 투자 방식이다. 일반인은 시도할 엄두도 못 내는 어려운 분야인데 거기에 수십억원을 운용할 만큼 과감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단 얘기다.”   김 의원은 9억8000만원 상당의 LG디스플레이 주식을 매도해 코인에 투자했다고 해명했다. 그렇게 60억~80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식을 매도해서 투자했다는 건 문제는 없어 보인다. 검찰이 압수수색에 들어간 상황에서 거짓말은 안 했을 거다. 그런데 김 의원은 자신의 첫 코인 투자였다고 밝힌 2016년 2월 8000만원 상당의 이더리움 투자에 대해선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다. 2016년 2월이면 이더리움이 개당 2달러일 때다. 그때 그걸 8000만원어치 샀으면 현재 790억원어치다. 물론 그사이 팔았을 수도 있지만 의구심을 자아낸다. 하나 더 이해가 안 갔던 건 (김 의원이) 이 얘기를 방송인 김어준씨의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뒤늦게 한 점이다. 그 전엔 2021년부터 코인에 투자한 것처럼 말했는데 첫 투자 시점이 이것과 안 맞는다. 본인이 논란을 자초한 면이 있다.”   암호화폐 투자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줄 알았는데 이번 논란으로 그게 아닌 걸 알았다는 여론이 있다. “일종의 오해다. 코인 투자의 특징은 정확히는 익명성이 아닌 가명(假名)성이다. 일반 계좌처럼 실명제가 아닐 뿐 거래내역은 투명하게 공개가 된다. 블록체인이라는 거대한 온라인 장부에 주소 형태로 기록돼 누구나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 소유의 지갑인지가 특정되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래내역은 소상히 알 수 있다.”   코인 익명 아닌 가명성, 거래 내역 공개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다른 인터뷰에선 ‘김 의원의 코인 거래내역을 분석해보면 추적을 피하기 위한 믹싱 앤드 텀블링을 시도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투자자가 자금 세탁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 믹싱 앤드 텀블링이다. 코인 지갑이 하나인 경우 자금 흐름 추적이 쉬운데, 이런 지갑을 수백 개에서 수천 개 만들어 자금을 계속 옮기면서 섞고 굴리면(mixing and tumbling) 자금 흐름 추적이 어렵다. 김 의원은 이렇게 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세간의 우려처럼 자금 세탁 가능성이 클 것 같진 않다.”   그럼 김 의원은 어떻게 했을 경우 법적으로 문제가 되나.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코인에 투자했거나 시세를 인위로 조종했다면 문제가 된다. 거래소에 대한 영업 방해 또는 코인 발행 프로젝트 방해도 그렇다. 코인 발행 프로젝트에 동업 형태로 참여했어도 문제가 된다. 국회의원의 겸직 금지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국민의힘 진상조사단 등에 따르면 김 의원은 지난해 넷마블이 발행한 마브렉스 코인의 거래소 상장 공지 2주 전부터 이 코인을 집중 매입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이 내부 정보를 이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은 들지만,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수사기관의 향후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정황상 꼭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고 보긴 모호한 면도 있다. 김 의원은 40여 종의 코인에 투자했는데, 그중 16종이 위믹스와 마브렉스 등 P2E(Play to Earn·돈 버는 게임) 섹터의 코인이었다. 그가 P2E 섹터의 순환매 장세를 고려, 다른 P2E 코인 시세가 급등하자 다음 순서로 마브렉스의 상장과 시세 급등을 예상해 집중 매입했을 수도 있다.”   의원 겸직 금지 조항은 국회법에 있지만, 코인 관련 내부 정보 이용에 대한 규제는 국내에 없지 않나. “코인을 증권으로 보면 자본시장법을 적용할 수 있다. 검찰에서 김 의원이 보유했던 위믹스 코인의 증권성 여부를 검토한다고 밝힌 게 그래서다. 어떤 코인은 발행 조건과 취지, 외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증권으로 볼 여지가 큰 경우가 있다.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리플 코인 발행사 리플랩스 사이 소송전의 핵심 쟁점도 리플의 증권성 여부다.”   증권성을 인정해서 코인 규제를 하는 게 바람직한가. “양날의 검이다. 투자자 피해에 대한 구제는 쉬워진다. 반면 사업자의 코인 발행은 어려워진다. 가상자산 생태계 확장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단 얘기다. 사회가 합의할 문제다.”     ■ 닥사, 김남국 논란 계기 ‘의심거래보고 룰 유형’ 개발 중 「 김남국 의원의 거액 코인 투자 논란을 계기로 투자자들은 ‘디지털자산 거래소 공동협의체’(DAXA·닥사)의 행보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닥사는 국내 5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가 참여하는 자율협의체다. 지난해 6월 테라·루나 사태를 계기로 출범, 국내에 암호화폐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적 규제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규제 마련에 나서고 있다. 김재진 닥사 상임부회장은 “23일 공식 홈페이지를 열어 투자자들이 닥사의 다양한 자율규제 등 가상자산 관련 정보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며 “앞으로도 투자자들의 정보 불균형 해소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일각에선 닥사의 자율규제가 역기능이 더 크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닥사를 움직이는 5대 거래소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99%에 달한다. 이런 독점적 지위를 등에 업고 자율규제라는 명분 아래 입맛대로 특정 코인을 거래지원(상장)하거나 거꾸로 거래지원 종료(상장 폐지)하면서 기업 이익 극대화를 도모하고, 투자자 보호는 뒷전일 수 있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시각이다. 실제 닥사가 K코인의 선두주자로 꼽혔던 위믹스에 대해 지난해 12월 갑작스러운 상장 폐지 결정을 내렸다가, 두 달여 만인 올해 2월 코인원에서 위믹스를 재상장하면서 투자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닥사 내에서도 엇박자가 날 만큼 자율규제의 기준이 모호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였다.   논란이 거세지자 닥사는 3월 상장 심사에 대한 공통 가이드라인의 주요 항목을 공개했다. 앞서 닥사는 지난해 9월 회원사 공동으로 상장 심사 가이드라인 도입을 발표한 뒤 10월부터 시행해왔다. 닥사는 상장 심사 평가위원 관련 규정도 강화, 지난달부터 적용했다. 회원사들이 상장 심사 때 외부 전문가 ‘최소 2인 참여’ 혹은 ‘최소 참여 비율 30%’의 기준을 지켜온 것에 더해 ‘법적 위험성 평가위원 최소 1인이 반드시 참여’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닥사는 이번 김남국 방지법 통과를 계기로 업권 공통의 ‘의심거래보고(STR) 룰 유형’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거래소마다 STR 기준이 달라서 비정상적인 코인 거래 진단이 까다로울 수 있어서다. 이번 김 의원의 코인 거래내역도 일부 거래소만이 STR로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닥사가 여러 문제 사례를 분석해 STR 룰 유형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동안 낮아졌던 (닥사에 대한) 신뢰도 회복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3.05.27 00:01

  • 불심으로 쌓은 북한산성 정문, 의상·원효대사가 지킨다

    불심으로 쌓은 북한산성 정문, 의상·원효대사가 지킨다

     ━  오늘 부처님오신날, 북한산에 깃든 불교   북한산 원효봉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들. 원효봉과 맞은편 의상봉은 북한산성 정문 대서문(동그라미)을 지킨다는 해석이 있다. 등산객이 있는 바위와 대서문 사이 계곡의 사찰은 서암사로, 조선시대 북한산성 승영사찰 13곳 중 하나였디. 사진 하단 왼쪽의 사찰은 석굴암이 있는 아미타사다. 김홍준 기자 승려가 지휘해, 승려들이 만들었다. 둘레 12.7㎞, 내부 면적 6.2㎢의 거대한 구조물. 한 해 탐방객 수백만 명을 끌어당기는 구심력. 북한산성이다. 그 산성을 이고 있는 북한산을 찾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나흘 앞둔 지난 23일의 북한산은 크고 작은 사찰 100여 곳이 내건 연등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왕도 지나갔고, 대통령도 드나든 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문이다. 숙종은 어린 영조를 데리고(1712년), 영조는 다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함께 북한산성을 찾았다(1772년).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선임연구원은 “3대에 걸친 왕들이 북한산성을 찾았는데, 숙종만 정문인 대서문을 이용했다”며 “영조가 1760년에 북한산성을 찾았을 때는 대성문을, 1772년에는 대남문을 입구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산성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는 탐방로를 ‘숙종의 길’로 부른다. 석가탄신일을 앞둔 북한산 도선사에서 연등을 달아놓았다. 연등은 연꽃의 련(蓮)이 아니라 불을 붙이거나 태운다는 ‘연’(燃)자를 쓴다. 따라서‘연등(燃燈)’은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깨달음을 전파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등을 켜놓았던 풍습에서 비롯됐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한 해 탐방객 600~700만명   숙종은 승려 성능(聖能)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승군 최고직)에 임명해 북한산성을 짓게 했다. 삼국시대부터 뼈대를 갖췄던 산성은 9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남한산성은 승려 각성(覺性)의 진두지휘로 3년 만에 지어졌으니(1624년), 한강 남북의 두 산성은 승군의 불심(佛心)과 노역이 갈고 다듬어진 공양(供養)이었다. 박 연구원은 “정확히 말하면 성을 쌓는 대가로 공명첩을 받아 군역을 면제받았는데, 그래도 막중한 노역이었음은 분명했다”며 “승려 외에 군인·도성민이 축성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북한산 의상봉(앞)과 원효봉(오른쪽 뒤). 한국의 두 고승, 의상대사와 원효대사의 법명에서 가져온 봉우리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성능은 『북한지(北漢誌)』를 남긴다. 요새 나오는 책 제목으로 설명한다면 ‘북한산성에 관한 모든 것’이나 ‘알기 쉬운 북한산성’쯤 되겠다. 성능은 『북한지』 속 지도 ‘북한도’에 북한산성 정문 양쪽의 봉우리를 대선배(불교 용어로 ‘존자·尊者’ 또는 ‘대덕·大德’)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 『북한지』에는 義相으로 씀)’으로 표기했다. 김순배 한국지명학회 총무이사(충주여고 지리 교사)는 “북한산성 초입의 두 봉우리를 원효봉과 의상봉으로 부르게 된 건, 두 대사가 한국 불교의 개조(開祖·종파의 원조가 되는 사람)로 통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며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나 그 이전부터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올해, 불기 2567년 5월의 한낮은 따가웠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면 탐방객 670만명 중 한 명, 2021년 기준으로는 736만명 중 한 명이 돼 북한산 대서문을 지났다. 대서문 편액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그의 호 ‘우남(雩南)’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성 승영사찰 13곳 중 하나였던 상운사에서 기거한 인연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대서문을 찾으면서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너무나 평탄해 숙종의 걱정을 자아낸 길 위로 한 아이가 몇 발 앞으로 뛰어가더니 오른손을 들어 뒤따라오던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한다. 북한산 선봉사의 싯다르타상.. 싯다르타는 후일 깨달음을 얻어 샤카모니(석가모니)가 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칠 때를 표현하고 있다. [사진=인스타그램]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보를 걸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인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연규 스님(전남 여수 항일암 주지)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내가 제일이다’로 잘못 쓸 수 있다”며 “하늘 안에, 땅 위에 모든 것이 존귀하고, 모든 것들은 깨달은 바대로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 차별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는 세상을 깨달았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숙종의 길’ 중간 선봉사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는 싯다르타 상(像)이 석가탄신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이 뒤바뀐 상도 간혹 있다. 불기(佛紀)는 불멸기원(佛滅紀元)의 준말.불멸(佛滅)은 석가모니가 열반(涅槃)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기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기원전 624년)부터 세는 게 아니라 열반한 해, 기원전 544년부터 세기 때문에 올해가 2567년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석가모니는 인도 영취산(靈鷲山, 혹은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했다. 북한산에도 영취봉(靈鷲峰)이 있다. 아니, 있었다. 현재 영취봉은 염초봉으로 부른다. 성능도 『북한지』 속 ‘북한도’에는 ‘염초봉’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본문에는 ‘영취봉’이라고 썼다. 김순배 이사는 “현재도 그렇지만, 북한산에는 불교 지명이 많다”며 “하지만 사찰인 (경북 영주) 숙수사 위에 유교를 대표하는 소수서원이 세워졌듯, 조선 시대에는 불교 지명이 유교 지명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영취봉과 염초봉의 관계도 그럴 것 같지만, 좀 더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숙종의 길 중간 선봉사엔 싯다르타상   염초봉(廉峭峰)은 ‘날카롭다’ 염(廉)과 ‘가파르다’ 초(峭)를 쓴다. 염은 청렴, 염치로 두루 쓰이지만 ‘날카롭다’라는 뜻으로는 생소하다. 공자가 말했다. “옛날엔 사람에게 세 가지 병폐가 있더니 지금은 그것마저 없다… 옛날 긍지가 센 사람은 청렴하여 위엄이 있었는데 지금의 긍지가 센 사람은 화를 잘 내고 거세다…(古者民有三疾…今古之矜也廉, 今之矜也忿戾…논어 양화16)” 주희는 여기에서 ‘염(廉)’을 이렇게 해석했다. “염은 모서리가 뾰족(峭)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바르고 위엄이 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같은 해석을 했다.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염초(廉峭)는 ‘물리적’ 가파름과 날카로움도 뜻하지만 ‘정신적’ 강직함과 올곧음도 의미한다”고 밝혔다. 북한산 염초봉. 염초봉 사면에도 다양한 암벽루트가 있다. 김홍준 기자   이 영취봉(염초봉) 서쪽 맞은 편에 나한봉이 있다. 나한(羅漢)은 부처의 말씀을 실천해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高僧)과 대덕을 일컫는다. 마주 보는 봉우리 사이에는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김 이사는 “나한은 불제자이기에 부처로 상징되는 영취봉을 마주하는 것처럼 『북한지』에 지명이 배치돼 있다”고 밝혔다. 염초봉 밑에는 도교의 ‘칠성(七星)’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칠성각·삼신각 등 사찰 속 전각처럼, 불교가 도교·민속신앙 등과 어울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북한산 원효봉 아래의 한 바위에 그려진 칠성(七星). 사찰에도 칠성을 모시는 칠성각이 있는데,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성을 찾은 숙종은 길이 너무 평탄해 성문 하나를 더 짓도록 지시했다. 중성문은 그렇게 태어났다. 성능은 중성문 위, 북한산 13개 승영사찰의 중심인 중흥사에서 30년을 지냈다. 근처 봉성암에 그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부도(浮屠)가 있다. 중흥사는 태고사와 함께 북한산성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태고(太古)는 원증국사 보우(普愚, 1301~1382)의 법호다. 조계종의 중시조다. 김 이사는 “북한산성 축조와 사찰 배치는 승군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전략적 의미와 함께 역사 공간이자 문화 공간인 산성 위에 불교적 의미를 담으려던 노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출구다. 대남문 동쪽으로는 보현봉이, 서쪽으로는 문수봉(이 있는데, 좌우에서 석가모니를 협시(夾侍)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이름을 가져왔따. 북한산성의 출구인 대남문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사진=경기문화재단 대서문이 정문이라면 후문은 어디일까. 대남문이다. 이 성문을 나오면 보토현과 북악산을 거쳐 경복궁으로 이어진다. 문수봉과 보현봉은 대남문을 협시(夾侍·받들어 모심)하고 있다. 석가모니를 좌우에서 모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는 사자를 타고, 보시를 상징하는 보현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이렇게 보현보살-석가모니-문수보살(좌측부터)을 모시는 불전은 대웅전으로 부른다. 보살이 아니라,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약사여래 (藥師如來) 같은 부처가 협시를 하면 격을 높여 대웅보전으로 부른다. 태고사에는 대웅보전이 있다.   숙종은 후문 대남문이 아니라 대동문을 통해 북한산성을 빠져나가 환궁했다. 지난 23일 기자는 대동문을 지나 용암문을 통해 하산했다. 예불이 끝나는 시간, 도선사의 한 승려가 불전사물(佛殿四物)인 법고·범종·목어·운판을 순서대로 두드렸다. 땅 위의, 땅속의, 물속의. 하늘의 중생과 짐승·미물이 차례대로 깨어난다. 어둑해진 길, 연등이 켜진다. 불 켠다는 뜻의 연등(燃燈)이 맞긴 하지만, 연꽃 모양이라 연등(蓮燈)으로 부르건 무슨 문제더냐. 내 마음의 불이 켜지면 되는데. 북한산 도선사에서 한 승려가 법고를 두들기고 있다. 법고는 범종, 목어, 운판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로 부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도선사 범종각에는 법고·범종·목어·운판(시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순)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다. 법고는 번뇌를 물리치고 모든 중생을 깨우치자는 의미다. 범종은 우주 중생을 깨우쳐 제도하는 대자대비의 소리를 뜻한다. 목어는 바다 수중에 사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의식구다. 운판은 날짐승들을 제도하는 의미다. 예불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법고-범종-목어-운판의 순서대로 친다. 김홍준 기자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3.05.27 00:01

  • 강남 은마 경매가 2억 뛰고 급매 사라졌지만, 신중론도 여전

    강남 은마 경매가 2억 뛰고 급매 사라졌지만, 신중론도 여전

     ━  주택시장 변곡점 왔나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5월 3주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증감률은 -0.1%로 매주 하락 폭이 줄어들며 상승 전환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뉴시스] #  “연초에 샀어야 했나.” 최근 서울 마포구에 전셋집을 계약한 직장인 김모(40)씨는 “요즘 집값이 다시 오르는 것을 보니 진작 급매물을 잡았어야 했던 건 아닌가 마음이 복잡하다”며 “연초 관심이 있던 대단지 아파트 전용 84㎡가 9억원대에 거래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2억원 이상 호가가 올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     18일 서울중앙지법 경매법정에서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매물이 실거래가보다 2억원 이상 높은 26억5000만원대에 낙찰됐다. 두 차례 시도에도 응찰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해당 경매에는 6개월 만에 응찰자가 45명이나 몰렸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그간 낙찰을 꺼리던 경매시장에서 시세보다 고가의 낙찰이 이뤄졌다는 것은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일부 청약 경쟁률 78.9대 1   ‘찐반(진짜 반등)’일까. 최근 시장의 반등 조짐에 갑론을박이 무성하다. 연초에 비하면 전국 아파트 시장의 온도는 확연히 상승했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5월 3주 주간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주간 매매가격 증감률은 -0.01% 하락했다. 지난주(-0.4%)보다 낙폭이 줄어들며 상승 전환을 코 앞에 뒀다.   실제 거래도 이뤄진다. 부동산 정보제공 업체인 부동산R114에 따르면, 올해 3월 이후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시스템에 신고된 아파트 거래가격을 연초(1·2월) 가격과 비교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 1만4546개 주택형 가운데 58.3%(8475건)의 평균 실거래가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도권(64%)의 상승거래 비중이 지방(54.1%)을 크게 앞질렀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승세가 확산되고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아파트 거래량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이 집계한 서울 아파트 거래량(계약일 기준)은 3월 총 2976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10월(559건)보다 5배 이상 증가한 수준이다. 19일 기준 4월 서울 아파트 거래량도 3000건을 돌파했다.   급매물도 속속 사라지고 있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인 리얼망고에 따르면, 최근 서울에서 상승세가 가장 두드러지는 송파구에선 KB시세보다 저렴한 호가 매물이 전체 등록매물(1만9632건)의 8.6%(1682건) 수준에 불과했다. 지난해 하반기 고점 가격보다 2억~3억원 가량 빠진 실거래로 화제가 됐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최윤성 리얼망고 대표는 “주택 수요가 많은 송파구의 경우 급매물도 많지 않지만, 급매로 나와도 KB시세 대비 하락 폭이 4500만~600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집값이 반등 조짐을 보이자 ‘바닥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지난 1월을 최저점으로 집값 하락폭이 둔화되고 지역별로 지지기반이 형성되고 있다”며 “고점 대비 20~30% 하락한 일부 급매물 중심으로 매수세가 나오는 심리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부동산시장을 냉각시켰던 최대 변수인 금리 인상에 대한 우려가 약화되고 있고, 대출 규제 완화 등 정책의 변화도 하락세를 진정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서울을 중심으로 되살아나는 청약 열기도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17일 1순위 청약을 진행한 서울 은평구 새절역 두산위브 트레지움은 평균 78.9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박지민 월용청약연구소 대표는 “청약 열기가 달아오르면 기존 아파트에 대한 관심으로도 옮겨간다”며 “고점 대비 20% 안팎 하락한 수준의 급매물이 남아있는 경기도 등으로 시장의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움츠렸던 시장이 바닥에선 고개를 들더라도, 반등의 속도를 내긴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1차적 관건은 ‘급매 소진 후 추격 매수가 따라붙을 수 있느냐’에 있다. 이광수 부동산 애널리스트는 “최근 매수세를 주도한 사람들은 2030세대 실수요자”라며 “실수요는 가격이 올라가면 추격매수하지 않고 다시 관망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부동산원이 집계한 아파트 매입자 연령대별 현황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전국 아파트 거래 8만8104건 가운데 2030세대의 매수 건은 2만7566건(31%)에 달했다. 생애 최초 주택구매자에 대해 최대 80%까지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올려준 특례보금자리론 출시와 대출 규제 완화 등이 젊은 층의 매수세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애널리스트는 “시장이 본격 상승하려면 투자 수요가 들어와야 하는데, 예년에는 30%를 넘나들던 서울 갭 투자 비중이 올해에는 10%안팎에 머무를 정도로 위축된 상태”라고 했다.   하반기 고가 전세 만기 몰려있어   ‘더블딥’(일시적 회복 후 다시 침체되는 현상)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펼쳐졌던 1차 부동산 세일이 끝나가고 있지만 2차 세일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리먼사태 직후인 2008년 9월~12월 수도권 집값은 넉달간 17% 빠졌다. 이후 2009년 수도권 집값은 전 고점을 갈아치울 정도로 급등했지만, 2010년 이후 쭉 미끄러졌다. 지난해 9~12월 넉 달간 서울 아파트값은 16% 급락했다. 일부 지역의 국지적 상승세에 단기적으로 집값이 1차 바닥을 찍더라도 다시 폭락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위험이 상당한 가운데, 경기침체에 따라 주택 매수 심리가 다시 얼어붙을 수 있어서다. 박 위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도 집값이 크게 빠졌다가 이듬해 급등했는데, 2010년부터 다시 떨어져 하우스푸어(집 가진 거지)로 기억되는 침체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부실 뇌관으로는 2021년 하반기에서 2022년 상반기의 전셋값 폭등기 계약이 첫손에 꼽힌다. ‘전세런’(부도난 은행에서 돈을 빼가는 뱅크런처럼, 세입자들이 전세시장을 떠나는 현상)이 하반기 부동산시장을 강타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이 애널리스트는 “2021년 하반기 고가로 계약된 전세가 많이 몰려있는데 곧 만기가 돌아오고 있다”며 “재계약 시점에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 집을 팔려는 움직임이 몰리면 시장에 강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 빅데이터가 진단한 투자점수 서울 46.6점, 부산 49.1점 그쳐 「 빅데이터 리치고가 진단한 부동산 시장 서울(42.6점)·대구(42.6점)·인천(40점)·부산(40점)·제주(39.4점)…. 지난해 5월, 부동산 빅데이터 ‘리치고’가 진단했던 전국 부동산 투자점수다. 당시 전국 시·도에서 경남(52.6점)과 경북(51.9점) 두 곳만이 겨우 50점을 넘어설 정도로, 시장이 위험 국면에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상반기 상승과 하락에 대한 예상이 엇갈리는 상황이었지만, 리치고는 전국이 ‘투자 유의’ 수준일 정도로 먹구름이 가득하다고 예측했다. 그로부터 1년. 빅데이터는 부동산의 현주소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빅데이터에 투자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위험하지만, 예측 불허의 시기에 ‘방향등’으로 참조할 수 있다.   5월 기준 전국 투자점수를 보면, 경남(61.7점)과 충남(60.3점)이 가장 높다. 서울(46.6점)의 투자점수는 전국 시·도에서 16위로 전북(49.2점), 부산(49.1점), 제주(39.3점)와 함께 50점 미만의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전반적으로 1년 전에 비해서는 전국 부동산의 거품이 다소 걷히며 투자점수가 올라간 상태이지만, 여전히 대부분 지역의 점수가 낮다. 서울 지역 아파트를 저가 매수할 최적기로 꼽혔던 2015년 9월에는 투자점수가 83점이었다.   리치고 종합점수에 반영되는 세부 지표들을 보면, M2통화량 대비 버블인덱스는 16~26% 수준의 하락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 PIR(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 지수는 25~40% 하락이 예상되는 구간에 있다. 매매 수급 흐름도 매우 좋지 않다. 매매 거래량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거래량이 적고 매물은 다시 쌓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기원 리치고 대표는 “2023년 5월 빅데이터는 여전히 집값이 하락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며 “지역별로 다르지만 집값은 최소 15% 이상 하락을 해야 매수 매력 구간에 들어간다”고 분석했다. 」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5.20 01:02

  • 성희롱 아이 혼내면 교사 고소…“학원 강사만도 못해” 한숨

    성희롱 아이 혼내면 교사 고소…“학원 강사만도 못해” 한숨

     ━  무너진 교권, 지금 우리 학교는   “이제는 아이들이 무서울 지경입니다.”   용인의 한 고등학교에서 12년째 교직 생활을 하는 박정민(여·가명·41) 교사는 몇 년 전부터 아이들과 대면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업이나 꼭 필요한 상담 말고는 아이들과 접촉을 최대한 피하려는 편”이라며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나 신뢰는 무너진지 오래”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 교사가 처음부터 아이들과의 접촉을 피해왔던 것은 아니다. 6년 전까지만해도 박 교사는 열정 넘치는 젊은 선생님이었다. 일에 치이고 동료나 선배 교사들과의 갈등에 힘들어도 아이들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달랐다. 박 교사는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학생들의 이정표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교사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라며 “아이들이 조금 엇나가고 삐뚫어져도 얼마든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교사의 이런 마음은 아이들의 도를 넘는 성희롱과 무시 속에서 빛을 잃었다. 2017년 시행한 익명의 교원평가에서 아이들은 박 교사의 신체 부위에 대한 희롱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내용을 기재했다. 박 교사는 “한두명의 일탈이 아니라 5~6명 정도 됐다는게 충격적이었다”며 “한동안은 학교 측에 말할 생각도 못했다”고 전했다. 해당 발언들이 공론화 되는 것이 두려웠던 박 교사는 이를 스스로 해결하려 아이들과 일일이 따로 상담했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아이들의 조롱은 심해졌고, 박 교사의 신체부위를 그린 익명의 쪽지를 교탁 위에 놓아두기도 했다. 박 교사는 “심각하게 화를 내거나 단호하게 제지해도 킥킥대는 아이들이 있다”며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무력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교권침해 건수 2269건, 1년 새 2배 늘어   이는 비단 박 교사만의 사례는 아니다. 교사는 한때 인기직업으로 꼽혔다. 외환위기,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직업 안정성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불과 10여년 전까지만해도 교대의 입학 커트라인은 수직상승했다. 저렴한 학비, 안정적인 연금도 강점이었다. 하지만 2010년들어 부족한 경제적 여건에 교권추락으로 인한 근무환경 악화로 교원들의 사기는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교대·사범대도 함께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인권을 강조하면서 문제 학생을 제지할 방법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점이다. 간단한 훈육이나 학생에 대한 퇴실 조치도 인권침해나 아동 학대로 몰리는 경우가 생기니 교사들은 아예 훈육을 포기해 버린다. 김지현(여·가명·29) 교사 또한 얼마전 자신의 물건을 숨기는 학생들의 짖궂은 장난에 기분이 상했지만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사를 꿈꿔 왔고, 교대에 진학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했지만 현실은 학원 강사만도 못하다”며 “학생들의 존중과 배려를 찾아보기는 어렵고 서류 업무만 하는 회사원이 된 느낌”이라고 전했다. 지난 14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스승의날을 기념해 최근 전국 유·초·중·고·대학 교원 6751명을 조사한 결과 학교 현장에서 교권은 잘 보호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69.7%로 나타났다. 2021년 50.6%, 2022년 55.8%와 비교할 때 갈수록 부정응답이 많아지는 추세다. 반면 ‘그렇다’는 응답은 2021년 18.9%, 2022년 16.2%로 갈수록 낮아지더니 급기야 올해 조사에서는 한자리수(9.2%)까지 추락했다.   최근 전북 군산에선 중학생이 교사의 얼굴을 수차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지난해 충남에선 한 중학생이 수업 중 교단에 드러누워 여교사를 촬영하는 일까지 있었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생에 의한 교권침해 심의 건수는 2020년 1197건에서 2021년 2269건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3000건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20년차 김정후(가명·50) 교사는 “과거에 비해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파다하다”며 “‘교사 주제에’라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사실상 아이들을 통제할 수단이 부모에게 전화해 애원하는 일 밖에 없다”며 “주변에서 교대나 사범대를 지망한다고 하면 솔직히 말리고 싶다”고 했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2학년생 이진호(가명)군은 “선생님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만 해도 불만을 갖는 학우들이 많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 ‘저건 좀 아닌데’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교사에게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도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혹여나 아이들에게 훈계라는 명목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수행 평가를 나쁘게 준다고 협박하면 학무보를 통해 고소장이 날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모에게 전화해 애원하는 일 밖에 없어”   ‘정당한 생활지도’와 ‘아동학대’의 경계가 모호한 시점에서 ‘아동학대 신고’는 교사를 압박하는 수단 중 가장 많이 활용되는 무기다. 학교폭력으로 신고를 당한 학생의 행동을 인정하는 의견서를 작성한 교원에게 ‘아동학대’로 신고한 보복성 신고 사례도 있다. 송기창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교사가 학생을 지도 하다가 학부모로부터 소송을 당하면 모든 것은 개인의 몫”이라며 “변호사 선임부터 수업을 하며 법원에 출석하는 것도 혼자 감당해야하니 누가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려 하겠나”고 반문했다.   교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급감할 수 밖에 없다. 교총의 통계에 따르면 교직 생활에 만족한다는 답변은 23.6%에 그쳤다. 관련 조사가 시작된 2006년(67.8%) 이후 역대 최저 수준이다. 교직 만족도는 2016년에는 70.2%에 달했지만 2019년 52.4%로 하락했고,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후 교사들이 방역업무를 떠맡게 되면서 32.1%로 급감했다. 이후 소폭 올랐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20%대까지 떨어졌다. 교직생활 중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해서는 ‘문제행동, 부적응 학생 등 생활지도’(30.4%)를 가장 많이 들었다. 이어 ‘학부모 민원 및 관계 유지’(25.2%), ‘교육과 무관하고 과중한 행정업무, 잡무’(18.2%)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무너진 교권을 바로 새우고 아이들의 올바른 지도를 위해서는 교사의 학생 생활지도 권한을 법제화 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우리나라는 전체적인 교육의 통일성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학칙을 넘어서 법률 수준의 규율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교사가 정당한 목적으로 교육적 활동 및 지도를 할 때는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등의 규정이 명확하게 생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다수의 교원들은 무너진 교권, 무너진 교실을 회복하는 방안으로 강력한 ‘교권 보호 입법’과 ‘고의중과실 없는 생활지도 면책권 부여’를 요구하고 있다.   교총의 통계를 보면 정당한 교육활동·생활지도는 민·형사상 면책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데 96.2%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한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로부터 교원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방안에 대해 ‘고의 중과실 없는 교육활동, 생활지도에 법적 면책권 부여’(42.6%)를 가장 많이 꼽았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선진국 사례를 보면 교사·학생 간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는 계약의 형태로 서로 침해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며 “학교에서 학생들이 지켜야 할 예의와 질서 규범들에 대해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존경심과 신뢰감을 갖도록 교사 집단의 변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체벌이나 학생지도의 법제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보진 않는다”며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학원들의 표준화된 평가가 교사의 평가에 우선하고, 배치표가 교사의 말보다 신뢰받는 상황이 문제”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교사들은 학생들을 꼼꼼하고 객관적으로 살피고 평가하여 학부모와 학생의 신뢰를 얻어야한다”며 “그래야 정부나 대학에서도 이를 믿고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게 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교사에게도 실질적인 권한이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 학생들, 학교·교사 만족도 높아졌지만 교우 관계는 나빠져 「 지난 15일 경남 창원시 마산여고 학생들이 스승의 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10년간 학생들의 학교와 교사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졌지만 교우 관계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교육청 산하 교육연구정보원 교육정책연구소가 지난 16일 내놓은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교 환경에 대한 학생들의 전반적인 만족도는 높아졌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은 2010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 초중고 학생 1만628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021년 서울 학생의 전반적인 학교 만족도는 2010년 대비 0.42점(3.543.96) 증가했고, 학습능력 만족도는 0.66점(3.303.96), 학교 시설 및 환경에 대한 만족도는 0.68점(3.203.88) 상승했다고 밝혔다. 학생들이 느끼는 교사에 대한 만족도는 3.62점에서 4.17점으로 올랐다. 중학생들이 느낀 교사 만족도가 가장 크게 증가(0.74점)했으며, 뒤이어 인문계고(0.69점), 직업계고(0.61점), 초등학교(0.16점) 순으로 모두 증가했다.   다만 교우관계 점수가 소폭 하락했다. 초중고 전체적으로 4.25점이었던 교우관계 점수는 2021년 4.18점으로 낮아졌다. 교우관계는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휴식시간 등에 친구와 함께 지내는지 정도를 5점 만점으로 질문했다. 특히, 초등학생이 4.41점에서 4.16점으로 가장 크게 하락해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학생 교우관계도 4.31점에서 4.22점으로 하락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코로나19를 거치며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늘어난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라며 “초등학생의 교우관계 개선을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분석했다. 」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3.05.20 00:43

  • ‘VIB·텐 포켓’ 신드롬…아이 고모·삼촌까지 지갑 팍팍 연다

    ‘VIB·텐 포켓’ 신드롬…아이 고모·삼촌까지 지갑 팍팍 연다

     ━  저출산의 역설, 고가 아동복 불티   지난 2월 서울의 한 백화점 안에 있는 아동복 매장. [연합뉴스] 수도권에서 23개월 여아를 키우고 있는 김모(34)씨는 최근 명품 아동복 구매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브랜드 상관없이 예쁜 옷을 입혔는데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다른 아이들이 대부분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냥 하나 사서 입힐까 싶다가도 티 하나에 수십만 원, 겉옷은 수백만 원이라 ‘이걸 입히는 게 맞나’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이모(41)씨는 결국 지난해 겨울 5세 아이가 입을 ‘몽클레르(moncler)’ 패딩을 구매했다. 한 벌에 100만원이 훌쩍 넘을 정도로 고가지만 최근 사이즈가 없어서 못 살 정도로 인기다. 이씨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인데다 또래 아이들이 많이 입어 샀다”며 “조금이라도 오래 입히려고 큰 사이즈를 골라 소매를 한 단 접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적어지고 있는데 아동복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매년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며 지난해 0.78명까지 낮아졌다. 반면 국내 아동복 시장의 규모는 2020년 9120억원에서 2021년 1조 1247억원으로 23.3% 증가했다. 같은 기간 40조 3228억원에서 43조 5292억원으로 8% 성장한 전체 패션 시장보다 성장률이 3배 가까이 높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추정하는 2022년 아동복 시장 규모는 1조 2016억원에 달한다.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 명의 자녀에게 아낌없이 돈을 쓰는 ‘VIB(Very Important Baby)’ 트렌드를 지목했다. 이전보다 덜 낳고, 늦게 낳는 만큼 아이를 귀하게 키우는 분위기가 형성돼 명품·고가 아동복이 인기를 끈다는 것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100원 하는 옷이 10벌 팔렸다면 지금은 1000원 하는 옷이 5벌 팔리는 격”이라며 “아동의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한 아이에 투자하는 비용은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한 아이를 위해 10명이 지갑을 연다는 ‘텐 포켓(10 Pocket)’ 현상도 지목됐다. 황진주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이 한 명에게 부모는 물론 조부모·고모·이모·삼촌 등 친척과 지인까지 10여 명이 관심을 가진다”며 “경제력 있는 성인 여러 명의 투자가 집중돼 고가 아동 브랜드가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이전 세대보다 더 소비 지향적인 밀레니얼 세대 여러 명이 한 아이에게 소비하며 나타난 저출산의 역설”이라고 전했다.   백화점 3사의 아동 명품 매출도 증가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의 올해 1~4월 아동 명품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8.5% 늘었다. 일반 아동 매장 매출 증가율(19.8%)보다 더 높다. 같은 기간 신세계백화점의 수입 아동 브랜드 매출도 전년 대비 28.7% 증가했다. 전체 아동 상품 매출은 20.1% 상승했다. 아동 명품 매출 증가율이 전체 아동 상품 매출 증가율보다 높다. 롯데백화점의 아동 명품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15% 늘었다.   명품 브랜드와 캐주얼 브랜드는 키즈 라인을 확대하며 VIB 트렌드를 저격하고 있다. 디올은 최근 신세계 강남점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베이비 디올 매장을 열었다. 몽클레르 앙팡, 버버리 칠드런, 펜디 키즈, 지방시 키즈 등 명품 브랜드도 백화점에 아동 전용 매장을 냈다. 지난해 9월 롯데백화점 잠실점에 국내 최초로 연 나이키 키즈 매장은 한 달 만에 매출 4억3000만원을 기록했다.   기존 아동복 브랜드도 사이즈를 늘리거나 대상 연령대를 넓히는 추세다. 아가방앤컴퍼니가 운영하는 유아동복 브랜드 에뜨와는 올해부터 3세에서 5세까지 입을 수 있는 토들러 제품군을 선보였다. 신생아부터 만 2세 아동을 대상으로 제품을 출시하다 타깃 확장에 나선 것이다. 반대로 만 6세에서 13세 아동용 제품을 만들던 블랙야크 키즈는 지난해 처음으로 만 2~5세를 위한 토들러 라인(100~120 사이즈)를 출시했다.   반면 중저가 아동복 브랜드가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알로앤루, 포래즈, 알퐁소 등을 운영했던 제로투세븐은 지난해 8월 영유아 사업을 전면 철수했다. 코오롱FnC도 지난해 7월 아동복 브랜드 리틀클로젯을 접었다. 서용구 교수는 “아동 시장이 양극화되며 고가 브랜드나 친숙한 캐주얼 브랜드 아니면 초저가 상품만 살아남으며 매쓰마켓(Mass Market, 대량구매 시장)인 중저가 브랜드가 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소비 지향적인 태도가 아이의 경제관념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시적 소비는 자녀에게는 물론 가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이가 고가의 상품만 입고 사용하면 소비를 통제하는 능력을 배울 기회가 없다”며 “명품 옷만 입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 명품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없다면 좌절감을 느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이어서 “중국의 소황제 세대처럼 이기적으로 클 가능성도 있다”며 “텐 포켓 세대가 자라 주변 어른들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의 몫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2023.05.20 00:01

  • 한국형 지중해식, 탄·단·지 비율 5:2:3 적당…오메가3 많은 고등어·임연수어·들기름 등 좋아

    한국형 지중해식, 탄·단·지 비율 5:2:3 적당…오메가3 많은 고등어·임연수어·들기름 등 좋아

     ━  건강 밥상 ‘지중해식 식단’ 비결   지중해식 식단의 특징은 신선한 해산물·채소를 즐겨 먹는다는 점이다. 미쉐린 가이드 그린 스타 레스토랑 ‘기가스’의 정하완 셰프가 조개·눈물콩 등을 이용해 만든 지중해 요리. 최영재 기자 여름에 부쩍 가까워진 날씨로 다이어트가 고민된다. 겨우내 두꺼운 옷으로 덮어뒀던 볼록한 배를 보며 ‘과연 나는 건강한가’ 자문도 하게 된다. 새삼 건강한 식이요법을 찾게 되는 때 ‘지중해 식단’이 눈에 들어왔다. 구릿빛 몸으로 와인과 더불어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며 사는 지중해 연안 사람들의 건강 비법이라는데, 과연 이 비법의 핵심은 뭘까. 그들의 대표 식품인 올리브유가 일상적이지 않은 한국인의 밥상에도 적용할 만한가.   6년 연속 ‘세계 최고의 건강 식단’ 선정   지중해식 식단의 특징은 신선한 해산물·채소를 즐겨 먹는다는 점이다. 미쉐린 가이드 그린 스타 레스토랑 ‘기가스’의 정하완 셰프가 조개·눈물콩 등을 이용해 만든 지중해 요리. 최영재 기자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말로, 올바른 식습관만으로도 충분히 건강한 삶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의학전문지 란셋(Lancet)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015~17년 195개국 대상 조사에서 조기 사망 원인 1위는 ‘잘못된 식습관(1100만명)’으로 꼽혔다. 2위가 고혈압(1040만명), 3위가 흡연(800만명)이다.     관련기사 “농장서 식탁으로 바로 옮겨 놓은 듯 자연 그대로의 멋·맛 담는 게 핵심” 2013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지중해식 식단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U.S. 뉴스&월드 리포트가 선정하는 건강에 도움 되는 ‘세계 최고의 식단’에서 올해까지 6년 연속 1위로 꼽혔다. 2위는 저염식 위주의 대시(DASH·Dietary Approaches to Stop Hypertension) 식단, 3위는 채식을 중심으로 한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식단이다.   지중해식 식단의 특징은 신선한 해산물·채소를 즐겨 먹는다는 점이다. 미쉐린 가이드 그린 스타 레스토랑 ‘기가스’의 정하완 셰프가 조개·눈물콩 등을 이용해 만든 지중해 요리. 최영재 기자 용어 그대로 지중해 연안 지역(키프로스·크로아티아·스페인·그리스·이탈리아·모로코·포르투갈)의 식단을 일컫는 지중해식 식단은 식물성 식품과 올리브유·생선·견과류 섭취를 강조하고 붉은색 고기와 가공식품을 제한하는 식사법이다. 혈관 건강을 돕고, 당뇨병의 발생 위험을 줄여주며,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 수치도 낮춰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의사·영양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지중해식 식단의 주요 음식들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 통곡물과 곡물빵, 콩류, 올리브유를 포함한 건강한 지방, 견과류와 씨앗, 생선과 해산물, 허브가 있다. 반대로 가급적 멀리 할 음식도 있다.   ▶지중해식 식단의 권장 식품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채소: 아티초크·브로콜리·케일·양배추·시금치·당근·셀러리·오이·피망·감자·고구마·토마토·호박   ●과일: 사과·멜론·살구·딸기·무화과·오렌지·복숭아·포도·배·대추·석류   ●통곡물: 보리·메밀·옥수수·귀리·호밀·보리·통밀   ●견과류: 아몬드·호두·캐슈·피스타치오·해바라기씨·호박씨·헤이즐넛·올리브   ●콩류: 병아리콩·카넬리콩·신장콩·렌틸콩·완두콩   ●생선&해산물: 조개·게·청어·로브스터·고등어·홍합·굴·연어·정어리·농어·새우·참치·문어·송어   ●허브&향신료: 바질·커민·마늘·라벤더·로즈마리·세이지·민트·오레가노·파슬리·후추·계피   ▶지중해식 식단의 제한해야 할 식품   ●정제곡물 식품: 흰 빵·흰쌀·감자칩·크래커   ●트랜스 지방: 마가린·가공 치즈·마가린이 첨가된 식품   ●설탕 첨가 식품: 소다 등의 음료수·아이스크림·설탕   ●정제된 기름: 콩기름·캐놀라유·면실유·포도씨유·해바라기씨유 등   지중해식 식단이 세계 최고의 건강한 식단으로 꼽히는 이유는 특정한 음식만을 먹거나, 완전히 끊어야 하는 음식 없이 ‘균형의 원칙’을 지키는 일상 식사만으로 심혈관 계통 질병을 예방하고 현대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다이어트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식’이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지중해 연안 지역의 사람들이 먹는 것처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중해식 식단의 예를 찾아보면 호두를 곁들인 비트 샐러드, 채소 스튜, 해산물 리소토, 호밀빵 토스트, 올리브유 드레싱을 얹은 그릭 샐러드 등을 제안하는데 평범한 한국인의 밥상을 과연 매일 이런 음식들로 대체할 수 있을까.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 이지원 교수는 “지중해식 식단의 개념을 정의하면 첫째, 지방을 많이 섭취하되 나쁜 포화지방과 트랜스지방은 피하고 좋은 지방을 먹는다는 것. 둘째, 탄수화물은 먹되 단순 당(흰빵·흰쌀)은 피하고 섬유질·미네랄이 많이 포함된 전곡류(보리·메밀·옥수수·수수·기장·귀리·통밀·현미 등) 계통을 선호한다는 것. 셋째, 항산화물질·비타민·미네랄이 풍부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나라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다 좋다고 해도 우리에게 안 맞으면 꼭 좋은 건 아니다. 한국 사람에게 잘 맞아야 하고 우리 문화에도 맞아야 한다”며 “지중해식의 핵심 개념을 염두에 두면 지중해에 가지 않아도 한국형 건강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른바 ‘한국식 지중해 식이(KMD·Korean style Mediterranean Diet)’다.   하루 섭취 열량 300㎉ 정도 낮추는 게 좋아   ‘한국형 지중해 식단’을 선보이는 메디쏠라의 밀키트. [사진 메디쏠라] 이지원 교수팀이 한국의 식품업체 메디쏠라와 공동으로 연구해 2021년 발표한 KMD의 특징은 기존 한국 식단에 비해 1일 섭취열량을 약 300㎉ 정도 낮추고, 탄수화물·단백질·지방의 비율을 5:2:3,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을 1:8 이하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연세대 임상영양대학원 교수이기도 한 메디쏠라 연구소의 김형미 소장은 “지중해 식단의 경우 탄:단:지 비율이 4:2:4이지만 한국인의 식습관을 고려해 지속성과 규칙성을 높일 수 있는 5:2:3의 비율이 적당하다는 연구 결과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는 또 “기초대사율이 떨어지는 40대부터는 칼로리를 낮춰야 한다(1일 권장 칼로리 40대 여성 1400㎉, 40대 남성 1800㎉)”며 “삼시세끼로 배분해 한 끼에 400㎉가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나머지 칼로리는 간식으로 충당)”고 했다.   ‘한국형 지중해 식단’을 선보이는 메디쏠라의 밀키트. [사진 메디쏠라] KMD는 지중해식 식단처럼 붉은색 고기를 피하진 않는다. 동물성과 식물성 단백질을 1:1로 하되, 동물성 단백질은 포화지방산이 적은 해산물과 가금류에서 충족할 것을 제안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잘 몰랐던 불포화지방산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이다. 원래 우리 몸은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이 1:1로 태어나는데, 몸에서 합성되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음식으로 섭취해줘야 한다. 하지만 튀기고 기름에 볶는 음식과 가공식품 섭취가 늘면서 미국의 경우 섭취비율이 1:16으로 달라졌다. 일본에선 1:4, 캐나다는 1:6으로 낮춰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정해졌지만, 우리의 경우 미국만큼 비율의 차가 커서 1:8 이하 정도까지 맞추자는 게 KMD의 연구 결과다.   그렇다면 오메가3와 오메가6는 어떤 음식에 많을까. 오메가3는 고등어·임연수어 등의 등푸른 생선과 해산물, 호두 등의 견과류, 들기름·캐놀라유, 푸른잎 채소에 많다. 오메가6는 옥수수기름·해바라기씨유·포도씨유 등의 식용유와 참기름에 많다. 오메가6도 먹어줘야 하는 영양소지만 좀 더 건강한 몸을 원한다면 오메가3는 섭취량을 늘이고, 오메가6는 줄이는 게 좋다. 튀김류·전류 등과 가공식품 섭취가 늘어서 오메가6 섭취 비율이 과다해지면 몸에서 염증 반응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KMD를 근거로 개발한 메디쏠라 밀키트의 21가지 메뉴들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중해식, 즉 양식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소불고기해물덮밥·임연수구이덮밥·두부새우덮밥 등의 한식도 포함돼 있다. 매일 올리브유와 그릭 샐러드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다만, 한 끼에 먹는 식사가 밥·국·반찬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원 플레이트 밀(한 그릇에 담긴)’로 만들어졌다. 김 소장은 “탄·단·지 비율 5:2:3,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비율을 1:8 이하로 구성하고 소금 섭취율도 줄이는 등 여러 가지 원칙을 지키고 반찬 중 특정 음식의 편식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는 건강한 식단을 위해 어떤 식재료를, 어느 정도 먹는 게 좋을지 영양 비율을 참고하는 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를 벤치마킹해서 영양 비율만 잘 지키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건강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지원 교수는 “약보다 먹는 게 훨씬 중요한데, 핵심은 양보다는 밸런스”라며 “한국식 지중해 식이란 한국인에 필요한 영양 비율을 잘 맞추자는 것, 즉 어떤 것은 먹고 어떤 것은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좋은 품질의 식품으로 영양소 비율의 균형을 잘 맞춰 먹자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이게 잘 실천된다면 ‘한국식 지중해 식이’라는 이름에서 지중해라는 단어를 빼고 한국의 대표 건강식으로 전 세계에 소개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한편, 오랫동안 지중해 요리와 문화를 연구해 온 강지영 음식칼럼니스트는 “지중해식 식단은 결론적으로 지중해식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라며 “와인 한 잔과 함께 천천히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식사를 하고, 좋은 사람들과 교우하며 스트레스를 덜 받는 생활이야말로 진짜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마인드”라고 했다.     ■ 씹힐 듯 ‘꾸덕한’ 그릭 요거트, MZ세대 식사 대용으로 인기 「 그릭 요커트에 그래놀라·과일 등을 곁들이면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사진 달그릭]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8년 1조8015억원이었던 국내 발효유 시장 규모는 2022년 2조원대로 성장했고, 2025년까지 2조1152억원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보통 발효유는 마시는 타입과 떠먹는 타입으로 나뉘는데 떠먹는 발효유를 ‘요거트’라고 부른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그릭 요거트’가 인기다. 그릭 요거트란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인공 첨가물 없이 원유를 발효시켜 만든 요거트를 말한다. 지중해식 식단의 대표 음식이며,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장수식품이다.   MZ세대가 그릭 요거트를 선호하는 데는 ‘헬시 플레저’ 트렌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팀이 ‘2022년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제시한 헬시 플레저는 ‘건강하다(Healthy)’와 ‘기쁨(Pleasure)’을 합친 신조어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조절을 하는 MZ세대가 늘면서 식사대용 한 끼로 충분한 음식을 찾게 됐고, 맛과 영양 면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는 점에서 그릭 요거트가 대두됐다. 샐러드나· 그래놀라·과일 등과 곁들이면 식사가 더욱 풍성해진다.   일반 요거트에 비해 열량 자체는 다소 높지만, 그릭 요거트에 든 단백질과 지방은 탄수화물에 비해 천천히 소화되기 때문에 포만감을 오래 지속시킨다는 것도 그릭 요거트의 장점이다. 그릭 요거트의 또 다른 특징은 특유의 ‘꾸덕함’인데 이는 유청을 최대한 빼서 더 많은 우유를 압축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당불내증(유당을 분해·소화 못 하는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도 좋다. 입안에서 씹힐 듯 ‘꾸덕꾸덕’ 독특한 식감이 바로 MZ세대가 그릭 요거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꾸덕하다 못해 바늘로 쪼개 먹을 수 있을 만큼 유청을 분리하는 ‘요즘(YOZM)’ 그릭 요거트는 지난 4월 14일부터 5월 8일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카페를 운영했는데, 당초 4월 30일까지만 운영할 계획을 연장하며 총 누적 방문객 1만5000명을 기록했다. 3.3배 농축을 특징으로 하는 ‘달그릭’ 그릭 요거트는 “샐러드보다 간편하게, 단백질은 채워주는” “닭가슴살, 채소 샐러드, 단백질 쉐이크가 지겨울 때” “비건까지는 아니어도 베지테리언이 먹을 수 있는 음식” 등의 소비자 욕구를 적극 반영한 제품으로 인기다.   이외에도 MZ세대에서 인기가 좋은 마켓컬리에서 ‘그릭데이’ ‘룩트’ 등의  그릭 요거트들이 꾸덕한 식감으로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3.05.13 01:01

  • “농장서 식탁으로 바로 옮겨 놓은 듯 자연 그대로의 멋·맛 담는 게 핵심”

    “농장서 식탁으로 바로 옮겨 놓은 듯 자연 그대로의 멋·맛 담는 게 핵심”

     ━  건강 밥상 ‘지중해식 식단’ 비결   정하완 셰프는 자연 그대로의 신선한 맛을 위해 직접 농사도 짓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영재 기자 미쉐린 가이드 그린 스타 레스토랑 ‘기가스’를 운영하는 정하완 셰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중해 요리를 선보인다. 일명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시스템이다. 말 그대로 농장에서 기른 신선한 채소와 허브를 식탁에서 바로 먹는 것을 의미한다. 제철 식재료를 로컬에서 조달해 신선한 상태로 바로 먹는 것과도 같은 의미다.   2009년부터 코로나19 이전까지 스페인의 ‘무가리츠’, 독일의 ‘라 비’ 등 미쉐린 스타 식당에서 근무한 정 셰프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지중해 요리에 애정이 많다. 휴가 기간에는 일부러 미쉐린 스타 식당뿐 아니라 유럽의 시골마을 오래된 지중해 요리 식당에서도 그들의 요리법을 배웠다. 비자 문제로 귀국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눌러앉은 그는 부모님 집 앞 텃밭에서 1년간 채소와 허브 농사부터 지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한국형 지중해식, 탄·단·지 비율 5:2:3 적당…오메가3 많은 고등어·임연수어·들기름 등 좋아 “지금도 제일 많이 고민하는 게 손님에게 자연이 가진 아름답고 맛있는 맛을 제공하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이해하는 지중해 요리의 핵심은 조개류·갑각류·고추·쌀·올리브 오일·와인·꿀·허브를 주로 사용해서 자극적인 소스 없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본연의 맛을 충분히 담는다는 거예요. 맛이 깔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그 핵심 재료 중 내가 직접 키울 수 있는 것은 채소와 허브니까 우리 레스토랑에서 쓸 대부분의 것은 내가 조달하자 한 거죠. 서양식 요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채소와 허브도 수입하지 않고 직접 키워서 조달하고 있어요.”   ‘기가스’는 저녁에 13가지 코스요리로만 메뉴를 준비하는데, 다른 곳에 비해 해산물을 사용한 메뉴가 압도적으로 많다. 갑각류는 주로 겨울철에 사용하는데, 이는 로브스터 등을 외국에서 수입하지 않고 국내 제철 갑각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해산물을 갖고 있는데 귀한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정 셰프는 “지중해 요리라고 색다르고 어려운 게 아니다”고 했다.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자연을 충분히 담아 창의적으로 맛있게 만드는 요리이기 때문이다. 근본은 우리의 사찰음식과 닮았고, 조리법만 서양식일 뿐이다.   다음은 ‘기가스’에서 내놓는 메뉴의 레시피다. 재료가 조금 복잡하고 많지만, 모두 국내에서 구입 가능하다. 재료들의 조합과 맛을 눈여겨 보았다가 가정식 요리로 응용해 보길 바란다.   ▶서해 동죽 조개&허브   서해 동죽 조개&허브 ●동죽 조개 ●딜 ●허브 주스: 마늘 8g, 생강 36g, 펜넬 씨드 8g, 바질 40g, 라임 주스 60g, 영귤 주스 100g, 적양파 80g 샐러리 240g, 딜 50g, 레몬 그라스 40g, 라임 잎 5개. ●허브 오일: 딜 200g, 콩기름 200g   ①동죽 조개를 데운 냄비에 화이트 와인을 넣고, 1.5분 정도 중간 불에서 익힌 후, 얼음물에 식힌다. ②허브 주스는 모든 재료를 으깨서 섞은 후, 냉장고에서 이틀 정도 숙성해 체에 내린다. ③ ①,②를 80℃ 온도에서 5분 정도 같이 익힌 후, 곱게 갈아 체에 내린다. ④딜과 함께 접시에 예쁘게 담는다.   ▶무늬 오징어&눈물콩   무늬 오징어&눈물콩 ●무늬 오징어 20g, 눈물콩 15g, 구안찰레 2g ●엔초비 먹물 소스 15g: 먹물 6티스푼, 흑산도 멸치 액젓 15g, 마늘 6쪽, 양파 60g, 로즈마리 20잎, 타임 10줄기, 크림 900g, 감자 200g, 올리브 오일 20g, 월계수잎 1잎, 말린 해산물 100g   ①오징어 껍질과 내장을 제거한 후 껍질 부분에 칼집을 내고 숯불에 5초 정도 빠르게 굽는다. ②엔초비 먹물소스는 작은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마늘과 양파를 익힌 후, 모든 재료를 넣고, 끓어오르면 뚜껑을 닫고, 불을 끈 다음 식힌 후 체에 거른다. ③끓는 물에 눈물콩은 1초만 데치고, 일반 완두콩을 사용할 경우는 10초 데친 후, 올리브 오일과 소금으로 양념한다. ④구안찰레는 잘게 다진다. ⑤접시에 같이 예쁘게 담는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3.05.13 00:48

  • 금융당국도 놓친 주가 조작, 유튜버는 석 달 전 경고했다

    금융당국도 놓친 주가 조작, 유튜버는 석 달 전 경고했다

     ━  SG증권발 ‘작전주 의혹’ 확산   김태형씨가 1월 20일 삼천리 등의 주가가 조작된 것 같다고 경고한 방송 화면. [사진 설명왕 테이버] “수급(유통 주식) 없이 올라가는 친구(종목)들 중 하나다. 이거 어딘가의 기획작(조작 세력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량 쥐고 날려(올려)버리는 건 막을 수가 없어요. 안 엮이셨으면 좋겠습니다.”   1월 20일 온라인 세상에서 ‘설명왕 테이버’로 알려진 주식 유튜버 김태형씨가 진행한 작전주 경고 방송의 일부다. 김씨가 이날 영상을 통해 경고한 작전주 의혹 대상은 바로 세방·선광·삼천리·대성홀딩스·다우데이타 등이다. 지난달 이른바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사태’로 하한가 폭탄을 맞은 주요 종목이다. 금융당국은 사태 직전이야 포착했다는 ‘주가조작’을 김씨는 석 달 전 이미 경고한 것이다. SG증권사태 후 해당 영상은 ‘개미(개인 투자자)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온라인에서는 금융당국이나 투자자들이 이 방송을 진작 봤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라덕연 H투자자문사 대표가 주도 의혹을 받는 이번 하한가 사태는 ‘다단계 방식’으로 세력을 모아 현재까지 알려진 투자자 수만 1000명이 넘는다. 임창정 등 유명 연예인과 골프선수, 의사 등이 투자자를 모으고 수익을 다시 떼 주는 방식으로, 피해 규모가 최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15년차 전업 주식 투자자이면서 인기 인터넷 방송 진행자(BJ)이기도 하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아프리카TV 경제 분야 1위이고, 누적 시청자 수가 200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주식 투자의 기술을 다룬 책 『머니카피』를 펴내기도 했다. 9일 잠실의 한 스튜디오에서 김씨를 만나 SG증권발(發) 작전주를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이들 작전의 특징, 이러한 작전주를 피해가는 투자법에 대해 들어봤다.   호재·수급 없이 오르는 종목은 위험   라덕연 H투자자문 대표가 11일 SG증권 관련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됐다. [뉴스1] 어떤 부분에서 주가조작을 의심했나. “지난해 하반기 하락장이었는데, 이들 기업 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매일 밤 방송을 진행하는데, 시청자들이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상승 곡선이 이상했다. 오르고 내림없이 이들 기업 주가는 쭉 올라가기만 했다. 특히 올라가는 각도는 일정한데, 아무런 소식(호재)도 없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 같은 상승 곡선은 나오기 어렵다. 게다가 이들 기업은 유통 주식이 거의 없는 이른바 ‘품절주’이거나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노잼주’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대주주 라인에 한국증권금융이 올라가 있는 점도 이상했다. 여기는 신용담보를 잡아주는 일종의 증권사들의 금융기관이다. 매수·매도를 활발히 하는 곳이 아니다. ‘기획’이라는 의심이 강해졌다.”   업계에선 다 아는 ‘작전’이었나. “많이 짐작했을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은 매우 작고, 테마주도 워낙 많다. 문제는 이번 사태의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이다. 다단계로 확산되면서 피해가 커졌다. 라덕연 대표는 법의 허점들을 역으로 잘 공략하기도 했다. 라 대표는 공매도가 안 되는 종목, 차액결제거래(CFD)를 통한 거래 등 본인만의 공식을 만들었다.”   악용된 법의 구멍이 무엇인가. “금융위원회 산하 감시기관이 있는데, 그 감시 시스템을 역으로 파고들었다. 예컨대 팀을 꾸려서 핸드폰 명의자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매수·매도를 눌렀다. 거래자가 다수여도 한 곳에서 매수·매도가 집중돼 일어나면 인터넷프로토콜(IP)이 추적 받을 수 있는데, 직접 매수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거래함으로써 이를 분산시켰다. CFD를 활용해 대주주 공시 의무도 피해갔다. 개인이 특정주식의 3% 이상이나 10억원이 넘는 주식을 보유하면 대주주로 등재가 된다. 그런데 라 대표는 10억원 이상을 보유해도 대주주로 잡히지 않았다. CFD를 통해 최종 주문자를 외국계 증권사처럼 포장한 덕분이다. 공매도 제외 종목을 중심으로 담기도 했다. 2022년 말 기준 국내 상장사 2437개 종목 중 공매도 가능 종목은 350개(14.36%)이다. 코로나 이후 공매도가 제한되는 시기를 노렸다. 주식 비과세의 이점도 교묘히 악용했다.”   주식 비과세가 어떤 문제가 있나. “만일 주식 차익에 세금이 붙어 근로·사업소득과 합산된다면, 과연 고소득자들이 계좌를 쉽게 넘길 수 있었을까. 금융투자소득세(이하 금투세) 도입에 논란이 많은데, 금투세가 도입되면 작전 세력은 무너진다. 차명계좌 거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공매도 안되는 종목이 왜 타깃이 됐나. “이들은 대주주가 절반 이상을 들고 있는 종목을 노렸다. 시장에 거래되는 물량이 매우 적은 종목들이다. 그런데 공매도가 가능하면 이를 활용해 주식이 없어도 빌려서 상승을 막을 여지가 있다. 그러면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머니게임으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공매도가 불가하니, 대주주가 팔지 않는 한 (작전 세력이 사는 물량 위주로) 주가가 계속 올라가는 구조로 설계했다고 본다.”   전문가 목표 수익도 연 30%, 과욕 금물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개인 투자자는 공매도를 반대한다. “지금 공매도를 풀면, 실제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 2021년 주가 20만원까지 치솟았던 신풍제약은 현재 1만원 수준으로 폭락했다. 공매도가 풀리면 그렇게 추락할 종목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다고 그냥 둬야 하나. 공매도 거래는 아직도 수기(手記)로 작성한다.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 수준에 비춰 말이 안된다. 전산화를 통해 어떤 자금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처리할 수만 있다면, 공매도 부활로 문제가 생길 우려는 크게 줄어든다.”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전 회장을 비롯해 서울가스·대성홀딩스 오너가는 주가 폭락 직전에 보유주식을 처분했다. “대주주의 절대 공식이 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반드시 ‘50%+α’를 들고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8종목 가운데는 대주주 지분이 60~70%에 이르는 종목이 상당했다. 대성홀딩스만 해도 최대주주 지분율이 70%가 넘고, 서울도시가스는 최대주주와 자사주 지분이 75%를 웃돌았다. 선광·삼천리·세방·다우데이타·하림지주 등도 최대 주주 지분율이 60%가 넘는다. 이들 기업 대주주는 경영 상황에 따라 10% 이상을 시장에 던져도 경영권 방어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가조작 세력은 최대주주가 지분들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됐을까. 짜고 치는 작전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그러다 믿었던 ‘회장님들’ 의 배신행위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험한 주식’은 어떻게 알 수 있나. “핵심은 주가가 올라가는 이유에 동의할 수 있냐, 아니냐다. 그 이유에 동의할 수 없다면 건드리면 안되는 주식이다. 개인적으론 두 가지를 본다. 우선 보유가치가 있느냐. 이를테면 ‘삼성전자는 업황이 돌아서면 8만원대는 갈거야’ 기대하면서 예금·채권보다 수익이 많으니까 일정기간 보유하겠다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수급 즉, 거래를 본다. 요즘 주가가 치솟은 2차전지는 인기가 있다. 그런데 이번 SG증권사태 관련 8개 종목은 수급(유통 주식)도 없고, 실적 상승이나 배당 등 보유 가치도 거의 없었다.”   사태 후 하한가 따라잡기 움직임도 있다. “단순히 많이 떨어졌으니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는 위험해 보인다. 특히 빚에 의한 투자가 적지 않다. 아직 버티고 있는 물량이 반대매매로 나올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쉽게 말해,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집안 물건에 빨간 딱지가 다 붙어있는 혼돈의 상황이다.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적정한 가치를 따질 수 있어야한다.”   당국의 늑장 대응도 도마 위에 올랐다. “선광, 대성홀딩스 같은 종목이 특정 계좌에서 거래되는 패턴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 법의 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수법이었다. 따라서 금융당국이 작정하고 종합적으로 파야 잡을 수 있었던 사안으로 보인다.”   주식 초보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주식 추천을 해달라는 초보 투자자에게 역으로 드리는 질문이 있다. 주식으로 돈을 얼마나 벌고 싶은 가다. 보통 연 50%, 100% 수익을 얘기한다. 월스트리트의 대가들도 연 20~30%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과욕이 투자를 꼬이게 하는 원인이다. 비교도 잘 해야 한다. 우리나라 1등주라면 글로벌 1등주와도 비교해보자. 돈을 잘 버는 기업을 예로 들어보면, LG생활건강은 샴푸도 만들고 세제도 만드는 국내 생활용품의 대표기업이다. 그럼 글로벌에는 이와 비슷한 기업이 어디가 있을까. P&G로 알려진 프록터&갬블이 있다. 이런 식으로 국내 우량기업과 글로벌 우량기업의 비교를 통해 수익률, 배당 등을 살펴보면 투자 성공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     ■ 2년간 주가 천천히 올리고 다단계…SG사태, 루보사건보다 수법 진화 「 소시에테제네랄(SG) 사태는 다단계 방식으로 투자 규모를 키웠다. 이는 소규모 지인끼리 진행되는 일반적인 주가조작에서 진화한 수법이다. 김태형씨는 “SG사태는 다단계 주가조작으로 악명을 떨친 2008년 루보사태에서 진화한 양상을 띤다”고 평가했다. 루보사태는 다단계업체 제이유그룹 경영진이 중심이 돼 루보의 주가를 주당 900원에서 5만원 수준까지 끌어올린 사건이다. 자동차 베어링을 만들던 루보는 2006년 900원에 불과했으나 2008년 4월엔 5만1400원까지 폭등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며 주가는 다시 900원대로 곤두발질쳤다.   루보는 전국에 서버를 구축해 다양한 위치에서 주문을 실행하면서 당국의 추적망을 피했다는 점도 이번 SG사태와 유사하다. 루보는 다단계업체 회원을 대상으로 1600억원대 자금을 운용했다. SG사태는 유명인·전문직을 앞세운 다단계 방식으로 피해 규모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레버리지도 일으켰다. 루보는 사채업자와 저축은행에서 1440억원의 자금을 추가로 돌렸다. SG는 여기서 진화해 차액결제거래(CFD)와 같은 파생상품을 이용했다. CFD는 증권사가 투자자 대신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최대 2.5배까지 레버리지 투자가 가능하다.   루보는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주가가 무려 50배 넘게 폭등했지만, 한 번도 이상급등 경고를 받지 않았다. 수백개의 차명계좌로 매일 2~3%씩 천천히 주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SG사태의 8개 종목도 길게는 3년에 걸쳐 주가를 밀어 올리는 방식으로 감시망을 피했다. 현재 거래소는 최대 100일 사이의 단기 이상거래를 탐지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으나, 앞으로 6개월 또는 1년 단위 중·장기 시세조종 등 신종 비전형 수법도 탐지하도록 개선할 방침이다. 」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5.13 00:01

  • ‘중국몽’ 돌격대장 시장화매체, 당 기관지보다 논조 더 강경

    ‘중국몽’ 돌격대장 시장화매체, 당 기관지보다 논조 더 강경

     ━  [기고] 중국 미디어 왜 거친 발언 쏟아내나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중국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윤석열 정부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외교 당국은 윤 대통령의 발언이나 워싱턴선언 등에 대해 “말참견” “불장난하면 타 죽는다”는 등의 비(非)외교적 수사를 동원하며 쉬지 않고 트집을 잡았다. 당국이 먼저 문제제기를 하고 나면 반드시 이어지는 게 중국 미디어의 파상공세적 보도다. 이번에도 ‘당(黨) 매체’와 ‘시장화(市場化) 매체’가 동시에 ‘윤석열 때리기’에 나섰다. 중국중앙TV(CCTV) 등 당 매체는 한국 야당인사들의 말을 집중 인용하는 방식을 동원했고, 상업성이 짙은 시장화 매체는 지금까지 그랬듯 돌격대장처럼 앞장서서 공산당 강경파의 의중을 반영했다.   CCTV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지난달 30일 저녁종합뉴스 신원롄보(新聞聯播)에서 자세히 다뤘다. 한·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미 정상회담도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워싱턴선언은 빈 껍데기”라고 한 국내 학자의 주장도 전했다. 한국 국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는 식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였다. CCTV 군사채널(CCTV-7)은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 연설에서 장진호 전투를 거론하자 6·25전쟁을 다룬 장편 애국주의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跨過鴨綠江)’를 긴급 재방송하기도 했다. 영자지 차이나데일리 인터넷판은 지난 2일 “윤 대통령의 친미 외교가 한국 안보를 희생시켰다”는 제목을 달고 배너를 따로 만들어 초기화면 상단에 배치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을 부각시켰다. 차이나데일리는 중국 내 외국인을 주요 독자로 하고 중문판(中國日報)을 별도로 낸다.   미디어, 애국주의 교육에도 앞장서야   환구시보는 지난달 23일자에서 ‘한국 외교의 국격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설을 싣고 윤석열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을 “중국을 모욕하고 도발해 미국의 환심을 사려는 행태”라고 강변했다. 다음 날엔 “한국은 미국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총알이 될 수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는 “(워싱턴 선언의) 진정한 승자는 워싱턴이고 한국은 자치권을 상실했다”고 쓴 데 이어 “북·중·러의 보복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는 공산당의 정교한 선전선동 전략이 가동되고 있다. 미디어 수용자를 유형별로 나눈 뒤 그에 적절한 매체로 하여금 선별한 내용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 내 일반 민중(CCTV)이나 외국인(차이나데일리), 강경 성향의 중국인(환구시보) 또는 강성 외국인(글로벌타임스) 등의 시선을 각각 붙잡기 위해서다. 내국인을 피해 해외 독자들에게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알리고 싶을 때는 인민일보 해외판이 주로 나선다. 이럴 때 공산당 중앙의 최고위 선전조직인 중앙선전부는 각 매체가 역할 분담 속에 선전전을 펼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조율하는 기능을 한다.   중국에서는 민간의 미디어 설립이 허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신문·방송은 관영매체다. 이는 다시 당 매체와 시장화 매체로 구분된다. 시장화 매체란 독립채산제 경영을 통해 자립해야 하는 매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극적 보도를 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보(都市報)나 만보(晩報)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언론의 인용보도에 자주 등장하는 환구시보도 시장화 매체에 속한다. 글로벌타임스는 환구시보의 영문판이다. 환구시보와 글로벌타임스는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자매지이긴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당보(黨報)는 아니다. 그렇다고 중앙선전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다. 이에 비해 재정 지원금을 직접 받는 당 매체는 경영 측면에 대한 걱정 없이 당의 입장만 충실하게 전달하면 된다.   중국 정부와 미디어는 왜 이런 모습을 보일까. ‘중국몽’ 실현을 위한 절박함이 주된 이유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재임 중에 중국몽, 즉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의 업무보고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줬다. 강력한 1인 지배체제를 바탕으로 중국식 현대화를 추진한다는 노선을 천명하면서 대만 통일은 중국몽 실현을 위한 필연적 요구라고 선언했다.   중국몽 실현이란 목표 아래 미디어의 역할은 특히 중시된다. 시 주석은 여론공작이 당과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직접 밝혔다(2016년 2월 뉴스여론공작 좌담회). 미디어를 통한 선전과 동원이 인민들을 단합시키고 국가적 역량을 모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뤄지는 통제는 언론의 감시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20차 당대회 업무보고에서는 미디어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공작을 강조하면서 시진핑 사상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라고 요구했다. 시진핑 사상의 핵심은 중국몽이다. 중국공산당은 사상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여타 분야 방어선은 지키기 어렵게 된다고 본다. 이런 기조에 따라 “당이 이데올로기 공작에 대한 영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해야 한다”거나 “이데올로기 공작 책임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사상 통제를 강화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인터넷 검열 당국, 네티즌과 숨바꼭질   지난달 24일 시진핑 주석이 주중 대사 70명으로부터 신임장을 받은 뒤 연설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이런 미디어 정책은 ‘당관매체(黨管媒體)’ 원칙에서 나온다. 미디어는 당이 관리한다는 의미다. 당관매체 원칙에 따라 당이 실질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여론을 주도한다. 당 중앙선전부는 매일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보낸다. 나아가 언론인에 대해서도 당성과 정치성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당 중앙의 입장에서 뉴스를 판단하고 보도하라는 주문이다. 그럴 때에 여론선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국 언론인이 5년마다 기자증을 갱신할 때 시진핑 사상 시험을 치르도록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당관매체 원칙은 1921년 공산당 창당 이래 이어져왔다. 1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중국공산당 제1차 결의’는 “일간 신문 등 모든 출판 사업은 마땅히 중앙집행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디어는 중국몽 실현을 위한 애국주의 교육에도 앞장서야 한다. 2019년 11월 공산당 중앙위와 국무원이 공동으로 발표한 ‘신시대 애국주의 교육실시 강요(강령)’는 중국몽 실현이 애국주의 교육의 명확한 주제라고 강조하면서(1장), 청소년을 애국주의 교육의 최우선 대상으로 삼으라고 했다(3장). 5장에서는 모든 종류의 미디어에 대해 애국주의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하고 특히 인터넷 공간에 애국주의가 가득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강령은 중국이 국가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음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총동원체제를 가동하던 2020년 봄. 장쑤성 한 의대의 산부인과 온라인 수업이 시작한 지 몇 초 만에 먹통이 됐다. 검열 당국이 차단한 것이다. 이유가 황당했다. 여성 생식기 그림을 올리는 게 규정위반이란 것이다. 그 뒤 해당 교수는 SNS에 “내가 가르치는 내용은 검열기준으로는 모두 외설에 해당할 것”이라고 썼다. 허난성 한 고교의 고대사 온라인 수업에서 독재, 군주제, 관료주의 같은 단어가 등장하자 검열 당국이 막은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중국에서 인터넷 검열은 인터넷안전법에 의해 합법화돼 있다. 인터넷 매체에 대한 최고위 관리감독기관인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은 모든 인터넷 정보를 규제하고 삭제하는 권한을 갖는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중국인의 의사표현 욕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등장에 따른 현상이다. 중국 네티즌과 검열 당국 간의 숨바꼭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버 공간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 언론의 토대는 기본적으로 마오쩌둥 시기에 만들어졌다. 공산혁명 시기 미디어는 혁명 성공을 위한 도구였다. 신중국 출범 뒤 문화혁명 때는 미디어가 계급투쟁 수단이었다. 언론 매체가 당 사업을 위한 선전도구라는 존재 의의는 이런 과정에서 확립됐다. 이런 미디어 시스템은 앞으로 바뀔 수 있을까. 대답은 간명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관매체 원칙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중국공산당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중국과 같은 1당지배 국가에서 인민들이 당의 방침을 따라오도록 만드는 선전의 중요성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원교 차이나미디어 대표. 일간지 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 출신으로 중국 인민대에서 뉴미디어와 정치 참여의 관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달 『시진핑의 중국몽과 미디어 전략』(나남)을 출간했다.

    2023.05.06 00:48

  • 학벌·가문·직업 빼고, 사자 갈기 같은 ‘나만의 상징’ 있나요?

    학벌·가문·직업 빼고, 사자 갈기 같은 ‘나만의 상징’ 있나요?

     ━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사자는 초원의 제왕이지만 모든 사자가 제왕이 되는 건 아니다. 수컷 사자 중 3% 정도만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이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려면 두 가지가 필수다.   우선, 기존의 제왕과 싸워서 이겨야 하니 힘이나 근육과 같은 전투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자리에 오를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집단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는 암컷 사자들이 새로운 제왕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멋진 갈기가 필요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풍성한 갈기를 말하는 걸까? 아니다. 사자들 사이에서 이건 두 번째 조건일 뿐, 이들에겐 윤기가 나는 듯한 검은 갈기가 최고다. 최상의 건강 상태로 힘이 넘칠 뿐만 아니라 경험이 쌓여 성숙하다는 징표인 까닭이다. 사자들의 세상에선 힘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갈기다.   사자만이 아니다. 적이든 우리 편이든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리, 특히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강력한 상징이 있어야 한다. 수컷 사슴은 누가 봐도 우람하고 멋진 뿔을 가져야 하고, 바다코끼리는 엄청난 덩치를 가져야 하며, 오랑우탄은 듬직한 덩치와 함께 넙적한 볼, 그리고 침착하면서도 빛나는 눈빛을 가져야 1인자 자격을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믿음과 희망 같은 보이지 않는 허구를 믿는 우리 인간들 역시 이런 힘을 일찌감치 깨우친 덕분에 자연에서 검증된 이런 상징들을 오래 전부터 갖다 써 왔다. 유럽인들이 지금도 흠모하는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국에 자신의 두상을 설치했는데, 사자 갈기를 닮은 머리칼을 한 모습이었다.   로마 황제들 역시 이를 위해 사자를 애완용으로 길렀고, 자신들이 죽으면 자신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독수리로 변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게끔 하려고 애썼다. 집단을 이끌려면 권력만이 아니라 권위가 필요하기에, 누구나 인정하는 이런 상징을 통해 우러르는 마음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상징이란 손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 가능한 까닭이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왕국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역시 사자와 표범을 자신들의 표상으로 삼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신 호루스는 하늘의 제왕인 매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용이 그 역할을 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도 이런 상징이 있다. 장군의 투구 위에 삼지창 같은 뾰족한 모형이 있는데, 이건 단순한 창이 아니다. 매가 날개를 쫙 펼치며 공격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연의 동물로부터 문명과는 거리가 먼 오지 부족들까지 상징물로 자신을 나타내는 이유가 뭘까?   시각을 가진 생명체에게 이미지는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인데, 이런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농축된 의미를 담은 게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상징은 문화의 정수”라고 했는데,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이나 대중을 상대하는 정치인들이 이걸 생명처럼 여기는 게 그래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라고 하면 그가 오로지 혁명의 힘으로 집권한 걸로 알지만, 사실은 상징의 힘이 컸다. 1959년, 카스트로가 광장에서 연설을 할 때였다. 연설 중간에 흰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무슨 일인지 날려보낸 비둘기가 돌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세상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의 어깨에 앉다니! 비둘기가 적임자를 알아봤다! 사람들은 이렇게 믿었다. 카스트로에겐 ‘하늘이 내린’ 축복이 따로 없었다. 상징이 그 사람의 정체성과 동일시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군가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그 사람을 상징하는 걸 공격하고 망가뜨리는 것도 이래서다.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 게 그렇고,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항거할 때 먼저 그의 초상화나 동상을 불태우고 무너뜨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헤어진 연인을 잊으려 할 때, 그를 상징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옷이나 특별한 물건으로 자신을 나타내던 신분제가 무너지고 개인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상이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넘쳐나는 것에는 이런 오래된 배경이 있다. 시쳇말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니 이걸 상징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징은 넘쳐날 정도로 많은데 종류가 참 빈약하다. 부와 지위를 향한 것들 일색이다. 비싼 곳에 가서 식사하고, 명품 옷과 장신구, 고급자동차로 자신을 나타내거나, 지위가 가진 힘을 휘두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외에 다른 걸 찾기 힘들다.   사자의 갈기가 그렇듯, 상징이란 자신이 쌓고 만든 고유한 정체성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어야 하고 품격 역시 여기서 나오는 건데, 이걸 돈과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 과시가 아닌 자신 만의 매력 같은 상징이 그렇게 없을까. 상징물은 차고 넘치지만 진짜는 드문, 가히 상징의 빈곤 시대라 할 만하다. 한 번쯤 생각해보자. 명함 빼고, 명품 빼고, 고급 자동차 빼고, 내 힘으로 이룬 게 아닌 집안 배경 빼고, 한때 공부 열심히 해 나온 출신 대학을 뺐을 때, 나를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있기는 있을까.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등의 책을 냈다.

    2023.05.06 00:21

  • “휠체어 갈 수 있는 식당” 휠비 덕에 장애인 외출 쉬워진다

    “휠체어 갈 수 있는 식당” 휠비 덕에 장애인 외출 쉬워진다

     ━  휠체어 내비 앱, 이달 중 출시   휠비 데이터 리서처 윤나은(29)씨와 권민준(21)씨가 지난달 20일 영등포구청역 인근 한 은행의 출입문과 경사로를 살펴보고 있다. 최기웅 기자 “여기 상가는 출입구가 거의 다 계단이라 가기 힘들 것 같아요.”   장애인의 날이었던 지난달 20일 장애인협동조합 ‘무의’ 소속 리서처 윤지영(24)씨가 말했다. 이들은 휠체어 내비게이션 앱 ‘휠비(WheelVi)’에 활용될 휠체어 이용 가능 시설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무의 리서처들의 수집 과정에 동행해봤다. 오늘의 수집 구역은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구청역 인근 일대. 한 블록, 두 블록, 세 블록 넘게 가서야 겨우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 카페가 나왔다. 마침내 지영씨가 정보 수집 앱을 열었다. 출입문 종류와 폭이 넓은지 체크하고, 사진을 촬영해 업로드 한다.   90개 전철역 인근 정보 제공 목표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 장애인들의 외출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약속 장소 인근에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지 미리 알아봐야 하는 건 기본, 밥도 아무데서나 먹을 수 없다. 완만한 경사로가 있고, 입구가 넓고, 의자를 옮길 수 있는 식당을 찾아야 한다. 운이 좋게 이와 같은 조건을 가진 장소를 찾았다고 해도 그곳까지 휠체어로 갈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언덕길은 아닌지, 보도 폭이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들의 외출이 이렇게 수고로운 이유는 비단 장애인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애인 시설이 있어도 어디에 있는지, 실제로 사용할 수는 있는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휠체어가 다니기에 괜찮은 길, 휠체어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카페가 있어도 정작 장애 당사자들이 모르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 결국 안전한 선택지인 ‘대형 쇼핑몰’ 또는 ‘아는 곳’으로 선택의 폭이 좁혀진다.   새로운 지역에 갈 때면 지도 앱의 로드뷰로 인도 상태를 어림잡아 보고, 온라인 방문자 후기를 참고해 갈 수 있을지 판단한다. 매장에 직접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지 문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외출해도 단번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휠체어 이용 장애인 임슬기(33)씨는 “도로 중심의 로드뷰로 보는 것과  실제로 가는 건 다르고, 사장님이 ‘휠체어도 들어올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계단이 있거나, 진입로에 턱이 있어 못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장애인의 날’이었던 지난달 20일 서울 영등포구청역 인근 상가거리에서 왼쪽부터 휠비 데이터 리서처 곽은혜(28)씨, 한경아(39)씨, 윤지영(24)씨가 휠체어 이용이 가능한 식당 및 카페를 찾고 있다. 최기웅 기자 식당과 술집이 줄지어 있는 영등포구청역 인근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열심히 걸음을 옮겨 보지만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입구에 턱이 있는데 경사로가 없고, 경사로가 있어도 가파르고, 설령 경사로가 완만하더라도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200m 남짓한 이 골목에 있던 수많은 음식점 중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윤지영씨는 “정보 수집 때마다 휠체어 사용 장애인분들의 선택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 체감하고 있다”며 “병원이나 약국, 은행 등 본인이 직접 가야하는 곳들도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인근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도 직접 찾아가 본다. 이용할 수 없게 잠겨있는 것은 아닌지, 있어도 없느니만 못한 정도로 좁거나 물건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휠체어 사용 장애인이자 리서처로 활동하고 있는 한경아(39)씨가 한 건물의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서 휠체어를 움직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넓고 괜찮네요.” 합격이다. 정보 수집 앱에 이용 가능한 화장실로 입력한다. 한씨는 “이런 곳만 있으면 좋겠지만 어떤 곳은 청소도구함으로 사용해 휠체어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물건이 쌓여 있기도 하다”고 귀띔했다.   “앱 덕분에 외출 소소한 재미 느껴”   휠체어 사용자들의 외출 장벽이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층 더 낮아질 전망이다. 휠비가 시험 서비스 기간을 마치고 이달 중 공식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휠비는 장애인 화장실 위치, 휠체어로 가기 적합한 경로, 휠체어로 출입할 수 있는 건물 등 휠체어 사용 장애인이 외출할 때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내비게이션 앱이다. SK행복나눔재단을 포함한 7개 기업의 공동 사회공헌 ‘휠체어 이동정보 제공 프로젝트’로 개발됐다.   휠비 앱에서 찾아본 종각역 인근 장애인 화장실 현황. 이용이 가능한 곳은 초록색으로, 이용이 어려운 곳은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다. 윤혜인 기자 박소담 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팀 매니저는 “휠체어 사용자들을 위한 시설이 부족한 문제도 있지만,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 헛걸음하거나 쉽게 방문하지 못하는 문제도 크다”며 프로젝트 기획 배경을 밝혔다. 교통약자를 위한 내비게이션 개발사 LBS tech(엘비에스테크)가 앱 개발 및 운영을, 무의가 주요 정보 수집을 맡고 있다. SKT, 요기요, LG헬로비전, 법무법인 디라이트도 후원과 이동정보 수집 임직원 자원봉사로 참여한다.   지난달 20일 서울 영등포구청역 인근 상가 거리에서 리서처가 휠체어 이용이 가능해 보이는 한 식당의 출입문 정보를 입력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정보 수집 과정은 단순하다. 이렇게 직접 서울 지하철역 인근 일대를 돌아다니며 장애인 출입이 가능한 곳을 찾는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더 많은 곳의 이동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휠체어로 못 가는 곳도 입력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부터는 가능한 곳에 한해 정보를 기록한다. 무의 리서처와 후원사 임직원이 건물별 출입문 형태와 넓이 등을 전달하면 LBS tech가 인공지능(AI)으로 검증해 휠비 앱에 반영한다. 보행로의 장애물과 경사도 등도 휠체어에 카메라를 설치해 영상을 촬영하고 AI로 분석한다. 이렇게 2021년부터 서울 50개 지하철역 인근 1만8225곳의 접근성 데이터가 모여 지난해 11월부터 휠비 베타서비스가 운영되고 있다.   휠비는 리서처들이 모은 정보를 활용해 장애인 화장실 위치와 이용 가능 여부, 휠체어로 접근할 수 있는 식당·카페의 위치와 사진을 제공한다. 도로 폭, 경사로 등을 고려해 목적지까지 휠체어로 갈 수 있는 보행로도 안내한다. 접근성 정보는 장애 당사자가 목적지를 찾아가고, 이동 반경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된다. SK행복나눔재단이 2020년 진행한 파일럿 테스트에서 접근성 정보가 있는 휠체어 사용자 9명의 목적지 도달률은 93%였지만 정보가 없는 휠체어 사용자 8명의 도달률은 41%에 불과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3월까지 서울시 휠체어 사용자 20명을 대상으로 휠비 활용성을 측정했을 때도 도달율이 92%에 달했다.   SK행복나눔재단에 따르면 휠비는 이달 공식 출시 후 분기별 업데이트를 통해 올해까지 서울 지하철 90개역 반경 500m 내 식당·카페·약국·병원·장애인 화장실 등의 출입 정보를 전달할 예정이다. 한경아씨는 휠비를 통해 휠체어 사용 장애인들의 외출이 쉬워지는 사회를 소망한다. “리서처 활동을 하면서 신당동, 익선동 같은 구도심에도 휠체어로 갈 수 있는 식당과 카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전에는 ‘휠체어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해 갈 엄두도 못 냈던 곳이죠. 요즘 새로운 가게를 찾아가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답니다. 휠비 앱을 통해 외출을 포기한 장애인들이 밖으로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휠비’ 개발한 이시완 대표 “AI 활용, 경사도·장애물 등 분석” 「 이시완 대표 휠비 앱 개발 및 운영을 맡고 있는 LBS tech(엘비에스테크)는 시각장애인 등 교통약자를 위한 내비게이션을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지난 26일 서울 서대문구 본사에서 이시완 대표와 만났다. 그는 전 세계 10억명 장애인의 이동권과 이용권 향상을 위해 ‘기술로 그들과 동행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휠비에 인공지능(AI)을 활용했다. “건물 접근성과 보행로 정보 수집에 활용된다. 접근성에 대해서는 무의 리서처와 기업 임직원분들, 그리고 복지관 등에서 건물 진입로, 출입구 등의 사진을 보내주면 그 사진을 AI가 다시 확인한다. 문 사진을 예로 들자면 AI가 문 모양으로 옆으로 열리는 문인지 밀어야 열리는 문인지 확인하고, 폭이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로 넓은지 픽셀화해 파악한다.”   보행로 촬영 영상을 분석하는 AI. [사진 LBS tech] AI가 보행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건물은 휠체어가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가능한’ 곳을 수집한다면, 보행로의 경우 일단 다닐 수 있다는 전제로 ‘장애물’을 수집한다. 길에 있는 가로수, 전봇대, 자전거 등이 장애물이다. 거리 측정 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부착한 휠체어를 조작해 보행로 영상을 촬영하고, AI로 보행로의 경사도, 평탄도, 넓이 등을 분석해 실제로 사람이 탄 휠체어가 갈 수 있을지 판단한다. 이때 전봇대나 가로수 같은 장애물과 보행에 편익을 주는 점자블록, 엘리베이터도 AI가 구분해 인식한다.”   배리어프리 스마트시티 구현이 목표라고. “스마트시티라는 개념이 장애인 분들에게는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지금의 도시도 접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내비게이션 앱 ‘지아이플러스’와 휠체어 이용 장애인을 위한 ‘휠비’다. 서울을 시작으로 세종, 대전 등 서비스 지역을 넓혀갈 예정이다. 우선 접근성을 높이고, 도심에서 충분히 다양한 시설을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지아이플러스에 경로 안내와 더불어 음식 주문 및 결제 시스템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2023.05.06 00:01

  • “버스 운행할수록 손해, 만년 적자” 사면초가 ‘시민의 발’ 마을버스

    “버스 운행할수록 손해, 만년 적자” 사면초가 ‘시민의 발’ 마을버스

     ━  위기의 서울 마을버스   마을버스. [뉴시스] “어떨 때는 2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는데, 집에 가려면 마을버스밖에 방법이 없어. 한 정거장 걷기도 힘드니 그냥 기다리는 거지 뭐.”   지난 3일 오후 서울 중구 남대문 앞의 종로09번 마을버스 정류장. 한 70대 남성이 무거운 짐을 든 채 마을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종로09번 버스의 종점인 수성동계곡. 인왕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한 이 정류장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20분이 걸린다. 서울에서도 고지대에 있어 도심인 경복궁역, 광화문역에서 이곳까지 가는 길은 ‘등산’과 마찬가지다. 그는 “집에서 광화문까지 나올 때는 천천히 걸어서라도 나올 텐데, 올라갈 때는 경사가 높아서 마을버스가 유일한 이동수단”이라며 “마을버스가 사라진다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사실상 외출이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골목 누비는 ‘대중교통 모세혈관’   버스, 지하철이 닿지 못하는 골목골목을 다니며 승객을 나르는 ‘대중교통의 모세혈관’ 마을버스가 사면초가에 몰렸다. 2015년 요금 인상 이후 8년간 요금을 동결해온 마을버스가 누적된 적자로 더는 버틸 수 없다며 백기를 들었다. 마을버스 업체들이 ‘만년 적자’를 겪게 된 것은 2004년 서울시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을 도입하면서부터다. 버스 회사의 수익을 지자체가 직접 관리하며 재정을 지원하는 준공영제로 운영돼 운영손실 전액을 보전받는 시내버스와 달리, 민영업체가 운영하는 마을버스는 이용객이 타 대중교통으로 환승하게 되면 환승액 전액이 아닌 일부 손실분만을 보조받았다. 현재 마을버스는 이용객이 지하철과 시내버스로 두 차례 환승하면 336원을, 시내버스만 이용하면 514원을, 지하철만 이용하면 523원을 벌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을버스 이용객이 타 교통수단으로 환승하면 손해는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다.   마을버스조합은 운영할수록 쌓이는 적자에 지속해서 요금인상 요청을 했지만 지난 8년간 서울 마을버스 요금은 ‘900원’에 멈춰있다. 업체들의 불만이 새어 나오자 서울시는 뒤늦게 적자업체 구제를 위한 재정지원액을 2019년 192억원에서 2022년 495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같은 기간 월 평균 지원업체도 2배 가까이 늘어났다. 하지만 업체들은 코로나19 이후 점차 쌓인 부채가 더이상 감당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불어나 회생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호소했다.   예고한 휴업 기간이 끝났음에도 휴업 중인 금천 01-1번 마을버스의 안내문. 오유진 기자 쌓인 적자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마을버스 업체들은 운행 감축을 결정했고, 수입이 줄어든 버스 기사들도 하나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내 196개 노선이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대비 약 20%씩 운행횟수를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버스 5대 중 1대는 차고지에 멈춰 있는 셈이다. 차량 숫자는 늘어나고, 운전기사는 감소해 2019년 2.2명이었던 버스 1대당 기사 수는 2023년 3월 기준 1.67명으로 줄었다.   종로09번 버스를 모는 장 모 기사는 “하루 9시간씩, 주야로 교대하는 일인지라 업무강도가 상당히 세다”며 “사장님도 빚을 지며 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직원 월급을 올려주고 싶어도 어렵고, 우리도 이런 사정을 아니 임금인상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시내버스만큼 지원을 해주는 게 어렵다면 요금이라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도록….”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서울시 마을버스 운송사업조합 홈페이지에도 하루가 멀다고 ‘대형 운전 경력이 없어도 와서 훈련받으면 버스운전을 할 수 있다’, ‘운전직 공무원에 도전할 수 있게 돕겠다’는 공고가 올라온다. 하지만 스러져가는 마을버스 업계에 정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내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경력만 쌓으면 바로 떠난다. 영등포지역 마을버스를 운행하는 태경운수의 관리부장은 “지속적으로 사람을 모집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고, 일하던 사람들도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싶어 시내버스로 이직하는 추세”라며 “일하는 환경과 조건이 좋지 않으니 누가 마을버스 운전기사가 되고 싶어 하겠나”고 말했다. 총 7대의 마을버스를 보유한 태경운수는 기사 구인난과 승객 감소로 인해 매일 1~2대의 버스는 사실상 운행을 중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을버스 운행을 포기하는 회사들까지도 나온다. 금천구에서 마을버스를 운행하는 범일운수는 2021년 5월 장기간에 걸친 경영악화로 금천01-1번 마을버스 휴업을 결정했다. 당초 6개월간 운행중단을 시행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운행을 재개하지 못한 상태다. 박주운 서울마을버스운송사업조합 전무는 “현재 서울에서 운행 중인 마을버스 노선 중 흑자 노선은 단 1개 노선밖에 없다”며 “모든 노선이 운행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라, 공익을 위한다는 심정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자체 직접 운영 등 대책 필요”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운행중지나 배차시간이 길어지는 것 등은 모두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시민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태경운수 관리부장은 “아무리 마을버스 이용자 숫자가 줄어든다고 해도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는 대중교통은 마을버스가 유일한데,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특히 자차가 없고, 역세권과 먼 지역에 사는 시민일수록 불편함은 더 커진다. 장 기사는 “이 지역에 거주 중인 분들은 연령대가 높은 편인데, 궂은 날씨에 버스 없이 언덕길을 오르다가 큰 사고로 이어질까 걱정된다”며 “서울시는 버스요금이 오르면 물가를 자극할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 사이 교통난은 모두 주민들이 떠안게 된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울 강동구 강일동에서 강동02번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노부부(80·73)는 “4000세대가 넘게 사는 이 지역에 다니는 마을버스 배차 간격은 20분 수준인데, 마을버스 회사에서는 인력이 없어 운행 증대가 어렵다고 하니 너무 답답하다”며 “비역세권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불편한 교통을 계속 감수하며 살라는 것인지….”라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이 지역에 거주 중인 박준서씨는 “심각한 마을버스 배차 간격에 이곳 주민들은 마을버스를 탈 수 있겠다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라며 “서울에 살고 있는데도 교통 난민이 된 기분으로 산다”고 토로했다.   구내 지하철역이 3곳에 불과해 마을버스 노선이 활성화되어 있는 금천구에서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지속된 감차로 마을버스 배차시간이 1시간까지 늘어난 노선도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 4대의 마을버스를 운영하던 금천11번 노선은 차량 노후화로 인해 운행 가능한 차량이 줄어들면서 배차 간격이 20분에서 1시간으로 늘어났다. 홍의석 정의당 금천구지역위원장은 “금천11번 마을버스는 가파른 언덕길과 주택가가 밀집된, 교통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 운행하다 보니 적자를 면치 못해 경영상 어려움이 크다”며 “젊은 세대는 도보로 이동해 시내버스를 탈 수 있지만, 주 이용객인 노약자나 임산부, 어린이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전했다. 홍 위원장은 “마을버스의 고질적인 적자 문제를 더이상 업체들에 맡길 것이 아니라 구청이 적극적으로 나서 직접 운영을 하는 등의 개선책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극에 달하자 서울시는 지난달 28일 ‘마을버스 적자업체 재정지원 확대 계획’을 통해 추경예산을 투입, 추가 예산을 확보하겠다는 처방을 내놓았다. 하지만 마을버스 운영자들은 서울시의 이번 대책이 숨통을 트일 만큼의 처방조차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박주운 전무는 “1일 1대당 재정지원기준액인 45만7040원은 4년 전에 산출한 금액으로, 그사이 오른 인건비와 물가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기준”이라며 “서울시는 시에서 7.5%, 자치구에서 7.5%를 부담해 월 재정지원금 산정액의 100%를 받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자치구와는 아무 상의 없이 시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라 실제 시행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무는 “서울시가 정말 교통약자인 시민들을 우선순위에 뒀다면 이런 정책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서울시도 민영으로 운영되는 마을버스에 시내버스 수준의 지원금액을 투입하긴 어려워 고심이 크다. 운영·재정관리 주체가 다른 마을버스에 동일한 금액을 지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다. 서울시 관계자는 “준공영제도가 아닌 마을버스 업계에 전액 지원을 할 근거도 없고, 재정도 마련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며 “시민 불편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반기 요금인상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고양시 일부 버스 배차 간격 4시간, 광주시 노선 절반만 운행 「 전국 곳곳에서 코로나19 확산, 기사 구인난, 물가 인상 ‘삼중고’가 겹친 마을버스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의 일부 마을버스 노선은 배차 간격이 4시간까지 늘어나 사실상 교통수단의 기능을 상실했다. 고양시는 하반기부터 시내버스와 마을버스를 모두 준공영제로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남양주시도 마을버스를 준공영제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관내 총 12개 마을버스 노선 중 6개만 운행 중이다. 광산구 평동 평지·봉정마을의 유일한 대중교통인 720-1번 마을버스가 지난 1월부터 휴업에 돌입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주민들이 ‘마을에 고립됐다’며 연일 항의하자 택시 이용권을 지급하고, 임시버스를 투입하고 있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광주시는 마을버스 재정 손실 지원을 검토하고 있으나 시내버스 준공영제에도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마을버스까지 본격적으로 지원하기는 쉽지 않아 고심 중이다. 」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5.06 00:01

  • 챗GPT 사전에 ‘모른다’는 없다? 가짜 논문까지 만들어 답변

    챗GPT 사전에 ‘모른다’는 없다? 가짜 논문까지 만들어 답변

     ━  피노키오 뺨치는 AI 놀라운 거짓말 실력   피노키오 뺨치는 AI 놀라운 거짓말 실력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대학의 박지혜 교수는 최근 챗GPT를 사용하다 놀랄 만한 경험을 했다. 학술저널에 제출할 논문을 준비 중이던 그는 참고자료로 브랜드 자율규제에 관한 선행 논문들을 찾던 중이었다. 평소 사용하는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마땅한 자료를 찾지 못했다. 불현듯 ‘챗GPT라면 나보다 더 잘 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어로 챗GPT에 질문했더니 순식간에 ‘비즈니스 윤리 저널(Journal of Business Ethics)’에 박 교수가 찾던 주제의 논문이 있다면서 제목과 저자·연도·초록(논문에 삽입된 요약문) 등 상세한 정보를 올려주었다. “과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막상 챗GPT가 알려준 저널에 들어가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논문은 없었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논문의 가짜 정보를 만들어 올렸던 것이다.   주사위 던지는 것처럼 답 매번 달라   “초록 내용이 하도 그럴 듯해서, 논문이 분명히 있는데 제가 못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한참 뒤지고 나서야 그런 논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챗GPT가 창의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기가 막혀서 선배 교수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님도 ‘챗GPT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나마 우리(전문가)는 챗GPT가 주는 정보를 검증할 수 있는 다른 데이터베이스가 있으니 알아차린 거죠. 만약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그 분야에 대해 질문했을 때 챗GPT가 이런 식으로 가짜로 만들어서 답을 주면 세상을 굉장히 어지럽힐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듭니다.” 체험에서 우러난 박 교수의 걱정은 공연한 우려만은 아닌 듯했다.   교수·연구원 채용정보 플랫폼으로 석박사급 인력이 많이 이용하는 하이브레인넷에서도 챗GPT의 그럴듯한 거짓말이 화제다. 이달 초 이곳 게시판에서 챗GPT가 쓴 가짜 논문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Commonpeople’이라는 닉네임의 유저는 이러한 가짜 논문의 대표적인 특징이 존재하지 않는 가짜 참고문헌을 제시하는 것이라면서 챗GPT가 가짜 참고문헌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로, ‘김철수(2000), IT 산업의 미래, 법문사’와 ‘홍길동(2010), 바이오 기업의 기술, 창문사’라는 진짜 출간된 논문이 있다고 합시다. 챗GPT는 이를 합쳐서 ‘최길수(2000), 바이오 IT의 미래, 경문사’라는 가짜 레퍼런스(참고문헌)를 만들어 줍니다.”   챗GPT의 거짓말은 전세계적 화두이기도 하다. 챗GPT를 개발한 업체 오픈AI를 2015년 공동 창립했으나 2018년에 손을 뗀 일론 머스크조차, 지난 17일 방송된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챗GPT가 거짓말을 하도록 훈련받고 있다”면서 그에 대항할 ‘트루스(Truth) GPT’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박 교수에게 거짓말을 한 챗GPT는 GPT-3.5 모델에 기반한 무료 버전이었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GPT-4 모델로 한 달 전 출시된 유료 버전(한 달에 약 2만6000원)은 어떨까. 기자가 직접 시험에 나섰다. 챗GPT-4가 아직 모를 만한 질문을 던져서 어떻게 대답하는지 보려고 했다. 그래서 던진 질문이 최근 퍼진 한국 사회의 유행어 ‘누칼협’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의 줄임말로 어떤 사람이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의 결과에 대해서 원망할 때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만일 챗GPT가 아직 이 신조어를 학습하지 못했다면 “모릅니다”고 답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챗GPT의 사전엔 ‘모른다’는 단어는 없었다. 챗GPT는 자신만만하게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전략) 이 단어는 ‘느긋하게 칼로리 협상’을 줄여서 만든 말로, 건강과 삶의 질을 중요시하면서도 식단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고 유연한 태도로 칼로리 섭취를 협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칼협은 과도한 다이어트와 식이요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응하여 탄생한 말입니다. (후략)” 너무나 능청스럽고 그럴 듯한 설명에 ‘이런 의미의 누칼협도 따로 있었던가’라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챗GPT에게 “아니야,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의 줄임말이야. 다시 설명해 줘.”라고 명령하자 챗GPT는 “죄송합니다. 제가 이해를 잘못했네요.”라고 하더니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은 한국에서 사용되는 신조어로, (중략) 상황이 강제적으로 변화된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에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행동을 변화시킬 때, 주변 사람들은 ‘누칼협?’이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후략)”이라고 또 다시 그럴 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정답 아닌 ‘위대한 질문’의 시대 될 것”   22일 아트센터 나비 동동마당에서 챗GPT의 가능성과 문제를 토론하는 손화철 한동대 교수(왼쪽)와 이경일 솔트룩스 대표(가운데), 사회자 김양현 교수(오른쪽). 문소영 기자 챗GPT는 왜 거짓말을 하며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하는 것일까. 지난 22일 아트센터 나비의 서울 장충동 타작마당 공간에서 열린 ‘동동마당’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 동동마당은 기술과 예술과 동아시아 철학의 접점을 주로 다루는 포럼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인공지능 기업인 솔트룩스의 이경일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챗GPT는 학습된 어마어마한 지식과 언어 중에서 특정 단어 다음에 올 가장 자연스럽고 문맥에 맞을 만한 단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글을 만드는데, 확률통계적 선택을 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해도 답변이 매번 다르다. 이 중에서 인간이 보기에 어떤 답변이 좋은지를 학습하는 것이다. 그 진위는 GPT조차 판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GPT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핼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을 꼽는다. 약물 등으로 환각 상태에 빠지면 자신의 상상과 현실이 완전히 겹쳐져서 변별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대표는 “어떤 의미로는 GPT가 상당히 위험한 것은 맞으나, 다른 의미로는 그만큼 창의성이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GPT 나름의 방식으로 상상을 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다룰 것인지가 중요한 숙제다”라고 덧붙였다.   사실 챗GPT-4가 ‘누칼협’을 ‘느긋하게 칼로리 협상’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시나 소설을 쓰는 수준의 놀라운 창의력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챗GPT는 주어진 단어로 삼행시·사행시를 쓰는 데 뛰어나다는 것이 검증된 바 있다. 늘 회식자리에서 새로운 건배사를 찾는 부장님들이 참고할 만하다. 이 대표는 “결국 인간이 GPT의 거짓을 변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해서 GPT로부터 창의적이고 통찰력 있는 답을 끌어내 활용해야 한다”며 “앞으로는 정답을 찾는 시대가 아니라 ‘위대한 질문’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동동마당에 참여한 기술철학자 손화철 한동대 교수는 우려를 표했다. “챗GPT의 대답에 대해 거짓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고전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고 챗GPT의 답변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디지털 네이티브처럼 챗GPT 네이티브도 생기게 될 터인데, 과연 어렸을 때부터 챗GPT에 묻고 답하며 자라온 사람이 이런 판단 능력을 지닐 수 있을까. ‘위대한 질문’의 시대라는 말에 동의하지만 위대한 질문을 하려면 질문자의 역량을 키워야 하는데, 이 역량을 키우는 것에 챗GPT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릴 때는 챗GPT를 못 쓰게 해야 하지 않나 막연하게 생각해본다.”   손 교수는 또 이러한 역량의 차이가 경제사회적 양극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기술 발전이 경제적인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다. 챗GPT를 개발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챗GPT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과 수동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람, 위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 그 양극화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의 보편 교육 시스템에서 목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2023.04.29 00:01

  • 한국과 일본, 누가 ‘스타켈버그 리더’가 될 것인가

    한국과 일본, 누가 ‘스타켈버그 리더’가 될 것인가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중국의 전국시대 초(楚)나라에 회왕(懷王)이라는 군주가 있었다. 초나라의 서쪽에는 진(秦), 동쪽에는 제(齊)라는 강대국이 있었다. 애초에 초나라는 제나라와 동맹을 맺고 진나라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진나라가 초나라 회왕에게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고 진나라와 동맹을 하면 국경의 600리 땅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영토를 600리나 넓힐 수 있다는 욕심에 회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는다. 그러자 진나라는 회왕에게 6리의 땅을 줄 테니 받아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원래 약속했던 600리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이었던 것이다. 분노한 회왕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진나라에 군사를 몰고 들어갔지만 제나라의 도움이 없는 초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에 오히려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홀드업 문제, 대기업·중기 사이서 발생   현재 한·일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악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가운데에 자리한 대한민국의 위치가 전국시대 초나라와 겹쳐지는 측면이 있다. 경제학에서는 국가간의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기업들 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초나라 회왕이 직면했던 문제와 유사한 문제로 경제학의 ‘홀드업(hold-up)’문제가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아서 납품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문제다.   한 중소기업이 A와 B라는 두 대기업에 물품을 납품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기업인 A로서는 자신의 신제품에 사용될 부품이 필요해서 해당 중소기업에 새로운 주문을 넣었는데 그 중소기업이 A의 경쟁 상대인 B에게 새로운 주문에 대한 정보를 흘리게 되면 신제품에 대한 비밀 정보가 경쟁 상대에게 알려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대기업인 B로서도 자신의 주요한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경쟁상대인 A의 부품도 납품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해당 중소기업은 A와 B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물론 중소기업이 A와 B 중에서 한쪽을 선택하기 전까지 A와 B는 해당 중소기업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자기를 선택하라고 회유할 것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이 결국 A를 선택하고 B와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해당 중소기업은 다시 B와의 관계를 맺기 어려워질 것이고 A의 입장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해 독점적인 지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B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과 독점적으로 거래하자고 회유했던 대기업 A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중소기업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렇게 B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A와 독점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해당 중소기업이 A에게 인질로 잡힌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인질을 의미하는 홀드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홀드업 문제라고 부른다.   물론 해당 중소기업이 B를 버리고 A를 선택해서 스스로 인질이 된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인 A와 B의 입장에서는 두 경쟁 기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해당 중소기업의 태도를 계속 용인하기 힘들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협력관계가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니 중소기업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현실 경제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신뢰에 기반한 원활한 협력이 이루어져야 좋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홀드업 문제 때문에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필요한 협력이 이루어지기 힘들게 되면 관련된 기업들의 경쟁력이 모두 하락하게 될 것이다.   지난달 1박2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도쿄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관에서 열린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손을 내밀었지만 일본 측에서 이를 반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한국이 손해를 보는 느낌을 주고 있다. 관계 개선에 먼저 손을 내민 한국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 일본과 관계를 끊기 힘든 상황이므로 일본은 이 점을 이용해서 자국의 이익을 챙길 여지가 생긴 것이다. 전형적인 홀드업 문제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에서 홀드업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홀드업 문제의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합병이다. 대기업인 A나 B가 해당 중소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주권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홀드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한 국가나 기업이 주도권을 가진 리더가 되어 다른 국가나 기업을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고백을 하겠다. 경제학에서는 리더나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아담 스미스의 원칙에 따르다 보니 경제 이론은 모두 각자 개인 플레이를 가정으로 한다. 현실에서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경우가 많고 팀에는 리더가 있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찾기 힘든 단어가 바로 리더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라는 단어가 한번 등장하는 경제 모형이 있는데 바로 ‘스타켈버그 리더(stackelberg leader)’이다. 스타켈버그라는 독일 경제학자가 처음 생각한 개념이다. 한 마디로 눈앞의 작은 경쟁에서 벗어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스타켈버그 리더이다. 석유를 수출해서 돈을 버는 국가들은 조금이라도 자기의 석유를 더 수출하고자 경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을 하다 보면 석유가 너무 많이 생산되어 석유의 가격이 하락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 석유를 수출하는 모든 국가들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압도적으로 석유의 수출량이 많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의 생산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석유의 생산을 줄여서 석유의 수출 물량이 줄어들면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므로 손해이다. 하지만 석유 수출의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의 생산을 줄이면 석유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아마도 몇몇 다른 국가들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석유의 생산을 줄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석유의 가격이 올라서 장기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 국가들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행동을 먼저 하는 국가나 기업을 경제학에서 스타켈버그 리더라고 부른다. 바둑의 명인이 몇 수 앞을 미리 읽고 있듯이 스타켈버그 리더는 몇 수를 미리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한·일 모두에게 협력 필요한 건 명백   물론 에콰도르와 같이 작은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 흉내를 내어서 스타켈버그 리더가 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리더가 되는 것은 어렵다. 전세계 석유 수출에서 에콰도르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기 때문에 에콰도르가 석유 생산을 줄인다고 해서 석유의 가격이 별로 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타켈버그 리더는 산업을 주도하는 강한 국가 또는 기업이 먼 안목을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스타켈버그 리더의 분석으로 보았을 때 한·일 관계의 앞날은 어떨까. 솔직히 말하면 낙관할 수 없다. 이제 한국의 국력이 많이 강해지고 일본의 국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관계로 두 국가 간의 힘이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스타켈버그 리더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국가나 기업이 일단 양보를 하고 손해를 감수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현재 압도적인 힘을 가진 쪽이 어느 쪽인지 불확실한 상태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에콰도르에게 먼저 석유 생산을 줄이고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하면 모두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누가 봐도 사우디아라비아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한·일 관계에서는 한국은 어째서 우리가 먼저 양보를 했냐고 대통령을 비난하고 일본은 이제 한국이 일본 수준으로 성장했으니 일본이 먼저 손해를 보면서 리더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압도적인 힘을 지닌 강대국인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스타켈버그 리더가 되어서 이끌어야 하겠지만, 미국이 제3자로서 한·일 관계의 모든 사항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한·일 관계의 홀드업 문제를 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두 국가에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이제는 국력이 성장한 대한민국이 한·일 관계에서 스타켈버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고려해볼 시기가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타켈버그 리더=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눈앞의 작은 경쟁에서 벗어나 이익을 포기하는 행동을 먼저 하는 국가나 기업을 뜻한다. 독일 경제학자 스타켈버그가 처음 생각한 개념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경제학 비타민』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등의 저서가 있다

    2023.04.22 00:43

  • ‘하얀 저승사자’ 제자들 우크라 잠입, 떨고있는 러 장성들

    ‘하얀 저승사자’ 제자들 우크라 잠입, 떨고있는 러 장성들

     ━  [기고] 우크라이나 저격부대의 전설과 진실 〈하〉   우크라이나 저격병이 사용하는 옛 소련제 드라구노프 소총의 조준경을 통해 수도 키이우의 시가지를 들여다본 모습. 지난해 3월 촬영. [AP=연합뉴스] 저격병의 무기로서 또 다른 장비는 망원경이다. 저격수는 ‘외로운 늑대(lonely wolf)’가 아니다. 흔히 저격병은 관측병(spotter)과 사수(shooter)의 2인1조로 움직인다. 관측병은 적의 위치와 최적 발사 위치, 접근, 퇴로, 위장, 엄폐를 맡는다. 저격 거리의 세계 최고 기록은 2017년 6월 2일 이라크 전쟁에서 캐나다의 저격수가 IS 요원 2명을 사살한 거리인데 3540m였다. 이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독자들의 자유이며 내가 우길 일이 아니다. 저격수의 이름은 극비 사항인데 흔히 윌리(Willie)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했으리라는 추측이 오고 가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캐나다 특수 부대는 한국전쟁 당시에 시력이 3.0으로 좋고 사격술이 뛰어난 이누이트(에스키모) 출신을 저격병으로 파병했는데,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한국인 아기들의 몽골 반점을 보며 반가워했다.   먼 거리를 쏘려면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조준경에 눈을 대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적군이 어디에 잠복하고 있는가를 아는 데는 엄청난 인내와 체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적군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쪽에서 자신을 노출하기 위하여 먼저 위장 사격을 한다. 그때는 내 조준경의 반사광이 적군에 노출되도록 유도한다. 그러니까 그는 3인조 가운데 ‘미끼’이다. 그 미끼에 걸려 적의 저격수가 발포하면 그때 그의 위치를 확인한 이곳 저격수가 대응 사격을 한다. 이쪽에서 바라본 적의 표적은 조준경의 반사광이다. 따라서 대응 사격은 적군의 눈을 맞추게 되니 더욱 치명적이다.   핀란드 퇴역 저격수들, 우크라행 자원   하루가 8만6400초인데 조준경에 햇볕이 반사되는 시간은 30초가 넘지 않는다.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지금 캐나다의 저격학교에서는 조준경 없이 저격하는 방법을 훈련하고 있다. 지금의 총은 모두 소음총이라 예전처럼 “따콩” 소리로 적의 위치를 가늠하지 않는다. 사수는 적군과의 거리, 적이 움직이는 시간과 착탄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통상 3000m일 경우에 착탄 시간은 2.5초이다. 총알의 속도와 적군의 표적이 2.5초 동안에 움직이는 거리도 계산해야 한다. 조준경은 총신보다 8.89㎝ 더 높다. 따라서 표적은 그만큼 낮게 계산해야 한다. 3000m의 거리에 초속 1000m인 총알의 착탄 시간이 2.5초 걸리는 것은 그 곳이 고산지대여서 공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저격수들은 그 먼 거리에서 모두 야전복을 입은 러시아 군 가운데 누가 사단장이고 누가 장성인지 어찌 알아낼까. 이는 테니스 공의 상표까지 읽을 수 있는 미국의 정찰 위성과 드론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나는 훈련소의 영점 사격(PRI)에서 20m의 표적을 맞추는 데도 탈락했다. 물론 2차 대전 때 쓰던 카빈의 총열이 낡은 탓도 있었다.   군사전문가인 이정환씨에 따르면, 하루 조준경이 반사하는 30초를 위해 낮시간 5만초를 엎드려 기다리는 데에는 초인적인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대소변의 문제도 어렵다.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절박하다. 총신(개머리판)에 얼굴을 대고 몇 시간을 기다리면 영하 35도에 노출된 총신과 영상 36.5도에 이르는 볼 사이의 온도 차가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면 총신의 선팽창율이 달라질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사수는 입에 눈을 물고 볼과 총신의 온도를 낮추어야 한다.   헤르손 지역의 참호에서 러시아 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저격병. [AP=연합뉴스] 이들이 러시아가 내색도 못 하고 두려워하는 바로 그 우크라이나 저격수들이다. 그런데 새로운 적이 또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겨울 전쟁’의 ‘백색 공포’인 핀란드의 퇴역 저격수들이 자원하여 우크라이나로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다. 핀란드가 러시아와 옛 소련으로부터 겪은 고통은 절치부심한 것이다. 1939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의 ‘겨울 전쟁’이라 불리는 수오무살미전쟁(Suomussalmen Taistelu)에서 소련군을 물리친 부대는 정규군 뿐만 아니라 고속으로 스키를 타며 사격하는 핀란드의 ‘하얀 군대’였다. 동계올림픽의 바이애슬론 종목을 연상하면 된다.   핀란드의 스키 저격병은 왜 그리 탁월한가. 스키라면 옛 소련도 지지 않는 나라였다. 그런데 두 나라의 스키 전쟁은 양상이 달랐다. 러시아의 스키부대는 평원을 달리는 고속 부대이다. 그러나 핀란드의 스키 병은 비탈진 나무들 사이를 곡예하듯 내달리면서 저격하기 때문에 그 기술도 어렵고, 저격을 당하지도 않는다. 동계올림픽의 스키 크로스가 그것이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2인1조가 되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달린다. 핀란드의 병력은 소련 병력의 3분의 1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핀란드는 2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노획했고, 소련제 스키는 조악하여 땔감으로 썼다. 소련군은 6만 명이 동사했다. 승리의 축제에서 핀란드 국민은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전쟁이다 (This is War).”   이 겨울 전쟁에 핀란드에는 시모 하이하(Simo Hayha : 1905~2002)라는 전설적인 저격수가 있었다. 그는 본디 스키를 타고 사슴을 사냥하던 평범한 시민이었는데, 소련이 침공하자 저격병으로 입대하여 영하 34도의 추위에서 스키를 질주하며 소련군 534명을 사살했다. 이것이 이제까지 세계 저격의 역사에서 최고 기록이다. 하루에 12명을 저격한 날도 있었는데 시간은 16분 걸렸다. 그는 적과 동지로부터 ‘하얀 저승사자(White Dead)’라는 별명을 들었다. 하이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저쪽의 100m 거리를 눈으로 측정하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는 조준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집중력과 시력이 좋은 탓도 있었지만, 조준경의 반사광을 적군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조준경이 없는 저격은 1500m까지 가능하다.   앞서 말한 우크라이나의 여성 파블리첸코는 전사한 남편에 대한 상심과 자신의 손에 죽은 몇백 명의 소련군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다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과 알콜 중독으로 58세의 한창 나이에 죽었다. 자이체프는 76세로 죽을 때까지 저격병 교육에 헌신하다 키이우의 국립묘지에 묻혔다. 하이하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을 받으며 97세까지 장수하며 근년까지 살았다. 그가 죽자 핀란드 국민은 “하이하가 없었으면 핀란드도 없었다”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제자들이 지금 우크라이나에 잠입했다니 러시아의 사단장과 장성들은 자꾸 뒤를 살필 수밖에 없다. 영화 ‘레옹(Leon, 1995)’과 ‘문 앞의 적(Enemy at the Gate, 2001)’이 그들을 모델로 했거나 그들의 생애에서 암시를 받아 만든 것이다.   6·25 때 에스키모 출신 저격병 활약   핀란드의 전설적 저격수 시모 하이하. [AP=연합뉴스] 당초 러시아가 걱정한 것은 탱크가 급진할 수 있을 정도로 땅이 어는 동토(Tundra)의 시기를 놓치고 진창(mud)의 시기에 진공한 것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지장이 있으니 침공의 시기를 늦춰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그랬다고도 한다. 이는 푸틴 대통령의 절통할 실수였다. 늦가을과 늦겨울에 시작되는 이 진창은 최신의 탱크도 무력하게 만든다. 러시아어로는 이를 라스푸티차(Rasputitsa)라 하는데 이것이 천혜의 해자(垓子)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이로 말미암아 패퇴했다. 그런데 이 진창이 러시아로서는 방어용으로는 좋았지만 막상 공격하려니 오히려 장애를 일으키고 있다.   이상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잘 드러나지 않은 이면이다. 물론 저격병의 활약만이 러시아의 고전과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러시아 병사의 사기와 용병 문제, 부패, 군수, 통신, 첩보, 애국적 지도자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이 글은 다만 우크라이나의 저격수만을 얘기하면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하늘 아래에도 미국의 네이비 실(Navy SEALs)에 못지않은 우리의 특수 부대가 설악산 눈밭과 언 바다에서 맨몸으로 뒹굴고 있음을 감사히 기억해 달라는 호소를 담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민간인 군사전문가 이정환(캐나다 거주)씨의 자문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동서양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사를 연구해 왔으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정치사』와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 등의 저서를 내고 『군주론』 『외교론』 등을 번역했으며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완역했다. 

    2023.04.22 00:01

  • 평생 한 여자만 그렸는데 사이는 나빴다고? 에드워드 호퍼의 7가지 사실

    평생 한 여자만 그렸는데 사이는 나빴다고? 에드워드 호퍼의 7가지 사실

     ━  올해 최대 화제의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부분확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출판계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 표지에 나오면 책이 더 잘 팔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도시의 고독을 그린 화가’ 호퍼(1882-1967)는 한국에도 팬이 많다. 그래서 그의 국내 최초 회고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올해 최대 화제의 전시로 손꼽힌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 개막일인 20일, 평일인데도 1800여 명의 관람객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을 찾았다. 예매 인원은 13만 명에 달한다. 호퍼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가장 많이 갖춘 뉴욕 휘트니미술관과의 협업 전시로서, 가장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은 시카고미술관 소장품이라 오지 않았지만, 호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은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을 비롯해 여러 주요 작품이 휘트니에서 날아왔다. 20세기 미국 풍경을 그린 화가 호퍼가 21세기 한국인에게까지 이토록 인기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SUNDAY가 호퍼에 대한 7가지 사실로 그 이유를 풀어보았다.   1 고독한 그림이 명랑한 광고와 잘 맞은 이유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차용한 ‘쓱 SSG’광고(2016)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캡처] 호퍼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건 2016년 그의 그림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쓱 SSG (신세계 온라인 쇼핑몰)’ 광고가 대박을 치면서였다. 호퍼의 그림들은 구도가 심플하면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고 크고 밝은 색면이 시원스러운 쾌감을 주기에 광고에 잘 녹아들었다. 사실 호퍼는 전업 화가가 되기 전에 광고·잡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보는 이의 눈을 빠르게 휘어잡아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감각이 그의 과묵하고 고독한 그림에 은근히 살아있는 것이다. 호퍼 자신은 그 일을 무척 싫어했지만 말이다. 이번 ‘길 위에서’ 전시는 제7섹션(호퍼의 삶과 업)에서 그의 광고·잡지 삽화를 다수 보여준다. “훗날 그의 주요 작품에 나타나는 구도와 모티프를 이 삽화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전시를 기획한 이승아 학예연구사가 말한다. 비록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창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2 늦게 성공했는데 유화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수채화 '석회암 채석장'(1926)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수채화 '맨해튼 다리'(1925-26)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는 전업 화가가 되는 게 소원이었지만 10년 간 작품을 한 점도 못 팔았기에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때려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가 전환기를 맞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항구도시 글로스터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서 뉴욕예술학교 동창 화가 조세핀을 만났다. 그녀의 영향을 받아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선으로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수채화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여기에서 호평을 받고 작품이 미술관에 팔리면서 용기를 얻은 호퍼는 드디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길 위에서’ 전시에서 호퍼의 수채화를 여러 점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수채화와 다르며 햇빛을 받은 사물의 표면과 그림자의 표현이 놀랍다. 이들을 보면, 초기에 프랑스 인상주의 아류에 불과했던 호퍼의 유화가 특유의 맑고 넓은 색면의 유화로 진화하는 데 수채화 창작이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3 한 여자만 그렸는데 사이 나빴다고?   에드워드 호퍼 '햇빛 속의 여인'(1961) [휘트니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그 이듬해, 호퍼는 조세핀과 결혼했다. 둘 다 마흔을 넘긴 나이여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만혼이었다. ‘조’라는 애칭의 조세핀은 평생에 걸쳐 호퍼의 중요한 조언자이자 모델이 되었다. 호퍼 그림 속의 거의 모든 여성은 조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햇빛 속의 여인’(1961)도 그렇고, 특히 ‘이층에 내리는 햇빛’에서 늙은 여인과 젊은 여인이 모두 조를 모델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우 사랑 넘치는 부부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호퍼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둘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다. 호퍼는 2m 가까운 키에 돌덩어리처럼 느리고 과묵했고, 조는 152㎝ 키에 새처럼 재빠르고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성격이었다. 조는 남편과 대화하는 게 “그냥 우물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아. 차이점이라면 우물에 던진 돌과 달리 쿵 소리도 안 난다는 거지”라고 불평했고, 호퍼는 “여자 하나와 사는 건 호랑이 두세 마리와 사는 것과 맞먹어”라고 투덜거렸다. 둘은 몸싸움까지 동반한 격렬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했다.   에드워드 호퍼 '트루로 집에서 스케치하는 조' (1934? 3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그럼에도 이 부부는 해로했다. 늘 참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한 조가 양보한 측면이 컸던 것 같다. 호퍼가 84세에 세상을 떠나자 불과 열 달 뒤에 조도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강렬한 애증의 관계였던 것일까. 이번 전시의 제6섹션 ‘조세핀 호퍼’에서 조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호퍼의 스케치와 조가 꼼꼼히 기록한 호퍼의 작품 장부, 둘이 함께 본 수많은 연극 티켓을 볼 수 있다. “아마 연극 보는 순간에 가장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라며 이 연구사는 웃었다.   4 ‘싸이코’ 감독 히치콕과는 무슨 관계   호퍼 ‘밤의 창문’(192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히치콕 영화 ‘이창’(1954)의 한 장면. [사진 구글 캡처] 누아르 영화를 좋아했던 호퍼와 앨프리드 히치콕은 서로의 팬이었다. 히치콕의 공포 스릴러 걸작 ‘싸이코’(1960)에 나오는 으스스한 집은 호퍼의 첫 주요작 ‘철길 옆의 집’(1925)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그림은 이번 전시에 포함돼 있지 않지만, 히치콕의 또 다른 명작 ‘이창’(1954)에 영감을 준 호퍼의 그림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바로 ‘밤의 창문’(1928)이다.    ‘이창’은 다리를 다쳐 한동안 집을 못 나가게 된 남자가 심심한 나머지 건너편 아파트 이웃들의 다양한 일상을 훔쳐보다가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타인의 내밀한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관찰자적(좋게 말하면), 관음증적(나쁘게 말하면) 욕망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다. ‘밤의 창문’ 역시 그런 그림이다. 아마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많은 그림들처럼 그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 우연히 본 장면에 인상을 받아 재구성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감시와 엿보기와 관련한 여러 범죄가 떠오르며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것을 의식한 듯, 호퍼의 팬인 소설가 겸 미술가 조너선 샌틀로퍼가 이 그림에서 영감 받아 쓴 단편소설은, 한 여성이 성범죄자 남성의 엿보기 습관을 역이용해서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5 호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장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Shirley'(2013)의 한 장면 [구글 캡처] 히치콕 영화뿐만 아니라 리들리 스콧의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1982) 등 여러 중요한 영화가 호퍼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실주의적이라 영화 장면으로 재현하기 쉬우면서 동시에 상징주의적이기 때문이다. 호퍼 그림의 텅 빈 건축 공간, 거기에 빛이 만들어 놓은 사각형, 상념에 잠긴 인물들은 한데 어울려 복합적인 관념과 정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들을 정교하게 영상으로 재현하고 교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만든 ‘셜리에 관한 모든 것(원제:Shirley)’(2013) 같은 영화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이 영화는 호퍼의 그림들 중 13점을 가져와서 이것을 셜리라는 가상의 배우의 삶에서 일어난 장면들로 설정했다. 이 전시에서는 그 그림들 중 ‘햇빛 속의 여인’을 볼 수 있다.   6 호퍼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소설집도   에드워드 호퍼 ‘푸른 밤’(1914).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의 그림들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샘솟을 수 있는지는 단편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2017)가 증명해 줄 것이다. ‘공포·스릴러 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을 비롯해 호퍼의 팬인 17명의 소설가들이 서로 다른 호퍼 그림 17점에 영감 받아 쓴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샌틀로퍼의 '밤의 창문'을 바탕으로 한 단편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이 단편집에 영감을 준 그림 여러 점이 전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초기 주요작 ‘푸른 밤’(1914)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로버트 O. 버틀러가 그림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신비롭고 불길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림에는 푸르스름한 초저녁 카페에 창백하게 분장한 피에로가 앉아 있다. 그 신비스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문 채 군복을 입은 남자, 그리고 베레모를 쓴 남자와 마주 앉아 있다. 불가능하지 않지만 보기 쉽진 않은 장면. 현실의 장면인데도 기묘한 꿈의 한 장면 같다. 그래서 버틀러의 단편도 현실과 심리적 환상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져 있다.   7 호퍼의 그림이 다 현실인 건 아니라고?   에드워드 호퍼 '아침 7시'(194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는 흔히 ‘사실주의 화가’라고 하지만, 종종 현실의 풍경에 상징적인 허구의 풍경을 섞곤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중에는 ‘아침 7시’(1948)와 ‘계단’(1949)이 대표적인 예다. ‘계단’은 호퍼의 고향 집(뉴욕주 소도시 나이액)을 그린 것인데 본래 현관문을 열면 평범한 거리가 펼쳐지지만 이 그림에서 열린 문 너머로 숲을 펼쳐 놓았다고 이승아 연구사는 설명한다. ‘아침 7시’는 호퍼가 고향에서 15년 전에 본, 아마도 금주법 시대에 주류 밀매를 했던 가게를, 기억에 환상을 입혀 그려낸 것이다. 미국의 계관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시간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시계가 걸린 깔끔하고 단정한 상점” 즉 “문명”이 “어둡고 어지럽고 불가해한 자연의 모습”인 숲과 상징적으로 병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호퍼는 현대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것이리라. 광고에 쓰이기 좋은 밝고 명쾌한 색면과 극적인 구도를 지녔지만 휑한 여백과 거기 맺힌 빛의 사각형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풀리지 않는 동경을 암시한다. 어렵지 않은 사실주의적 풍경이면서도 상징주의적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들은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품고 있고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시공을 초월한 호퍼의 마력이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2023.04.22 00:01

  • 1인 가구 717만 절반은 가난…“쪽방서 사육 당하는 느낌”

    1인 가구 717만 절반은 가난…“쪽방서 사육 당하는 느낌”

     ━  ‘나 혼자 산다’ 시대의 그늘   지난 2월 서울 용산구 쪽방촌 거주민의 방. [뉴시스] 너도나도 ‘나 혼자 산다.’   1인 가구가 매년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5년 520만 가구에서 2021년 717만 가구로 6년 새 38%나 늘어났다. 최근에는 이런 증가세에 가속이 붙었다. 2016년에는 전년 대비 20만 가구가, 2021년에는 52만 가구가 증가했다. 불과 5년 새 증가 폭이 2.5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세 집 중 하나가 ‘나 혼자 산다’는 집이다. 2021년 전체 2145만 가구 중 1인 가구가 33.4%로 가장 많았다.   이들이 혼자 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이 지방이라 어쩔 수 없었죠.” 경기도 용인에 살던 김모(30)씨는 지방 공기업에 취업하며 1인 가구가 됐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김씨처럼 직장 문제로 인해 혼자 사는 사례가 34.3%로 가장 많았다. 직장인 서모(28)씨는 부모님과 직장이 모두 서울에 있지만 지난해 독립해 서울 은평구에 월셋집을 얻었다. 서씨와 같이 독립하기 위해 1인 가구가 된 사례가 26.2%로 2위다. 이후 집안사정(17%), 사별(15.5%), 학업(4.9%)이 뒤를 이었다.   주거 지원 정책 청년·노인에 편중   결혼을 선택으로 여기는 분위기와 개인주의가 확산하며 앞으로 1인 가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통계청은 2050년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중이 39.6%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저출산·고령화의 영향으로 20대 이하 1인 가구는 줄고 노년층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는 20대 이하(19.8%), 70대 이상(18.1%), 30대(17.1%), 60대(16.4%), 50대(15.4%), 40대(13.3%) 순이지만, 2050년에는 20대 이하가 7.5%로 가장 낮고, 70대 이상 노년층은 42.9%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문제는 1인 가구의 경제력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1인 가구의 상대적 빈곤율은 47.2%다. 2명 중 1명은 개인소득 중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중위소득의 50% 미만이라는 의미다. 전체 가구 빈곤율인 15.3%보다도 약 3배 높다. 특히 65세 이상 노년 1인 가구의 빈곤율은 72.1%에 달했다. 주거 형태로만 보아도 월세로 거주하는 사례가42.3%로 가장 많았고, 자기 집에 사는 경우는 34.3%에 그쳤다.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1인 가구는 손바닥만한 원룸으로 내몰린다. 지난 12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인근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0만원인 13㎡(3.9평) 방을 둘러봤다. 현관에서 두 걸음 만에 싱크대 앞이다. 난간도 없고 가파른 계단형 수납장을 딛고 올라서야 누울 공간이 나온다. 복층의 높이는 60㎝ 남짓. 앉기도 어렵다. 이렇게 최저주거기준 보다도 좁고 불편한 ‘계단식 방’ 약 15개 중 공실은 두 개뿐이었다. 하지만 건축법과 소방법 위반 사항이 없다면 이런 주거공간도 막을 수 없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1인 최저주거기준이 너무 좁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국토교통부가 정한 1인 최저주거기준은 14㎡(4.2평)으로 2011년 이후 13년째 그대로다. 부부는 26㎡(7.8평), 두 자녀를 둔 4인 가족도 43㎡(13평)에 불과하다. 반면 일본은 25㎡(7.5평), 영국은 38㎡(11.4평)다. 강제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외 국가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2년간 4평 원룸에 살았다는 직장인 김수진(28)씨는 “건조대를 펴면 냉장고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좁아 먹고 자는 것 외에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육당하는 느낌이었다”며 “어떻게 4평이 최소 주거 기준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1인 가구 중 중장년층은 임대주택에도 들어가기 어렵다. 대부분의 주거 지원 정책은 대상이 청년·신혼부부·노인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전세란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는 지난해 한국공간디자인학회 논문에서 “현재 많은 1인 가구 주택 지원 정책이 청년층으로 한정돼 있다”며 “빈곤 사각지대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양한 연령층의 저소득 1인 가구로 지원 범주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대주택이나 4평짜리 원룸도 얻지 못한 이들은 이보다 열악한 고시텔·고시원·쪽방으로 밀려난다.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외로움도 우려된다. 한규만 고려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역학적으로 기혼보다 미혼이거나 이혼·별거로 1인 가구가 된 경우 우울증 발생 빈도가 높다”며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덜 받을 수 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인 가구의 재정적 상황이 좋지 않아 경제적인 이유가 우울증 위험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연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교수는 “1인 가구가 증가하는 현상 자체보다도 혼자 살면서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울증, 자살률이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서 “특히 독거노인의 경우 급격한 인지기능 저하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역사회서도 여러 모임 만들어야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0만원인 서울 서대문구의 13㎡원룸. 윤혜인 기자 실제로 좀처럼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었던 김경아(27)씨는 대학에 진학하며 경남 창원에서 올라와 서울에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외롭다고 느낄 때가 많아졌다. 김씨는 “혼자 사는 게 자유로워서 좋기도 하지만 모든 걸 스스로 챙겨야 하고, 외로울 때 가족을 당장 볼 수 없다는 점이 힘들다”며 “코로나19에 걸렸을 땐 어디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고, 식사도 혼자 챙겨야 해 정말 서러웠다”고 말했다.   1인 가구 증가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핀란드(47%), 스웨덴(45.4%), 독일(42.1%)의 1인 가구 비중은 40%를 상회한다. 일본(38%), 프랑스(37.8%), 영국(31.1%)도 30%를 넘어섰다. 영국이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직을 신설하고, 일본이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한 배경이다. 정부에서 개인의 외로움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다루겠다고 시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1인 가구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규만 교수는 “1인 가구는 사회·정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룹에서 활동하는 게 좋다”며 “지역사회에서도 여러 모임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주 4회 이상 등에 땀이 날 정도의 유산소 운동은 우울증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중년 여성 1인 가구 19명을 인터뷰해 『에이징 솔로』를 출간한 김희경 작가 역시 “1인 가구일수록 나름대로 연결망을 만들어 사회와 계속 이어져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1인 가구를 위해 현재 돌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홀로 사는 김모(56)씨는 지난 1월 집에서 쓰러졌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꾸준히 연락하던 고교 후배 덕에 살 수 있었다. 이처럼 1인 가구가 다양한 연결망을 만들었을 때 비상시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희경 작가는 “돌봄 휴가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고, 향후 1인 가구의 사망이 늘어날 경우를 대비해 가족이 아니더라도 지정한 사람이 의료 결정을 대리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1인분 밀키트·미니 채소…소포장 제품이 잘 팔린다 「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소포장된 채소류가 진열돼 있다. [사진 홈플러스] ‘적게 담아 많이 판다.’   요새 대형마트·편의점이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 수요를 저격하고 있다. 소포장 상품의 비중을 늘리는 마케팅에 골몰하고 있다. 인기는 폭발적이다. 3년 차 1인 가구 백소정(30)씨는 “혼자 먹으니 손질하기도 번거롭고 버리는 양도 많아서 식품은 대부분 소포장 제품을 구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홈플러스는 농산·축산·수산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소포장 상품을 출시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소포장 상품 수는 72종으로 지난해 6월 20종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3인분 밀키트 제품을 1인분으로 구성하는 등 소포장 상품의 범위도 넓히고 있다. 올해 1월 홈플러스의 축산류·수산물류 소포장 제품의 매출은 지난해 1월 대비 각각 1428%, 1716% 증가했다.   이마트도 크기와 양이 적어 부담이 덜한 미니 채소를 판매하고 있다. 2021년 대비 지난해 미니채소 매출은 방울 양배추 257%, 미니 양파 63%, 미니 단호박 57%, 소형 수박 45%, 스낵 오이 21% 등 크게 상승했다. ‘하루채소’라는 이름으로 나온 깻잎·버섯·대파·깐마늘·고추 등 소포장 채소도 990원에 판매하고 있다. 다가오는 여름철에는 애플 수박 등 이색적인 소형 수박도 판매할 예정이다.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1인 가구가 자주 이용하는 편의점에서도 소포장 과일과 정육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 BGF리테일에 따르면 편의점 CU에서 판매하는 소포장 세척 과일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2020년 19.9%, 2021년 25.7%, 2022년 15.8%로 꾸준히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달 CU의 정육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0%나 올랐다. BGF리테일의 김배근 팀장은 “앞으로 소포장 정육 상품을 늘리고 다른 식재료 상품으로도 ‘소형화’를 넓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윤혜인 기자 yun.hyein@joongang.co.kr

    2023.04.22 00:01

  • 기를 쓰고 막을 일도 아니고, 통과시킬 일도 아닌데…

    기를 쓰고 막을 일도 아니고, 통과시킬 일도 아닌데…

     ━  처리 연기된 ‘간호법’ 충돌 배경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간호법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13일 보건복지의료연대가 반대 집회(위쪽 사진)를 열자, 14일 대한간호협회도 제정 촉구 집회(아래쪽 사진)로 맞불을 놨다. [뉴시스] “지난 2년간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통과 이외의 시나리오는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간호협회 관계자)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통과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의사협회 관계자)   극한 대치를 이어갔던 간호법 처리가 27일 본회의로 연기됐다. 간호법을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대한방사선사협회 등 보건복지의료연대 소속 13개 단체도, 찬성하는 대한간호협회도 강경한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간호법이 뭐길래 이런 혼란이 벌어지는 걸까.   간호법은 내용만 뜯어보면 논란이 될만한 게 별로 없다. 의료법·보건의료인력지원법 등에서 간호사 관련 부분만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기를 쓰고 통과시킬 만한 것도 아니지만, 기를 쓰고 반대할 만한 것도 아니다. 간호법은 2005년부터 추진돼 온 해묵은 이슈다. 다만 간호사의 업무 범위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초 2021년 김민석 민주당 의원의 법안에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지도 또는 처방 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규정했고,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 안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지도하에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라고 담았다. 이 조항이 간호사의 ‘단독 개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발에 부닥쳤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로 바뀌었다. 이번에 본회의 직회부된 법안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이번에는 ‘지역사회’가 문제가 됐다. 상정된 간호법 1조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의료연대 측은 향후 간호사 단독 개원이나 지역사회에서 단독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당장 법안에 단독 개원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은 없지만, 향후 법 개정을 통해 방문간호센터 같은 단독 개원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역사회 문구를 근거로 의사의 지도·감독에서 벗어나서 별도의 의료행위(무면허 의료)를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간호법 쟁점 간호계는 기존 의료법에는 간호사 업무가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고, 의사 인력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의료행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지속해서 법안 제정을 요구해왔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간호사의 역할이 단순한 환자 간호에서 지역사회 방문건강관리, 만성질환 관리 등으로 넓어졌기 때문에 폭넓은 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김영경 대한간호협회 회장은 “간호법은 현행 의료법과 동일하게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정했기 때문에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포함돼도 의사의 지도를 벗어나 독자적 진료를 할 수 없다”며 “간단한 의료행위조차 할 수 없도록 제한된 법을 시정하려면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현행 의료법상에서는 지역사회에 소속된 행정복지센터 간호사가 환자를 찾아가 혈압, 혈당을 체크하는 것도 법 위반 소지가 있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가 지역사회까지 확대될 경우 기존 병원에서 간호사의 이탈이 심화하고, 요양보호사나 임상병리사 등 타 의료직무의 업무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도 간호법 반대 근거 중 하나다. 간호사가 지역사회 내에서 의료활동을 하게 되면 응급구조사나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등이 수행하던 의료업무까지 맡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현재 임상병리사만이 할 수 있는 심전도 측정 및 전송 등의 업무를 간호사가 맡으면 임상병리사 등 소수 직역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간호단체에서는 더 나은 의료·요양·돌봄 서비스 제공을 위해 간호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부분은 간호법이 아닌 건강보험법이나 장기요양보험법을 개정해 손볼 영역”이라며 “타 직역과 충분히 소통하면서 해결해야지, 숙원사업이라는 이유로 독단적으로 밀고 나가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열된 찬반 논란이 벌어지는데 대해 익명을 요청한 의료계 관계자는 “초고령화 시대에 돌봄 서비스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사와 간호사의 힘싸움아니겠냐”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간병·돌봄을 위한 사회보장인 ‘개호보험’에 지난해 500만명을 대상으로 130조원을 지출했다. 그는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나라에서도 노인 돌봄 서비스를 활성화하려면 간호사의 방문간호 단독 개업도 고려해 봄 직하다”며 “간호사의 업무 부문을 의료법에 두기보다 간호법에 두는 것이 법률 개정이 더 수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대한간호협회 간호법제정특위 신경림 위원장은 지난 2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의료기관 개설을 담은 법률이 의료법이고, 거기에 간호사에게는 개설권이 없는데 간호법안을 내니 ‘의료기관을 개설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뒤집어씌운다”며 “앞으로 간호법에 개설권이 생기겠느냐”고 말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4.15 01:06

  • 부모·지인 협박하고 알몸사진 유포…사채 덫에 ‘지옥’ 생활

    부모·지인 협박하고 알몸사진 유포…사채 덫에 ‘지옥’ 생활

     ━  불법 채권추심 피해 확산   서울의 한 유흥가에 흩뿌려져 있는 불법대부업 명함형 전단지. [뉴스1] “채권 장부를 들고 탈출했습니다.”   정명근(31세·가명)씨는 지난 2월 22일 새벽 5시쯤 맨발로 뛰어다녔다. 불법 사채업자들의 사무실에서 도망치는 상황. 정씨는 “돈을 갚으라며 윽박지르고 살해 협박까지 하니 가서 일이라도 해서 갚겠다고 했다”며 “그런데 그곳에서 돈을 받아 오라고 시키는 일을 보니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탈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 추심. 쉽게 말해 빚 독촉을 위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현행법상 채권 추심자는 채무자의 가족이나 동료에게 변제 독촉을 해서는 안 된다. 변제를 위한 만남이나 연락 자체가 위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채업자가 빚을 독촉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은 채무자들이 빌린 돈에 이자까지 다 갚았는데도 불구하고 약점을 쥐고 흔들며 끊임없이 돈을 보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경찰 국가수사본부는 지난해 미등록대부 및 불법 채권추심 등 불법 사금융 범죄 1177건을 가려내고 2085명을 검거했다. 범죄수익 53억여 원도 몰수·추징했다. 불법채권 추심 관련 피해상담·신고 건수도 늘어나고 있다. 2021년 867건에서 지난해 1109건으로 30%가량 증가했다. 올해 1~2월은 271건. 지난해 같은 기간 127건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 건수는 신고 건수의 3~4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씨도 불법 채권 추심 피해 신고자 중 한 명이다.   최고 연 4000% 고리 이자 받기도   시작은 전세 자금에 필요한 1000만원이었다. 그는 “돈을 빌리려면 절차상 필요하다며 내 주변 사람의 연락처를 기록해야 한다길래 알려줬다”며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출 액수는 사채업자가 마음대로 정했다. 이자는 터무니 없었다. 상환이 늦으면 부모님, 심지어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선생님에게까지 전화했다. 이자만 1년 새 1억5000만원에 달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은 ‘갚을 돈이 없으면 안 갚으면 되지 않냐’,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는데 24시간 내내 협박에 노출되면 돈을 주고라도 이 힘든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며 “경찰에 신고해도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사용하는 이들이라 추적이 쉽지 않고, 왜 돈을 빌렸냐고 추궁을 당하기도 해서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피해자들은 신고를 하면 보복을 한다는 불법 채권 추심자의 으름장에 경찰에 연락하기가 꺼려지고,  경찰이 막상 검거해도 돈을 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현실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정씨가 불법 채권 추심자의 도움을 받으려 한 것도 실수지만, 지인들의 연락처를 알려준 것도 큰 실수다. 불법 채권 추심자가 개인정보를 요구할 당시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피해자들을 안심시키는 건 일종의 매뉴얼. 하지만 ‘파일 공유 앱’을 설치하도록 요구해 ‘연락처’ 일체와 ‘얼굴이 보이는 사진 파일’ 수집한 뒤부터는 끝없는 협박의 지옥이 펼쳐진다. 법률사무소 세일의 이세일 대표 변호사는 “불법 사채업자들은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젊은 사람이나 여성 등 약자들을 골라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도가 올라가야 한다’며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이나 개인정보를 요구하고 현혹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채무자의 얼굴 사진을 음란물 등에 합성해 빚 변제 독촉을 하기도 한다. 50대 남성 최국현(가명)씨의 경우다.   최씨는 생활자금 100만원이 필요했다. 대부업자는 “신용도가 낮으니 알몸을 찍어서 보내라”고 최씨에게 요구했다. “돈만 제때 갚으면 아무 일 없을 것”, “당신은 남자인데 알몸사진이 뭐 어떻냐”라는 말도 곁들였다. 최씨는 알몸사진을 찍어서 대부업자에게 전송했다. 이후 대부업자의 빚 독촉에 몰린 최씨는 “나중에 내 얼굴을 몸에 합성해 지인들을 전부 초대한 단톡방에 뿌리더라”고 전했다. 최씨는 현재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정리됐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부산청 강력범죄수사대에서는 지난해 이러한 성착취 수법으로 총 3500명에게 최고 연 4000%가 넘는 고리 이자를 받아낸 대부조직원 66명을 검거했다.   경찰청·금감원, 10월까지 집중 단속   불법 추심 피해는 2차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업자금으로 30여 곳에서 사채를 끌어다 쓴 뒤  협박에 시달리던 40대 여성 유모란(가명)씨. 그는 얼마전 또다른 사채업자로부터 1000만원만 주면 이자랑 원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씨는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안 보였는데 같은 업계 사람의 연락을 받으니 덜컥 믿음이 생기더라”며 “현금으로 1000만원을 해당 사채업자들에게 지급했는데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단순히 전화를 받지 말라는 것뿐이였다”고 전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유씨는 다시 절망했다. 이 소장은 “이런 2차 피해는 사채가 아니라, 돈을 받아놓고 연락을 끊는, 사기와 절도를 결합한 보이스피싱”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불법 사채의 경우 피해 복구가 쉽지 않기에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세일 변호사는 “한두명의 피의자들을 잡아도 이들이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윗선을 잡기는 어려울 수 있다”며 “과도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항상 의심해야 한다. 한번 정보를 넘기면 회수가 불가능하고, 급한 불을 끄려다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피해자들은 힘들더라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법무법인 대건의 한상준 대표 변호사는 “불법 사채업자들이 1만명에게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끝까지 물고 넘어지는 피해자가 10명도 안 된다면, 피해 사례가 이어질 것”이라며 “상황이 어렵고 더는 엮이고 싶지도 않겠지만, 피해자들이 집단 소송이나 어떤 방식으로 끝까지 목소리 내려고 노력해야 합의, 변제 등의 가능성이라도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불법 추심 피해가 계속되자 경찰청과 금융감독원은 3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를 성착취 추심 등 불법채권추심 특별근절기간으로 정하고 집중 단속한다고 지난달 19일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협박과 폭언에 노출돼있는 피해자들에게는 불법 추심을 멈추게 할 대책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힘없이 돈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계속.     ■ 보이스피싱 총책서 해결사 된 이기동 소장 “채무자 실질적 지원 체계 갖춰야” 「 이기동 불법 사채 피해자인 정명근(31·가명)씨가 사채업자들의 사무실에서 탈출한 뒤 가장 먼저찾은 곳은 어디였을까. 정씨는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이기동(사진) 소장 사무실”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채업자들이 이 소장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탈출 시 갖고 나온 사채업자 장부를 들고 그는 이기동 소장을 찾아갔다. 이후 이 소장은  사채업자들과 만나 담판을 지었다. 처음에는 기세등등하던 이들도 “우리 잘못도 있으니 어느 정도 이자만 돌려받는 선에서 끝내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 소장은 누구길래 사채업자들도 입에 올렸을까. 이 소장은 20대 시절 8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 모집 총책으로 활동했다. 그 대가로 2년 6개월간 감옥생활도 했다. 이 소장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불린다. 지금까지 1500여 명의 불법 사채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었고, 한 사람당 적게는 5건, 많게는 120건의 피해에 도움을 줬다. 이 소장은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붙잡혀 수사를 받던 중 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내가 칼만 안 들었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어둠의 생활을 청산했다”고 말했다.   2014년 출소한 이 소장은 가장 잘 아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금융범죄 예방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라는 책을 썼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수법, 예방법 등 업계 사람들만 알만한 내밀한 이야기를 담았다. 2015년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예방 대책으로 내놓은 ‘30분 지연 인출제도’(100만원 이상)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악성 부채 정리 과정을 보여주는 유튜브 방송을 매주 진행하는 이 소장은 불법 사채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채업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한다. 경찰에 찾아갔다가 사채업자들에게 오히려 더 심한 협박을 당한 이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는 이들 등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이 소장은 ‘해결사’다. 이 소장은 “피해자가 나한테 돈을 맡겨 뒀으니 나한테 와서 찾아가라는 식으로 불법 사채업자와 피해자를 단절시키는 게 우선”이라며 “대부분의 피해자는 ‘돈을 빌려서’, ‘개인정보가 털려서’ 등 약자의 입장에서 대응하려고 하니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그가 있는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는 24시간 가동된다. 이 소장은 “채무자는 1분 1초가 급한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면 일주일이 지나서야 수사에 들어가는 데다가 그마저 적극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며 “사회가 채무자를 실질적으로 돕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3.04.15 0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