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보수 정당에서 ‘남원정’은 단지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을 한정하는 건 아니다. ‘올드한 영남당’을 개혁하려는 수도권 출신의 ‘젊은 목소리’를 상징한 세력이기도 했다. 함께 성장하며 대선주자의 반열로도 올라섰다.   김재섭(左), 김용태(右) 22대 총선에서 ‘남원정’을 떠올리게 하는 보수 정치인들이 의원 배지를 달았다.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인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된 김재섭(37) 당선인과 한때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의 지역구였던 포천-가평에서 당선된 김용태(34) 당선인이 그들이다. ‘친이준석계’로 분류되는 둘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과 친윤계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꾸준히 내왔다.   김재섭 당선인은 12일에도 “여당이 너무 정부와 대통령실에 종속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며 “22대 국회에서는 정부와의 건전한 긴장관계를 통해 정부와 협력하면서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가진 여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두고도 “우리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에 대해서도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라고 했다.   관련기사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국민의힘 최연소 당선자인 김용태 당선인도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이 책임을 갖고 국민의 상식에 부합할 수 있는 모습들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중 김용태 당선인은 이준석계의 ‘천아용인(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 중 한 명이었고 셋(천하람·허은아·이기인)이 탈당했을 때 당 잔류를 택했다.   이준석, 천하람, 이주영(왼쪽부터 순서대로) 이준석·천하람 두 사람은 개혁신당 간판으로 화성을과 비례대표로 각각 당선됐다. 천 당선인과 함께 개혁신당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았던 82년생 이주영 전 순천향대 천안병원 교수도 비례대표 1번으로 22대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이들은 스스로를 ‘범야’로 규정한다. 이준석 대표는 “여당이 정말 준엄한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며 “바로 직전에 전국 단위 선거에서 대승을 이끌었던 그 당의 대표였던 사람이 왜 당을 옮겨가지고 이렇게 출마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것에 대해서 윤 대통령이 한번 곱씹어보셨으면 하는 생각”이라며 윤 대통령을 정면 겨냥했다.   현재 ‘여야’로 나뉘어있지만, 보수 진영에서 비슷한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있다. 김재섭 당선인은 “(이 대표) 스스로 범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지만 중도정당이 아니라 늘 보수정당임을 자처했다”며 “보수의 적통을 자처했던 사람이기에 결국 가는 큰 방향성 자체는 같다”고 했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왼쪽부터 순서대로) 윤종빈 명지대 교수는 이들에 대해 “30~40대의 젊은 정치인으로 기성 정치를 쇄신하려고 한 ‘남원정’과 나이, 행보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남원정’보다 정치적으로 더 험한 자갈밭을 걸어 당선됐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며 “이 대표의 경우 페미니즘, 노인 무임승차 등 민감한 이슈들을 피하지 않고 건드려 온 점이 기성 정치에서 벗어나 보여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동수 청년정치 크루 대표도 “민주당에서 청년 정치인이라고 불릴만한 당선인들은 주류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보수 진영에선 쓴소리하는 정치인들이 자력으로 지역구를 돌파했다는 점에서 보수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발판을 마련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종북에 대한 비판이나 영남에 갇힌 지역적 한계를 깨고 2030이 원하는 이슈를 많이 다뤄야 한다”며 “그러면 이들의 당선이 반짝 이슈를 넘어서 보수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란 지적도 있다.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 벌써 ‘남원정’을 연상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새로운 정치 세대로서 이들에게 그 정도 맹아(萌芽)가 있는지는 이제부터 증명해야한다”고 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2024.04.13 01:18

  •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한 심상정 녹색정의당 의원. [뉴시스] 녹색정의당(이하 정의당)이 4·10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 2.14%로 비례의원 배출에 실패했다. 심상정 의원도 지역구(경기 고양갑)에서 16년 만에 낙선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제22대 국회에서 정의당은 0석, 원외 정당이 됐다.   정의당의 빈자리는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이하 준연동제)로 생겨난 ‘2중대 정당’이 대신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조국혁신당이 득표율 24.25%로 당선인 12명을 배출해 원내 3당이 됐다. 범야권 지지층이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를 외치며 전략적 분산투표를 벌인 결과다.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특권정치를 기필코 끝내겠다”(심상정)며 정의당 주도로 도입했던 준연동제가 빚어낸 아이러니다.   거대 양당의 위용은 이번에도 끄떡없었다. 이들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과 국민의미래는 각각 14석과 18석을 챙겼다. 21대 총선 때보다 더 뻔뻔하고 재빨랐다. 위성정당 창당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고, 정당 기호 선순위를 받기 위한 현역 의원 꿔주기도 4년 전과 판박이였다. 양당 대표도 “국민만 찍자”, “더불어 몰빵”을 외치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다당제 실현이라는 선거제 개혁의 취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관련기사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민주당은 더 나아가 어떤 군소정당과 후보들을 자신의 위성정당에 입주시킬지 선택까지 했다.  거대 정당의 특권이 더 강화된 역설이다. 이걸 거부한 정의당은 다시 원외가 됐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당시 민주노동당, 지역구 2, 비례 8)을 배출하면서 시작된 ‘독자적 진보정당’ 노선의 비극적 말로다. 반면 역시 민주노동당의 후예를 자처하는 진보당은 민주당 위성정당에 들어가 비례 2석과 야권 단일화 지역구 1석(울산 북구)을 챙겼다. 사회민주당과 기본소득당도 한 석씩 받았다. 이준한 인천대(정치학) 교수는 “진보정당이 스스로 힘을 키워 국민의 지지를 받기보단, 거대 정당과 선거연합을 하거나 공천 나눠 갖기를 하는 기형적 문화가 완성됐다”고 비판했다.   준연동제가 도입 때부터 정치 세력의 담합에서 시작된 만큼,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당은 선거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2019년 민주당이 원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과 검경수사권 조정법을 패스트트랙에 태워 동시에 처리했다. ‘조국 사태’ 때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적격하다는 의견을 내면서 “정의당에서 정의가 사라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진만 덕성여대(정치학) 교수는 “정의당의 기대와 달리 거대 양당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준우 상임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지도부는 12일 오전 노회찬 전 의원 묘소가 있는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을 참배해 “부족함을 고백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저희를 찍어주신 60만 시민의 응원과 격려 속에서 다시 외롭지 않은 길을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정의당의 장래가 밝진 않다. 정의당 창당 멤버인 한창민 초대 대전시당위원장은 민주당 위성정당 비례 10번으로, 신장식 전 정의당 사무총장은 조국혁신당 비례 4번으로 당선증을 쥐었다. 옛 정의당 지도부 인사는 “우리가 나이브했다”고 말했다.     강보현 기자 kang.bohyun@joongang.co.kr

    2024.04.13 01:12

  •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협치의 시간, 여야 대화 통로부터 열어야"

     ━  정당학회·중앙SUNDAY 총선 좌담 - 전문가들이 본 4·10 총선   4·10 총선 이후 한국 정치가 미지의 경로로 들어섰다. 최고의 여소야대(與小野大)다. 노태우 대통령이 총선 후 20개월만인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나섰을 때 여당(민정당)은 지금보다 17석 많은 125석(전체 299석)이었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 임기 내내 여소야대를 한다는 게 (여권으로선) 가장 뼈아픈 지점이 아닐까 싶다. 양극화 과정이 심한 가운데 ‘분점 정부’(의회 다수당과 대통령 소속 정당이 다른 것)가 되면 정치든 협치를 통해 성과를 내야 할 텐데 지금 구도에선 상당히 불리하다. 이제 시간은 야당 편이다.”   “전국 선거처럼 치러져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은 다 표출됐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정당이나 지역구 의원들을 평가할 기회는 놓친, 되게 잃은 게 많은 선거일 수 있다.”   관련기사 보수 젊은피 이준석·김재섭·김용태…2024년판 ‘남원정’ 될까 정의당 주도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심상정에 부메랑 됐다 11일 중앙SUNDAY와 한국정당학회(회장 박원호 서울대 교수)의 긴급 총선 좌담회에서 나온 진단들이다. 박 회장과 박현석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과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임유진 강원대 교수가 함께했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협치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175석의 더불어민주당엔 ‘제도적 인내’(forbearance)를 요청했고, 쪼그라들고 있는 국민의힘에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상대가 잘 안 돼야 내게 집권기회가 오는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고민도 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왔다. 윤 대통령에겐 개헌 이니셔티브가 기회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  정권 심판론 커지며 ‘전국 선거’ 돼버린 총선…지역구 의원 평가할 기회 사라져     초유의 여소야대를 만들어낸 4·10 총선 다음날인 11일 중앙 SUNDAY와 한국정치학회가 총선 민심을 논의할 긴급 좌담회를 마련했다. 왼쪽부터 박원호 정당학 회장(서울대)과 박현석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그룹장, 임유진 강원대, 이재묵 한국외국어대 교수. 김상선 기자 결국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재묵=“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대통령에 대한 불만 중 윤 대통령은 특히 불통·일방독주가 많다. 처음엔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이젠 외신에서도 ‘입틀막’이라고 한다. 여당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도 지나치게 용산 입김이 들어갔다는 보도도 있었다. 야당 대표가 아무리 인기 없고 사법리스크가 있다 해도 대통령이 2년간 안 만난 경우는 없었다. 사법 리스크가 있는 건 사법부가 판단하면 될 문제이지, 행정부 수반이 판단할 건 아니다. 야당과 소통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박현석=“대통령의 소통은 정치권 내 반대자들과의 소통과 국민·유권자·시민과의 소통, 두 차원으로 볼 수 있는데 둘 중 하나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의대 증원 문제도 전형적인 예다. 민주당도 의대 정원 증원을 주장했었다. 지금이라도 소통해야 한다.”   4·10총선 당선인 분석 임유진=“정당 내부도 소통 자체가 너무 안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선거에서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운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걸 잘 봐야 한다.”   박원호=“윤 대통령이 특정 정책 영역에서 굉장히 큰 실책이 있었다기보다 스타일이나 컬처라고 해야 하나 그런 문제가 지적되곤 하는데, 저도 동의한다. 한국에서 소위 보수가 새로운 기반(segment)을 찾은 게 2007년, 2008년 MB(이명박)를 당선시킬 때였다. 당시 정두언 의원이 3중(中)을 말했다. 정치적 중도, 영호남이 아닌 서울, 그리고 중산층이다. 좀 리버럴한 스타일로 민정계 보수와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다. 박근혜 정부 때 떨어져 나갔고 촛불을 들었고 윤 대통령을 찍었다. 이들이 지금의 윤 대통령과 문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느냐,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아무리 밀턴 프리드먼 책을 가지고 입으론 자유주의를 말해도 행동은 자유주의가 아니지 않나. 리버럴한 이들 유권자를 끌고 갈 정도의 힘이라면 이준석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당 안에 함께 있지 못하고 쫓아내니 이길 수가 없다.”   박 교수는 2016년 총선이 정당과 유권자 간 안정적이고 장기적 관계 맺기가 흔들린 순간(realignment·리얼라인먼트)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민주당에 변함없이 강한 지지를 보내는 4050세대가 인구학적 다수를 점하면서다. 그는 ‘보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현석·이재묵 교수도 비슷한 인식이다. 실제 2008년 총선 이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작아졌다(18대 153석→151석→122석→103석→108석). “이번에 수도권에서 살아남은 후보들을 보면 다 중도에 가깝다. 보수정당이 어떻게 가야 할지 방향은 나와 있다”(박현석), “수도권 중심, 앞으로 성장할 세대 중심으로 노선을 재정비해야 하는데, 자꾸 선거 결과가 영남 쪽으로 국한된다. 대통령도 위기의식을 느끼면 대구 서문시장에 가지 않나”(이재묵)라고 했다.   4·10총선 지역별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 결국 정권심판 선거가 됐다.   이재묵=“총선을 통해 지역구에서 4년간 제대로 일했는가를 보고 잘한 사람은 더 칭찬해주고 못 한 사람은 벌해야 하는데 대통령에 대한 불만, 중간평가의 수단으로만 온전히 써버리게 되니까 결과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은 다 표출됐지만, 유권자들 입장에선 지역구 의원들을 평가할 기회는 다 사라진 셈이 됐다.”   임유진=“의회 정치를 잘하는 나라를 보면 대부분 의원이 선수(選數)가 높다. 우린 공천에서 제일 마이너스 되는 게 선수였다. 이들의 전문성은 무시되고 윤석열·이재명과의 관계만 남아 아쉽다. 학생들에게 진짜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박원호=‘전국 선거’가 돼, 로컬(지역구) 이슈들은 다 사라져 버리게 됐다. 전국 선거 프레임은 여당엔 절대로 유리할 수 없다. 지지율 36%짜리 대통령의 코테일(coattails, 선거에서 같은 당의 후보자들을 함께 당선시키는 대통령이나 유력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해볼 수 있는 게 없다.   윤 대통령은 정치인 되길 꺼린 것 같다.   박원호=“아직 정치인이 아닌 듯하다. 용산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걱정스럽다.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게 정치도 전문직이란 거다. 대통령만 아니라 국회의원도 몇 선씩 한 사람들은 전문직이다. 입법도 나름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다. 물갈이의 이면엔 막대한 코스트가 있다.”   한 위원장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나.   박현석=“신선했고 팬덤이 있었지만, 대세를 어찌 해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정치인으로 훈련받지 않아서 국가 비전이 없다 보니 (한 위원장에게서) 나오는 말들이 다 민주당을 공격하는 것들이었다. 그게 여당 포지션이면 표를 얻기 힘들다. 당으로 봐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한동훈 개인으로 보면 고생스럽긴 했겠지만, 정치가 정말 힘듦을 크게 깨달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본다.”   이재명 대표는 초유의 거대 여당 대표지만 사법 리스크는 여전하다. 사법부가 고민하게 될 듯하다.   박원호=“이 대표가 잘해서 압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본인이 선택한 거다. 만약 대통령의 비토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200석을 넘겼다면 훨씬 더 압박·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이 대표가 정치력이 있다면 당장 무엇을 한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 결과가 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당연히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문제를 옆으로 제쳐놓으면 이 대표로선 급할 게 없다. 기다리고 있으면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박현석=“8월이면 전당대회다. 조국혁신당이 있고 전대를 하게 되면 강성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이 있기에 이 대표에게도 기회가 있을 수 있으나, 이 대표도 반대보단 국가를 끌어갈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대안도 비전도 꼭 제시해야 한다.”   임유진=“대항하고 적대하면서 자신의 힘을 키워왔기 때문에 180석 가까운 걸 이끌며 더 커지고 더 싸우게 될까 걱정이다.”   박원호=“민주주의가 존속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제도적 인내’다. 권력의 자기 자제다.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데 무력화하지 않는 것 내지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울 수 있음에도 여당 등 다른 정당과 협력해 진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야권의 압승에 조국 대표가 결과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다. 12석의 대표가 됐는데 그가 정치적 용서를 받았다고 보나.   이재묵=“지지를 확인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4050에선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일부 조사를 보면 20대에선 0% 나왔다. 안티테제로만 어필했다. 다음 대선을 생각하려면 분명 확장성이 있어야 한다.”   박원호=“어떤 연구자가 카톡으로 ‘도덕성에는 유효기간이 있는 것 같다’고 보내왔더라. 측은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걸로 정치적 미래, 대선주자까지 갈 수 있느냐, 전 지금은 좀 아닌 것 같다.”   이번에도 거대 양당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우회해 위성정당을 만들며 비례의석을 대거 휩쓰는 폐해를 보였다. 동시에 민주당·국민의힘의 득표율은 5.4%포인트 차에 불과했으나 지역구 의석은 71석이나 차이 나는 비례성 문제도 여전했다.   위성정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박원호=“위성정당은 제도를 해킹한 것이다. 원래 멸칭(蔑稱)인데 이젠 준위성정당이란 희한한 얘기까지 한다. 병립형보다 지금이 더 나쁜 것 같다. 지역구 정당은 위성정당 여러 개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수 있었다. 이번 선거사에 기록될 것 중 하나는 정의당 계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의석 획득 기준인 3%에 미달한) 2.14%였다. 위성정당 안에 안 들어가서 그런 건데 안타까운 일이다.”   박현석=“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게 비례성 높은 선거제가 필요하고 소수의 목소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게 하려는 거였는데 둘 다 실패한 셈이 됐다. 양당 간 불비례성이 정치를 나쁘게 만드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비례의석을 넓혀가면 군소 정당의 진입 장벽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희망한다.”   단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싸우는 게 정치를 나쁘게 한다는 점에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려면 개헌해야 하지만.   박원호=“대선뿐 아니라 지역구 선거까지 결선투표하자고 말해왔다. 지금은 유권자들에게 0 또는 1의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게 돼 있는데 그거 말고도 다른 옵션이 많다는 걸 알려야 한다. 결선투표하는데 150억~200억원이 든다고 하는데 갈등을 더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쓰는 건 별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구조적으로 손대기 어렵게 돼 있다. 정권 초기엔 누구도 안 하려고 한다.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려나. 뭔가 판을 흔들고 싶다면 꺼낼 수도 있긴 하겠다.”   이재묵=“선거도 선거지만 다들 대통령제에 문제 있다는 걸 안다. 제로섬이다. 상대 진영의 대통령이 성공하면 나의 집권 기회는 줄어드는 거니, 협치보단 상대가 잘 안 되어야 하는 게 구조화되고 있다. 그간 불행한 대통령이 많았다. 정치인들이 이제는 여야 할 것 없이 권력구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4.13 00:01

  • 죽은 반려견 빼닮은 인형 만들고 동물 복제까지 시도

    죽은 반려견 빼닮은 인형 만들고 동물 복제까지 시도

     ━  펫로스 증후군 앓는 반려인 급증   펫로스 “털뭉치 모아놓은 병을 매일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아직은 보낼 때가 아니잖아요.” 10년간 함께했던 반려견 ‘싼쵸’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낸 지 20일이 지났지만 여느 때처럼 집에 보관 중인 유골함 앞에 밥도 주고 물도 준다. ‘싼쵸 아빠’ 강성일(41) 반려동물장례연구소장 얘기다.   지금까지 1만2000여 마리의 장례를 도왔던 그는 지난 7일엔 자신의 아이를 직접 염했다. 강씨는 그때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너무 힘들었다. 손쓸 새도 없이 떠나 버려서….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복제라도 하고 싶었다.” 지난 1월 심장병을 앓던 반려견 ‘기동이’를 보낸 정소현(30)씨도 16년간 동고동락한 기동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씨는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며 힘들어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면서 ‘펫로스 증후군(반려동물 사별 후 겪는 우울감)’을 호소하는 반려인들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 결과 2022년 반려동물 양육 인구는 602만 가구에 1306만 명으로 집계됐다. 네 가구 중 하나는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얘기다. 지난 23일 ‘국제 강아지의 날’엔 페북에만 축하 기념글이 150만 개나 게시되는 등 반려동물은 이제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KB경영연구소 조사에서도 반려인의 81.6%가 ‘반려동물은 가족’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문제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펫팸족’이 늘어나면서 사별에 따른 후유증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북대병원 정운선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8월 국제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반려동물과 사별한 지 1년 미만인 반려인의 79%가 중증 이상의 우울감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포메라니안 ‘코난이’를 떠나 보낸 김모(34)씨도 “사고로 죽을 뻔했을 때 코난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그런 생명의 은인이 먼저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며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이처럼 펫로스 증후군을 겪는 반려인들이 늘면서 인형 제작이나 음악·미술 치료 등 우울감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코난이 아빠’ 김씨도 최근 인형을 주문했다. 사진만 보내면 똑같은 외형으로 제작되고 생전의 수염과 털도 심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김씨는 “코난이와 너무 똑같이 생겨 받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말했다. 인형 제작자 김설아씨는 “지난해엔 주문이 두세 배 늘면서 연 200개 이상 판매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최근엔 펫로스 극복을 위해 ‘동물 복제’까지 시도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연초엔 한 유튜버가 복제한 반려견 영상을 올리자 찬반양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최근 인터넷 카페엔 반려동물의 체세포 채취 및 보관 방법을 묻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현재 국내법상 동물 복제는 합법·불법 여부에 대한 법조항조차 전무한 상황에서 국내외 복제 업체에 개별적으로 의뢰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반려동물에서 채취한 체세포는 액화질소로 냉동 보관해야 하는 등 보관 비용만 1년에 최대 1000만원 들고 복제 비용도 견종에 따라 6000만원에서 최대 1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도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와 관련,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최근 유튜버가 의뢰한 복제 업체를 고발했다. 조 대표는 “복제하려면 최소한 대리모견 10마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측면도 문제점 중 하나로 지목된다. 조 대표는 “생명윤리적으로 동물도 인간과 동등하게 봐야 하며 따라서 동물 복제가 수단화돼선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래 반려동물과 성격 등이 결코 똑같을 수 없다”는 것도 반대 이유로 꼽힌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동물 복제는 ‘copy’가 아니라 ‘cloning’의 개념으로, 기존 반려동물과는 사뭇 다른 유전형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심할 경우 예상치 못한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찬성 쪽 목소리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펫로스 증후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행복추구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한재언 변호사는 “동물의 생명도 소중한 건 맞지만 헌법상 인간과 동등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며 “현행법상으로도 인간의 행복추구권이 우선돼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박세필 제주대 줄기세포연구센터장도 “반려동물을 난치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이 없으면 반려인들의 심적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며 복제 찬성 입장을 밝혔다. 그는 “최근엔 복제 기술의 일환으로 맞춤형 세포를 생산해 반려동물의 난치병 치료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며 “이 같은 연구와 기술 축적은 인간의 행복추구권 보호를 위해서도 권장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반려인 1300만 명 시대’를 맞아 ‘반려동물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를 둘러싼 논란이 더 이상 소모적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하루속히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강성일 소장은 “이젠 가족처럼 받아들여지는 반려동물의 죽음을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한 변호사는 “난자 채취 시 학대, 기형아 처분 문제, 대리모견 복지 등에 대한 법 조항이 우선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3.30 00:41

  • 미래의 북망산 경제학, 의료 서비스 편차 따라 값 달라져야

    미래의 북망산 경제학, 의료 서비스 편차 따라 값 달라져야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6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가 생중계 되고 있다. [뉴스1] 저마다 벼슬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김창업)    조선시대 김창업이라는 선비가 지은 시조다. 혹시 시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면 북망산(北邙山)은 중국 낙양성의 북쪽에 위치한 산인데, 낙양 사람들의 묘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유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묻힌 곳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학생 시절 참으로 운치 있고 나름의 철학이 담긴 시조라 생각해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의술보다 치료비 없어 북망산행 많아   하지만 현재 의사 증원을 두고 갈등이 첨예한 대한민국의 경제학 전공자로서 이 시조를 다시 읽어보면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우울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안동 김씨 권세가의 집안에 태어나 형제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했지만 초야에 묻혀서 글과 그림을 즐겼다는 김창업이 살았던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20세기만 해도 사람이 죽어서 북망산에 묻히는 이유는 의사가 병을 고치지 못해서였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해서 평범한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사람이 언제 죽는가는 당연히 병을 못 고치는 의사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의학의 발전은 정말 눈부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내 집안만 봐도 할아버님은 20대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 형제분들도 4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는데 아버님과 어머님의 형제분은 모두 건강하게 80대 인생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부모님의 형제분들이 모두 병에 한 번도 안 걸린 것은 전혀 아니다. 20세기라면 손도 대지 못할 중병에 걸렸다가 치료받고 살아난 분들도 몇 분이 계시다. 시대를 잘 타고 난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100세까지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게 됐다. 문제는 의학이 발전해 의원이 병을 아주 잘 고치게 되었고 앞으로 미래에는 더욱 의학이 발달할 것이지만 여전히 인간은 죽어서 북망산에 묻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북망산에 묻히는 책임은 사람들의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경제 전문가가 오롯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경제학과 교수인 내가 의대 정원을 놓고 전 국민이 고통을 겪는 현 상황에서 김창업의 시조를 보면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국내 최초로 세브란스에 도입돼 치료를 시작한 중입자가속기는 가격이 3000억원이라고 한다. 수술을 하지도 않고 몸 안의 암세포만 골라서 1분 정도 만에 태워 없애는 꿈의 치료기라고 하니, 미래에는 암으로 죽는 사람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에 수천만원이 들어가는 치료비용이다. 이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학의 문제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도 국내 최고 수준의 병원이 있다. 같은 교수이지만 의과대 교수님들을 보면 존경심이 든다. 65세 정년퇴임 날까지 매일 7시 이전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치열하게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의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전공하기를 백 번 잘 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물론 의대 교수님들의 연봉은 나보다 높지만 근무 시간과 스트레스를 고려하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오히려 의대 교수님을 보고 안쓰러운 기분이 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문제는 모두 잘 알고 있는 저렴한 의료 수가이다. 환자 한 명당 진료와 치료를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 국민건강보험에 의해 낮게 규제되고 있기 때문에 병원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마치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듯이 5분마다 한 명의 환자를 보아야 하는 형편이다. 각각의 환자들은 개인적으로 정말 중대한 병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인데, 5분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해야 한다니 나라면 아무리 큰돈을 주더라도 거절할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 의사들은 이런 일을 척척 잘 해낸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도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학생이 유학을 오는데, 이들이 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서는 모두 칭찬 일색이다. 이렇게 빨리 예약이 가능하고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해주면서 의료비는 깜짝 놀랄 수준으로 저렴한 것에 놀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내가 유학했을 때의 일이다.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치통이 있어서 재학하던 하버드대 보건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두 가지 측면에서 깜짝 놀랐다.   우선 치과 치료실이 너무 깨끗했다는 것이다. 의자와 치료 기구가 모두 비닐로 싸여 있었고 마치 우주복 같은 옷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내가 예약된 30분을 꽉 채워서 치료를 받고 나자 간호사가 들어와 의자와 치료 기구를 싸고 있던 비닐을 모두 벗겨내고 다음 환자를 위해서 새로운 비닐을 씌웠다. 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치과는 그야말로 5분에서 10분 만에 환자를 받아서 치료했고, 앞의 환자에게 썼던 치료 기구를 다시 나를 치료할 때 사용했다. 역시 의료 선진국은 다르다는 사실에 우선 한 번 놀랐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치료를 마치고 나오던 나는 치료비 청구서를 보고 하늘이 무너질 만큼 놀랐다. 한국의 치과에 비해서 미국 치과의 진료비가 10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후 나는 치통이 있더라도 참다가 여름 방학에 한국에 들어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치과 치료의 위생도 중요하고 품질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이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한국의 의료 설비나 위생 수준은 미국에 비해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가격은 훨씬 저렴하다. 그것은 뛰어난 인재들이 의대에 진학해서 엄청난 기술과 효율성으로 진료와 치료를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품의 품질은 높고 가격이 저렴하면 사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지는 반면, 만들어도 이윤이 별로 남지 않기 때문에 팔려는 사람은 줄어 공급 부족이 발생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원리인데 대한민국 의료 산업에도 이런 경제학은 정확히 적용된다.   현재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진료 분야의 의사 공급 부족 현상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에 추진하는 의대 정원 증가는 의사 공급을 늘린다는 점에서는 경제학적 해결 방안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대 정원의 증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논리도 경제학과 부합하는 점이 있다.   최고 서비스 받으려면 높은 가격 치러야   현재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은 소수 정예를 선발해 양성하는 시스템이다. 마치 모든 군인을 특전사 수준으로 양성하는 것과 같다. 개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 입대를 시켜서 특전사 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시키는, 소수 정예의 의사가 전 국민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모든 의사들은 상당히 높은 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정원을 늘리면 더 이상 모든 구성원을 정예 멤버로 육성할 수 없게 된다. 아마 현재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마음에는 앞으로 엘리트 의사만 육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이로 인해 평범한 의사가 배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의료계의 우려는 맞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하다. 우선 맞는 점은 앞으로는 소수 정예 엘리트 의료인만 육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전사 대원도 있지만 평범한 보병 소총수도 나타날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런 의료계의 우려는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소수 정예로 계속되면 특정 지역이나 특정 분야에서 진료를 아예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의료 서비스의 품질에 편차가 생겨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   반면 의료계의 우려가 틀린 점은 의료 서비스 품질의 편차가 생기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고 우려만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 아파트에는 고급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상당히 살고 있지만 나는 20년 된 국산차를 아직도 타고 있다. 물론 나도 외제차를 타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 기꺼이 감수한다. 옷이나 음식이나 이 세상의 모든 상품에는 품질의 격차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감수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료 서비스 품질의 격차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가격의 격차이다.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고 비싼 첨단 의료 장비가 도입되면서 모든 사람이 저렴한 가격에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로도 가능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력이 뛰어난 의사의 진료비가 평범한 의사의 진료비와 같도록 유지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을 아주 기초적인 의료비를 제공하고 그것을 초과하는 고가의 진료와 치료는 개인이 선택적으로 부담하는 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미래의 북망산을 책임져야 하는 한 경제학자의 생각이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3.30 00:25

  • 일본, 물가 뛰고 임금 올라 웃지만…근본적 체질 개선은 미지수

    일본, 물가 뛰고 임금 올라 웃지만…근본적 체질 개선은 미지수

     ━  ‘닛케이 4만 시대’ 계기로 본 일본 경제   지난달 24일 대만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제1공장 준공식을 개최했다. 연내에는 인근에서 제2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AP=연합뉴스] “마침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다카타 하지메 일본은행 정책 심의위원)   일본 정부가 2001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공식화한 이후 23년 만에 ‘디플레이션 탈피’를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등 일정 정도 ‘선순환’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본은행(BOJ)이 내달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 정부와 BOJ는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려면 2% 이상의 물가 상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 등으로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전년 대비 3.1% 상승하며 1982년 이후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저로 인한 기업 수출 증가와 함께 임금 인상도 이어져 1990년대 자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 했던 초기 요인이 하나 둘 해소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적지 않다며 섣부른 기대감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   일본 닛케이지수 추이 긍정적 시그널은 일본 경제 곳곳에서 감지된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임금이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오르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일본 기업은 2020년 이후 임금을 매년 3% 이상 올렸다. 지난해 인상률은 평균 3.58%로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올해 임금 인상 목표를 1992년 이후 최고 폭인 ‘4% 초과’로 정했다. 일본 최대 대형마트 ‘이온 몰’은 올해 정규직 임금을 7% 인상하기도 했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서는 소비 물꼬를 터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 인상은 필수”라며 “임금 인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강한 의지 속에 기업 임금이 3년 연속 상승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엔저 효과로 수출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수시장 침체가 이어지고 있어 기업 경영환경은 좋지 않은 편이다. 이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 인상이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기업도 ‘소비→투자→경기 회복’ 사이클을 되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임금과 함께 물가가 상승한 만큼 일본의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했다. 그러나 물가만 뛴 한국과 달리 물가·임금이 동시에 오르면서 일본 경제에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실제 미즈호리서치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2023년도 임금 증가율은 전년 1.9%에서 2%대 중반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임금 증가에 따라 소비지출은 0.6%, 국내총생산은 0.4%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올해 임금 인상률은 지난해보다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소비와 국내총생산이 더 뛸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2024년 전망 보고서에서 “2024년 일본 민간소비는 물가상승세 둔화와 임금 인상에 따라 완만하게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증시가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것도 임금 인상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기면서 개인 투자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 증시 투자 환경도 좋아졌다. 지난해 시행한 기업 밸류업 상승 프로그램이 본격화하고 있고, 올해 1월에는 소액투자비과세제도(신NISA)가 개편돼 세제 혜택 폭도 커졌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3개월간 도쿄증권거래소 프라임(최상위)시장의 매매 동향을 보면 개인 투자비중이 19%에서 25%로 증가했다”며 “NISA 관련 거래대금은 지난해 11월 5조 엔 수준에서 올 1월 61조 엔 규모로 대폭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기업으로도 자금이 몰리고 있다. 코로나19 당시 디지털 후진국이란 수모를 겪은 일본은 2022년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내놓고 반도체·2차전지와 같은 미래산업은 물론 관련 스타트업 집중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2027년까지 스타트업 투자액 규모를 10조 엔(약 89조원)으로 늘리면서 10만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창출하고, 100개를 유니콘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영향으로 스타트업 투자가 증가세다. 일본 스타트업 시장조사업체 이니셜은 “세계적인 투자 혹한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신규 벤처캐피탈과 신규 펀드 결성액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반도체의 경우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곳곳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1조엔(약 8조9215억원)을 들여 일본 구마모토현에 제1공장을 짓고 지난달부터 웨이퍼 양산에 돌입했다. 규슈경제조사협회에 따르면 TSMC 공장 준공에 따른 경제 파급효과가 10년간 20조 엔(약 178조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또 미쓰비시전기는 1000억 엔을 들여 구마모토현 생산 거점에 전기차용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고, 반도체 대기업 롬도 미야자키현 반도체 공장을 올해 말 가동할 예정이다. 도요타·키옥시아 등 일본 대기업이 설립한 파운드리 업체 라피더스는 지난해 홋카이도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 “2027년까지 10만개 스타트업 창출”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임금이 뛰고 기업 투자가 늘면서 지난해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속보치)은 1.9%를 기록하며 25년 만에 한국 성장률(1.4%)을 앞질렀다. 그러나 최근의 이 같은 일본 경제의 긍정적 변화가 꾸준히 이어져 근본적인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당장 지난해 4분기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로이터통신은 이에 대해 프랑스 크레디 아그리콜은행의 아이다 타쿠지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말을 인용해 “글로벌 성장 둔화와 국내 수요 부진 등으로 올해 1분기 일본 경제가 다시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저출산·초고령화 등으로 일본의 노동생산성이 바닥권을 맴돌고 있는 것도 전문가들이 일본 경제를 낙관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2022년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0위로 197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1980년대까지만 해도 4%대였던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2023년 0.25%까지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7일 “일본 정부가 출산율, 노인 노동 참가율 등이 오르지 않으면 내년부터 2060년까지 실질 GDP 성장률이 연평균 0.2%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고강도 저출산·초고령화 대책을 시행 중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7일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출생아 수(속보치)는 전년보다 5.1% 감소한 75만8631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까지 8년 연속 감소하면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김주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가 ‘이제는 (생산인구 부족)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노동 인구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일본은 특히 외국인 노동자 중 고임금 인재뿐만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까지 정착해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향후 일본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고,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관건”이라면서도 “일본 경제가 살아난다는 건 거꾸로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일본 경제 회복을) 지켜만 보고 있어선 안된다”고 설명했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4.03.09 00:40

  •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  정치인들이 전통시장 찾는 까닭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마포구 망원시장. 신수민 기자 “우리 시장님 하나 잡으시고, 이 회장도 잡으시고…. 아주머니, 저거 빈대떡 아닌가요?”   지난해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부산 국제시장을 찾아 떡볶이 접시를 집으며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전통시장 방문이 더욱 잦아졌다. 지난해 11월 7일(대구 칠성종합시장)부터 지난달 26일(충남 서산 동부시장)까지 9곳을 오갔고 지난달에만 5곳을 찾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도 앞다퉈 전통시장을 찾고 있다.   관련기사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총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전통시장을 향한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지고 있다. 전국에서 전통시장이 가장 많은 서울(189곳), 그중에서도 중구(50곳·1위)와 종로구(30곳·2위) 전통시장엔 후보들의 방문이 온종일 끊이질 않고 있다. 부산(160곳)과 대구(107곳)도 만만찮다. 후보들 대부분은 “민심 청취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치인들은 왜 선거 때만 되면 이처럼 전통시장으로 향하는 걸까. 전통시장 대신 대형마트를 찾으면 안 되는 걸까. 전통시장이 대체 뭐길래.   #민심의 바로미터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5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서울 경동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70여 년 전, 전통시장을 찾은 정치인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1월 30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현장을 방문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피해액은 14억300만원. 1952년 한국 정부 세출 결산액인 206억원의 7%에 달하는 규모였다. ‘대한늬우스’ 제79보를 보면 이 전 대통령은 1956년에도 국제시장을 찾았다. 하재근 사회문화평론가는 “한국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 그중에서도 피란민이 모여 대한민국 재건의 상징이 된 국제시장을 면밀히 챙길 필요를 느꼈을 것”이라고 짚었다. 민심을 살피고 달래려는 행보였다는 분석이다.   대통령기록관 사진과 동영상을 들춰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3월 5일 서울 길음시장에서 상인들과 순대에 소주를 곁들이고 있다. 대통령의 음주 장면은 흔치 않다. 하 평론가는 “전통시장에서의 민심 청취 행보라는 컨셉이라 (음주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최근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자신을 드러낼 매체가 진화하면서 전통시장에서의 정치인도 ‘그림’이 잘 나오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5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광주 양동시장을 각각 방문해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 대선 출마선언 전 “시장에서 오뎅(어묵) 먹는 것 같은 쇼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한 달여 만에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먹방’을 찍었다. 지난 대선 먹방을 삼갔던 이재명 대표도 최근에는 떡볶이를 마다치 않는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장 먹방’을 대선 홍보 영상으로 삼았다. 2008년 3월 9일 자양동 골목시장을 찾아서는 떡을 건네는 상인의 손을 덥석 잡아 입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재래시장이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차별화 정책이 필요하다”면서다. 2013년 실시된 대형마트의 ‘새벽 영업금지’와 ‘매달 이틀 의무 휴업’ 규제는 이미 이때부터 이 전 대통령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 전 대통령에게 전통시장은 민심 청취의 장이자 대선 공약이었던 ‘재래시장 활성화’를 재확인하는 곳이었다. 제도 시행 후 10년. 전통시장은 과연 활성화됐을까.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대형마트는 2013년 33조9000억원에서 2022년 34조8000억원으로 지난 10년간 10%에 가까운 매출 성장세(9.7%)를 보였다. 반면 전통시장은 같은 기간 1502곳에서 1388곳으로 114곳(7.6%)이나 줄었다. 그 사이에 이커머스는 거래액이 38조5000억원에서 209조9000억원으로 5배 넘게 급성장했다. 중대형 식자재 마트들도 의무 휴업 도입 이후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우리마트의 경우 2022년 2024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2013년 371억원에 비해 5배 넘게 증가했다. 업계에선 “대형마트와 전통시장 경쟁의 진짜 승자는 ‘제 3지대’인 이커머스와 식자재 마트”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당초 의도대로라면 대형마트 규제로 소비자는 불편해야 하는데,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불편하지 않다”는 응답이 65%에 달했다. 이에 더해 대구·청주·고양시 등 일부 지자체는 최근 조례 개정을 통해 대형마트 휴무일을 공휴일에서 평일로 옮겼다. 정부도 지난 1월 22일 대형마트 공휴일 의무 휴업을 폐지하기로 했다. 관련 개정안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윤 대통령은 사흘 뒤인 지난 1월 25일 의정부 제일시장을 찾아 어묵을 먹었다. 소상공인들은 정부의 대형마트 규제 해제 방침에 반발했지만 시장은 북새통이었다. 상인 윤모(56)씨는 “30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린 건 처음 봤다”고 했다. 하 평론가는 “정치인들의 전통시장 방문엔 지지층 결집 의도가 담겨 있다”며 “지지자들도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서 선거가 임박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왜 대형마트는 좀처럼 들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대형마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강자’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에서 어느 정치인이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겠느냐”며 “대신 서민과 중산층을 두루 접할 수 있는 전통시장의 방문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종로구 광장시장.신수민 기자 “재래시장이요? 전통시장 아닌가요?”   유지현(27·경기도 고양시)씨는 재래시장이란 단어를 낯설어했다. 문헌상 우리나라 시장 전통은 490년 시작됐다. 신라 소지왕 12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화를 통하게 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1500여 년. 그새 태어난 시장들은 재래시장과 전통시장으로 뒤섞여 불리고 있다. 정치인들도 현장 방문 중에 구분 없이 부르고 있다. 국어사전은 재래시장을 ‘예전부터 있어 전해져 내려온 시장’으로 풀이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제정된 ‘시장 규칙’이 대한제국 시대까지 지속돼 온 시장을 ‘재래시장’으로 정리한 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2009년 ‘공식 용어’가 바뀌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에 찾았던 자양동 시장의 상인이 “재래시장이란 용어의 어감이 안 좋다”고 하자 “재래시장 대신 전통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1년 뒤인 2009년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은 ‘전통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으로 바뀌었다. 김도형 지방행정연구원 센터장에 따르면 재래시장이란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강해 이름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전통시장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공식 용어를 바꾼 한국 전통시장은 이후 ‘여행 성지’로 떠올랐다. 최근엔 MZ세대나 외국인들이 전통시장을 찾아 SNS에 인증샷 등을 올리면서 방문객과 매출액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수준을 회복하는 추세다. 정부는 ‘K-관광 마켓’과 관련해 전통시장 버킷 리스트 10곳을 뽑기도 했다. ▶서울 풍물시장 ▶인천 신포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 ▶광주 양동전통시장 ▶수원 남문로데오시장 ▶속초 관광수산시장 ▶단양 구경시장 ▶순천 웃장 ▶안동 구시장연합 ▶진주 중앙·논개시장 등이다.   그중 대구 서문시장과 광주 양동시장은 정치인들에겐 영호남 전통시장의 상징이자 ‘성지’로 통한다. 이 대표는 지난달 5일 양동시장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렀던 국밥집에서 노 전 대통령이 국밥을 먹었던 자리에 앉았다. 한 위원장도 같은 날 서울 경동시장을 찾았는데 당내에선 “우리도 서문시장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 평론가는 “정치인들에겐 대구 하면 서문시장이고, 광주 하면 양동시장”이라며 “기왕에 갈 거면 그 지역에서 가장 어필할 수 있는 시장과 장소를 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저렴하다”고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과연 쌀까.   #물가의 바로미터   최근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서울의 전통시장들. 동대문구 경동시장. 신수민 기자 “소비자들은 가격 비교도 ‘전통시장 대 대형마트’를 원합니다. 저희도 양쪽의 품질을 맞춰 비교 가격을 제시합니다.” 이동훈 한국물가정보 팀장의 말이다. 한국물가정보는 최신 물가를 반영해 명절 차례상과 김장 비용 정보 등을 제공한다. 전통시장에서의 구매비가 대형마트보다 항상 4만~5만원 적게 나온다. 올해 정월대보름 오곡밥·부럼 차림 가격도 전통시장은 13만1600원, 대형마트는 17만1480원이었다. 이 팀장은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물건 품질이 전통시장은 대체로 ‘일률적’인데 대형마트는 ‘다양화’돼 있어서, 같은 수준으로 맞추다 보면 대형마트 비용이 좀 더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에서 파는 돼지머리고기. 김홍준 기자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대형마트를 선호할까. 주부 곽모(53)씨는 “편의성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리서치 소비자 인식 조사에서도 접근성, 환불·교환, 친절도 등에서 대형마트가 앞섰다. 곽씨는 “전통시장은 신용카드 사용 제한, 주차장 불충분, 정찰제 미정착 등 불편한 게 많다”고 설명했다. 1인 가구주인 김명선(29)씨도 “전통시장에선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팔아 돈도, 상품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적잖다”고 했다. 한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대형마트 휴무일에 전통시장을 이용한다고 밝힌 응답자는 11.5%에 불과했다. 반찬거리는 전통시장이 싸지만 군것질거리는 비싸다는 평도 있다.   일각에선 정치인들의 전통시장 방문을 ‘구태’라고 꼬집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익히 알면서도 전통시장을 외면하지 못하는 건 전통시장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특히 떡볶이·어묵·순대를 많이 찾는다. 하 평론가는 “이곳저곳 빨리 들러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수를 먹자니 시간이 걸리고 남기면 ‘친서민’에 반하는 거고. 그러다 보니 ‘패스트푸드’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처럼 대형마트에 밀리면서도, 숫자가 줄면서도 전통시장은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논리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문화가 담겨 있고, 만남이 이뤄지며, 정서가 순화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을 넘어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시장(市場)이라고 부른다. 윤 대통령이 어묵을 먹었던 의정부 제일시장 분식집 사장이 말했다. “민심이고, 물가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우리 서민들에겐 시장이 곧 인심(人心)이죠.”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4.03.02 00:34

  •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광장 정량표시제, 경동은 청년몰 조성…카드 결제 늘리고 배송 서비스도 시작

    서울 광장시장에서 파는 순대. 신수민기자 “모둠전과 순대는 안 먹었어요. 비싸잖아요.”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안시은(20)씨는 “가격 논란이 거셌던 메뉴라 아예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 타키(24)도 “광장시장은 재밌는 곳”이라면서도 “무슨 음식인지 잘 모르겠는데 값도 비싸 주문을 꺼리게 되더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중순 ‘1만5000원짜리 순대 모둠전’ 논란이 SNS를 뜨겁게 달군 지 100일. 중앙SUNDAY가 다시 찾은 광장시장은 2030세대부터 고령층에 외국인 관광객까지 몰려 여전히 붐비는 모습이었다. 한 점포에 들어가 보니 순대 1인분에 8000원. 포장해 무게 측정기로 중량을 재보니 520g이었다. 김지희(64)씨는 “아이고,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순대가 16점이니 하나에 500원이네”라며 놀라워했다.   관련기사 “그림 되고 친서민 이미지 부각”…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앞다퉈 시장 먹방 비교를 위해 서울 주변 전통시장 6곳을 함께 찾아가 봤다. 경동시장·광장시장·남성시장·아현시장·의정부 제일시장·통인시장 등을 둘러본 결과 순대 1인분 가격은 4000~8000원으로 시장마다 제각각이었고 광장시장 가격과도 차이가 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양이 적거나 같은 양인데 다른 곳보다 더 비쌀 경우 소비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며 “몇몇 상점의 과도한 가격 설정은 다른 상인들뿐 아니라 시장 전체 이미지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6곳 전통시장 모두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것도 여전했다. 계좌 이체를 해야 했고 일부 점포는 아예 현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상인들은 현실적인 고충을 호소했다. 광장시장에서 10년째 호두과자를 팔고 있는 한 상인은 “카드를 받고 싶어도 웬만한 점포는 사업자 등록이 안 돼 있어 단말기를 놓을 수 없는 실정”이라며 “소비자들도 불편하겠지만 우리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그런 가운데 변신을 꾀하려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바가지요금’ 논란 이후 “이대로 가다가는 시장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면서다. 당장 광장시장은 지난해 12월부터 ‘정량표시제’를 시범 도입했다. 시장 상인회도 카드 결제 활성화를 위해 상인들의 사업자 등록 절차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상인들도 친절 서비스를 다짐하고 나섰다. “이랏샤이마세, 오이시이오이시이(어서오세요, 맛있습니다).” 희끗한 머리의 나이 지긋한 상인이 광장시장에서 일본어로 손님을 끌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메뉴판과 간판에도 외국어가 추가됐다. 옛날 과자 판매점을 운영하는 백정순(66)씨는 “관광객 안내 필수 용어로 일본어·중국어·영어 등 3개 국어를 익히고 있다”며 “자꾸 까먹긴 하는데 이렇게라도 노력해야 손님이 더 찾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관광 명소로 소문난 맛집은 입장 예약 서비스도 도입했다. 한 일본인 관광객은 “예능 프로 ‘런닝맨’에 나온 육회 음식점을 찾아 왔는데, 줄이 길 줄 알았더니 대기 시스템이 있어서 편리했다”며 반겼다. 시장 자체적으로 체험 콘텐트를 만들기도 했다. 종로구 통인시장에선 ‘엽전 도시락’을 체험하려는 2030세대로 붐비고 있었다. 현금을 엽전으로 바꾼 뒤 식판을 들고 각 점포의 대표 음식을 엽전으로 구입하는 식이다. 시설 현대화에도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경동시장의 경우 시장 안에 청년몰도 따로 조성해 MZ세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동작구 남성시장은 프랜차이즈 마트처럼 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남성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우리 시장은 야채와 과일·정육 등 1차 식품이 인기가 높은 만큼 이런 장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점포마다 배송 서비스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하고 있다”며 “맞벌이 부부 등 유동 인구가 많은 동네 특성상 배송 서비스를 활성화할수록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문가들은 전통시장의 이 같은 변신 노력이 효과를 거두려면 보다 적극적인 지원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장흥섭 전 한국경영교육학회장(경북대 명예교수)은 “전통시장은 결국 상인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며 “지자체도 시장 현대화는 물론 각기 다른 지역적 특색을 잘 살려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2024.03.02 00:23

  • ‘현대판 도적떼’ 월스트리트, 미 정부가 세금 쏟아 돕는 까닭

    ‘현대판 도적떼’ 월스트리트, 미 정부가 세금 쏟아 돕는 까닭

     ━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월스트리트 지구상에 인류가 등장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최초의 인류는 무정부 상태에서 살았을 것이다. 정부가 없다는 것은 법도 없었다는 뜻이므로 폭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더라도 말릴 사람도 없고 죄책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인간들은 서로 지켜야 할 법을 만들고, 이 법을 집행할 정부를 만들어서 폭력 대신 윤리와 법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   최초의 정부, 도적떼가 세웠다고 생각   과연 최초의 정부와 법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경제학에서는 최초의 정부를 만든 사람은 ‘도적떼’였다고 생각한다. 법과 정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도적이나 강도를 잡아서 처벌하는 것인데, 그 법과 정부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사실 도적떼였다는 것이 진실일 수 있을까? 독자들이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과거 원시 인류가 농사와 목축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발생한 직업이 있었을 것인데 바로 도적질이다. 열심히 곡식을 재배해 수확하고 양과 돼지를 키우는 성실한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반대로 이런 사람의 곡식과 가축을 훔쳐서 편하게 먹고 살고자 하는 집단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도적떼 중의 한 패거리를 흑곰파라고 부르겠다. 흑곰파는 한강 주변에서 농민에게 강제로 곡식을 뺏는 나쁜 도적떼였다. 그런데 가을 어느 날 흑곰파 도적들이 한 마을로 곡식을 뺏으러 갔는데, 곡식이 한 톨도 없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당황한 흑곰파 두목이 농민들에게 이유를 묻자, 얼마 전 백호파라는 도적의 무리가 마을에 쳐들어와서 수확한 곡식을 다 뺏어 갔다는 것이다.   백호파나 흑곰파나 같은 도적질을 하는 동종 직군이므로 백호파의 이런 행동을 흑곰파가 좋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흑곰파는 마치 자신의 곡식을 백호파가 뺏어간 것 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백호파가 계속해서 한강 유역의 농민들의 곡식을 뺏어 가면 흑곰파는 뺏을 곡식이 없어서 도적질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아마 흑곰파는 농민들에게 백호파 도적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물은 후 뒤쫓아 가서 백호파를 급습하고 농민들의 곡식을 다시 뺏어 왔을 것이다. 이렇게 백호파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흑곰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힘이 없는 농민을 노리는 도적떼가 한둘이 아닌데 앞으로 다른 도적떼에게 농민들이 곡식을 뺏기는 일이 계속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트레이더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경제학자들이 생각했을 때 흑곰파 두목은 결국 농민들을 다른 도적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사를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강 유역의 농민들을 밤낮으로 지키면서 다른 도적떼로부터 보호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보호하는 농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농민들의 생산이 늘어나야 흑곰파도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므로 농민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매년 적당량의 곡식만 빼앗고 농민들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흑곰파에게 곡식을 뺏기는 농민 입장에서도 여러 명의 도적떼들에게 번갈아 곡식을 뺏기기 보다는 사정을 봐가면서 곡식을 뺏어 가면서 한편 다른 도적들을 막아주는 흑곰파에게 의지하는 것이 현실적인 최선의 방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수확한 곡식의 일정 양을 흑곰파에게 매년 자발적으로 주게 되었을 것인데, 이것이 아마도 세금의 시초였을 것이다. 당연히 흑곰파는 얼마 후 도적떼가 아닌 정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말이다.   경제학에서는 농민과 도적처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주체도 오랜 기간 관계가 지속되면 오히려 협력을 하게 된다는 현상을 ‘반복 게임(repeated game)’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관계의 상대방이든 지속적으로 교류하게 되면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이라는 말처럼 협력으로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와 메인스트리트(Wall street vs. Main street)의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금융위기로 미국 금융 회사가 밀집한 뉴욕 월스트리트가 파산의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의 부유한 금융 기관을 정부의 돈으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금융 기관이 아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메인스트리트가 반기를 들고 항의를 했던 현상이다.   도덕적, 논리적으로는 메인스트리트가 옳다. 동네 마을의 공장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 정부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해당 사업이 실패한 것은 해당 사업의 종사자들이 잘못 운영했기 때문이니 국민의 혈세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인스트리트의 공장은 결국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의 부유한 금융가들이 무모하고 위험한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것인데, 미국 정부가 국민의 혈세로 이 금융기관을 도와서 파산을 막았으니 메인스트리트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메인스트리트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심지어 자신의 돈으로 투자를 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반인의 돈을 받아서 위험한 곳에 투자를 한 후 잘 되면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은 엄청난 수수료를 받는 반면, 투자가 실패하면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손해는 고스란히 메인스트리트의 일반인이 감수해야 하니 괘씸하다면 괘씸한 집단이 바로 금융권인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권은 현대판 도적떼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주장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이런 괘씸한 월스트리트를 돕는 데는 이유가 있다.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단순히 월스트리트만 파산하는 것이 아니라 메인스트리트에 위치한 일반 공장이나 가게도 모두 파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의 정부들이 금융권에 더 신경을 쓰고 지원해주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인류의 고령화 현상이다.   과거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인류가 생산에 종사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퇴직한 후 불과 몇 년 안에 병으로 사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60세 생일인 회갑을 맞이하면 오래 수명 장수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노후 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 사망하기 직전까지 생산 활동으로 돈을 벌다가 죽었을 테니 늙어서 살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은 지나친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의학의 발전으로 100세까지 사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만큼 퇴직 후 오랜 기간 생존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져서 더 이상 생산활동으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의식주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상당한 병원비를 감당하면서 10년 또는 20년 이상 살아야 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돈이 돈을 벌게 하는 곳이 월스트리트   경제학적으로 보면 더 이상 몸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젊어서 저축한 돈으로 돈이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노후생활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돈이 돈을 버는 것을 하는 곳이 바로 월스트리트 즉, 금융권이다. 금융권은 일반인이 저축한 남의 돈으로 투자해서 이익이 발생하면 중간에서 떼어서 빼돌리는 도적떼와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 나의 귀중한 돈을 잘 투자해서 노후에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주식 투자를 전혀 하지 않는 일반인이라도 아마 국민 연금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이 국민연금의 대부분이 주식 시장에 투자돼 있으므로 나의 노후는 금융권과는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대로 금융권 측면에서 일반인은 단기적으로는 각종 이자와 수수료를 뜯어낼 수 있는 대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금융권이 지나치게 이익을 챙기면 일반인들이 금융권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므로 오히려 일반인들이 투자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서 다시 금융권에 투자해야 장기적으로 금융권도 더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는 밸류업(value up)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을 성장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밸류업 프로그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견 금융권에 지나친 혜택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정책이 실행돼야 한다. 그리고 금융권이 이런 프로그램을 악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길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흑곰파와 농민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법과 정부를 만들어서 서로 도왔듯이 반복 게임의 교훈인 적과의 동침을 통해서 고령화 사회의 노후 대비를 금융권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3.02 00:11

  • 중처법 시행 확대 유예 주장에 노동계·야당 “불안감 과장, 처벌 더 강화해야”

    중처법 시행 확대 유예 주장에 노동계·야당 “불안감 과장, 처벌 더 강화해야”

    14일 수원시에서 열린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촉구 결의대회에 참석한 중소기업인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29일 임시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중소업계를 중심으로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 확대 시행을 유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도 2월 임시국회에서 유예안을 통과시킨다는 입장인 반면, 노동계와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와 경영계가 과도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소건설단체와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등 중소업계는 이달 들어 전국에서 릴레이 결의대회를 벌이고 있다. 19일에는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 호남권 30여 개 중소기업단체와 중소기업인 5000여 명이 모여 ‘50인 미만 사업장 중처법 유예’를 촉구했다. 1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2월 14일 경기도 수원에 이어 세 번째 결의대회다.   참석자들은 “준비 기간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리한 법 시행으로 현장에 혼선을 주고 영세 기업인을 예비 범법자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강창선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장은 “중처법을 없애 달라고 호소하고 싶지만 법이 이미 만들어졌으므로 이를 준수할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준비 안 된 법 적용에 불안·체념, 정부 안전 컨설팅도 감감 “무전유죄법 될 우려, 엄벌이 정의라는 도그마 벗어나야” 여당도 중처법 유예안 재논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3일 2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안을 처리할 것을 더불어민주당에 요구했다. 2월 임시국회 일정상 법안을 처리하는 본회의는 29일 오후 2시에 열린다.   이에 맞서 ‘처벌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노동계의 움직임도 한층 활발해지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는 울산고용노동지청 앞에서 12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 사고와 관련, 경영책임자 구속·처벌과 부실한 관리감독의 책임을 묻기 위한 기자회견을 했다. 금속노조 측은 “안전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무재해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의 발단이 된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인 김미숙 생명안전행동 공동대표도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죽음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며 정치권의 유예 움직임을 비판했다.   정부와 경영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광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업안전보건본부 본부장은 15일 서울에서 열린 중대재해전문가넷 심포지엄에서 “지난해 동네 빵집과 카페가 속한 음식·숙박업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자 수는 4명에 불과하다”며 정부와 경영계가 과도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와 경영계는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으로 동네 빵집, 카페 사장들이 처벌받을 것처럼 말하지만 99%가 이와 무관하다”며 “과도한 불안감 조성은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업계의 유예 주장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29일 본회의에서 중처법 적용 유예 법안이 처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국회 안팎의 평가다. 이달 초 중처법 관련 협상 결렬 직전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시행된 법을 다시 멈춘다는 것은 원칙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다만, 일각에서는 총선 직전임을 감안, 자영업자와 서민의 표심 이탈을 우려한 야당이 다시 테이블에 앉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24.02.24 00:52

  • 준비 안 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 불안·체념, 정부 안전 컨설팅도 감감

    준비 안 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 불안·체념, 정부 안전 컨설팅도 감감

     ━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한 달] 시화·반월산단 르포   21일 경기 반월·시화 산업단지에 위치한 한 제조업체 공장에서 지게차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공된 부품을 운반하고 있다. 이곳 산단에 입주한 기업 95%는 지난달 27일을 기점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 됐다. 최기웅 기자 19일 찾은 경기도 시흥·안산시 일대 시화·반월산업단지는 코를 찌르는 화학약품 냄새와 청력 보호구 없이는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2년 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수출문이 닫혀 도로 곳곳을 도배하던 ‘공장 임대’ 현수막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27일 5인 이상~50인 미만 기업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 적용 한 달을 맞는 이곳의 분위기는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1970년대 수도권 중소형 공장들이 대규모 이전하면서 조성된 이곳은 국내 소재·부품·장비산업을 이끌며 한국 제조업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국내 뿌리산업(제조업의 기본이 되는 주조·금형·용접 등의 기초 제조업)의 본고장답게 굳게 자리를 지켜왔다.   관련기사 중처법 시행 확대 유예 주장에 노동계·야당 “불안감 과장, 처벌 더 강화해야” “무전유죄법 될 우려, 엄벌이 정의라는 도그마 벗어나야” 그런 이곳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한 건 지난달 27일 중처법이 50인 미만 기업으로 확대 시행된 이후부터다. 시화·반월산단 입주 기업 중 94.7%가 50인 미만으로 지난달 27일을 기점으로 중처법 대상 기업이 됐다. 이에 따라 업체 대표 등 사업주는 ▶재해 예방에 필요한 안전보건 관리체계와 ▶재해 발생 시 대책을 구축해야 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알아듣기도 힘든 법 지키라니 난감”   이 법은 ‘처벌’만을 규정한 법으로 중처법 대상이 되면 어쨌든 중처법상 안전보건 관리 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자의 사망이나 동일 사고로 인한 부상이 발생할 경우 대표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법안 확대 시행 이후 한 달이 거의 다 됐지만 이곳의 많은 기업 대표들은 “중처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우리 같은 작은 기업도 해당이 되냐”고 되물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반월산업단지 초입을 지키고 있는 K산업 서모(59) 대표는 “뉴스에서 몇 번 (중처법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는데, 10명 남짓 일하는 우리 회사에서도 준비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며 기자의 설명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간 정부나 유관단체로부터 안내문조차 받아본 적 없다는 답변도 돌아왔다. 서 대표는 “매달 직원들을 대상으로 안전교육을 하고 있고, 작업 시 안전용구를 착용하도록 지시하는데 뭘 더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정부는 중처법 확대 시행에 맞춰 중소기업의 예방 컨설팅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이곳까지는 손길이 닿지 못한 것이다. 실제 19일에 이어 21일에도 이곳을 찾아 곳곳을 살폈으나 산업단지 어디에도 중처법 시행과 관련된 안내문이나 현수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중처법 대상이 된 건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 손을 놓고 있다는 반응도 많았다. 이곳에 긴장감이 감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처법상 처벌만 있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라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처법 제4조 제1호는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 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 조치’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 법 그 어디에도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법이 없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가 50인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방대한 법 준수사항’(54%, 복수응답) 때문에 법 대처가 어렵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30년째 도금업체를 운영하는 김모(65) 대표는 “직원을 다치게 만들어 처벌받고 싶은 사장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공장마다 환경이 다 다르니 뭐가 위험하고 뭐가 필요한지 매뉴얼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중처법에 대처하려 로펌 등 법률적 자문을 구한 업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종합건설업체를 운영하는 D공영 김모(64) 대표는 “우리처럼 상수도 공사, 콘크리트 공사, 건물 건설 공사를 한꺼번에 하는 업체는 사업장마다 적용해야 하는 안전기준이 다 다르다”며 “(컨설팅을 요청하려) 기관마다 물어봐도 담당자마다 대답이 다 달라 어떤 기준을 세워 안전관리자를 고용하고, 처벌에 주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수십 곳의 공사현장을 한 명의 대표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관리하라는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2년간 준비한 업체도 “빈틈 있을까 불안”   실제 제조·건설업 현장에서는 업종별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일률적 처벌 규정에 재해방지 대책을 세우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가령 조선업이나 건설업의 경우 고공에서 추락할 위험이 높아 낙상 위험을 막는 것이 중요하고, 화학물질을 다루는 곳에서는 화상이나 가스 흡입 사고, 제조업에서는 끼임, 절단 등의 위험이 가장 높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하지만 현행 중처법에는 업종별 관리체계가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대표 입장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대처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길은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업장마다 모두 상황이 다르다 보니 현장에서는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지 판단하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감독관조차 판단 기준이 달라 안전장치를 마련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며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하면서도 어느 업장에는 1개 규정이, 어느 업장에는 10개 규정이 적용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미숙한 준비로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주 입장에선 휴업 또는 폐업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도 사업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50인 미만의 중소기업 대표는 직함은 사장이지만 부족한 인력 탓에 영업, 공장 운영, 기계 가동, 경영관리 등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예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중처법 처벌 대상이 되면 유·무죄를 떠나 소송 과정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2년부터 지난해 8월 말까지 입건된 중대재해법 위반 사건의 처리 기간은 평균 215.9일, 최장 477일이었다.   수사 결과 내사 종결에 그치더라도 해당 업체 대표는 1년 가까이 조사를 받으며 사업을 끌고가야 하는 셈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현행 중처법에는 ‘일정 수준의 예방조치를 취하면 면책한다’는 규정도 없어 어디까지 예방을 해야 할지 파악해 대처하기 어렵다”며 “대기업의 경우 안전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조치를 취할 수 있겠지만, 상황이 어려운 중소기업은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법안 개정과 더불어 구체적인 이행 내용을 담은 시행령이나 대통령령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같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50인 미만 기업의 중처법 시행을 유예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용윤 동국대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중처법의 기본 목적은 중소기업이 아니라 중대 규모 사업장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며 “20인 미만이나 1억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건설업)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것은 법안 체계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높은 형량으로 기업주에게 공포감만 퍼트리는 만큼 무작정 법안을 적용하기보단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의 기준규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2년가량 추가 유예 기간을 두고 명확하지 않은 법안을 수정해 실효성 있는 법안을 만드는 것이 이 법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길 위원은 “운전면허를 보유한 모두를 동일한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보단, 자주 규정을 어긴 사람을 대상으로 보다 엄격하고 강력한 처벌 규정을 만드는 것이 안전수칙 준수에 효과적”이라며 “산재처리, 안전관리규정 등을 잘 준수해왔던 업체까지 단순히 사업주라는 이유로 잠재적 범법자로 뭉뚱그려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2022년 법 시행 이후 약 2년간 안전관리를 위해 컨설팅을 받았던 H콘크리트 제조업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코로나19 위기도 악착같이 버텨 이겨냈는데, 중처법에는 속수무책입니다. 2년간 준비했는데도 혹여 빈틈이 있을까 불안한데,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제발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달라는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오유진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4.02.24 00:51

  • “무전유죄법 될 우려, 엄벌이 정의라는 도그마 벗어나야”

    “무전유죄법 될 우려, 엄벌이 정의라는 도그마 벗어나야”

     ━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한 달   19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에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중대재해처벌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법이 될 수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 적용이 상시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된 데 대해 “중대재해 관련 처벌이 대기업이 아닌, 중소업체 최고경영자(CEO)에 집중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중처법은 애초 대기업을 처벌하고자 하는 것이 취지지만, 실상은 중소업체 사장 처벌에 치우칠 것이라는 우려다. 중처법 도입 이전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중소기업의 경우 대부분 CEO가 처벌됐으나, 대기업 CEO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구성요건, 위법사실에 대한 증거 부족 등으로 인해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이에 중처법 제정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2022년 1월 중처법 도입 이후에도 이전부터 기소가 집중됐던 중소업체 책임자 처벌에 치우치고 있다. 실제 중처법 도입 후 지난달까지 검찰에 의해 기소된 37건(급성중독 1건, 사망 30건) 중 대기업(근로자 1000명 이상)은 1곳뿐이다. 지난달부터 50인 미만 중소업체로 확대된 만큼 영세 사업자가 처벌 받을 우려는 더 커졌다. 정 교수는 “유·무죄 판결 여부를 떠나 수사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영세 기업엔 큰 타격이 될 수 있고, 이는 기업 도산이나 사업 위축으로 이어져 결국 근로자와 취약계층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처법 유죄 판결 14건 모두 중소기업   ‘엄벌이 곧 정의’라는 도그마(독단적 신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벌을 강화한 중처법이 실시된 이후인 2022년 산업 현장 사망 사고 발생 현황을 살펴보면,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자 수는 248명에서 256명으로 되레 증가했다. 2023년 3분기(누적)까지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망자 수는 192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0명 감소했다. 정 교수는 “지난해 재해 사망사고의 절반을 차지하는 건설현장이 반토막 나고 제조업 생산이 크게 위축됐던 점을 고려하면, 이 법은 중대재해를 줄이기는커녕 늘리는 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관련기사 준비 안 된 법 적용에 불안·체념, 정부 안전 컨설팅도 감감 중처법 시행 확대 유예 주장에 노동계·야당 “불안감 과장, 처벌 더 강화해야”   중처법 도입 후 2년을 평가한다면. “안전 역량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산재예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정비할 노력은 하지 않고 엄벌주의로 상황을 회피하고 있어서다. 현재 우리나라 안전 분야 행정인력은 전 세계 독보적인 수준이다. 근로자 1만명당 미국의 8배 이상, 일본의 4배 이상이다.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산재예방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산재예방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봐야 하지 않나. 중처법은 안전평가서나 관련 인원과 조직을 두는 등 형식적 안전에 치중돼 있다. 정작 실질적 안전 예방 조치는 뒷전이 될 수 있다.”   중처법에 의한 예방 효과는 없나. “중처법으로 경영진의 안전 의욕을 고취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안전 역량을 키우기 위한 실질적·실효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중처법은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과 안전을 강화하는 것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엄벌주의로 따지면 중국, 북한, 아랍권이 산재예방 선진국이 됐어야 한다.”   한국경제학회도 지난달 ‘중처법은 재해를 감소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사업주와 CEO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사고가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박재옥·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처벌보다 경영진이 직원들의 근무나 일 처리 방식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느냐가 사고 증감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됐는데. “50인 미만 사업주는 자포자기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처법의 큰 문제는 예측과 이행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기 어렵다. 안전을 강화하려는 노력보다 감독기관과 수사기관에 잘 보여 처벌을 피하는 쪽에 돈과 역량이 몰리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익부 빈익빈이다. 중소기업은 로펌 등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칼날이 중소기업에 집중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중처법 확대 적용 이전에도 중처법상 유죄 판결이 난 기업 14곳이 모두 중소기업이었다.”   중처법은 어떤 점에서 지키기 어려운가. “가령 A기업에서 엘리베이터 유지보수 업무를 B업체에 맡겼다고 치자. 사고가 나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답은 그때그때 다르다이다. 여론의 비난이 몰리거나 기업 규모에 따라 책임 여부가 달라지기도 하고, 두 업체 모두 책임이라고도 한다. 외부 업체의 안전 업무에 대한 평가도 해야 하는데, 우리 회사도 우리 직원도 아닌데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 주무부처(고용노동부)에 물어봐도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현실적인 규정도 문제다. 일례로 기계가 오작동하는 경우나 테스트가 필요하다면, 기계를 무조건 정지하도록 한다. 그런데 오류를 잡아내거나 테스트를 위해선 기계를 작동시켜야 하지 않나. 이런 경우에도 사고가 발생하면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고 처벌할 수 있다.” 수사기관 자의적 법 집행·남용 우려도   대구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은 19일 성명을 통해 “중처법 시행 2년이 넘도록 시행규칙조차 없다”며 “시행령은 있지만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무슨 조치를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두루뭉술한 법령 탓에 중대재해 적용 여부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된 만큼 영세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정부 차원의 안전시스템 구축 등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처법의 안전 강화 취지를 살리려면 어떤 개선이 필요한가. “범죄구성 요건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중대재해 예방에 효과적이다. 지키기 어려운 법을 만들어놓고 엄벌을 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법에 대해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법 해석이 모호하다보니 수사기관의 자의적 법 집행과 남용도 우려된다. 기업체의 경우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수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큰 타격이다. 이로 인해 기업이 도산하거나 위축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취약계층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도 많다. 의무 주체나 법령이 중복되거나 충돌하는 중처법으로 이중 규제하기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기본법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처법의 취지를 일부 반영해 개정해야 한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4.02.24 00:48

  • 1000조원 미래 먹거리, K배터리 비상등 켜졌다

    1000조원 미래 먹거리, K배터리 비상등 켜졌다

     ━  K배터리 비상등, 출구는 없나   지난해 수주 잔고 1000조원을 돌파하며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차세대 먹거리로 부상한 K배터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글로벌 전기차수요 둔화 속에 지난해 4분기부터 배터리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데다 중국의 전기차 공습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고, 일본이 배터리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등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점유율 1·4·5위 기업인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의 지난해 4분기 합산 매출은 16조7030억원으로 3분기(17조3443억원) 대비 3.7% 감소했다. 매출이 크게 줄진 않았지만 리튬·니켈 등 핵심광물 가격이 내려가면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다. 3사의 지난해 4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6314억원으로 3분기(1조1411억원) 대비 44.7% 급감했다. SK온은 4분기 186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경기 불황과 각국의 보조금 삭감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글로벌 전기차 수요가 꺾이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인도량은 1406만대로 전년 대비 33.4%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22년 61.3%의 반토막이다. 그러다 보니 배터리 사용량도 지난해 38.6% 증가에 그쳤다(2022년엔 71.8% 증가). 수요가 가라앉은 가운데 공급 측면에선 설비 증설이 본격화하면서 단기적으로 배터리 공급망 전체에서 과잉 우려가 커진 상태다.   관련기사 신산업 성장통 ‘캐즘’ 앓는 K배터리…기술·공정 내실 다질 하늘이 준 기회 문제는 글로벌 전기차 수요가 회복된다고 해도 K배터리의 경쟁력을 장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CATL과 BYD 등 중국의 배터리 업체가 자국 전기차를 앞세워 K배터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와 전기차를 만드는 BYD는 지난해 4분기 미국 테슬라를 제치고 글로벌 전기차 판매 1위를 달성했다. BYD는 특히 내수시장은 물론 일본·태국·스웨덴 등지에서도 전기차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  미국 압박, 일본 반격, 전고체 개발 경쟁…3대 난제 넘어야 K배터리 재도약 길 열린다     중국의 1위 2차전지 제조업체 CATL이 지난해 8월 선보인 전기차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10분 충전으로 400㎞를 갈 수 있다. [신화통신=뉴시스] 이 덕에 CATL과 BYD(배터리)는 지난해에만 각각 전년 대비 40.8%, 57.9% 성장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 2위를 차지했다. CATL은 중국 전기차 브랜드뿐 아니라 테슬라 모델3·Y, BMW iX, 메르세데스 벤츠 EQS 등 글로벌 자동차에도 배터리를 공급하면서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도 1위 LG에너지솔루션을 바짝 뒤쫓고 있다. 전기차 수요가 살아나면 K배터리 판매량도 늘어나긴 하겠지만, 중국 업체의 시장 잠식이 더 가파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런데, 진짜 문제는 전기차 수요 회복이 아니라는 분석들이 나온다. 중국을 견제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불똥이 K배터리로 옮겨 붙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3사는 배터리 제조의 핵심광물 대부분을 중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IRA 규제 시행으로 중국산 핵심광물을 공급받아 만든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몰락한 듯 보였던 ‘배터리 종주국’ 일본의 최근 기세도 심상찮다. 소재·부품·장비 기술력을 앞세워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나서고 있다.   특히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경쟁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K배터리를 한국의 흔들림 없는 먹거리로 만들기 위해선 컨트롤타워 설립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현재 배터리 산업은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으로 나뉘어 부처 간 이해관계에 따라 비효율적으로 육성되고 있다”며 “미국의 에너지부처럼 통합 조직을 만들고 전문 인력을 투입해 꾸준히 정책을 발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중국 견제한 미 IRA 세부 규정 암초    현재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장악한 국가는 중국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생산량은 705.5GWh(기가와트시)로, 그중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6곳(CATL·BYD·CALB·궈시안·EVE·신왕다)이 중국 업체다. 6곳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63.5%에 달한다. 자동차 등의 자국 산업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는 한편 중국을 집중 견제 중인 미국으로선 달가울 리 없다. 미국 내 인플레이션 완화가 목적이지만 이런 배경 속에서도 나온 게 2022년 발효된 IRA다.   IRA를 통해 미국 정부는 배터리의 핵심광물과 부품이 일정 요건을 충족하고,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 한해 최대 75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정 요건’이란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기업이 부품은 올해부터, 핵심광물은 내년부터 미국 정부가 외국우려기업(FEOC)으로 지정한 곳에서 조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보조금 지급 규제 강화로 기업의 가격 인하 경쟁이 심화되는 셈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난해 12월 발표한 IRA 세부규정안에서 사실상 중국 내 모든 기업을 FEOC로 정했다. 이로써 미국에서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차종이 지난해 말 43개에서 올해 19개로 줄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문제는 한국 기업이 조달 중인 핵심광물의 대부분이 중국산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배터리 핵심광물의 중국산 수입 의존도가 ▶수산화리튬 84% ▶수산화코발트 69% ▶황산코발트 97% ▶황산망간 97% ▶탄산망간 100% 등으로 매우 높다(2021년 기준). 결국 중국산 핵심광물 수입 최소화가 필요한데, 이는 기존 공급망을 완전히 흔드는 일이라 1년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업계는 난색을 표한다.   지난달 2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관보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미국 정부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IRA로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차종이 하나도 없는 현대자동차그룹은 “흑연 등 특정 핵심광물에 대한 FEOC 규정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해 달라”고 밝혔다. 중국은 2022년 세계 구형흑연(흑연 광석을 가공한 중간 원료)의 100%, 합성흑연의 69%를 생산했다. 다른 국가들이 단기간에 그 역할을 대체하기 힘든 사정을 참작해 달라는 논리다.   SK온 역시 “중국산 흑연을 대체할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최소 3~4년이 걸리고, 그렇게 해도 북미 수요를 전부 감당하기 힘들다”며 핵심광물에 대한 FEOC 규정 적용을 2027년 1월로 2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핵심광물 총 가치의 10% 미만을 차지하는 저(低)가치 재료는 규정에서 예외로 해 달라”며 코발트와 형석 등을 저가치 재료로 제시했다. 하지만 의견이 수용될지는 미지수인 데다, 수용돼도 한시적 조치일 뿐이다.   비상이 걸린 기업은 다각도로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 SK온은 최근 미국의 웨스트워터리소스와 2027~31년 미국산 천연흑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캐나다의 일렉트라와 2025~29년 황산코발트 공급 계약을, 칠레의 SQM과 2029년까지 리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SDI는 아예 해외 광산 업체를 인수해 니켈 일부를 확보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그러나 여전히 중국산을 대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공학부 교수는 “미국은 올해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돼도 여론을 고려해서 IRA를 폐기하기 힘들 것”이라며 “기업이 공급망 다각화에 계속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소·부·장 경쟁력 앞세운 일본의 추격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도요타 전기차. [사진 도요타] SNE리서치에 따르면 10년 전인 2014년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점유율 1위 국가는 일본이었다. 당시 사용량 기준 71%로 한국(17.3%)과 중국(9.6%)을 크게 앞섰다. 하지만 이후 중국의 대규모 투자, 한국의 기술력 확보와 원가 절감 등에 밀려 일본은 시장에서 밀려났다. 지난해 글로벌 점유율이 CATL(36.8%)와 BYD(15.8%), LG에너지솔루션(13.6%)에 이어 4위를 기록한 파나소닉(6.4%) 정도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일본이 최근 권토중래에 나선 정부와 기업의 과감한 투자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 중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도요타의 배터리 사업 투자에 보조금 1200억 엔(약 1조700억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도요타가 추산한 해당 사업 규모의 40%에 달하는 액수다. 또 최근 외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 산하의 일본개발은행(DBJ)은 반도체와 배터리 등 국가 경제 안보에 필수인 산업 분야에 향후 2년간 1500억 엔(약 1조3300억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아티언스 등 자국 기업의 배터리 소재 생산 확대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아울러 파나소닉은 지난해 연매출 11조원의 자동차 부품 생산 자회사를 매각한 자금 5조원을 배터리 사업 강화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과감한 투자로 옛 영광을 되찾는다는 일본의 자신감은 배터리 산업의 근간인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유지 중인 강력한 경쟁력에서 비롯된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분석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기술 수준을 100%라고 봤을 때 한국은 96%, 중국은 82.5%로 각각 0.5년과 2년의 기술 격차가 있다.   일본은 소·부·장에서, 한국은 패키징(양산 기술)에서 각각 우위를 점했는데 전체적으로 일본의 기술력이 조금 더 우세하다고 보는 것이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는 “일본은 시장점유율 반등이 아직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1991년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 양산과 상용화에 성공했고 삼원계·흑연 음극재 같은 배터리 관련 주요 신기술을 만드는 등 언제나 선도적 위치에 있었다”며 “이를 중심으로 언제라도 다시 경쟁에서 치고 올라올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는 도요타·혼다 등 막강한 자동차 기업들과의 시너지 효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도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로 배터리의 소·부·장 경쟁력은 과거보다 강화됐다. 소재에선 에코프로비엠이 배터리의 출력을 결정하는 양극재 분야에서 글로벌 1위 생산력을 확보했고, 포스코퓨처엠은 배터리 충전 속도를 결정하는 음극재 분야 글로벌 5위다. SKIET는 양극과 음극이 닿지 않도록 막아주는 분리막 분야에서, SK넥실리스는 음극재 코팅 재료인 동박 분야에서 각각 글로벌 1위다. 장비에선 디이앤티와 에이프로 등이 주목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럼에도 개선점이 적잖다. 예컨대 에코프로비엠은 부채비율이 지난해 상반기 155.6%, 포스코퓨처엠은 지난해 3분기 133%에 달하는 등 공격적 투자 과정에서 재무구조 악화로 투자 확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가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는 것처럼 배터리 산업에서도 생산 보조금을 지급하고, 세제 혜택을 주는 등의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기업 전략 설계 전문가인 설명환 펄스 대표는 “배터리는 결국 재료 중심의 과학 분야”라며 “한국이 지금처럼 패키징 분야에서만 강점을 보인다면 앞으로 배터리 산업에서 현재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소·부·장 분야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  ‘게임 체인저’ 전고체 시장 선점 경쟁   최근 배터리 업계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 경쟁에 전념 중이다. 중국이 주도한 가격 인하의 ‘치킨 게임’으로 악화한 경쟁 여건을 개선시킬 ‘게임 체인저’로 여겨서다. 전고체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 사이 전해질이 액체 아닌 고체로 된 2차전지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2차전지인 LI는 액체 전해질인데, 가연성 물질이라 고열에 폭발할 위험성이 크고 수명도 짧은 편이다. 반면 고체 전해질은 구조적으로 안정돼 충격에 의한 누액 위험성이 작은 편이다.   이 때문에 화재 방지 부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그 공간에 배터리 용량을 향상시키는 소재를 사용하는 식으로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도 있다. 따라서 고체 전해질로 바꾸면 폭발 위험 최소화는 물론 전기차의 경량화와 주행 거리 향상까지 기대할 수 있다. 성장세 둔화 우려가 나오는 기존 배터리 시장과는 달리, 전고체 배터리 시장은 2022년 글로벌 2750만 달러(약 370억원) 규모에서 2030년 400억 달러(약 53조4600억원) 규모로 급성장할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SNE리서치).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이에 각국은 전고체 배터리의 상용화와 시장 선점에 사활을 걸었다. 중국에선 정부 주도로 전고체 배터리를 상용화하기 위한 연합체 ‘CASIP’가 최근 결성됐다. CATL과 BYD, CALB 등이 참여해 2030년까지 중국에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성공하고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목표다. 우양 밍가오 중국 칭화대 교수는 현지 언론에 “전고체 배터리 기술이 배터리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국을 뒤집을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일본보다 속도전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니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중국 기업이 보유한 전고체 배터리 관련 특허는 아직 100건 미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요타만 해도 관련 특허 1300건 이상을 확보했다. 도요타는 내년 자사 하이브리드 전기차에, 2026년 순수 전기차에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하고 2027년부터는 전고체 배터리를 대량 생산할 계획이다. 여기에 대만도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달 24일 외신에 따르면 대만 업체 프롤로지움테크놀로지는 대만 타오위안에 전고체 배터리 공장을 준공하고 양산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목표한 초기 생산력은 전기차 1만4000대에 탑재될 수 있는 연간 0.5GWh 규모다.   한국에선 삼성SDI가 전고체 배터리 개발 경쟁에 가장 앞선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SDI는 지난해 국내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 시제품을 생산, 4분기 일부 고객사에 제공했다. 2027년 상용화가 목표다. 또 조직 개편을 통해 전고체 배터리 전담 조직(ASB사업화추진팀)을 신설했다. SK온은 미국의 솔리드파워와 기술 이전 협약을 체결하면서 속도전에 가세했다. 2026년 시제품 생산과 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차세대 배터리 파일럿 라인을 올해 대전에 완공할 예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30년까지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관건은 이들 기업이 상용화에 성공하더라도 유의미한 수율(투입 숫자 대비 완성된 양품(良品) 비율)을 얼마나 빨리 달성할 수 있느냐다. 기업들이 수율 안정화를 위해 초기 전고체 배터리에 약간의 액체 전해질을 첨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경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에너지저장연구센터장은 “시중 전기차에 실제 탑재되려면 목표한 시점보다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성능을 최대한 유지하되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난제”라고 분석했다. 이창균·오유진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4.02.17 01:35

  • 신산업 성장통 ‘캐즘’ 앓는 K배터리…기술·공정 내실 다질 하늘이 준 기회

    신산업 성장통 ‘캐즘’ 앓는 K배터리…기술·공정 내실 다질 하늘이 준 기회

     ━  K배터리 비상등, 출구는 없나   이상영 교수 “지금은 한국 배터리 업계가 내실을 다질 적기다.” 한국 배터리 업계의 산증인 이상영 연세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과 생산량, 점유율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기술 차별화로 우위에 서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기차 수요 부진으로 실적이 악화하고 있는 배터리 업계가 이른바 ‘죽음의 계곡’(신기술을 사업화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을 지나는 동안 기술 개발에 매진하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전기차 수요 부진과 미국·일본·중국에 둘러싸인 지금은 위기이자 한국 배터리가 성장할 기회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덕에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만큼 전폭적인 기술 개발과 정부의 지원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1997년부터 2008년까지 LG화학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며 국내 배터리 산업에 토대를 닦은 국내 ‘배터리 1세대’ 개발자다. 유니스트(UNIST) 교수를 거쳐 지금은 연세대에서 이차전지연구센터장을 맡아 LG에너지솔루션을 포함한 국내 기업들과 함께 배터리 연구의 최전선을 지휘하고 있다. 14일 이 교수를 화상으로 만났다.   중국에 따라잡힌 한국 상당히 위험   현재 한국 배터리 산업을 총평한다면. “배터리 산업의 원년 멤버 중 한 명이지만, 그 누구도 이 산업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현재 기술적인 측면에선 우리나라만큼 인정받는 나라는 없다. 지금은 모든 신산업이 겪는 ‘캐즘’(기술 혁신이 대중화로 이어지기 전 나타나는 일시적인 정체)을 겪고 있다고 본다. 성장을 위해 겪어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상향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다만, 몇 년 새 배터리 산업이 우리 역량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커져 내실을 다질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 바로 신기술 개발, 공정 최적화 등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다. 하늘이 준 기회다.”   관련기사 1000조원 미래 먹거리, K배터리 비상등 켜졌다 중국이 빠르게 따라오고 있다. “중국의 발전 속도가 빠른 것은 사실 우리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처음 배터리를 개발할 때 일본에서 소재를 수입했는데, 단가만 생각하다보니 중국 소재 업체와 손을 잡아 기술을 전수해줬다. 뼈아픈 실수다. 그때도 분명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했었는데 어김없이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았다. 리튬인산철(LFP)의 경우 우리는 등한시했지만 중국이 주도권을 잡는 바람에 우리가 따라가는 꼴이 돼버렸다. 한국에선 1년이 걸리는 걸 중국은 한 달이면 한다. 리튬이온의 경우도 기술력이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다.”   일본까지 가세하고 있다. “일본은 배터리 종주국이지만, 일본은 전기차 연구를 막 시작하던 시절 ‘리튬이온은 절대 전기차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리튬이온 개발에서 뒤쳐졌으니 뒤늦게 전고체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우리를 위협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메이저 플레이어도 다 도산하지 않았나. 다만 소재 쪽은 다르다. 소재 측면에서는 여전히 일본에 알짜배기 기업들이 있기 때문에 견제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의 경쟁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배터리 업체의 성과를 평가할 때 흔히 생산량과 시장 점유율을 지표로 사용한다. 생산량이 많으면 좋겠지만 굳이 생산량으로 1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짜놓은 판에 들어가 같이 경쟁하는 건 어차피 쉽지 않다. 어느 정도 생산량은 확보하되, 마진이 많이 남는 구조로 가는 게 오히려 낫다. 자동차 업계로 비유하자면, 중국산 자동차가 아닌 BMW나 메르세데스 벤츠, 제네시스 등과 같은 프리미엄을 지향하자는 뜻이다. 점유율이 낮아도 품질이 좋으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다. 다만 프리미엄 라인만 고집하라는 건 아니다. 고가·저가 라인을 함께 가져가면서도 기술력을 높이는 게 핵심이다. 배터리 3사의 최고경영자(CEO) 또한 점유율을 늘리기보다는 기술 차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 갈래 따로노는 R&D 일원화 절실   전고체 배터리는 ‘게임 체인저’가 될까. “전고체에 대한 일부 오해가 존재한다. 전고체를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데, 전고체는 넓은 의미의 차세대 배터리를 하나의 용어로 포장한 것이다. 배터리 개발자들의 지향점일 뿐이지 진짜 꿈의 배터리인지는 아직 모른다. 짧은 기간 내에 구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아니다.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목표로 삼되, 연구 여정에서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며 여러 길을 시도해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전고체보다 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정부 지원도 필요해 보인다. “기업이 원하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줬으면 한다. 지금은 대학, 출연연, 기업 간 칸막이가 있어 연구·개발(R&D) 비효율만 커지고 있다. 중국처럼 전폭적인 지원이 어렵다면, 업계 최전선에 있는 기업이 원하는 개발 과제를 발굴해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술 공개와 같은 딜레마가 있을 수 있기에 대승적 결단이 필요할 거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2차전지 육성을 위한 대학 지원도 대폭 확대해야 한다. 똑똑한 학생들이 대거 2차전지 산업으로 유입되어야 기술 차별화가 가능하고, 국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지금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정말 이 산업이 중요하다면 정부에 ‘2차전지 특위’를 만들어서라도 힘을 실어줬으면 한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4.02.17 01:01

  • 가덕공항, 이주 대책 없는 질주…흑산공항은 '80인승'에 붕 뜨나

    가덕공항, 이주 대책 없는 질주…흑산공항은 '80인승'에 붕 뜨나

    가덕도공항 부지인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동 대항마을. 외양포마을과 새바지마을도 공항이 들어서면 사라진다. 마을 뒤로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연대봉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여기 죄다 할매들이야. 새로 어디 가서 제대로 살지 모르겠네.”   지난 8일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 섬 남쪽 끝머리 외양포마을 이성태(70) 이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 가덕도를 비롯해 길게는 2032년, 짧게는 2027년 개항을 목표로 진행 중인 신공항 사업은 현재 8개. 총사업비만 25조원에 달한다. 기존 공항 15곳과 차별화를 위해 ‘신(新)’을 붙이고 일각에서는 그 앞에 ‘묻지 마’ ‘닥치고’ ‘너도나도’ 등의 수식어를 붙일 정도로 추진 속도가 거세다.   #가덕도 외양포·대항 사람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만만찮다. 특히 4월 총선을 맞아 지방자치단체와 해당 지역구 의원 등이 신공항 유치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무리수가 잇따르고 있다는 지적이 적잖다. 실제로 특별법을 통해 예비타당성조사를 건너뛰고(가덕도) 심의 발목을 잡았던 국립공원 지역에서 빠지기도 했다(흑산). 경제성 평가가 낮은데 추진을 강행하는 곳도 여럿이다. 총선을 앞두고 ‘공항 포퓰리즘’ 논란이 커지고 있는 신공항 현장을 중앙SUNDAY가 찾아가 봤다.   “여기가 모두 국방부 땅이요. 보상? 저기 대항과 새바지의 3분의 1도 안 될 거요. 그래도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지.” 이성태 이장은 가덕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국방부 땅이라 사용료를 냈지만 자기 땅이라 여기며 열심히 밭을 일궜다. 그는 국수봉(269m)과 남산(189m)을 가리켰다. 공항이 들어서면 이 산들이 깎여나가고 대항·새바지·외양포 등 마을 세 곳도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바다 위에만 공항을 만들겠다던 당초 계획안은 1년 만인 지난해 4월 육지와 연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공사 기간을 27개월 앞당겼다. 이장이 말했듯 “여기 외양포가 (터미널이 생기는) 메인”이 된다. 대항마을엔 물류기지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대항마을로 들어서니 공항 건설 관련 현수막이 급격히 늘었다. 그렇다고 연대봉(459m) 고개 북쪽 천성마을이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주모(51)씨는 “(신공항으로 향하는) 도로가 넓어지고 철도가 생기면 돈도 더 들고 우리도 불편해지지 않겠냐”고 걱정했다. 섬 전체가 ‘공항화’가 된다는 말이다.   가덕도 신공항에 대한 정부 의지는 확고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3일 부산을 두 달 만에 다시 찾아 가덕도 신공항 조기 개항을 거듭 약속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신공항 추진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여당도, 야당도 모처럼 한마음 한뜻이다.   이에 더해 2030년 부산 엑스포를 위해 국제공항이 필요해 2029년까지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며 예타 면제하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 사업비 13조7500억원으로 지난 10년간 최대 예타 면제다. 지난달 통과된 ‘달빛철도특별법’도 예타 면제 측면에선 가덕도의 아류라는  평가다. 게다가 엑스포 유치 실패는 되레 가덕도 신공항 건설 속도를 높였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총선 표를 의식해 부산 민심을 달래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예타 면제? 그런 건 둘째 치고 이주 대책도 아직 나온 게 없소.” 대항마을 공모(63)씨가 낮으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섬 분위기가 그랬다. 조용한 것 같은데 다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덕도 신공항의 비용 대비 편익(B/C) 비율은 0.58이다. 공항을 지어서 얻는 편익이 비용의 절반에 그친다는 얘기다. 안전성 문제도 거론된다. 특별법 처리 당시 국토부는 “진해비행장과 공역이 중첩되고 김해공항 관제 업무도 복잡해져 안전사고 위험이 증가한다”며 “수심이 30m에 이르고 태풍도 지나는 길목”이라고 지적했다. 2022년 사전타당성조사 연구진은 “바다~육지 공항은 지반 지지력 차이가 커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덕도 주민들이 “이러다 공항에 펑크(사고)라도 나면 어쩌나”라며 걱정하는 이유다.   새만금공항 부지. 2019년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받았지만 2024년 2월까지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상언 기자 낮은 B/C에도 불구하고 국제 행사를 이유로 예타 면제를 추진한 신공항 사업이 또 있다. 새만금공항이다. 2018·2022년 국토부 조사에서 각각 0.479와 0.503 B/C를 받았다. 이후 세계잼버리 대회를 앞두고 예타 면제를 받았지만 현재까지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갯벌 훼손, 조류와 충돌 우려 등 곳곳이 논란이다.   그러다 보니 자칫 ‘유령 공항’ ‘무늬만 공항’만 하나 더 추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고추 말리는 공항’으로 유명해진 무안공항은 2022년 영업이익률이 -1693.8%다. 양양공항은 다른 공항들이 잘 나갔던 2019년에도 -1239.9%였다. 사천·포항경주 공항도 ‘마이너스 네 자리’로 악명 높다. 모두 경제성을 간과한 탓이다. B/C가 낮기로는 흑산공항도 마찬가지다.   #흑산도 예리 사람들   전남 신안군 흑산도 상라봉에서 멀리 흑산공항 부지인 대봉산이 보인다. 상라봉 아래로 12굽이고갯길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김홍준 기자 “위치로는 흑산도 다음에 홍도지만, 찾는 우선순위는 홍도 다음에 흑산이에요.” 지난 14일 홍어를 썰던 흑산도 주민 김선복(49)씨의 칼질이 더 날카로워졌다. 김씨는 “어차피 흑산공항이 생겨도 배로 40분이나 걸려 홍도에 들어가야 하고 기상이 조금만 나빠도 결항인데, 그 돈으로 흑산도의 매력을 높이는 데 투자하면 좋겠다”고 했다.   택시기사 겸 가이드 김용현(59)씨와 주민 이모(63)씨는 결이 다른 말을 했다. “이제 그만 왔다 갔다 하고 빨리 공항을 지으면 좋겠다. 흑산도 숙원 사업 아니냐”면서다. 이들 말대로 흑산공항은 표류했다. 무려 15년째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위원회는 ‘철새 보호, 국립공원 훼손’ 등의 이유로 심의를 보류하거나 중단을 반복했다. 2018년 흑산공항 예타 결과 B/C는 4.38이나 됐지만 국토부가 2020년 재측정한 수요를 적용한 결과 0.78까지 떨어졌다.   최대 난제는 다도해국립공원 일부라는 점. 그런 가운데 국공위는 지난해 1월 흑산공항 부지인 예리 일원 0.675㎢ 구역을 국립공원에서 제외했다. 대신 명사십리 해수욕장 인근 5.5㎢를 집어넣는 ‘수(手)’를 뒀다. 정인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국장은 “꼼수”라고 꼬집었다. 반면 흑산공항 추진을 적극 옹호하는 측에서는 “묘수”라고 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당초 50인승 항공기를 기준으로 활주로를 설계했는데, 해당 기종이 단종 추세인 데다 수요를 늘리기 위해 국토부가 지난해 11월 80인승 기종으로 바꿨다. 중앙SUNDAY가 심상정 녹색정의당 의원실에서 입수한 국토부의 ‘도서 소형공항 시설 개선 방안 검토’ 자료에 따르면 소형 공항을 새로 만드는 흑산·백령·울릉은 ‘80인승’을 새로 적용하게 되면서 사업비가 최소 1.5~2배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15년 넘게 지역 숙원 사업으로 공항을 추진하던 흑산도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지난해 착공 계획이 ‘올해’로 바뀐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21일 경북 울릉군 울릉공항 건설현장. 가두봉을 깎아 공항을 만든다. 2026년 개항을 목표로 하고 있는 울릉공항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업계 목소리를 반영해 80인승 항공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크기로 설계를 변경할 계획이다. 2024년 2월 초 현재 공정률은 44%다.[연합뉴스] 게다가 공항이 들어서면 흑산도 관광은 당일치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당일 생활권이 된 뒤 쇠락한 설악산 지구의 악몽을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훈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장은 “설악산처럼 당일 생활권이 된 관광지는 숙박업부터 쓰러진 뒤 유흥주점과 식당업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는 만큼 다시 찾을 만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상태로는 ‘홍도로 가기 위해 흑산도를 패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80인승 변수’가 생긴 다른 소형 공항인 백령은 군민(軍民)공항으로 추진에 속도가 붙은 상태다. 울릉공항은 이미 44% 지은 상태라 되돌릴 수 없어 공사는 계속된다고 한다. 유정훈 교수는 “신공항은 각종 선거의 핵심 이슈”라며 “지역 민심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국가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사안인데도 너무 정치적 이슈에만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침 지난 14일 서울고법 행정10부는 용인경전철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해 혈세를 낭비했다며 당시 지자체장과 연구원들에게 214억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유 교수는 “국비로 건설하는 공항은 지자체가 주도하고 운영하는  철도와 달리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신공항, 자그마치 25조원이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4.02.17 01:00

  • "아껴서 빚 갚자"…새해 목표 2순위는 '돈 모을 결심'

    "아껴서 빚 갚자"…새해 목표 2순위는 '돈 모을 결심'

     ━  새해 작심삼일 그만, 금주·운동할 결심 체험기   결혼 3년차인 서진영(37)씨의 새해 목표는 2년 안에 ‘1억원 모으기’다. 서씨는 지난해 신혼부부 특별 공급으로 주택청약에 당첨됐다. 하지만 내 집 마련의 기쁨도 잠시. 대출에 대한 부담감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고민 끝에 서씨 부부는 2세 계획은 물론 매년 가던 해외여행도 1억원을 모을 때까진 미루기로 합의했다. 서씨는 “대출금리가 부담스러워 여윳돈이 생기면 바로 중도금을 갚고 있다”며 “입주 시점까지 잔금 치를 돈을 최대한 마련하는 걸 올해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반주·혼술 습관부터 끊고…운동? 몸 괜찮으면 일단 뛰어라” “작심삼일 120번 하면 1년, 무의식 입력 땐 저절로 행동” 결심은 달라도 의지는 같다. 특히 2040세대의 경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건강·행복 같은 큰 소망 대신 ‘돈’과 관련한 구체적 목표를 우선순위에 두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한국리서치 조사에서도 ‘건강 유지와 회복’ 다음으로 많이 꼽힌 새해 결심이 ‘재산 축적, 빚 탕감’으로 나타났다. 2022년 3위에서 지난해와 올해는 2위로 올라섰다. 이동한 한국리서치 수석연구원은 “돈 문제 해결을 새해 목표로 삼는 비율이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늘고 있는 추세”라며 “특히 젊은층의 관심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이는 20대의 소득이 줄고 빚은 늘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통계청이 지난해 말 발표한 ‘한국의 사회 동향 2023’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평균 소득이 매년 증가한 가운데 20대 가구주의 소득만 유일하게 감소했다. 지난해 20대의 부채 보유액도 2018년보다 93.5%나 급증했다. 30대 39.8%, 40~50대 22.0%에 비해 확연히 높은 수치다.   유경원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서비스업 종사자와 자영업자·비정규직 등이 특히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들 업종에 종사하는 2030세대의 비중이 매우 높은 상황”이라며 “여기에 20대에 독립하는 가구가 늘고 이로 인해 전월세 보증금 대출 수요 또한 커지면서 젊은층의 부채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석일(27)씨는 지난해 어렵게 직장을 구했지만 6개월간 저축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을 받은 뒤 매달 30만원씩 내는 적금 상품에 가입했지만 이마저도 두 달 만에 해지했다. 김씨는 “학자금 대출 상환하고 월세·식비 등을 제하고 나니 저축은 언감생심이더라”며 “마흔 전에는 내 집을 갖고 싶은데 이대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 올해는 최대한 씀씀이를 줄여 돈을 모으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소상공인들도 ‘돈’을 새해 소망 1순위로 꼽았다. 2018년 서울 마포구에서 카페를 창업한 윤지혜(42)씨는 한때 하루 평균 매출이 300만원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코로나19 직격탄은 윤씨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월 400만원의 임대료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윤씨는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다시 좋아질 거란 믿음 하나로 버텨 왔는데 지난해 원두 등 각종 부자재 가격이 급등해 여전히 힘든 상황”이라며 “올해는 어떻게든 빚을 줄이기로 결심한 뒤 온라인 사업도 병행하는 등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있다”고 말했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2024.02.03 00:48

  • “작심삼일 120번 하면 1년, 무의식 입력 땐 저절로 행동”

    “작심삼일 120번 하면 1년, 무의식 입력 땐 저절로 행동”

     ━  새해 작심삼일 그만, 금주·운동할 결심 체험기   서울 시내 대형서점 문구 코너에서 한 고객이 새해 다이어리를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갓생’ 좀 하려고요.”   지난달 19일 서울 도심의 한 대형서점 문구 코너에서 만난 김형민(24)씨는 다이어리를 고르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정점을 찍은 뒤 다이어리를 사려는 이들이 확연히 줄어 여기저기 50% 할인 표시가 붙어 있었지만 여느 2030세대처럼 형민씨도 ‘갓생(God+生·부지런하고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을 다짐했다. “새해잖아요.” 형민씨의 결심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 살아갑니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려 달리죠. 추동(drive)이란 심리입니다. 추동이 새해를 기폭제 삼아 발진하면, 자기 효능감(self efficacy)을 엔진 삼아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을 향해 우사인 볼트처럼 내달리는 겁니다.”(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모두에겐 시간적인 랜드마크가 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의 나를 분리하고 동기가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새 출발 효과(fresh-start effect)라고 하죠. 새해는 메가톤급 랜드마크입니다. 놓치면 ‘올해 폭망 아니냐’며 불안해지는 겁니다.”(정수근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   관련기사 “반주·혼술 습관부터 끊고…운동? 몸 괜찮으면 일단 뛰어라” “아껴서 빚 갚자”…새해 목표 2순위는 ‘돈 모을 결심’ 둘 다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그중에서도 최 교수는 인지, 정 교수는 뇌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을 작심하고 만난 건 ‘작심삼일(作心三日)’ 때문이다. 작심삼일은 한자 문화권에서 우리나라만 쓰는 말이다.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즉 고려 시대의 국가 정책이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뒤집어졌던 상황을 패러디한 말이다. 미국의 시장 분석 기관인 통계브레인조사연구소(SBRI)에 따르면 새해 결심에 나서는 사람은 45%, 그중 성공할 확률은 8% 정도다. 바꿔 말하면 92%가 실패한다. 형민씨는 다이어리에 ‘금연·금주·다이어트·학원’ 등의 계획을 빼곡하게 쓸 거라고 했다.   왜 작심삼일이 되나요. “형민씨에게 연락하고 싶네요. 너무 거창한 계획 아니냐고요. 그동안 삶의 패턴이 그렇게 세팅돼 있지 않다면 의지만으론 해결할 수 없어요. 목표를 세울 때는 ‘비용(cost)’을 산출하고 ‘비용 편익(cost-benefit)’을 잘 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앞의 편익(benefit)에만 관심을 쏟으면 비용에 굴복하기 십상입니다. 인간에겐 당장의 이익을 장래의 유익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거든요.”(최) “새로운 습관 형성에는 반복이 필요한데 즉각적 보상이 따르는 안 좋은 행동을 줄이는 게 쉽지 않고, 보상이 지연되는 좋은 행동을 반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행동의 선택엔 대뇌피질의 전전두피질이 관여합니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죠. 반면 습관적인 행동은 자동적·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즉 쉬운 행동이란 거죠.”(정)   두 교수는 그러면서 다이어트와 ‘한잔’을 예로 들었다. “직장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뒤 다이어트라는 새해 결심과 냉장고 속 맥주 들이켜기 중 어느 게 품이 적게 들면서도 행복하겠나요.” 최 교수는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면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가 생겨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결국엔 작심삼일이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도 “미래 내 의욕이 지금의 내 의욕과 동일할 거라고 생각하는 투사 편향(projection bias) 또한 작심삼일의 주된 원인”이라고 짚었다. 형민씨는 어느 쪽을 택할까. 맥주일까, 다이어트일까.   실패할지언정 작심은 반복해야 할까요. “새해 목표를 세우는 건 자기 향상 과정의 시작점입니다. 작심삼일을 120번 하면 1년이 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성장할 기회도 많아지는 셈이죠.”(최)   일본의 뇌과학 전문가인 이시우라 쇼이치는 작심삼일을 넘어 30일간의 지속적인 반복, 즉 ‘작심삼십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뇌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일정 기간 의식적으로 반복된 행동을 해야 하고, 그래야 무의식에 입력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작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작고, 실현 가능하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더 행복해지기, 부자 되기, 20㎏ 빼기 등 모호하거나 무리한 목표는 삼가야 합니다. 목표에 근접도 못 하면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어요. 또 작은 목표를 이룬 뒤엔 즉각 보상을 해줘야 동기 부여가 지속됩니다.”(최·정)   형민씨를 만난 지 보름이 흘렀다. 그는 그새 작심삼일을 몇 번이나 했을까. 다이어리는 빽빽하게 채워지고 있을까.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4.02.03 00:45

  • "금주? 낭만 착각 혼술부터 끊어라…운동? 날짜 계산 말고 일단 뛰어라"

    "금주? 낭만 착각 혼술부터 끊어라…운동? 날짜 계산 말고 일단 뛰어라"

     ━  새해 작심삼일 그만, 금주·운동할 결심 체험기   새해 금주와 운동을 결심한 기자와 취재원들이 지난달 31일 함께 인왕산 야등(야간 등산)에 나섰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올해 목표는 건강”이라고 외쳤다. 김상선 기자 ‘어쩐지’ 단것이 자꾸 입에 당겼다.   오늘로 금주 17일째. 의사는 “아시겠지만 단것은 몸에 좋지 않다. 다만 술을 대체할 수 있다면 금주 초기엔 권할 만하다”고 말했다. 운동 17일째. 트레이너는 “운동하고 단 걸 안 먹는 게 최선이지만, 운동하고 먹는 걸 차선으로 선택할 수는 있다”고 했다. 조현 순천향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단맛을 원하는 건 삶의 패턴이 바뀌면서 생기는 정신적·신체적 공백을 메우려는 보상 심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어쩐지’ 단맛에 끌렸다는 것이다.   2024년 새해. 중앙SUNDAY 취재진은 ‘작심’을 했다. 50대 기자는 30년 넘게 마신 술을 끊었고, 30대 기자는 8년 넘게 주저했던 운동을 시작했다. 큰 이유는 없다. 어쩌면 누군가 하니까 따라 하는 거고, 뭐라도 안 하면 불안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새해 결심 1위는 ‘건강 유지와 회복’. 지난 3년간 줄곧 선두다. 이를 위한 금주와 금연·운동은 새해 결심의 구체적 레퍼토리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안다. ‘작심삼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작심삼일은 꼭 3일이 아니라 단기간에 목표가 흐지부지됨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번엔 과연?   #국민 12% 금주 필요한 위험한 단계   남자는 맥주잔을 한동안 쳐다봤다. 그걸 집어 입으로 가져오기까진 5초. 번뇌와 망설임이 난무했다. 금주 모임에도 나가며 술을 끊으려는 노력은 맥주 거품처럼 사라졌다. 술이 연거푸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영화 ‘더 웨이 백’의 한 장면이다. 모교 농구팀을 재건하려는 잭(벤 에플렉)의 열망과 알코올 의존증이 공존하긴 결코 쉽지 않았다. 영화 '더 웨이 백(2020)'의 한 장면. 잭 커닝험(오른쪽, 벤 애플랙 연기)은 소아암으로 아들을 일찍 잃고 심한 알코올 의존증을 겪으며 일용직을 전전한다. 전도 유망했던 과거에 힘입어 모교 농구를 재건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감독직을 맡는다. 금주 모임에도 나가는 등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듯했다. 하지만 친구의 아들 역시 소아암으로 위기를 겪는 모습이 '기폭제'가 되면서 다시 폭음을 시작한다. 기사에 나온 '맥주잔까지 5초'는 바로 이 폭음 장면을 묘사했다. 잭은 감독직에서 해임된다. 그 와중에 팀은 승승장구. 잭은 집에서 가만히 TV로 지켜볼 뿐이다. [중앙 포토]   관련기사 “작심삼일 120번 하면 1년, 무의식 입력 땐 저절로 행동” “아껴서 빚 갚자”…새해 목표 2순위는 ‘돈 모을 결심’ “아, (잭처럼) 저도 그랬죠.” 일산 허씨의 말이다. 올해 예순인 그는 13년째 술을 ‘끊고’ 있다. 세계적인 단주 모임 ‘알코홀릭스 어나니머스(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회원이기도 하다. 하루에 소주 7~8병을 마셨다는 그는 “나도 소주 반병에서 시작했는데 괜찮다, 괜찮다 합리화하다 보니 하루 8병까지 이른 것”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자신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그러면서 “나도 11개월 끊었다 다시 마시게 된 날, 그동안 못 마신 걸 영화 속 잭처럼 한없이 들이켜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하종은 고양시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장은 “우리나라 인구의 12% 정도는 금주가 필요한 알코올 남용 이상의 단계”라며 “자신이 위험한 상태임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행위에 대해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음주하기 때문에 금주가 어려운 것”이라고 진단했다.   허씨를 살린 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두려움이었다. 이젠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알코올은 간장과 췌장을 허물어뜨렸고 당뇨를 불렀다. 몸도 바싹 말랐다. 파블로 피카소의 판화 ‘검소한 식사(1904)’에도 이런 모습이 담겨 있다. 작품 속 남자는 허씨처럼 장기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듯 몸이 깡마르다. 하 센터장은 “알코올 의존증이 장기화해 장기 손상까지 이어지면 몸이 영양소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다가 근육까지 소실돼 야위게 된다”고 설명했다. ‘알코올 의존’은 ‘알코올 남용’보다 심각한 상태를 일컫는다. 파블로 피카소는 그가 가장 불우했던 '청색 시기(Blue Period, 1901~1904)'에 이 '검소한 식사(The Frugal Meal, 1904)'를 판화로 만들었다. 스페인 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 측은 ″지독한 궁핍과 알코올의존증의 표현'이라 평하고 있다. [사진=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   고모(51·서울 서초구)씨는 금주 3개월째다. 매일 소주 1병씩 마셨던 그는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눈이 침침했다”고 했다. 동국대병원 안과 의료진이 “알코올로 췌장 기능이 떨어져 엽산 흡수가 안 되기 때문에 시력 저하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자 결국 그는 금주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회사원 조모(53·경기도 고양시)씨도 새해 들어 금주에 돌입했다. 매일 소주 1병과 맥주 2병을 세트로 마셨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사흘 정도는 잘 참았는데 그 뒤로는 영 어렵더라.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친구, 회사 동료, 거래처와 모두 단절되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오죽하면 『금주 다이어리』의 저자 클레어 풀리도 “난 공식적으로 버림받았다”고 썼겠는가.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처음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그러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런 뒤엔 위안을 위해, 두려움과 초조함 때문에 마신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어떤 감정이든 술로 풀게 된다.”   고씨는 회사 업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조씨는 코로나 팬데믹 때 찾아온 우울감 탓에 술을 찾게 됐다고 고백했다. 일산 허씨의 폭주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가 밀고 끌었다. 이에 대해 하 센터장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 사람도 마신다’ ‘안 마시면 뭔가 허전해’ 등으로 합리화하면서 습관적으로 마시다 보면 알코올에 대한 내성이 쌓여 음주량은 점점 늘고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도 빈번하게 나타나면서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반주·혼술과 아침 해장술이 당긴다면 알코올 의존증 초기 증상으로, 끊고 싶어도 끊기가 매우 힘들어진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금주가 종종 작심삼일에 그치고 마는 건 ‘도파민’이란 신경전달물질 때문이다. 도파민은 쾌락과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알코올은 도파민 분비를 위한 ‘가성비’가 뛰어나다. 눈만 돌리면 살 수 있다. 게다가 저렴하다. 효과는 즉각적이다. 사회관계의 윤활유가 되니 너도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 센터장은 “바로 이 대목이 알코올의 함정”이라며 “연결 고리를 잘라야 작심삼일을 넘을 수 있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알코올을 대체할 만한 건 뭐가 있을까.   강현종(55·경기도 파주시)씨는 25개월째 금주 중이다. 그는 “운동을 잘하려고 끊었고, 끊다 보니 운동에 더 집중하게 됐다”며 “이젠 술 생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흡연은 35년째 계속하고 있다. 강씨는 “술을 끊은 것처럼 담배도 언젠간 끊고 싶다”고 했다. 조 교수는 “흡연을 멈추지 못하는 것 또한 도파민 때문”이라며 “반주나 혼술 등 습관적 음주부터 없애 금주에 이르는 것처럼 흡연도 ‘괜히 피는 것 같다’는 상황부터 정리하고 운동 등 ‘보상’이 될 만한 취미 활동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금주와 금연을 위해서는 상담자와 '라포(rapport·유대감 혹은 친밀감)'를 쌓아 쌓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고양시 덕양구 보건소 금연클리닉에서는 최근 39년간 흡연을 해온 전모(57)씨가 담배를 스스로 끊도록 상담했다. 보건소 관계자는 "직업이 성우라 목소리를 지켜야 한다는 본인의 의지가 있었지만, 사실 외로운 싸움이라 상담과 조언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50대 기자는 일단 혼술을 없앴다. 보상용으로 퇴근 직후 목공을 시작했다. 조 교수의 말처럼 금주와 금연은 결국 운동으로 만날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31일엔 취재진과 취재원이 함께 인왕산 야등(야간 등산)도 했다. 8년 만에 운동을 시작한 30대 기자는 숨이 가빴다.   #몸 움직이면 뇌 자극해 회복력 강화   “그냥 물만 마시고 가도 돼요.”   센터장의 말을 믿기로 했다. 30대 기자의 집에서 헬스클럽까진 걸어서 3분. 1월은 추워서, 2월은 짧고 휴일이 많아서라는 핑계는 집어치웠다. 그렇게 17일이 지났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운동이 작심삼일이 되는 건 기존 습관에 따라 형성된 뇌 회로의 변화가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라며 “반복 행동이 어느 정도 지속돼야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뇌과학계 일각에선 ‘어느 정도’의 시간을 열흘로 보기도 한다. 기자처럼 근육통이 생기고 단것이 당기기도 하지만 운동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2018)' 포스터. 칸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우울증을 겪는 베르트랑(마티외 아말리크)를 중심으로 이른바 '루저' 중년 남성들이 운동을 통해 어떻게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지를 보여준다. 코미디지만 잔잔하면서도 통쾌하다. 영화의 시작은 물 안에서 치열하게 휘젓는 손과 팔, 다리를 보여준다. 이 포스터도 마찬가지인데, 상처는 쉽게 치유할 수 없고 보이지는 않아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앙 포토]   여기 ‘몸꽝’들이 있다. 우울증, 부도 위기, 따돌림 등 어딘가 크게 상처 난 중년 남자들이다. 이들이 운동을 시작한다. 남자 수중발레다. 수영으로, 달리기로 함께 흘린 땀만큼 친밀감이 쌓인다. 세계 대회 우승으로 각자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런데 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엔 중요한 장면이 있다. 수중에서 치열하게 휘젓는 손과 팔과 다리다. 증진과 개선·치유는 공짜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잠수교. 운동 동호인들의 물결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새해를 맞아 ‘달리기’를 작심한 김주현(44)씨와 500m를 덩달아 같이 달렸다. 아이가 셋인 김씨는 “주변에 아픈 사람도 많았고 사실 나도 아팠다”며 “그런데 운동을 하니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들고 고통도 줄어들더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신체 각 부위는 뇌에 연결돼 있는데, 신체가 움직이면 뇌에 자극을 자꾸 줘서 뇌 신경세포가 활성화 되고 피질이 두꺼워져서 회복 탄력성이 증가해 스트레스 같은 타격에도 회복이 빨라지게 된다”며 “특히 운동을 하면 뇌 신경세포를 생성시키는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가 분비되면서 뇌가 더 튼튼해지는 효과도 입증됐다”고 말했다. 에두아르 마네(프랑스, 1832~1883)의 '블로뉴에서의 크로켓(1871).'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마네는 노르망디 해안에서 크로켓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는 모습을 그렸다. 앞의 밤색 바지를 입고 있는 이가 모네의 양아들이고 그 옆 노란 드레스 차림의 여성은 당시 젊은 작가 진 곤잘레스다. [중앙 포토]   이규성(35)씨가 새해에 운동을 결심한 것도 그래서다. 그는 넥타이를 휘날리며 따릉이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었다. 이씨는 “퇴근길 운동을 결심한 건 업무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옆을 빠르게 달리다 멈춘 이상하(43)씨도 “이렇게 뛰고 나면 행복감이 몰려온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날 기자가 만난 ‘운린이(운동 초보)’ 15명의 새해 운동 결심 이유는 연령별로 각각 달랐다. 10~20대는 ‘체력 증진과 다이어트’, 30~40대는 ‘업무·육아 스트레스 해소와 우울감 탈피’, 50대 이상은 ‘건강’이 1순위였다. 새해 들어 자전거 타기를 결심한 김라희(18)씨는 “공부에 뒷심을 내려고 운동을 시작했는데, 군것질이 자꾸 당겨 식단 관리는 작심일일 중”이라며 웃었다. 1년 만에 자전거 동호회에 복귀했다는 전경진(69)씨도 “지난해는 아파서 쉬었는데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겠다 싶었다”며 “올해 목표는 전국 순회와 해외 탐방”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 11월 17일 일산 더클라임에서 처음 클라이밍을 접하는 클린이들이 강사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이주강 가천대 길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운동을 하면 뇌에 엔도르핀과 같은 행복호르몬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지면서 계속 운동을 하고 싶어진다”며 “다만 무리하면 부상 위험이 높아져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운동량 측정 피트니스 앱인 스트라바(Strava)에 따르면 새해 운동을 결심한 이들은 대개 19일 만에 운동을 포기한다. 17일째인 기자들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지난 1월 31일 인왕산 야등(야간 등산) 나선 취재원과 취재진. '건강'을 올해 목표로 삼은 공통점을 안고 바위 구간을 오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에 대해 하 센터장은 “금주도, 운동도 혼자보다는 병원과 상담사·지인 등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조 교수도 “운동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생활 패턴과 몸 상태를 점검한 뒤 괜찮다고 판단되면 ‘헬스클럽에 물이라도 마시러 가자’는 마음으로 일단 부딪혀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인왕산. 기자가 함께 간 운린이들에게 물었다. “올해 결심은요?” 그러자 미리 입을 맞춘 듯 모두가 함께 외쳤다. “건강, 건강, 건강!” 김홍준·신수민 기자 rimrim@joongang.co.kr

    2024.02.03 00:01

  • 스윙 선거구 62곳…총선 판 뒤집는다

    스윙 선거구 62곳…총선 판 뒤집는다

     ━  총선 승패 가를 ‘스윙 선거구’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수도권 전체 111석 중 81석(73%)을 가져갔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더불어민주당이 121석 중 103석(85.1%)을 차지했다. 압승이었다. 득표율 차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18대 때 한나라당(48.3%)은 통합민주당(민주당 전신, 36.4%)보다 11.9%포인트 더 얻었다. 21대 총선에선 민주당(53%)이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40.7%)보다 12.3%포인트를 앞섰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 표라도 앞서면 승자가 되는 현행 제도에선 일정 표심의 변화가 당선 정당의 교체로 이어지곤 한다. 대체로 박빙 승부가 벌어지는 수도권에선 더 그렇다. 18대와 21대 사이에12.1%포인트의 스윙(Swing)이 있었는데 81석의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16석으로 찌그러들고 26석의 민주당 계열 정당은 103석으로 거대해졌다. 스윙의 위력이다.   현행 수도권 121개 선거구를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21대까지 최근 5차례 총선에서 59곳이 민주당 또는 국민의힘이 네 번 이상 이긴 곳이었다. 이른바 ‘텃밭’(당선 확실 지역·safe seat)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나머지 62곳은 정당 바뀜이 한두 차례 있었다. 어느 당이건 세 번 이기거나 세 번 졌다는 의미다. ‘스윙(경합하는) 선거구’라고 할 수 있다.   ‘선거 민심의 풍향계’로 불리는 인천에선 9곳이 경합하는 선거구였다. 나머지 4곳은 민주당 텃밭으로 불릴만한 곳으로 인천 계양갑·을은 5차례, 인천 남동을·부평을은 4차례 민주당 후보에게 당선증을 안겼다. 국민의힘은 전무했다.   경기에선 34곳을 ‘스윙 선거구’로 볼 수 있다.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은 20곳으로 수원정 등 11곳은 5회 연속, 수원갑·을 등 9곳은 4회 당선자를 냈다. 국민의힘엔 이런 지역이 5곳에 그쳤다.   서울은 상대적으로 텃밭 선거구가 많아 10곳 중 6곳 꼴이었다. 49곳 중 4회 이상 국민의힘 또는 민주당 당선자를 낸 지역구가 30곳에 달했다. 국민의힘은 용산과 강남권 7곳, 민주당은 전체 지역구의 절반에 살짝 못 미치는 23곳이었다.    ━  유권자 유입 늘어난 경기 경합지 표심, 서울과 따로 간다     뉴타운 등 개발 공약(18대), 존재감 있는 제3당(안철수의 국민의당, 19대)의 등장 등 국민의힘에 유리하게 작용한 이슈를 제외하고 보면 수도권에선 민주당으로의 표 쏠림 현상이 관찰된다.〈그래픽 참조〉 특히 경기권이 두드러졌는데 민주당은 부천·고양에서 초강세였고 과거에 고전했던 성남분당을이나 의왕-과천도 연속으로 당선자를 내고 있다.   국민의힘 당직자는 수도권에서의 국민의힘 약세에 대해 세 가지 원인을 들었다. 우선 당 자체가 수도권 중도층에 소구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20대 총선 당시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와의 갈등, 21대 총선 당시 황교안 대표와 김형오 공관위원장의 부진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그로 인해 상대 당 후보보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등판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인물난’이다. 마지막으로 연이은 참패로 수도권 조직력이 와해돼 제대로 선거를 치르기 어려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문가 “공천 마무리되면 여론 움직일 듯”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정한울 한국사람연구원장은 인구학적 변동 요인도 집었다 그는 “지방의 젊은 세대가 수도권으로 오는데 서울로 못 들어가고 경기도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이 주류적 시각을 가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17대 총선 때까지만 해도 서울 유권자(775만 명)가 경기 유권자(731만 명)보다 더 많았다. 이후 서울은 70만 명 정도 느는 수준에서 정체했다면 경기는 375만 명이 늘었다. 오랫동안 국민의힘이 강세를 보였던 화성·파주·김포도 민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만 2022년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를 계기로 견고하면 민주당 지지 흐름에 변화가 왔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4.83%포인트 앞섰다. 국민의힘 계열 대선 후보가 민주당 계열을 앞선 건 YS(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처음이다. 경기(5.32%포인트)·인천(1.86%포인트)에선 뒤졌다. 같은 해 광역단체장 선거에선 국민의힘이 서울·인천에서 승리했고 민주당은 경기를 지켰다.   정치권에선 과거 수도권 전체가 유사한 표심을 보였던 것과 달리 근래 서울과 경기가 따로 가는, 탈동조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부동산 가격 급상승으로 3040세대가 서울을 빠져나갔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 2021년까지 10년간 서울 유권자 중 3040세대가 61만 명 준 데 비해 60대 이상은 77만4000여 명이 늘었다는 분석도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가 민주당 소속이나 민주당 색채가 강하지 않아, 야당에 거부감 있는 경기 중도층의 이탈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흐름이 총선까지 이어질지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박동원 폴리콤 대표는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때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겨우 회복했는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당 대표 밀어내기 등 용산(대통령실)의 민심이반 행보로 이전으로 돌아간 듯하다”며 “공천이 마무리되고 구도가 서면 여론이 움직일 듯하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국민의힘에선 서울에선 호전됐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 당직자는 “서울은 확연하게 데이터로 좋아지는 게 보인다”며 “경기 쪽 데이터는 아주 좋은 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부적으론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후 정권심판론이 흐려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 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수원을 방문, 철도 지하화를 약속하고 김포·구리·하남·고양 등 경기 일부 지역의 서울 편입뿐만 아니라 민주당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경기북부특별자치도(북자도, 분도) 논의도 공감한다고 밝혔다. 2일엔 구리의 전통시장을 방문, 시민들과 만났다.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경기도 각 지역에 계시는 시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서 그 뜻에 맞춰 적극적으로 신속하게 (행정구역 개편을) 진행해드리겠다는 약속을 드렸다”며 “그 취지에서 구리도 그중에 하나에 포함된다”고 했다. 3일엔 김포를 방문할 예정이다.   양당, 표 분산 제3당 파괴력에 촉각   민주당은 수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신년기자회견에서 “(총선은) 대한민국이 잃어버린 비전을 되찾는 날이다.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울 마지막 기회”라며 정권심판론을 재차 부각했다. 그러면서 공약도 속속 발표한다. 국민의힘의 철도 지하화에 맞서 이 대표가 “전면적으로 철도, 역사 지하화를 추진할 때가 됐다”며 더 키우기도 했다.   2일엔 김동연 지사가 남양주시 진접역에서 ‘경기 동부 SOC(사회간접자본) 대개발 원년’ 선포식을 열었다. 2040년까지 SOC 33조9000억원과 민간개발투자 9조4000억원 등 총 43조 3000억원을 투자해 도로 18개와 철도 13개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김 지사는 “6월까지 전문가 자문과 연구용역 등을 거쳐 사업을 구체화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는 등 숙의 과정을 거쳐 연내 최종 구상안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김 지사가 찾은 남양주는 민주당 강세 지역이지만 남양주갑의 조응천 의원이 ‘비이재명’ 기치를 들고 탈당해 변수가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두 당은 제3당의 파괴력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직접 당선자를 낼 가능성보다, 표의 분산으로 인해 양당 승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실제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을 이끌던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 당선자는 2명(안철수·김성식)이었지만 선거구에서 20%대까지도 득표, 두 당을 긴장하게 했었다.   ☞스윙(Swing)=전국 또는 선거구 단위로 유권자가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이동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통계적 척도다. 한 정당의 득표율 상승에 다른 정당의 득표율 하락을 더한 후 2로 나눠 계산한다. ‘현대 선거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버틀러가 1945년 제안한 개념이다. 영국·호주 등에선 선거 때마다 중요하게 다뤄진다. 영국 BBC는 선거방송에서 스윙고미터(swingometer)를 보여준다. 미국에서의 스윙은 공화당·민주당이 경합하는 선거구를 지칭하곤 한다.  고정애·최모란 기자 ockham@joongang.co.kr

    2024.02.03 00:01

  • "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  막 오른 미 대선…왜 다시 트럼프인가   “지금 이 나라는 내전 중입니다. 100여 년 전에는 세계를 위협하는 거악을 ‘나치’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민주당’이라고 부릅니다. 도널드 트럼프만이 이 나라를,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의 핵심 승부처로 꼽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21일(현지시간). 트럼프 지지자 에드워드 영(64)은 오후 7시 로체스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예정된 트럼프 유세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9시부터 생겨난 긴 줄에 합류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를 따라다니기 위해 560㎞ 떨어진 뉴저지주 집에서 12시간을 운전해 왔다고 했다. 체감온도 영하 25도까지 떨어진 혹한도 그의 ‘열정’을 막진 못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 코에 동상이 걸리는 것 같고 뼈가 으스러지듯 아프지만 트럼프가 미국을 위해 한 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며 “트럼프가 니키 헤일리(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전 유엔대사)를 보기 좋게 쓰러뜨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관련기사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떨고 있는 지구촌 트럼프 91건 혐의 형사 기소, ‘1·6 의회 폭동’ 대선 전 유죄 땐 큰 타격 미 대선, 선거인단에 투표해 뽑는 간선제…올해는 11월 5일 사실상 결정 그의 기대대로 23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54.4%)은 헤일리 전 주지사(43.2%)를 두 자릿수 격차로 제쳤다. 지난 15일의 아이오와 코커스(전당대회)에 이은 2연속 과반 대승이다. 역대 공화당에서 처음 두 번의 경선을 연달아 이긴 사람은 모두 최종 대선 후보에 지명됐다. 트럼프가 사실상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굳혔다는 얘기다.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 후보가 될 조 바이든 대통령과 2020년에 이은 재대결이 유력하다.   ‘못 배운 마초 인종주의’ 폄하는 잘못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가 다시 돌아왔다. 8년 전 대선 후보로 지명될 때보다 더 강력해졌다. 왜 다시 트럼프일까. 의회 난입 선동 혐의 등 통례를 벗어나는 언행으로 ‘민주주의 파괴자’로까지 불런 트럼프에 환호하는 열혈 지지자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트럼프의 귀환은 이민자와 중국을 비롯한 외국이 미국의 부(富)와 권력을 앗아갔다고 생각하는 백인 남성 중심의 분노·불안 심리와 관련이 깊다.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신조어가 ‘프레카리아트’다.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불안한 고용 상황의 노동자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수십년간 민주당 정부가 묵인한 국경 개방에 따라 유입된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프레카리아트의 집합적 분노가 트럼프를 다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중앙일보와 함께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난해 1년치 성명·연설문·인터뷰 등 각종 발언을 분석한 빅데이터 컨설팅 업체 아르스프락시아의 김도훈 대표는 “트럼프 재등장의 저변에는 ‘미 유권자층의 정치적 리얼라인먼트(재편)’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저학력 백인 남자들이 안정적 직장을 갖고 전통적 가장 역할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과거 엘리트 정당으로 인식됐던 공화당을 지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트럼프는 불안하고 원자화된 다수 노동자, 또 전통적으로 미국인 가치를 담보한다고 믿었던 백인 남성들의 불편해진 심기에 호소하고 있다”며 “이들의 지지를 단순히 ‘못 배운 사람들의 마초 인종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저학력·저소득 백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자긍심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집합적 기억과 분노의 근저에는 그럴만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바이든 대통령은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거시경제가 좋아지고 자연히 미국인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얘기하지만 다수의 프레카리아트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것은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라며 “차라리 ‘내가 대통령이 되면 1년 안에 뉴햄프셔주 기름값을 절반으로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는 비전 설파가 더 매력적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뉴 햄프셔 비백인 59% 트럼프 지지   조 바이든 중앙일보가 뉴햄프셔 경선 기간인 지난 20일부터 23일까지 만나본 ‘열성 트럼피(트럼프 추종자)’들은 그를 지지하는 이유로 무너진 미국을 재건해줄 거라는 기대, 전쟁을 종식시켜줄 거라는 바람, 고물가 경제를 원상 회복시켜줄 거라는 희망을 언급하는 등 사유가 뚜렷했다. 23일 맨체스터시 앤소니 커뮤니티센터에서 프라이머리 투표를 마친 뒤 중앙일보와 만난 크레이그 로웰(41)은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자 행렬을 보라. 그 때문에 미국이 망가졌다”고 개탄하며 “이 나라를 폐허에서 재건하고 늪을 청소할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전 대통령뿐”이라고 했다.   니키 헤일리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통령이 되면 하루 만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에 대한 믿음도 강했다. 지난 22일 뉴햄프셔주 홀리스의 유세 집회에서 만난 대만계 미국인 쉬린 양(67)은 “트럼프와 시진핑(중국 국가주석)은 깊은 신뢰 관계가 있다”며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시진핑의 대만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트럼프가 다 막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45년 전 대만에서 미국 뉴욕주로 이주했다는 쉬린 양은 “미국에 사는 동안 트럼프가 대통령이었을 때 전쟁이 없고 가장 평온했다”고 떠올렸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주목할 만한 대목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층이 조금씩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6년 대선 승리의 기반이 됐던 저학력·저소득 중심의 ‘성난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유색 인종 등으로 지지층이 넓어지고 있다. 23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때 워싱턴포스트(WP)가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트럼프는 남성 응답자의 59%가 지지했고 여성으로부터도 50%의 지지를 얻었다. 헤일리 전 주지사가 얻은 여성 지지 비율 48%보다 2%포인트 높았다. 또 백인 응답자의 54%가 트럼프를 지지한 가운데 비(非)백인 응답자의 59%가 트럼프를 지지해 오히려 백인층보다 강한 지지세를 보이기도 했다. 23일 만난 리사 그레벌(53)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 기름값은 갤런당 1.8~1.9달러였고 식료품 물가도 안정적이었다”며 “나와 같은 40,50대 주부 중 많은 이는 민주당 정부가 망친 미국 경제를 되살릴 지도자로 트럼프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만 1,2차 경선을 거치며 트럼프가 가진 한계 역시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화당원 중심으로는 똘똘 뭉쳤지만 무당층 저변에서는 반(反)트럼프 정서가 상당했고, 고소득·고학력 층에서는 트럼프의 부진이 여전했다. 조사업체 에디슨리서치가 실시한 출구조사 결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유권자의 44%를 점하는 무당층 중에서 58%가 헤일리 전 주지사에 표를 몰아줬다. 또 전체 유권자의 35%가 중도를 자처했는데 이들 가운데 20%만 트럼프를 찍었다. 실제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는 대부분 지역에서 헤일리를 앞섰지만 하노버·라임·레바논 등 고학력 고소득층이 다수 분포한 부촌에서는 큰 표 차로 진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프레카리아트의 불안과 분노 표심을 공략하는 데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본선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될 중도층 공략에 고전한다면 대선 레이스의 끝은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저임금·저숙련 노동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노동 무산계급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불안정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 계급을  뜻하는 독일어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2004년 유로메이데이 행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2024.01.27 00:48

  • 트럼프 91건 혐의 형사 기소, ‘1·6 의회 폭동’ 대선 전 유죄 땐 큰 타격

     ━  막 오른 미 대선…왜 다시 트럼프인가    “91건의 혐의가 트럼프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24일 뉴욕타임스(NYT)가 도널드 트럼프 후보에게 내린 평가다. 그가 공화당 대선 후보에 다가갈수록 그가 안고 있는 ‘사법 리스크’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트럼프는 2021년 1·6 의회 폭동 사태 등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한 시도를 비롯한 91개 혐의로 4차례 형사 기소돼 있다. 법적·정치적으로 가장 폭발력이 큰 건 ‘대선 결과 뒤집기’와 관련해 지난해 8월 잭 스미스 연방 특검이 한 기소다.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허위 주장으로 지지자들을 부추겨 의회에서 폭동을 벌이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워싱턴 연방 항소법원에서 진행 중인 해당 사건의 재판일은 오는 3월 4일이다. 하지만 트럼프 측이 ‘면책 특권’을 주장하며 지연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관련기사 “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떨고 있는 지구촌 미 대선, 선거인단에 투표해 뽑는 간선제…올해는 11월 5일 사실상 결정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대선 투표일 이전 재판정에 설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유죄 판결을 받게 돼 파장이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2016년 트럼프와 혼외정사를 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에게 억대의 입막음 돈을 지급한 것과 관련된 재판은 유죄가 나와도 중형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의 대선 후보 자격에 대한 일부 주들의 문제 제기도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의회 폭동 사건 등을 근거로 내란 혐의를 적용해 경선 투표용지에서 트럼프의 이름을 빼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측은 대법원에 항소했는데, 대법원은 다음 달 8일부터 사건 심리에 들어간다.   사법 리스크에도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지키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강력한 지지세 때문이다. 하지만 본선은 다르다. NYT는 “보수적인 아이오와 주에서도 트럼프 지지자 10%가 유죄판결이 나오면 찍지 않겠다고 답했다”면서 “무당층과 스윙 스테이트(경합주) 유권자들의 의심이 커진다면 트럼프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2024.01.27 00:47

  • 미 대선, 선거인단에 투표해 뽑는 간선제…올해는 11월 5일 사실상 결정

     ━  막 오른 미 대선…왜 다시 트럼프인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다. 공화·민주 양당이 대선 후보를 뽑은 다음, 두 후보가 경쟁해 최종 승자가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매우 복잡해 미국인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직선제가 아니라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국민들의 직접투표가 아닌 주별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의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미국 대선 제도를 일문일답으로 풀어보자.   코커스와 프라이머리가 다른 점은. “둘 다 당내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이다. 우선, 코커스는 정당의 당원대회다. 당원들이 모여 지지하는 후보들을 놓고 토론을 한 뒤 각자 지지 후보를 결정해 투표한다. 당의 성향에 충실하고 탄탄한 조직을 가진 후보가 유리하다. 프라이머리는 당원뿐 아니라 일반 유권자도 참여한다. 정당 대신 주 정부의 선거관리기구가 행사를 맡는다. 코커스와 달리 일반인 참여가 가능해 민심을 더 잘 반영한다는 특징이 있다.”   당내 경선에서 대선 후보를 뽑는 대의원은 어떻게 선정하나. “주별 경선에서 각 후보가 얻는 지지율에 따라 대의원을 후보들에게 배분한다. 민주당의 경우 경선에서 15% 이상의 지지율을 얻지 못한 후보의 지지자들은 2차 투표를 해야 한다. 15% 이상을 얻은 다른 후보를 다시 선택해야 한다. 이후 최종 지지율을 근거로 후보별로 대의원을 배분하게 된다. 공화당의 경우 주별로 최저 지지율 기준이 다르다.”   관련기사 “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떨고 있는 지구촌 트럼프 91건 혐의 형사 기소, ‘1·6 의회 폭동’ 대선 전 유죄 땐 큰 타격 본선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은 어떻게 구성되나. “총 선거인단은 538명이다. 이 중 과반인 270명 이상의 지지를 얻는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4년마다 11월 첫째 월요일 다음 날인 화요일에 일반 유권자들이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다. 올 대선의 경우 11월 5일이다. 이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투표는 실제 12월 17일 열린다. 대통령이 선출되는 날은 12월 17일이지만 선거인단에 지원한 사람들이 이미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미리 공개하기에 이들에 대한 선출이 확정되면 누가 대통령이 될지도 결정된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4.01.27 00:41

  •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떨고 있는 지구촌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떨고 있는 지구촌

     ━  막 오른 미 대선…왜 다시 트럼프인가   지난해 1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가운데)이 독일 비스바덴에 있는 미군 유럽·아프리카 사령부를 방문해 지휘관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 등극에 성큼 다가섰다. 이 기세라면 3월 말 전에 대의원 과반을 확보하면서 경선이 사실상 종료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미국 역사상 1892년 대선 이후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이 자신을 꺾었던 현직 대통령과 재대결을 벌이게 된다.   만약 오는 11월 5일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해 내년 1월 20일에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면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다양한 트럼프 리스크에 또다시 직면하게 된다. 예측 불허 트럼프의 일방적인 정책을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1기 행정부 당시와 트럼프 개인 성향을 기초로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다.   군사 안보 차원에서 볼 때 트럼프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해외 분쟁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 동맹 관계나 미국의 대(大)전략에 따른 기존의 전략적 가치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에 따라 유럽, 중동, 아시아 등 곳곳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장 즉각적인 영향이 미칠 곳은 우크라이나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할 것이 분명하다. 이미 공화당 유권자들 대다수와 중도층은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부정적인 터라 트럼프가 마주칠 정치적 반대도 거의 없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도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간의 입장차는 분명하다. 바이든은 젊은 세대와 미국 내 소수 인종을 신경 써야 하기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과 다른 노선임을 강조하는데 반해, 개신교 세력을 선거에 동원해야 하는 트럼프로서는 이스라엘 지지를 확고히 할 것이다.   관련기사 “이민자가 미국 부·권력 탈취” 분노 등에 업고…트럼프, 더 강해져 돌아왔다 트럼프 91건 혐의 형사 기소, ‘1·6 의회 폭동’ 대선 전 유죄 땐 큰 타격 미 대선, 선거인단에 투표해 뽑는 간선제…올해는 11월 5일 사실상 결정 어차피 이번 미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후보를 선택할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다. 문제는 선거 때 투표하러 갈 것인지 말 것인지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바이든과 트럼프의 정책 차이는 투표율에서 중요 변수 중 하나가 될 전망이다.   대만 유사시와 관련해선 바이든이 대만에 대한 절대적 수호 입장이지만, 트럼프는 선거 기간 동안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심산이다. 우크라이나든 중동이든 대만이든 북한이든 자신의 임기 중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당선되면 바이든의 안보 정책 실패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 중이다.   트럼프의 경제 리스크는 어떠할까. 일단 1기 행정부 당시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요구처럼 한국만 따로 치르는 비용 구도와는 다소 다른 전개가 유력하다. 현재까지 파악된 리스크는 수입 품목 전반에 걸친 10% 관세 부과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기 공언 등이다. 1974년에 제정된 무역법의 301조에 근거한 관세 부과는 자유무역과 세계화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한 미국 유권자들을 위한 맞춤형 통상 정책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나서서 미국의 소비자에게 돌아갈 피해와 물가상승 우려, 그리고 전 세계 국가들이 취할 대미 보복 무역 조치 가능성을 아무리 설파해도 선거 기간 중에는 공감을 얻기 어려워 보인다. 추후 미국 경제에 부작용이 드러나는 시점에 가서야 트럼프는 관세 인하를 유인책으로 유럽 및 아시아 국가들과의 개별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큰데, 2020년 초 중국과의 협상 타결이 전례다. 실제로 관세 부과보다 우리 기업에 더 심각한 트럼프 리스크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전면 폐기 시나리오다. 배터리를 포함한 에너지와 기후 환경 관련하여 이미 추진 중인 생산 및 투자 계획에 상당한 파급력이 미칠 전망이다. 청정에너지 산업과 기술에 약 37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세제와 금융 혜택을 부여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경우 지난 2022년 여름 입법 당시의 한국 전기차에 미칠 피해 우려는 거의 해결됐지만 우리 기업이 중국과의 배터리 산업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호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11월 5일에 대선과 함께 치러질 의회 선거도 중요하다. 현재 전망으로는 상원 선거에서 공화당 현역 의원이 출마하는 11곳 모두 낙승이 확실한 반면, 민주당이 지켜야 하는 23석 가운데 적어도 3석이 경합 중이고 그 중 이미 1석은 공화당에 빼앗길 것이 분명하다. 그 경우 2025년 1월 3일에 개원하는 새 의회에서 상원 공화당은 적어도 50석 이상을 획득하고 하원 공화당은 현재의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게 되므로 트럼프 1기 행정부 첫 2년(2017~2018)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대통령-공화당 의회 시대가 만들어진다. 다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전면 폐기될지는 불투명하다. 우선 입법 과정으로만 보면 상원 의사규칙 자문관의 판단에 따라 인플레이션 감축법 폐기 법안을 예산조정절차에 태우게 된다면 필리버스터가 배제되므로 상하원 모두 단순 과반으로 폐기 법안의 통과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포함된 막대한 규모의 세금 및 금융 혜택과 그로 인한 생산 투자 계획이 다수의 공화당 지역구에서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둘째, 인플레이션 감축법 안에 포함된 처방전 약값 인하, 특히 인슐린 비용을 한 달에 35달러 이하로 낮춘 점 등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전부 폐기해 버리는 데 대한 정치적 부담이 공화당에도 따른다. 또한 폐기하더라도 이미 지출이 확정된 경우에는 예산 회수도 불가능하다. 만일 기후 위기 관련 조항들만 따로 떼어서 법 개정을 하려고 한다면 예산조정절차에 적용하는 것이 불분명해지며 민주당 상원의 필리버스터에 의해 좌초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경우 안보 및 통상과 관련된 리스크가 적지 않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이미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겪어봤기에 대처가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4.01.27 00:40

  • "상속세, 경제에 손실 입히는 세금…혁신기업 등장도 막아"

    "상속세, 경제에 손실 입히는 세금…혁신기업 등장도 막아"

     ━  글로벌 이슈 떠오른 상속세   에이먼 버틀러 애덤스미스연구소(ASI) 소장은 40여 년간 전 세계 시장경제 정책을 연구해온 자유시장주의자다. [사진 ASI] 상속세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에 이어 17일 상속세 완화 방침을 시사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국거래소에서 개최한 민생토론회에서 “소액 주주는 주가가 올라야 이득을 보지만, 대주주 입장에서는 주가가 너무 올라가면 상속세를 어마어마하게 물게 된다”며 “결국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하는 과도한 세제는 우리 중산층과 서민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으로 상속세를 지목하면서 사실상 세 부담 완화를 시사한 것이다. 사실 상속세 개편은 윤 정부가 출범 이후 공식화했지만 사회적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현재 속도 조절 중인 정책이다. 부의 대물림으로 양극화가 심화할 것이란 국민적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주식시장 발전 저해’라는 논리로 상속세 개편 추진을 공식화한 것이다.   높은 세율, 불법으로 회피하고 싶게 만들어   이런 가운데 상속세 원조국인 영국이 오는 3월 상속세 단계적 폐지를 논의하기로 하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영국 정부는 기업 투자 활성화를 통해 경제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논리로 상속세 개편을 추진 중이다. 영국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020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낮은 0.5%에 그쳤다.(국제통화기금) 올해 전망치도 0.6% 정도로 2년 연속 0%대 성장률이 예상된다.   과도한 상속세가 기업 투자에 걸림돌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스웨덴이 2005년, 노르웨이·체코가 2014년에 상속세를 전면 페지했다. 영국의 경제정책 싱크탱크인 애덤스미스연구소(Adam Smith Institute·ASI) 소장이자 공동창립자인 에이먼 버틀러(Eamonn Butler)는 “(상속세는) 경제에 손실을 입히는 세금이자, 혁신적인 기업이 등장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세금”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상속세 부담 때문에 투자를 늘리기 어렵고, 이게 결국은 나라 전체의 손실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그가 속한 애덤스미스연구소는 마가렛 대처 정부 시절 법인·소득세 인하를 통한 기업 투자 활성화 정책을 정부에 제안해 경제성장률을 확 끌어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1.53%였던 경제성장률은 2.46%로 1%포인트 가까이 올랐고, 매년 10% 넘게 치솟던 물가는 3%대로 낮아진 바 있다. 이후 ASI는 영국 경제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다. 24일 이메일을 통해 버틀러 소장을 만났다.   영국 정부가 상속세 개편을 예고했다. “폐지까지는 갈 길이 남았지만 꼭 폐지되길 바란다. 집권당인 보수당은 지도자가 몇 차례 바뀌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팬데믹 기간 쌓인 부채 탓에 세제 정책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기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됐다. 과세 대상이 점차 확대되면서 지지자들은 이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거를 1년여 앞둔 정부가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여러 감세 정책을 내놓고 있는데, 상속세도 이 일환이다.”   상속세율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나. “구체적인 방식은 3월 발표 예정이다. 가장 좋은 건 상속세율을 낮추거나 점진적인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닌 폐지다. 기업과 경제의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세금은 하루빨리 없애는 것이 좋다. 세율을 낮추는 단계적 변화 방식은 언제든 원상 복귀될 수 있기 때문에 세금을 폐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영국에서 상속세가 200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속세는 1812년 나폴레옹의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도입됐다. 그 이후로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세수를 늘리고 싶어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최근까지는 극소수에게만 적용되었기에 중요한 세금으로 다뤄지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범위가 3.76%까지 늘었다.”   상속세에 불만이 많다. “상속세는 애초에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세금이다. 모든 인류에게는 자신의 자식에게 무언가를 물려주고, 우리보다 더 나은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본성이 심어져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세금이다. 이중과세 등의 문제도 있다. 그런데 세율도 너무 높다. 영국은 상속세율이 40%인데 이는 탈법이나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회피하고 싶게 만드는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나 개인이 상속세 절세 방법을 찾는데 노동력이나 시간, 자금을 낭비하고 있다. 상속세 폐지로 가야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세율을 낮춰야 한다. 10% 정도라면 기업이나 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본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러나 일부에서는 상류층의 과도한 세습을 막고 양극화된 부를 재편하기 위해 상속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상속세 정도의 허들조차 없다면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심화될 거란 시각에서다.   한국은 상속세율이 최고 60%에 이른다. “너무 높다(too high). 한국 경제에 명백한 손실(drain)이다. 상속세가 이렇게 높으면 아이디어가 있고 기술이 있어도 이를 바탕으로 한 창업 등 기업 일구는 일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지 않나? 한국의 우수 인력은 창업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을 선호한다. 상속세를 개편해 돈의 흐름을 유연하게 한다면, 더 많은 돈이 이동할 것이고 창업 희망자나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는 일도 좀 더 용이할 것이다.”   한국에선 상속세 납부를 위해 기업 지분을 팔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의 기업은 상속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다른 나라의 기업보다 많은 제약을 안고 있는 셈이다. 상속세는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세금을 피하기 위한(혹은 피할 수 있는) 투자를 하게 만들고, 이는 결국 경제 전체를 고통 받게 만들 뿐이다.”   상속세, 더 많은 중산층에게 적용될 우려   상속세 폐지나 개편에 반대하는 주장 속에는 세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기획재정부도 지난해 세법 개정으로 올해 세수가 크게 줄어들 것을 우려해 상속세 개편에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입장이다. 23일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세제 개편으로 약 1000억~2000억원의 세수감소가 예상된다”며 “상속세 개편론에 대해 신중하게 의견을 수렴 중”이라고 밝혔다. 상속세마저 개편하면 세수가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상속세 개편에 따른 세수 감소 우려는. “상속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영국만 해도 2022~2023년 상속세 수입은 70억9000만 파운드로 전체 세입 1조270억 파운드의 약 0.7%에 그쳤다. 이 정도라면 세율을 0%대로 낮춰도 사실상 타격이 없는 수준이다. 한국도 비슷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금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건 정부 수입이 아니라 자본이다. 세수 감소가 걱정돼 상속세를 개편할 수 없다면 앞으로 그 어떤 세금도 줄일 수 없다.”   상속세 대상은 극소수라는 주장도 있다. “극소수에게 적용되는 세금이라도 잘못됐다는 인식이 있다면 줄이는 것이 맞다. 또 상속세가 향후 더 많은 중산층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상속세는 정부를 좀 더 부유하게 만들 순 있지만, 경제 전체는 훨씬 더 가난하게 만든다.”   한국은 상속세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고 본다. 기업이 자본의 절반을 상속세로 납부해야 한다는 건, 한국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뜻이다. 투자가 부족하면 기업이 번창할 수 없고, 주가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과도한 법인세와 양도소득세도 마찬가지다. 어떤 투자가 옳을지 고민해야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 방법은 없나. “한국 경제는 자본 집약적 환경에서 창의적인 기업가를 위한 환경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자본이 대기업 한 곳이 아닌 더 많은 사람에게 분배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적어도 높은 상속세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본을 빼앗기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 스웨덴·노르웨이 폐지…미국은 상속세 공제액 늘려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은 2000년대 이후 상속세를 단계적 축소 혹은 폐지해 왔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인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각각 2005년과 2014년에, 체코는 2014년에 상속세를 전면 폐지했다. 한때 상속세율이 최고 70%에 달했던 스웨덴이 상속세를 전면 폐지한 건 상속세로 인해 기업의 기반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1984년에는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 승계를 포기한 스웨덴 기업 ‘아스트라’가 영국의 ‘제네카’에 인수돼 영국 기업 ‘아스트라제네카’로 합병됐고, 세계 최대 가구업체인 이케아는 상속세를 피해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기기도 했다. 기업들이 줄줄이 해외로 떠나자 진보정당인 사민당이 나서서 상속세를 폐지했다.   공제 한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는 국가도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인데, 미국은 최고 40%의 상속세율을 유지하는 대신 상속세 공제액을 늘리는 방식으로 세제 혜택을 부여한다. 500만 달러(약 66억원) 수준이었던 상속·증여세 면세 한도는 2018년 연방정부가 개정세법(TCJA)을 제정하면서 두 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기준 상속세 면제 한도는 1292만 달러(약 172억원)에 달한다.   1985년 상속세를 폐지한 캐나다는 상속 시점에 부과하는 상속세 대신 물려받은 재산을 처분할 때 발생한 자본차익에 세금을 물리는 자본이득세를 부과한다. 상속 당시보다 상속 이후 차익에 대한 세금을 걷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이중과세를 막을 수 있단 측면에서 한국이 참고할 만한 사례다. 」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4.01.27 0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