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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물가 뛰고 임금 올라 웃지만…근본적 체질 개선은 미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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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13면

‘닛케이 4만 시대’ 계기로 본 일본 경제

지난달 24일 대만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제1공장 준공식을 개최했다. 연내에는 인근에서 제2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4일 대만 TSMC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제1공장 준공식을 개최했다. 연내에는 인근에서 제2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AP=연합뉴스]

“마침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다카타 하지메 일본은행 정책 심의위원)

일본 정부가 2001년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을 공식화한 이후 23년 만에 ‘디플레이션 탈피’를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등 일정 정도 ‘선순환’ 흐름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본은행(BOJ)이 내달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 정부와 BOJ는 일본 경제의 고질병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려면 2% 이상의 물가 상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 등으로 크게 상승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전년 대비 3.1% 상승하며 1982년 이후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저로 인한 기업 수출 증가와 함께 임금 인상도 이어져 1990년대 자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 빠져들게 했던 초기 요인이 하나 둘 해소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적지 않다며 섣부른 기대감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

일본 닛케이지수 추이

일본 닛케이지수 추이

긍정적 시그널은 일본 경제 곳곳에서 감지된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임금이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오르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일본 기업은 2020년 이후 임금을 매년 3% 이상 올렸다. 지난해 인상률은 평균 3.58%로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은 올해 임금 인상 목표를 1992년 이후 최고 폭인 ‘4% 초과’로 정했다. 일본 최대 대형마트 ‘이온 몰’은 올해 정규직 임금을 7% 인상하기도 했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서는 소비 물꼬를 터야 하는데, 그러려면 임금 인상은 필수”라며 “임금 인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강한 의지 속에 기업 임금이 3년 연속 상승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엔저 효과로 수출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수시장 침체가 이어지고 있어 기업 경영환경은 좋지 않은 편이다. 이 교수는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 인상이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기업도 ‘소비→투자→경기 회복’ 사이클을 되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대승적 결단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임금과 함께 물가가 상승한 만큼 일본의 실질임금은 22개월 연속 하락했다. 그러나 물가만 뛴 한국과 달리 물가·임금이 동시에 오르면서 일본 경제에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실제 미즈호리서치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2023년도 임금 증가율은 전년 1.9%에서 2%대 중반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임금 증가에 따라 소비지출은 0.6%, 국내총생산은 0.4%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올해 임금 인상률은 지난해보다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소비와 국내총생산이 더 뛸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2024년 전망 보고서에서 “2024년 일본 민간소비는 물가상승세 둔화와 임금 인상에 따라 완만하게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일본 증시가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것도 임금 인상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기면서 개인 투자 역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 증시 투자 환경도 좋아졌다. 지난해 시행한 기업 밸류업 상승 프로그램이 본격화하고 있고, 올해 1월에는 소액투자비과세제도(신NISA)가 개편돼 세제 혜택 폭도 커졌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3개월간 도쿄증권거래소 프라임(최상위)시장의 매매 동향을 보면 개인 투자비중이 19%에서 25%로 증가했다”며 “NISA 관련 거래대금은 지난해 11월 5조 엔 수준에서 올 1월 61조 엔 규모로 대폭 늘어났다”고 전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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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으로도 자금이 몰리고 있다. 코로나19 당시 디지털 후진국이란 수모를 겪은 일본은 2022년 ‘스타트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내놓고 반도체·2차전지와 같은 미래산업은 물론 관련 스타트업 집중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2027년까지 스타트업 투자액 규모를 10조 엔(약 89조원)으로 늘리면서 10만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창출하고, 100개를 유니콘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영향으로 스타트업 투자가 증가세다. 일본 스타트업 시장조사업체 이니셜은 “세계적인 투자 혹한기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신규 벤처캐피탈과 신규 펀드 결성액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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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의 경우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곳곳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1조엔(약 8조9215억원)을 들여 일본 구마모토현에 제1공장을 짓고 지난달부터 웨이퍼 양산에 돌입했다. 규슈경제조사협회에 따르면 TSMC 공장 준공에 따른 경제 파급효과가 10년간 20조 엔(약 178조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또 미쓰비시전기는 1000억 엔을 들여 구마모토현 생산 거점에 전기차용 반도체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고, 반도체 대기업 롬도 미야자키현 반도체 공장을 올해 말 가동할 예정이다. 도요타·키옥시아 등 일본 대기업이 설립한 파운드리 업체 라피더스는 지난해 홋카이도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 “2027년까지 10만개 스타트업 창출”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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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뛰고 기업 투자가 늘면서 지난해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속보치)은 1.9%를 기록하며 25년 만에 한국 성장률(1.4%)을 앞질렀다. 그러나 최근의 이 같은 일본 경제의 긍정적 변화가 꾸준히 이어져 근본적인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당장 지난해 4분기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로이터통신은 이에 대해 프랑스 크레디 아그리콜은행의 아이다 타쿠지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말을 인용해 “글로벌 성장 둔화와 국내 수요 부진 등으로 올해 1분기 일본 경제가 다시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내다봤다.

저출산·초고령화 등으로 일본의 노동생산성이 바닥권을 맴돌고 있는 것도 전문가들이 일본 경제를 낙관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2022년 일본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0위로 197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1980년대까지만 해도 4%대였던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2023년 0.25%까지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7일 “일본 정부가 출산율, 노인 노동 참가율 등이 오르지 않으면 내년부터 2060년까지 실질 GDP 성장률이 연평균 0.2%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고강도 저출산·초고령화 대책을 시행 중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7일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출생아 수(속보치)는 전년보다 5.1% 감소한 75만8631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까지 8년 연속 감소하면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김주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가 ‘이제는 (생산인구 부족)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노동 인구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일본은 특히 외국인 노동자 중 고임금 인재뿐만 아니라 저임금 노동자까지 정착해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향후 일본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고,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관건”이라면서도 “일본 경제가 살아난다는 건 거꾸로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일본 경제 회복을) 지켜만 보고 있어선 안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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