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수에 빠진다, 슬램덩크서 스즈메까지 J컬처 열풍

    향수에 빠진다, 슬램덩크서 스즈메까지 J컬처 열풍

     ━  일본 대중문화의 귀환   지난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하 스즈메)’이 개봉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단기간 100만 기록을 세웠다.(17일 현재 124만) ‘스즈메’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실감과 불안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환기시키는 감동과 치유의 영화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11월 개봉해 1000만 관객을 가볍게 돌파했다. ‘너의 이름은.’(2017), ‘날씨의 아이’(2019)에 이어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연속 10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이다.   장르 다양성이 틈새시장 공략 강제징용 배상 합의로 한일 관계가 다시 화두가 된 지금, 일본 대중문화에 훈풍이 불고 있다. 이번주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스즈메'(1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2위),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마을로’(4위) 등 일본 애니가 휩쓸었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부터 바람이 시작됐다. ‘오세이사’는 1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지난해 수입 실사 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 차트에 머물고 있다. 국내에서 일본 실사 영화가 1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02년 ‘주온’ 이후 21년 만이다. ‘슬램덩크’는 17일 기준 누적 관객 수 405만명으로, ‘너의 이름은.’(380만)의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 만화 차트도 1~22위까지 슬램덩크로 도배되며 단행본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   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2 너의 이름은.(2017). 3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 4 스즈메의 문단속(2023). 5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2023). [각 영화사],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지난해 말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웹툰에 잠식되는 일본 망가(Japanese Manga are being eclipsed by Korean webtoons)’라는 기사를 쓰는 등, K팝과 OTT, 웹툰 열풍으로 K콘텐트가 일본을 넘어섰다는 인식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침체된 국내 극장가를 일본 콘텐트가 점령한 모양새라 흥미롭다. 쇠락하던 대중문화 강대국 일본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는 걸까. 2019년부터 이어진 ‘노재팬’ 정서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 극장가의 코로나 회복세가 느린 탓도 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미국·유럽의 관객 회복세가 80%인데 한국은 50% 미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더디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있는 콘텐트 개봉을 미루게 되고, 관객은 극장을 더욱 멀리하는 악순환의 와중에 ‘슬램덩크’처럼 고정팬이 많은 일본 애니가 레트로 감성까지 자극시키며 흥행이 폭발했다”고 분석했다.   ‘일상의 회복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는 “원래 일본 애니를 즐기는 팬들의 움직임이 있다. 대중문화 개방 이후 일본에서 지브리(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이 개봉해 1위를 하면 한국에서도 곧바로 1위를 하는 게 패턴이었는데, ‘노재팬’을 겪다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며 “일본에서도 지금 애니가 계속 잘 되고 있고, ‘스즈메’나 ‘귀멸의 칼날’이 최고 성적을 올렸으니 한국 팬들도 당연히 본다”고 말했다.   사실 경제 흐름이 막혔던 ‘노재팬’ 시국에도 문화는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2019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 만큼 폭발력은 없었지만, 무려 259일 동안 상영되며 ‘국내 최장기 극장 상영 영화’(2위 ‘서편제’ 231일)가 됐다. 2021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도 그해 누적매출 200억원을 넘긴 첫 영화로, 예스24 상반기 결산 만화 차트 1~25위를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석권하기도 했다.   원래 일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1950년대 이미 사람의 마음을 가진 로봇을 상상했던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철완아톰’은 1963년 일본 최초의 TV애니로 제작돼 영미권에 수출됐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1988)는 지난해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가 연극으로 제작할 정도로 세계인에게 친숙한 글로벌 콘텐트다. 지난해 포켓몬빵 광풍을 부른 ‘포켓몬스터’(1996)는 증강현실게임 ‘포켓몬고’ 등 꾸준히 전세계에 문화 현상을 일으키며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누적 매출 1180억 달러 추정)을 올린 미디어 프랜차이즈로 군림하고 있다.   앞선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글로벌 웹툰 시장 규모가 37억달러(약 4조8300억원)를 넘어선 반면 망가(일본 만화) 시장 규모는 2650억엔(약 2조5700억원)으로 축소경향이라고 분석했지만, 종이책 매출만 따진 수치다. 일본출판과학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전자책을 포함한 일본 만화 매출은 지난해 6770억엔(약 6조5600억원) 규모로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 애니메이션 시장도 2021년 매출 2조7422억 엔(약 26조원)으로 전년 대비 13% 커지며 역대 최대 규모가 됐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넘어 일본 대중문화 전반을 보면 몇년 새 부쩍 활력을 잃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콘텐트 시장에서 OTT 등 디지털 비중이 작아서다. 강태웅 교수는 “일본은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 한편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저작권법이 까다롭고 아날로그 체제를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내수시장이 크다 보니 OTT시대가 아직 안 왔다. 드라마의 경우 OTT보다 제작비가 약한 지상파가 모험을 못하고 안정적인 국내 시청률이 보장된 출판문화 기반의 제작을 지속하니 글로벌 경쟁력은 떨어진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저작권법을 고치자는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자극적인 소재도 덜해 졌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플랜 75’(2022),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2022) 처럼 초고령화와 가족해체 등 현실문제를 조명하거나, 드라마 ‘일본침몰’(2021)이나 신카이 마코토 ‘재난 3부작’ 처럼 위기를 담담하게 응시하는 콘텐트가 많다. 복고 트렌드도 강하다. 한동안 침체였던 NHK 대하사극의 시청률이 다시 올라가고, 시대극 영화도 부활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처럼 과거를 동경하고 소박한 일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힐링·향수템이 대세다. ‘스즈메’도 고 히로미·마쓰다 세이코·나카지마 미유키·이노우에 요스이 등 7080 국민가수 메들리가  향수를 자아낸다.   이런 코드는 복수와 폭력, 불평등 등 자극적인 소재 일변도인 한국에서 틈새시장이다. 일본 대중문화는 다양한 장르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고, 그중 우리에게 부족한 장르가 마니아층을 형성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꼭 챙겨본다고 소개한 ‘고독한 미식가’를 비롯해 ‘심야식당’ 등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일드는 음식이나 잔잔한 일상을 소재로 한 힐링 계열이다.   슬램덩크 현상도 향수 마케팅 덕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웹툰의 시대에 90년대 만화 왕도물을 추앙하는 대중심리가 세대 불문이라 ‘현상’이 됐다. ‘슬램덩크’를 13회 관람했다는 30대 여성 조민정씨는 “상영관마다 오리지널 티켓, 포스터 등 특전 MD가 달라서 경기도까지 가고 있는데, 만화를 워낙 좋아해서 보고 또 봐도 재밌다. 만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특유의 작화 스타일 때문에 만화를 다시 보고 싶어져 전집까지 구입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도 “고독한 미식가 봤다”   지난해 포켓몬빵 띠부씰 수집 광풍이 떠오르는 과몰입인데, 오히려 원작을 보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이 장기 흥행을 견인하고 있다. CGV에 따르면 10~30대 관객이 66%고, 예스24의 슬램덩크 만화 구입층도 2030 여성 비중이 43.9%다. 이들은 슬램덩크 굿즈 팝업스토어를 찾아 일본 여행을 갈 정도다. ‘스즈메’도 한정판 굿즈와 콜라보 디저트를 파는 홍대 앞 팝업 카페가 문전성시고, 직접 캐릭터 굿즈를 만들어 SNS에 자랑하는 팬들도 많다.   강태웅 교수는 “전형적인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의 행동”이라며 “과거 쟈니즈 아이돌 팬덤처럼 애니 팬도 캐릭터에 빠져드는 게 특성이다. ‘슬램덩크’도 단순히 옛날 농구만화라 농구팬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20대 여성 사이에서 캐릭터별로 팬덤이 생겨 장기 흥행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동진 평론가도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흥행할 땐 늘 마니아들이 움직인다”면서 “특히 ‘슬램덩크’와 ‘오세이사’ 현상은 우리 극장가의 극단적 니치화를 보여 준다. ‘스즈메’는 작품성도 좋지만 신카이 마코토 마니아 덕이 크다. 당분간 극장가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와 고정 마니아층이 있는 장르만 성공할 것 같다”고 진단했다.   흥미로운 건 민감한 한일 정세가 대중의 문화 수용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게 된 현실이다. 국격이 향상되면서 우리 정서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걸까.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젊은 세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소셜 아이덴티티가 다르다”면서 “집단적 피해자 마인드를 가진 기성세대가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며 취향 공개에 소극적이었다면, 상처를 많이 극복한 지금은 집단의 기억보다 개인의 선택과 기호가 중요해졌다. 일본 문화를 남들보다 잘 향유하는 것도 힙한 취향으로 자랑스러워하는 게 요즘 세대”라고 해석했다.   노재팬과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시절에 대한 반작용으로 외교 현안과 문화적 기호를 구별할 여유가 생겼다는 시각도 있다. 강태웅 교수는 “한일관계는 기복이 심했지만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경색 국면이 3년 넘게 이어진 적은 없었기에 현 상황은 그에 대한 반동현상”이라면서 “이 분위기를 그간 약해진 민간교류와 문화교류를 토대부터 다시 쌓아나갈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3.18 00:01

  • 송혜교의 우아한 복수…“파트2 통쾌한 결말은 아닐 것”

    송혜교의 우아한 복수…“파트2 통쾌한 결말은 아닐 것”

     ━  ‘더 글로리’와 여성 복수극의 진화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같이 칼춤 춰 줄 망나니가 필요한 거지.”   장안의 화제인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여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대사다. 퍽 상징적이다. ‘파리의 연인’(2004)부터 ‘미스터 션샤인’(2018)까지 멜로드라마의 왕좌를 사수해 온 김은숙 작가가 처음으로 복수극에 도전하는 출사표인 동시에, 요즘 드라마 시청자들의 마음의 소리로 들려서다.   바야흐로 복수극 전성시대다. ‘빈센조’(2021)를 비롯해 ‘모범택시’(2021), ‘악마판사’(2021) ‘돼지의 왕’(2022), ‘3인칭 복수’(2022) 등이 1, 2년새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법망을 비껴가는 악인들을 사적 복수로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가 대중을 열광시킨다.   김은숙·송혜교의 변신에 열광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이 대열에 송혜교가 합류했다. ‘태양의 후예’를 비롯해 로맨스 일변도였던 송혜교가 학교폭력 피해자로 변신해 18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실행해 가는 의외성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안길호 감독의 전작 ‘비밀의 숲’에서 감정을 잃어버린 황시목 검사(조승우)가 떠오를 만큼 웃음기 싹 지운 이미지 변신이 놀라운데, 김은숙과 송혜교의 변신에 세계가 들썩인다. 넷플릭스 아시아 1위, 세계 4위를 찍었고, 미국 매체 ‘인사이더’가 한국문화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15가지 복선을 분석한 기사를 냈을 정도다.   사실 현대극에서 사적 복수를 소재 삼은 콘텐트는 늘 정당성이 화두가 됐고, 복수의 주체도 참담한 결말을 맞곤 했다. 아내와 딸을 무참히 살해한 강도들은 물론, 출세를 위해 범죄자와 형량 거래를 한 법조계까지 살벌하게 응징하는 영화 ‘모범시민’(2009), 어린 딸을 짓밟고도 처벌받지 않는 소년들을 직접 처단하는 영화 ‘방황하는 칼날’(2014)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대중은 다크 히어로가 ‘내 복수도 대신해 주길’ 바라는 눈치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정당성보다 정의 실현을 바라는 대중은 공정성에 민감해진 시대를 반영한다. 늘 평등한 삶에 대한 욕구 불만족 상태라서다.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10여년 전만 해도 계층 격차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면, 이제 SNS를 통한 비교가 일상이 되면서 수저계급론이 나오고 공정성에 민감한 세상이 됐다”면서 “법이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지수가 올라간 상태에서 시스템이 못해주는 복수를 히어로가 해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송혜교의 흑화가 낯설 뿐, 여성의 복수극도 드물지 않다. 요즘 MBC ‘마녀의 게임’으로 컴백한 장서희가 일일드라마 판 ‘복수의 여왕’이다. 2000년대 그가 주연한 ‘인어아가씨’(2002)와 ‘아내의 유혹’(2008)이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를 응징하는 서사였다면, ‘마녀의 게임’은 거대악의 음모와 출생의 비밀까지 엮어 자극의 수위를 높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OTT라는 뉴미디어를 타고 노골적인 학폭 장면을 묘사하며 드라마계 ‘청불’ 여성 복수극의 새 장을 열었다. 사실 여성 복수극은 원래 잔인한 게 특징이다. 가냘픈 여성이 잔인한 복수를 할 때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여성 복수극의 원형인 일본 영화 ‘여죄수 사소리’(1972)와 ‘슈라 유키히메’(1973)부터 사무라이 영화 특유의 잔혹함을 무기로 탄생했다. 난폭한 남성성에 대한 원한과 잔혹한 복수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애틋한 모성이다. 가장 성공한 여성 복수극으로 꼽히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2003)이 두 작품을 오마주한 이래, ‘남성 대 여성’과 ‘모성’ 클리셰는 여성 복수극의 공식이 됐다.   지금까지도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여성 복수극의 마스터플롯이다. 2021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2020)도 의대생들의 집단 성폭행 소재인데, ‘전도유망한 청년의 삶을 망칠 수 없다’며 성범죄자 남성에게 관대한 세상을 비꼬고 있다. 지금 핫한 넷플릭스 시리즈 ‘우먼 오브 더 데드’(2022) 역시 주인공 남편의 갑작스런 사고사 배후에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류층 남성들의 성폭행 카르텔이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여성 복수극은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일까.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아주 오랫동안 억압과 피억압 계층의 대립을 남성 대 여성으로 은유해 왔고, 그 구조를 바로잡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며 “권선징악의 대주제를 살리기 위해 선악 구분의 서사가 중요하고, 여성 복수의 정당성을 돋보이게 하는 데 모성애만한 것이 없다. 특히 복수의 모멘텀을 자신을 넘어 자식이나 가족이라는 지켜야 할 대상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의 ‘청불’ 여성 복수극도 ‘친절한 금자씨’(2005)부터 ‘악녀’(2017)까지 젠더 이분법과 모성 클리셰로 설득력을 갖춘 피칠갑 액션의 공식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더 글로리’의 미덕은 이 해묵은 공식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는 점이다. ‘더 글로리’의 세계관은 훨씬 다층적이다. 개인의 원한을 학폭과 수저계급론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확장시켜 ‘펜트하우스’ 급으로 대중의 분노 수위를 끌어올렸다.   드라마 평론가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더 글로리’는 복수보다 학폭의 폭력성과 사회적 심각성에 방점이 찍힌다”고 강조했다. “학폭이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집중해서 보여주고, 제도가 마비된 상황에서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파괴된 영혼을 애도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공권력마저 학폭에 마비된 근원이 신자유주의 이후 재력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계급질서라는 것이 공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동은의 복수는 젠더와도 무관하다. 복수의 칼이 겨눈 절대악은 여성인 연진이다. 남성은 오히려 복수의 도구로 쓰인다. 복수극이라는 장르물에 주여정(이도현)과 하도영(정성일)이라는 삼각 로맨스 바이브도 그다지 생뚱맞지 않다. 김은숙이 첫 장르물에 자신의 장기를 아낌없이 갈아 넣은 양념이라 맛깔스럽다.   두 남성보다 더 강력한 여성 조력자 강현남(염혜란)이 있기에 그렇다. “우리 손에 피 묻힐 일 없을 것”이라는 동은의 대사처럼, 그녀들의 복수에 액션은 없다. ‘파트1이 끝났는데 복수는 시작도 안 했다’는 불만이 있지만, 복수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바둑 두듯이 가해자들의 성역을 조금씩 파고들며 악의 카르텔 안에서 서로를 해하는 지옥을 한창 건축 중이다. 첫 타깃인 명오의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윤소희 시신을 빌미로 연진을 자극한 결과로 암시된다.   태국 등 해외서도 학폭 공론화   미나토 가나에 소설 원작 영화 ‘고백’. [사진 각 영화사] 김은숙은 모성 클리셰도 박살냈다. 모성이 불타는 건 오히려 가해자 쪽이다. 무속 광신자인 연진 모친이 비뚤어진 모성을 전시하고, 예솔에 대한 연진의 모성은 복수의 트리거가 된다.   핵심은 피칠갑의 카타르시스 없이 심리전으로 덫을 놓는 ‘우아한 복수’다. ‘아름다운 복수극’이라 불리는 일본 영화 ‘고백(2010)’이 액션 없이도 비주얼 거장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상미와 함께 더욱 잔혹한 복수극이 된 것과도 같다. 중학교 여교사가 딸을 죽인 소년들을 심리전으로 응징하는 서사가 충격을 던졌고,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하향한 소년법 개정에 불씨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언어폭력이 신체폭력보다 큰 상처를 주듯, 이런 간접 공격이 때론 더 강렬하다. 조지선 교수는 “헛소문을 내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왕따가 더 심한 폭력인 것처럼, 노골적인 공격이 아니라도 치밀한 장기 플랜을 켜켜이 완성해 가는 동은을 지켜보는 시청자는 그 은근한 공격성에 오싹함을 느낀다. 그래서 피 한방울 없이도 더 잔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최신작 ‘우먼 오브 더 데드’. [사진 각 영화사] 그럼 3월 10일 공개되는 파트2의 복수의 끝은 어떨까. 동은이 연진의 딸 예솔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복수를 완성하는 방식이 무엇일지, 전 세계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아름다운 K복수극’인 이유는 따로 있다. 폭력적 액션을 소비하고 마는 여타 복수극과 달리, 태국 등 해외에서까지 ‘학폭’을 공론화하고 있어서다. 한동안 판타지 속에 머물던 드라마가 글로벌하게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획득한 것이다.   윤석진 교수는 ‘더 글로리’를 ‘복수극’이라는 오락 영역으로 한정짓는 것을 경계하며,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폭력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극적 재미가 아니라 어젠다 세팅을 위한 것이고, 학폭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파트2에서 통쾌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복수가 이뤄지더라도 피해자의 영혼은 회복될 수 없다. 파괴된 영혼이 자기 삶까지 포기하고 선택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게 윤 교수의 말이다. 조지선 교수도 “‘엄마는 내가 죽도록 맞고 오는 것과 죽도록 패고 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가슴 아플 것 같냐’는 딸의 질문이 집필 계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 패고 있는 동은도 고통스러울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혀도 스스로 벌 받는 쓸쓸한 결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1.28 00:01

  • ‘하나의 중국’ 흔드는 미국, 대만 해협 긴장의 물결 높아져

    ‘하나의 중국’ 흔드는 미국, 대만 해협 긴장의 물결 높아져

     ━  [SUNDAY 분석] 대만 위기설 고조   대만이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미·중 경쟁 격화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악화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대만에 쏠리면서다. 대만은 미·중 모두에게 양보할 수 없는 지리적·전략적 요충지다. 미국에게 대만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최전방 지역으로서 가치가 크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도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 기조를 그대로 이어갈 태세다.   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을 별도의 독립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고 대만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서방국가에도 초강경 대응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만 해협에서의 군사적 긴장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미·중 양국이 대만의 미묘한 지정학적 입지를 둘러싸고 자국 이익 극대화를 앞세우며 경제·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맞서면서 대만이 미·중 갈등의 ‘핫 프런티어’로 급부상하는 모습이다.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인 시어도어 루스벨트호가 지난 5일 남중국해를 지나고 있다. [사진 미 해군] 지난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이례적으로 대만 문제가 언급됐다. 양국 정상은 공동 성명에서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한·미 정상이 공동 성명에서 대만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도 반발하고 나섰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한·미) 공동 성명 내용에 우려를 표한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으로 외부 세력의 간섭을 용납할 수 없다”며 “관련국들은 대만 문제에 대한 언행에 신중해야 하며 불장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도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대만 문제가 거론됐는데 29년 전 한·중 수교 때 이미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 직후 중국 정부가 보인 반응보다는 절제된 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핵심 이익인 대만 문제와 관련한 후폭풍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한국에 도입된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한한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대만 문제와 관련해 원칙적인 수준이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미국이 대만을 중시하고 있다는 방증이란 해석이다.   미국 입장에서 대만의 활용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최전방 프런티어로서 지정학적 입지가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또한 대만 이슈를 통해 베이징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면서 다른 분야에서의 양보를 얻어내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미국은 대만 정부와의 모든 접촉을 비공식화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조하는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관행은 지난 1월 트럼프 정부 임기 막판에 깨졌다. 미 국무부가 대만 당국자들과의 접촉 금지 제한을 풀면서다. 바이든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만 당국자들과의 접촉을 장려하고 나섰다. 지난 20일엔 스콧 버스비 미 국무부 부차관보와 탕펑 대만 정무위원이 화상 회담을 한 데 대해 언론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전임 트럼프 행정부보다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하는 모양새다. AP통신은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대만과의 교류 확대 전략은 다른 나라들의 외교 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의 눈치를 덜 보면서 대만과의 접촉을 늘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대만 입장에서도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런 가운데 미·중 양국은 대만 해협을 둘러싸고 군사적으로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지난 18일엔 미 해군 7함대 소속 구축함 커티스 윌버함이 ‘항행의 자유’ 작전을 위해 대만 해협을 통과했다. 이에 맞서 중국도 JH-7 전폭기 2대 등 4대의 군용기를 대만 방공식별구역으로 출동시켰다. 중국 국방부는 “중국 군대는 위협과 도발에 대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미군의 위협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대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은 피하면서 아직까진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며 “하지만 지난 3월 알래스카 고위급 회담 이후 크게 고조된 미·중 긴장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대만 해협에서의 위기감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일각에선 ‘대만 위기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SCMP는 중국양안아카데미를 인용해 “양안 관계가 전쟁 직전의 상황”이라며 “지금의 위기 지수는 국공내전 이후 장제스가 대만으로 건너갔을 때보다도 높다”고 전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대만이 그동안 미·중 사이에서 견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이 사라지고 있다”며 “이 때문에 대만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됐다”고 우려했다. 대만과 미국이 급속히 밀착되면서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중국과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는 얘기다.   최근엔 코로나 백신을 둘러싸고도 중국과 대만 사이에 마찰음이 커지고 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지난 26일 “화이자 백신을 도입하기 위한 계약을 중국이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대만 정부는 중국의 백신 지원 제안을 거절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대만이 백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막다른 길에 처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이에 더해 미국과 함께 중국 견제에 앞장서고 있는 일본도 올해 방위백서에 대만 문제를 기술할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정세의 안정이 일본의 안전 보장과 국제사회의 안정에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일본 정부가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대만 정세를 방위백서에 포함시키는 것은 처음이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본의 경우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어 대만 정세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중국이 주변국들에 의해 고립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질수록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될 수 있고 이는 한반도 정세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1.05.29 00:20

  • 한·미·일 3각 협력 복원 통해 ‘중국 압박’ 강화 나서

    한·미·일 3각 협력 복원 통해 ‘중국 압박’ 강화 나서

     ━  [SUNDAY 분석] 미 국무·국방, 일본 거쳐 방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3일(현지시간) 국무부 청사에서 취임 후 첫 외교 정책 연설을 하고 있다. 블링컨 장관은 17~18일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AP=연합뉴스] 2009년 2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국무장관이 된 힐러리 클린턴의 첫 해외 순방은 ‘파격’이었다.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아시아를 처음 방문지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장관은 당시 일본·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과 중국을 잇따라 방문했다. 이전까지 미국의 역대 국무장관들이 취임하자마자 향한 곳은 유럽과 중동이었다. 유럽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고 중동은 국제정세를 좌우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는 17일 방한하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도 아시아로 정해졌다. 16~17일 일본을 거쳐 한국을 찾는다.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이었던 렉스 틸러슨의 첫 해외 방문지도 동북아시아였다. 최근 미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 해외 순방지 네 곳 중 세 곳이 아시아인 셈이다. 〈그래픽 참조〉   이는 오바마 행정부 이후 아시아가 미 외교 정책 우선순위에서 유럽·중동 못지않게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커진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시작된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 중시 정책)’가 미국의 확고부동한 외교 1순위로 떠오른 것이다.   오스틴 미 국방장관 하지만 포인트는 크게 달라졌다. 오바마 정부 때까지만도 중국에 대한 견제와 함께 협력도 강조됐다. 반면 바이든 정부의 아시아 중시 정책은 주로 ‘중국 견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 대표적이다. 다음 주 방한하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가장 큰 관심사 또한 ‘동맹과 함께하는 중국 견제’다. 북핵 문제를 포함한 대북 정책 조율과 한·일 관계 개선 등도 주요 의제로 꼽힌다. 함께 방한하는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전시작전권 전환 문제 등을 한국 정부와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 2+2(외교+국방) 장관 회의는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 열리는 것으로 2016년 이후 5년 만이다. 2010년부터 격년으로 열리다가 트럼프 정부 들어 중단됐다. 그런 만큼 이번 회의는 한·미 모두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지난 1월 출범한 바이든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외교·안보 분야에서 얼마나 긴밀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느냐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AP 통신은 “이번 아시아 순방의 가장 큰 목적은 동맹 강화를 통한 중국 압박”이라며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그동안 강조해 왔던 다자간 협력을 통한 중국 고립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 백악관이 이달 초 공개한 ‘국가안보전략 중간 지침’도 중국을 “유일한 경쟁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 글로벌 의제를 설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오스틴 국방장관이 한·일 방문 후 인도를 찾는 것도 이 같은 기조에 따른 전략적 행보로 풀이된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4대 해양 강국이 결성한 ‘쿼드(Quad)’ 멤버이자 중국의 강력한 역내 라이벌이다. 12일(현지시간)에는 미·일·호주·인도 등 쿼드 4개국 정상들이 화상 회의를 열고 결속을 재확인했다.   여기에 미국이 쿼드 참여국을 늘려 ‘쿼드 플러스’로 확장을 꾀하고 나서면서 우리 정부의 대응 전략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쿼드 플러스에 참여할 경우 중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것이란 점에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에 대해 서정건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미국이 원칙적으로 한국에 쿼드 플러스 참여를 요구할 수 있지만 강하게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주요 동맹인 한국과의 갈등이 불거질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 교수는 “우리 정부도 ‘다른 나라의 이익을 자동으로 배제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고 강조한 만큼 나름의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번 회담에서는 미국의 국무·국방장관이 동시에 방한하는 만큼 북핵 등 대북 정책 공조 현안도 활발히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미 국가안보전략 중간 지침을 통해 북한에 대한 기본 시각을 밝힌 상태다. 지침에는 “북한과 이란은 판도를 뒤집는(game-changing) 능력과 기술을 추구하며 미국의 동맹을 위협하고 역내 안정을 위태롭게 한다”며 북한의 핵·미사일로 인한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한·일 양국과 적극 협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CNN은 “한국과의 대북 정책 논의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가 관심사”라며 “그동안 한국은 적극적인 대북 접근을 강조하는 등 바이든 행정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 수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큼 이번 2+2 회의에서는 서로에 대한 탐색전과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의견 교환만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로이터 통신은 미 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북한에 대한 고도의 전략적 재검토가 이르면 4월 중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며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정책이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보도했다.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 관계는 미국에도 적잖은 부담이다. 따라서 이번 2+2 회의에서는 한·일 갈등 해소 방안도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망가진 동맹 관계를 회복하고 아시아에서 강력한 리더로서의 위상을 되찾는 데 있어 한·일 갈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한·일 관계를 복구해 한·미·일 삼각 협력을 단단히 구축하는 게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외교 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며 “지난달 열린 한·미·일 외교 당국자 회의도 바이든 행정부가 한·일 양국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자리였다”고 분석했다. 한국과의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축), 일본과의 동맹을 코너스톤(cornerstone·주춧돌)이라고 여기는 바이든 행정부가 한·미·일 협력 강화를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타결된 만큼 전작권 전환 등 현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전작권이 조기에 전환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군 대비 태세 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선행돼야 하지만 한·미 연합훈련 축소 등으로 제대로 된 평가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관련기사블링컨, 북·중·이란 등 적대국엔 가차 없는 '강경 원칙주의자'

    2021.03.13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