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그룹에 어음 부활=국내 10대 기업집단 계열로 매출 1조원이 넘는 A사는 이달 들어 협력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 조건을 바꿨다. 납품 받은 뒤 20일 안에 전액 현금으로 결제해 주던 것을 납품 후 한 달 안에 만기 석 달짜리 어음을 주기로 한 것. 회사 관계자는 “매출과 이익이 줄어드는 가운데 해외 자금시장까지 얼어붙어 어쩔 수 없이 자금부담을 협력업체와 나눠 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바람에 이 회사 거래업체들도 덩달이 운영자금 압박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 대기업 어음을 금융시장에서 할인받아 현금화하기가 쉽지 않다. 어음 발행 업체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서울 명동 사채시장에 돌기 시작한 탓이다. B협력사 관계자는 “은행은 물론이고 제2금융권에서도 회사 어음이 잘 통하지 않아 그냥 금고에 넣어두고 만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A사처럼 금융불안으로 납품 대금을 현찰로 주지 못하는 곳이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8월 말까지 이 은행에서 결제 처리한 중소기업 발행 어음은 모두 4조5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6419억원) 늘어난 것이다.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는 “유동성을 좀 더 확보하려고 거래업체에 현금 대신 어음을 주는 업체가 늘고 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어음할인 수요가 올 들어 늘어난 걸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기업·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영세한 협력업체에 어음을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중소협력업체를 동반자로 삼으려는 대기업이 늘었고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협력을 원하는 사회적 여론도 압력으로 작용해 대부분 기업들이 현금결제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10대 그룹은 현금결제를 해야 한다’는 업계 불문율이 조성됐다. 하지만 근래 사업환경이 급속히 악화하면서 일부 업체들이 석 달짜리 어음 지급을 재개한 것이다.
◆마른 수건도 쥐어 짜=현금 결제 업체라도 비용절감을 부르짖는 곳이 늘고 있다. 국내 양대 통신회사인 KT와 SK텔레콤도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KT는 하반기부터 부장급이 소지하던 법인카드를 회수했다. 또 연간 기본급의 500%이던 성과급을 다소 낮출 것을 검토하고 있다. SK텔레콤의 김신배 사장은 최근 임원회의에서 “비용절감에 예외인 부서는 없다”고 선언하고 부문별로 구체적인 방안을 내도록 했다. 이에 따라 이 회사는 보유 골프회원권을 연말까지 어느 정도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설비투자·마케팅에 드는 필수 경비는 확실히 집행하되 기타 낭비 요소를 제거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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