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지법’ 스님이 날아다닌다, 광부들의 ‘검은 길’ 천지개벽

  • 카드 발행 일시2024.05.07

“석탄을 실어 나르던 당시의 길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어요. 바닥이 전부 돌 천지였고, 잠깐 한눈팔면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벽이었지요. 이 길을 60년대 초에 국토건설단이 닦았다고 해요. 그 사람들 덕분에 석탄을 실어 나르고 저 같은 사람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석탄 차를 몰다가 나중에 광부들을 태우는 버스를 운전했는데, 처음에 석탄 차는 2.5톤 트럭을 개조해 5톤 차로 만들었어요. 쇠 도람통(드럼통)을 펴서 트럭 적재함을 높게 쌓은 형태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위험했지요. 스무살 무렵부터 운전수 보조로 시작했는데, 첫 월급이 4000원이었어요. 생활이 어려웠죠. 3년 뒤 면허를 따서 운전수가 됐고, 그때 월급이 많이 올랐어요. 덕분에 4남매를 잘 키울 수 있었죠.”

박동규(76) 씨가 강원 정선 운탄고도(運炭高道, 당시 운탄길)를 걸으며, 말했다. 국토건설단은 1960년대,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 노역을 시키는 형태로 운영됐다. 마땅한 장비도 없이 곡괭이와 삽으로 길을 내야 했다. 그런 길이 지금은 운탄고도(雲坦高道)가 됐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 비나 강물을 검은색을 칠했다”고 할 만큼 검은 석탄가루 날리던 험한 길이 이제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고원 평탄 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운탄고도를 걷는 천웅(오른쪽) 정암사 주지 스님과 정선 광부들의 걷기 모임 한둘회 회원들. 김영주 기자.

운탄고도를 걷는 천웅(오른쪽) 정암사 주지 스님과 정선 광부들의 걷기 모임 한둘회 회원들. 김영주 기자.

지난 4일 운탄고도를 당시 광부로 일한 8명과 정암사 천웅 주지 스님과 함께 걸었다. 정암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으로 정선 주민들에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가져왔다는 마노석으로 세운 수마노탑은 4년 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했다.

천웅 스님은 3년 전부터 정선 옛길 걷기 모임 ‘님과 함께’ 대장 역할을 맡고 있다. 정선의 스님·신부님·목사님이 한데 모여 만든 걷기 모임으로 매달 한 차례씩 정선 주민들과 함께 정선의 옛길을 걷는다고 한다. 이날은 사북 광부들의 모임인 한둘회 회원들과 운탄고도 5길(화절령~만항재) 일부를 걸었다. 하이원 CC가 있는 하이원팰리스호텔 주차장에서 백운산(1426m) 7부 능선을 지나 하이원리조트가 자리한 도롱이연못까지 6㎞(왕복 약 12㎞)의 길이다. 쉬엄쉬엄 걷는데 약 4시간 정도 걸린다.

천웅 스님은 이 길을 수행 삼아 매일 걷는다고 한다. 배낭도 없이, 손에 생수 한병도 들지 않고 혼자서 맨몸으로 걷는다. 이날도 장삼에 등산화, 밀짚모자 외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왔다 갔다 하면 12㎞ 정도 되는데, 2시간 정도에 걷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걷게 되거든요. 원래 빨리 걷는 걸 좋아하고, 또 절에서 일이 많기도 하고요. ”

매일 운탄고도를 걷는 천웅 정암사 주지 스님. 김영주 기자.

매일 운탄고도를 걷는 천웅 정암사 주지 스님. 김영주 기자.

매일 산길을 걸어서인지 스님의 걷기 체력은 남달랐다. 실제 걸음걸이가 빨랐다. ‘님과 함께’ 모임에서 총무를 맡는 권혜경 씨는 “산에서 축지법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빨리 걷는다”고 말했다.

“명상하듯 걷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걸음이 빨라져요. 또 빨리 걷다 보면 잡념 없이 걸을 수 있고요. 이것저것 막 꺼내서 생각하면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잖아요. 고민이 많으면 오히려 기우(杞憂)가 돼요. 그게 가장 안 좋은 것이죠. 앞날에 대해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걱정보단 실행이 우선이죠. 그러려면 지혜가 필요하고요. 이렇게 걸으면서 명상을 하고, 그런 시간에 지혜가 생기는 거죠. 저도 출가한 후에 선방에서 10년 정도 참선 했는데, (선방도 좋지만)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 참 좋습니다.”

봄에 걷기 좋은 야생화 길  

정선 운탄고도 5길을 걷다가 휴식을 취하는 한둘회 회원들. 김영주 기자.

정선 운탄고도 5길을 걷다가 휴식을 취하는 한둘회 회원들. 김영주 기자.

본래 운탄고도 5길은 정선 사북읍 화절령(1200m)에서 시작해 하이원리조트 위 백운산을 돌아 만항재(1330m)까지로 설계돼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러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간 뒤, 되돌아오는 것으로 코스를 잡았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기가 좋고, 길이 완만해 발걸음이 수월하다.

길엔 노오란 괴불주머니를 비롯해 야생화가 만발했다. 또 연둣빛 새잎이 무성하게 돋은 숲은 터널을 이뤘다. 이날 정선의 낮 최고 기온은 29도에 육박했는데, 운탄고도 5길은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