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어느 퇴직 관료와의 취중한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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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400원을 돌파한 환율의 고공행진이 십 년 전의 악몽을 되살려내던 지난 주말,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인사항명이란 괘씸죄에 걸려 30년 공직생활을 접었던 모 부처의 전직 차관이었다. 유능하고 강직하기로 소문났던 그 친구가 2006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바다이야기’로 마음고생을 꽤나 했을 거라 위로했지만, 그것은 쫓아낸 명분에 불과했다고 스치듯 말했다. 사건의 전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약간의 취기를 빌려 2년 전 ‘그’가 되었다.

쓸 만한 관직이 비교적 많은 그 부처로 낙하산 인사 명단이 자주 내려왔다. 더러는 들어줘야 했다. 그런데, 적자투성이의 모 TV방송국 고위직 인사문제가 화근이었다. 이미 없애기로 결정한 그 자리로 청와대가 특정인 명단을 하달했다. 권력자의 전직 비서였다. 청와대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정권에 흠이 될 게 뻔했다. ‘급’이 형편없이 낮았다. 거절 사인을 올렸다. 대학동기가 수장으로 있는 청와대팀에서 전갈이 왔다. 만나서 회포나 풀자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만났다. 캠퍼스 밖에서 30년 만에 조우한 동기생과 즐거운 추억을 나눴다. 유쾌했다. 그 분위기를 빌려 속을 털어놓았다. 인사를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고.

며칠 뒤, 그 수장을 보좌하는 투박하기로 소문난 비서관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우리 팀장께 그 무슨 오만불손한 태도인가, 왜 반말을 해대느냐’는 뜬금없는 충고였다. 권력 실세의 일갈이었다. 허탈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민정실에서 조사관이 파견되었다. 그동안 그 부처에서 단행했던 인사 관련 서류를 모두 챙겨 들고 있었다. 서슬 시퍼런 조사관이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비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전의로 충만한 젊은 전사였다. 전리품은 없었지만, 전사(戰史)는 창작될 수 있다는 점이 약간 꺼림칙하기는 했다.

공직생활을 접기로 이미 결심한 뒤라 마음은 한결 편했다. 30년 동안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 지혜, 경험을 사회로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관료란 정권의 손발이기에 권력이 불편해하면 관복을 벗고 낙향해야 한다. 다만 괘씸죄·역모죄·항명죄에 걸려 위리안치(圍籬安置)당하거나 사약(死藥)을 받지만 않는다면 행복한 낙향이라고 생각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단서를 달았다. 더 미련이 없기에 조용하게 끝내자고. 그러나, 답은 사납고 날카로웠다. “배 째드리지요!”였다.

출국금지령이 내렸다. 그리고 ‘바다이야기’가 터졌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도박용 상품권이 이념혁명가들과 줄이 닿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유통망의 결재권 어디에 나를 엮는 시나리오였다. 권력의 무차별 폭격은 매서웠다. 30년 공직의 보람은 포연(砲煙)처럼 코에 쓰렸다. 쑥대밭이 된 지난 세월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초여름의 산천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작은 마을들이 출장명령서도, 스케줄도, 만날 사람도 예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여로(旅路)를 열어주었다. 그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 사건이 종결되자 여로도 끝났다. 사건 담당검사가 마지막 진술에 동의했다. “이거, 국력 낭비지요!”

새 정권이 들어서서 장엄한 축포를 쏘아대던 지난봄, 밤이 이슥했던 시각에 지하철을 탔다. 정권교체로 표정이 한결 밝았던 승객들 사이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사나운 부하직원들을 대동하고 회포나 풀자던 그 대학동기였다. 처진 어깨였다. 그 비장한 순간에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을 참느라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하차했고 군중 사이로 사라졌다. 뒷모습은 여전히 힘이 없었다.

‘정치의 성패는 인재등용에 달렸다’고 그 퇴직관료는 자신의 쓰린 경험을 정리했다. 필자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로 화답했다. ‘정치는 국가권력이라는 강제력과 손을 잡는 일인데, 잘 쓰면 대의(大義)가 되고, 못 쓰면 악마가 된다’. 베버는 덧붙였다. 자기 사람들을 끌어 모아 집단도취적 환경을 조성하면 결국 대의를 그르치고 국가의 수레바퀴는 늪에 빠진다고. 그렇다면, 세계적 금융위기로 공포와 불안이 엄습하는 요즘 일사불란한 대비책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은 2년 전의 이 얘기가 현 정권에도 다반사로 일어난 탓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리만브라더즈(Lee+Man)라는 신조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닐 터이고, 특정 정파의 독주가 신속한 위기관리를 저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제 시작된 대통령의 노변담화(爐邊談話)가 ‘독주의 옹호’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송호근 서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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