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한테 내 공장 가져가라고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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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공장을 가져가라고 했다. 돈 나올 데가 없다는 걸 나보다 은행이 더 잘 안다. 만기도 안 된 대출금을 빨리 갚으라니 공장밖에 내놓을 게 없다.”

부산에서 자동차 부품공장을 운영하는 최모 사장의 푸념이다. 그는 지난해 말 부산은행에서 2010년에 갚기로 하고 10억원의 운전자금을 빌렸다. 그는 “우리가 부품을 납품하는 미국 자동차 업체의 경영이 악화됐다는 소식이 나온 뒤 대출 담당 직원이 우리 회사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대출금을 갚으라고 종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은 은행 앞에서 영원한 을(乙)일 수밖에 없다. 한두 달의 말미도 주지 않고 원칙대로 대출금을 거둬갈 때는 야속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서 철강자재 수입을 하는 D사의 이모 대표도 비슷한 심정이다.

“저희 직원들은 담당 은행 지점장이 올 때마다 ‘저승사자’가 왔다고 해요.”

이 대표는 8월 말에 철강자재를 수입하면서 결제대금 200만 달러를 신한은행에서 두 달짜리 기한부 어음을 끊어 결제했다. 자재를 국내 업체에 팔아 대금을 갚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수입한 물량은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 건설 경기가 가라앉아 팔지 못한 것. 그대로 앉아 약 3억6000만원의 환차손이 발생했다. 이 대표는 “은행에 만기를 두 달만 연장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면박만 당했다. 정기예금을 담보로 넣겠다고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유행처럼 엔화 대출(싼 엔화로 대출받은 뒤 엔화로 갚는 것)을 받은 중소업체들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인천시 부평에서 전자업체에 고무제품을 납품하는 K사의 박모 사장은 지난해 외환은행에서 시중금리보다 훨씬 싼 3.5%대의 엔화 대출을 받았다. 당시 그 은행은 파격적으로 공장 담보 가격의 100%를 다 대출해 줬다. 1년 거치 최장 5년 상환 조건이었다. 하지만 외환은행은 최근 엔화가 1년 새 60% 정도 뛰었다며 롤오버(만기연장)가 어렵다는 통보를 했다고 한다. 박 사장은 은행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경인데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박 사장은 “일부 중소업체 사장들은 삼삼오오 모여 은행에 가서 항의를 했다. 아예 세를 모아 큰 시위를 벌여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대출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거나 아예 몽땅 회수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 건실한 중소기업까지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13일 라디오 연설에서 “은행들은 비가 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이럴 때 금융회사들이 나서 흑자도산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D사의 이 대표는 “대통령 말은 백 번 옳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비만 오면 은행들이 달려와 우산을 빼앗는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달 하순 154개 업체를 상대로 은행 거래 때 느끼는 어려움을 조사했다. 중앙회 이창호 과장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중소기업 경영에 미치는 여파로 64%가 은행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꼽았다”고 말했다.

은행들도 할 말이 많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금융권 사정이 워낙 안 좋아 대출 만기 때 원금의 10%를 갚고 연장해 주던 것을 요즘은 20~30%를 요구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엔화 대출을 받은 중소기업이 원금을 상환하지 못하겠다면 대신 연리 8%대인 원화 대출로 바꾸도록 권할 정도로 중소업계를 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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