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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고향 없는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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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7면

추석이 재생시키는 고향의 이미지는 자신의 탄생 기록과 성장일기가 조상의 생활사 한 부분으로 편입된 촌락이다. 그것은 여전히 누런 곡식이 익는 농촌이거나 아직도 애잔한 시골 정서와 끈끈한 혈연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지방 소도시에나 어울리는 영상이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인구의 절반이 고향을 떠났고, 현재 농촌 거주민이 인구의 7% 정도에 불과하기에 그런 이미지의 고향은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귀향길에 오른다. 하루 나절이 족히 걸리는 곳일지라도, 긴 차량 행렬에 끼여 기어이 가고야 만다. 부모가 살았던 집터에서 성장의 추억을 들춰 보고, 잡풀과 덤불에 덮여 나지막이 엎드린 조상의 무덤을 둘러보는 무언의 관습 속에는 자신의 기원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숨겨 있다.

찾아가는 그곳이 자신의 출생지이고, 거기에 부모님이 살고 있다면 추석 귀향처럼 설레는 일은 없다. 자신의 출생 기억을 오롯이 간직한 집이나 마을에 부모님까지 살아계시는 이 완벽한 ‘생물학적 고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고 있다. 아마 10%도 채 안 될 것이다. 나머지는 종가와 장손이 주관하는 제사에 참여하거나, 그곳에 모여드는 직계가족, 일가친척을 만나 근황을 나누는 게 보통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만남 속에서 ‘인류학적 고향’이 재생된다는 점이다. 핏줄을 나눈 사람들은 용모와 기질이 비슷해 평소에 의아했던 집안의 기밀들이나 괴벽의 출처가 쉽게 풀린다. 왜 사촌형의 주량이 집안 최고인지, 왜 잘난 삼촌이 젊은 시절 그토록 처절한 방랑 생활을 해야 했는지, 왜 젊은 고모는 불가에 입문해야 했는지, 왜 종갓집 재산이 일찍이 거덜났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만한 살아있는 물증들이 모여 인류학적 고향을 빚어내는 것이다. 모이는 곳이 타관이어도 상관없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추석이 명절이 아니라 괴롭고 두려운 날이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차례 때문이다. 차례는 고향 의식과 조상 숭배를 재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다. 고령 세대가 모든 것은 다 양보해도 제의(祭儀)권력만큼은 끝까지 쥐고 있는 이유는 혈연·지연이 중첩된 자신의 향수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후손들은 시큰둥하다. 출생지와 성장 배경이 각각 다르고, 조상의 얼굴과 이력을 모르는 후손들은 차례음식을 누가 어떻게 장만할까를 두고 서로 긴장한다.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인류학적 고향이 형성되기는커녕 반목과 갈등이 싹튼다. 명절은 ‘음식’이고, 음식은 노동과 비용이다. 고령 세대 감독, 장년 세대 출연, 젊은 세대 관람이라는 합작영화 상영이 끝나고 돌아올 때에야 비로소 추석 달빛의 그윽함을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서 장년 세대는 눈치챌 것이다. 고령 세대가 고집하는 그런 완벽한 고향의 이미지는 여지없이 퇴색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조상과의 친족적 유대와 생물학적 고향의 의미를 숭상해온 부모 세대는 곧 소멸할 것인 반면 자신의 삶과 고향을 연결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세대들이 태어났다.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아파트촌과 도시 병원에서 출생했고, 더욱이 형제와 남매 개념을 전혀 모르는 외동 자녀가 주류를 이루는 가족환경에서 생물학적·인류학적 고향의 의미는 옅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혈연집단이나 문중 같은 세력 개념으로서의 ‘사회학적 고향’도 동시에 소멸될 듯싶다. 고향! 조상! 같은 추석 명절의 화두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 즉 ‘고향 없는 세대’가 출현하고 있다. 한국 사회와 추석 세태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궁금하다.

송호근 서울대·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