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80대 “20일 전 병원 퇴원, 죽기 살기로 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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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호 02면

제22대 총선 사전투표 첫날인 5일 오전 7시22분. 서울 양천구 신정4동 주민센터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온 시각장애인 윤석철(44)씨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보통 투표에 1~3분 남짓 걸리지만 윤씨는 이날 오전 6시56분 투표소에 도착한 지 26분 만에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을 수 있었다.

본인 확인 작업까진 수월했지만 도장을 찍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점자용 투표 보조용구에 투표용지를 끼우고 후보자 이름을 손으로 읽은 뒤 현장 인력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윤씨는 “시각장애인은 가끔 장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팡이를 접을 때가 있다”며 “장애인들이 지팡이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했다”고 말했다.

사전투표 첫날을 맞아 많은 시민이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민모(83)씨는 오전 8시20분쯤 한진경로당 내 투표소를 찾았다. 한 손엔 지팡이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론 부인의 부축을 받았다. 투표를 마친 뒤 경로당 앞 의자에 앉아 한참 숨을 고른 민씨는 “패혈증에 디스크까지 총 16번 수술을 받고 20일 전에 퇴원했다”며 “건강이 안 좋아도 투표는 꼭 해야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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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박경인(30)씨와 문석영(32)씨도 이날 사전투표를 위해 종로장애인복지관을 찾았다. 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투표를 완료한 박씨는 “투표용지를 봉투에 넣고 스티커를 떼 봉투를 붙이는 손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보조인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점심시간엔 인근 사무실에서 투표하러 온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복지관에 마련된 투표장 밖 복도까지 대기줄이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주민센터에도 이른 새벽부터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페인트가 묻은 작업복과 안전화 차림으로 투표장을 찾은 권모(66)씨는 “오전 7시30분까지 경기 수원으로 출근해야 하는데 나라를 생각해서 일어나자마자 투표하러 왔다”며 졸린 눈을 비볐다. 이모(57)씨도 “새벽 4시 남구로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일이 없어 돌아오는 길에 투표하러 왔다”며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일주일에 세 번 일 나가기도 쉽지 않은데, 좋은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뽑혀야 일자리도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선거일인 오는 10일 가게를 비우기 어려운 자영업자들도 사전투표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경기도 광명전통시장의 떡집 사장은 “오전 6시 투표소 문을 열자마자 왔는데도 3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며 “선거 당일은 휴일이라 손님이 많아 가게를 뜰 수 없을 것 같아 오늘 일찍 투표장에 왔다”고 전했다.

SNS에서는 젊은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투표소 인근에 핀 벚꽃이나 개나리를 배경으로 손목 등에 찍은 도장 사진을 공유하는 ‘봄꽃 인증샷’도 이어졌다. 한 네티즌은 “꽃 보러 가는 길에 사전투표소가 있는지 검색 한 번씩 해보자”고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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