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되려고 제주 모였다…비폭풍 뚫고 산길 달린 그들

  • 카드 발행 일시2024.04.23

나도 산길을 달릴 수 있을까? 나도 달리고 싶다. 

제주 트레일러닝 대회 출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기자는 달리기에 적잖은 두려움이 있다.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세 차례의 수술을 한 끝에 왼쪽·오른쪽 다리가 짝짝이가 됐다. 사고로 다친 왼쪽 다리가 2㎝ 정도 짧아 빨리 달리면 균형을 잃고 뒤뚱댄다. 또 당시 뒤틀어진 왼쪽 발목엔 아직도 약 7㎝의 핀이 대각선으로 박혀 있다. 달릴 때면 무릎과 발목에 하중이 더 하기 때문에 힘껏 뛰거나 무리해서 걷게 되면 발목이 시큰해진 적도 있다. 반듯이 달리지 못하고, 발목이 어긋나지 않을까 걱정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다. 평지에서도 이런 형편이라 산에서 달린다는 생각은 로망 수준이었다. 비록 뒤틀어진 발목이라도 ‘오래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나도 산길을 달리고 싶다는 욕구는 스멀스멀 살아난다. 달리기는 인간의 본능 중 가장 하나인데, 영영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요즘엔 집 근처 북한산 트레일과 둘레길을 내달리는 트레일 러너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해졌다. 사실 레저스포츠로 즐기는 트레일 러닝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트레일 러너라고 해서 모두 늘씬한 몸매와 말 근육을 가진 것도 아니다. 트레커 수준의 평범한 신체 조건을 가진 이들도 많다. ‘저 사람의 체형은 러너 같지 않은데, 그래도 잘 달리네.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 자신감을 갖게 된 건 지난 1~2월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다. 당시 하루 20~25㎞를 걸었는데,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1시간에 2~3km의 속도로 가야 했다. 계획대로 정한 구간을 마치려면 걷는 것으론 부족했고, 그래서 내리막길은 주로 뛰어서 내려왔다. 이상하게도 다리가 멀쩡했다. 걷는 동안 몸무게가 줄어든 덕분이다. 종주 막바지엔 출발 시점보다 8㎏이 줄었다. 군살이 빠져 몸이 가볍게 되자, 무릎과 발목에 가해지는 하중이 덜해졌고 그래서 평균 13㎏의 배낭을 메고도 산길을 달려 내려올 수 있었다. ‘지금의 체중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하루 40~50㎞도 어렵지 않아.’

4월 20일 한라산 자락에서 열린 '블랙야크 트레일런' 대회에서 여자부 1등을 차지한 김진희 선수. 호흡을 가다듬으며, 숲길을 달리고 있다. 사진 블랙야크

4월 20일 한라산 자락에서 열린 '블랙야크 트레일런' 대회에서 여자부 1등을 차지한 김진희 선수. 호흡을 가다듬으며, 숲길을 달리고 있다. 사진 블랙야크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가 제주 한라산 일원에서 개최하는 ‘블랙야크 트레일런 50K’는 지난해 시작된 신생 대회다. 제주엔 해마다 많은 마라톤과 트레일 러닝 대회가 열리지만, 블랙야크 트레일런은 입문자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50K 코스는 만만치 않다. 색달동 야크마을(해발 약 200m)에서 출발해 한라산 둘레길과 1100도로를 통과해 한라산 윗세오름 대피소(1700m)까지 올라가 원점 복귀하는 코스다. 실제 거리는 57㎞나 된다.

표고 차가 1500m나 되는 57㎞ 구간을 12시간 이내에 마치려면, 1시간 평속 5㎞로 달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평소 시속 3~4km의 속도로 걷는 편이라, 오르막에서 이 속도로 걷고, 내리막에서 달려 내려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목표는 컷오프(시간 내에 구간을 돌파하지 못해, 다음 구간에 진입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를 통과해 완주하는 것으로. 꼴찌라도 좋아.’

중앙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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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런, 비가 와도 달린다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4월 20일 오전 6시 30분. 210명의 선수가 제주 색달동 야크마을 앞 출발선에 섰다. 진행자의 출발 카운트다운에 맞춰 다 함께 내달리는 210명의 참가자. 수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마라톤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출발점을 통과했다. “착 착 착 착.” 비에 젖은 땅에 러닝화를 내딛는 소리가 좋았다.

기자도 보폭과 속도를 조절해가며 달렸다. 출발점에서 500m 지점을 가니 내리막이 시작됐다. 덕분에 초반 호흡에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 구간에서 210명의 순위가 대강 정리됐다. 순위권을 목표로 한 상급자 선수들은 속도를 내며,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기자는 대열의 맨 후미에 섰다. 어림잡아 뒤에 30~40명의 선수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심적으로 뒤가 편했고, 아직 30~40명의 선수가 내 뒤에 있다는 것에도 안도감이 생겼다.

블랙야크 트레일 런 대회를 뛰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블랙야크

블랙야크 트레일 런 대회를 뛰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 블랙야크

사실 이 날 대회는 57㎞가 아닌 18㎞ 단축 코스로 진행됐다. 이날 오전 6시부터 시간당 2~7㎜의 비와 강풍이 예보돼 있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의 코스 설계자는 “국립공원공단 측에서 한라산 둘레길에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단축한 이유를 들었다. 더구나 한라산 윗세오름에 진입하는 정오경에는 더 많은 비와 강풍이 예보돼 있었다.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그래서 코스는 한라산 중산간(해발 600~1000m)에 진입하기 전인, 체크포인트(CP)1 지점까지 달린 후 다시 되돌아오는 것으로 변경됐다. ‘생애 최초 트레일 런 50㎞’ 도전 목표는 물 건너갔지만, 완주에 대한 부담감은 훨씬 덜었다. 기자뿐만 아니라 모든 참가자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블랙야크 트레일런 참가자들. 김영주 기자

비를 맞으며 달리는 블랙야크 트레일런 참가자들. 김영주 기자

시작점에서 약 2.5㎞ 정도를 15분 정도 달렸던 것 같다. 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흡도 그렇게 거칠지 않았다. 이후 오르막이 나타났다. 이제부턴 걷기의 시간이었다. 애초부터 오르막이 나타나면 걷자는 계획이었으니 욕심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후미에 처진 수십 명의 참가자들도 다 같이 걷고 있었다. 그러나 걷더라도, 시간당 5㎞ 이상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평소 걷는 것은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앞서가던 참가자들 몇 명을 제치고 나아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