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의 총선 레이더 ⑬ 여론조사 공표금지
이른바 ‘깜깜이 기간’이다. 지금도 언론사와 정당은 열일하면서 여론동향을 파악하고 있지만 조사결과를 공표할 수는 없다. 이 사정을 아는 유권자들은 정치부 기자나 정당 관계자로 일하는 지인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요새 뭐라도 바뀐 건 아닌지. 막말 사태나 고발 사태로 인한 막판 뒤집기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시민의 선택이 곧 권력인 민주정에서 이럴 수는 없다. 유권자가 가장 심각하게 투표의 가치를 따져봐야 할 그 기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단의 근거 중 하나인 여론동향 정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서는 안 된다. 유권자의 판단력을 의심하며 그들의 선택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둡게 하는 시대착오적 규제를 이렇게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전문가와 평론가들은 이번에도 ‘깜깜이 기간’을 맞아 어김없이 시대착오적인 규제를 폐지하거나 획기적으로 줄일 것을 주문한다. 실로 인터넷 교류매체로 모든 선거정보를 실시간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 누구 좋아하라고 하는 규제인지부터가 의문이다. 부작용이 오히려 심각하다. 은밀하게 유력한 언론사의 최신 조사결과라면서 유통되는 허위조작 정보의 위력만 더해 줄 뿐이다.
‘깜깜이 기간’ 때문에 부실한 여론조사 대행사가 활개 칠 수 있다. 이들은 선거 전에 대충 수행한 조사결과를 여기저기 팔다가, 선거에 임박해서 조사결과를 밝힐 수 없다고 편리하게 입 다물고, 선거가 끝나면 자기는 정확하게 조사했다고 외치고 다닌다. 여론조사 공표규제가 부실한 여론조사의 핑계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실효성도 없다. 가령 일본이나 중국의 유력 언론사가 한국에서 조사를 한 후 자국에서 공표해 버리면 그것으로 무력화될 수 있다. 오직 이 기간을 견디고 당선된 국회의원들만이 자명한 문제점들을 모른 체하다가 다음 선거를 맞는다. ‘깜깜이 기간’ 덕분에 당선됐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유를 헤아릴 수 없는 기묘한 배신이라고 해야겠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두 처음부터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캐나다의 경우가 시사적이다. 이 나라는 1993년 이래 선거 전 3일 동안 여론조사 공표를 금지했지만, 1998년 대법원이 여론조사 공표금지는 발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시하면서 선거 당일에만 공표를 금지하는 제도로 변경했다. 2007년 대법원은 선거 당일 여론조사 공표금지가 합헌임을 확인했지만, 정부가 오히려 선거 당일까지 인터넷 교류매체로 정치정보를 교환하는 시대에 그 규제마저 시대착오적이라고 인정하고, 결국 2014년 공정선거법을 개정하면서 공표금지 조항 자체를 폐지했다.
프랑스와 독일 사례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프랑스는 1977년 이래로 선거법에 따라 1주일간 조사결과 공표를 금지했는데, 1997년 언론사들이 이 법을 고의로 위반함으로써 법정 투쟁에 돌입했다. 결국 2002년 국회가 24시간 공표금지를 입법하면서 제도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있다. 독일은 선거운동 기간에 대한 명시적 법 조항조차 없는 비규제적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지만,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법에 유럽연합 선거법을 준용하기 시작하면서 투표 당일 유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요인을 통제하는 규정을 인정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이렇게 돼선 곤란하겠다 싶은 나라가 있다면 이탈리아다. 열정적으로 당파적 투쟁에 몰두하는 정당들이 어떻게 정치적 실패를 초래하는지 조귀동의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서 배울 수 있다. 이탈리아는 애초에 복잡한 각종 선거규제 조항이 많기로 유명한데, 여론조사 공표금지 기간은 무려 15일에 달한다. 이런 초강력 규제마저 과거 28일을 축소한 결과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15일 전 조사한 결과라 할지라도 깜깜이 기간 동안 공표할 수 없다. 조사자의 진정성은 물론 시민의 정치적 판단력 자체를 의심하는 제도라고 하겠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