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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주차장 잠기는데 10분, 119 신고할 경황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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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새벽 4시쯤 출근했습니다. 30분쯤 지나 안내방송을 하려고 전원을 올렸죠.”

6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실. 태풍 ‘힌남노’가 상륙한 가운데 이날 오전 6시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빼러 내려간 주민 7명이 삽시간에 들이닥친 물에 주차장이 침수되면서 연락이 끊겼다. 경비실에서 만난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A씨로부터 오전 상황을 설명 들었다. 다음은 A씨가 재구성한 상황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출근 30분 만인 이날 오전 4시30분쯤 A씨는 직접 주민들에게 “102동 유치원 놀이터 쪽에 주차된 차량은 이동해 주십시오. 지하주차장은 괜찮습니다”라고 방송했다. 그러고는 폭우 속에 순찰을 나갔다. 순찰하던 A씨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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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지역별 상세 관측자료를 보면 이날 오전 3~9시 포항시 남구에는 261㎜의 폭우가 쏟아졌다. A씨는 “오전 5시20분쯤 다시 방송했다. 이때는 지하주차장에도 물이 찰 수 있으니 차량을 지상으로 옮겨 달라는 내용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안내방송에 따라 이동하는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밖을 나섰다.

태풍 ‘힌남노’의 상륙이 예보됐던 이날 새벽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는 A씨 외에도 시설과장과 경비원, 입주자 대표회원 등이 더 있었다고 한다. A씨가 차량 통제를 위해 관리사무소를 나선 뒤 시설과장이 두 차례에 걸쳐 다시 안내방송을 했다. A씨는 “(내용을)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침수가 우려되니 지하주차장 차량을 옮겨 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전 5시50분 아파트 인근 하천인 냉천이 폭우에 흘러넘쳤다. 냉천은 해병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정문에서 약 150m 거리에 있다. A씨는 “하천이 넘치면서 삽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이 들이닥쳤다. 물이 밀려와 지하주차장이 완전히 잠기는 데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왜 119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 묻자 A씨는 “119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경황이 없었다”며 “(내가) 신고하지는 않았지만, 그즈음 이미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하천이 범람해 진입로로 흘러들자 구급차가 들어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기록적 폭우로 하천이 범람해 물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유입된 것을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했다.

어렵사리 중앙일보 인터뷰에 응한 A씨는 괴로워했다. 태풍으로 인한 정전 탓에 불이 꺼진 경비실에서 그를 만났는데,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몸과 함께 떨렸다. 온라인 게시판 등에 “안내방송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마녀사냥식 여론이 높아지는 걸 A씨도 잘 알고 있었다.

A씨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침수 이후의 상황을 물었지만, A씨는 젖은 목소리로 “미안하다. 더 이상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아파트 주민 다수는 “관리사무소 측은 태풍 상황에서 아파트단지를 관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안내방송은 주민의 재산 피해를 막으려는 시도였을 뿐, 사고가 나라고 내보낸 게 아니다” 등 관리사무소 측 책임을 제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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