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러시아 지우기 나섰다...키이우서 우정동상 '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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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당국이 26일(현지시간) 러시아와의 우정을 상징하며 키이우 중심부에 40년간 설치돼 있던 8m짜리 동상을 철거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가 자국 내 '러시아 흔적 지우기'에 나선 모습이다.

키이우에 설치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우정을 상징하던 동상이 26일(현지시간) 철거됐다. 이 동상은 철거 과정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로이터=연합뉴스

키이우에 설치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우정을 상징하던 동상이 26일(현지시간) 철거됐다. 이 동상은 철거 과정에서 목이 잘려 나갔다. 로이터=연합뉴스

"우정의 실체 봤다"...러 기념물 첫 철거  

로이터통신·뉴욕타임스(NYT) 등은 옛 소련 시절 설치된 이 동상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린 채 제거됐다고 보도했다. 글로벌뉴스는 "키이우시가 '탈러시아, 비공산화'를 위해 철거할 계획이라고 밝힌 60개의 기념물 중 첫 번째로 철거됐다"고 전했다.

이 동상은 1982년 소련 건국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가 소련 국민의 우정을 상징하는 훈장을 함께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키이우의 랜드마크로 여겨진 곡선형 기념물 '인민 우정 아치(People's Friendship Arch)' 아래에 설치돼 있었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우리는 (러시아의 침공을 통해) 이 '우정'의 실체를 알게 됐다. '우정'은 우크라이나 도시를 파괴하고, 평화로웠던 수많은 시민들을 살해했다"고 동상 철거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한다. 오늘은 키이우에 상징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동상이 철거된 후 곡선형 기념물 '인민 우정 아치'만 남은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동상이 철거된 후 곡선형 기념물 '인민 우정 아치'만 남은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시민들 잘린 동상 머리서 촬영..."역사적 순간"   

글로벌타임스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30분에 시작된 동상 철거 작업은 5시간가량 이어져 오후 6시 30분쯤 마무리됐다. 기중기, 전기 톱, 지렛대 등이 동원됐고, 작업자의 실수로 러시아 노동자를 상징한 동상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고 매체는 전했다.

비가 내린 궂은 날씨에도 현장에서 철거 모습을 지켜본 우크라이나 시민 100여 명은 환호하며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외쳤다.
서로를 보듬어 안거나 화상 통화를 통해 친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는 시민도 있었다. 일부 시민들은 잘린 동상의 머리에 앉거나 발을 올리고 사진을 찍었다.

26일 러시아와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 철거 모습을 시민 등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26일 러시아와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 철거 모습을 시민 등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철거 과정을 지켜본 한 시민은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우리는 더 이상 러시아와 우정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러시아 프로파간다(선전)의 종식을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이 동상 제작에 참여한 디자이너 세르히 미로로드스키도 이번 철거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데 우리가 러시아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고 반문 한 뒤 "러시아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이다. 따라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우정 기념물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철거된 동상의 머리를 만지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철거된 동상의 머리를 만지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러 관련 거리·장소 460곳 이름도 바꾼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동상을 둘러쌌던 곡선형 기념물 '인민 우정 아치'는 철거하지 않는 대신, 우크라이나 국기 색을 덧칠할 예정이다. 클리치코 시장은 "이 기념물의 이름이 '자유 우크라이나'로 개명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일각에선 이 동상이 진작 철거됐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돈바스 내전 이후인 2016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비공산화의 일환으로 이 기념물 전체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돈바스 전쟁 기념비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비용 부족과 관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로 좌절됐다. 2018년 인권 운동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이 곡선형 기념물 꼭대기에 갈라진 금 형태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사회와 정치권에선 러시아, 공산주의 등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제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키이우시는 앞으로 러시아와 연관된 기념물 60개를 없애고, 러시아와 관련된 거리·장소 460곳의 이름을 바꿀 계획이다.

26일 키이우에서 러시아와의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6일 키이우에서 러시아와의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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