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갇힌 채 적구화·밀봉 훈련…평양 간첩, 서울 사람이 됐다 [간첩전쟁 3화]

  • 카드 발행 일시2024.05.15

〈제1부〉 ‘공화국영웅’ 남파간첩 김동식의 인생유전

  3화. "지하당을 구축하라" … 남파 명령이 떨어지다  

납북 어부 36명의 사진을 보도한 2005년 2월 2일자 중앙일보 1면. 납북자들이 1974년 가슴 왼편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묘향산을 찾아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남파간첩 김동식씨는 “적구화 교육 중 내게 서울말을 가르친 '하 선생'이 납북 어부였다는 사실을 중앙일보를 보고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굵은 빨간색 원 안이 김동식씨가 지목한 하 선생이다. 중앙포토

납북 어부 36명의 사진을 보도한 2005년 2월 2일자 중앙일보 1면. 납북자들이 1974년 가슴 왼편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묘향산을 찾아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남파간첩 김동식씨는 “적구화 교육 중 내게 서울말을 가르친 '하 선생'이 납북 어부였다는 사실을 중앙일보를 보고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굵은 빨간색 원 안이 김동식씨가 지목한 하 선생이다. 중앙포토

사진은 기록이다. 기록은 종종 놀라운 사실을 폭로한다. 여기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그렇다.

2005년 2월 2일자 중앙일보 1면에 납북 어부 단체사진이 실렸다. 북한의 대남공작원(남파간첩) 출신 김동식은 그 사진 속에서 낯익은 얼굴과 조우했다. 김동식은 1995년 2차 남한 침투 때 군경과 총격전 끝에 생포된 뒤 대한민국에 정착한 상태였다.

납북자가족모임이 공개한 사진에는 ‘묘향산 휴양기념 1974’(오른쪽 위)라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1971년 서해상에서 납북된 휘영37호 선원 12명과 72년 납북된 오대양 61, 62호 선원 24명 등 납북 어부 36명의 모습이 담겼다.

사진 속에 ‘하 선생’(굵은 빨간색 원 안)이 있었다. 김동식이 1990년 1차 침투를 앞두고 평양에서 ‘적구화 교육’(남한 사람 만들기)을 받을 때 서울말을 가르친 ‘강사’가 하 선생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하 선생의 모습은 또렷했다. 김동식은 최근 ‘남북 간첩탐구' 취재팀과 만나 기억을 되살렸다.

서울말 강사가 납북 어부 사실 처음 알아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그저 ‘하 선생’이라고 불렸는데, 그에게 서울말을 배우면서 친해졌지요. 말이 별로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고, 북한에서 결혼해 딸아들을 낳았다는 정도만 알려졌지요. 당시 30대 후반으로 키가 175㎝ 정도로 큰 편이었습니다. 본명·납북 경위 등 하 선생의 신분은 보안상 비밀이었지요. 그가 납북 어부 출신이란 사실은 중앙일보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김동식의 증언은 1950~70년대 북한이 대한민국 어부를 강제로 납치한 뒤 남파간첩 침투를 위한 적구화 교육에 동원했다는 아픈 역사를 고발한다. NLL(북방한계선)을 넘거나 공해상에서 조업 중 북측 경비정에 나포된 뒤 지금까지 북한에 억류된 남한 어부는 457명으로 통일부는 추정한다.

남한 출신 월북자들이 가르친 적구화 교육

적구화(敵區化), 김동식과 ‘하 선생’을 잇는 연결고리다. 적구는 ‘적이 통치하는 구역’, 즉 남한을 일컫는 북한식 용어다. 한국에선 ‘남파됐다’고 하지만, 북한 대남공작 부서에서는 ‘적구에 나간다’ ‘적구에 침투한다’고 표현한다.

적구화 교육은 대남공작원에게 남한의 언어와 생활 풍습, 사회 환경을 가르치는 현지인화, 즉 한국인화 훈련이다. 대남공작원들이 남파됐을 경우 북한 사투리를 쓰거나 남한 물정을 몰라 신고 또는 검거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조치다.

김동식씨가 4월 서울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취재팀과 만나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동식씨가 4월 서울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취재팀과 만나 북한에서 받았던 훈련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