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자폭” 세뇌된 김동식…폭파범 김현희도 동문이었다 [간첩전쟁 2화]

  • 카드 발행 일시2024.05.08

〈제1부〉 ‘공화국영웅’ 남파간첩 김동식의 인생유전

2화.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

1981년 3월 18일 땅거미가 내려앉은 평양 대동강역.
김동식은 노동당의 부름을 받았다. 해주에서 열차에 몸을 실은 뒤 7시간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고향 황해남도 용연에서 남창고등중학교를 갓 졸업한 18세 청춘이었다. 역에 마중 나온 중앙당 지도원은 그를 승용차에 태워 시내 인민문화궁전 맞은편의 10층짜리 ‘초대소’로 안내했다.

노동당 대외연락부(대남 공작 부서, 현 문화교류국) 간부가 맞아주며 저녁을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치자 김동식을 응접실로 불렀다.

이제부터 동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높은 신임과 배려에 의해 남조선 혁명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소. 대남공작원을 양성하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앞으로 4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될 것이오.

김동식에겐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공작원 대학? 노동당의 명령에 따라 용연군-해주시-황해도-평양을 오가며 수천 명의 다른 지역 또래 학생과 경쟁했던 지난 1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숱한 면접심사와 신체검사 끝에 그는 전국에서 선발된 6명 중 한 명에 들었다. 김일성·김정일 측근 경호원으로 발탁되는 출세를 내심 기대했다. 청춘의 꿈이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김동식씨가 지난 4월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동식씨가 지난 4월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남공작원 양성하는 금성정치군사대학

금성정치군사대학(1992년 ‘김정일군사정치대학’으로 개칭)은 듣도 보도 못한 금시초문의 대학이었다. 시험도 안 보고 대학에 입학한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수차례 면접 때 ‘당에 충성’을 다짐했던 그였다.

“동무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소?”(당 간부 면접관)
“공군 조종사가 되거나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김동식)
“지금 동무는 당에서 쓰려고 이렇게 면접하고 있는데, 그렇게 대답하면 정답이 아니지…”(당 간부 면접관)
“그럼, 당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김동식)
“그렇지, 그게 정답이지!”(당 간부 면접관)

그랬으니, “동무는 남조선 혁명을 해야 되겠소”라는 당의 결정에 반박할 수 없었다.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대외연락부 간부의 지시가 이어졌다.

앞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본명 대신 ‘박승국’이라는 가명을 쓰시오.

이름 속에 담긴 자기 정체성을 지우라는 뜻이었다. 자연인으로 살았던 18년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날 밤, 김동식은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인계됐다. 대남공작원 혹은 남조선 혁명가로서, 남한 말로는 남파간첩으로서, 그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