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 카드 발행 일시2024.05.22

 〈제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송진우

전봉준 찾아가다 만난 송진우

1970년대, 나는 『전봉준(全琫準) 평전』을 집필하고자 호남 땅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전봉준이 태어난 곳에서부터 시작해 그가 살다가 일생을 마친 곳까지 모두를 답사했다. 그러는 데에 15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작업을 마치기까지 5000㎞를 답사했다. 전봉준 생애의 최후 장면을 찾아 헤매다가 나는 그가 전남 장성 백양사(白羊寺)에서 마지막 이틀 밤을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1981년 10월, 초겨울 밤비를 맞으며 그곳을 찾아갔다.

종무 스님에게 전봉준의 마지막 밤에 관한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서 왔노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스님은 “오늘은 신도들의 법회가 있어 재워줄 방은 없고, 전봉준이 마지막 밤을 지낸 곳은 백양사가 아니라 이곳에서 2㎞ 떨어진 백양사의 말사(末寺) 청류암이니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했다.

 젊은 시절 송진우가 독립운동의 뜻을 키웠던 전남 백양사 청류암 정경. 사진 신복룡

젊은 시절 송진우가 독립운동의 뜻을 키웠던 전남 백양사 청류암 정경. 사진 신복룡

그날은 신도들의 법회가 있어 재워줄 방이 없다기에 나는 할 수 없이 밤중에 읍내 약수리로 나와 여관 냉방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에 큰길에 나가 지나가는 촌로에게 전봉준 장군이 마지막 밤을 지냈다는 청류암을 찾아가는 길을 물었더니, “그 이야기라면 건넛마을 가인리에 사시는 이형옥 어른을 찾아가 여쭈어보면 자세히 가르쳐 줄 거요”라고 했다.

백양사 청류암의 추억

한때 송진우가 공부했던 백양사 청류암을 알려준 고 이형욱 선생. 사진 신복룡

한때 송진우가 공부했던 백양사 청류암을 알려준 고 이형욱 선생. 사진 신복룡

나는 서둘러 그 어른댁을 찾아갔다. 1894년생이셨으니 그 무렵에 벌써 87세의 고령이셨다. 찾아뵌 연유를 말씀드렸더니 그는 감격스러운 듯, “누군가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행적을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려나, 기다린 지 70년이 되었다오”라고 감회를 말했다. 그분은 어린 시절에 석하(石霞)라는 법명을 받고 청류암의 승려 생활을 했으며, 자신이 독립운동가 이갑성(李甲成)의 사촌동생이라는 말도 했다. 그 어른은 몸소 청류암까지 나를 안내하겠다고 하시면서 부서진 우산대를 지팡이로 삼아 앞장을 서셨다. 그러나 마음 뿐, 300m를 가지 못하고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으니 이리저리로 잘 살펴보라면서, 그곳에는 전봉준 장군의 친필 암각서가 두 곳 있으니 그것도 잘 찾아 사진도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노인을 산중에 남겨두고 칡넝쿨을 헤치며 겨우 청류암을 찾을 수 있었다. 노령산맥 끝자락의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가는 감천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청류암은 참으로 명승지였다. 나는 사진을 찍고 노인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많은 증언을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 전봉준의 암각 글씨 사진을 현상해 보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탁본을 떠오지 못한 것이 그리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탁본에 능숙한 학생 다섯 명을 데리고 한 달 만에 다시 청류암을 찾아갔다.

이형옥옹은 몹시 기뻐했다. 노인은 탁본에 쓸 양동이와 사다리를 빌려주셨다. 내가 일행과 함께 청류암으로 올라가는데 어른이 내 뒤꼭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은 오른쪽 끝 방에서 주무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