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3박자 탱고, 그 파산의 리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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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사람들은 묻는다. 덩치가 큰 헤비급 여당이 경량급 야당에 눌려 꼼짝달싹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성질 급한 보수 인사들은 169명에 달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뭔가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미적대는 것에 분통을 터트린다. 그러나, 숫자로 해결하는 것, 소위 다수결 원리라는 이 고전적 명제가 여의도 정치에서는 오래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유권자들이 여당에 표를 몰아준들 소용이 없다. 거부권(veto power)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야당이라도 “노!”라고 소리치면 여의도 정치는 올 스톱이다. 합의정신을 살리기 위해 설치한 거부권이 ‘비창조적 흥분’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 본회의장 입구의 로텐더홀은 육탄 방어의 성전(聖殿)이다. 법안 발의-상임위원회-본회의로 이어지는 삼박자 입법 과정은 각 단계에서 교섭단체-상임위 간사-원내대표 간 합의를 거쳐야 비로소 작동한다. 여기서 거부권이 발동한다. 법안 발의가 지연되거나, 상임위원회가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이라도 로텐더홀을 점령하면 본회의가 불가능하다. 육탄 방어라는 최후의 거부권이 살아있는 한, 군소 야당도 몸값을 한없이 올릴 수 있다.

3단계 입법 과정에 설치된 세 유형의 거부권이 여의도 정치를 삼류화하는 ‘삼박자 탱고’다. 18대 국회는 이 삼박자 탱고를 추느라고 145일을 허비했다. 정치 달인을 자처하는 누군가가 있어 여의도로 고이 보낸다고 해도 그는 결국 삼박자 탱고에 몸을 맡기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삼박자 탱고는 개혁을 빙자한 개악을 막아내기도 했지만 5년 단임 정권엔 그 파산의 리듬이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정권 초기 야당은 거부권을 십분 활용해 ‘총력 저지’에 매진한다. 중반기에는 정책 실패를 꼬집어 ‘맹렬 비난’에 돌입하고, 말기로 가면 ‘정권 탈환’ 전쟁을 개시한다. 저지-비난-탈환의 삼박자가 야당 정치의 5년 매뉴얼이다. 야당이 주로 외치는 말은, 정권 초기에는 “안 돼!”, 중기에는 “뭘 했니?”, 말기에는 “내놔!”다. 매번 당해도 여당이 야당이 되면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대통령은 이 여의도 탱고가 싫어 무도회장에는 얼씬도 않는데 그 대신 되는 일이 없다.

비정규직법 개정안과 미디어법안은 총력 저지의 최후 액션플랜에 걸린 법안들인 만큼, 여당 뜻대로 넘어갈 리 만무하다.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2단계 거부권인 환경노동위원회의 빗장이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기업을 ‘부도덕한 기업’으로 비난하고, 실직대란이 일어나면 정부 여당에 책임을 전가할 계산이 끝난 민주당엔 1년이든 6개월이든 ‘유예’가 별 의미가 없다. 수만 명이 거리를 떠돌고 실직 가정이 겪는 재난은 정치적 득실 앞에 사소한 현실일 뿐이다. 한나라당이 야당이었어도 그런 거부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여의도 삼박자 탱고가 대의를 향한 뜨거운 확신이 아니라 권력 계산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권력 자체를 추구하는 행위는 정치력을 왜곡시키는 가장 해로운 형태이며, 권력에 잠복해 있는 폭력성 또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극적 사태이다. 우리는 4년마다 돈과 힘을 들여 이 악마적 힘들과 관계하는 자들을 뽑아 여의도로 보냈던 것이다.

한나라당 초선 의원들의 모임인 ‘민본 21’이 악마와의 고리를 끊는 묘안을 냈다. 법안 자동상정제 도입과 표결 처리를 보장하는 ‘국회개혁법안’이 그것인데, 거부권에 걸려 발의조차 어렵게 하는 절차 규정을 과감하게 고쳐서 ‘격투 국회’를 ‘토론 국회’로, ‘당략 국회’를 ‘국민의 국회’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젊은 정치인들의 절박감과 사명감이 돋보인다. 거부권의 정신을 살리되 소수가 다수를 짓누르는 파행 정치를 혁파하자는 것이다. 파산의 삼박자를 회생의 리듬으로 바꾸는 것, 여의도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전제조건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