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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고함(孤喊)] 기축년의 화두, 상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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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기축년 새해의 화두(話頭)는 무엇일까? 나는 상식(常識)이라고 말한다. 상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항상(恒常)스러운 의식(意識)이다. 그렇다면 항상스러운 의식이란 무엇일까?

시행착오에 덜미 잡힌 과거 정권들 #진보의 흐름 거스르는 아집 버려야

불교에서는 식(識)이라는 것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제1식을 눈으로 보아 생기는 식이라 하여 안식(眼識)이라고 부른다.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하여 이식(耳識)이라 하고,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하여 비식(鼻識)이라 하고, 제4식은 혀로 맛보아 생기는 식이라 하여 설식(舌識)이라 하고,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하여 신식(身識)이라고 한다. 이 오관(五官)으로 인하여 생기는 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부르는데, 이 전오식은 매우 현재적이다. 당장 당장에서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식이다.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식(意識)이라는 놈이다. 안·이·비·설·신과는 다른 좀 높은 차원의 식인데, 의근(意根: 인식기관)이 법(法)이라는 경(境:대상)을 인식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이때 법이란 물질적·정신적인 일체의 사물을 포괄하는 것으로, 현대어로 하면 개념(concepts)이라는 것에 가깝게 오는 말이다. 의식은 전오식과 달리 과거·미래·현재의 삼세(三世)를 대상으로 하며, 따라서 기억작용이 있고 추리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강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바로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오식에서는 오히려 집착이나 번뇌가 없다. 그런데 제6식에 오면 좀 복잡해진다. 이미 자아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제7식인 마나식(末那識)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놈은 제6식의 개념적 사유의 근저에서 활동하는 아주 근원적인 강력한 자기동일 의식이다.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我執)의 본원(本源)인 것이다. 제7식부터는 이미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심리로 들어간다.

제7식보다도 더 깊은 곳에 제8식인 아라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이라는 놈이 있다. 이 놈은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 세계는 아라야식에 저장돼 있는 종자(種子)가 전개해 놓은 것이라고 본다. 아라야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Unconsciousness) 정도로 생각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 단지 유식사상에서는 대상 세계를 객관적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고 심식(心識)의 소산으로 본다. 내 마음이 만든 세계를 내 마음이 보는 것이다.

카를 융(C. G. Jung)은 무의식의 종자보다 더 깊은 곳에 근원적인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을 설정한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 속에는 콤플렉스(complex)라는 의식의 응어리들이 있지만, 융의 집단무의식 속에는 인간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아키타이프(archetype)라는 종자가 우글거리고 있다.

상식(常識)이란 바로 제1식에서 제8식까지, 그리고 집단무의식을 포괄하는 인간의 모든 식(識)의 굴레에 항상스럽게 존재하는 것인데, 이 상식은 매우 근원적인 식일 수도 있고, 아주 오염된 집착과 번뇌의 식일 수도 있다. 아라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식의 과제는 어떻게 오염된 상태를 벗어나 청정한 깨달음의 상태로 가느냐 하는 것인데, 이를 불교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제거하면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화(化)한다고 표현한다.

상식이 원성실성(如如의 理想)으로 화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아집이나 편집을 버려야 한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자아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는 것이다. 비판을 수용하지 못할 때 상식은 변계소집성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비상식적인 행동 속에서 허망분별(虛妄分別)의 변계소집에 빠져왔다. 한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3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세계사에 유례를 보기 어려운 동족살상의 전쟁을 한 것도 비상식적인 아집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 부작용 때문에 빨갱이니 반동분자니 하고, 좌니 우니 하는 망상적인 변계소집에 빠져 있다.

그뿐인가? 민중이 진보의 기회를 허락한 최초의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IMF의 조속한 해결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매우 의미 있는 구조조정도 아니한 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높이고 조작금융적인 거품경제로 한 발 한 발 빠져들게 만들었다. 대우의 처리 문제만 해도, 아무리 대우의 업보가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해도 그렇게 졸속한 방식으로 처리될 문제는 아니었다. 대우의 재무구조를 생각하기 전에 그 자산가치를 형량했어야 했고, 그 공든탑에 쌓인 수많은 민중의 혈한(血汗)의 세계사적 가치를 애정을 가지고 고려했어야 했다. 민족경제의 핵이 결여돼 있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골 빈 보수들의 비판 아닌 비난을 내가 열거할 필요는 없겠으나, 새만금 처리 문제 하나만 하더라도 전혀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유무역협정(FTA)을 솔선하여 주도하는 용기란 전혀 참여정부가 탄생된 소이연(所以然)과는 무관한 만용이었고, 권력의 오용이요, 오판이었다. 그 결과로서 참여정부가 존재하는 역사적 맥락이 상실되었고, 그것을 지원했던 민중세력이 분열됐으며, 정치적 역량이 허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진보를 갈망하는 민중을 대변한 정권이 가장 처절하게 진보를 좌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다 상식의 배반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두 아집에 빠져 근원적 반성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 정부를 탄생시킨 민중의 갈망과 진보의 대세는 여전(如前)하다. 그 참여정부에 등돌린 민심을 업고 역사를 또다시 재단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겨우‘대운하’를 운운하는 정도의 터무니없는 비상식적 판단으로 정권을 출범시켰다고 한다면, 그리고 아직도 그러한 수준의 변계소집에 머물러 있다면 이 민족, 이 역사의 앞길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여기서 무엇을 말하리오? 하늘과 땅을 다 갈아엎는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오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뿐이리라.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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