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5.01

 〈제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② 해방정국에서의 인연과 야망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고민 

해방정국에서의 삶이 누구인들 격동이 아니었을까마는 정치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모두 곧 국회의원이 될 것 같았고, 저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권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 가운데 야망이라는 점에서는 단연 여운형(呂運亨)의 꿈이 가장 컸고, 그런 난세에 꿈을 접었으면서도 잠재의식의 저 밑바닥에서는 “나라고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는 가냘픈 꿈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장래를 지켜보던 사람이 곧 김규식(金奎植)이었다. 난세는 사람들의 심성을 들뜨게 한다.
1945년 9월 8일에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인천에 상륙해 입성하고 보니 상황이 좀 막막했다. 야전에서 뼈가 굵은 그에게 정무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도 없이 한국 주재 관동군의 항복을 받으라는 지침만 있을 뿐이었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 간의 항복문서 조인식. 조선총독부는 이날까지 치안과 행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 간의 항복문서 조인식. 조선총독부는 이날까지 치안과 행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한국에 관한 역사·지리·문화적 견문도 없이 가져온 것이라고는 부하들이 도쿄에서 베껴온 무슨 백과사전의 ‘한국편’ 몇 쪽이 모두였다. 다행히 언더우드 가문(Underwoods)과 윔스(C Weems) 등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과 그 자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이승만의 이름을 들어봤지만 만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