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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87년 만의 고백] ① 20대에 만난 남편과 41세에 결혼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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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내 이희호 여사가 자서전을 발간했다. 퍼스트레이디로, 한 남자의 아내로, 엄마로, 여성∙사회운동가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 여든일곱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녀가 담담한 문체로 적어 내려간 영욕의 세월.

#첫째 무대

20대에 만난 남편과 41세에 결혼하기까지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 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셋방에는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 또한 그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우리는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 나는 살아온 환경과 행로가 판이했다. 대한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김정례씨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김정례씨는 그를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 인 목포에서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이후 그를 면우회 모임에서 또 만났다. 그는 토론에서 늘 조용히 듣는 편이었다. 운명의 힘 이었던가. 아니면 지금 말로 코드가 맞았는지, 누구에게나 친절한 내가 누님 같았는지 나와는 말을 잘했다. 그때 나는 내 진로를 두고 와병 중인 사람과 유학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재회한 것 또한 우연이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인 1959년 여름 끝자락이었다. 길을 가다 종로에서 그를 만났다. 그게 전부였다. 그해 9월 나는 YWCA 총무로 멕시코 세계 YWCA 대회 참석차 떠나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을 돌고 1960년 2월 초에 돌아왔다. 6월쯤 그가 4.19 이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기사와 함께 그 사이에 부인과 사별했음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 아름다웠던 부인과 어린 자식들, 그리고 혼자된 그가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는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5수로 당선됐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다시 실 업자가 되자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이후 만남이 잦아졌다. 곤궁하고 울적한 그는 퇴근 무렵이면 명동으로 나왔다. 당시 그는 민주당 간부로서 부패와 용공 혐의로 두 차례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는데 그 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 내심 걱정이 됐다. 그는 1962년 3월쯤 나를 다시 찾아왔다.

아직 찬기운이 감도는 저녁 파고다 공원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던 그가 그때 청혼을 했다. 나는 이미 지난 연말쯤 마음을 정하고 있던 터였다. 사실 타이밍도 작용했다. 그즈음 나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서울대 재학 시절 만난 계훈제 선생과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동지적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전쟁 중 앓는 사람을 두고 매정하게 유학을 떠나 버렸고, 이후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내가 결혼한 후 그분도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 소 홀가분해졌다.

취재_윤혜진 기자 사진_임효진(studio lamp) 참고자료_『동행』(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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