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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87년 만의 고백] ② 결혼 후 사춘기 두 아들과의 첫 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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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내 이희호 여사가 자서전을 발간했다. 퍼스트레이디로, 한 남자의 아내로, 엄마로, 여성∙사회운동가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 여든일곱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녀가 담담한 문체로 적어 내려간 영욕의 세월.

#둘째 무대

결혼 후 사춘기 두 아들과의 첫 대면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서울 대신동의 30만원짜리 전셋집에는 한창 예민한 나이의 홍일이와 홍업이 형제가 있었다. ‘호랑이 할머니’시어머니 장수금 여사는 체구와 스케일이 크고 인정 많은 여장부였다.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어서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목포로 이사 나오는 결단을 내리기도 하셨는데, 그런 어머니에게 남편은 지극한 효자였다. 이에 반해 우리 고부 관계는 서로 조심스러웠다. 아이들의 돌아간 어머니에게는 호랑이 시어머니셨다는데, 우리는 서로 어려워하는 사이로 비껴가며 10년을 한지붕 아래서 살았다.

심장병을 앓던 시누이는 결혼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누이동생을 무척 아끼던 오빠가 죽어 가는 여동생을 지켜보는 모습은 처연했다. 그는 회한에 젖어 잘나가던 사업을 접고 정치로 방향을 바꾼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거듭되는 낙선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아이들 엄마를 먼저 보내고 누이마저 제대로 치료를 못해 준채 떠나보낸 것이다.


이 두 여성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시린 존재로 살아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이던가. 부산 피란 시절 우연히 부산 광복동의 한 다방에서 그의 가족을 본 적이 있다. 차용애씨는 그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구나 싶게 매력적이었다. 아이들은 또 얼마나 귀여웠던가. 나는 홍일이, 홍업이 두 형제의 어머니가 되면서 차용애씨에게 기도했다.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당시 홍일이는 배재중학교 2학년이고 홍업이는 이화여대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1학년 이었다. 둘 다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었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면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그 또래였던 나의 남동생들 상호, 철호, 성호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가 얼마나 그리울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덤덤한 사람이어서 인위적으로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 아이와 편애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곧 정치 활동을 재개해서 무척 바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교육과 용돈 관리 등 모든 것을 내게 맡겼다. 바쁘게 바깥 활동을 하는 아내 대신 어머니에게 살림과 양육을 일임했을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의 현명한 처사였다. 내 일상이 늘 분주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새어머니와 모든 일상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차 한 가족이 되어 갔다.

홍걸이가 태어난 것은 1963년 11월 12일, 내 나이 42세 때였다. 만학에다 만혼의 노산이었다. 나는 피곤을 모르는 특이체질이다. 입덧은 살짝 지나갔고 배도 그다지 부르지 않아 시어머니가 7개월 넘어서야 아셨을 정도다. 아이를 가졌다고 눕거나 하지도 않는 등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남편은 임신을 크게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치를 재개해 지역구 목포에서 많이 지내던 때였다.

시어머니 역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나도 내 아이를 갖겠다는 욕심이 없어 무덤덤했지만 주위의 무관심엔 좀 섭섭했다. 아기 옷이랑 포대기, 요람을 내 손으로 만들면서 엄마가 될 준비를 했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출산할 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선거 보름 전이라 남편은 목포를 떠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시간이다. 애초부터 알콩달콩한 행복을 바란 결혼이 아니었기에 서운함을 밀어 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나는 준비 안 된 엄마였다. 여성운동으로, 강의로 집을 수시로 비운 서투른 엄마였다. 홍걸이는 그런 내게 꼭 용건만 말했다. 어려서는‘엄마, 엄마’하던 아이가 커서 ‘어머니’란 말이 안 나오는지 팔을 쿡 찔러 돌아보면“책 사게 돈 주세요”하는 식이었다. 오히려 형들이 ‘어머니, 어머니’했다.

취재_윤혜진 기자 사진_임효진(studio lamp) 참고자료_『동행』(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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