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부연락선’ 3등실의 악몽…삼성 이병철도 모욕 당했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5.09

6살 때 ‘관부연락선’ 3등실…생계 위해 온가족 일본행

회갑을 맞은 필자의 부친 박봉관옹(왼쪽)과 모친 김소순 여사.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회갑을 맞은 필자의 부친 박봉관옹(왼쪽)과 모친 김소순 여사. 사진 박태준 전 국무총리

나는 1927년 9월 28일(음력) 경남 동래군(현 부산시 기장) 장안면 임랑리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대문을 나서면 하얀 백사장과 파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오른편으로는 좌천강이란 자그마한 개천이 달음산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바다로 흘러드는 갯마을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의 공동어장 소유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가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토지에 근대적 소유관계를 도입하면서 수많은 조선 농민의 경작권을 빼앗았다. 어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우리 마을에선 일본인 어장 주인을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 백부가 뽑혔다. 백부는 일본어는 못 했지만 한학에 밝아 필담(筆談)으로 일본인을 상대했다. 그러면서 차츰 일본어를 익히게 됐고, 생계 수단을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홑몸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백부는 아버지를 일본으로 불렀고, 아버지는 33년 가을 어머니와 나를 불렀다.

만 여섯 살의 내가 최초로 목격한 어마어마한 문명이 ‘관부(關釜)연락선’이었다. 그 거대한 문명은 ‘중세의 갯마을’에서 갓 나온 아이에게 멀미의 기억을 남겼다. 관부연락선 3등실. 나보다 어머니가 더 고생했던 것 같다.

나중에 기업인이 돼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선배를 만나 관부연락선의 멀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선배도 와세다대로 유학 가면서 관부연락선 3등실에 탔는데, 멀미를 못 견뎌 1등실을 기웃거리다가 일본 형사로부터 난생처음 모진 모욕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 이 선배는 나라 없는 설움을 새삼 통감했으며, 그 사건이 인생 분발의 큰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