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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토정 이지함은 탁월한 경제 사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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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함 평전
신병주 지음, 글항아리, 296쪽, 1만3500원

1960~70년대 세모·세시에는 ‘토정비결’ 문패를 내걸고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철학관 노인들의 모습이 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요샌 토정비결의 ‘약발’도 꽤나 떨어진 것 같다. ‘이지함’이란 이름에 젊은 층은 피부과나 화장품을 떠올리는 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토정 이지함(1517~1578). ‘토정(土亭)’은 이지함이 마포 강변에 흙으로 쌓은 정자다. 지금의 마포구 ‘토정로’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나루터의 정자 ‘토정’에서 유유히 배를 몰아 팔도를 유람하며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종횡무진한 이단아가 이지함이다. 전통 명문가의 자제였으면서도 과거를 접고 처사로 은일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혹한 민생의 현실을 목도했다. 교조화되기 전의 조선 성리학에 숱한 상상력의 씨앗을 뿌렸던 인물이다. 그 상상력을 은유로서가 아니라 빈민 구휼과 국부 증대의 실천적 개혁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시대에 앞서 상공업 진흥과 해양자원 개발을 주장했다.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토정이 뿌린 사상적 씨앗이 200여 년 뒤 ‘북학 사상’으로 만개했다고 주장한다. 16세기의 탁월한 경제 사상가로서의 이지함을 재조명한 것이다. 기인적 풍모 때문에 소설적으로만 이해돼 온 이지함에 대한 학술적 평전이다. “구리로 만든 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는 식의 기행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지함은 16세기 조선 사상계의 본류 속에서 당당하게 교류한 학자다.

충남 아산시에 세워진 이지함 동상. [중앙포토]

그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으며 남명 조식, 율곡 이이와의 친분이 깊었다. ‘모범생’ 계열의 이이에겐 다소 무책임한 인물로 여겨졌겠지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의 호방한 기운과 토정의 개방적 사유는 궁합이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남명의 비장함과는 사뭇 다른 토정의 이인(異人)적인 ‘발랄함’은 후대 북학파의 핵심 인물 연암 박지원의 기풍으로 전수되는 듯하다. 효종 때 남인의 영수로 활약했던 허목(1589~1682)이 토정을 두고 “높은 행실과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세상을 조롱하며 스스로 즐긴 인물”이라고 한 평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제자 조헌에게 천민 출신의 송익필과 서기를 스승과 사우로 추천했던 인물이다.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능력과 실질을 숭상한 이가 토정이었다. 토정이 최고의 인재로 꼽은 인물이 물길 잘 알며 고기 잘 낚는 양심적 어부였으니, 그가 품은 개방적 사유의 폭은 지금 시대에도 가늠하기 힘든 여운을 남긴다.

책은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의 사후 100년 뒤 후손이 펴낸 『토정유고』에는 『토정비결』이 포함돼 있지 않다. 19세기에 유행한 『토정비결』의 저자로 이지함의 이름이 빌려졌던 것은 그의 인기에 대한 민중적 헌사였을 거란 이야기다. 책은 조선의 사상사·법제, 풍속에 대한 해설까지 곁들여 쉽고 넓게 읽힌다. 하지만 ‘학술 평전’으로서 토정 사상의 한계나 시대적 제약점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없는 점이 아쉽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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