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에 한번 만취해야 버텼다…직장과 창작 이어준 꺽쇠, 술

  • 카드 발행 일시2024.04.15

4회. 최고의 80년대 작가  

1980년대가 내 소설의 전성기였다는 말은 지난 회에서 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사람의 아들』이 무섭게 팔려 나가자 문예지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작품 청탁이 줄을 이었다. 지난주 총선 때 유행했던 말처럼 자고 일어나니 바빠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구 매일신문의 편집기자였던 내가 일일이 청탁에 응할 수 없었다. 아마 절반도 받아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원고 줄 곳을 골라야 할 때는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았을 오기를 부렸다. 일종의 앙갚음이었다. 등단 전 내 원고 게재를 거부했던 횟수만큼 잡지사들에 퇴짜를 놓은 다음에야 원고를 준다는 원칙 같은 것이었다. 가령 한 잡지사가 이전에 내 요청을 두 차례 거부했다면 이제는 내 쪽에서 그 잡지사의 청탁을 두 번째까지 거절한 다음 세 번째 원고 청탁을 해오면 그제야 응하는 식이었다. 물론 거절할 때는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대신 써줄 때는 최선을 다해 썼다.

그러다 보니 이제 신문사를 그만두고 글만 쓰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따진다면 굳이 신문사를 다닐 필요가 없긴 했다. 요즘 문예지에 단편소설 한 편이 실리면 작가는 100만원 안팎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잡지 원고료는 지금보다 훨씬 후했다. 200자 원고지 한 장당 천몇백원이었던 것 같다. 어지간한 봉급생활자 일당이 5000~6000원이던 시절이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시간의 일부만 떼어내 글 쓰는 데 투자해도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봉급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1981년 6월부터 중앙일보에 역사소설 '그 찬란한 여명'을 연재한 소설가 이문열씨(왼쪽)와 삽화를 그린 김세종 화백. '그 찬란한 여명'은 백제가 한때 중국 땅 요서 지역을 경략했다는 확정되지 않은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훗날 『요서지』라는 제목으로도 출간됐다. 중앙포토

1981년 6월부터 중앙일보에 역사소설 '그 찬란한 여명'을 연재한 소설가 이문열씨(왼쪽)와 삽화를 그린 김세종 화백. '그 찬란한 여명'은 백제가 한때 중국 땅 요서 지역을 경략했다는 확정되지 않은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훗날 『요서지』라는 제목으로도 출간됐다. 중앙포토

최소한의 생활 보장 위해 작가와 신문기자 겸업  

그런데도 신문사를 그만두지 않았던 이유는 우선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무방비 상태가 두려웠다. 아무런 공익적 기능이 없다고 여겼던 소설과 달리 신문사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실질적인 봉사를 할 수 있다는 당시 내 생각도 나를 신문사에 붙들어 둔 이유의 하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구매일은 지방의 유력지였다. 나는 크기를 조정한 다음 제목을 달아 기사를 죽이거나 살리는 편집기자였다. 아침에 3단 크기의 비판 기사가 나가면 대부분 오후에 시정이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니는 직장마다 탐문을 하고 다니던 대공분과 형사에게 덜 시달리기 시작한 것도 대구매일 기자가 되고서였다.

무엇보다 문학이 과연 내가 ‘가야 할 만 리 길’인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80년 초에 출간한 내 두 번째 소설 『그해 겨울』에 붙인 ‘作家(작가)노우트’에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