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티스 소설 밀어낸 이 작품…사람의 아들이 80년대 열었다

  • 카드 발행 일시2024.04.08
1987년 『사람의 아들』을 장편으로 개작한 후 잡지 인터뷰하는 모습. 그 전해에 지금 거주하는 경기도 이천에 작업실을 장만해 내려와 지냈다. 사진 이재유

1987년 『사람의 아들』을 장편으로 개작한 후 잡지 인터뷰하는 모습. 그 전해에 지금 거주하는 경기도 이천에 작업실을 장만해 내려와 지냈다. 사진 이재유

3회. ‘출세작’ 사람의 아들 

2001년 전후로 혹독한 시기가 있었지만 1980년대는 나의 전성기였다. 평단이 항상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반면, 독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사랑받는 작가였다. 시대와 불화하고 있노라고 자조(自嘲)한 90년대에도 내 소설에 대한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 긴 밀월(蜜月)의 출발점이 내 첫 소설 『사람의 아들』이다.

“이문열 이름만 들어가도 책이 나간다”

『사람의 아들』은 79년 출간 직후부터 무섭게 팔려나갔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 국내 출판사들은 판매 집계 전산화가 더디고 부정확했다. 인세 수입으로 역산하면 종전 중편을 장편으로 늘려 87년 개보판(改補版)을 낼 때까지 100만 부가 팔렸던 것 같다. 지금까지 총 300만 부 팔린 것으로 추정한다. 내 작품들 가운데 단일 제명(題名)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나는 자랑도, 부끄러움도 가장 많은 책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아들』뿐 아니라 『젊은 날의 초상』(1981년), 『황제를 위하여』(1982년) 등 후속작들의 반응도 좋아서였겠지만, 91년 딱딱한 평론집 『이문열 論(론)』까지 1만 부 넘게 팔리자 출판가에 “이문열 이름만 들어가도 책이 나간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고 들었다.

1979년 6월 출간된 『사람의 아들』 초판본. 중고시장에서 40만원에 거래된다.

1979년 6월 출간된 『사람의 아들』 초판본. 중고시장에서 40만원에 거래된다.

덕분에 비교적 최근까지 문학 강연을 하면 『사람의 아들』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주로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궁금해 한다. 왜 그렇게 인기 있었는지 묻는 사람도 있다. 2001년 어떻게 책 장례식까지 벌어졌는지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의 이상 열기 역시 내게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내가 쓰기 힘들었던 만큼 당연히 독자에게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오스트리아 영사를 지낸 내 친구 하나만 끝까지 초고를 읽었을 뿐 주변에서 두 쪽 이상 읽어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나는 출판사에서 인세를 주는 것으로 봐서 판매부수가 조작된 허수 같지는 않지만, 아마 독자의 지적 허영 같은 것 때문에 가능한 숫자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몇 가지 짐작은 있다. 70년대 후반 소설 시장은 크게 두 부류가 풍미했다. 곧바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였던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1973년), 조해일의 『겨울 여자』(1976년)처럼 술집 여급을 등장시킨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년) 등 당시 평단 혹은 저널리즘이 ‘근로자 소설’이라고 칭한 소설들이 또 한 부류였다.

70년대를 문 닫으며 세상에 나온 『사람의 아들』은 아시다시피 엉뚱하게도 종교소설이었다. 시인 황지우, 문학평론가 진형준, 영화감독 이창동, 출판인 심만수, 네 사람이 함께 편집해 91년 출간한 내 첫 산문집 『사색』의 허두(虛頭)에 편집자들은 이런 문장을 써두었다.

땅 위에 것에, 풍속과 윤리에 우리 사회 모두가 몰두해 있을 때 그는 어째서 신(神)을 발언했을까.

땅 위의 것 그리고 풍속과 윤리. 이 두 표현이 각각 근로자 소설, 호스티스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의 아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아들』은 공교롭게 김성동(2022년 작고)의 불교소설인 『만다라』와 함께 대략 81년 말까지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를 단골로 장식했다. 호스티스 소설은 차츰 자취를 감췄다. 결과적으로 내 소설이 호스티스 소설을 밀어낸 셈이다. 70년대 대중소설이 퇴조하고, 새로운 개성을 요구하는 80년대 시장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1975년 개봉해 당시로는 경이적인 36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1973년 조선작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소설가 김승옥이 각색했다. 조선작 등의 소설은 술집 여급을 등장시켜 '호스티스 소설'로 불렸다.

1975년 개봉해 당시로는 경이적인 36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1973년 조선작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소설가 김승옥이 각색했다. 조선작 등의 소설은 술집 여급을 등장시켜 '호스티스 소설'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