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다 죽을 뻔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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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전화를 했을 때도 그는 섬에 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여수 신항에 입항한 ‘전남 511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전남 511호는 전국에 네 척(전남 2척, 경남 1척, 충남 1척)이 있는 병원선의 하나다. 길이 32m, 너비 7m의 128t급 선박에 의료장비를 갖췄다. 여수·고흥·보성·강진·완도·해남의 섬 가운데 의사가 없는 89곳 주민 1만여 명의 건강을 돌본다. 의료진은 전남도 보건한방과 소속의 내과전문의·치과의사·한의사 1명씩과 간호사 3명, 임상병리사·방사선사 1명씩이 배치돼 있다. 선원을 합쳐 17명이 탄다.

이 배를 찾아가 만난 박미숙(54·보건직 6급·방사선사·사진) 씨는 병원선의 산 증인이다. 신구전문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8년 6월 처음 병원선에 올라 30년 6개월째 근무하고 있다. 공중보건의인 의사들은 보통 1년, 간호사들은 3~5년 탄 뒤 육상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처음에는 딱 일 년만 타려 했어요. 그런데 바다와 섬이 좋았고, 외로운 섬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마음에 들어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남편과 딸을 충북 청주에 둔 그는 주중에는 병원선에서 먹고 잔다. 간호사들과 주방장을 합쳐 모두 5명의 여자가 한 방을 쓴다. 면적이 12㎡에 불과해 침대를 두 층으로 놓고도 기본 생활용품을 놓기에 옹색하다. 방이 배 아래층에 있어, 손바닥 만한 창조차 없다.

병원선이 2000년 현재의 선박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냉방은커녕 난방 시설조차 없었다. 겨울엔 석유 난로를 피웠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을음으로 코 안이 까매졌다. 여름에는 밤에 일찍 전등을 껐다. 전등 때문에 좁은 방아 더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에는 한 번 배를 타고나가면 육지 가족과는 연락 두절이었다. “미혼 시절, 휴일에 선을 봐도 배를 타면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없어 금세 서로 잊어버렸어요.” 박씨는 33살에야 결혼했다.

“파도가 높아 배가 크게 흔들리면 난리예요. 가구·생활용품들이 쏟아져 바닥을 뒹굴고. 신참 직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지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지만 의료장비들이 안 넘어지게 붙잡고들 있어요. 직업의식 때문이겠죠.”

20년 전엔 진도군 서거차도 부근에서 큰 풍랑을 만나 모두 마지막 기도까지 올렸다가 간신히 무인도에 피항해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이젠 더 이상 배를 안 타겠다’라고 작정을 한다. 그러다가도 날이 개어 햇살이 바다에 부서져 반짝거리는 걸 보면 다 잊어버린다.

“이젠 육지서 며칠 지내면 답답하고, 배로 돌아와 바다를 보면 가슴이 확 트여요. 이 나이에 사무실 들어가 근무하기도 그렇고, 아마 정년 때까지 계속 배를 타겠죠.”

손병오(52) ‘전남 511호’ 선장은 “박씨가 웬만한 파도엔 겁도 안 먹고 배 멀미를 안 해, 젊은 직원들이 꼭 ‘선원’ 같다고 한다”며 “의료진·선원들을 잘 다독거리는 등 어머니 같은 역할도 한다”라고 말했다. 배에서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박씨의 어깨가 왠지 어머니의 그것처럼 포근해 보였다.

글=이해석 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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