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본 러시아 소녀 장수인양 “또 하나의 모국 한국에 필요한 사람 되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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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 사는 장수인(19)양은 빨간색·초록색 체크무늬 치마와 남색 더블 재킷의 전남여고 교복을 입었다. 한국사람과 똑같이 말하지만 하얀 살결에 오뚝한 코, 쌍꺼풀이 진한 갈색 눈, 긴 속눈썹, 밝은 갈색의 머리는 영락없는 러시아 소녀다. 그는 러시아인 부모 밑에서 나스타 바스카예브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에게 입양돼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장수인양이 양어머니 김경희씨와 함께 대학 전형방법이 소개된 신문을 보며 지원 대학을 상의하고 있다. [프리랜서 오종찬]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러시아 남부 모즈독.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로 2시간 반을 간 다음, 다시 차로 2시간을 더 달려야 도착하는 오지다. 그곳에서 나이 든 아버지(81)를 대신해 어머니(59)가 교회 버스 운전 등을 해가며 6남매를 키웠다. 살림살이는 넉넉하지 않았다. 2001년 2월 현지 교회를 찾았던 장병정(56)·김경희(53) 부부는 한국에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다며 수인이를 입양해 데려왔다.

12살 꼬마는 6개월 만에 한국말을 익히고 초등학교 6학년에 들어갔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사실상 공백상태로 보냈기 때문이다. 고3인 올해 수능시험을 쳤다.

수인이의 꿈은 한국어·러시아어 동시 통역사가 되는 것이다. 낳아준 러시아와 길러준 한국 모두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대학 전공은 러시아어과 외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한국말도 잘하니 방송 일을 해보자”라는 제안을 심심찮게 받았고, 연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동시통역사의 꿈을 위해 접었다.

수인이가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중고 자동차 매매업을 하며 넉넉하던 부모님은, 몇 년 전부터 빚 보증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버지 장씨는 택시를 운전한다. 어머니가 한때 김밥집을 할 때 수인이는 쉬는 날이면 장사를 도왔다.

“눈치가 빠른 아이예요. 돈을 달라는 말을 잘 안 하고, 용돈을 줘도 아껴쓰지요. 언젠가는 ‘엄마, 집안 사정이 나빠진 통에 난 사춘기마저 내색도 못하고 지내버린 것 같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가슴이 아팠어요.”

어머니는 잘 자라준 수인이를 대견스러워하면서도 “뒷받침을 제대로 못해주는 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수인이는 부모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 등록금이 적은 국립대에 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 속이 상한다. 한때는 학비가 한국에 비해 적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공부해 통역사의 꿈을 이루는 게 생이별하면서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친부모에게도 효도하는 길이다”라며 만류하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수인이는 고향을 떠난 뒤 러시아의 친부모를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 김씨는 “러시아 집 형편이 더욱 곤란해져 수인이 친오빠(25세)를 한국에 데려와 취업시키려 하는데 잘 안 되고 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수인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른이 되어 자리를 잡으면 러시아에 있는 친부모와 한국의 부모를 모두 모시며 살고 싶어요.”

광주=이해석 기자,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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