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의 13억 경제학]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우덕의 13억 경제학 바로가기

일산 사는 주부 K씨는 참으로 알뜰한 주부다. 콩나물 한 다발을 살 때도 억척스럽다 할 정도로 깍고, 할인권을 꼭꼭 챙겨 기어이 싸게 사고야 마는 알뜰 주부이기도 하다. 그가 지난 주 말 찬꺼리를 사기 위해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렀다. 경기 탓인가, 일요일 오후였음에도 마트는 썰렁했다. 그 역시 흥이 나지 않았다.

이리 저리 콩나물을 뒤집던 그는 갑자기 집었던 콩나물을 내 던진다. 울컥 속이 상해서다.

'100원 아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내가 참으로 바보다. 작년 들었던 펀드가 망가져 1년도 안 돼 3000만 원을 손해 봤다. 100원 아껴 뭣 하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아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그의 한 숨이 깊다. 누가 한국의 선량한 주부들을 이렇게 울리고 있는가?

어쨌든 따지고 보면 이번 세계 경제위기는 미국에서 비롯됐다. 아니 미국의 탐욕이 위기를 불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들의 무절제한 소비와 끝없는 탐욕이 지금 세계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핵심부에서 시작된 위기는 지금 변두리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국가들에게 더 가혹한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다. 콩나물 한 다발에도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선량한 한국 주부주들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고 있다. 그 월가의 탐욕 때문에 말이다.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역사는 끝났다(The End of History)’

꼭 20년 전 유명 역사 철학가인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한 말이다. 1989년이 어떤 해인가? 쏘련이 무너지고, 베이징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지구상에서 공산진영은 사라지는 듯 했다. 역사를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전진'으로 해석하는 후쿠야마에게 공산주의의 '멸망'은 곧 역사의 종말이었다. 더이상 전진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공산주의, 니들은 이제 죽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맞짱 뜨겠다는 놈들은 이제 사라졌다. 자유민주주의는 왕권체제, 파시즘, 공산주의와 싸워 왔다. 그 대결의 역사가 이제는 끝난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의 완벽한 승리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후쿠야마의 말대로 역사는 끝난 것일까?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는 승리한 것일까?

지금 누가 감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일산 주부의 한 숨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유 민주주의가 이겼다'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후쿠야마가 말한 대결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분석가들은 이번 위기의 책임을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 '신(新)자유주의(Neo-liberalism)' 탓으로 돌리고 있다.

후쿠야마가 찬사를 아끼지 않던 '자유 민주주의의 총아'들이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비난받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신(新)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시장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했다. 규제완화는 최대 덕목이었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월가는 탐욕으로 가득찼고,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 자본주의를 '수출'하기도 했다. 혹 경제적으로 불안한 나라가 생기면 달려가 달러를 들이밀고는 자기들의 방식을 따르라고 압박을 가한다. IMF가 첨병이었다. 남미가 당했고, 한국이 당했다. 그들은 한 발 더나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도입을 강요한다. 그게 소위 말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거다. 핵심부 미국이 위기에 처하니 주변 나라가 더 큰 충격을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일산의 주부가 콩나물을 내던진 이유다.

미국의 압박에도 자기의 길을 고집한 나라가 있었다. 중국이었다. 위안화를 평가절상하는 워싱턴의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너희들이 먼저 소비를 줄여'라며 버티기 일쑤였다.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압력에도 '우리는 아직 여건이 되지 않았어'라며 빗장을 내리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시 미국식 자본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자유무역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 나라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혜택을 받은 나라일 수 있다. 수출로 달러를 벌었고, 수출로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다.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의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었을까?

중국은 스스로의 정치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말한다. 사회주의 하면서 시장경제하겠다는 거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공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 경제 시스템'이다. 국가는 개인이나 기업의 자율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중시한다. 당연히 국가의 힘이 중요하다. 여기에 시장경제를 하겠다는 것은 곧 ‘자원의 분배 기능을 시장에 맞기겠다’는 뜻이다. 시장의 효율성을 활용하겠다는 얘기다.

이 체제를 요약하고 또 요약하면 '국가가 시장의 힘을 빌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중국의 체제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온다. 필자는 이 중에서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m)’라는 분석 툴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국가가 시장과 기업에 깊숙이 개입하고, 더 나가 경제주체의 하나로서 직접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형태다. 국가가 국유기업을 앞세워서 국내 산업을 장악하고, 또 해외로 진출하기도 한다.

신(新)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미국식 자본주의와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를 구별 짖는 가장 큰 차이는 역시 국가의 역할이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국가의 개입을 부정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차이 때문에 양자는 서로 갈등의 요소를 갖고 있기도 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는 말하지 말자. 그건 자기의 것을 남에게 강요하길 좋아하는 미국식 사고일 뿐이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존중받았다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도 역시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자기 여건에 맞는 노선을 택하기만 하면 그뿐이다.

다만 세계 경제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어느 것이 더 적절 한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 미국식 자본주의는 세계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다. 그 반대 쪽에 있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쩌면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향후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 보다도 더 세계경제 미치는 영향력이 클 수도 있다.

학계에서 나오는 '베이징 컨센서스'가 바로 이를 연구하는 용어다.

그렇다면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
이는 향후 중국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국가자본주의를 다시 정의하자면, '국가가 국유기업을 앞세워 경제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형태'로 말할 수 있다. 국유기업이 국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인 셈이다.

중국에 ‘양치(央企)’라는 게 있다. 중앙정부(국무원)산하 국유기업을 뜻하는 ‘중양치예(中央企業)’의 약자로 모두 146개에 달하고 있다. 이 146개 양치는 중국경제의 핵심이자 기둥이다. 그 명단을 훓어보면 우리가 아는 대형 국유기업은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여기(http://www.sasac.gov.cn/n1180/n1226/n2425/index.html)를 클릭 해 확인해 보시라.

중국 국유기업은 한 때 부실경영, 부패의 상징이었다. 물론 그 이미지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국유기업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국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양치’ 중 하나인 화학제품 생산 업체인 중국화공그룹(ChemChina)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자.

중국화공이 등장한 것은 2004년 말. 중국은 당시 국무원 부서였던 화공부 소속의 화학제품 관련업체를 지분제휴 등의 방식으로 통폐합 중국화공그룹을 설립했다. 중국화공은 탄생은 세계 화공업계의 빅 뉴스였다. 매출액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화공그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화공은 최근 구조조정으로 편입된 선양(沈陽)화공연구원을 포함, 모두 8개 상장 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전체 직원이 수 만명에 이른다. 국가의 의도에 따라 탄생한 이 그룹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외형을 불리면서 급성장하는 것이다.

중국화공의 성장은 여기서 국내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가의 지원으로 국내에서 덩치를 키운 이 회사의 다음 수순은 해외시장 진출이었다. 이 회사는 유럽 최대 동물사료 개발 업체인 벨기에의 드라커 홀딩스(Drakker Holings)를 인수한데 이어 최근 호주 최대 화학제품 생산업체인 퀘노스(Qenos)를 1억5000만 달러에 사들이기도 했다.

중국 화공분야 해외시장 진출 전략이 이들 양치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국유기업은 이밖에도 석유 철광석 비철금속 등 중국의 원자재 확보 전략의 첨병으로 뛰고 있다. 다음 사이트를 꼭 참고하시라(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06204 )

양치를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 리룽룽(李榮融) 국유자산감독관리위(國資委)주임이다. 그는 총 매출액 10조 위안(2000조 원)에 달하는 146개 국유기업을 관장하는 세계 최대 홀딩컴퍼니의 CEO라고 할 만하다. 리 주임의 목표는 2010년까지 포천500대 리스트에 양치 50개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2007년 이미 16개가 500대 기업에 편입됐다.

 ‘국유기업을 글로벌 다국적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그들은 국가와 기업이 똘똘뭉쳐 세계 시장으로 달려나오고 있다. '국가가 멋잇감을 정하면 기업이 사냥하는 식'이다.

금융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비(非)금융권 분야에 국유자산감독관리위가 있다면 금융권에는 '중양휘진(中央匯金)공사가 있다. 지난 2003년 설립된 휘진은 중국은행 건설은행 공상은행 농업은행 등 4대 국유상업은행에 자금을 투자, 실질적으로 이들 은행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중양휘진 공사에 대해서는 이후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 정리해보자.

중국은 서방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혜택을 받아 성장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서방의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했고, 그들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이 길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국유기업(국유은행)을 통해 국내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고, 또 국유기업을 앞세워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향후 어떤 노선을 걸을 지에 대해서는 학계 여러 의견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현 테제가 존재하는 한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는 '국가자본주의'형태를 지속할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식 모델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바보다. 중국은 우리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길을 갈 뿐이다. 중국은 다만 그 길을 함께 갈 친구를 필요로하고 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도그마에 빠져 허덕이는 한국의 관계 학계 인사들이 꼭 곱씹어야 할 말이다.
한우덕 기자 = woodyhan@joongang.co.kr

[J-HOT]

▶ 헉, '그선' 마저…코스피 900선도 무너져

▶ 비서실장만 5번만 지낸 그, YS-昌 악연 전말 폭로

▶ '미래에셋' 박현주 "지금 100년에 한번 있을 투자기회"

▶ 신격호 회장 셋째 부인, 롯데쇼핑 주주에

▶ '베토벤 바이러스' 시청률 따라 금리 변하는 정기예금

▶ 사람 아기 뱄다? 암소 바다에 수장시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