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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화만 이봉화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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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생물을 좋아하던 분이라면 금방 기억날지 모르겠다. 에른스트 헤켈이라는 독일 생물학자가 1866년 제창한 ‘반복 발생설’. 요지는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의 단축된 급속한 반복’이라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태아는 어류·파충류 등 인류 이전의 진화 단계를 반복하면서 성장해 마침내 인간의 아기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태아의 성장 시기별 그림과 함께 학설을 처음 대했을 때 참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술한 가설일 뿐이어서 요즘 생물학에서는 중요한 이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봉화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이 불씨를 제공한 쌀 소득보전 직불금 파문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반복 발생설이 뜬금없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건 이봉화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봉화씨만 이봉화씨인 것은 아니라는 느낌과 함께.

이 차관은 어려운 형편에서 자라 차관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자수성가형이다. 충주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집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1년여 경찰로 근무하다 1973년 공채로 서울시 7급 공무원이 됐다. 서울시 여성 공무원 최초로 인사과장을 지냈고,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는 재무국장·감사관이라는 중책도 맡았다. 오세훈 시장 취임 후 ‘여성이 행복한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를 도맡아 추진했다. 일만 잘했는가. ‘자기 관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은 그냥 붙은 게 아니다. 79년 임신한 몸으로 학력고사를 치러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야간)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나아가 서울시립대와 일본 도시샤대에서 차례로 박사학위를 땄다. 박사학위 논문은 ‘한일여성정책 비교’(서울시립대)와 ‘노인 장기요양제도 연구’(도시샤대). 차관이 아니라 당장 장관을 시켜도 손색없는 능력과 경력이다.

이력 몇 줄만 살펴도 인간 드라마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는 이 차관이 낙마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망신당하거나 기소될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고 물러나게 됐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철 지난 반복 발생설이 이 차관의 경우에는 신통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자리에서 물러난 공직자들을 살펴보면 정해진 유형이 있다. 무자격 농지 매입 같은 부동산 문제이거나 자녀 교육을 위한 위장 전입, 학력이나 논문 속이기, 본인·아들의 병역 비리, 이중국적 같은 것들이다. 비슷한 비리가 어제도 오늘도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여기서만큼은 진보와 보수, 여와 야가 따로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차관이 우리나라 기성사회(establishment)의 한 단면도라고 본다. 이봉화만 이봉화가 아니다. 직불금 파문은 돌연변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았다. 다 내력이 있고 계통도 있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산업화 시대는 엄청난 근면성과 일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당연히 젊음을 희생해야 했다. 이 차관은 한 인터뷰에서 문제의 안성 땅에 대해 “결혼한 지 10년 정도 될 때 재산에도 좀 관심을 갖고 노후 생각도 하고 열심히 살 때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여성 공직자가 어느 날 문득 정신 차리고 ‘더 먼 앞날’에 어떻게 대비할지 고심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더구나 당시는 땅·군대·주민등록·국적·학력 등 모든 분야가 허술했다. 공직자들도 ‘똥 묻은 놈이 수두룩한데 겨나 검불 묻히는 정도야’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준이 엄청 높아졌다. 뒤늦게 고위직에 오른 공직자들의 몸에서 산업화 시대에 체내에 축적된 중금속이 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직불금 비리는 중금속 중 아주 작은 쇳가루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중금속을 빼고 겨와 똥을 털어내야 한다. 냄새가 가시지 않으면 아예 공직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공금과 세금은 특히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눈먼 돈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떠야 한다. 적어도 공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산업화 시대의 그림자인 부패 형질만은 몸속에서 제거해야 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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