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주의, 길을 잃고 방황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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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국 보수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보수주의는 작은 정부와 자유무역, 규제 철폐 등을 핵심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 혼선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대처 실패 등으로 보수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염증은 깊어졌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가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NYT)는 20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81년 이후 미 정치를 지배했던 보수주의가 방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크리스토퍼 디머스 회장은 “부시 정부 아래 재정 적자와 정부 규제, 예산 뒷받침 없는 정책 등이 급증해 매우 실망스럽다”며 “근본적으로 보수주의 철학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22년간 회장으로 일하며 AEI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의 하나로 키웠다. 폴 울포위츠 전 국무부 부장관과 존 볼턴 전 유엔대사 등도 퇴임 후 AEI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수주의의 실패=워싱턴 포스트(WP)는 11일 “지난 30년간 경제적 논의를 지배했던 자유시장 논리가 붕괴하고 있다”며 “최근 금융시장 혼란은 ‘자본 지배 시대(Capital Rules era)’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최근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행보도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다. 재무부는 주택 경기 침체로 경영 위기에 빠진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살리기 위해 돈을 찍어서라도 지원하기로 했다.

주택 대출 규모(5조2000억 달러)가 미 모기지 시장(12조 달러)의 절반에 이르는 이들 기관이 망하면 미국과 세계 경제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쓰러져야 할 기업은 쓰러지는 게 시장 원리”라는 미 정부의 기존 입장을 뒤엎는 것이다.

최근 금융시장 혼란의 원인으로 과도한 자본시장 규제 완화가 꼽히면서 “시장이 정부 개입보다 낫다”는 보수주의 논리도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미 하원의 바니 프랭크 금융위원장은 “과도한 규제 완화로 세계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투자은행과 대형 증권사들을 신중하게 감시할 수 있는 강력한 틀이 마련돼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보수주의의 성장우선주의는 빈부 격차를 확산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보수주의자들은 경제가 성장하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몫이 커져 모두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현실은 소수가 부를 독식하고, 대부분은 살기가 팍팍해졌다. 오바마가 빈부 격차 해소와 자유무역 반대를 주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레이건 보수주의에 집착=신보수주의자(네오콘)인 데이비드 프럼은 “보수주의 위기의 핵심은 80년대 어젠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를 신성시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화당이 레이건의 정책에서 너무 벗어나 위기를 자초했다”는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프럼은 “세금 감면은 선”이라는 공화당의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며, 소비세와 에너지세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부시를 영웅으로 찬양하던 그는 최근 출간한 『복귀: 다시 승리할 수 있는 보수주의』에서 “부시는 공화당을 재앙으로 이끌었다”고 비판했다.

젊은 보수주의자인 유벌 레빈 윤리·공공정책센터 연구원은 “세상이 바뀌면 정책의 우선순위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30여 년 전 핵심 이슈였던 냉전·범죄·복지제도 개혁·세금·사회문제의 대부분은 이제 더 이상 이슈가 아니며, 지금은 에너지·환경·이민·의료보장제도 등이 핵심 이슈”라고 강조했다.

신세대 보수주의자인 로스 더댓은 “보수주의자들은 동성 결혼이나 낙태에만 얽매이지 말고 미국인들이 가장 걱정하는 가족 해체나 경제적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주의 집필가인 애덤 벨로는 “공화당은 미국인 과반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정치인이 나올 때까지 부활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그런 정치인이 출현하면 보수주의 이론가들이 그의 정치적 본능을 새로운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론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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