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 파도 세계 경제 집어삼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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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파문이 처음 터졌을 때만 해도 세계 시장의 반응은 차분했다. 미국이 재빨리 금리를 낮추고 달러를 넉넉하게 푼 덕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진통제에 불과했다.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주요 금융회사의 실적 악화로 현실화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다. 고유가와 중국의 거품 붕괴 우려가 서브프라임 파문과 겹치면서 불안심리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현재 국제 금융시장을 돌아다니는 돈은 수십조 달러에 달한다. 이 돈이 한꺼번에 같은 방향으로 쏠릴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몰고 올 파괴력을 갖고 있다. 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 오석태 이사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도 국제 핫머니의 이머징 마켓(신흥시장) 탈출 러시에서 비롯됐다"며 "이번 파문도 시장의 불안심리를 얼마나 빨리 진정시키느냐가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이머징 마켓 탈출 재연되나=그동안 글로벌 머니는 미국.일본에서 벗어나 상대적 고금리인 중국.한국 등 아시아로 몰렸다. 그 덕분에 중국과 아시아 증시는 대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중국 증시가 과열되면서 경계심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제로금리를 조금씩 올릴 조짐이다. 이로 인해 아시아.호주 등지로 흩어졌던 엔 캐리 트레이드(저금리의 일본에서 돈을 빌려 고금리 국가에 투자하는 기법) 자금이 일본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파문은 이 흐름에 기름을 부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투자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낸 미국.유럽 금융회사들이 이를 메우기 위해 그동안 많이 오른 중국.한국 등 아시아 시장의 주식.채권을 팔아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최근 아시아 증시 하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 손해를 본 미국 금융회사가 주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외국인 매도로 아시아 증시가 계속 떨어질 경우 불안심리를 자극해 아시아 탈출 러시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도 홍역=상반기까지만 해도 국내엔 달러가 남아돌아 걱정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달러 공급이 끊기면서 산업은행과 국민은행조차 다음 주부터 달러를 시장에 내놓지 않기로 했다. 국내 시장에 달러 돈줄 역할을 했던 씨티은행도 이달부터는 달러 공급을 중단한 상태다. 이로 인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 채권의 가산금리가 급등했다. 산업은행 김민병 머니마켓팀장은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로 국내 은행의 해외자금 조달 길이 꽉 막혔다"고 전했다. 그는 "국내 시장에서 주가.채권 값이 동반 하락하면서 달러 값은 뛰고 있는 이유도 외국인이 국내 주식.채권을 팔아 달러로 바꿔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증시가 과열되자 국내 시장에서도 자금이 은행에서 빠져나와 펀드로 몰렸다. 이 바람에 연말 자금수요가 많은 은행이 경쟁적으로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이나 고금리 예금 유치로 자금을 끌어모으면서 시중금리도 급등했다.

◆어두워지는 내년 전망=불안의 진원지가 해외라는 점에서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씨티은행 오 이사는 "현재로선 미국이 과감한 금리인하로 국제 금융가의 불안심리를 진정시켜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 부실을 소화해 낼 때까지는 이머징 마켓의 자산을 파는 흐름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몇 차례 등락은 있겠지만 현재 추세가 내년 초까지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피해가 올해보다 내년에 더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올해 안에 진정될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낙관론도 남아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버클리대의 로라 타이슨 교수는 "세계 경제가 더 이상 미국이라는 단 하나의 기관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며 "성장하는 중국.인도 등의 내수시장이 뒷받침해 주면 불안심리는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경민.김준현.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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