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블랙박스도 발명했다…'이공계 천국' 이 나라 비결 [세계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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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Wifi·근거리 무선망), 비행기 블랙박스, 태아 검진용 초음파 장비. 모두 호주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된 기술이다. 광활한 영토를 지닌 자원 강국으로만 여겨지는 호주는 알고 보면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한 과학·기술 강국이다. 페니실린(노벨 의학상), 엑스레이 기술(물리학상) 등은 인류의 삶에 크게 기여했다.

호주는 연구·개발(R&D)에 강한 나라다. 인구 규모(2600만명)는 세계 55위이나 1인당 학술논문 수는 세계 7위(2017~2021년) 수준이다. R&D 성과로 치면 세계 전체 성과의 3.71%를 차지하는 나라다.

호주 멜버른에 있는 모나쉬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달탐사 로버, 위성개발 스타트업을 만들고 어엿한 스타트업 대표와 직원이 되어 상주한다. 모나쉬 대학 2학년 제임스 그레이(왼쪽 끝)는 “우주 기업이 학부생으로 구성된 우리 스타트업에 자금을 댄다"면서 "우리는 결국 기술을 상용화해서 기업에도 이익을 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서유진 기자

호주 멜버른에 있는 모나쉬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달탐사 로버, 위성개발 스타트업을 만들고 어엿한 스타트업 대표와 직원이 되어 상주한다. 모나쉬 대학 2학년 제임스 그레이(왼쪽 끝)는 “우주 기업이 학부생으로 구성된 우리 스타트업에 자금을 댄다"면서 "우리는 결국 기술을 상용화해서 기업에도 이익을 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서유진 기자

과학기술 강국 호주의 비결은 무엇일까. 제프 로빈슨 주한 호주 대사는 "풍부한 호주의 천연 자원을 어떻게 잘 획득하고 활용할지를 연구자들이 고민하면서 R&D가 활발하게 진행됐다"고 답했다. 광활한 국토에서 인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생활 속, 산업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드론 등 항공 산업, 원격 제어 기술 중심으로 과학기술이 발달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18일 빅토리아주(州) 멜버른에 위치한 호주 연방 과학산업연구기구(CSIRO)를 방문했다. 이곳은 한국 과학기술연구원(KIST)격인 기관으로 1916년 세워져 호주 과학과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와이파이도, 찢어지지 않는 플라스틱 지폐도 CSIRO 연구원들의 작품이다. 연구원은 약 5700명, 한 해 예산(2022년)은 13억 호주달러(약 1조1600억원)에 이른다. CSIRO 측은 102억 호주 달러(약 9조원)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폴 세비지 CSIRO 제조부문 부대표는 기자에게 투자 후 5~10년간 연구성과를 기다려주는 ‘인내심 있는 투자(Patient capital)’가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세비지 부대표는 "호주와 한국 모두 내수 시장이 미국·유럽보다 작고,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이럴수록 미래 먹거리인 과학 기술과 혁신 산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예산 삭감에 대한 두려움 없는 연구 환경도 강조했다. 그는 "연방정부가 예산을 편성할 때 철저히 CSIRO를 믿고 분배를 맡긴다"면서 “정부가 CSIRO의 R&D 예산을 갑자기 삭감하거나 연구에 간여, 통제하는 일은 없다”고 덧붙였다.

폴 세비지 CSIRO 제조부문 부대표는 연구비 투자 후에 5~10년간 연구성과를 기다려주는 ‘인내심 있는 투자’를 강조했다. 서유진 기자

폴 세비지 CSIRO 제조부문 부대표는 연구비 투자 후에 5~10년간 연구성과를 기다려주는 ‘인내심 있는 투자’를 강조했다. 서유진 기자

호주 과학·기술 경쟁력의 또 다른 축인 대학에선 학생이 주도하는 과제 해결 중심의 연구가 정착돼 있었다. 지난달 18일 찾아간 멜버른의 모나쉬 대학 혁신랩에선 사과나무 가지를 망가뜨리지 않고 수확할 수 있는 로봇 개발이 한창이었다. 코로나19로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올 수 없게 돼 농가가 인력난에 허덕이자, 학생들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로봇 제작에 나선 것이다.

키난 그랜랜드 모나쉬대 스마트 제조 허브 연구원은 "로봇이 스마트 농업을 위한 데이터도 축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나뭇잎 뒤에 가려진 사과까지 식별해내는 로봇 기술이 전쟁 중 인명 구조, 정찰 임무에도 활용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 대학 혁신 랩을 이용하는 1000여명의 대학생들은 달 탐사 로버, 위성개발 등 다양한 교내 스타트업을 세웠다. 모나쉬 대학 2학년 제임스 그레이는 “우주 항공 기업이 학부생으로 구성된 우리 스타트업에 자금을 대주고 있다”면서 “결국 우리 기술이 상용화돼 기업에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실패도 용인 "문제 해결하니 연구 제의 더 들어와"

뉴사우스웨일스(NSW)주에 있는 시드니공과대학(UTS) 테크랩도 호주 R&D '요람'으로 여겨진다. 학교 측은 9만5000㎡ 부지를 학생들과 이들이 만든 기업에 내줬다. 지난달 16일 만난 아이반 추아 UTS 매니저는 “대학은 학위를 주는 기관이 아니라, 기술과 산업에 직접 기여하는 존재”라고 전했다.

호주의 산학 협력은 대학과 기업이 시작과 끝이 명확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협력하고, 성과를 다른 분야로 응용·확장한다는 게 특징이었다. 유찬열 UTS 선임연구원은 "시드니 하버브릿지를 사람 대신 청소·유지·보수하는 로봇을 UTS 연구진이 개발한 뒤 이 기술을 가진 연구진이 회사도 세웠다"며 "향후 우주 정거장 등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 문화가 인상적이었다. 유 연구원은 "실험이 실패해도 다음 사업 수주에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서 "저도 해양로봇 실험에 크게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생각지 못했던 문제점을 해결하니 외려 연구 제의가 더 많이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매미도 7년 걸려"…25년간 기업 키우니 특허 1000개 

UTS와 차로 30분 떨어진 시카다(Cicada·매미) 혁신센터도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헬라 자르고니 매니저는 센터 이름을 설명하면서 “땅속 매미가 성체가 되기까지 7년 걸리는 것처럼 좋은 기술을 가진 기업도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시카다 혁센센터에선 지난 25년간 350개 이상 기업이 탄생해 20억 호주 달러(약 1조78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따냈다. 이들이 딴 특허만 1000개 이상이다.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시드니에 위치한 시카다(Cicada·매미) 혁신 센터에 입주한 기업가들. 6000㎡(약 1815평) 부지에 세운 건물은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해 만들었다. 산업혁명 상징인 증기기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산업혁명을 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서유진 기자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시드니에 위치한 시카다(Cicada·매미) 혁신 센터에 입주한 기업가들. 6000㎡(약 1815평) 부지에 세운 건물은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해 만들었다. 산업혁명 상징인 증기기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산업혁명을 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서유진 기자

센터 관계자는 “연구자들이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을 상업화할 수 있게 돕는다”면서 “초보 기업가들이 각 분야 선배 전문가에게 기술·투자유치 등에서 맞춤형 코치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분야도 헬스케어, 식음료·농업, 에너지·기후변화, 첨단 제조 등 다양하다.

특히 호주는 제약 산업에 유리하다. 백인·흑인·아시안·히스패닉·호주 원주민 등 다인종이 모여 살아 임상 시험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실제 글로벌 제약사가 매년 약 1000건의 신규 임상시험을 호주에서 시작한다. 한국 등 외국 기업이라도 임상시험을 호주에서 하면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국제 규제 기관의 인증을 신청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시드니에 위치한 시카다(Cicada·매미) 혁신 센터. 서유진 기자

뉴사우스웨일스(NSW)주의 시드니에 위치한 시카다(Cicada·매미) 혁신 센터. 서유진 기자

고용 불안 해소 "최소 3년 계약"

연구자가 연구에 전념하기 위한 각종 제도도 마련돼 있다. 대표적인 예가 'RTP'(Research Training Program)다. 호주 연방정부에서 국내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제도로 박사과정의 경우, 1년에 세금 없이 3만 호주달러(약 2700만원)를 4년간 지원하고, 학비도 면제해준다. 학부 때 성적이 좋았거나, 기업 등에서 관련 경력이 있으면 받을 수 있다. 유찬열 선임 연구원은 "저도 박사과정 때 이 제도 덕에 연구에 집중했다"면서 "이제 대학원생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RTP 제도가 연구실 인력 확보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또한 박사후 연구원(포닥)의 경우, 과거에는 대학이 계약을 1년마다 연장해 종신직(테뉴어)을 얻기까지 고용이 불안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최소 3년으로 바뀌는 추세다. 유 연구원은 "연구원에도 테뉴어와 유사한 정규직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이 역시 연구원의 불안을 줄이고 연구에 집중하게 하는 제도"라고 전했다.

커비연구소의 권지수 연구원(노란색 원피스)은 "호주에서는 출산·육아나 불가피한 사유로 연구가 중단되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면서 "덕분에 육아 휴직 후에도 계속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커비 연구소

커비연구소의 권지수 연구원(노란색 원피스)은 "호주에서는 출산·육아나 불가피한 사유로 연구가 중단되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면서 "덕분에 육아 휴직 후에도 계속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커비 연구소

여성 인재를 위한 배려도 있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감염병 통제·예방에 기여하는 커비연구소의 권지수 연구원은 "호주에는 출산·육아나 불가피한 사유로 연구가 중단되어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면서 "덕분에 육아 휴직 후 복직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수평적이고 협업을 강조하는 문화도 연구자에겐 힘이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20년 영주권을 취득한 김문용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UNSW) 호주태양광연구협회(ACAP) 연구원은 "호주는 다른 대학·연구팀과 협업을 권장한다"면서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면 지도교수와 팀원의 지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직책 대신 이름으로 소통하는 수평적 환경,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질문하는 문화가 도움된다"고 전했다.

김문용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UNSW) 연구원(왼쪽)은 "호주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다른 대학, 연구팀과 협업을 권장한다"면서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때 지도 교수나 팀의 지지를 받는다"고 전했다. 서유진 기자

김문용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UNSW) 연구원(왼쪽)은 "호주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다른 대학, 연구팀과 협업을 권장한다"면서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때 지도 교수나 팀의 지지를 받는다"고 전했다. 서유진 기자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보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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