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국왕 등 남성만 가입한 사교클럽…첫 여성 회원은 본드걸?[세계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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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서 깊은 남성 사교클럽 ‘개릭 클럽(Garrick Club)’ 내부 모습. 사진 개릭 클럽 홈페이지 캡처

영국의 유서 깊은 남성 사교클럽 ‘개릭 클럽(Garrick Club)’ 내부 모습. 사진 개릭 클럽 홈페이지 캡처

찰스 3세 국왕, 올리버 다우든 부총리, 리처드 무어 해외정보국(MI6) 국장,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팝스타 스팅, 패션디자이너 폴 스미스….

192년간 여성 가입을 받지 않은 영국의 유명 남성 사교클럽 ‘개릭 클럽(Garrick Club)’ 회원 면면이다.

이곳이 지난 7일(현지시간) 1300명 회원 대상 투표에서 59.98%의 찬성률로 1831년 창설 이후 처음으로 여성 가입을 허용하면서 어떤 여성들이 가입하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간 번번이 여성들의 가입 시도가 무산됐고, 여성의 클럽 입장마저 남성 회원의 초대를 받아야 손님으로나마 드물게 가능했던 곳이어서다. 들어가서도 여성은 식당 가운데 자리엔 앉을 수 없어 가장자리 테이블로 안내됐고, 어떤 것도 지불할 수 없다는 의미로 가격이 표시되지 않은 메뉴판을 받곤 했다.

8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크리스토퍼 커커 개릭 클럽 의장은 회원들에게 향후 여성 가입과 관련, “‘토크니즘’(tokenism, 소수 집단의 적은 수만 조직에 편입시켜 구색을 갖추고 차별을 개선한 조직처럼 보이게 하는 것) 우려가 있지만 대다수 여성에게 정상적인 가입 대기 시간이 적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개릭 클럽은 입회에만 최소 2년 이상 소요되는 등 까다로운 가입 절차로 악명이 높다. 기존 회원이 먼저 신규 회원 후보를 제안하고, 그를 다른 회원이 두 번째로 제안해야 붉은색 가죽으로 제본된 책인 회원 명부에 이름이 적힌다.

이후 이 명부에 충분한 수의 회원이 회원 가입을 지지하는 서명을 해야 후보자위원회에 상정되고, 그 다음 절차로 24명으로 구성된 총위원회에서 후보자 자격을 검토한다. 그 전에 회원 후보를 클럽으로 초대해 식사하면서 위원회 위원들이 후보의 면면을 판단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현 찰스 3세 국왕도 1985년 왕세자 시절 그의 부친이던 필립 공이 제안하고 배우 도널드 신든이 두 번째로 제안하는 절차를 거쳐 가입했다. 찰스 3세는 당시 지명 양식에 자신의 직업을 ‘자영업자(self-employed)’라고 썼다고 한다(1985년 영국 타임스지 보도).

팝스타 스팅과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사진 중앙포토

팝스타 스팅과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사진 중앙포토

이런 가운데 저명한 여성을 ‘패스트트랙’으로 가입시키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이 클럽은 7명의 후보자 명단도 작성했다. 로마 역사 연구로 저명한 영국 케임브리지대 고전학 교수 메리 비어드, 앰버 러드 전 내무장관, 채널 4 뉴스 앵커 캐시 뉴먼, 정치 평론가이자 노동당 정치고문을 지낸 아예샤 하자리카 등이다. 배우 줄리엣 스티븐슨, 코벤트리 대학교 총장인 마가렛 캐슬리-헤이포드, 전 항소법원 판사였던 엘리자베스 글로스터도 명단에 올랐다.

본드걸 출신 여배우 가입도 논의 

일부 회원은 ‘본드걸’ 출신이자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관록의 여배우 조안나 럼리(77)를 가입시키는 방안도 논의중이다. 2011년 한 회원이 럼리를 후보자 책에 쓰자 몇몇 회원이 비속어를 쓰거나 “여성은 여기 있으면 안 되고 앞으로도 안 된다”며 종이를 찢어버린 적이 있는데, 이에 사과하는 의미에서다. 미술사학자 루신다 램튼도 명부에 이름이 올라갔다가 비슷한 욕설은 들은 적이 있어 역시 가입이 논의된다.

지난해 11월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전 세계에 대한 영국의 인도주의적 공헌을 인정하고 재난 비상 위원회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리셉션이 열려 찰스 국왕과 조안나 럼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배우 조안나 럼리는 인권운동가로도 활약해왔고,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축하하는 책(A Queen for All Seasons:A Celebration of Queen Elizabeth Ⅱ on her Platinum Jubilee)를 쓰기도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1월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전 세계에 대한 영국의 인도주의적 공헌을 인정하고 재난 비상 위원회 창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리셉션이 열려 찰스 국왕과 조안나 럼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배우 조안나 럼리는 인권운동가로도 활약해왔고,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축하하는 책(A Queen for All Seasons:A Celebration of Queen Elizabeth Ⅱ on her Platinum Jubilee)를 쓰기도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성 가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찮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원은 “명부에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고 총회에 상정되는 데 5~10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여성 가입에 반대표를 던진 일부 회원은 위원들이 새 후보에 반대표를 던지면 가입이 무산된다는 점을 들어 “앞으로 가입을 막으면 된다”고 말했다.

여성 사교클럽인 ‘포셋 소사이어티’의 제미마 올차우스키는 기고글에서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이 개릭에서 점심을 먹는 건 수세기 동안 존재해 온 고위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라며 “개릭이 선택된 소수만 초대되는 엘리트 클럽으로 남아있는 건 여전히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개릭 클럽 내부. 사진 개릭클럽 홈페이지 캡처

개릭 클럽 내부. 사진 개릭클럽 홈페이지 캡처

개릭 클럽은 어떤 곳

1831년 윌리엄 4세 국왕의 동생 서섹스 공작 오거스터스 프레데릭 왕자의 후원으로 ‘문학적 신사’ 그룹이 설립했다. 18세기 유명 배우 데이비드 개릭의 이름을 땄는데, 배우가 존경 받는 사회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던 당시 “배우와 세련된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표방했다.

예술가 사랑방으로 출발했기에 작가 찰스 디킨스, H.G 웰스도 회원이었다. 회원이던 A.A 밀른이 ‘위니 더 푸’ 저작권 일부를 개릭에 남기기도 했다.

클럽의 문을 여성에게 열려는 시도는 수차례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인권 변호사 앤서니 레스터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메리 앤 시하트를 회원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클럽 회장은 그녀를 초대해 점심을 먹는 데 그쳤다.

2010년 평등법이 통과되면서 클럽은 회원의 손님인 여성이 30석 규모의 중앙 테이블에 앉는 것을 더 이상 금지할 수 없게 됐지만, 여성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2015년 투표에선 50.5%가 여성 가입 허용에 찬성했으나 당시엔 클럽 규칙 변경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해 무산됐다.

2020년 기업가 에밀리 벤델은 클럽이 여성 회원 가입 거부가 2010년 평등법을 위반한다는 법률전문가 300여 명의 청원서를 받기도 했다.

변화가 감지된 건 올해 3월 가디언이 회원 명단을 보도하면서다. 50대 이상 백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아 평소 사회적 다양성을 외치던 거물급 인사들이 남성 엘리트주의에 동조한다는 비난이 일었다. 이에 공무원들의 수장인 사이먼 케이스 내각 장관과 리처드 무어 MI6 국장, 영국 팝스타 스팅 등이 회원 탈퇴 의사를 전했다.

판사인 회원들도 자녀 양육권 분쟁이나 가정 폭력 피해자 사건 심리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조계에서 나오자 클럽을 탈퇴했다.

개릭 클럽 내부 모습. 사진 개릭 클럽 홈페이지 캡처

개릭 클럽 내부 모습. 사진 개릭 클럽 홈페이지 캡처

개릭 클럽은 식당, 도서관, 카페 뿐 아니라 17개의 침실, 당구장, 카드실, 컴퓨터실, 옥상 테라스를 갖추고 1000여 점의 미술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계단 아래서(Under the Stairs)’로 알려진 회원 라운지도 유명하다. 회원권은 연간 1600파운드(약 275만원, 올해 3월 기준)이다.

이곳에선 엄격한 규칙이 적용된다. 커피룸에서 식사를 할 땐 재킷과 칼라가 있는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야 한다. 오후 9시30분 이후에 도착하는 회원만 넥타이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 손님으로 초대된 여성은 바지를 입을 수 있지만 청바지, 운동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진촬영도 금지돼 있다. 개인 주최 행사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총무의 사전 승인을 받고 개인 용도로만 쓸 수 있다. 소셜 미디어에 게시해선 안 된다. 입장할 때는 휴대폰을 꺼두거나 무음으로 설정해야 한다. 흡연도 허용되지 않는다.

지난달 4일 한 행인이 영국 런던의 개릭 클럽 입구 앞을 지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4일 한 행인이 영국 런던의 개릭 클럽 입구 앞을 지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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