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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가 관객과 댄스…이어령 장남이 문 연 메타버스 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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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메타버스 개관식. [사진 서울예술단]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메타버스 개관식. [사진 서울예술단]

지난 10일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의 개관식이 열렸다. 장소는 SK텔레콤의 메타버스 플랫폼인 이프랜드(IFLAND). ‘잃어버린 얼굴 1895’는 2013년 초연해 이달까지 다섯 시즌 공연된 흥행작이다. 뮤지컬 작품이 가상공간에서 개관식을 연 까닭은 뭘까.

메타버스 시도하는 공연의 현재와 미래 #초창기 단계로 '세계관' 구축하고 짧은 공연부터 시작 #"기존의 인터넷 이용하는 공연이 메타버스인지 의문" 지적도

이날 문을 연 것은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랜드다. 뮤지컬은 사진을 찍지 않았던 명성황후가 주인공. 여기에 맞춰 ‘1895 대한제국’으로 이름 붙인 랜드에 경복궁의 건청궁 내외부와 연회장, 사진관 등 작품 속의 세계관을 3D로 구현했다. 사람들은 아바타로 입장해 이 공간의 곳곳을 둘러볼 수 있다. 이날 개관식에는 뮤지컬 속 주요 노래인 ‘생일 축하해 척’에 맞춰 춤을 추는 짧은 공연도 펼쳤다. 실제 사람의 안무 동작을 녹화해두었다가 아바타에 적용했다.

‘메타버스 뮤지컬’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실연 공연이 가상 공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보여준다. 제작을 맡은 스튜디오 기어이의 이혜원 대표는 “메타버스 공연의 여러 단계 중 초기 형태”라고 설명했다. 우선은 현실 세계의 관객이 가상 공간에서 작품의 ‘세계관’을 경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단계다. 그는 “메타버스 월드를 배경으로 하는 공연도 작은 규모부터 시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대 위 실연(實演)을 기본으로 하던 공연예술이 가상 세계로 발을 내디딘다. 눈 빠른 이들이 여러 형태로 시도 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아트앤테크놀로지(AT) 랩은 지난달 말 학생들의 작품을 메타버스 플랫폼(이프랜드, 스페이셜, VR챗)에서 선보였다. 무용원 졸업생들의 아바타가 실시간으로 공연했고, 회화 작품은 가상 갤러리에 전시됐으며, 졸업 건축 작품이 3D 공간에서 재현됐다.

배우가 아바타 형태로 관객과 실시간 소통하는 '허수아비'. [사진 유튜브 캡처]

배우가 아바타 형태로 관객과 실시간 소통하는 '허수아비'. [사진 유튜브 캡처]

한예종 AT랩의 이승무 소장(영상원 교수)은 이번 쇼케이스를 매년 열겠다고 했다. 고(故) 이어령 선생의 장남인 그는 2020년 작품‘허수아비’로 메타버스 공연의 선두에 선 창작자다. VR 기기를 착용한 관객이 배우와 함께 스토리에 참여하는 가상현실 콘텐트였다. ‘허수아비’는 특히 열을 감지하고 동작을 정교하게 캡처하는 기술로 관심을 모았으며 기계의 힘을 빌렸으나 인간의 따뜻함을 전하는 내용으로 주목받았다.

원일 감독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진행했던 '미래 극장'. [사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원일 감독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가 진행했던 '미래 극장'. [사진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각 장르에서 변화를 선도했던 이들은 가상 현실의 공연을 힘껏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한국 음악의 창작자인 원일 감독은 경기 시나위 오케스트라와 함께 메타버스 형태의 공연 ‘미래극장’을  2020년  열었다. 현장에는 장비를 착용해 아바타로 공연을 보는 관객 5명에 관람자 20명이 더 있었고 온라인 관객도 별도로 존재했다. 관객들은 참여자가 되어 ‘소리꾼’ 또는 ‘재담꾼’을 투표로 고르는 식으로 공연 내용을 결정해서 봤다.

원일 감독은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당시는 메타버스라는 말도 일반화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코로나 19 때문에 현실과 가상의 절충이 절실하던 시기였다”고 했다. ‘미래극장’을 경험한 후 그는 “가상 세계의 공연을 대차게 밀어 붙여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무엇보다 그는 가상 현실의 공연이 가져온 청중의 주도권에 주목했다. “지금껏 공연자에게 있던 공연 진행의 권리가 관객에게 갈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클래식 연주단체인 세종솔로이스츠가 가상공간에 마련한 랜드. [사진 세종솔로이스츠]

클래식 연주단체인 세종솔로이스츠가 가상공간에 마련한 랜드. [사진 세종솔로이스츠]

또는 무대 위의 순수예술이 관객 접점을 넓히기 위해 메타버스를 선택하기도 한다.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의 강효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연주단체 세종솔로이스츠는 지난해 메타버스 공연을 시도했다. 세종솔로이스츠의 강경원 감독은 “18~19세기 곡을 주로 연주하지만, 바뀌는 세상에서 뒤처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클래식 음악의 연주 장면을 미리 녹화해 3D로 만드는 기술을 찾지 못해 2D로 녹화해 송출했다. 강 감독은 “자본이 투입되고 시장이 넓어지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초기 단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메타버스 공연의 일상화는 현실 경험 능가의 여부에 의해 판가름 나게 된다. 이승무 교수는 “최근 기존의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연을 메타버스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미 존재하는 인터넷을 도구로 해서 공연 장면을 보는 일은, 무대 공연을 관람하는 현실 경험을 대체할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VR 장비가 보편화하고, 그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경험”을 메타버스 공연의 출발점으로 봤다. 스튜디오 기어이의 이혜원 대표 또한 “메타버스 공연의 일상화를 위해서는 관련 디바이스 보급률이 지금의 휴대전화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원일 감독 역시 “현실 경험을 뛰어넘을만한 기술과 로직을 더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의 공연이 가상 공간으로 단숨에 옮겨가진 않겠지만 시도는 계속된다. 한예종 AT랩은 포스텍과 함께 예술 작품만을 위한 자체 메타버스 플랫폼을 구축해 내년 오픈한다. 이혜원 대표는 “현실 공연을 가상 공연으로 당장 대체하기보다는, 스핀오프 개념으로 웹 공연화를 해보면서 공연 경험을 연장해 나갈 계획이다”라며 “배우의 존재감과 아우라까지 옮기는 기술까지 연구되면서 다양한 시도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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