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무대에 물 20톤, 31세의 리어…초호화 제작진이 창극 ‘리어’ 만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창극 '리어' 연습 중의 한 장면. 젊고 인기 많은 소리꾼 김준수가 리어로 나온다. [사진 국립창극단]

창극 '리어' 연습 중의 한 장면. 젊고 인기 많은 소리꾼 김준수가 리어로 나온다. [사진 국립창극단]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노자(老子)의 도덕경 8장이 울려 퍼지는이곳. 서울 장충동의 국립창극단 연습실이다. 공연을 앞둔 작품은 노자의 철학과 어떻게 연결될까 싶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국립창극단은 신작 창극‘리어’를 17~27일 무대에 올린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리어’ 연습실 가보니 #무대에 채워지는 물을 예상하며 연습 #판소리 스타 김준수가 연기하는 노년의 리어 인상적

8일 찾은 연습실에서는 ‘리어’ 원작에서 상상하기 힘들었던 시각적, 청각적 시도가 한창이었다. 무대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물[水]이다. ‘리어’가 오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14.6m×9.6m)에는 물 20t이 들어차게 된다. 수조와 같은 형태에 담길 물은 바닥에서 15㎝까지 올라올 예정이다. 연습실의 무대에는 물이 없었지만, 배우와 합창단은 마치 물 위에서 걷듯 동작을 연습 중이었다. 물을 상정한 그들의 동작은 중력을 이겨내는 듯 떠다녔다. 총 10회 공연을 견뎌낼 아쿠아 슈즈를 따로 마련해뒀다고 했다.

왜 물일까. 연출과 안무를 맡은 정영두는 이날 연습실에서 “상류에서 흘러가 하류에서 혼탁해지는 물이 맑아져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점, 그리고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는 섭리를 그린다”고 설명했다. 리어는 도덕경을 읊으며 등장하지만 원작에서처럼 오류에 빠져 세 딸의 진실을 옳게 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정영두는 이날 연습에서도 물처럼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동작을 출연진에게 주문했다.

20t의 물탱크를 끌어와 무대에 채우고, 중간에 모두 뺐다가 다시 차오르게 만드는 작업은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의 몫이다. 수많은 연극과 창극, 뮤지컬, 오페라의 무대를 맡았던 그는 이번 공연의 물에 대해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고 했다. “마지막 장면의 코딜리어가 다시 차오른 물 위에 누워 죽는다. 자연의 이미지와 인생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물이 시각을 담당하는 사이, 청각은 스타 앙상블이 맡는다. 2014년 ‘바리abandoned’이후 국악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 듀오로 꼽혀온 한승석ㆍ정재일이다. 한승석은 이번 작품에서 작창을, 정재일은 작곡을 맡았다. 한승석은 배삼식의 각색에 경기민요를 차용한 음악으로 창극 ‘리어’의 기틀을 다졌다. 여기에 정재일은 국악기와 서양악기, 전자음향까지 더한 13인조 구성으로 음악을 구현하며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창극 '리어'의 연습장면. [사진 국립창극단]

창극 '리어'의 연습장면. [사진 국립창극단]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막의 4장에서는 광대가 리어의 상태를 풍자하며 장기타령, 배치기 같은 민요를 차용하고, 에드거가 방황하는 리어를 만나는 10장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생 공수래공수거라”하는 부분이 유머러스하게 흘러나온다. 2박의 비트가 강조된 악기 편성에 힙합 하듯 노래가 흘러간다. 두 스타 음악가는 창극의 특성에 맞게, 그러나 현대 청중에 낯설지 않은 음악을 배치했다.

이렇듯 현재 한국 공연계의 호화 제작진이 합류한 공연이다. 안무가로 시작해 음악극으로 영역을 넓혔던 정영두가 연출, 시대의 가장 필요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맡았다. 판소리로 시작해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히트 창극의 작창을 맡았던 한승석이 음악감독을, ‘옥자’‘기생충’‘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을 담당했다.

출연진도 만만치 않다. 창극에서 ‘팬덤’을 만들어낸 소리꾼 김준수가 31세의 나이에 리어 역을 맡았고, 판소리의 대표적 스타 유태평양이 글로스터 역할로 나온다. 이 밖에도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인 이소연이 리어의 첫째 딸인 거너릴로, 국립창극단의 ‘넥스트 김준수’로 꼽히는 김수인이 에드먼드로 나온다.

창극 '리어'의 무대 스케치. [사진 국립창극단]

창극 '리어'의 무대 스케치. [사진 국립창극단]

제작진ㆍ출연진은 화려하지만, 무대 위의 고찰은 진지하고 차분하다. 김준수는 젊은 스타 주연이라는 정체성보다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인 노인에 집중해 연습을 이끌어나갔다. 연기와 노래에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늙고 지친 리어의 상황을 적절히 표현해냈다. 정영두 연출은 “절대 악이나 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정확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무대, 의상, 그리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작품의 시대나 장소와 같은 구체적 배경을 드러내지 않는다. “유럽이거나 동양일 수도, 수백 년 혹은 지금일 수도 있다.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중립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을 부탁하고 있다.” 창극 ‘리어’는 17~27일 화~목요일엔 오후 7시 30분, 토ㆍ일요일엔 오후 3시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