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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대 뛰어든 카이스트 졸업생 "정답 없는 세상에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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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무대』(코난북스)를 낸 공연과 무대 매니어 황정원. [사진 황정원]

『아무튼, 무대』(코난북스)를 낸 공연과 무대 매니어 황정원. [사진 황정원]

2006년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ROH)에서 서울로, 대형 컨테이너 6개가 출발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를 ROH 버전으로 공연하기 위해 무대와 세트를 통째로 실어 옮겼다. 컨테이너가 도착한 날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의 백스테이지에 스태프들이 모였다. 드디어 메인 무대의 세트가 들어있는 컨테이너를 여는 순간.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 안에는 폐휴지가 가득했다.

『아무튼, 무대』 낸 황정원 #"정답의 세계에 살다 정답 없는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아무튼, 무대』(코난북스)를 낸 공연과 무대 매니어 황정원. [사진 황정원]

『아무튼, 무대』(코난북스)를 낸 공연과 무대 매니어 황정원. [사진 황정원]

당시 예술의전당 입사 2년 차로 ‘돈 조반니’ 제작에 참여했던 황정원(44)이 소개한 일화다. 그는 최근 『아무튼, 무대』를 내면서 무대 뒤의 아찔했던 순간을 적었다. ‘돈 조반니’의 컨테이너는 엉뚱하게도 중국의 변방에서 발견됐고, 개막 날짜가 임박하면서 비행기에 싣게 된 세트는 반으로 잘렸다가 서울에서 다시 봉합됐다. 겨우 무대가 올라갔지만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공연 중 하루는 주연 가수가 공연 시간을 착각해 나타나지 않았다. 황정원은 “오페라 공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일어났다”고 썼다. 그래도 공연은 무사히, 박수를 받으며 끝났다.

20여년을 무대에 푹 빠져 지낸 황정원은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시작되어야 하는 쇼, 또 마지막 음표가 불릴 때까지 계속돼야 하는 공연에 경의를 표한다. 8일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공연은 박물관 전시품과 달리 현재 진행형으로 무대 뒤에서 바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책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또한 긴박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공연 예술이 관객을 순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묘미를 예찬했다.

사실 그는 갑작스럽게 무대의 매력에 빠져들어 20여년을 살아온 케이스다. 원래는 이과생이었다. “학교 성적에 맞춰 과학고등학교, 그다음엔 카이스트에 진학했다”고 했다. 카이스트에서 산업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주변의 공학도와 달리 자신은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빠져든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 내리는 날, 친구들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각도와 단면적을 계산하는데, 나는 쇼팽 ‘빗방울 전주곡’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음악학 석사를 받았고, 뮤지컬 제작사에 입사했다. 이후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직장을 옮겨 음악 공연 기획, 오페라 제작, 교육 사업 등을 맡았다. “정답의 세계에 살다가, 정답 없는 예술의 세상으로 오면서 완전히 매혹됐다”고 했다.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직장이었지만 그는 또 훌쩍 다른 세상으로 갔다. 2009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이주했고, 거기에서 독일 바이로이트를 통학하며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오페라 축제로 유명한 두 도시를 오가며 공연을 볼 만큼 봤다”고 했다. 지금은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으로 옮겨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오페라 텍스트 변용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고 오페라 번역 작업 등에 참여한다.

공연과 무대에 대한 애정은 깊고 짙어졌다. “처음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환상이 있었다. 지금은 그 뒤의 복잡하고 때로는 추한 측면까지도 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대한 경외심이 깊어졌다.” 그는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무대, 그중에서도 오페라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작업을 꿈꾼다. “궁극적으로는 대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무대의 가치에 대해 그는 최근 독일 뮌헨에서 열린 공연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바이에른 국립극장이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를 공연하는데 그에 앞서 베토벤 9번 교향곡 4악장의 하이라이트를 연주하며 우크라이나를 위로했다. 객석에서 한명 두명 일어나더니 전체가 기립했다. 말과 논리보다도 무대의 한순간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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