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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달린 예수' 꽁꽁 싸매 숨겼다…우크라판 경주 '특급 작전'

중앙일보

입력

리비우의 종교사박물관 직원이 지난 4일 러시아군 공격에 대비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상자를 만들고 있다. [AP=연합뉴스]

리비우의 종교사박물관 직원이 지난 4일 러시아군 공격에 대비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상자를 만들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며 공습을 이어가는 가운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문화유산'이라고 불리는 서부 도시 리비우는 자국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작전 수행에 들어갔다.

리비우는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잘 보존된 중세 구시가지와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구시가지 전체가 등록되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북 경주인 셈이다.

영국 BBC 방송은 러시아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리비우 시민들이 갤러리·박물관·교회 등은 도시 전체의 문화유산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거대한 작전 수행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리비우에서는 수천 개의 미술작품을 진열장에서 빼 지하 비밀장소나 창고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 리이브의 한 박물관. 진열대 위에 전시됐던 물건들이 비밀 창고로 옮겨져 텅 비었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리이브의 한 박물관. 진열대 위에 전시됐던 물건들이 비밀 창고로 옮겨져 텅 비었다. [EPA=연합뉴스]

안드레이 셰프티츠키 국립박물관 역시 미술품을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밀 창고로 옮겼다. 현재 박물관의 진열장은 텅 비었고, 복도 역시 받침대 위에 전시됐던 미술품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남은 거라곤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판자뿐이다.

특히 이 박물관 내 가장 귀중한 작품으로 꼽히는 17세기 보호로드차니 성화(聖畫)는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로 모아 전시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으나 러시아의 침공 이후 6일 안에 해체돼 창고로 옮겨졌다. 1939년 나치 침략 당시 처음 해체됐었고, 소련연방 당시 전시가 금지됐다가 2006년에 가까스로 복원했지만 다시 분해된 것이다. 코잔 관장은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호르 코잔 국립박물관 관장은 "지금까지 박물관 컬렉션의 97%인 18만 점이 포장돼 창고로 옮겨졌다. 나머지 1500개의 유물도 대부분 박물관에서 나간 상태"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셰프티츠키 국립박물관에서 해체돼 옮겨지고 있는 보호로드차니 성화. [AP=연합뉴스]

안드레이 셰프티츠키 국립박물관에서 해체돼 옮겨지고 있는 보호로드차니 성화. [AP=연합뉴스]

도심 곳곳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조각상과 건물을 지키기 위한 작업도 진행 중이다. 분수대 위에 설치된 그리스 신과 여신의 조각상은 불이 붙지 않는 포장재로 감쌌다. 주위엔 철근 구조물을 설치했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은 은박 보호재로 밀봉했다. 아르메니아 성전에 위치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 나무 조각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리를 옮겨졌다.

릴리야 오니셴코 리비우 시의회 유산보호사무소 소장은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점차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며 “모든 것들을 옮기기 이전에 사진을 찍고 비밀 장소에 옮긴 후 다시 한번 사진을 찍고 있다”고 밝혔다.

리비우 도심의 조각상을 보호재료로 감싸고 있는 리비우 시민들. 연합뉴스

리비우 도심의 조각상을 보호재료로 감싸고 있는 리비우 시민들. 연합뉴스

리비우 시민들에게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은 삶의 터전을 잃는 것 이상의 공포다. 코잔 관장은 “하르키우나 마리우폴에서 벌어진 문화유산 파괴가 이곳에서도 일어난다면 그것은 참혹한 비극”이라며 “리비우의 박물관들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 모습에 대해 영감을 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리비우의 미술작품들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지하 비밀창고에는 작품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온·습도 조절기가 없을뿐더러, 벙커 자체가 강력한 폭발을 견딜만큼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치를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유산들”이라며 “하루 빨리 제자리에 되돌려놔야한다”고 탄식했다.

리비우 시민들이 박물관이나 교회의 유리창을 금속판으로 덮고 있다. 연합뉴스

리비우 시민들이 박물관이나 교회의 유리창을 금속판으로 덮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 턱밑까지 진격한 러시아군은 서부 도시로 전선을 확대하며 리비우 인근 공습을 시작했다. 13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은 러시아군이 리비우 외곽 군사기지에 미사일 8발을 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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