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일 거물이 화이자 100만병 공급" 이런 백신사기 벌써 수십건

중앙일보

입력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코로나19 백신 모습. *기사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뉴스1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코로나19 백신 모습. *기사내용과 직접적인 관련 없습니다. 뉴스1

“독일 바이오앤택 통해 화이자 백신 공급이 가능합니다.”

서울의 무역업체 A사는 지난달 솔깃한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인은 자신을 독일 의료산업 거물인 H박사의 사업 동료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기본 100만병 이상 공급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가격도 제시했다. 국내에서 백신 보릿고개 논란이 터진 이후다. 발신인은 H박사와 대부호를 통해 독일 바이오앤텍, 아스트라제네카와 ‘줄’이 닿는다고 했다. A사는 잘만 성사되면, 백신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정부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스트라제네카의 경우 한 병으로 최대 12명까지 맞출 수 있다. 100만병이면 1200만회에 달한다.

화상회의까지 제안한 중개인  

연락이 여러 차례 오갔다. 특정 백신의 물량을 문의하면, 구체적인 해외 수급 상황을 설명하며 확보계획을 알려줬다. 이후 A사가 확인작업으로 뜸을 들이자 독촉 연락이 오기도 했다. A사는 반신반의했다. 중개인이 백신 위탁생산 정보 등 워낙 바이오업계 정보에 밝아서다. 더욱이 화상회의까지 제안한 바 있다. A사 관계자는 “보내온 메일 내용 등을 보면 가짜는 아닌 것 같다”며 “확실히 하려 자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A사에 접근한 해외 무역중개인은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3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현재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 등은 각국 중앙정부, 코백스와 같은 국제기구에만 백신을 공급하고 있다. 제3의 경로를 통한 유통·판매는 승인되지 않아 아예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특히 코로나19 범유행 상황 속 백신을 확보하려는 국가는 줄 섰다.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서는 굳이 제3의 경로를 둬 공급망을 분산시킬 이유가 없다.

백신접종 자료사진. 연합뉴스

백신접종 자료사진. 연합뉴스

대부분 가짜거나 해프닝으로 끝나 

중앙일보가 A사에 메일을 보낸 발신인을 추적해보니 주소를 태국 방콕의 한 디자인회사에 두고 있었다. 독일 의료산업 거물이라는 H 박사, 대부호와의 관계역시 불확실하다. 자연히 이들이 다리를 놔준다는 구매경로도 투명하지 않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그간 백신 구매 ‘제안’이 수십건 들어왔다”며 “대부분 가짜였고 일부는 신빙성 없는 해프닝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불안정한 백신 수급 상황을 틈타 이런 류의 사기 수법이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뿐이 아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은 지난 3월 가짜 백신 범죄에 대해 경고했다. 온라인에서 백신을 직접 구매했다 피해를 본 사례가 늘면서다. 인터폴은 “범죄자들은 빠르게 돈을 벌려고 사람의 두려움을 노려왔다”며 “가짜 백신은 가장 최근의 사기범죄”라고 말했다. 지난해 코로나19 초기 마스크 대란이 일자 마스크 공급사기가 비일비재하게 터졌다.

한국화이자는 제3 경로를 통한 백신 공급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사진은 한국화이자 본사 앞 모습. 뉴스1

한국화이자는 제3 경로를 통한 백신 공급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사진은 한국화이자 본사 앞 모습. 뉴스1

사기·해프닝에 휘말릴 수도 

개인뿐 아니다. 지방자치단체, 의료단체도 자칫 피해 볼 수 있다. 최근 대구시는 정부에 화이자 백신 구매를 주선했다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사정은 이랬다. 지난해 말 대구 의료기관협의체인 메디시티대구협의회는 외국의 한 무역회사와 코로나19 백신을 수입하는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물량은 3000만명분이다. 정부가 화이자와 개별계약한 3300만명분과는 별개다. 협의회와 외국 무역회사는 실무 작업을 마무리했고, 이후 대구시를 거쳐 관련 내용이 보건복지부로 넘어왔다. 대구시 역시 백신 수급에 도움을 주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3일 정부는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구매 절차를 추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역시 공식 유통경로가 아니라서다. 자연히 백신 품질도 의심된다. 한국화이자는 해당 무역업체 제안의 경우 화이자 제품 거래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화이자는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인터폴과도 협력하기로 했다.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 반장은 “(화이자 백신 주선 건은) 대구시에서 별도 계약을 한 것이 아니다"라며 “대구시의사회·메디시티대구협의회 등이 (외국 무역업체와) 접촉했고 이후 대구시를 거쳐 정부에 ‘도입을 협의해달라’는 요청이 온 사안이라 계약이 이뤄진 부분은 없다”고 설명했다.

"성공 가능성 크다고 판단" … 근거는 못 대

손 반장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관련해서도 (사기적 제안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과 같은 해프닝은 종종 있다"며 "원래 해프닝으로 끝날 일인데 이번에는 (외부에) 공개돼 필요 이상으로 크게 다뤄지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메디시티 협의회 관계자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역회사의 제안이)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일을 진행하며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협의회측은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비밀유지 약속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김민욱·이태윤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