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탈북 고위 외교관은 왜 '기초수급자'로 살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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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2019년 9월 망명한 류현우(51)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탈북민이자 이산가족이다. 평양외국어대에서 아랍어를 전공한 뒤 외무성에 들어가 20년가량 일했다.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금고지기'로 불렸던 전일춘(83) 전 노동당 39호실장의 사위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탈북했지만, 일부 가족은 함께 오지 못해 이산의 고통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낀다.
 이산과 실향의 아픔 못지않게 류 전 대사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았다고 토로했다. "내가 이 나라에 왜 왔는지 모르겠다"며 수차례 자책했다고 한다. 목숨 걸고 망명한 엘리트 외교관은 왜 대한민국을 원망했을까.

"2019년 9월 망명한 이후 문재인 정부의 여러 행태에 심한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꼈다"는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 장세정 기자

"2019년 9월 망명한 이후 문재인 정부의 여러 행태에 심한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꼈다"는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 장세정 기자

 그에게 직접 들어본 탈북 동기는 의외였다. 북한 외무성의 재외공관 축소 방침에 따라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도 비용 절감을 위해 저렴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신줏단지처럼 챙겼던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이사 와중에 분실했다. 이 사건 때문에 평양 소환령을 받자 탈북을 결단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의 비인간성과 억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 대사
신변보호 못 받고 2년이상 푸대접
탈북 지식인, 역량 맞게 활용해야

 탈북을 준비하며 남한 유튜브를 검색했다.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무역참사로 일하다 2000년에 탈북한 홍순경(87) 전 북한민주화위원장의 경험담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큰 도움이 됐다. "대한민국에 가면 각자 역량에 맞게 일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2019년 9월 대한민국 땅을 밟은 뒤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보 당국의 합동 심문을 3개월간 받은 뒤 탈북민이 사회 적응 훈련을 받는 하나원 입소(3개월)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사회로 배출됐다. 서훈 국정원장 시절이었다.

2021년 6월 4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등과 기념촬영 하는 모습. 원훈석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해 논란이 됐다. [청와대]

2021년 6월 4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등과 기념촬영 하는 모습. 원훈석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해 논란이 됐다. [청와대]

 세 식구에게 약 20평짜리 임대 아파트가 배정되자 담당 경찰관이 다녀간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전일춘의 사위인 만큼 테러에 대비한 신변 보호조치를 제공할 법한데도 그런 배려는 없었다. 법이 정한 정착지원금을 받았지만, 직업이 없다 보니 밑 빠진 독에 물 같았다. 임대아파트 월세와 관리비를 내면 생계가 막막했다. 결국 2020년 2월부터 월 110만원(당시 3인 가족 기준)을 받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다.
 뜻 있는 교회가 후원금을 보내줬지만, 가족을 먹여 살릴 호구지책이 필요했다. 2020년에 망명한 조성길(49)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도 문 정부가 푸대접하는 바람에 처지가 비슷했다는 후문이다. 코로나19 시절이라 택배기사로 일하면 돈벌이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알아봤지만, 1종 보통 운전면허 따는 것이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2021년 1월 국내 언론에 그의 망명 사실이 처음 보도되고, 그다음 달 미국 CNN 방송 인터뷰에서 “김정은은 핵무기를 생존의 열쇠라고 믿기 때문에 비핵화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북한에 저자세로 일관해온 문 정부가 류 전 대사의 발언에 화들짝 놀란듯했다. 당시 박지원 국정원장 체제에서 한 당국자가 "활동 좀 같이하자"고 제안했지만, 류 전 대사는 "문 정부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하겠다"며 거절했다. 탈북 청년 어민 두 명을 비밀리에 강제 북송했고,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측에 피살됐는데도 사실을 왜곡하는 행태에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2021년 2월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하는 모습. '김정은에겐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취지로 증언하자 문재인 정부 측이 상당히 놀랐던 것같다고 전했다. [방송 캡쳐]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2021년 2월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하는 모습. '김정은에겐 비핵화 의지가 없다'는 취지로 증언하자 문재인 정부 측이 상당히 놀랐던 것같다고 전했다. [방송 캡쳐]

 이후에도 류 전 대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여정 하명법'(대북전단살포금지법) 관련 토론회에 참석해 북한 사정을 증언했다. "대학생이던 1991년 황해도 농촌에서 한·소 수교 삐라(전단)를 보고 소련이 북한을 배반하고 남한과 수교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체험을 공개했다. "대북 전단을 보내서라도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존중해야 북한 주민의 의식이 바뀌고 북한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자 좌파 인사가 "대북 전단은 남북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며 반박해 논쟁하기도 했다. 결국 이 법은 2023년 9월 위헌 판정을 받았다.
 2020년부터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여름까지 2년 반 이상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았다. 정권 교체 이후 정부 산하 연구원에서 프로젝트 단위로 일감이 조금씩 들어오면서 수급자 신세를 겨우 벗었다. 그는 "3만4000명이 넘는 탈북민이 각자 재능·역량에 맞는 일을 하며 대한민국에 기여하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신원식(가운데) 국방부 장관이 2023년 10월 11일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대화력전수행본부를 시찰한 자리에서 북한의 도발에 '즉강끝'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하며 장병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국방부]

신원식(가운데) 국방부 장관이 2023년 10월 11일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대화력전수행본부를 시찰한 자리에서 북한의 도발에 '즉강끝'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하며 장병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국방부]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도발하면 '즉·강·끝(즉각·강력히·끝까지)'으로 응징하라고 주문해왔다. 류 전 대사 같은 탈북 지식인을 50만 장병들의 사기 진작과 정신 무장을 위한 정훈 교육에 투입하면 어떨까. 북한 정권의 실상을 정확히 알려주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야 할 이유를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