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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약 1호 ‘고교학점제’, 절대평가 전환 등 산 너머 산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정부의 교육공약 1호인 고교학점제가 원만히 시행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학교 내신의 절대평가 전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 등의 이슈가 맞물려 있어 교육 시스템 전부를 뜯어 고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실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교육부는 이미 도입 시기를 3년이나 늦춘 바 있다.

 고교학점제는 대학처럼 학생이 원하는 강의를 선택해 듣는 제도다. 자신의 진로 희망과 적성에 따라 수업을 골라 듣고, 누적 학점이 일정 기준에 도달하면 졸업한다. 미국과 유럽 등 대다수의 선진국은 학점제 형태로 교육과정을 운영 중이다. 암기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는데 효과가 있어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의 교육공약 1호로 제시됐다. 이를 위해 교육부는 지난해부터 연구·선도학교 105곳을 운영했고 올해 354곳으로 확대키로 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 실행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학교 내신 성적을 산출하는 방식이 성취평가(절대평가)로 완전히 전환돼야 한다. 상대평가 체제 아래선 다양한 과목이 개설되더라도 점수를 받기 쉬운 과목에만 학생이 쏠리기 때문에 학점제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고교학점제를 선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인천신현고. 지역 민요 명창을 초청해 민요를 배우며 수업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고교학점제를 선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인천신현고. 지역 민요 명창을 초청해 민요를 배우며 수업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하지 않은 채 고교학점제를 실시하면 부작용이 날 수밖에 없다”며 “지금처럼 학교 시험에 대한 불신이 큰 상황에서 절대평가로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 교수는 특히 “수능 절대평가도 물 건너간 상황에서 내신 절대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숙명여고 사태나 최근 드라마 ‘SKY캐슬’을 통해 논란이 된 것처럼 학교 내신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불신은 매우 크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평가를 전면 도입할 경우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학교 간 수준차가 크기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내신 반영 방식을 놓고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연구소장은 “지방 일반고 1등급도 서울 강남에 가면 3~4등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 절대평가가 되면 대입에서 또 다른 갈등 요인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교마다 학생들의 수준이 다르고, 시험 문제가 상이한데 절대평가 성적을 대입에서 활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제대로 된 절대평가를 하려면 국제인증 교육과정(IBDP)처럼 전국 단위의 동일한 성취기준으로 객관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2017년 선택형 교육과정 우수학교를 방문한 김상곤 사회부총리. [연합뉴스]

2017년 선택형 교육과정 우수학교를 방문한 김상곤 사회부총리. [연합뉴스]

 내신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더라도 온전한 시행을 위해선 수능 또한 절대평가로 바뀌어야 한다. 현재처럼 상대평가가 유지되면 학생들은 수능에 유리한 과목만 골라듣는 쏠림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17년 8월 김상곤 당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취임직후 첫 정책으로 수능 절대평가 전환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개편을 1년 연기했고, 대입공론화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엔 무산됐다.

 하지만 교육부가 구상 중인 로드맵엔 대입제도와의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빠져 있다. 2022년에 부분 도입 후 2025년 전국 학교에서 전면 실시하는 것을 내세웠지만 대입제도 개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지난 17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개한 ‘학점제 도입을 위한 고등학교 교육과정 재구조화 방안 연구’ 보고서에도 이 같은 우려가 잘 나타나 있다. 교사와 교수 등 전문가 1만552명을 설문조사 했는데 학점제 도입 시 가장 필요한 사항으로 ‘대학입시제도 개편’(35.6%)을 1순위로 꼽았다. 두 번째는 ‘교과의 재구조화’(20.4%)였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기 위해선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과목마다 해당 교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중앙포토]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기 위해선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게 아니라 과목마다 해당 교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중앙포토]

 학교별로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다양한 수업을 개설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보통의 일반고는 한 학기에 50, 60개 과목이 개설되는데 학점제로 전환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과목이 개설돼야 한다. 또 각 수업에 적합한 교과교실도 갖춰져야 한다.

 익명을 요청한 서울의 고교 교사는 “교사마다 전공으로 잘 가르치는 과목이 정해져 있는데 과목이 늘어서 전공 이외의 다른 것도 가르친다면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그렇다고 강사를 구해서 수업하면 교육의 질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임기 내에 무리한 시행을 추진하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으로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상훈 교수는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신의 절대평가 전환, 교원 수급, 강의실, 대입제도 문제에 대해 충분히 숙의하고 로드맵을 짜야 한다”며 “정권의 성과 때문에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밀어붙이면 제도 자체의 취지를 망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석만·전민희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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